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무언동자경 상권
[법회의 인연]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나열기(羅閱祗)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1,250비구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보살마하살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왕사성에 사자장군(師子將軍)의 첫째 부인이 산기가 있더니 덕 있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때마침 허공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자여, 너는 마땅히 불도의 가르침[道敎]에 뜻을 두고 경전을 생각할 뿐, 부디 세간의 말과 이야기는 선설하지 말아라.
방편으로 세간 제도하는 법을 환하게 깨달을 것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고 세속[方俗]의 일을 버리며,
마땅히 올바른 이치로 돌아갈 것이지, 화려한 말이나 꾸며대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라.”
동자는 멀리서 들리는 이러한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는 아예 울거나 어떤 말소리도 내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어린 아이의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7일이 지나자 그 얼굴에 기쁨이 가득할 뿐 조금도 초췌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한없이 쳐다보았고,
한쪽에선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 아이는 말도 못하는데 길러서 무엇하랴?”
그러자 아이의 부모가 답하였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우리가 길러야만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지금 이 아이의 단정한 얼굴과 헤아릴 수 없이 당당하고 뛰어난 미묘한 모습을 보니, 평범한 아이가 따라올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부모ㆍ친척과 여러 친지들이 이 아이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곧 ‘무언(無言)’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에 무언 동자는 점점 자라나 여덟 살이 되었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관찰하고자 하는 이가 계속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도 어떤 곳에서 이치를 분별하는 법회가 있을 때면 동자는 그 법회에 나아가서 설법을 듣되 역시 고요히 생각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 날 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그의 부모ㆍ가까운 친척[五種親屬]ㆍ친구ㆍ친지들과 함께 가사굴산으로 갔다.
그는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나아가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오른편으로 세 번 돌고는 세존 앞에 합장하고 서서, 무수한 시방 세계로부터 모여든 억백천 해의 보살들이 각각 장엄되고 청정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였고 곧 착한 마음이 생겼다.
그때 사리불(舍利佛)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렸다.
“하늘 가운데 하늘이시여, 이 무언 동자는 바로 사자장군의 아들이며 그 단정한 얼굴과 헤아리기 어렵게 뛰어난 모습이 이와 같지만 아무런 말을 못하오니, 이 동자는 전생의 어떤 재앙이 남아 있기에 태어날 때부터 말이 없고 또 말을 하지 못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대답하셨다.
“그만 두라. 무언 동자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아라. 왜냐 하면 이 동자는 바로 과거세의 보살마하살로서 이미 과거 부처님들께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어 그 무수한 모든 부처님ㆍ정각(正覺)들에게 공양하고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하여 물러서지 않는[不退轉] 지위를 얻었으므로, 곧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성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자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허공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동자여, 너는 앞으로 불도에 뜻을 두어 경전을 생각할 뿐 세속의 말은 하지 말아라’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이 보살이 지금까지 조용하게 말이 없었던 것이다.
또 유순(柔順)하게 가르침을 받은 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네 가지 선정[四禪]을 받들어 행하였노라.”
세존은 다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 어떤 중생이라도 만약 이 무언보살을 보고서 이와 같이 불도의 가르침만 따르고 세속의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러한 인연으로 곧 지금의 큰 법회에서라도 경전의 법을 선설(宣說)하여 한량없고도 말할 수 없는 인민들을 모두다 교화시켜 이롭게 인도할 것이니라.”
이에 무언보살은 곧 그 모습대로 삼매에 들어 상서로운 모습을 나타내었고, 모든 성문ㆍ보살들을 비롯한 천룡(天龍)ㆍ귀신(鬼神)ㆍ건답화(揵沓和)ㆍ아수륜(阿須倫)ㆍ가류라(伽留羅)ㆍ진다라(眞陀羅)ㆍ마후륵(摩睺勒)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등 일체 대중 각각의 오른 손바닥에 수레바퀴와 같이 큰 연꽃을 화생(化生)시켰다.
그 미묘하고도 선명한 갖가지 빛깔과 한량없는 향내에 보는 이마다 마음으로 기뻐하였으며, 또 그 연꽃 위에는 자연스럽게 화생한 보살들이 서른두 가지 상호로 그 몸매를 장엄하여 결가부좌하고 있었다.
무언보살이 이러한 큰 신족통(神足通)을 나타내어 세존께 머리 조아려 거듭 귀명하자 그 연꽃 위에 앉은 모든 보살들도 함께 합장하고 몸을 굽혀서 세 번 스스로 귀의하였다.
무언보살이 머리 조아려 귀명하는 것을 입으로 선창하자 때맞추어 항하 강변의 모래알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가 저절로 여섯 가지로 진동할 정도로 그 큰 음성은 널리 울려 퍼졌고, 허공에선 찬탄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온갖 꽃이 흩뿌려지고 공후(箜篌) 따위의 악기들이 연주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울렸다.
이에 무언보살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그의 큰 서원을 성취하여 땅에서 공중으로 네 길[丈] 아홉 자[尺] 높이만큼 솟아올랐고, 다른 대보살들도 그렇게 하였다. 무언대사(無言大士)는 그 공중에서 여러 보살들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게송을 읊어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형체가 없이 형체를 나타내지만
또한 빛깔에 머물지 않고
단지 중생을 열어 교화하기 위해
그 몸을 나타내고 가르치시네.
부처님께선 본래 색신이 없고
유위법에도 집착하지 않지만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도사(導師)께선 일부러 몸을 나타내시네.
서른두 가지 상호를 나타내고
기묘한 여든 가지 종호(種好)로써
그 신체를 장엄하시고는
중생을 위해 법을 강설하시네.
법이란 아무런 형상이 없고
어떤 음향(音響)도 없나니
음향이 없으므로 얻을 것 없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고요하고도 미묘하여라.
부처님께선 이러한 법을 깨달으시어
보리수 아래 앉아 계시니
그 도는 바로 말없는 가르침이라
어떤 언사로도 말할 수 없다네.
그 법은 형상 없는 법이라
형상을 구하려해도 구할 수 없나니
형상 없는 그러한 법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으랴?
중생을 가엾이 생각하심이
곧 부처님의 큰 은혜라
얻을 것 없는 법을 분별하시어
때를 놓치지 않고 선설하시네.
이 얻을 것 없음을 훤히 깨달으시고
얻을 것 없는 공(空)을 깨달으시어
이와 같이 길러내시니
부처님의 이치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네.
유위의 말로써 가르침이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이 법 또한 아무것도 없고
무위이고 자연조차 없다네.
이처럼 덧없는 형색(形色)으로
도사께선 인연 따라 그 모습 보여주시고
이 법 아무것도 없다는 것
중생 위해 이 경(經)을 말씀하시네.
처음 태어나 여덟 살이 되기까지
입으로 아예 말하지 않음은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하늘이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네.
‘경전을 생각하라’ 하였기 때문에
귀로도 소리를 듣지 않고
이와 같이 도업(道業)에만 뜻을 두어
입으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네.
가령 말하지 않음[無言]에 어떤 가르침이 있다면
말로서 드러낼 것이 없으니
말로서 해설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청정하고 미묘하고 밝을 것이리라.
이러한 서원으로 불도를 생각하되
그 뜻을 대승(大乘)에 두고서
마땅히 높은 가르침을 받들어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부처가 되리다.
불도의 마음이란 얻을 수 없고
말 없고 형상도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불도는 공하여
얽매임을 풀고 빛나는 광명을 이룬다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