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야경 제7회
만수실리분서(曼殊室利分序)
듣건대, 무릇 상(相)에 머물러도 분별하여 보는 것이 없으면, 진여(眞如)27)의 장엄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생각[慮]에 빠져도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이 없으면, 종지(種智)28)의 고요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진(二塵)에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때로 보는 것을 좇아서 엷어지기도 하고 진해지기도 하는 것이요, 오예(五翳)29)를 열어젖히고자 한다면 다시 의문이 일어나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空)의 도(道)를 신속하게 밝힌 것이니, 급고독원은 선게(旋憩)의 도량을 총괄했고, 당시 사람들을 차례로 선택하니, 묘길(妙吉)30)은 대양(對楊)31)의 중책에 올랐다.
이에 보지 않아도 홀연히 우러르게 되고, 듣지 않아도 밥을 먹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으니, 이미 닦지 않아도 닦는 것이 이루어지고, 또한 배우지 않아도 배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의 구별(區別)됨을 깨달아 형상화시키면, 보리(菩提)가 만 가지로 흐르는 것이요, 현상의 혼탁함을 끊으면, 열반(涅槃)이 하나의 모습[一相]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이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나면, 삶과 죽음[生死]도 구별하여 보지 않게 되고, 보리가 만 가지로 흐르면, 불법(佛法)이 아닌 것이 없게 되니, 빽빽이 얽혀 있는 현상[假名]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아도, 광활하게 뻥 뚫린 실상(實相)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제 여래법(如來法)이 없는 것이 분명하니, 하물며 보살법(菩薩法)은 있겠는가? 보살법(菩薩法)이 없으니, 이승법(二乘法)은 있겠으며, 이승법(二乘法)이 없으니, 하물며 범부법(凡夫法)은 있겠는가? 이렇듯 법(法)이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보리(菩提)가 있겠으며, 보리(菩提)가 없는데, 어찌 좇을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좇을 것이 없는데, 어찌 증득(證得)32)이 있다고 하며, 증득(證得)이 없는데, 어찌 깨달은 자[證者]는 있다고 하는가? 이 때문에 다양한 가르침은 있지만 하나로 관통하는 가르침은 없는 것이고, 뻥 뚫리면 고원해지고 막으면 국한되는 것이다.
호탕하게 여유가 있으나 게으름이 없고, 왕성하게 열심히 하나 정미롭지 않음과, 번뇌의 나쁜 기운과 자비의 구름이 나누어 피어나고 검림(劍林)33)이 옥호(玉毫)34)와 아름다움을 견줌이 모두 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어찌 이것을 바꾸겠는가?
살펴보건대, 그 언설[言路]을 빌려서는 말을 분명히 하고35),실상[眞宗]을 우러러서는 청허하여 욕심이 없으며, 활기차고 씩씩하게 구슬이 굴러가듯 하고, 시원하고 청아하게 옥경이 소리를 거두듯36) 하니, 불법의 거룩한 가르침[聖旨]을 일으켜 전해주는데, 이 문수반야보다 훌륭한 것이 없음이요,법왕(法王 : 부처님)의 체득을 바라는 것도,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깊은 의미를 탐구하여 비밀스럽게 감춰졌던 오묘한 깨달음의 문을 열고, 그 말씀들을 깊이 음미하여, 비밀스런 말씀의 자취를 포괄한다.
그리하여 말씀은 분명하게 하고 그 가르침은 빈틈없이 갖춰서 펴낸 것이, 바로 옛 『문수반야(文殊般若)』경이다. 비록 두 축으로 부(部)를 이루었을 지라도, 그 깨우침과 꾸짖음이 선명히 갖추어져, 칠중(七衆)37)이 귀의한 것과 비교해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27)
진여(眞如) : 우주 모든 만물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하고 무차별한 절대의 진리를 말한다. 다른 말로 진성(眞性)이라고도 한다.
28)
종지(種智) :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모습과 차별의 모습을 두루 아는 부처의 지혜를 말한다.
29)
오예(五翳) : 다섯 가지 가리는 것이란 뜻으로, 연기(煙)ㆍ구름(雲)ㆍ먼지(塵)ㆍ안개(霧)ㆍ아수라의 손을 말한다.
30)
묘길(妙吉) : 묘길상(妙吉祥)ㆍ묘덕(妙德)으로도 불리는 문수보살이다.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로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
31)
대양(對楊) : 대양(對揚)과 같은 뜻이다. 원래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백성에게 알린다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부처의 뜻을 받들어 가르침을 널리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다.
32)
증득(證得) : 올바른 지혜로써 진리를 확실히 깨달아 얻는 것이다.
33)
검림(劍林) : 뜨거운 철환(鐵丸)이 과일로 달리는 높이 24유순이나 되는 칼 숲이 있는 지옥이다.
34)
옥호(玉毫) : 부처님의 미간에 있는 흰털, 32상의 하나이다.
35)
편편(便便) : 『논어(論語)』「향당鄕黨」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공자가 마을에 있을 때는 진실하면서도 공손하여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종묘나 조정에서는 말을 분명하게 하되 오직 조심스러웠다”(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36)
옥진(玉振) : 『맹자(孟子)』「만장장구(萬章章句)」하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공자를 集大成한 분이라고 하는데, 집대성이란, 음악을 연주할 때 쇠종을 쳐서 소리가 퍼지게 하고, 곡조를 마무리할 때 옥경(玉磬)을 쳐서 소리를 거두어 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쇠종을 쳐서 소리가 퍼지게 하는 것은 연주의 시작을 의미하고, 옥경을 쳐서 소리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연주의 마무리를 의미하니, 연주를 시작하는 것은 지혜(智慧)에 속하는 일이고, 연주를 마무리하는 것은 성(聖)에 속하는 일이다.“(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也者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始條理也, 玉振之也者終條理也, 始條理者智之事也, 終條理者聖之事也)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