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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보생론 제1권
대당용흥삼장성교서(大唐龍興三藏聖敎序)
應天神龍(응천신룡) 황제(皇帝) 지음
들으니 드높아 창창함이여. 하늘이 별자리를 벌려 모양을 드러냈고, 드넓어 망망함이여, 대지가 산천을 두어 모습을 이루었다. 우러러 천문(天文)을 살펴봐도 이미 저러하고, 구부려 지리(地理)를 돌아봐도, 역시 이러하다.
대개 묘지(妙旨)가 깊고 그윽하니 명언(名言)의 길이 저 멀리 끊겼으며, 진여(眞如)가 맑고 고요하니 성상(性相)1)의 뜻이 모두 다 사라졌다.
처음으로 마음의 용틀임을 일으키니 법문의 우레가 메아리쳐 울렸고, 미혹한 무리들을 권장하여 인도하니 깨침의 머리는 우러러 바른 길[司方]2)을 기다렸다.
분명히 알라. 변하는 거짓 이름이 변치 않는 이름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걸림이 없는 말씀은 말씀이 떠난 데서 밝혀진다.
더욱이 모양을 벗어난 모양이니 홀로 삼계(三界)의 으뜸이라 칭하고, 하늘 가운데 하늘이니 이에 6통(通)3)의 성인이라 부른다. 법왕(法王)은 예리한 견해로 일흔 두 임금4)을 품어 길렀으며, 범왕[梵]과 제석[帝]은 시기를 타서 만 팔천 년을 굳게 지켜왔다. 주행하는 별[周星]5)이 채색을 안았으니 말은 성인 탄생의 징조와 부합하고, 한나라의 해[漢日]에 상서가 흘렀으니 일은 신비로운 현몽(現夢)과 일치한다.
때문에 위세가 진사겁(塵沙劫)6)에 떨칠 수 있으며, 교화가 세속 경계를 덮을 수 있었다. 옥과 같은 하얀 털7)이 빛을 놓아 어둠을 없애고, 금과 같이 귀한 입8)을 크게 열어 막힘을 뚫었다. 번뇌의 도적[煩惱賊]을 무찌르는 데 어찌 방패와 창을 빌리겠는가? 생사의 마군[生死軍]을 무너뜨림은 오직 지혜의 힘을 의지할 뿐이다. 뚜렷이 밝은 경지를 열어 널리 끝없는 세계를 거둬들였고, 영원히 기쁜 문을 터서 두루 유정(有情)의 생명을 끌어안았다.
비록 하늘에 넘치는 욕심의 물결일지라도, 경계의 바람이 멈추니 어느새 맑아졌고, 햇빛을 가리는 마음의 티끌일지라도, 법문의 비가 적시니 곧바로 걷히었다. 돌아가 의지하는 자는 재앙을 녹이어 복덕을 이루고, 되돌려 베푸는 자는 위험을 버리어 안정을 얻는다. 참으로 “더없이 높구려, 그 이룬 공덕이여, 더없이 넓구려. 무어라 이름하랴!”고 말하리라.
단지 어리석고 무지한 4생(生)이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하여 한량없이 아득한 6취(趣)에 함께 묶였을 뿐이니, 어찌 허망한 꽃이 진실이 아니며, 물 속의 달이 견고치 않음을 알겠는가? 5음(陰) 가운데를 치달아 좇으며, 3계(界)의 지경에서 허덕인다.
이들 중생을 거둬들이니, 결국 법문을 기다렸다. 흰말이 서쪽에서 오니 심오한 말씀이 동쪽을 덮었다. 세존께서 근기를 따라 널리 펴시니 중생들은 성품을 좇아 미혹을 벗는다.
마명(馬鳴)9)은 귀중한 편서(編書)로 아름다움을 선양하였으며, 용수(龍樹)10)는 보배의 게송(偈頌)으로 꽃다움을 드날렸다. 이에 멀리 진단(震旦)에 알려지고, 두루 염부(閻浮)에 퍼지면서, 반자(半字)ㆍ만자(滿字)11)의 교가 따로 나뉘고, 대승(大乘)ㆍ소승(小乘)의 법이 함께 달렸다.
뛰어난 법덕을 갖춘 불도징(佛圖澄)12)과 도안(道安)13)은 발맞춰 훌륭한 도량에 머물고, 고상한 인품을 지닌 법림(法琳)14)과 혜원(慧遠)15)은 나란히 법다운 사찰에 자취를 보이니. 드디어 미묘한 말씀으로 모범이 드러나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훌륭한 영예를 남겼으며, 지극한 수행으로 법규가 흘러나와 시방 곳곳이 다 차도록 무성한 열매를 드날렸다.
마침내 후주(後周)의 시대가 열리면서[膺運]16) 크게 마(魔)의 바람이 몰아치니, 드디어 천하의 사찰은 모두 헐렸거나 폐지되고 말았으며, 도량의 승려는 함께 세속으로 내몰려 섞여 버렸다. 한심하구나. 적막한 선정(禪定)의 터전에는 쓸쓸히 좌선(坐禪)의 자리만을 남겨 놓았으며, 황량한 지혜의 동산에는 더 이상 경행(經行)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에 개황(開皇)17)에 이르러 거듭 사원(寺院)을 고쳐 세우는 일이 진행되었으나. 오히려 대업(大業)18)을 만나서 다시 찢겨 흩어져 종잡을 수 없는 일을 당하니, 귀신은 통곡하고 신령은 신음하며, 산악이 울부짖고, 바다가 들끓었다. 이미 도탄에 빠졌으니, 어찌 가람(伽藍)인들 온전하겠는가? 바른 법은 몰락하고, 사견(邪見)만 더욱 자랄 뿐이다. 여기에 사람은 깨침의 길목을 알지 못하여, 고통과 쌓임[集]의 구역에서 허덕이고, 세속은 참다운 종지가 파묻혀서, 덮고 묶는 번뇌 가운데에 얽히고 말았다.
이에 우리 큰 당나라에 천하를 두었으니, 위로는 소수(巢燧)19)를 능멸하고, 아래로 희헌(羲軒)20)을 내려다본다. 세 분 성인21)이 다시 빛나니, 온 세상이 하나가 되었다. 위엄은 다스림을 더하고, 덕택은 한없이 덮였다. 대지의 맥락이 잡혀 두터운 덕을 돌렸고, 하늘의 벼리가 뻗쳐 진실한 덕을 보냈다. 다시 부처님의 해가 밝아졌고, 거듭 청정한 하늘을 수놓았다. 용궁(龍宮)이 여덟 버팀목을 떠 받혔으니 사해가 고루 안정되고, 영취(靈鷲)가 다섯 봉우리와 함께 하니 어찌 높음을 다투랴?
크게 불교를 선양하여 넓힘은, 진실로 황실조정에 속한 일이다. 대선복사(大先福寺)의 역경을 맡으신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은 범양(范陽)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장씨(張氏)다. 5대(代)가 한나라에 봉직한 뒤로 삼태(三台)가 진(晉)나라에 벼슬하기 전까지는, 높은 벼슬은 나눠 광채를 발했고, 군자의 덕은 합쳐 채색을 떨쳤다. 고조(高祖)께서 동쪽 제(齊)나라 군수(郡守)에 오르니, 인풍(仁風)은 부채를 좇았고, 단비는 수레를 따랐다.
교화는 육조(六條)를 선양하였고, 정사는 십부(十部)를 행하였다. 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함께 세속의 영화를 싫어하여, 은자(隱者)의 한 언덕에서 자유롭게 지내고, 은자의 세 뜰에서 마음대로 거닐면서, 조화(調和)를 품어 본질을 체득하고, 심성(心性)을 닦아 정신을 길렀으며, 지초의 꽃[芝秀]은 동쪽 산에서 따왔으며, 맑은 물은 남쪽 샘에서 길어왔다. 당연히 신선의 경계에 깊숙이 들어 하얀 구름에 깃들어 묻힌 이라고 하리라. 연못가의 두루미도 여기서는 소리를 삼켰으며, 논두렁의 망아지도 이 때문에 그림자를 멈추었다.
법사(法師)는 어려서 이미 사리 판단이 빼어나서, 일찍부터 뛰어난 총명이 알려졌다. 겨우 떠들며 돌아다니는 나이[辯李之歲]22)를 넘기자, 마음에 출가(出家)를 원했으며, 겨우 배움을 좇아 돌아다니는 나이[遊洛之年]23)를 지내자, 서국(西國: 인도)을 탐방하려고 결심하였다. 이에 경사(經史)를 해박하게 연구하였고, 옛날과 지금을 배워 환히 알았으며, 삼장(三藏)의 그윽한 요점을 총괄하였고, 일승(一乘)의 심오한 내용을 널리 밝혔다. 이뿐이랴, 고요히 머물러 정려(靜慮)를 닦고, 복잡한 생각을 쉬어 선정(禪定)에 들었으니, 저 산 속의 숲을 의지하여 이 쌓인 번뇌를 멀리 떠난 것이다.
3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속에 품은 뜻을 이루게 되었다. 함형(咸亨) 2년에 광부(廣府: 廣州)로 갔다. 뜻을 같이한 사람이 처음에는 열 명이 되었으나, 돛대를 올려 배가 떠날 때는,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남쪽의 큰 바다를 돌며 멀리 떠나서, 서쪽의 먼 나라를 향하여 오래 달렸다. 천 겹 암초(暗礁)를 겪고, 만리 파도를 능멸하며, 점차 천축(天竺)에 이르렀고, 다음에 왕사성(王舍城)에 도착하였다.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신 신령한 봉우리[靈峰]는 아직 그대로 있고, 여래께서 도(道)를 이루신 신성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폐사성(吠舍城: 毘舍離城)중에 번개(幡蓋)를 드리운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으며, 급고원(給孤園) 안에 황금을 흩은 자리도 여태껏 남아 있다. 삼도의 보배 계단[三道寶階]24)은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하고, 팔대의 신령한 탑[八大靈塔]은 저 멀리 아득히 직접 보는 듯하다.
서른이 넘어 나라를 돌아보는 사이,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을 지냈다.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얼마나 잡아끌어 오래 머물었으며, 아뇩지(阿耨池) 변에서 얼마나 세속의 때를 씻어 비췄던가?
법사(法師)는 자비(慈悲)를 방으로 삼았고, 인욕(忍辱)을 옷으로 여겼다. 오래도록 재계(齋戒)하여 한 끼니의 밥으로 몸을 돌보았으며, 오래도록 좌선(坐禪)하여 종일토록 게으르지 않았다.
또 예부터 번역하는 이들은 먼저 범문(梵文)을 근거한 뒤에 한역(漢譯)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말을 정리할 때 비로소 학자(學者)에게 의지하였고, 뜻을 밝혀낼 때 별도로 승도(僧徒)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제 법사는 이와 다르다. 이미 5천축의 말에 능통하였고, 2제(諦)25)의 심오한 종지를 상세히 알았다. 뜻을 번역하고 글을 엮는 일은 다 자기로부터 나왔고, 말을 지시(指示)하고 이치를 결정하는 일은 옆에서 구하지 않았으니, 한(漢)나라의 마등(摩騰)보다 뛰어나고, 진(秦)나라의 라집(羅什)보다 훌륭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증성(證聖) 원년(元年) 여름 5월에, 4백 부에 가까운 50만 송(頌)의 범본경(梵本經)과 금강좌 진용(金剛座眞容) 1포(鋪)와 사리(舍利) 3백 립(粒)을 가지고 도읍에 도착했다.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께서 하늘의 진동으로 황제의 시기를 알리자, 하늘의 뜻을 받들어 기강(紀綱)을 바로 잡게 되면서, 불법계승(佛法繼承)을 임무(任務)로 삼았고, 중생제도(衆生濟度)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에 모든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고, 겸하여 4부대중(部大衆)에게 교시하니, 무지개 깃발은 햇빛을 지웠고, 환영의 예악[鳳吹]26)에 구름도 멈췄다. 향은 6수(銖)27)에 흩어지고, 꽃은 5색(色)으로 나부낀다. 쟁쟁한 금옥의 소리는 장중하고, 휘황한 광채의 빛깔은 찬란하다. 이 가운데 법사(法師)는 상동(上東)의 문에서 영접되어 수기사(授記寺)로 모셔졌다.
여기서 우전삼장(于闐三藏)28)과 대선복사 사주(大先福寺寺主) 사문 복례(復禮)29)와 서숭복사주(西崇福寺主) 법장(法藏)30) 등과 『화엄경(花嚴經)』을 번역하였다. 그 뒤 대복선사(大福先寺)로 가서 천축삼장(天竺三藏) 보사말다(寶思末多)와 수기사주(授記寺主) 혜표(惠表), 사문 승장(勝莊), 자훈(慈訓) 등과 더불어 근본부율(根本部律)을 번역하였다.
그 대덕(大德)들은 4선(禪)의 선정(禪定)에 마음을 집중하여 6도(度)의 실천에 생각을 합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법의 거울[法鏡]을 마음의 바탕에 달고, 계의 구슬을 성품의 바다에 밝혔다. 문장의 숲이 우뚝 빼어나니, 깨침의 나무에 향기가 그윽하고, 지혜의 횃불을 환히 밝혔으니, 계수의 달빛은 그림자와 똑같다. 본래의 황금과 순박한 구슬은 바로 이 분들이 아니고 누구랴? 참으로 사원(寺院)의 동량(棟梁)이요, 진정 법문(法門)의 용상(龍象)이로다.
이미 제잡경율(諸雜經律) 2백여 권을 번역하여 다 책으로 만들고 이내 모두 황실(皇室)에 바쳤으므로, 그 외 다른 계율(戒律)의 모든 논서도 비로소 뒤 이은 번역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5편(篇)31)의 교(敎)도 자세히 밝아지고, 8법(法)32)의 인(因)도 상세히 드러나리라. 거위의 구슬33)을 모범 삼아 지키니, 벌레의 목숨도 다치지 않고, 뜨는 주머니[浮囊]34)를 반드시 결점이 없는 데서 취한다면, 기름 발우[油鉢]35)는 끝내 쏟아지지 않음을 기약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의 기강(紀綱)을 숭상한다면, 중생의 이목(耳目)은 열려지리라.
엎드려 원하오니, 위로는 먼저 떠나신 성조(聖祖)를 도와 영원히 칠묘(七廟)의 터전이 이어지게 하시고, 아래로 이 미천한 몸에 닿아서 항상 하늘[九天]의 수명을 누리게 하소서. 가련한 생명을 장수(長壽)의 경계로 옮겨주시고, 야박한 세속을 후덕(厚德)한 원천에 이르게 하시며, 세월마다 풍년이 들어 시절마다 화기가 넘치게 하시고, 머나먼 변방(邊方)이 안정되고어 가까운 도회(都會)를 정숙케 하옵소서,
돌아보니 조정의 일이 급하고 나라의 일이 많아, 밤중의 여가를 타서 하늘에 가득한 덕을 기리다 보니, 허공을 헤아려 고요를 두드리는 듯, 부족하나마 머리말을 지었노라.
1)
성(性)과 상(相)으로서, 성(性)은 절대불변(絶對不變)의 진실한 체성(體性)을, 상(相)은 상대변화(相對變化)의 차별된 현상(現相)을 말한다.
2)
남쪽을 가르치는 신선의 목상(木像)이 새겨진 중국 고대의 지남거(指南車: 혹은 司南車)를 사방(司方)이라고 한다.
3)
육신통(六神通)으로서, 신족통(神足通)ㆍ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누진통(漏盡通)을 말한다.
4)
중국 고대에 태산(泰山)에서 땅을 높이 쌓아서 제단(祭壇)을 만들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올리던 일[封禪]로서, 여기에 모신 72의 인군(人君)을 말한다.
5)
목성(木星)이 하늘을 한 바퀴 도는 사이로서, 열두 해 동안을 말한다.
6)
한없이 많은 티끌과 모래와 같이 긴 시간을 말한다.
7)
부처님의 미간백호(眉間白毫)를 말한다.
8)
부처님의 입을 귀한 황금에 비유하여 금구(金口)라고 칭한다.
9)
중인도 마갈타국 사람으로서, 불멸후 6백 년경에 대승(大乘)을 제창한 논사(論師)이다.
10)
불멸후 6,7백 년경의 남인도(南印度: 혹은 西印度) 사람. 공종(空宗)의 시조로서 대승불교(大乘佛敎)를 크게 선양하였다.
11)
반자교(半字敎)는 만자교(滿字敎) 이전에 배우고 닦는 교리이며, 만자교는 반자교를 바탕으로 배우고 닦는 교리를 말한다.
『열반경(涅槃經)』의 “아버지가 어리석은 자제에게 먼저 만자(滿字)를 가르치지 않고, 반자(半字)부터 가르친다”는 비유에서 유래한다.
뒤에는 반자교(半字敎)를 소승교(小乘敎)에, 만자교(滿字敎)를 대승교(大乘敎)에 비교하는 등 많은 설이 나왔다.
12)
(231~348) 서역(西域) 구자국(龜玆國)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백(帛)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경문(經文)을 잘 외우고 문리(文理)에 밝았다. 310년에 중국 낙양(洛陽)으로 온 뒤, 신비한 행적을 보였다. 후조(後趙)의 석륵(石勒)ㆍ석호(石虎) 등의 비호(庇護)를 받으면서 대법(大法)을 전하였고, 도안(道安)등 1만의 제자를 두었다.
13)
(314~385) 중국 부류(扶柳)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위(魏)씨며, 불도징(佛圖澄) 등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 개척에 앞장섰다. 『반야경(般若經)』ㆍ『도행경(道行經)』ㆍ『밀적경(密跡經)』ㆍ『안반경(安般經)』 등의 문구를 자세히 비교하여 시종(始終)의 뜻을 소상히 밝혔고, 처음으로 경문(經文)에 「서분(序分)」ㆍ「정종분(正宗分)」ㆍ「유통분(流通分)」의 과목을 정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으며, 반야(般若)의 공론(空論)을 제창하여 초기 인도인 중심의 포교를 중국인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 『반야절의략(般若折疑略)』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14)
(572~640) 중국 영천(潁川) 사람으로서, 속성(俗姓)은 진(陳)씨며 어려서 출가하였다.
유석백가(儒釋百家)의 학문을 널리 연구하였고, 특히 삼론(三論)에 정통하였다.
601년에 장안(長安)에 들어가서 도술(道術)을 연마한 뒤 의녕(義寧) 원년(元年ː617)에 도복(道服)을 입고, 노장(老莊)의 학문을 더욱 깊이 통달하니 따르는 도속(道俗)이 많았다.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618)에 다시 불교로 돌아와, 경사(京師)의 제법사(濟法寺)에서 살았다. 때에 태사(太史) 부혁(傅奕)이 11조의 항목을 들어 불법의 폐지를 주장하자. 『파사론(破邪論)』 1권을 지어 그 부당성을 논파한 결과, 부혁은 그 이치에 굴복하게 되었고, 고조(高祖)는 폐불(廢佛)의 뜻을 거두었다.
그 뒤에도 이중경(李仲卿)의 『배불론(排佛論)』을 상대로 『변정론(辯正論)』 8권을 지어 그의 주장을 물리쳤다. 정관(貞觀) 연중에 칙명(勅命)으로 용전사(龍田寺)에 머물면서 역경(譯經)의 필수(筆受)직을 맡아 참여하기도 하였다.
69세에 입적(入寂)하니, 도속(道俗)이 통곡하는 가운데 동산(東山)에 장사지냈다.
저서(著書)로는 『시부(詩賦)』ㆍ『찬송(讚頌)』ㆍ『비지(碑誌)』ㆍ『기전(記傳)』ㆍ『삼교계보(三敎系譜)』ㆍ『대승교법(大乘敎法)』 등 30여 권을 남겼다.
언종(彦悰)은 법림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법림별전(法琳別傳)』 3권을 지었는데, 그 안에 불법 수호[護法]에 관한 사적(事蹟)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5)
(334~416) 중국 안문누번(雁門樓煩)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가(賈)씨다.
13세부터 허창(許昌)과 낙양(洛陽)을 번갈아 유학(遊學)하여 널리 육경(六經)과 노장(老莊)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21세 때 아우 혜지(慧持)와 함께 태행산맥(太行山脈)의 항산사(恒山寺)로 갔다가 도안(道安)의 법석(法席)에서 반야경(般若經)의 강설을 듣고, 크게 깨달아서 동생과 함께 출가를 결심, 도안 문하에 들어갔다.
그 뒤 30년 동안 여산(廬山)에 살면서, 법정(法淨)ㆍ법령(法領)을 서역으로 보내어 범본(梵本)을 찾아오게 하고, 계빈국의 승가바제(僧伽婆提)를 청하여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ㆍ『삼법도론(三法度論)』을 다시 번역케 하였고, 또 담마류지(曇摩流支)를 청하여 『십송률(十誦律)』을 완전하게 번역케 하는 등 불교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83세에 입적하니 송대의 제왕(帝王)들은 변각대사(辯覺大師), 정각대사(正覺大師), 원오대사(圓悟大師), 등변정각대사(等徧正覺大師)의 시호를 내렸다.
저서는 『여산집(廬山集)』 10권, 『대지도론요략(大智度論要略)』 20권, 『문대승중심의십팔과(問大乘中深義十八科)』 3권, 『명보응론(明報應論)』 1권, 『석삼보론(釋三寶論)』 1권, 『변심식론(辯心識論)』 1권, 『사문단복론(沙門袒服論)』 1권, 『법성론(法性論)』 2권,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등을 남겼다.
16)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560~578)가 황제에 오른 시기를 말하며, 곧 이어 폐불정책(廢佛政策)을 단행하였기 때문에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17)
수 문제(隋文帝: 581~604)의 연호를 말한다.
18)
수 양제(隋煬帝: 604~617)의 연호(年號)를 말한다.
19)
중국 상고(上古)의 전설적 성인(聖人) 또는 황제(皇帝)로서, 소(巢)는 사람에게 집 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유소씨(有巢氏)를, 수(燧)는 처음으로 불을 피워 사람들에게 화식법(火食法)을 가르쳤다는 수인씨(燧人氏)를 말한다.
20)
중국 상고(上古)의 전설적 제왕(帝王)으로서, 희(羲)는 처음으로 백성에게 고기잡이, 사냥, 목축(牧畜)을 가르치고, 팔괘(八卦)를 만들었다는 복희(伏羲)를, 헌(軒)은 치우(蚩尤)의 난을 평정하고, 처음으로 의복, 배와 수레, 궁시(弓矢), 약초의 사용, 의술 등을 베풀었다는 황제(黃帝)를 말한다.
21)
당(唐)의 고조(高祖)ㆍ태종(太宗)ㆍ고종(高宗)을 말한다.
22)
변이지세(辯李之歲)를 떠들며[辯] 돌아다니는[李] 나이로 해석한다면,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정편(義淨篇)」에는 초츤지세(髫齔之歲)로 되어 있으니 7, 8세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23)
유락지년(遊洛之年)을 배움을 좇아[遊] 돌아다니는[洛] 나이로 해석한다면, 『송고승전』의 「의정편」에는 15세로 되어 있으니, 지학지년(志學之年)이 아닐까 생각된다.
24)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서 여름 3개월 동안 모친(母親) 마야부인(摩耶夫人)을 위하여 법회(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부처님이 편히 내려오실 수 있도록 제석천(帝釋天)이 놓은 금(金)ㆍ은(銀)ㆍ유리(琉璃)의 삼도의 보배계단[三道寶階]을 말한다.
25)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말한다.
26)
생황(笙簧), 퉁소 등 세악(細樂)을 말한다.
27)
6수의(銖衣)로서 매우 가볍고 엷은 옷을 말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는 “도리천의 옷 무게가 6수(銖)”라고 하였다.
28)
우전(于闐)은 나라 이름이다. 여기 우전삼장(于闐三藏)은 실차난타(實叉難陀)를 말한다.
29)
복례(復禮)는 2인으로 똑같이 중국 당대(唐代)의 고승이란 점, 번역의 일이 유사한 점, 생몰년(生沒年)의 미상인 점 때문에, 정확한 해당 인물을 참고하기 위하여 2인의 사적(事蹟)을 다 싣는다.
중국 당대(唐代)의 고승. 경조(京兆)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황보(皇甫)씨며, 생몰년대(生沒年代)는 미상(未詳)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머물면서 불전(佛典)과 함께 유학(儒學), 시가(詩歌)도 깊이 연구하여 일찍이 지바하라(地婆訶羅)ㆍ실차난타(實叉難陀)를 따라서 『대장엄경(大藏嚴經)』과 『화엄경(華嚴經)』을 번역하였다. 고종(高宗) 영융(永隆) 2년(681)에 태자문학(太子文學: 唐代의 經籍官吏) 권무이(權無二)가 불전(佛典)에 대한 10조의 질의[釋典稽疑]를 제출하자, 복례는 여기에 『십문변혹론(十門辯惑論)』 2권을 지어 답변하니, 권무이는 굴복하고 제자가 되었다.
저서는 『진망송(眞妄頌)』을 남겼다. 이 책은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의 관계를 논설한 것으로서, 당대의 고승들에게 의심을 들어 해답하여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것은 징관(澄觀)과 종밀(宗密)의 답변뿐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복례는 법장(法藏)의 설한 가명보살(假名菩薩)의 교의(敎義)에 반대, 글을 올려 법장을 강남(江南)으로 쫓아낼 것을 주청(奏請)하였다고 한다.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참조.
당대의 고승으로서 당시에 고결한 덕(德)과 행(行)으로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칙명(勅命)으로 현수법장(賢首法藏)의 역장(譯場)에 참여하여, 법장(法藏)ㆍ도성(道成)과 공동으로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入法界品)」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 외 사적(事蹟)과 생몰년대(生沒年代)는 미상(未詳)이다.
30)
중국 화엄종의 제3조(祖) 현수(賢首)를 말한다.
31)
5범취(犯聚), 5중죄(衆罪), 5종제(種制)라고도 하며,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의 계(戒)를 5과(科)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는 바라이(波羅夷)로서, 비구들과 함께 살지 못하는 가장 무거운 죄이다.
둘째는 승잔(僧殘)으로서, 참회하여 겨우 용서되는 죄이다.
셋째는 바일제(波逸提)로서, 지옥에 떨어지는 죄[捨墮와 墮의 2종이 있음]이다.
넷재는 바라제제사니(爬羅提提舍尼)로서, 참회하면 없어지는 죄이다.
다섯째는 돌길라(突吉羅)로서, 앞의 4종에 비해 가장 가벼운 죄를 말한다.
32)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의 계(戒)를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서, 바라이(波羅夷)ㆍ승잔(僧殘)ㆍ부정(不定)ㆍ사타(捨墮)ㆍ단제(單提)ㆍ제사니(提舍尼)ㆍ중학(衆學)ㆍ멸쟁(滅諍)을 말한다.
33)
한 비구가 탁발하던 중 구슬 만드는 집에 갔다가, 주인이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 거위가 귀중한 구슬을 삼켜버렸다. 주인이 비구를 의심하여 고발하였다. 잡혀간 비구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바른 대로 말하면 거위가 죽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면 망어죄를 짓게 되니,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고통을 참았다. 뒤에 거위의 배설물에서 구슬이 나오자 혐의를 벗었다는 고사(故事)이다.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11권 참조.
34)
강이나 바다를 건널 때 물에 뜨는 주머니로서, 이것을 의지하여 위험을 벗어난다는 뜻으로 계율(戒律)에 비유된다.
열반경(涅槃經)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금계(禁戒)를 지킴은 바다를 건널 때 뜨는 주머니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35)
계율을 지키는 바른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을 말한다.
『열반경(涅槃經)』 22권에
“비유하면 25리에 걸쳐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서, 국왕이 한 신하에게 기름이 가득 담긴 발우를 주며,
‘한 방울의 기름도 흘림이 없이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 속을 헤쳐가라. 만일 어기면 그대의 목숨은 없으리라’ 하고
칼을 든 신하를 딸려 보낸다면, 기름 발우를 든 신하는 중간에서 비록 다섯 가지 나쁜 욕망의 유혹을 받더라도, 목숨 때문에 방일하지 않으리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도 이와 같이 나고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바른 생각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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