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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의족경 상권
1. 걸탐왕경(桀貪王經)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실 때였다. 당시 한 범지(梵志)가 기수(祇樹) 안에 큰 논을 가지고 있었는데, 벼가 이미 익어 조만간 수확해야 할 형편이었다. 범지는 새벽에 일어나 논으로 가서 멀리 벼이삭들을 보고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바람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벼를 보고 있는 것이 너무도 좋아 논 곁을 떠날 줄을 몰랐다.
부처님께서 이때 비구들과 함께 걸식하시려 성으로 들어가시다가 멀리서 범지가 이처럼 기쁨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도 이 범지를 보느냐?”
비구들이 모두 본다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묵묵히 성으로 돌아가셨고, 걸식을 마친 다음 비구들은 저마다 정사(精舍)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그만 하늘에서 큰 우박이 내려 논의 벼가 모두 죽고 범지의 하나뿐인 외동딸마저 이날 밤 죽고 말았다. 범지는 이 때문에 근심과 번민에 젖어 슬피 통곡하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다음 날 비구들이 발우를 가지고 걸식하러 성으로 들어갔다가 범지가 이러한 재해를 입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매우 비통해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사문(沙門)과 범지 및 백성들로서는 누구도 그의 근심을 풀어줄 수 없었다. 비구들은 걸식을 마치고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돌아와서 예배를 올리고, 범지의 마음이 이렇게 근심에 잠겨 있음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마침 말이 끝나자 범지가 슬피 울며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와서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곁에 앉았다.
부처님께서는 범지가 근심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다섯 가지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일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 일인가?
모든 존재는 사라지기 마련이니 사라지지 않게 하려해도 어찌 할 수 없으며,
없어지기 마련이니 없어지지 않게 하려 해도 어찌 할 수 없으며,
병들게 마련이니 병들지 않게 하려해도 어찌 할 수 없으며,
늙게 마련이니 늙지 않게 하려해도 어찌 할 수 없으며,
죽기 마련이니 죽지 않게 하려해도 어찌 할 수 없는 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도가 없고 지혜가 없는 탓에 사라져가고, 없어져버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면 곧 근심과 슬픔을 일으켜 넙적다리를 치고 애를 태우며 자신의 몸을 손상시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째서인가? 진리가 이러함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범지여, 내가 들은 바로는 진리를 얻은 이는 사라져가고, 없어져버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아도 근심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이미 진리가 이러함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소유만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존재가 모두 그러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날 때부터 필연적으로 사라져가게 되어 있는데, 나만 어찌 유독 예외일 수 있겠는가?”
지혜롭게 생각하며 자세히 헤아려 보자. 나의 소유가 지금 이미 사라졌다고 해서 설사 근심에 잠긴 채 음식을 먹지 않아 파리하게 여위고 얼굴이 수척해진다고 하자.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나와 친한 사람들은 근심하게 만들 뿐, 아무리 슬퍼하며 없어진 가산(家産)과 딸에 미련을 두더라도 다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와 같이 살핀다면 사라져가고, 없어져버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끝내 다시는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인연을 내용으로 범지를 위해 게송을 읊으셨다.
근심에 잠겨 슬피 울지 말지니
이미 잃은 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슬퍼해도 소용이 없나니
나의 원수들만 좋아라 할 뿐이네.
진실로 지혜롭게 살펴볼 수 있는 이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근심치 않나니
원수들이 기뻐 하기는 커녕 번민에 잠겨
환희에 찬 나의 얼굴을 보게 된다네.
날아다니는 음향도 무상엔 못 미치는데
진귀한 보배로 죽지 않기를 구하네.
덧없음을 알게 되면 다시는 근심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으리니
정행(正行)을 생각함이 세간의 보배보다 낫네.
추구해도 소용 없음을 진실로 알아라.
세상 사람, 나와 그대 모두 마찬가지
근심을 멀리하고 정행을 생각할지니
근심한들 이 세상에 무슨 이익 있으리.
부처님께서 다시 범지를 위해 바른 법을 자세히 말씀하시고는 이어 보시와 지계(持戒)를 말씀하시고, 천상에 태어나는 길을 보여주어 선행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범지의 악업(惡業)은 본래 그다지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부처님께서는 범지의 마음이 누그러져 정도(正道)로 향하여 문득 사성제(四聖諦)를 보게 된 것을 아셨다.
범지는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어 마치 깨끗한 명주천에 물감을 들이면 곧 좋은 빛을 띠듯이 제일구항도(第一溝港道)를 얻었다.
그래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대어 예배하고 손을 모아 말하였다.
“저는 이제서야 마치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보듯 진리를 알았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신명을 다해 부처님께 귀의하고 비구승께 귀의하오니, 저를 청신자(淸信者)로 받아 주신다면 오계(五戒)를 받들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깨끗히 지키고 범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범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주위를 세 번 돌아 예를 올리고 떠났다.
이에 비구들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통쾌하십니다, 범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시어 이처럼 기뻐하여 웃으면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금생에만 이 범지의 근심을 풀어준 것이 아니다.”
이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과거 아주 오랜 옛날, 이 염부리(閻浮利:염부제)에는 다섯 왕이 살고 있었다.
그 중 한 왕은 걸탐(桀貪)이란 이름을 가졌는데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에 대신(大臣)과 백성들이 모두 왕이 하는 짓을 근심한 나머지 함께 모여 집집마다 병사를 내기로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병사가 모집되자 왕 앞에 이르러 함께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 자신이 한 일이 바르지 못하고 탐욕을 부려 온 백성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정녕 스스로 아십니까? 급히 이 나라를 떠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시해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왕은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 전율하여 의복과 모발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이리하여 왕은 수레를 타고 나라를 떠나 고생스럽게 풀을 엮어 방석 따위를 만들어 팔아 근근히 생계를 꾸려갔다.
한편 대신과 백성들은 왕의 아우를 새왕으로 삼았는데, 새왕은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에게 억울한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옛왕 걸탐은 자기 아우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뻐하며 생각했다.
‘내가 아우에게 청하면 넉넉히 생활할 수 있으리라.’
걸탐은 편지를 보내 생활할 수 있도록 고을 하나를 달라고 청하자, 새왕이 그의 곤궁한 형편을 불쌍히 여기고는 즉시 주었다.
걸탐은 이번에는 고을을 잘 다스리고 다시 두 고을을 달라고 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네 다섯 고을에서 열 고을, 스물ㆍ서른ㆍ사십ㆍ오십 고을에서 백 고을, 이백 고을에서 오백 고을에 이르고, 다시 나라의 반에 해당하는 고을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즉시 주었고 걸탐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자 걸탐은 곧 욕심이 생겨 나라의 반에 해당하는 자신의 영토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아우의 나라를 공격하여 이기고 옛나라를 되찾았다.
그러자 다시 욕심이 생겨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어찌 일국(一國)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두 나라, 세 나라, 네 나라를 치지 않으리요.’
걸탐은 곧 이웃 나라들을 공격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고 다시 빼앗은 네 나라를 잘 다스리고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내가 어찌 네 나라의 병력을 동원하여 다섯째 나라를 치지 않으리요.’
걸탐은 곧 공격하여 또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당시 사해(四海) 안의 모든 땅이 걸탐 왕의 영토가 되자, 걸탐은 호를 고쳐 스스로 대승왕(大勝王)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왕이 만족할 줄 아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제석천(帝釋天)이 구이(驅夷)라는 성(姓)을 가진 어린 범지로 변하였다.
범지로 변한 제석천은 왕을 만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금으로 된 지팡이를 짚고 금으로 된 병을 들고 궁궐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문지기가 왕에게 말씀드렸다.
“밖에 구이라는 성을 가진 범지가 왕을 뵙고자 합니다.”
이에 왕이 흔쾌히 허락하고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제석천은 궁궐로 들어와 서로 인사를 마친 다음 뒤로 물러나 왕에게 말하였다.
“제가 마침 바닷가로부터 오다가 한 대국(大國)을 보았는데, 풍요롭고 백성이 많으며 진귀한 보배가 많아 정벌할 만했습니다.”
왕은 지금껏 만족하고 있다가 다시 이 나라를 얻고 싶은 욕심이 생겨
“이 나라가 몹시 탐이 난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제석천이 말했다.
“함선(艦船)을 더 준비하고 군사를 일으켜 기다리십시오.
칠 일 후에 왕을 모시고 그 나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제석천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가 되어 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함선을 많이 준비했으나, 온다던 범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왕은 번민에 잠겨 슬퍼하면서 넙적다리를 치며 말하였다.
“원통하다. 나는 이제 이 대국(大國)을 잃고 말았구나.
구이를 만났을 때 꼭 붙잡아 둘 것을 기한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다니.”
이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왕을 향해 둘러 앉아 있었는데, 왕은 울고 또 울고 번민하고 또 번민하며 근심에 잠겨 마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왕은 한 게송을 듣고 번쩍 정신이 들어서 말하였다.
욕심을 채울 생각을 내면 낼수록
또 다시 다른 욕심이 생기게 마련
날마다 성대하게 기쁜 일을 행하면
이로 인하여 자재(自在)함을 얻게 되리.
왕은 뭇 사람들을 위하여 게송의 뜻을 말해 주고 싶어, 이 게송의 뜻을 풀 수 있는 이가 있으면 일천 냥의 금전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는 울다(鬱多)란 이름의 한 소년이 있었다.
울다는 곧 왕에게 말했다.
“제가 이 뜻을 풀 수 있습니다. 칠 일의 여유를 주시면 돌아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7일째가 되자 울다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왕이 계신 곳으로 가서 왕의 근심을 풀어드리려 합니다.”
“아들아, 가지 말거라. 제왕을 섬기기란 타오르는 불을 섬기기만큼 어렵고 그 가르침은 예리한 칼과도 같아 가까이 할 수 없단다.”
“어머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스스로 왕의 게송의 뜻을 풀 수 있는 힘이 있으니, 후한 사례를 받아 마음껏 즐겁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울다는 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제가 이제 왔으니 게송의 뜻을 대답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서
게송을 읊었다.
욕심을 채울 생각을 내면 낼수록
또 다시 다른 욕심이 생기게 마련
방일하여 절제하지 아니하면
목마를 때 뜨거운 물을 마시는 격
세상의 땅을 다 차지하여
말과 금은 보화가 가득 찼건만
모조리 얻고도 만족할 줄 몰라
도리어 정행(正行)을 비방하네.
마치 뿔과 발톱이 생겨나
날이 갈수록 점점 자라나듯이
사람이 사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
모르는 사이에 욕심이 늘어난다네.
굶주림과 목마름은 끝이 없어
날마다 날마다 다시 생기는 법
산처럼 쌓인 금, 하늘에 닿아
형상이 마치 수미산같건만
모조리 얻고도 만족할 줄 몰라
도리어 정행(正行)을 비방하네.
욕심은 고통과 무지를 부르나니
일찍이 귀에 담지도 않았다네.
부디 욕심을 떠나는 법을 들을지니
욕심을 싫어하는 이는 총명하여서
욕심을 싫어함을 존귀하게 여기나
끊임없는 욕심이란 버리기 어려워
총명한 사람은 고통임을 깨닫고
사랑과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네.
마치 수레바퀴를 만들 때
능히 견고하게 할 수 있듯이
차츰차츰 욕심을 제거해 가면
마음이 점차 편안하게 되리니
선정의 도를 얻고자 한다면
욕심을 모두 버려야 하리.
이에 왕은 말했다.
“뜻을 알았다. 세상의 땅을 모두 다스려 사해 안을 모조리 차지하였으니,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하다 하겠다.
그런데도 다시 해외(海外)의 나라에 까지 욕심을 내었구나.”
말을 마친 대승왕은 다시 울다에게 게송을 말하였다.
동자께서 만약 좋으시다면
존귀한 지위로 세상을 편안케 하소서.
욕심에 대한 설법이 매우 통렬하니
그대의 지혜가 이와 같구려.
그대가 여덟 수의 게송을 설하셨으니
천 냥의 상금을 드리나이다.
모쪼록 이를 대덕(大德)께 바치노니
뜻을 설명하심에 매우 슬펐습니다.
울다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이러한 보배는 필요치 않으니
스스로 자급해 살아가면 그뿐
마음에 욕락을 멀리하고저
끝으로 게송을 설하노니
그러나 대왕이여, 저의 모친이
쇠약한 몸의 노인이신지라
모친을 봉양하고픈 마음뿐이니
천 냥의 금전을 저에게 주시어
모친을 봉양할 수 있게 하소서.
대승왕은 곧 금천 천 냥을 울다에게 주어 늙은 모친을 봉양하게 하였다.
이야기를 마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때의 대승왕은 바로 벼를 심었던 범지이고, 동자 울다는 나의 전신이다.
나는 이때도 이 범지의 슬픔과 근심을 풀어주었고,
지금 역시 이 범지의 슬픔과 근심을 모두 끊어 주어 마침내 다시는 괴로워하지 않게 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 본래의 인연으로 해서 이 경의 뜻을 말씀하시어, 우리 후학들로 하여금 설법을 듣게 하시고 후세 사람들을 위해 게송을 지어 뜻을 밝힘으로써 우리 경법(經法)이 길이 머물도록 하셨다.
이에 의족경(義足經)을 말씀하셨다.
욕심 채울 생각을 내면 낼수록
또 다시 다른 욕심이 생기게 마련
날마다 더욱 기쁜 일을 행하면
이로 인하여 자재함을 얻게 되리.
세상의 욕락을 탐내게 되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
이미 잃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독화살이 자신의 몸에 꽂힌다네.
모쪼록 욕심을 멀리 해야 하리니
마치 몸에 뱀의 대가리가 달라붙은듯이
세상의 욕락을 멀리 떠나
마땅히 선정을 행해야 하리.
밭에 진귀한 보배를 심어 놓고
어리석게 소와 말로 기르듯이
그대가 욕심에 매여 있는 탓에
어리석은 행동이 몸을 침범하네.
약한 이를 이겨 사납고 포악한 짓을 하면
죄를 받고 원한만 깊어져
저승에 가서 고통을 받게 되나니
배가 바닷속에서 부서지듯 하네.
그러므로 말하노니, 마음을 가다듬어
욕심을 멀리하여 범하지 말지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해탈을 구하면
배를 타고서 피안에 이르리.
부처님께서 『의족경』을 말씀하시고 나자 비구들은 환희에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