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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 제1권
1. 관연품(觀緣品) ①
널리 모든 분별을 끊고
모든 희론(戱論)을 없애시며
유근(有根)을 잘 제거하기 위하여
진실법을 훌륭히 설하시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경지를
문자로 훌륭하게 안립(安立)하시어
나쁜 지혜와 그릇된 마음을 깨뜨리시니,
이 까닭으로 머리 숙여 예경합니다. 1)
[釋] 이들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나의 스승(용수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 중에서 자기가 깨달은 대로 진리를 자세히 증험하고 참된 뜻을 열어 나타냈으니, 모든 삿된 지혜의 그물을 끊기 위함이다. 저 그릇된 견해를 가진 사람은 비록 범행(梵行)을 닦지만 미혹하기 때문에 모두 선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제 그릇된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도(道)를 깨닫게 하려고 성스런 가르침에 의거해 이 『중론(中論)』을 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논에서 말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른바 바가바(婆伽婆)께서는 무명중생(無明衆生)이 세간의 생기와 소멸[起滅], 단멸과 상주[斷常], 같은 것과 다른 것[一異], 오는 것과 가는 것[來去] 등 그물같이 빽빽한 모든 희론의 숲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제일의 자비를 일으키시고, 용맹의 지혜를 내셨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몸과 목숨을 버리고, 싫증내는 마음 없이 무량한 복덕과 지혜의 짐을 짊어지시며, 반야 경계의 바다를 꿰뚫고 모든 희론의 그물을 끊어 다른 연(緣)에 의지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모든 법의 진실한 감로를 얻으셨다.
그리하여 저 취[趣]2)ㆍ수명[壽]ㆍ신분[分齊]ㆍ성(性)ㆍ처(處)3)ㆍ시간 등에서 중생을 섭수하여 이익케 하시며, 모든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및 외도(外道)와 함께 하지 않으시고, 오직 제일승(第一乘)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위해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에 의거해 ‘생기하는 것이 아닌[不起]’ 등의 모든 언어를 시설하셨다.
이 연기의 진실한 가르침 가운데 가장 수승하다.
우리의 아사리[성사(聖師)] 용수보살도 또한 ‘생기하는 것도 아닌’ 등의 문구에서 여래의 여실한 도리를 열어 보이고 여실한 깨달음을 얻어 지극한 용맹을 내어 통달한 대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까닭에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또 자비의 물로 마음을 적셔 이미 깨달은 것을 증험하여 세간의 중생들로 하여금 자기가 이미 깨달은 것을 이해하게 하려고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생기는 것도 아니며,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네.
연기는 희론을 그치게 하며
설한 것이 희론을 잘 없애기 때문에
모든 설법자 가운데 최상인
부처님께 예경합니다.
[釋] 이 게송4)의 순서대로 직접 풀이하여 이 논의 뜻을 해석하겠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게송의 뜻을 말한다.
파괴되는 까닭에 소멸[滅]이라 하고, 출생하는 까닭에 생기[起]라 하며,
상속하여 죽는 까닭에 단멸[斷]이라 하고, 모든 시간에 머무는 까닭에 상주[常]라 하며,
차별되지 않고 다른 뜻이 없는 까닭에 같은 것[一]이라 하고, 차별되고 다른 뜻이 있는 까닭에 다른 것[種種]이라 하며,
이곳으로 온다는 뜻에서 오는 것[來]이라 하고, 저기로 간다는 뜻에서 가는 작용이라 한다.
이 소멸이 없으므로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 가는 것이 없으므로 가는 것도 아니다.
생기와 소멸, 같은 것과 다른 것은 제일의제(第一義諦)에서 끊어지고, 저 단멸과 상주는 세속제에서 끊기며, 가는 것과 오는 것은 때로는 세속제와 제일의제에서 끊긴다고 한다. 혹은 이와 같은 것 모두는 제일의제에서 끊긴다. 그분이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분이란 불세존(佛世尊)이다.
연기란 갖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연기라 한다.
언어의 자성(自性)에 집착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까닭에 희론을 그치게 한다고 한다.
모든 재난과 장애가 없는 까닭에, 혹은 자성(自性)이 공(空)하기 때문에 잘 없앤다[善滅]고 한다. 설한 것은 뜻을 널리 연설하기 때문이다.
올바르고 전도되지 않은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에 통달하기 때문에 부처님[婆伽婆]이라고 이름 한다. 이와 같은 뜻으로 인하여 내가 예경하는 것이다.
‘모든 설법자 가운데 최상’이란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그(부처님)는 전도되지 않은 연기로써 하늘과 인간에게 열반(涅槃)과 신락(信樂)의 도(道)를 열어 보이셨기 때문이고, 성문ㆍ독각ㆍ보살에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며, 연설하신 대로 연기가 바르며 전도되지 않고 뛰어나기 때문이다.
[문] 그대는 스스로 연기법을 설한다고 했는데, 만일 연기를 말한다면 어째서 “생기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혹은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연기한다고 하는가?
이 말은 서로 모순된다. 또한 이해될 수 없는 까닭에 말과 뜻이 다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언어가 다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답] 만일 모든 연기가 다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가 내게 오류가 있다고 이해해도 마땅하지만, 나는 아직 “모든 연기가 다 생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까닭에 위와 같은 잘못은 없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 세속제에는 연기가 존재하지만 제일의제에서는 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말한 이유[因]는 이 주장에 성립되지 않는다. 마치 보시바라밀[檀]등과 같다. 제일의제에서는 선(善)을 말할 수 없지만 생사(生死)를 섭수하는 까닭에 선이라고 한다.
또한 식(識)을 아(我)라 하는 것처럼 제일의제 중에 식은 진실로 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여 아는 까닭에 과오가 없다.
또한 마치 변화한 장부(丈夫)가 나타는 것처럼 장부의 자성(自性)은 실로 생긴 것이 아니다. 또 아지랑이처럼 내입(內入)의 생기 등은 세속제에서 설해지며, 제일의제에서는 설해지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잘못이 없다.
[문] 생기[起]뒤에 소멸을 부정하는 것은 법의 모습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 생기가 먼저이기 때문에 마치 단멸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답] 생사는 비롯함이 없기 때문에 먼저 소멸하고 나중에 일어나는 것도 똑같이 부정한다. 부정인[非一向因]5)의 과오가 있으며, 주장의 순서만 보고 차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문장에서 만일 생기를 먼저 부정한다면, 소멸과 똑같은 잘못이 있게 된다.
또한 담무덕인(曇無德人)6)이 말하였다.
“논의 처음에 생기하는 것도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은 무위법(無爲法)이므로 특수한 연기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아법(我法)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논의 처음에 성문 등과 같은 연기가 아니라는 주장과 상응하지 않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자성을 부정하는 까닭에 ‘생기하는 것도 아닌’ 등의 특별한 연기법을 말한 것은 그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저 무위연기(無爲緣起)가 있다고 말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려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증험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의 의도가, 말하자면 연기가 반드시 연기무위(緣起無爲)라 한다면 이 해석에는 과오가 있다. 왜냐하면 생기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저 생기에 실체가 없으므로 ‘같은[共]’이라 이름 할 수 없다. 무위에는 생기가 없지만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머무는 것[住]과 같다.”
또한 경량부(經量部)논사가 말하였다.
“‘생기하는 것도 아닌’ 등의 뜻은 성문과 다른[不共]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과 다르게 생기하는 것에 실체가 없는 것을 ‘생기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자재(自在)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저 외도가 소멸에 대해 이해할 때 소멸에 실체가 없는 것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비유하면 무아(無我)와 같다.
원인에 의지해 결과가 생기므로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결과가 일어나야 원인이 없어지므로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마니주(摩尼珠)와 마른 소똥 가루와 햇빛이 화합하여 이렇게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실체7)에서 불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른 실체에서 불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생기하면서 소멸하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라는 주장도 바로 그와 같다. 그대가 논의 처음에 설한 ‘성문과 다른 특별한 연기’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이런 말을 해도 이 말은 바른 도리에 위배된다. 이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기는 ‘생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생기하는 것이 아닌 등의 특수한 연기’의 뜻을 이해시키려 한다. 이것이 불공의 ‘특수한 연기’인 까닭에 처음에 부처님을 찬탄하고 바야흐로 이 논을 짓는다. 먼저 ‘생기’가 ‘생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 ‘소멸하는 것이 아님’등도 바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어떻게 저 ‘생기하는 것이 아님’ 등을 이해시킬 수 있는가?
이른바 생기를 분별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드러난 것[現前]으로 알기 때문에 모두 그와 같이 설하는 것이다. 혹은 자기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것으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고도 하며, 혹은 자기와 다른 것으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고 하고, 혹은 무인(無因)에서 실체가 일어난다고 하는 이 설들은 다 옳지 못하다. 성스런 가르침 및 바른 도리에 의거하여 여실히 제관(諦觀)하는 것이 생기의 뜻이다. 그러므로 논을 지은 용수보살이 자재로이 결정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어떠한 때에도 어떠한 곳에서도
사물의 실체는 없네.
자기로부터, 다른 것으로부터, 모두로부터,
혹은 무인(無因)으로부터도.
[釋] “자기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非自]”란 저 모임[聚]이 모든 일어나는 법을 안립 시켜도 끝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차례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自]란 아(我)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모든 실체[體]를 무슨 까닭에 부정하는가?
말하자면 ‘부정한다’한 최승의 뜻이기 때문이며, 또한 남김없이 분별의 그물을 끊기 때문이다. 남김 없는[無餘] 분별의 그물은 남김 없는 인식의 경계를 말하기 때문이며, ‘경계가 없다[無境界]’는 것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성립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遮]’이란 유여(有餘)으 수(受)를 논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방편으로 모든 법이 ‘생기하는 것이 아님’을 설하는 것이다. 방편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대승의 실단(悉檀)8)이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함경(阿含經)』에서 색(色)에는 생기 작용이 없음을 설할 뿐 반야바라밀의 생기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로부터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不自起]”란 이른바 자기로부터 이러한 실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른 이해이다.
만일 이것을 달리 이해하여 자기[自體]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에도 오류가 있다. 어떤 오류가 있는가? 이른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他起]”고 하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그대가 “자기로부터 실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 오직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오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다른 것으로부터 동시에 일어난다”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단다(悉檀多)에 위배되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방편어로는, 제일의제 중에 모든 내입(內入) 등은 자기로부터 일어난다는 뜻이 없다. 세속제에서 작용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생각[思]과 같다. 이부(異部)로 회전(廻轉)하여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어도 이유가 되지 못하는가? 비유에 실체[體]가 없기 때문이므로 이와 같이 저 이유를 회전해도 모든 곳에 비유에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승거(僧佉)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세우려는 주장은 어떤 뜻인가? 결과[果]를 ‘자기로부터[自]’라 이름 하는가, 아니면 원인을 ‘자기로부터’라 이름하는가?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만일 결과의 실체[體]를 세워 ‘자기로부터’라고 하면 나의 주장의 성립한다. 만일 원인의 실체가 ‘자기’라면 주장과 서로 위배된다. 원인 가운데 실체[體]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有]가 일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생기[起]’라고 해야 한다. 그대가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주장이 어찌 옳겠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생기에 관한 분별을 부정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자기의 성질에 의하여 일어난다’ 하고, 또는 ‘다른 것의 성질[他性]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는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부정한다. 그대가 바르게 사유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대가 미혹하기 때문이며,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어떤 사람이 달리 해석하여 말하였다.
“모든 법은 자기의 실체로부터 일어나는 일이 없다. 저 생기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며, 또 무한소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치와 상응하지 않는다. 그 뜻은 무엇인가? 이유와 비유를 설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설하는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논파는 전도를 드러내 오류를 이루게 된다.
무엇이 전도됨인가?
이른바 다른 것으로부터 실체가 일어난다는 오류, 존재의 결과가 일어난다는 오류 및 유한소급[有窮]을 일으킨다는 오류로 말미암아 본래의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승거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하였다.
“모든 실체는 자기로부터 생기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일어나려고 다시 자기를 없애기 때문이니, 마치 삼계에 토끼의 뿔이 생기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다시 그대의 주장을 물리치고자 한다. 이처럼 나는 원인과 결과를 세워 다른 실체가 없음을 잘 요별 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자아(自我)처럼 원인의 실체로부터 결과의 법이 스스로 일어나므로 나의 주장이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삿된 분별을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먼저 그 주장을 부정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이처럼 모든 법의 실체는 자기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때 어떤 곳이라도 물체가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뜻은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부터[他]’란 ‘다르다[異]’는 뜻이다. 이를 방편어로는, 제일의제 중에 내입(內入)은 모든 다른 연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니, 왜냐하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병(甁) 등과 같이 또한 제일의제 중에 다른 연이 눈 등의 내입(內入)을 일으킬 수 없으니, 왜냐하면 다른 것[他]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실[經]등과 같다.
[문] 그대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유 면제가 성립하지 않으니, 주장을 세우는 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항상하는 소리는 없으니, 소리이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답] 그대는 잘 말하지 못했다. ‘소리는 무상하다’란 위타(韋陀)9)의 소리를 가리키며,‘소리이기 때문에’란 북소리와 같기 때문이다. 주장의 일부를 성립시키는 이유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편으로 치우쳤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비세사인(鞞世師人)이 말하였다.
“미진(微塵)을 원인으로 모든 법의 결과가 일어난다. 저 두 미진을 처음으로 차례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 모여 실체10)가 일어난다. 그대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我)의 속성[求那]11)을 분별하여 원인으로 주장하는 것인가. 특수[異義]12)를 분별하여 원인으로 주장하는 것인가? 만일 아(我)의 실체[體]를 여의고 따로 속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만일 저 특수[異義]를 분별하면 세간의 이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설은 옳지 않다. 총괄적인 원인을 설하기 때문이다. 저 법이 모여 다른 지각을 일으키므로 이와 같은 지각의 원인을 설하여 ‘다른[他]’이라 하며, ‘아(我)’와 ‘속성’은 아니라고 말하니, 다르게 사유하기 때문이다. 세간의 이해 또한 무너지지 않으니, 주장 명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제일의제에서는 ‘지(地)의 미진’이 처음 일어나는 순간을 ‘지의 실체[地實]’라 하지 않으니, 미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화진(火塵)과 같으니, 이와 같이 제일의제에서는 화진이 처음 일어날 때 ‘불의 실체[火實]’라 이름하지 않는다. 미진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수진(水塵)과 같다. 이와 같은 것들도 차례로 설해야 한다.”
다시 아비담(阿毘曇)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다른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과의 공능(功能)이 공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설한 것인가, 공하지 않다는 것을 설하여 ‘다른 것’이라 한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결과의 공능이 공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유 명제가 성립되지 않으며, 공하지 않다면 능성법(能成法)13) 이 공하므로 비유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총괄적으로 취법(聚法)을 말하고, 사물에 관한 치우치 견해를 관하며, 다른 것[他]으로 인한 지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대가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으며, 능성법이 공하여 비유가 무너진다’고 지적한 것에는빛과 그림자처럼 오류가 없다.”
다시 유식학파의 사람[自部人]이 말하였다.
“만일 제일의제 중에 저 내입(內入)과 외입(外入)이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면 법의 실체[體]가 성립하지 않아 의지하는 곳이 없어지니, 그대에게 이유 명제가 성립되지 않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세속의 언설은 실제하고 병과 눈 등의 내입과 외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대가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 불호(佛護) 논사가 해석하였다.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것[他作]도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만일 그와 같이 오류를 설하면 곧 이루는 목적[所成法]과 이루는 내용[能成]이 전도되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로부터 모든 원인의 실체가 일어나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또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한 사물의 실체만 일어나기 때문에 앞에서 한 말과 서로 위배된다. 또 만일 이와는 달리 ‘모든 것이 일어나는 오류’가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한다는 것[他起]’이라는 오류가 된다면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14)
향부자와 고삼(苦蔘)과
암마라는 열을 제거하고
석녀(石女)는 아이가 없으며
죽순은 무거워 괴롭네.
토끼의 인(印)은 달빛에 새겨지고,
따뜻한 봄날에 음악을 연주하네.
다른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싹과 다른 지(地) 등의 종자와 다르지 않은 종자는 싹 등의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와 같은 주장에 의해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물체가 일어난다고 말하면 그 말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함께 하지 않은[不共]’이란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어느 때 어느 곳에 한 물체도 ‘함께[共]’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말에는 오류가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려 한다면 논증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15) 이 주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여기서 나형부(裸刑部)의 견해를 비판한다.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무슨 말인가?
그가 말하기를 “금과 금 아닌 것과 사람의 노력과 불 등 자타(自他)의 힘에 의해 팔찌 등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설한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무인(無因)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무슨 뜻인가?
어떤 때 어떤 곳에서 어떤 사물의 실체도 무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인은 증험 할 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증험이 성립한다 해도 오류가 있기 때문에 세간이 이해하는 바를 깨뜨린다.
세간에서 논증하는 주장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속의 내입(內入)의 실체를 일어나게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이 것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싹 등과 같다. 다시 세간에서 이해하는 바를 오류란, 저 세간에서 만일 사물의 실체가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안다면, 실로 비단을 만드는 것과 대나무로 광주리를 만드는 것과 진흙으로 단지를 만드는 것과 같은 그러한 오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나쁜 원인[惡因]”을 처(婦) 등이 없는 것처럼 또한 “무인(無因)”이라고 한다.
나쁜 원인은 무엇인가?
이른바 자성(自性)ㆍ자재천(自在天)ㆍ장부(丈夫)ㆍ장(藏)ㆍ시(時)ㆍ나라연(那羅延) 등은 실체가 아니므로 이것은 무인이며, 실체를 일으킬 수 없다. 만일 “저 자성 등에서 일어난다”고 말하여 사람에게 이해시키려 하면, 논증 방법이 옳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증험을 말해도 또한 오류가 있다.
또 자성에 집착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성이 있어 저 내입(內入) 등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체(我體)를 장엄하기 때문이다. 물에서 자생하는 꽃의 뿌리ㆍ실뿌리ㆍ줄기ㆍ잎사귀의 색과 모양이 아름다운 것처럼, 또한 대청주인다라니라아비니라보(大靑珠因陀羅尼羅阿毘尼羅寶) 등처럼, 또 공작 목덜미의 갖가지 무늬 빛을 좋아하는 것처럼 모든 자성은 그러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와 같은 주장을 내세워 자성을 ‘작용하는 자[作者]’라 한다면 업의 원인에 작용하는 자가 없음을 보지 못했다. 만일 그렇다면 저 내입(內入)이 인연을 일으켜 반드시 세속의 지혜가 작용하는 모든 언어가 되어 다시 오류가 성립하게 된다.
만일 제일의제에서라면 비유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는 연꽃과 보배 등이 본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대는 나처럼 무인에서 일어난다는 주장을 세워 모든 법을 이루려고 하지만, 나는 이제 그대에게 무인으로 인해 모든 것이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 주겠다.
또 그대가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無因]’을 세워 원인[因]을 말한다면 먼저 집착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또 만일 ‘내가 무인을 주장해도 그들로 하여금 원인을 이해시킬 수 없으므로 반드시 원인을 들어 무인(無因)을 이해시켜야 한다. 비유하면 오랑캐와 함께 다시 오랑캐의 말을 하는 것처럼, 이런 까닭에 방편으로 원인을 설해도 앞의 말이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말끝을 바꾸는 것은 또한 얻고자 하는 의도와 같으며, 이 의도로 그를 이해시킬 수 있다. 오랑캐에게 ‘저 곳에 연기가 있으면 곧 불이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의도를 알려 지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쪽 말과 저쪽의 말이 다르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다른 승거 바주라(婆冑羅) 사람이 말하였다.
“저 정액[歌羅羅]16)과 싹 등은 연(緣)이 없이 일어나고, 병ㆍ옷 등과 같은 것은 연이 있어 일어난다. 모든 실체는 자성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세우려는 주장이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저 모든 때에 모든 사물이 일어나는 것을 다 부정하므로 그대의 설은 이것과 상응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주장에 의해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없다.”
또 외인(外人)은 자재천이 원인이 된다고 집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자재천(自在天)이 세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세속제에서는 또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소 치는 사람처럼 혹은 근심과 기쁨의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재천을 집착하여 모든 원인으로 세간을 만드는 자라 이름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인식되는 것[所量]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자재(自在)와 같다. 그러므로 세속제에서도 자재천이 모든 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끝내 자재천이 원인이 되어 모든 법을 일으킨다고 말하면, 이 원인과 결과는 자기의 성질인가, 다른 것의 성질[他性]인가, 둘 다 갖춘 성질인가? 이 차이에 관한 분별은 앞에서 이미 부정했으므로 일어나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아님도 나중에 자세히 논판하겠다. 제일의제 주에서 자재천은 모든 법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중생세간(衆生世間)과 기세간(器世間)의 갖가지 업의 원인이 자재천이기 때문에 머무는 작용ㆍ생기하는 작용ㆍ괴멸되는 작용ㆍ고락의 증감 작용 따위의 의지처가 된다’고 했는데, 이 설이 성립하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주장을 이루게 된다. 세속의 언설은 제일의가 아니며, 제일의 주에는 업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장부(丈夫)17)가 생기는 원인[生因]이 된다고 고집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세간은 장부를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실로 그물을 짜는 것처럼, 월주(月珠)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나무에서 가지와 잎 등이 돋아나는 것처럼, 모든 중생이 장부로 원인을 삼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 운동(運動)과 부동(不動), 가까운 것과 먼 것, 안과 밖 등 그와 같은 모든 것은 다 장부를 원인으로 삼는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에서 자재천이 원인이 된다고 집착하는 이런 생각을 이미 부정했지만, 이제 다시 말하겠다. 조달(調達)18)의 아(我)와 같은 것은 조달의 몸을 모이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我)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耶若達多)의 자아(自我)와 같다.
또한 야야달다의 몸 등의 모임은 야야달다의 아(我)가 만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 즐거움과 괴로움과 지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조달의 몸 등의 모임과 같다. 만일 ‘저 계박된 아(我)는 삼계의 원인이 되지만 모든 것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아(我)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만일 해탈한 아라고 한다면 주장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의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문] 그대가 ‘아(我)로 원인을 삼는다’고 말한 것은 우리의 주장 중 한 부분이므로 그대가 이유를 제시해도 이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답]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앞에서 이미 설하였다. 왜 오류가 없는지는 앞에서 ‘소리는 무상하다. 소리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북소리와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세운 주장은 오직 이 한 아(我)만 있다는 것이니, 마치 허공이 하나인 것과 같다. 병 등의 분별은 모두 거짓이며, 거짓이므로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때문에 비유할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논파는 이루어질 수 없다. 주장에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19)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잘 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허공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허공 꽃처럼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허공’이라 말한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언설이 있을 뿐이다. 세속법 중에 아(我)를 설한 것은 가설하여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대가 한 아(我)만을 세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한다면 논증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문] 계박된 자아에는 해탈한 자아 외에 다시 다른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아(我)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마치 해탈아와 같다.
[답]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 중에 하나의 해탈아는 성립되지 않는다.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아품(觀我品)에서 자세히 풀이하겠다.”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우리의 주장은 저 자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범마(梵摩:梵天)를 위시하여 아래로 주지(住持)20)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의 결과가 일어남은 다 자성을 원인으로 한다. 내입(內入)이 괴로움과 즐거움과 어리석음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반드시 원인이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과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능작(能作)의 인(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세간의 사물에 능작의 인이 갖추어져 있다면, 아(我)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마치 전단나무의 조각ㆍ기와 조각ㆍ금으로 장엄된 그릇과 같이 이러한 것들은 총체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저 내입에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 등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내입이 저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모든 5온은 다 이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 등의 자성이 된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5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수음(受陰)과 같다. 이 때문에 이유 명제와 비유 명제가 모두 이루어질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위에서 그대가 세운 주장 때문에 제일의제에서는 전단나무 등의 비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세속제 가운데 어리석음이 행온(行蘊)에 포섭되므로 비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 즐거움과 괴로움 등 두 가지는 에 다른 법들의 즐거움과 괴로움의 자성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대상[所量]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지각[覺]과 같이 그 증험에 상응하지 않는다.
[문] 그대가 말한 제일의제 중에는 비유가 없기 때문에 그대의 증험도 옳지 않다.
[답] 총괄적으로 지각을 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들었고, 또한 비유의 자체(自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뜻으로 인하여 저 장(藏)21)은 5대(大)22)등 진리[諦]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장부와 같다. 그대가 만일 자성이 원인이 된다고 설한다면, 자기의 논증을 스스로 논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외인이 말하였다.
“내가 장부와 생각[思]이 상응한다고 말하면 곧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하면 그 이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능성법(能成法)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비유 또한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말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총체적으로 이유를 설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주장을 세우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이해되지 못하여 총체적으로 하나도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원인이 없이 모든 법은 일어날 수 없다. 속성[性]ㆍ시간[時]ㆍ나라연(那羅延) 등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자재천을 부정하는 가운데 말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자기로부터,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로부터와 다른 것으로부터 모두 원인 없이, 어떤 때에 어떤 실체에서도 어떤 사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없지만 요작23)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물었다.
“어떤 사물을 어떻게 요작(了作)하는가?”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등불과 항아리 등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등불과 항아리 두 사물은 본래 스스로 발생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발생하지 않은 등불로 저 발생하지 않은 항아리 등을 요작(了作)하려 하는가? 마치 말[馬]에 뿔이 없는 것처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제일의제에는 법의 발생이 없기 때문이다. 세속제 중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저 등불은 벼에서 무슨 작용을 하는가, 작용이 되는가?”
외도가 말하였다.
“수(受)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수는 본래 앞에 없다가 나중에 비로소 존재한다. 앞서 없다가 나중에 있는 수를 곧 작용[作]이라 한다. ‘어둠 속의 안식(眼識)은 이 순간 감수작용을 못하다가 등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장애를 없앤다’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이것은 작법(作法)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장애를 없애는 것이 어찌 작용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대가 ‘감수 작용이 먼저 있음을 본다’고 고집하여 만일 감수[受]가 먼저 있다고 말한다면, 등불이 다시 무슨 소용이겠는가?
또한 무엇을 항아리라 이름하는가?
아법(我法) 중에 4대(大)와 4대가 지은 색이 화합하기 때문에 ‘항아리’라 이름하는 것처럼, 저 등불이 있을 때 빛도 함께 일어난다. 이 뜻으로 인하여 세속제에는 작용하는 바의 원인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물체는 각각 자기의 원인으로부터 상속하여 일어난다. 왜냐하면 빛이 물체와 함께 일어나는 것처럼 이것이 요해(了解)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제일의제 중에는 생기법이 전혀 없으며, 또한 요해도 없다. 5대(大) 등의 진리들은 요해될 수 없는 사물로서 능히 그것은 요해되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요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의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한다’는 그 말은 옳지 못하다.
다시 불호(佛護) 논사가 이 구절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또한 무인(無因)에서 저 물체가 일어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무인에서 일어난다면 마땅히 모든 곳에서 모든 사물이 항상 일어난다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말뜻은 성립하게 하는 것[能成]과 성립되는 것[所成]이 분명히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저 사물의 실체가 원인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때에 실체가 일어나고, 또한 어떤 곳에서 한 사물이 일어나야 비로소 생기의 시작이 있으므로 먼저 한 말과 서로 위배된다. 이처럼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이미 오류를 지적하였다. 만일 그것과 다른 불상응의 의미가 있다면 또한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여기서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란 일체의 모든 논에 이와 같은 설은 없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혹은 자기의 종(宗)이나 혹은 다른 종이나 한 사물도 혹은 물들었건 혹은 깨끗하건 무인(無因)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낱낱이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도 등과 같지 않은 특수한 연기에 ‘생기하는 것이 아닌[不起]’ 등의 주장이 성립한다.”
[4연(緣)]
다시 아비담(阿毘曇) 사람이 말하였다.
“4연(緣)이 있어 모든 법은 발생한다. 어찌하여 연기는 ‘일어나는 것이 아닌[不起]’이라고 하는가? 우리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인연(因緣)과 연연(緣緣)과
차제연(次第緣)과 증상연(增上緣)의
4연(緣)으로 모든 법이 일어나니
다시 다섯째 연은 없네.
[釋] ‘인연’24)이란 공유(共有)와 자분(自分)과 상응(相應)과 변(遍)과 보(報) 등의 다섯 원인을 말한다. ‘인연’이란 모든 법을 말하고, 차제연이란 아라한 최후에 일어나는 심법과 심소법[心數法]이며, ‘증상연’이란 이른바 소작인(所作因)이다. ‘다섯째 연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종(宗)에도, 다른 사람의 종(宗)에도, 천상인간(天上人間)에도, 수다라(修多羅)에도, 아비담(阿毘曇)에도, 그 밖의 논(論)들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다섯째 연이 있다고 설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대중부(大衆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생의 유무(有無) 등 모든 연(緣)은 다 네 가지 연 가운데 포섭된다. 이런 까닭에 네 가지 연은 모든 법을 일으킬 수 있다. 그대가 ‘물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논자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실체
그 이외의 뭇 연[衆緣]
언설과 음성 등은
모두 무자성(無自性)이네.
[釋] ‘모든 물체’란 저 눈 등을 말한다. ‘의 뭇 연’이란 가라라(歌羅羅) 등이고, ‘언설과 음성’이란 화합의 시기이며, ‘무자성(無自性)’이란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 모든 실체 등은 무자성이다. 또한 다른 처(處) 및 자재천(自在天) 등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저 다른 것은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자기의 실체가 되고, 뭇 인연이 ‘다른 것의 실체[他體]’가 된다고 하는가?
그 존재[有]는 앞의 ‘생기하는 것이 아닌[不起]’의 주장에서 이미 논파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는 여기서 나를 논파할 수 없다.
혹은 자기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허망하게 분별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여, “만일 모든 법의 실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설하며, 자기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다. 만일 다른 연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다. 다른 연이 있으므로 모든 법이 일어날 수 있다. 연은 반드시 존재하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해한다”고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일 이와 같이 “자기로부터 일어남”을 부정한다면 나의 주장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실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다른 것이 어떤 것을 일어날 수 있게 한다면, 이 말은 옳지 않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실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여 저 실체 밖에 달리 일어나는 것이 있음을 부정한다면, 내가 든 비유를 돕는 것이 된다. 이런 까닭에 빨강과 하얀 연(緣)에는 눈[眼]등이 없다. 뭇 연(緣) 중에 안법(眼法)은 공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뭇 연은 자체가 없다.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두 가지 말이 있다. 제일의제에서 저 눈 등은 빨강과 하얀 뭇 연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눈 등은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항아리와 같다. 제일의제 중에 빨강과 하얀 뭇 연은 그 공능으로 눈 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눈은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헝겊을 자르는 칼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제일의제 중에 원인과 뭇 연은 눈을 일으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세간의 혼돈스런 지혜와 원인 없음[無因]에 대한 쟁론에 머무는 자들을 모두 불쌍히 여기시어 세속제 중에 인연ㆍ차제연ㆍ소연연ㆍ증상연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연(緣) 때문에 나의 주장은 논파되지 않는다.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야 한다.
또 다르게 분별하는 사람이 말하였다.
“실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모두 여기서 다시 사량(思量)해야 한다.
이 네 가지 연 가운데 무엇이 눈 등의 모든 실체를 일으키는가?
또한 다른 이름으로 차별된 것은 대중부와 비세사(鞞世師)등에서 분별된 것처럼 그것도 상(相)에 따라 이러한 주장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결코 다섯째 연은 없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눈 등과 다른 것 모두가 그러하지가 않다. 어찌하여 그렇지 않은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자아(自我) 등의 모든 실체[體]와
내입(內入) 등의 뭇 연은
낱낱이 모두 있지 않으니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네.
[釋] 모든 연 중에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저 눈 등의 실체는 모두 성립하지 못한다. 이들 소리는 개개의 원인 중에도 없고, 화합한 중에도 없으며, 다른 것 중에도 없다. 혹은 세속제에도, 혹은 제일의제에도 비롯함이 없을 때부터 자성이 없어 사물의 실체가 먼저 일어나지 못한다. 또한 아직 일찍이 무자성인 사물은 있지 않다. 뭇 연들의 다른 실체가 미래에 다른 것들을 일으킨다면 무엇을 성립시키는가? 한결같이 다른 것은 없다. 다른 원인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만일 그대가 자기의 마음속으로 망령되게 “모든 법은 실체가 있으므로미래에 장차 이 실체를 기다려 일어나다. 저 연은 다른 것이다”하고, 상대력(相待力) 때문에 연을 다른 것이라고 분별한다면 단지 그것은 말만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뭇 연에는 다른 성질[他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세속제 중에 가설하여 ‘다른 것이 있다’고 설해도 제일의제 중에는 저 ‘다른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앞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나의 의도는 이른바 미세한 아체(我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작용하여 명료하게 된다. 명료하지 않은 과(果)에 의해 연(緣)은 다른 것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어찌 논파할 수 있겠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옳지 못하다.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다. 항아리 등의 ‘미세한 아[細我]’는 주장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대의 ‘명료(明了)’라는 말은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