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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서울역~남산~광희문~혜화문~숙정문~창의문~숭례문~서울역 걷기
○ 일시 : 2026. 6. 21.(일)
○ 구간 : 18.6km(서울특별시)
- 서울역~남산~광희문~흥인지문~혜화문~숙정문~창의문~숭례문~서울역
○ 실거리 : 오룩스맵 기록 23.26km
○ 행정구역: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 회현동, 예장동, 장충동, 신당동, 정동, 서소문동, 소공동, 용산구 용산동 , 종로구
창신동, 충신동, 혜화동, 명륜동, 부암동, 청운동,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무악동, 행촌동, 송원동, 평동, 성북구 삼선동, 성북동
○ 인원 : 2명(송주봉님, 사르리)
○ 소요시간 : 08시간 04분(06시 56분~13시 01분)
○ 난이도 : ★
○ 감상평 : ★★★★(한양도성, 북악산, 인왕산, 역사지역 감상)
○ 추천시기 : 봄, 가을(도심지 꽃 및 단풍 구경)
○ 날 씨 : 맑음, 24.5℃~29.6℃(서울특별시 중구기준, 기상청 제공)
○ 교통편 : 왕복 매교역(수인분당선)→수원역→서울역(1시간 17분 소요)
○ 한양도성 개념도
○ 오룩스맵 기록
▶ 걸은 통계
▶ 걸은 궤적
▶ 걸은 고도
○ 길 위의 풍경 및 이야기
오늘 걸을 길은 한양도성이다. 한향도성은 이성계가 1394년 조선의 수도를 개성에 한양으로 천도 후 정도전 등이 도성의 기본 계획과 성곽 건설에 관여를 했으며 1396년부터 본격적으로 축조되었다. 도성의 전체 둘레는 약 18.6km였으며,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연결하여 수도 한양을 감쌌고 있으며, 성문은 크게 4대문과 4소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19세기 말 어느 선비가 남긴 순성기행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송철호 학예연구사님의 "조선 선비의 한양 산책"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당시 어느 선비가 걸으면서 느껴던 감정과 지금에 내가 걷고 있는 감정을 비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4구간으로 나누워져 있다. 백악구간은 창의문~혜화문, 낙산구간은 혜화문~흥인지문, 남산(목멱산) 구간은 장충체육관~백범광장, 마지막 인왕구간은 돈의문 터~창의문까지이다.
오늘은 서울역에서 시작해서 남산, 광희문, 혜화문, 숙정문, 창의문 , 숭례문을 돌아서 다시 서울역까지 걸을 예정이다.
| 조선 선비의 한양 산책, <순성기행> 조선 초 한양 천도와 함께 내사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는 한양도성이 축조되었다. 한양을 지키는 장졸들이 도성을 따라 돌며 방비하고 경계하는 일을 순성(巡城)이라고 하였는데, 조선 후기가 되면 상춘객들이 성벽을 따라 두루 돌며 경치를 구경하는 일도 순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순성에 나선 사람들은 도성 안팎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며 시나 문장으로 감회를 남기곤 하였다. 이제 살펴볼 유물도 19세기 말 어느 선비가 순성을 하고 남긴 기행문이다. 순성기행의 작성자 이 문서의 명칭은 순성기행(巡城紀行)이다. 누가 언제 작성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략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글쓴이는 두세 명의 일행과 함께 기묘년 늦봄 윤달 29일에 순성을 다녀왔다. 이때가 한양 천도로부터 약 500년 후였다는 언급을 참고하면 그가 순성한 날을 1879년(고종 16) 윤3월 29일로 추정할 수 있다. 글쓴이와 일행은 그해 진사시에 응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879년은 3년마다 과거가 시행되는 식년에 해당하고, 진사시는 3월 12일까지 진행되었으므로 시기가 합치한다. 서울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 순성에 나섰다고 하는 글쓴이의 말을 고려하면 과거 응시를 위해 서울에 올라 온 지방 유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진사시 합격 사실을 확인하고 5월에 임금 앞에서 거행될 축하연을 기다리던 중 순성을 하였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과(小科)인 진사시 합격은 관직 진출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당시 진사의 위상도 예전같지 않았기에 다음과 같이 자조하기도 하였다. 진사과는 당나라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합격자는) ‘흰옷의 재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 우리나라에서야 한낱 누추한 차림의 선비에 불과하니, 어디 쓰일 데가 있겠는가? 순성기행의 구성 순성기행은 글쓴이가 직접 쓴 한 장의 기행문 초고로서 글자를 삭제하거나 추가하는 등 수정한 흔적이 많다. 완전히 다듬지 못한 글이기에 문장의 흐름이나 순서를 파악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말 순성에 나선 선비의 눈을 통해 당시 한양도성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글은 짧은 서론과 기행문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는 한양의 유래와 순성을 하게 된 연유를 썼고, 본문에는 흥인지문으로부터 창의문과 인왕산까지 순성 여정을 기록하였다. 본문의 글자 사이에 삽입한 글은 우리나라의 위치와 서울을 수도로 정한 내력, 국가 재정 문제를 논술한 것으로서 글쓴이의 창작은 아니고, 《성호사설》에 있는 글을 일부 옮긴 것이다. 글쓴이는 흥인지문에서 낙산, 혜화문, 숙정문, 북악산, 창의문의 순서로 순성길을 돌았다. 도성을 일주하고 다시 흥인지문으로 돌아왔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아쉽게도 문서는 중간 이후 잘려나가 창의문 다음 내용이 남아있지 않다. 전체 순성길 중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라고 할 수 있다. 송동의 앵두골 선비 일행은 29일 새벽에 순성길을 나섰다. 마침 보슬비가 지나가 먼지도 날리지 않고 길 떠나기 좋은 아침이었다. 첫 번째 목적지인 흥인지문에 도착하여 성안의 훈련도감과 성 밖의 왕심평(枉尋坪)을 보았다. 왕심평은 곧 왕십리를 말하는데, 무학대사가 한양을 천도할 때 이곳으로 잘못 찾아왔기에 이름이 왕심평이 되었다는 일화를 전했다. 흥인지문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좌룡정 활터를 지나, 타락산(낙산)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창덕궁에 임금님이 거처하고 있음을 상기하고, 다시 경모궁과 성균관을 지나 혜화문 앵두골에서 쉬었다. 이곳은 송시열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거주한 동네이기에 흔히 송동(宋洞)이라고 불렸는데, 특히 앵두꽃이 유명해서 봄이면 구경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지금의 벚꽃처럼 조선시대 앵두꽃은 대표적인 봄꽃의 하나였다. 순성을 하던 이들도 혹여 아직 지지 않은 앵두꽃이 남아서였는지, 송동의 앵두골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숙정문의 돌부처 ![]() 숙정문에 이르렀다. 문이 닫혀있고 양문에 시왕(十王)과 여러 보살들이 그려져 있다. 석불은 한 자 남짓 되는 크기인데 감실에 앉아있다. 숙정문은 평소 사용하지 않는 문이었기에 닫혀있었는데, 시왕과 보살 같은 불화가 그려져 있다는 기록이 낯설기도 하다. 더구나 감실과 석불이라니 이 글이 묘사하는 것이 숙정문인지 암자인지 혼란스럽다. 그런데 숙정문에 석불이 있었다는 기록은 순성기행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말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이만도(李晩燾, 1842~1910)가 쓴 다음의 시를 보자. 염려 깊어 문에 누각 안 세웠거니 이 문 바로 북한산 가는 문이네. 천년 동안 대문 열지 않으려고 하니 돌부처가 문 지키고 앉아있구나 (이만도의 시 ‘숙정문’, 《향산집》 ) 이 시는 이만도가 1870년 즈음 관직생활을 할 때 숙정문에서 기청제(장마가 그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며 느낀 소감을 시로 쓴 것이다. 마침 순성기행과 작성 시기가 비슷하다. 문에 누각이 없었다는 것과 오랫동안 문이 닫혀있었다는 것을 보면 정확히 숙정문을 묘사한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도 돌부처가 문을 지키고 앉아 있다고 표현하였다. 순성기행을 보지 않고 이 시를 먼저 보았다면 그저 시적 상상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외에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 쓴 글에도 숙정문의 신상(神像)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숙청문의 신상 [숙청문은 도성의 북문인데 좋지 않게 여겨 닫아두고 열지 않았다. 만약 이 문을 열면 성안에 남녀 간의 문란한 변괴가 많아지므로 굳게 닫고 사용하지 않았다 한다. 문기둥에 여러 신상들을 걸어두었다. 세초에 마을의 여인네들이 많이 모여 복을 빈다.] (이규경의 글 ‘화동음사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 숙정문(숙청문)에 전해지는 속설과 민간 신앙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문기둥에 여러 신상들을 걸어놓고 여인들이 와서 복을 빌었다고 하였다. 불상이라는 표현은 없으나 신상이 숙정문에 걸려 있다고 하였으니, 석불이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현재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된 것으로 누각을 새로 얹고 보수하여 옛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100여 년 전 순성기행의 선비가 보았던 숙정문의 돌부처는 어디로 갔을까? 불타버린 경복궁 일행은 숙정문 성 밖으로 나가 복숭아나무가 많은 계곡길을 지났다. 시냇가는 빨래하는 사람, 한가로이 발 씻는 사람, 물 긷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멀리서 은은하게 퍼져오는 청연암 종소리를 들으며 북악산에 올랐다. 도성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에 도착하자, 미리 하인을 보내 준비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일행과 함께 술 한 잔을 마시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북쪽으로 북한산 백운대가 보였고, 서쪽으로 한강 포구도 언뜻 보였다. 이어 산 아래를 굽어보니 광화문 밖 넓은 대로에 행인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반듯하게 지어진 경복궁에는 경회루와 근정전이 우뚝 솟아있었다. (경복궁은) 임진년에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지금 전하께서 즉위하시고 중건하였다. 병자년(1876)에 화재가 일어났으니 경회루와 근정전만 홀로 우뚝하다. 고종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선대원군의 의지로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그러나 중건 이후 경복궁에서는 유난히도 화재가 자주 발생했는데, 특히 1876년(고종 13)의 화재는 매우 큰 규모였다. 11월 4일 교태전에서 시작된 불은 내전(內殿) 대부분의 영역으로 번져 교태전과 강녕전을 비롯한 십여 개의 전각, 830여 칸을 태워버렸다. 전각뿐 아니라 역대 왕들의 어필과 어보(御寶)까지 대부분 소실된 큰 화재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불에 탄 전각들은 거의 10년 후에야 복구할 수 있었다. 화재가 일어난 지 3년 후 북악산에 오른 글쓴이에게 유독 경회루와 근정전이 눈에 띄었다. 근정전과 경회루가 경복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들이기도 하지만, 화재로 사라진 주변의 많은 전각들이 여전히 복구되지 않았기에 경회루와 근정전만 홀로 솟은 듯 보였을 것이다. 끝나지 않은 순성길 일행은 북악산을 내려와 창의문에서 점심을 먹고 인왕산으로 향했다. 인왕산의 성벽은 매우 가파르고 험준한 지형에 세워져있었다. 성벽을 따라 오르며 호랑이가 넘어다닌다는 고개를 거쳐 중종과 단경왕후의 전설이 남아있는 치마바위에 이르렀다. 이들의 여정은 이후 목멱산과 흥인지문까지 이어졌겠지만, 순성기행에 남은 기록은 여기까지다. 선비들의 순성으로부터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산은 여전하고, 한양도성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또 많은 것이 변했다. 왕조의 수도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성벽길은 옛사람의 산책로가 되었다가, 일부는 일제에 의해 무너져내렸고, 일부는 엄혹한 시절 철조망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다행히 다시 열린 도성길은 이제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빌딩에 가로막힌 서울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꽃피는 날 순성길에 나서보는 것도 좋겠다. <작성자 : 송철호 학예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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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06시 49분]
서울역 광장을 걸었던 기억이 가물 거린다. 역 안에서 환승해서 이동을 했어도 밖으로 나온적이 언제 였는지 가물 거리는 것이 아니라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망각의 시간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해 진다. 역이라는 곳은 떠나고 오는 사람들 그리고 이별과 만남이 이루워지는 장소이다. 역은 머물러 있는 장소가 아닌데 역주변에서 각자의 잃어 버린 슬픈 세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서울역에서 고가도로를 재이용한 서울로7017를 따라 서울역앞 도로를 건너려고 했는데 TV에서 많이 보던 지하차도를 따라 낯선 풍경을 보면서 걷기로 한다.
| 서울역은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철도 관문으로, 경부선·경의선 등의 기점이자 KTX와 수도권 전철이 모이는 중추 역을 뜻합니다. 역명은 시대에 따라 남대문역 → 경성역 → 서울역으로 바뀌어 왔고, 현재의 ‘서울역’ 명칭은 1947년 서울 지명을 반영해 정착한 것으로 정리됩니다. 현재 사용 중인 서울역 민자역사(2003년 개장)와 별개로, 과거 역사 건물은 사적 제284호로 보존되어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고가도로를 개조해서 리모델링한 서울로7017 공원 풍경이다.
선답자 트랙은 서울로타워방향 도로로 진행을 했는데 현재 건축공사 가림막으로 진행을 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남대문교회로 넘어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막아 놓아서 다시 서울로 타워 방향으로 내려와서 남산소월타워 방향으로 진행을 합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 왼쪽으로 복원된 성벽을 따라 진행을 합니다.
도로변 공원에 양주동선생 산 넘고 물 건너 석책 모습이다.
이곳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공사중으로 돌아서 올라온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복원된 도성의 모습이다.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다.
백범 김구선생 동상이다.
어렸을 때 어깨동무 월간지 표지에 많이 나오던 어린이회관 모습이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모습이다.
민족정기의 전당 표지석이다.
대한국인 안중근의사 동상이다.
남산타워가 모습을 드러낸다.
점점가까워 진다.
남산에 있는 봉돈 모습이다.
사랑의 자물쇠 풍경이다.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워지기를 빌어 본다.
세월이 흘러도 바라는 소원은 계속 진행되어지기를 바란다.
남산 팔각정 풍경이다. 남산은 태어나서 처음 와본다.
시야를 가리는 가스가 도심의 미관을 저해하고 있다.
올라온 곳에서 반대 방향으로 내려간다.
도로를 벗어나 성벽길을 따라 걷는다.
이곳은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사람이 적게 올라오는 모양이다.
참나리꽃 모양이다.
소나무 아래 중나리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1950년 4월 29일에 설립된 아시아 최초 국립 극장이다.
동국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 간다.
어렸을 때 복싱경기나 레슬링 경기 등 많은 경기가 있던 장충체육관 앞을 지나간다.
길고양이 급식소라고 한다.
광희문 앞을 지나간다.
| 광희문(光熙門)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입니다.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습니다. [출처 : Visit Seoul] |
동대문 DDP 풍경이다.
| 서울특별시 중구의 전시장 및 쇼핑몰. 영국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라고 한다. 2007년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 이후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개발 정책의 일원으로 세워지게 되었으며 2008년에 착공하여 6년 만인 2014년 3월에 개장하였다. 현재 운영 기관은 서울시 출연기관인 서울디자인재단이며 2009년에 먼저 개장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더불어 총 관리를 하고 있다. [출처 : 나무위키] |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곡선이 아름다운 건물 모습이다.
곳곳에 공원으로 휴식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풍경이다.
동대문 DDP 주변을 한바퀴 돌아 나간다.
흥인지문 모습이다.
흥인지문을 지나 창신동방향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서 뒤돌아본 주변 풍경이다.
성벽을 따라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 간다.
성곽을 따라 카페 및 상점들이 조성되어 있다.
앞으로 가야할 북악산과 인왕산이 기다리고 있다.
복원된 성벽은 다양한 크기의 석재가 사용되었다.
충신동과 동숭동을 넘어 혜화문에 도착을 한다.
| 혜화문(惠化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소문이다.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다. 동소문(東小門)이라는 속칭이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1592년 문루가 불타 1744년에 재건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4년 원래 위치에서 떨어진곳에 복원했다. [출처 : 위키백과] |
성북동 성벽을 따라 걷는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인근 식당에서 냉면과 만두로 점심식사를 한다. 식사를 한 장소부터 북악산 권역으로 들어서 있다.
와룡공원을 지나간다.
공원주변 안내도이다.
북악스카이웨이 아래 단독주택단지 풍경이다.
가야할 북악산 정상 모습이다.
| 숙정문(肅靖門)은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북청문 등으로도 불렸다. 후에 맑을 청(淸)에서 삼수변을 설 립(立) 자로 대체한 꾀할 정(靖)으로 표기가 바뀌어 숙정문(肅靖門)으로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청문이라는 표현은 1703년을 마지막으로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
북악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 북악산(北岳山)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경복궁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낙산, 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한국의 화강암 산으로 기반암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 화강암이며, 높이는 약 342 m이다. [출처 : 위키백과] |
북악산에서 창의문 방향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창의문에 도착한다.
|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과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1] 왕들이 경복궁에 들어갈 때 쓰는 문이다. 어느 한 승려가 선조에게 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마구 왕래하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자 창의문을 폐쇄해버렸다. 그러나 이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고 도성에 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후에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출처 : 위키백과] |
창의문에서 인왕산을 오르기 위하여 성벽 계단을 따라 힘겹게 올라 간다. 더위가 장난이 아니다.
인왕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청와대 모습이다.
북악산 풍경이다.
인왕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 인왕산은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아 다양한 이름이 붙었다.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선바위와 모자를 닮은 모자바위, 돼지를 닮은 돼지바위 등이 있으며, 인왕산 정상에는 삿갓 모양의 삿갓바위가 있다. 정상에 오르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인왕산과 함께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내사산인 낙산, 남산, 백악산이 펼쳐진다. 정상 아래편에 겸재의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매바위와 치마바위가 장관을 이룬다. 인왕산의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의 인왕산도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인왕산에는 태조, 무학대사의 기도 터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남아 있다.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코스는 사직터널을 기점으로 성곽 터와 정상을 지나 부암동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청와대 앞길과 연결되어 있어 여유가 된다면 팔판로, 효자로, 경복궁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다. |
성벽 위를 덮어던 옥개석 모습이다.
인왕사방향으로 내려가는 성곽 풍경이다.
성벽을 따라 계속 걷는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등산객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성벽아래에 원추리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양도성 도의문 터 750m 표지판이 있는 곳이다.
서대문교회 앞을 지나간다.
돈의문이 있던 정동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 돈의문(敦義門) '돈의문(敦義門)' 뜻은 '의(義)를 두텁게 하는(敦) 문(門)'이다. '의(義)' 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4] 돈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두텁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흔히 불리는 이명(異名)은 서대문(西大門)으로,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란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본래 새문(신문, 新門)이라 불렸으나, 근대를 거치며 서대문으로 정착되었다. 남대문, 동대문이 조선시대에도 민간에서 흔히 부르던 명칭인 것과는 대조된다 조선 한양도성의 사대문(四大門) 중 서문(西門)이었던 건축물이다. 조선 시대에 한성부에서 평안도 의주부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 의주로와 강화도로 가는 간선도로 강화로의 시작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고 조선 외교사절이 중국으로 갈 때 이용하는 중요한 문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에 전차 선로를 놓는다는 명분으로 철거되어 소실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나무위키] |
보호수로 1976년에 지정된 수령이 500년 된 회화나무이다.
프랑스공사터 앞을 지나간다.
운치있는 정동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이화여자고등학교 앞을 지나간다.
배재학당과 관련 기미독립선언서 등사 장면 동상이다.
진주회관 앞에서 웨이팅을 하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다.
부영태평빌딩 앞 덕유산 홍보 사진이다.
숭례문에 도착을 한다.
| 숭례문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국가유산청 덕수궁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그러나 아쉽게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방화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2010년 2월에 숭례문복구공사를 시작한 이래 2013년에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숭례문이 아닌가 싶다. 숭례문에서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오면서 한양도성 순성길 걷기를 마친다. 서울구경이라는 말이 있다. 걸어서 한양도성 순성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서울에 대한 현재와 과거를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는 시간이었다. 서울역에서 시작한 발걸음은 노숙자 밀집 거주 지역인 지하도를 지나면서 삶의 무게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고기도로를 리모델링해서 공원으로 조성한 "서울로7017"를 먼 발치에서 보면서 남산으로 오르면서 백범 김구선생 광장, 안중근의사 기념관 등을 지나 처음으로 가보는 남산 정상에 도착을 하고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어릴적 문화뉴스 많이 나오던 국립극장 건물 실물도 처음으로 보고 동국대학교 앞을 스쳐지나 우리나라 실내 스포츠문화의 메카인 장충체육관도 볼 수 있었다. 장충동을 지나 광희문을 만나고 이어서 동대문 DDP,문화역사공원 등을 보고 청계천 오간수교를 건너서 흥인지문 실물을 영접을 한다.창신동 성곽을 따라 걸어 낙산을 지나 혜화문 아래서 단청을 바라본다. 혜화동과 성북동 경계의 성곽을 따라 걸어가다 점심식사로 냉면과 만두를 먹는다. 여기부터 등산로를 따라 와룡공원을 올라서 계속 이어지는 경사로를 따라 올라서면 숙정문을 지나 북악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잠시 주변을 감상 후 창의문으로 내려서서 다시 인왕산을 지키고 있는 성곽을 따라 오른다. 인왕산 정상에서 한참을 쉬었다 간다.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 간다.돈화문터가 있는 정동사거리를 지나 정동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가을에 걸으면 예쁜길일 것 같다. 상공회의소 방향으로 나오면 숭례문에 다다른다. 지난 화마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시는 문화재 테러가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숭례문을 지나 출발지인 서울역으로 걷는다. 한양도성 순성길을 걷는 것은 서울 주변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등을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서울에 와서 이동 시에는 대부분 전철을 이용하기 때문에 도심지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처음으로 와본 곳이 대부분으로 유익한 시간 이었던 것 같다. 아쉬운 것은 사전에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왔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한양도성 순성길을 걸어야 겠다. 서울역에서 송주봉형님은 전철을 타고 안양으로 나는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오면서 다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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