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상권
이 경전 문구(文句)의 뜻과 차례를
세간에는 밝은 지혜가 없어 알 수 없으니
여기 머리 조아려 저희들을 가르쳐 주시기를
한량없는 공덕으로 생겨난 몸께 예배합니다.
이와 같은 덕 갖추신 분께 마땅히 예 올려 공경하며
그 족적(足跡)에 이마 대어 예배하오니
타기 어려운 깨달음의 수레[覺轅]를 저 분께선 타시고서
간절한 마음으로 널리 모든 중생[舍識] 이롭게 한 까닭입니다.
[가장 으뜸가는 이익과 부촉]
경에 이르기를
“가장 으뜸가는 이익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근기가 성숙(成熟)한 보살을 근거로 말한 것이고,
“가장 으뜸가는 부촉(付囑)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보살을 근거로 말한 것이다.
어떤 것이 모든 보살에게 가장 으뜸가는 이익이 되는 것이며,
또 어떤 것을 가장 으뜸가는 부촉이라고 말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렇게 게송을 설하였다.
으뜸가는 이익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제 몸은 물론 그 친속에게까지 이익을 주기 때문이며
증득하였거나 증득하지 못했거나 물러나지 않게 하므로
가장 으뜸가는 부촉이라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살의 몸에 이익이 되게 하고 또한 그 보살로 하여금 그가 간직한 것을 도반들에게 서로 이어지게 하여 이익 되게 하므로 가장 으뜸가는 이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몸에서 불법(佛法)을 성숙시켜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곧 그 몸을 이익 되게 하는 동시에 또한 다른 유정(有情)들을 교화하여 모든 것을 견뎌내게 하고 모두 다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권속에게까지 이익을 주는 것이니,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얻었거나 얻지 못했거나 간에 가지고 있는 공덕을 가지고 능히 그들을 위하여 물러나지 않는 인(因)을 지으며 착한 벗을 친근히 하고 몸을 맡겨 의지하는,
이것을 으뜸가는 부촉이라 하며 또한 서로 부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증득하고 나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승(大乘)을 버리지 않게 하려고 함이며,
‘증득하지 못했어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승에서 다시 더욱 수승(殊勝)한 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보살이 머무르는 법]
보살승(菩薩乘)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이들이 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이렇게 게송을 설하였다.
마음이 광대하고 가장 뛰어나며
지극(至極)하고 뒤바뀜이 없으니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의요(意樂) 때문에
이 승(乘)의 공덕이 원만해진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만약 보살이 이 네 가지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의요를 일으켰을 때 맨 처음 발한 마음[發心]을 이 대승에 두고서 이 의요(意樂)를 갖춘다면 비로소 공덕이 원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의요인가?
첫째는 광대(廣大)이고
둘째는 최승(最勝)이며,
셋째는 지극(至極)이며
넷째는 전도되지 않는[無顚倒]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승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발심한 모든 이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는 말에서
“이와 같은 모든 것”까지는 광대(廣大)한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며,
“내가 그들로 하여금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의 경지를 증득하게 하리라”라고 한 것은 가장 으뜸가는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며,
“비록 이와 같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여”에서부터 “보살이라 이름하지 않느니라”까지는 지극(至極)한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을 다 거두어 보살과 같게 하되, 제 자신이 이로 말미암아 적멸(寂滅)하게 되면 제 자신이 유정(有情)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만약 따로 중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중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만약 모든 중생을 거두어들여서 제 몸같이 여기면 이는 곧 지극한 버리지 않음이니, 이러한 까닭에 지극(至極)한 의요(意樂)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수명이라는 생각을 갖고 또 다른 생각을 구한다면 이런 자는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라는 것은 곧 뒤바뀐 생각이 없는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다.
이 뒤바뀐 생각은 몸이 있다는 견해를 연유하거나 의지하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런 생각을 알아 바로 끊어버리면 곧 뒤바뀐 생각이 없어진다.
[머물지 않고 보시하다, 6바리밀]
그 다음 아래 경문의 내용은 마땅히 보살승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낸 이들이 있으면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일에 머물지 않고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가?
첫 번째 보시만 설해도 여섯 가지 도피안(到彼岸)을 다 거두어들인다고 생각하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여섯 가지 바라밀[六度]을 모두 보시라 이름하니
재시(財施)와 무외시(無畏施)와 법시(法施)로 말미암으며
이 가운데 하나와 둘과 셋[一二三]을
머무르지 않는 수행이라 이름한다.
이 여섯 가지 바라밀은 모두 보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보시의 성품은 재시(財施)와 두려움 없는 보시[無畏施]와 법보시(法布施)를 연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것을 첫째로 말미암은 것은 첫 번째 보시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움 없는 것을 두 번째로 말미암은 것은 지계[戒]바라밀과 인욕[忍]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니, 원수가 없는 것[지계바라밀]과 원수의 처소[인욕바라밀]가 없는 곳에는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법을 베푸는 것을 세 번째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바로 정진[勤] 등을 말하는 것이니 게으름 없음[정진바라밀]으로 말미암아 저 실정을 깨닫고 난 뒤[선정바라밀] 여실[如實]한 법을 선설(宣說)하는 것[지혜바라밀]이다.
이것이 곧 큰 보살들이 수행하는 법이다.
이것이 곧 첫 번째 재물을 베푸는 설법으로써 여섯 가지 바라밀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 된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어떤 일에 머무르지 않고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하니,
이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는 것을 성품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자기 몸을 위해서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건
선행(先行)의 과보(果報)에 대해 모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일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않고 처소를 따라 머물지도 않는 것을 밝힌 것이며,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한다’는 것은 곧 은혜에 대한 보답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란 이양(利養)이나 공경(恭敬)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은혜를 구하거나 이익을 바라는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처소를 따라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물질적 존재 등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선행의 결과에 대한 보답이 있기를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었다.
왜 반드시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행해야 하는가?
게송으로 답하였다.
이런 집착 여의기 위해 마음 일으키지 않고
다른 일[餘行]을 위해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제 자신을 돌아보아 보시를 행하지 않고 그런 보시를 여의고자 하여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기 때문에 제 자신에 집착하지 말고 속히 보시를 행하라고 말한 것이다.
은혜에 보답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선행에 대한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에 마침내는 정각(正覺) 보리과(菩提果)의 성품을 버리게 되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어떤 결과를 바라거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는 이 두 가지를 버려야만 한다고 말한 것이다.
[마음을 거두어 항복받는 일]
다음에는 마음을 거두어 항복받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마땅히 설명하리라.
마음을 거두어 항복하는 방법은 세 바퀴[三輪]에 있으니
형상[相]에 대한 마음 제거해 버려야 하며
뒤로 갈수록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의혹들
생기는 대로 모두 다 제거해야 한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이와 같이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하며, 나아가 모습이라는 생각에까지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베푸는 물질과 베푸는 것을 받는 중생, 그리고 베푸는 사람 등 이 세 가지에서 모든 생각이나 마음에 집착하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다음엔 보시에 대한 이익을 밝힌 것이다.
어떤 이가 논란하여 말하기를
“이미 보시 등에 대하여 그 모습을 여의었다면 장차 어떠한 복덕(福德)의 이익을 받겠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대하여
“생겨나는 복이 매우 많을 것이다”라는 말로 대답하였다.
묻기를,
무슨 까닭에 수행(修行)에 대하여 선설(宣說)하면서도 복덕이나 이익에 대하여는 드러내 말하지 않고,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을 거두어 항복하는 일에 대해서 말했는가?
답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라도 모습이나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비로소 그는 집착 없는 보시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뒤의 경문(經文)은 모두 뒤로 가면 갈수록 생겨나는 의혹을 제거해 없애는 것이니, 여기에서 문득 이와 같은 의혹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묻노니,
만약 모든 법(法)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면 왜 정각(正覺)의 뛰어난 결과를 구하기 위해 보시를 행하는가?
이 의혹에 대답하기 위하여 경에서 이르기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뛰어난 상호[勝相]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여 이처럼 자세히 설하고 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만약 모여서 만들어진 형상을 가지고
오묘한 모습이라 생각하여도 그것은 뛰어난 모습이 아니니
세 가지 모습[三相]으로 변천하여 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여래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여래를 보시 등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형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품을 증득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자가 문득 여래가 지니고 있는 훌륭한 모습을 보고 만약 여래 진여(眞如)의 성품을 희망한다면, 이러한 모습은 곧 훌륭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수승하고 미묘한 모습으로는 여래를 관(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저 법신(法身)은 모여서 만들어져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르기를
“왜 그런가?
여래께서 설하신 저 수승한 모습은 세 가지 모양으로 변천하여 달라지니, 이 뛰어난 모습은 곧 진정으로 뛰어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담겨 있는 뜻은 세 가지 모습의 바탕은 곧 옮겨 흘러가기 때문에 묘생(妙生)이 훌륭한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훌륭한 모습을 모습이 아니라고 보면 여래(如來)를 관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의미는 인연을 따라 생기는 법은 곧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임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여래께서 저 전무(全無)한 세 가지 모습[三相]으로 말미암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습을 여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곧 아무 모습도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서 여래께는 생(生)ㆍ주(住)ㆍ멸(滅)의 변이(變異)하는 성품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안다면, 이것은 곧 여래는 조작(造作)이 있는 성품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은 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품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나면 비록 불과(佛果)를 위해서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는 법시(法施)라야 한다고 말하여 곧 중생들의 의심하는 마음을 없앤 것이다.
이 아래의 내용들은 묘생이 거듭 의혹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만약 이와 같이 머무름이 없는 보시를 행하는 이는 곧 인(因)이 지극하고 매우 심오할 것이다’라고 의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