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정론 제1권
변정론서(辯正論序)
진자량(陳子良) 지음
대개 들었다. 선니(宣尼)1)가 꿈에 들자 10익(翼)의 이치가 더욱 밝아졌고 백양(伯陽)2)이 함곡관을 나가자 두 편의 뜻이 나타나서, 혹은 깊은 이치[深]를 계사와 상[繫象]에서 낚아 올리고 혹은 심오한 진리[賾]를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곳[希夷]에서 찾았도다.
이름과 말로 펴지도 못하고 음과 양으로 헤아리지도 못하여 하늘과 땅을 두루 다스리고 귀(鬼)와 신(神)을 포괄할 수는 있지만 도는 대천세계(大千世界)에 흡족함이 없고 말은 역내(域內)를 초월하지 못하였다. 하물며 법신(法身)이 원만하고 고요하여 미묘함이 유(有)와 무(無)를 벗어나고, 지극한 이치가 응현(凝玄)하여 자취가 진(眞)과 속(俗)을 없앴으며, 체가 3상(相)을 끊었고 누(累)가 일곱 생[七生]을 다함이리오.
무심(無心)이 곧 심(心)이요, 비색(非色)이 곧 색이다. 무심이 곧 심(心)이기에 이러한 마음을 마음으로 하였고, 비색이 색이기에 이러한 색을 색으로 한다. 등(藤)과 사(蛇)가 이에 아울러 공(空)3)하고 형(形)과 명(名)이 그 때문에 함께 고요하여서 통발과 올가미의 밖이니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서백(西伯)4)은 유리 감옥에 갇혔어도 정미(精微)함을 나타내었고, 자장(子長)5)은 궁형을 당했어도 마침내 먼저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역(易)에서 “옛적에 역을 지은 자는 아마도 근심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변정론(辯正論)』이 일어남이 참으로 까닭이 있다 하겠다.
법사의 세속 성은 진씨(陳氏)니 한나라 태구장(太丘長)인 중궁(仲弓)6)의 후손이다. 먼 조상대에 벼슬로 인해 강좌(江左)에 옮겨 살았고, 근자에는 떠돌다가 또 양주(襄州)에 살았으며, 수나라 때에는 관중(關中) 땅에 들어가서 스승을 좇아 업을 청하였으니, 옥이 형산(荊山)에서 나옴에 희고 맑은 성품이 더욱 드러나고 계수나무가 그윽한 숲에 옮김에 꽃답고 향기로운 바람이 더 멀리 가는 것과 같다.
법사는 진인(眞人)의 상서에 응하고 황상(黃裳)의 길함7)을 받아서 안으로는 삼장(三藏)을 꾸렸고 밖으로는 9류(流)를 종합하였다.
이미 정(情)을 반연함을 잘하였으며 더욱이 사물을 체달함을 공부하여서 편장(篇章)이 곱고 화려하며 이치가 깊고 빛나는 것이 욱욱(郁郁)하게 비단을 요로 하는 글을 섞었으며 표표(飄飄)하게 구름을 능멸하는 기상이 솟았으니 반고(班固)와 가규(賈逵)의 금옥(金玉)8)으로도 같은 해에 말할 수 없고 반악(潘岳)과 육기(陸機)의 강해(江海)9)로도 어찌 바야흐로 멍에함을 견디겠는가?
장생(莊生)10)과 묵생(墨生)11)의 학과 황자(黃子)12)와 노자(老子)의 글과 3청(淸)과 3통(洞)13)의 글과 9부(府)와 9선(仙)의 부록(符籙)과 『등진은결(登眞隱決)』의 비결14)과 『영보도명(靈寶度命)』의 의식15)을 가슴 가운데 삼키고 손바닥 가리키듯이 말하였다.
더구나 옛적에 『중관(中觀)』을 익혔으며 젊어서 『법화(法華)』를 온습(蘊習)하였기에 이미 듣고 가짐이 있었으며, 근자에는 저술을 오로지하여서 운사(運思)하는 외에 남의 학문을 빨아들이기에 피로함이 없었다.
그래서 『중관』을 말하게 되면 용수(龍樹)보살이 다시 온 듯하고, 자연을 말하게 되면 노자와 장자에 멀지 않았다. 이에 사방에서 잡답(雜畓)하게 오는 것이 마치 장자(長者)의 동산[園]에 돌아오는 것과 같고, 7귀(貴)16)가 분륜(紛綸)하는 것이 화음(華陰)의 저자17)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
이는 학문이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에 짝하며, 재주와 승조(僧肇)와 도생(道生)에 지나니 실지로 보살 가운데의 기둥과 서까래요, 법성(法城)의 담과 해자라 하겠다.
이때에 도사 이중경(李仲卿)18)과 유진희(劉進喜)19) 등이 모두 용렬한 글을 지어서 불교의 바른 법을 비방하고 헐뜯으니 속세(俗世)에 있는 인사들이 혹은 삿된 믿음을 내었다.
이에 법사가 그들의 눈멀고 귀먹었음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지옥에 들어갈까 두려워서 이에 큰 자비를 내어서 드디어 이 논을 지었으니, 이를 일러 이 법의 바다를 고동하고 저 말의 봉우리를 떨치며 푸른 닭의 날카로움이 다투어 달리고, 누런 준마가 다투어 달리는 듯해서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꺾이고 구름이 녹고 안개가 걷히듯 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큰 화로가 조그마한 깃달린 것을 불태움을 형상하겠고, 뜨거운 햇볕이 가벼운 얼음 녹이는 것과 같다고 할 만하니 지고 이기는 무리들을 이에 보겠다.
법사가 잠시 자비한 정(定)에 돌아와서 이미 마군(魔軍)을 깨쳤으며 지혜의 칼을 휘둘러서 어리석은 적(賊)을 항복시키니 부처의 해가 여기에서 다시 빛나고 법의 구름이 이로 말미암아 널리 덮였다.
그런데 법사가 지은 시(詩)와 부(賦)와 계(啓)와 송(頌)과 비(碑)와 뢰(誄)와 장(章)과 표(表) 등의 대승 교법과 『파사론(破邪論)』 등의 30여 권은 세상에 오래 전해지지만 『변정론』 8권(卷) 12편 2백여 장은 불교와 도교의 교의 근원을 다하고, 품조(品藻)의 이름과 이치를 다하였으면서도 지은 지 여러 해이나 유포(流布)되지 못하였다.
옛날 진(秦)나라 효공(孝公)은 제왕(帝王)의 도리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잠들고 패왕(覇王)의 도리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일어났다 하니, 그 격으로 『변정론』이 간행되지 못함은 마치 양춘(陽春)의 온화한 경치를 모름과 같아서 깊이 비탄(悲歎)하겠다.
다만 법사가 지은 것이 안과 밖을 겸하여 해통(該通)하였지만 일을 좋아하는 후생들이 깨우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려워서 제자 영천(穎川) 진자량(陳子良)이 가까이서 정례(頂禮)를 펴고 좇아서 나루터 가는 길을 물으니 난연(爛然)하게 눈에 넘치는 것이 마치 밝은 달이 가슴에 들어오는 것과 같고, 고요하게 기틀에 응하는 것이 보배 구슬이 물건을 대하는 것과 같아서 이미 사구(四衢)의 환(幻)을 깨달았기에 문득 백 성(城)에서 노님을 쉰다. 이에 듣지 못했던 것을 계(啓)하여 주해(注解)를 하니 장래에 함께 좋아하게 된다면 다행히 그 취지를 자세히 했다 하겠다.
1)
한(漢)의 평제(平帝)가 공자에게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린 뒤로 공자를 선니(宣尼)라고도 한다.
2)
노자(老子)의 자(字)이다.
3)
등 넝쿨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4)
주(周)의 문왕(文王)을 말한다. 문왕이 유리에 갇혔을 때 주역의 괘사를 지었다고 한다.
5)
사마천(司馬遷)의 자(字)이다.
6)
후한(後漢) 진식(陳寔)의 자이다.
7)
『주역(周易)』 곤(坤)괘 육오(六五)의 효사(爻辭)에 “육오는 누런 치마이니 크게 길하다.[六五, 黃裳元吉]”라고 하였고, 상전에서는 “황상원길은 문이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黃裳元吉, 文在中也]”라고 하였다.
8)
훌륭한 문장을 비유한 말이다.
9)
시문(詩文)을 비유한 말이다.
10)
장자(莊子)를 말한다.
11)
묵자(墨子)를 말한다.
12)
황제(黃帝)를 말한다.
13)
3청(淸)은 도가(道家)의 삼신(三神)인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ㆍ상청영보도군(上淸靈寶道君)ㆍ태청태상노군(太淸太上老君), 또는 선인(仙人)인 머무는 곳인 옥청(玉淸)ㆍ상청(上淸)ㆍ태청(太淸)이고, 3통(洞)은 도장(道藏)의 분류인 첫째 통진(洞眞) 둘째 통현(洞玄) 셋째 통신(洞神)이지만 모두 도가의 경전을 말한다.
14)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지은 『등진은결(登眞隱決)』에 보이는 선도(仙道)의 비결을 말한다.
15)
도가의 경전인 『영보도인명경(靈寶度人命經)』에 기록된 의례(儀禮)를 말한다.
16)
일곱 명의 귀한 사람을 말한다.
17)
후한(後漢)의 장개(張楷)가 장음(張陰)에 은거할 때 따르던 학자들이 저자[市]를 이루었다는 고사(故事)를 말한다.
18)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을 지어 불교를 비방한 것을 말한다.
19)
『현정론(顯正論)』을 지어 불교를 비방한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