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일 목사님(50. 오사카 일본사랑교회)이 20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불렀던 복음성가입니다.
실명이나 다름없는 장애자이지만 겹겹의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1996년에 일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복음의 척박한 땅 일본에 교회를 개척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와 처음 만난 때는 1987년.
그가 밀알선교단광주지부를 창립하여 단장으로, 나는 이사장으로 동역할 때였습니다.
교회들이 선교단체들을 힘 있게 돕질 못하던 때여서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장애우들을 잘 섬겼습니다.
김 목사님의 간증집(나비는 은혜의 꿀을 먹는다-한국밀알선교단)을 읽고
그의 눈물겨운 과거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역사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김재일은 불행한 아이였습니다.
3남4녀 7남매 모두가 시각장애자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두 형과 여동생은 앞을 못 보는 맹인이고 넷은 심한 약시였습니다.
유전이라 하지만 그것은 천형이요 벗어버릴 수 없는 저주의 올무였습니다.
재일이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왼쪽 눈이 안보였습니다.
수술도 교정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책을 눈 가까이 5센티미터 거리로 해야 겨우 볼 수 있었습니다. 칠판 글씨는 전혀 못 보았고 사람 얼굴도 1-2미터 거리라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7남매 모두가 손가락질과 놀림을 받았습니다.
‘눈깔보’. 아이들이 재일이를 놀리는 별명이었습니다.
어리지만 때로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돌멩이를 들고 놀리는 아이의 집까지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저놈이 나를 눈깔보라고 놀리고 도망갔어요. 나오라고 해요! 가만 안 둘거야...” 하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자녀들 보는 것을 마음아파하며 술에 취해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년이 되어서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이나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뻗쳐 왔습니다.
안마사로 가난하게 사는 큰 형이 ‘너도 교회나 나가봐라’ 고 권했습니다. 아내가 점쟁이인 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싫었습니다.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신이 어디 있어. 그런 나쁜 신은 필요 없어. 내가 전생에 뭘 잘못했어? 신은 없어...’ 신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신을 믿어요? 다 떨어진 고무신을 믿지.’ 하며 형의 권고를 물리쳤습니다. 그는 캄캄한 터널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끄셨습니다.
교회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용기를 내서 찾아간 맹인교회. 그렇지만 실망했습니다. 더듬거리며 점자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는 맹인들의 모습이 불쌍하고, 저들 틈에 끼어 있을 자신이 더욱 불쌍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을 만나 교제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이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성령의 검이었습니다.
‘사랑’이란 말이 좌절과 원망과 분노의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던 재일이에게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 어떤 분이 계심을 느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밤늦게까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진리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신이십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 나는 나 같은 장애우들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재일이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의 새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자신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보기 흉한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것으로 탄생되는 것이 나비이다.
나는 죽는 그 날까지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다.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이 꽃 저 꽃에 생명의 꽃가루, 은혜의 꽃가루를 옮기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저주의 올무를 벗어버린 새로운 피조물.
진리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찬송은 이렇게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