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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스님 비구・대처 회동서 대처측 비판 “쌀・장작 조계사에 많이 갖다줘” 김법련화보살 재산 몰수당할 위기 모면 스님들 뒷바라지에 온 힘 1955년 7월 대한불교서울신도회 창립 명예회장 최창운 보살 명예부회장 진무착행보살 등도 도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대부분의 일들에는 주연(主演)과 조연(助演)이 등장한다. 주연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연이 없으면 주연의 그런 행동은 나오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뛰어난 주연이라도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화운동도 마찬가지다. 주창자들이 선두고 서고 비구・비구니스님들이 뒤따랐지만, 신도들의 도움이 신도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우바이들의 보이지않는 헌신적인 노력은 정화운동 기간을 훨씬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정도다. 정화운동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여신도가 이정수(李禎洙)보살이다.
정화운동 직후인 1956년 보각(普覺. 98세)이란 법명을 받고 법주사 수정암에서 출가, 현재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산78번지에 위치한 통일정사에 주석하고 있다.
56년 법주사 수정암에서 보각이란 법명받고 출가
1904년 7월20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171번지에서 태어난 이정수보살은 1915년 서울 이화보통, 1919년 이화고등학교, 1923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각각 졸업한 엘리트. 1928년 보성고보 장석철 교무주임과 결혼, 불교로 개종한다. 이때 불교와 인연맺은 이정수보살은 1953~55년 불교부인회 회장을 역임하며 정화운동 뒷바라지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보각스님의 증언. “처음 조계사 터가 보성고보 옛 터여. 지금 고려대학, 그게 보성전문이라, 둘을 해 나가는데 경영난에 빠져 보성고보는 폐교하게 된 거라고. 폐교하게 될 때 나와 결혼햇던 이가 장석철 교무주임이야. 폐고 당시 장주임은 독지가가 교육사업을 하겠다면 무료로 기증하겠다고 그랬는데, 31본산 주지를 만나고 힘을 써, 일전 한 푼 안들이고 절터를 얻게됐지.” 정화운동과 관련된 스님의 계속된 증언을 더 들어보자. “내가 불교로 스물 네 살 적부터 전향하고서 불교를 신앙했지. 1954년 내가 남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아는 스님이 나를 찾아왔어. 우리 불교가 정화를 하게 돼 이제 살게 됐으니 빨리 가자고 그래. 그 스님을 따라 내려 온거라. 왔더니 지금 조계사 2층 방 하나를 4명의 스님이 써. 동산스님, 효봉스님, 금오스님, 청담스님 네 스님이 있었어. 날 데리고 온 그 스님이 날 소개했는데 ‘이 보살님 하나를 붙들면 몇 천명 붙드는 효용이라고, 최고학부를 나오고 신심도 장하니까, 스님네들이 잘 좀 붙들구서 우리 불교일 좀 하자구’ 그랬어. 그랬더니 네 스님이 ‘그러냐. 그러면 보살이 우리 일을 잘 협조해서 우리 불교일을 해 보자구’고 그래. ‘그러겄습니다’ 했지.
그랬는데 당시 대처승들이 옛날 나의 남편 제자들이여. 그래 내가 갓더니 내일 회의를 하는데 사모님도 참여하라구 하면서 집엘 못가게 해. 하룻밤 자구서 다음 날 회의에 참여를 하는데 비구승 이쪽에 앉구, 대처승 이쪽에 앉구 마주 앉았어. 대처승 총무원장이 비구승들 보고 얘기를 하는 거야. ‘니네는 파계승이니 나가라. 생각해보라, 부처님도 아름다운 야소다라 부인이 있고, 라후라라는 아들이 있었잖느냐’고 그러데. 비구스님들은 아무 소리도 안하는거야.”
비구 대처 회의서 대처승 비판
대처승이 비구승 보구 파계승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주목된다. 지금이야 비구가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일제 강점기나 정화운동 직전까지의 불교계에 만연된 분위기는 ‘대처가 당연하다’는 생각이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각스님의 이야기. “삽십분이 되고 사십분이 되도 아무 소리를 안해. 그래 그 때 내가 손들었지. 당시 신도는 나 하나였어. 대처승 총무원장이 날 소개했어. ‘저 보살님은 여자 신도지만, 참 최고학부도 나오고 신심도 있다’구 한침을 나를 칭찬하는 거여. 내가 일어서서 ‘스님네들 회의하는데 신도로써 발언한다는 게 외람합니다’ 그랬더니 ‘말을 해보라’는 거여. ‘부처님이 되신 석가모니께서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다 하지만, 그 아내 아들을 다 버리고 설산에 수도한 다음 독신으로 지냈지. 아들 아내 다 데리고 부처님 된 것아니다. 성불하신 다음에야 부처님 이라고 우리가 부르게 딘 것 아니냐.’하니깐 비구스님들은 박수를 치고, 소개한 이는 멍하니 보고 있는 거야.
그 다음에는 사업가들을 찾아가 쌀을 몇 가마니씩, 장작을 사용하던 때라, 장작도 몇 마치씩 조계사에 갖다 놓았지. 그래서 스님들 식량을 했어. 지금은 그 스님들 다 입적했어. 월하스님이 나를 알거여. 예전 스님은 다 나를 알지.” 쌀과 장작을 조계사로 날랐다는 부분이 관심을 끈다. 정화운동 주역들이 54년 11월5일 선학원에서 조계사로 들어왔지만, 당시 조계사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난방 시설 또한 턱없이 부실 했을 것이다. 보각스님의 증언에서 그것이 뚜렷하게 읽혀진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어머니를 뵈러 시골에 다녀와 조계사에 와보니 벚당에 일곱 군데 빨간 딱지가 붙었어. 20명 스님은 거적을 깔고 쫓겨 나와 앉아있어. 그때 당시 문화국장하던 이가 스님네들 단식하는 것 갖고 몹쓸 말을 해 신문에 나고 했는데, 우리들이 거길 찾아갔지. 신도들 300여명을 복도부터 계단까지 주욱 세워놓고, 내가 의자를 치켜들고 ‘문화국장 이놈 우리가 너를 죽이러 왔다’하면 뒤에서 신도들이 ‘문화국장 죽이자’ 함성을질러. 그놈의 얼굴이 새파래져 세 시간을 달래. 그러더니 조계사로 큰 트럭 2대가 오고 높은 사람들이 다 왔어. 단식하던 스님들이 죄 쓰러져 호송을 했지. 기력이 있는 스님들을 방으로 모셔 나무젖가락으로 죽을 드시게 했어. 우리들은 ‘부처님은 물건이 아니다, 신앙의 대상이다’며 법당으로 가 차압딱지를 모두 떼어버리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했어. 모두들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불렀지. 그런 가정을 통해 1955년 8월 전국승니대회가 잘 치뤄진거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난 김법련화보살
이정수보살 아니 보각스님과 더불어 당시 정화운동을 측면지원한 대표적인 우바이가 또 한명 있다. 법련화 김부전(1920~1973) 보살이 바로 그다. 일제 강점 당시 형성된 왜색불교를 씻어내고, 청정승단으로의 회복을 기원하며 비구승들이 벌인 정화운동(1954~1969) 당시 보시와 희사로 스님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법련화 보살. 법련화 보살은 일제가 이 땅에서 한창 위세를 떨치던 1920년 11월 17일, 황해도 장연군 낙도면 지경리에서 태어났다. 나름대로 포부와 계획을 갖고 있던 법련화가 불교와 인연맺은 것은 1940년 21세 되던 해다.
당시 금강산 정양사에서 큰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법련화는 정양사를 찾았다. 법회에서 법련화는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일체상 즉명제불(應無所住 而生其心 離一切相 卽名諸佛.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생긴다. 모든 상(相)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부처다.)”이라는 법문을 듣고 크게 감동한다. 무엇인가 뚜렷하게 가슴에 와닿는 기분이었다. “얽매임 없는 마음을 내고, 아집 등 집착에서 벗아난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금강경 말씀은 ‘일제강점’과 ‘여성’ 만든 ‘제한’ 등으로 힘들어하던 법련화에게 새로운 안목을 준 것이다. 걸림없이 사는 길이 있다는 희소식에 다름아니었다. 크게 발심한 법련화는 김적음 스님께 보살계를 받고 삼보에 귀의하게 된다. 수계 당시 법련화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지침이 이미 서 있었다. 출가해 일대사인연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법련화가 택한 길은 재가 청신녀의 삶이었다.
불교발전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돼야지 하는 생각을 마옴 속에 굳게 다졌다. 짧다면 짧은 생애 동안 어디에도 집착함 없이,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법련화가 낼 수 있었던 것은, 불교에 입문할 당시의 초심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과 함께 법련화의 삶도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해방 즈음 법련화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각고의 노력 끝에 법련화보살은 1950년대 중반 서울 국제극장을 운영하는 사장에까지 오른다. 그즈음 법련화보살은 한국불교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정화운동에 법련화는 신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다. 재산을 몰수당할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계사에서 정화운동 중인 스님들의 뒷바라지에 온 힘을 쏟았다. 소달구지에 쌀을 가득 싣고 와 스님들게 직접 공양을 올리는 등 정화운동 성취에 남다른 헌신을 했다.
선학원서 효봉스님 친견
정화운동 성취를위해 효봉스님도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있었다. 스님이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찾아오는 스님과 재가불자들로 선학원은 만원을 이루었다. 1년 동안 선학원에 주석하며 승단 정화불사에 전념하셨던 효봉대종사와의 만남은 법련화를 더욱 발심하게 만들었다. 흔들림 없는 효봉스님의 구도정신에 감화된 것. 수행자는 될 수 있는 한 가난하여야 하며, 물건을 적게 가져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스님의 무소유의 가르침은 그녀에게 환희심을 주었고, 불자로서 가야 할 길을 새롭게 다짐하는 동기를 마련해 주었다.
법련화는 이후 재산을 불교와 사회를 위한 일에 나눈다는 원력을 세우고 적극적인 신행활동을 전개했다. 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정화 이후 60・61년 화동종회(和同宗會)가 결성되자, 스님들 봉양을 아낌없이 했다. 선학원에 마야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보각스님・법련화보살 이외에도 많은 우바이들이 정화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955년 7월3일 설립된 대한불교 서울신도회 명예회장 최창운 보살, 명예부회장 진무착행 보살, 회장 양무구행 보살 등이 그들이다. 아낌없이 보시하고 희사한 그들 대부분은 이미 ‘피안’으로 갔지만, 그들의 삶은 ‘진리의 연꽃’이 돼 지금도 한국불교를 보이지 않게 호위하고 있다. <불교신문 기획연재/불교정화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