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론 상권
1. 양양 법림 법사 문집의 서문
만약 신묘함이 비할 바 없다면, 이는 따져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극한 이치는 아득한 것인데, 어떻게 줄자로 재듯 알 수 있겠으며, 상도(常道)는 벼랑이 끊어지듯 말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여러 하늘에 기대어 오묘함을 들여다보겠는가?
5문(五門)과 6바라밀[六度]의 근원에 이르는 데는, 반자(半字:小乘)와 일승(一乘:大乘)의 가르침이나, 구류(九流)와 백가[百氏]의 안목이나, 3통(洞)과 4검(檢)의 글이 있으니, 참으로 종횡으로 엮어서 그 도모함을 드러내고 심력(心力)으로 그 경지에 다다르되, 이를 꽃피우고 다시 열매를 맺은 이가 이 시대에 있었다.
법림(法琳) 법사는 속성이 진(陳)씨이고 영천(穎川) 사람이다. 진(晉)나라 사공군(司空群)의 후손으로 양(梁)나라에서 진(陳)나라에 이르도록 대대로 관직을 이어 왔으며 조부와 백부에 이르기까지 누대로 유종(儒宗)의 집안인지라, 법사는 어려서부터 『삼론(三論)』을 익혀 조야(朝野)에 이름을 날렸으며, 장성해서는 여러 전적에 해박하여 속세에 명성을 떨쳤고, 위의가 엄숙하며 절개가 곧았으나 사물에 구애됨이 없이 두루 통달하였다.
청한(淸翰)에 떠돌면서 미은(微隱)을 가려내되 바야흐로 봄이 화창하게 피었어도 공용(功用)은 감추었으나 드러난 어짊의 덕량(德量)은 마치 바보 같고 말더듬이 같아, 겉으로는 어두워도 안으로는 밝은 공덕이 있었다. 참으로 지혜가 세상[四海]을 두루 헤아리고 도(道)가 하늘에 이르렀는데, 어찌 절개에 있어 산도(山濤)의 유(類)와 신준(神俊)함에 있어 유양(庾亮)과 짝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정신을 가다듬어 밝혀내되, 이처럼 글 짓는 마음이 곧으면서도 촌스럽지 않은데다 우아하면서도 법도가 있었고, 팔음(八音)이 고루 들리고 오색(五色)을 가지런히 펼쳤다.
도행(道行)을 반듯이 이루어 삼공(三空)을 바로 보고 온갖 미혹은 팔고(八苦)에서 건졌는데, 이미 삼학(三學:戒ㆍ定ㆍ慧)을 다하였어도 하심(下心)하여 낮게 임하면서 높은 것에 어울렸으니, 실로 석종(釋種)의 동량(棟梁)이면서 인륜(人倫)의 우의(羽儀:師表)라 하겠다. 더욱이 부족한 이는 보태주고 어려운 이는 도와주되 늘 남을 먼저 하고 나를 뒤로하였다. 풍광(風光)을 귀중히 여겨 나무창을 드리우고, 산수(山水)를 사랑하며 자연을 짊어졌으나, 원력으로 이를 거두어 자취를 없애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말년에 청계산(靑溪山)의 귀곡동(鬼谷洞)에 숨었는데, 바위틈을 막자 일월이 가려지고 허공에 창을 내자 풍운이 넘나들었다. 이 속에서 오지(五芝)를 캐고 누웠다 일어났다 하며 팔선(八禪)에 노닐고 잠자면서, 골짜기에서 송출(松朮)을 따먹고 산자락에서 벽려(薜荔)를 벗겨 걸치면서도 언제나 합장하고 마정(摩頂)에 귀의하여 도를 물었으니, 이처럼 유유히 경행(經行)하기를 10여 년이나 하였다.
험한 산봉우리와 가파른 산자락과 큰 소나무와 깊은 골짜기는 늘 그러하듯이, 촌 늙은이가 사는 곳이고 옛 성현이 다니던 곳인지라, 발길 닿고 눈길 마주치는 곳마다 혈처(穴處)를 빠져 나오는 지귀(指歸) 아님이 없었다.
이윽고 『청계산기(靑溪山記)』 1권을 지었는데, 이미 세간에 유포되어 있다.
태사령(太史令) 부혁(傅奕)이, 학문도 천박하고 식견조차 높지 못하면서, 짧은 글로 정각(正覺)을 비난하였는데, 장차 포고(布鼓)의 울림을 뇌문(雷門)에 견주기라도 하면, 대체로 범상한 이들이 이에 현혹될 것이 염려스러웠다.
이에 법사가 이 곤충을 불쌍히 여겨 다시 『파사론』 1권을 지었다.
비록 우위(虞衛)에게 전하여 함께 상주(上奏)하였다 하나, 달리 표주(表奏)한 것만도 아홉 차례나 되는지라, 파리와 천리마가 함께 달리더라도 한쪽만이 천 리를 달렸다고 볼 것이다. 마침내 빨강과 자주의 색을 달리 하고 맑고 흐린 것의 흐름을 가려내어, 범상함으로 거룩함을 헤아리는 잘못을 훈계하고, 속된 것으로 참된 것을 재보려는 허물을 추궁하였다.
예문을 인용하여 도(道)가 유(儒)가 아닌 이치를 증명하였는데, 곧장 속마음을 깊이 찔러 세밀하게 지적하니 군사가 패망하듯, 얼음이 녹아내리듯 하지 않음이 없었다.
방으로 쳐들어가 창을 휘두르고자 하니, 방 귀퉁이에라도 머리 처박고 피할 자리가 없었다 하겠다. 마침내 이를 필사하여 묵히지 않고 세간에 오래도록 펴고자 한다. 구름이 걷히면 해를 볼 것인즉, 일시 현혹되었더라도 마침내 도를 얻을 것이다.
법사가 논술하는 방식은 날카로우면서도 이치가 뚜렷한데, 대체로 속히 편집하다가 빠진 것도 많이 있다.
이제 간간이 채집하여 모은 시(詩)ㆍ부(賦)ㆍ비(碑)ㆍ지(誌)ㆍ찬(讚)ㆍ송(頌)ㆍ잠(箴)ㆍ계(誡)ㆍ기(記)ㆍ전(傳)ㆍ계(啓)ㆍ논(論) 및 『삼교계보(三敎系譜)』와 『석로종원(釋老宗源)』 등을 모두 합하여 30권이 되었다.
법사와 나는 정(情)은 물처럼 담박하지만 의리는 금란(金蘭)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옷은 달리 입었어도 자별하게 지내는 것이 참으로 돈독하다. 문득 노끈으로 그의 규장(珪璋)을 이어 내어 차례대로 편집하고서 『상전하파사론계(上殿下破邪論啓)라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