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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의 문학활동
남 진 원
‣ 나의 글쓰기 . 2002. 12. 8.
( 신명조 15. )
글과 인연을 맺어온 지도 오랜 기간이 되었다. 타인의 글을 읽고 타인의 말에 기를 기울이며 지내오다가 내 생활이 묻어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지 30여년이 되었으니 꽤 많이 흐른 셈이다. 시간의 무게만큼 익은 글은 별로 없지만 줄곧 한 길을 향해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보람이 있다고 여긴다.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곳은 지금의 태백시 회전동이다. 당시 나는 스물 한 살의 청년으로 초등학교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스물 세 살에 내 문학 활동이 교직 생활과 함께 이어졌다.
1975년 3월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최도규 선생이 부임해 오셨다. 1974년에 내가 학급문집 「나룻배」를 발간한 것을 보셨다. 그리고 내게 글을 쓰라고 주문하셨다. 1975년 나는 강원아동문학회에 가입하였고 강원아동문학 3집ㅂ에 동시 ‘호수’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문학활동을 공식적으로 하게 된 셈이다. 그래도 문학 지식이 일천하던 때라, 많은 창작 활동과 함께 지식적인 문학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내가 근무하던 태백시 화전동은 탄광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비단결 같은 엷은 안개가 꿈틀대는 매봉산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신비의 세계에 몸을 들여놓은 듯하였다.
매봉산 위에서 내리퍼붙다시 하는 태양 빛은 신비의 생명을 뿌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한껏 들떴고 싱그러운 아침의 경이로움에 생명감을 시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곳처럼 생각된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매료되어 일기를 써 가듯 글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시간은 학교 수업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하여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무엇을 한 번 하게 되면 분간하지 않고 몰두하는 게 나의 나쁜 버릇이었다. 이것은 좋은 면도 있지만 결국 건강을 해치는 아주 나쁜 습관이었다. 나는 화전동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글쓰기에 몰두하였다. 밤 늦게 자면 새벽에 일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글 쓰는 작업은 낮에 틈나는 시간과 주로 밤 시간이다.
밤에 긍를 쓰다가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랐다. 마침 그 당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나보다 먼저 문학의 싹을 틔우며 공부를 해 오던 최도규 시인(작고)이 부임해 오셨다. 우리는 평소에 문학 작품에 대해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 물론 나는 그 분ㄴ의 말씀을 듣는 입장이았고 그 분은 선배로써, 믿음직한 형으로써 내게 많은 작품을 들려주었고 내 작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때마다 나는 큰 용기를 얻어 글쓰기에 더욱 분발할 수 있었다.
내가 글을 쓰면 제밀 먼저 보여드리는 분이 바로 최도규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은 몹시 서운한 일도 있었다.
여름밤이었는데 나는 마침 방에서 시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편을 탈고하였다. 그 작품을 손에 쥐고 최도규 선생님 관사로 달려갔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는 것이다. 그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일찍 주무시는 것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저녁 9시 밖에는 안 되었는데 잠자리에 들다니 ……. 나는 너무 허전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글쓰기 습관은 고향인 모교에 가서도 이어졌다. 나는 태백 화전국교에서 만 5년 학교 만기를 채운 후에 고향인 정선군 골지리에 소재한 [문래국민 학교 : 지금은 분교장]에 가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내가 어릴 때 다니던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것 또한 신나는 일인지 몰랐다.
나는 이곳에서도 토요일 저녁이면 식사를 하고난 후 글을 썼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밤을 꼬박 꼬박 새었다. 일요일 새벽이 온 것이었다. 밖에 나가보면 마음은 싱그러운 기운에 휩쌓여 있고 그 모습을 본 나는 과거에 급제한 선비처럼 기뻤다.
그러나 이런 나의 씁관을 얼마 전에 청산을 하였다. 이제는 체력이 떨어져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오래 붙들고 앉아야 좋은 글이 써지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 틈이 있으면 그 시간을 버리지 않고 평소 익혀놓은 생각들을 정리해놓는다. 그 시간은 대개 낮이거나 이른 아침이다. 저녁에는 9시 뉴스를 보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그러니 생각도 맑아지고 마음도 차분하여져서 한결 좋다. 오늘날처럼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좀더 천천히 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처럼 눈 내리는 한가로운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 계몽아동문학회 문삼석 회장에게 2002년. 12월 8일 송고 -
대회사 견본
나의 글쓰기 . 2.
[2002..]
‣ 강릉***고 졸업 30주년 대회사
(강릉***고 졸업생이 되어 작성해 본 대회사 견본 임.)
안녕하십니까?
금년도 어언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번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4강 신화라는 국가적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태풍 루사의 피해가 전국을 강타하였습니다. 그 피해가 우난히 컸던 강릉이었지만 모두들 합심하고 협력하여 슬기롭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번 태풍 피해의 난관을 극복하고 헤쳐나가는 데에는 자랑스런 강릉 *** 선배 후배 우리 동문들의 힘 또한 컸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부심을 깆고 있습니다. 이처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뚝심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우리 강릉농공고의 자랑이라고 여겨집니다.
뿐만아니라, 우리 동문들은 각계각층에서 인간다운 성실성을 바탕으로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가면서 지역사회로부터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모두가 학창시절 모교에서 가르침의 손길응ㄹ 주신 은사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ㄴ까? 오늘 우리 졸업 30주년 행사의 자리에는 저희들의 스승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참으로 기쁩니다. 감사한 마음을 모아 뜨거운 박수를 드립니다. (여러분, 은사님께 힘찬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오늘은 우리 졸업생들이 은사님들을 모시고 30주년 행사를 거행하는 즐겁고 즐거운 날입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불구하고 저희 행사를 빛내주시기 위하여 총동창회장님을 비롯하여 본교 교장선생님과 내빈 여러분, 강릉지역 6개교 회장단, 학교의 선배, 후배님이 자리를 함께 하셨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동문들의 모습을 보니 실로 감회가 깊습니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 지천명의 문턱을 넘은 우리들은 인생의 풍요로운 수확기에 들어섰습니다. 서로의 믿음과 서로의 신뢰가 한데 어우러져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격변의 시대에서 오히려 넉넉함과 느긋함을 보이며 강릉농곡ㅇ고 특유의 삶의 여유와 멋을 구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생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제야말로 우리들의 즐거운 인생이 미래사회와 발맞춰 행복을 노래할 때라고 보여집니다. 저 중국 대륙의 황하강을 흐르는 장강의 소리없는 잠력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아름답게 이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동문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하오며 오늘의 만남이 우리 모두에게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즐겁고 뜻 깊은 추억으로 새겨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2년 나의 글쓰기. 3.
2002년 2월, 나는 ‘한국동시문학회 결성 발기인’ 승낙 요청문을 받고 승낙문을 보냈다.
- 한국동시문학회 결성 발기인 승낙 2002. 2. 15.
가칭 ‘한국동시문학회’결성 취지 및 발기인 승낙 요청문
30년을 넘게 동시를 쓰고 있는 선배 동시인이 있습니다. 그분은 동시집 한 권을 위해 여섯 군데나 출판사를 전전하다 끝내 자비로 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 선배님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임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시의 현실을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기보다 이제는 점검하고 성찰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동시는 왜 출판문화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가, 우리가 쓰고 있는 동시에는 출판문화로부터 외면당할 그만한 이유가 있는가, 21세기 이 시점에서 정립해야 할 동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런 문제가 이젠 집중적이고 보다 학문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늘 이시적으로 제기되었다 힘없이 소멸되고 만 게 사실입니다. 그것이 분명 심각한 문제임에도 그냥 일회적인 담론으로 끝내고 만 것은 현재 동시를 쓰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기보다는 이에 대한 집중적인 접근을 통하여 동시의 활로와 정체성을 모색할 때입니다. 또한 장르가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가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1500여 명에 달하는 동시인들이 단지 ‘아동문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안주하여 고민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일반 성인 문단의 경우, 소설 단체 2개, 시 단체 2개 등 시조, 희곡, 평론 등 각 장르별로 단체가 설립돼, 전문적인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 아동문학 단체도 전문화, 세분화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가칭, ‘한국동시문학회’를 발족시키고자 뜻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2월 5일 ‘가칭 한국동시문학회 발족을 위한 추진위원회 결성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14명 (수도권 거주 중심) 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추진위원 모두 ‘한국동시문학회’와 발족(5월 예정)을 적극 찬동하였고, 그것만이 동시를 활성화 내지는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결의도 하였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새 술’ 도
다시 빚고, 그것을 담을 ‘새 부대’도 또한 지어야 할 떼에 직면하였습니다.
그 일에 귀하의 적극적인 울력이 필요합니다. 귀하를 가칭 ‘한국동시문학회’ 발기인으로 추대하고자 합니다. 취지문을 잘 읽어보시고 승낙하시어, 2002년 2월 28일까지 동봉해드린 회신 봉투를 이용해 회송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발기인이 확정되면 3월 중에 발기인대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발족될 가칭 한국동시문학회는 전국 동시인(소속 단체 불문)을 망라하여, 동참 인원과 상관없이 분명히 결성한다는 점을 밝히며, 결코 ‘또 하나의 자리’를 만들자는 의도가 아님을 아울러 천명합니다.
- 한국동시문학회 결성 위원회 -
발기인 승낙 요청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다순, 존칭 생략)
공재동, 권영상, 권오삼, 권오훈, 김구연, 김소운, 김숙분, 김영기, 김완기, 김원석, 김은영, 김재수, 김재용, 김종상, 김종영, 김진광, 남진원, 노원호, 문삼석, 민현숙, 박경용, 박근칠, 박두순, 박 일, 박종현, 빅지현, 박행신, 손광세, 손동연, 송명호, 송 현, 신현득, 신현배, 신형건, 엄기원, 오순택, 유경환, 윤동재, 윤이현, 이상교, 이상현, 이정석, 이준관, 이준섭, 이창건, 이창규, 장승련, 전병호, 전영관, 전원범, 정두리, 정용원, 조규영, 진복희, 최일환, 최춘해, 최 향, 하청호, 허동인, 선 용.
( 문의처: 박두순 )
2002년 2월 15일
가칭 ‘한국동시문학회’ 결성 추진위원회
권영상, 권오삼, 김소운, 김숙분, 박두순, 손광세, 노원호,
신현배, 신형건, 이상교, 이준관, 이창건, 전병호, 정두리
[동화]
이상한 꽃
남진원
장미꽃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찾아오는 친구가 거의 없습니다. ‘곧 친구들이 찾아올 거야’ 이런 기다림으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볼을 살살 간질이는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누구지?’ 장미꽃은 반가움에 돌아보았습니다. 바람 친구였습니다.
“야! 반갑다아!”
장미꽃은 너무 기뻐 외쳤습니다. 가슴까지 울렁거렸습니다. 바람이 자기의 예쁜 모습을 보고 칭찬해 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바람은 반가운 얼굴이 아닙니다.
“씨-잉, 씨-잉. 너는 애가 칭찬해주길 바라고 있지? 칭찬 받길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친구는 없어. 그럴수록 친구들이 너를 비웃기만 하는 걸 아니? 내가 너에게 온 건 이 말을 해주기 위해서야.”
“ … ”
“그리고 날씨도 점점 추워지니 겨울을 잘 지내라고 미리 알려주러 온 거야. 아무튼 잘 지내. 그럼 난 간다?”
바람은 휑하니 떠나갔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바람의 말처럼 추위만 찾아왔습니다. 찬바람과 갑자기 찾아온 추위 때문에 장미꽃은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아이구 추워라! 견딜 수 없네.”
그렇지만 장미꽃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난 세상에서 제일 예뻐! 누군가 나의 모습을 꼭 보러 올 거야! 그리고 칭찬해 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또 한 떼의 친구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에는 참새들이었습니다. 참새들은 지나는 길에 장미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길 봐, 이상한 꽃이 있어?”
“어디, 어디?”
지나가던 참새들이 신기한 듯 내려다봅니다. 그 꽃은 빨간 장미꽃입니다. 어느 커다란 3층집 정원 앞에 장미꽃 한 송이만 쓸쓸하게 피어있습니다.
“겨울에도 꽃이 피나?”
“글쎄, 이 추위에 어떻게 견디지?”
참새들은 궁금한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종알거리며 장미나무 가지에 내려앉았습니다. 참새들은 신기한 듯 한 송이의 장미꽃을 들여다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니 놀랍다!”
“나도 이런 꽃은 처음 본다?”
참새들은 다들 한 마디씩 지껄였습니다. 그러면서 장미 잎을 콕콕 쪼아보기도 하였습니다.
“아무 향기도 없잖아!”
“그렇네.”
“종이꽃 같은데….”
“종이꽃은 아니야, 여길 보라구, 줄기에 꼭 붙어 있잖아.”
참새들은 칭찬은커녕 장미꽃을 귀찮게만 하였습니다. 장미꽃은 심술이 잔뜩 났습니다. 정말 재수 없는 날이라고 여겼습니다. 모두들 이제는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장미꽃은 너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소원을 말하지 않는 건데….’
장미꽃은 즐거웠던 여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장미꽃 주위로 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앵앵, 꿀 좀 주세요.” 그러면 장미꽃은 뽐내며 말했습니다.
“없어, 다른 곳에 가 봐.” 그래도 벌들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미꽃님, 조금만 꿀을 주세요.”
장미꽃은 이 말을 듣고 어깨가 으쓱해져서 꿀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나비들도 찾아와 꽃 중의 여왕님이라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음, 나는 꽃 중의 왕이지.’ 장미꽃은 거만해졌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예쁜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줄 알았습니다.
‘이 예쁜 모습을 오래도록 지녀야지.’ 장미꽃은 갑자기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늘 나라에 사는 꽃의 여신에게 “꽃의 여신님, 저를 오래도록 피어있는 꽃으로 살게 해 주세요. 저의 소원입니다.” 하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신은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건을 하나 붙였습니다.
“향기가 없어도 된다면 허락 해주지.”
“그럼요. 네, 네. 향기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예쁜 모습만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피었던 꽃은 지지 않은 채 겨울에도 그대로 피어있었던 것입니다. 장미꽃은 참새들이 찾아올 때 속으로 반가웠습니다. 자신의 예쁜 모습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새들이 가까이 와서 이상한 꽃이라고 놀려서 화만 났습니다.
“바보 머저리 같은 녀석들! 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다니….”
장미꽃은 참새들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너처럼 자랑하면 안 돼. 웃기는 일이지.넌 아직 그것도 모르니? 그리고 제일 아름다운 것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냐. 너야말로 바보구나.”
참새들은 장미꽃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장미꽃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겼습니다.
“어서 내 주위에서 가 버려. 가버리라구.”
“쯧쯧, 말을 못 알아듣는군. 얘들아, 가자.”
참새들은 멀리 멀리 떠나갔습니다. 이제 장미꽃 주위에는 손을 얼어붙게 하는 추위와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장미꽃은 자신의 예쁜 모습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어 슬프고 억울하였습니다.
“나의 모습을 누가 좀 보아 달 라 구! 나의 멋 진 모 습을…”
장미꽃은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겨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듣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쓸쓸한 목소리만 혼자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린이강원 2002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