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9.
이육사의 시, 광야를 또 읽다
남진원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의 시는 늘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원시적인 힘이 있다.
시의 첫 행부터가 얼마나 시원하랴?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라면서 우주 시원의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다. 광활한 광야의 서두 답지 않은가. 그 시의 줄기가 장강처럼 도도하다.
‘닭 우는 소리’는 새벽을 알리는 소리다. 그건 어둠을 여는 빛의 소리이기도하다. 거침없이 내 달리려는 말의 안장과 푸른 갈기를 보는 듯하다.
지구의 모든 부분은 산맥으로 뻗어 내려와 있다 그 줄기들이 바다를 연모해 내달린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성하고 거룩한 땅이 있었으니, 이육사가 말하는 바로 ‘이곳’이다. ‘이곳’은 광야이기도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의 원초적인 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의 가슴속에 품을, 숨 쉬는 평안의 영원성을 띤 정착지이기도 하리라.
이 육사의 광야 시 중에 가장 멋지고 대담한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광야의 아득함을 더해 지금 눈이 내리고 있다. 매화꽃 보다도 더 멋진 눈일 것이다. 담대함으로 가득차 있고 장엄하며 황홀함의 미감을 드러내는 이 시적 표현에 어찌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리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멋진 시인!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그리고 장쾌함의 여운이 공명처럼 천지를 진동하게 하는 시 구절,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무엇이든 상상하게 하는 상징성을 담보로 하여 즐거움을 한껏 부필리고 희망을 탁 트이게 하는 거대한 모습이다. 마치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대장부의 통쾌함이 있다. 이 시가 바로 그런 시라 하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중의 하나가 이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