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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1章 漣 川 邑
연천군 2읍 8개 면의 하나이다.
이 읍은 본래 연천현의 현내면(縣內面) 지역으로, 읍내리(邑內里)·지혜동리(智惠洞里)·동막리(東幕里)·무수동리(無愁洞里) 등 4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현내면을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고 읍내(邑內)·지혜(智惠)·차탄(車灘)·통현(通峴)·동막(東幕)·고문(古文)의 6개 동리로 개편 관할하였다가,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東面)의 와초(瓦草)·옥산(玉山)·현가(玄加)·상리(上里) 등 4개 동리를 병합하여 와초·옥산·현가·상·읍내·차탄·동막·통현·고문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으며, 1938년 1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28호"에 의하여 군내면을 연천면으로 개칭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직후에는 연천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6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2557호"에 의하여 포천군 관인면의 부곡리를 새로 편입하여 10개 리로 개편 관할하여 오늘에 이른다.
읍의 동쪽은 포천군 관인면, 남쪽은 전곡읍과 청산면·포천군 창수면, 서쪽은 군남면과 중면, 북쪽은 신서면과 경계가 되는 연천군 행정의 중심지역이다.
□ 일반현황
·읍사무소 소재지 : 연천읍 차탄1리 4
(1994년도 통계연보 기준)
+---------+------+------------------+---------+---------------------------+
| | | 인 구 수 |인구밀도 | 리 수 |
| 면 적 |가구수+------+-----+-----+ +-----+-----+-----+---------+
| (km ) | | 계 | 남 | 여 |(1인/1km)|법정 |행정 | 반 |자연마을 |
+---------+------+------+-----+-----+---------+-----+-----+-----+---------+
| 87,59 | 2,589|9,232 |4,752|4,480| 105,4 | 10 | 17 | 108 | 17 |
+---------+------+------+-----+-----+---------+-----+-----+-----+---------+
1. 와초리(瓦草里)
본래 연천현 동면(東面)의 지역으로, '기새'라는 마을이 있어 한자로 음을 빌어 와초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내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6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의 지역이 민간인 미입주 상태에 놓여 있다.
1 박집산 : 거림동 서쪽에 있는 산. 예전에 궁궐에서 반남 박씨에게 하사한 사패지(賜牌地)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지금도 박씨의 묘가 많은 산이다.
2 절고개 : 와초리 도당말에서 상리의 망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 고개 중간 지점에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3 푸묵골 : 절고개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전에 이곳에서 돈을 주조했다 하며, '풀무골'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4 도당말(都堂村) : 절고개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까지도 이 마을 뒤편 산록에 있던 큰 소나무에 매년 소를 제물로 마련하여 산제를 올렸다 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반남 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5 동묘고개(東墓峴) : 능골에서 상리의 원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상리편 참고)
6 능골(陵谷) : 동묘고개에 딸린 골짜기로, 개령군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7 개령군 이 지 묘(開寧君 李枝 墓. 영도령 묘)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8 안골 : 개령군묘 서쪽에 있는 골짜기.
9 북파지 : 회옥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북쪽으로 패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0 자작고개 : 회옥골에서 중면 합수리의 무조래로 넘어 가는 고개. 예전에 이 고개 정상에 도둑과 호랑이가 들끓어 이 곳을 지나던 행인들이 행방을 알 수 없이 실종되었다 하여 깊숙이 속으로 스며들거나 졸아든다는 뜻을 가진 '잣다'에서 뜻을 따와 '자잣고개'라 불리워지던 것이 어휘가 변하여 자작고개가 되었다 한다.
11 회옥골(懷玉洞) : 자작고개 아래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동래 정씨가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12 선두밭골 : 회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13 장골(長谷, 긴골) : 회옥골에서 국사봉까지 이르는 긴 골짜기.
14 회골 : 국사봉 남쪽에 딸린 골짜기.
15 국사봉(國師峰. 366m) : 장골 북쪽에 있는 봉우리. 신서면 도신리와 경계가 되며 '망재'라고도 불리우지만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6 진응달고개 : 장골과 윗골 사이에 있는 고개. 하루종일 해가 들지 않는 음지여서 지어진 이름이다.
17 아래산골 : 회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18 능모루 : 도당말 북쪽에 있는 모퉁이, 조인후 묘의 앞에 있는 모퉁이가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19 승정원도승지 조인후 묘(承政院都承旨 趙仁後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0 새터산 : 능모루 뒤편에 있는 산.
21 세류동(細柳洞) : 도당말 북쪽에 있던 마을.
22 윗골(上洞) : 세류동 위에 있는 골짜기. 피부병에 효험이 있는 옻물약수가 있는 곳이다.
23 두투맥이 : 세류동에서 신서면 도신리의 보맥이로 넘어 가는 고개. 고개가 두드러졌다는 뜻의 '두투'와 장소라는 뜻의 '목'이 합쳐져 '두투목'이 '두투모기'를 거쳐 '두투매기(두투맥이)'가 되었다.
24 잔바다골 : 세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공주 이씨가 열다섯가구 살았던 곳이다.
25 평안병사 이사증 묘(平安兵使 李思曾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6 기새(瓦草洞) : 도당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기와를 구웠던 곳이라 하여 15세기경 기와의 옛말인 '디새'가 음이 변한 '기새'를 한자로 옮겨 와초리라 불리웠다 한다.
일설에는 이질설사의 생약인 오이풀 또는 외동풀이 무성히 자라던 곳이 되어 한자로 의역하여 와초리로 했다는 두 가지 유래설이 전해 오며, 조선시대에는 내시(內侍)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었으나, 6·25 전에는 연주 현씨가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27 사관머루 : 박집산 북쪽에 있는 들판.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28 도리말 : 박집산 북쪽에 있었던 마을. 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9 요골 : 새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30 새배기논( = 기새골논) : 새말 서북쪽, 긴 골짜기에 있는 고래실 논.
31 와초리 충현탑(瓦草里 忠顯塔) : 1959년 5월 25일에 건립되었으며, 비의 높이 1,5m. 기단 2,4m이다. 이 비는 1951년 3월 25일, 대광리 북쪽에 위치한 '불로'· '포크찾'·'티본' 등의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아군과 '아사지투루도' 소장이 지휘한 미 제7사단 장병이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적군에 맞서 성공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적의 전의를 상실시킨 큰 전과를 올리는 과정에서 자유수호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893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전적기념비이다.
32 손맞이비냥 : 충현탑이 있는 조그만 산. (신서면 도신리편 참고)
33 새말(新村) : 손맞이비냥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경원선 철도의 옆이 된다.
34 지경터(地境垈) : 새말 남쪽에 있는 와초리에서 가장 큰 마을. 신서면이 철원군에 속해 있었을 때 이 마을이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가 된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도신리와 와초리의 경계가 되는 차탄천을 선으로 하여 도신리 지역부터는 기후차이로 인하여 보리농사가 안 된다 한다.
35 거림동(巨林洞) : 지경터 남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큰 숲이 군락을 이루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6 거림들 : 거림동 주위에 있는 들판.
* 제 보 자 : 이 공 정(87) 신서면 도신3리
이 희 춘(63) 연천읍 상1리
정 을 수(60)
2. 상리(上里)
본래 연천현 동면의 지역인데, 조선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좌찬리(左贊里)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웃골'에서 이름을 따 '상리'라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20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큰밤골(栗洞) : 필리핀군 참전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파평 윤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 웃골(上洞) : 밤골 위에 있었던 마을로, 상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3 아랫쟁골 : 닭운이 서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재궁동의 아래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마정승 묘(馬政丞 墓) : 아랫쟁골과 쟁골 사이, 북쪽으로 뻗어 나온 산부리에 있는 고분. 단지 전설상에 마정승 묘라 전해 올 뿐, 피장인의 이름과 관직 등 자세한 내용이 전해오지 않는 묘이다.
봉분은 허물어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까지 봉분 아래 도로변에 있었던 비석 또한 논 속에 매몰되었다 한다.
5 쟁골(齋宮洞) : 마정승 묘 서쪽에 있었던 마을. 고려말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1333∼1367)의 황후였던 기황후(奇皇后)의 묘와 재실(齋室)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6·25 전까지 한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6 시랑말고개 : 재궁동에서 중면 합수리의 시랑말로 넘어 다니는 고개. 시랑말에서는 이 고개를 '쟁고개'라 부른다.
7 기황후 묘(奇皇后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8 등정골(된정굴) : 마정승 묘 북쪽에 있는 골짜기.
9 외산부리 : 솟을봉에서 재궁동으로 뻗어 내려온 산부리.
10 이정승 묘(李政丞 墓) : 마정승 묘 동쪽, 산부리 끝에 있는 고분. 상석·문관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으나, 피장인은 자세하지 않다.
11 닭운이(鷄鳴洞) : 아랫쟁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곳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파니 그 속에서 닭이 울며 나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로 전해 오지만, 본래 닭운이의 뜻은 '산 안에 있는 마을'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래 우리말 산(山)은 '닫'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닫'이 지금에 와서는 그 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드물고 연철음절과의 관계나 다른 낱말과 유사성으로 인하여 '닷', '닥','닭' 등으로 옮겨간 것이 대부분인데, 이 곳 닭운이의 예는, 닭 (山) + 안(內) + 이 > 닭안이 > 닭은이 > 닭운이와 같은 음의 변화를 거치면서 본래의 뜻인 '산자락으로 둘러쳐져 있는 골짜기 마을'과는 관련이 없는 음차의 '닭(鷄)'을 대입시켜 엉뚱한 유래로 정착된 지명이다.
12 황해촌(黃海村) : 닭운이 남쪽에 있는 마을. 6·25 이후 황해도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3 필리핀군 참전비 : 상1리 미래고개에 있는 6·25전적비. 기단높이 2,4m. 비 높이 1m이다. 이 비는 6·25 때 한국전선에서 중공군과 가장 큰 격전을 했던 연천지구 율동리전투(1951. 4. 22 ∼ 23)에서 승전한 필리핀군의 전공과 125명의 전몰영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966년 4월 22일 연천군민이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아래와 같다.
'자유와 세계 평화를 위하여 이 땅에서 공헌한 영웅적인 필리핀 용사들에게 바친다'
14 미래고개 : 필리핀군 참전비 앞에 있는 고개. 현재 32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자세한 유래는 군남면 옥계리 "미래"참고)
15 새능 : 신망리역 서쪽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 큰 묘를 썼다 하여 새능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나, 현재 그 묘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16 좌찬이(左贊洞) : 새능 북쪽에 있었던 마을. 조선시대에 의정부 좌찬성 벼슬을 한 우계 이씨(牛溪李氏)의 이 모(李 ?)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부천 임씨와 양천 허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17 둠뫼산 : 좌찬이 중앙에 있는 둥근 산. '덩이'를 뜻하는 말인 '둠'과 '뫼(山)'가 합하여 단순히 '산(山. 둠이 땅이름으로 쓰일 때에는 대개 산을 나타낸다)'을 뜻하는 이름인데, 뒤에 또 다시 같은 뜻의 산이 붙어 '둠(山) + 뫼(山) + 산(山)'이 된 땅이름이다.
18 솟을봉 : 좌찬이 북쪽에 있는 봉우리로, 중면 합수리와 경계가 된다. 이 곳을 기점으로 하여 군자산과 옥녀봉으로 양 산맥이 갈라진다.
19 당이네구럼 : 솟을봉 옆에 있는 골짜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당나라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20 원골(院谷) : 둠뫼산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조선시대에 출장하던 관원(官員)과 나그네들이 이용하던 국영여관인 원(院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원의 명칭을 '松折院' 또는 '松節院'이라 적고 있다)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당시에는 한양과 함경도를 잇는 대로(驛路)가 이 곳을 거쳐 철원도호부로 연결되었다.
21 동묘고개(東墓峴) : 원골에서 와초리의 능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동가(東家)의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22 망골 : 신망리역 북쪽에 있는 골짜기.
23 고터동(庫垈洞) : 신망리역 북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 이 부근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보관했던 연천현의 읍창(邑倉)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전에는 연주 현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4 동이정골 : 망골 남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동이우물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5 원모루(院隅) : 현 상리국민학교가 위치한 곳의 옛 이름. 송절원의 앞에 있는 모퉁이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이 모퉁이에 장승과 주막이 있었으며 부근에는 연주 현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26 상리 선사유물 산포지(上里 先史遺物 散布地) : 선사유적과 유물편 참고.
27 신망리(新望里) : 경원선 서쪽에 형성된 시가지. 이 곳은 6·25가 끝난 후인 1954 년 5월, 피난민 정착지역으로 지정되어 미 제7사단에서 3만평의 부지위에 1세대당 330m 의 대지에 59,4m 크기의 목조 루핑조 가옥 100호를 건립하여 선착순으로 피난민을 입주시켰는데, 당시 연천읍에서 가장 먼저 입주가 시작된 이 곳을 미군들 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라'는 뜻의 신망리(New Hope Twon)로 명명한 것이 오늘에 널리 쓰이고 있는 이름이다.
28 다방거리(茶房巨里) : 경원선 동쪽에 있는 마을. 1954년 수복이 되면서 연천읍
관내에 최초로 다방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9 신망리역(新望里驛) : 3번 국도 옆, 경원선에 있는 기차역.
30 미래골 : 신망리역 남쪽에 있는 골짜기. 미래고개의 옆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허 은(80) 연천읍 상1리
조 기 학(79) 605
임 병 순(68) 2반
정 을 수(61)
조 흥 선(60) 1반
3. 현가리(玄加里)
본래 연천현 동면의 가척리(加尺里)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재울(加尺洞)과 가무사리(玄沙洞)를 병합하여 현사동의 "玄"자와 가척동의 "加"자를 따서 현가리라 하여 군내면의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10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벼락바위 : 가재울 중앙에 있는 바위.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연천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모두 기아에 허덕이던 때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구걸을 다니던 한 가족이 배고품을 참지 못하여 이 바위에서 어린 자식을 죽이게 되었는데, 마침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부모는 맞아 죽고, 넙적한 모양의 바위는 지금의 모습처럼 깨져버렸다 한다.
2 가재울(加尺洞) : 벼락바위 부근에 있던 마을. 이 곳의 한자표시인 '加尺洞' 또는 '佳尺洞'의 유래는 다름아닌 가장자리의 사투리인 '가새'나 '가쟁이'를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실제의 뜻과는 아무연관이 없는 '加尺' 또는 '佳尺'으로 표기한 것이다. 즉, 가재울은 차탄천변의 '가장자리 언덕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어야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6·25 전 이 마을에는 진주 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었으나, 수복 이후에 입주가 되지 않아 현재 연천시내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3 지당골 ; 가재울 중앙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지당암'이라는 절이 있었다는 설과 '산제당'이 있었다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오는 곳이며, 현재 그 터에서는 소량의 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4 읍고개 : 가재울에서 읍내리로 넘어 가는 고개.
5 매봉 : 현가리와 읍내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매사냥을 했던 곳이라 한다.
6 숫돌봉 : 가재울 서쪽, 군남면 옥계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7 귓논 : 절텃골 앞에 있는 논. 귀가진 모서리에 있는 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8 절텃골(寺垈洞) : 가재울과 도당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이 곳에 있던 절에 대하여 문헌에 상세하지 않지만 빈대에 의해서 폐사(廢寺)가 되었다는 구전이 전해올 뿐이다.
현재 절이 자리했던 곳에는 민가가 위치하며, 그 옆에는 이 절에서 사용했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6·25 전에는 청풍 김씨들이 마을을 이루었으며, 지금은 연천읍 식수를 관리하는 상수도 사업소가 있다.
9 도당골(陶唐洞, 淸華洞) : 가무사리와 가재울 사이에 있는 마을. 조선 개국 초 고 려 신하로써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이 곳에 숨어 살며 일생을 마친 고려 진사 금은(琴隱) 이양소(李陽昭. 1367 - ?)의 높은 지조를 후세 사람들이 중국의 도연명에 비견할만하다 하여 도연명이 은일한 곳인 도당에서 뜻을 따와 도당동이라 이름지었고, 조정에서 내려준 그의 시호(諡號)인 '청화'에 연유하여 청화동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6·25 전에는 여흥 민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10 선덩어리 : 도당골 중앙에 있는 둥근 산.
11 쇠주골(巢鳥洞) : 도당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12 긴등 : 현가리와 군남면 옥계리의 경계가 되는 긴 산등.
13 잣나무골 : 도당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잣나무가 많았다 한다.
14 서남면민회 망향탑(西南面民會 望鄕塔) : 도당골에 있는 망향탑으로, 6·25 이전 연천군 12개 면 가운데 하나였던 서남면 8개 리의 실향민들이 조국의 평화통일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1987년 5월에 건립한 망향탑이다.
15 안골(安谷) : 도당골과 가무사리 사이에 있는 작은 골짜기.
16 가무사리(玄沙洞) : 도당골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가무사리는 '가무'와 '사리'의 두 음절로 이루어진 지명으로, 실제로는 한자의 '玄沙'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땅이름이다.
먼저 앞 음절 '가무'는 '신성하고 거룩하다' 또는 '큰'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의 '(감)' 갈래의 이름으로, 이 '감'은 다시 '가무', '가마', '가매', '가미' 등으로 음운변화를 일으켜 지금의 '玄', '金', '黑' 등의 한자식 땅이름으로 옮겨져 쓰이고 있으며, '사리'는 '사이(間)'라는 뜻의 고어 '삳(삿)'의 받침 ㄷ이 ㄹ로 개음 절화한 '살'이 쉽게 '사리'로 옮겨간 것으로, 앞의 '가무(大)'와 뒤의 '사리(間)'가 합하면서 도당골과 상리 '사이에 있는 큰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의 '가무사리'로 불리워지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음 그대로를 음차한 '玄沙'로 씌어지고 있는 땅이름이다.
17 매산 홍직필 묘(梅山 洪直弼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8 청화산(淸華山) : 가무사리 서쪽, 군남면 옥계리와 경계가 되는 산. 고려 멸망 후 도당골에 은거했던 고려 진사 이양소가 매일 이 산에 올라 송악(開城)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고려조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킨 곳이라 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이 산을 '백이의 맑은 기풍과 희이의 빛나는 산이라'. -- 伯夷之淸風 希夷之華山 -- 칭하고 이 글 가운데에서 두 자를 취해 '청화산'이라 명명했다 한다.
※ 참고문헌 : ≪순천이씨세보≫
주) ·백이숙제(伯夷叔齊) : 중국 殷나라 孤竹君의 아들이며 兄弟之間.武王이 殷을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으므로, 형제는 周의 녹을 먹기를 부끄럽게 여기어 절조를 지키기 위하여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희이(希夷) : 중국 송(宋)나라 때 은자(隱者)인 진 단(陣 )의 호. 자는 도남(圖南)이며 역학(易學)의 대가이다.
* 제 보 자 : 김 익 장(89) 연천읍 현가리 2반
민 영 윤(86) 6반
홍 중 관(76) (가무사리)
강 성 엽(63) 연천읍 현가리 3반
4. 차탄리(車灘里)
본래 연천현 현내면의 지혜동리(智惠洞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진천( 津川. 車灘川)에 있는 수레여울에서 이름을 따 지혜동리를 차탄리로 명칭 변경을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 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4개의 행정리, 35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군청, 경찰서 등의 행정관청이 위치하고 있어 연천군이 중심지가 되어 있다.
1 농사시험장자리(農事試驗場 -) : 차탄천 동쪽, 3번 국도 옆에 있는 농사시험장. 일제 강점기 때 이 곳에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도 연천군의 농사시험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2 가마터 : 농사시험장 남쪽에 있던 요지(窯址). 일제 강점기 말에 일본인들이 세운 벽돌공장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 성지골구럼 : 차탄리 봉수지 동쪽에 있는 골짜기.
4 용봉(龍峰) : 봉화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군남면 왕림리와 경계가 된다.
5 꽃자봉 : 봉화봉 동쪽에 딸린 조그만 봉우리.
6 봉화봉(烽火峰. 244m) : 군자산 남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문화유적·유물편 "차탄리 봉수지" 참고)
7 덕녕이(德寧谷) : 봉화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8 덕녕이등 : 군자산 남쪽, 군남면 삼거리와 경계가 되는 긴 산등.
9 군자산(君子山. 327,8m) : "산천"편 참고.
10 차탄리 마애석불입상(車灘里 磨崖石佛立像) : 앞시울 밭 가운데 있는 석불입상. (문화유적·유물편 "불상" 참고)
11 앞시울(前谷) : 차탄리 현충탑 서쪽에 있는 마을. 차탄리에서 가장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울'은 '마을'의 뜻이다)
6·25 전에는 예안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2 물방아터 : 차탄리 현충탑 남쪽,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던 터.
13 공굴다리 : 차탄천에 있는 경원선 철교의 옛 이름. 교각이 콘크리트(Concrete)로 되어 있다 하여 '공굴'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우고 있다.
14 수레여울(車灘. 수레울) : 공굴다리 북쪽, 장진천에 있는 여울. 조선 개국 초 연천읍 현가리 도당골에 은거했던 고려 진사 이양소(李陽昭)를 만나기 위하여 연천으로 친행하던 태종의 어가(御駕)가 이 여울을 건너다 빠졌다 하여 '수레여울'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15 차탄리 현충탑(車灘里 顯忠塔) : 차탄2리 136 - 1번지에 있는 전적기념탑. 이 탑은 1950년 12월 17일 ∼ 51년 3월 15일까지 연천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육군 17연대 장병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산화한 동 연대 장병 969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이후 1971년 5월 31일 충수되었고, 1978년 5월 20일 현충탑으로 명명되었으며, 연천출신 6·25 참전 전몰용사 고박영열 중령 외 76위와 순직 경찰관 6위의 영령을 추모하고 있는 곳이다.
16 해골(鶴洞) : 군자산 동쪽에 있는 마을. 전설에 의하면 예전 동막리 부무이동에 곡성 임씨가 선대 묘를 쓰려고 땅을 파니, 그 곳에서 학이 나와 이 골짜기로 날아왔다 하여 해골이 되었다는 설과, 이 곳의 지형이 학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해골이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온다. 6·25 전에는 곡성 임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7 지골(智惠洞) : 해골 북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지혜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18 지혜사지(智惠寺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19 연천향교(漣川鄕校) : 지정문화재편 참고.
20 차탄리 지석묘(車灘里 支石墓)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21 뽕나무거리 : 연천군청 남쪽에 있던 밭. 일제 강점기 때 잠업장려로 인하여 이 주위 모두가 뽕나무밭이 조성되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22 연천군청 향나무 : 연천군청사 앞뜰에 있는 향나무.
일제 강점기 때와 현재의 크기가 차이 없다는 촌노들의 증언으로 보아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으나 약 3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m, 둘레 2m 크기이다.
6·25로 연천시내 전역이 건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폐허가 되었을 당시 연천역의 급수탑과 이 나무만이 가지 하나 상하지 않고 푸른 모습으로 의연하게 남아 있었다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 갔던 우리 고장 출신의 재일교포가 모국 성묘단으로 고향을 방문했을 때 예전의 마을 형체는 찾을 길없이 변해 있었으나 이 향나무 만은 변함없이 서 있어 향수를 달랬다는 일화와, 6·25 때 고아가 되어 미육군 장병들의 보호를 받던 재미교포 청년이 모국을 방문하여 이 곳에 와서 어린시절을 회상하였으나 모든 것이 변하여 기억할 수 없었고, 임시 미국군 부대였던 군청터의 이 향나무에 올라가 놀던 때가 생각난다고 눈물짓는 이도 있었다 한다.
지금도 사시장청 무성한 모습으로 연천 수난의 역사를 묵묵히 대변해 주고 있는 유서 깊은 나무이다.
23 망곡산(望哭山) : 연천역 서쪽에 있는 둥근 산. 구한말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의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 관내 유림과 향민들이 이 산에 올라와 궁궐이 있는 서울쪽을 바라보며 시들어만 가는 국운을 애태워하며 통곡하던 충절과 애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연천군민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진 산이다. 지금은 연천읍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4 연천역(漣川驛) : 망곡산 동쪽, 경원선에 있는 역. 6·25 전 북한이 남침준비를 위하여 설치한 탱크 하역시설이 잘 남아 있는 교육장이기도 하다.
※ 경원선과 연천역
경원선은 서울의 용산역에서 의정부, 연천, 철원, 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철도로 1914년 9월16일 개통되었고 총연장은 222.7km이다.
이 철도는 갑오경장 이후인 1896년 9월 30일, 제국주의의 여러 열강 가운데 프랑스의 휘브릴르상사가 철도부설권을 청구한 이래, 1898년에는 독일이, 1899년에는 일본이 차례로 요구하였으나 '철도와 광산경영은 일체 이를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라는 우리 조정의 원칙에 의해 즉각 거부되었으며, 국내 철도국의 직영방침에 의해 선로측량을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자금 사정으로 중단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교묘히 악용한 일본이 철도자금 대부약관의 의무조항을 내세워 철도부설이 결정되어 1910년 4 월, 선로측량과 함께 10월 15일에는 용산에서 기공식을, 이듬해 10월에는 원산에서 기공식을 하여 일부구간이 개통되었고 1914년 9월 16일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원산까지의 운행이 중단되었고 6·25가 끝난 후에는 용산 - 신탄리간 88,8km를 왕복 운행하였으나, 1986년 9월 2일 용산 - 의정부간 31,21km가 복선 전철화 되어 현재 여객수송은 의정부역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연천군 내에는 초성리역, 한탄강역, 전곡역, 연천역, 신망리역, 대광리역, 신탄리역 등 7개의 크고 작은 기차역이 경원선에 소재하고 있다.
25 연천역 급수탑(漣川驛 給水搭) : 연천역에 있는 철근·콘크리트조의 급수탑으로, 처음에는 서울에서 연천까지만 철도를 운행하다가, 1914년 9월 16일 원산까지 증설, 개통되면서 세워졌는데 전체 높이 23m, 둘레 18m, 용량은 100M/T 규모이다.
당시 경원선 증기기관차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연천역에 정차하면서 급수한 후 원산까지 운행하였고, 원산발 열차는 연천역에 와서 급수하여 서울로 가던 서울과 원산 중간지점의 단 하나뿐인 중요한 급수탑이었다.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남북이 분단되자 열차의 이용도가 적어졌으며, 6·25 이후 디젤기관차의 출현으로 현재는 쓸모가 없어졌다. 그러나, 전란의 와중에서도 주변에 있던 역사건물은 모두 전소되었으나, 유독 이 급수탑만이 전신에 수 백발의 총탄과 포탄을 맞은 모습으로 우리 민족 시련의 상흔을 그대로 드러내고 우뚝 서 있어 연천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6·25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26 제사공장터(製絲工場 -) : 현재 연천읍시가지 시장거리에 있던 제사공장. 일제강점기 때 건립되었으나 6·25로 파괴되어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2·7일 되면 연천장이 서는 장터로 변해 있다.
* 제 보 자 : 한 정 수(86) 연천읍 차탄1리 9반
이 상 우(64) 군남면 황지리 5반
5. 옥산리(玉山里)
본래 연천현 동면의 지역으로, 마을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는 둥근 산이 있어 '오미'라 불리워지던 곳이었으나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는 뜻의 '오미'를 '玉山'으로 표기하여 오늘날의 옥산리로 불리우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에서 연천군 군내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 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하여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6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불견이고개(佛見嶺, 佛峴) : 옥산리 사기막골과 신서면 내산리의 법화골 사이에 있는 큰 고개. 이 고갯마루에서 옥산리·동막리, 신서면 도신리·내산리의 경계가 나뉘어진다. (자세한 유래는 신서면 도신리편 참고)
2 삼태골 : 불견이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삼태기같은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 어두니골 : 삼태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좁고 음지가 되어 항상 어둡고 음침하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4 사기막골(沙器幕谷) : 모정산 동쪽에서 불견이고개 정상까지 있는 큰 골짜기. 조선 후기 때 경영되었던 백자요지(白磁窯址 - 신서면 도신리 지역에 위치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5 꽃봉산(花峰) : 모정산 북쪽, 차탄천변에 있는 경승지. 봄이 되면 이 곳에 펼쳐진 천연절벽 위로 진달래, 철쭉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는 곳이 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이 산 밑에 위치한 소(沼)를 꽃봉소라 하는데, 6·25 전에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갔다는 깊은 소로,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전설을 간직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복이 되고 차탄천에 보(洑)를 막은 뒤부터 꽃봉소가 점차 매몰되어 지금은 옛 모습과 정취를 잃은 상태이다.
6 모정산(茅亭山) : 꽃봉소 남쪽에 있는 둥근 산. 조선 후기 이 곳에 은거했던 병조참판 정래주(鄭來周. 1680 ∼ 1745)가 세운 모정(茅亭 : ≪輿地圖書≫에는 이 정자의 편 액이 "枕流亭"으로 되어 있다)이라는 정자가 있던 산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광무읍지≫에는 이 정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모정은 연천관아에서 동쪽으로 15리 거리인 불견산 아래에 있는데, 참판 정래주가 우거하던 곳으로, 지금도 이 곳에는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원문 : 茅亭在縣東十五里佛見 山下參判鄭來周所居也今其子孫仍居焉)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연천에서 손꼽히는 경승지가 되어 '1. 모정, 2. 은거당 (왕징면 강서리에 있던 미수 허 목의 고택)'이란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한다.
※ 정래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7 불계동(佛溪洞) : 모정산 남쪽에 있는 마을.
8 관자골 : 사기막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9 삼태산 : 관자골 남쪽에 있는 산.
10 독바위 : 관자골 입구에 있는 바위. 그 형상이 큰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1 등미 : 불계동과 안터 사이에 있는 목. 가장골산 등의 끝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2 가장골산 : 모정산 남쪽에 있는 산.
13 사무래이벌 : 모정산 남쪽에 있는 들판. 차탄천변에 퇴적된 모래로 이루어진 들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 앞개울 : 상리와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차탄천(장진천)의 다른 이름이다.
15 낭둥치 : 가장골산 서쪽에 있는 벼랑.
16 망두산 : 가장골산과 당뒤산 사이에 있는 조그만 산. 승의랑 이 분(承議郞 李昐)의 묘에 있는 큰 석물(망주석) 때문에 지어진 산 이름이다.
17 안터(內垈) : 망두산 남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정래주의 후손인 동래정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18 개새낳터 : 안터 남쪽에 있는 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9 당뒤산(堂後山) ; 옥산리 중앙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둥근 산. 당뒤 마을의 뒤에 있는 산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산으로 인하여 오미라는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
20 안터고개 : 당뒤산 동쪽에 있는 고개로, 오미동과 안터 사이에 있다.
21 옥산리 백자요지 I·II(玉山里 白磁窯址 I·II)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 참고.
22 동산이골 : 백자도요지가 있는 큰 골짜기.
23 병무골 ; 동산이골 중앙에 북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
24 감투봉 : 불견이고개 남쪽에 있는 감투모양의 산 봉우리. 동막리와 경계가 된다.
25 문바위골 : 동산이골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마주 대하고 있는 자연석문(石門)이 있어 지어진 골짜기 이름이다.
26 수리봉 : 감투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 하늘을 날아 다니는 수리와는 연관이 없는 단순히 '높은 봉우리'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높이는 377.3m이다. (신서면 대광리 "수리봉" 참고)
27 뫼골 : 동산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8 성지물 : 오미동 북쪽에 있는 우물.
29 동뮈 : 당뒤산 남쪽, 파평 윤씨의 묘가 있는 산.
30 작밭 : 안터고개 아래에 있는 밭. 자갈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1 당뒤(堂後洞) : 당뒤산 아래에 있는 마을. 예전에 신당(神堂)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2 진밋곁 : 당뒤 앞에 있는 밭. 땅이 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33 오미(五味洞) : 당뒤산 남쪽에 있는 마을. 6·25 전에는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었던 곳으로, 옥산리 마을 중앙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당뒤산으로 인하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는 뜻의 '오미'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五味'로 표기하여 쓰이고 있으며, 옥산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34 관산터 : 오미 마을에 있던 관선정 터(觀仙亭址). 조선 영조 때 편찬된 ≪輿地圖書. 1759 - 1765≫ 연천편 고적조에는 이 정자에 대하여 '관선정은 연천 관아에서 동으로 10리 거리에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 하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원문 : 觀仙亭在縣東十里諺傳古有仙人遊此云有遺基)라고 기록이 되어 있을 뿐,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 오지 않고 있다.
6·25 전에는 이 주위에 밤나무, 소나무 고목들이 우거져 있어 오미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군 사격장이 들어서 있어 그 터가 완전히 멸실된 상태이다.
35 군논 : 관산터 옆에 있는 논. 옥산리에서 가장 크다 하여 '큰논'이라 불리워오다 군논으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6 노지말 : 오미 남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군 사격장 지역이 된다.
37 다래우물 : 오미 동쪽에 있는 우물. 주위에 다래넝쿨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8 매봉재 : 오미 동쪽에 있는 산.
39 관산이 : 다래우물 동쪽에 있는 골짜기.
40 매골 : 관산이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 안에 높고 험준한 바위가 많아 매가 새끼를 치던 둥지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1 평풍바위 : 어두니골 7부 능선 지점에 있는 평풍처럼 생긴 바위. 수정이 나온다하며, 전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강씨들이 이 곳에서 피난했다 한다.
42 어두니골 : 평풍바위 아래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좁고 숲이 우거진 음지가 되어 항시 어두운 골짜기 이름이다.
43 새터골 : 매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금을 캤던 금광굴이 있던 곳이다.
44 소반번지 : 새터골 입구에 있는 소반처럼 생긴 버덩.
45 동굴산소 : 오미 남쪽에 있는 동그란 산. 윤씨의 묘가 있다.
46 골밭 : 소반번지 서쪽에 있는 밭. 예전에 전염병이 돌 적에 죽은 아이들의 시신을 이 곳에 버려 늘 여우가 들끓었던 곳이라 한다.
47 귀웅못 : 오미 남쪽, 차탄천변에 있는 못. 소의 먹이통인 구유모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 지금은 매몰된 상태이다.
48 조개못 : 귀웅못 옆에 있는 못. 조개가 많이 서식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9 양금재봉(養金財峰. 310m) : 동막리편 참고.
* 제 보 자 : 허 은(80) 연천읍 상1리
정 하 범(65) 연천읍 상2리 6반
윤 승 오(67) 현가리 2반
김 태 형(61) 상1리 7반
6. 읍내리(邑內里)
본래 연천현 현내면(縣內面)의 지역으로, 조선시대 연천현의 관아가 있어 읍내가 되므로 읍내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현내면이 군내면으로 개칭되면서 군내면 읍내리가 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 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2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지골고개(智惠峴) : 지칫골에서 차탄리 지혜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
2 핑구너머(氷庫踰峴) : 지칫골 남쪽에 있는 산 등성이. 읍내리에 연천현의 관아가 있었을 때 여름에 사용할 목적으로 얼음을 보관했던 저장고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 지칫골 : 핑구너머 서쪽에 있는 골짜기.
4 솟대봉 : 읍내리에 있는 산.
5 개천말 : 솟대봉 북쪽에 있는 마을. 군자산에서 발원하는 작은 개천의 옆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 연당자리(蓮堂 --) : 솟대봉 아래에 있는 연못. 예전에 연꽃이 많이 자생했다 하여 불리워지던 이름. 지금은 이 못이 논으로 변해 있다.
7 아랫말 : 연당자리 부근에 있는 마을.
8 남창말(南倉洞) : 솟대봉 서쪽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연천현에 딸린 남창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고종조의 ≪光武邑誌≫ 창고(倉庫)조에는 "南倉十二間"이라는 간략한 규모만 적혀 있다. 6·25 전에는 밀양 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9 먹적골고개 : 읍내리에서 차탄리 지혜동의 막바지로 통하는 고개.
10 큰고개 : 읍내리 남창말에서 군남면 선곡리로 넘어 다니는 고개.
11 며치골고개 : 읍내리에서 군남면 선곡리의 며치골로 통하는 고개. '작은고개'라고도 한다.
12 괴모골고개 : 며치골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
13 기우제터(祈雨祭 -) : 읍내리 서쪽, 아지봉 산록에 있었던 기우제 터. 조선시대에 가뭄이 심하게 들면 읍내리 주민들이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라 한다.
14 아지봉(阿只峰) : 읍내리 서쪽에 있는 봉우리. 옛 연천현의 진산(鎭山)인 군자산의 북쪽에 있는 산. 군자산에 비하여 작은 봉우리라 하여 '작은' 또는 '낮은'의 뜻을 가진 옛말의 '아지'에서 음을 취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5 윗말 : 남창말 북쪽에 있는 마을. 아랫말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16 관사터(官舍 -) : 아지봉 동쪽에 있는 조선시대 연천현감의 관저(官邸 - 지방관리들이 들어가 살도록 만든 관사)가 있던 곳. 현재는 그 터에 민가(民家)가 있다.
17 쇠공터 : 아지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어떤 장님이 이 곳에서 나는 약수물을 마시고 눈을 떳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8 괴목골고개 : 읍내리에서 군남면 옥계리로 넘어가는 고개. 현재 90번 군도가 나 있다.
19 샘고개 : 괴목골고개 서쪽에 있는 고개. 90번 군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이 고개를 이용하여 군남면의 옥계리로 넘어 다녔다.
20 연천향교터(漣川鄕校址) : 조선시대부터 6·25 전까지 연천군의 향교가 있던 자리. (지정문화재편 참고)
21 윗샘골 : 연천향교터 밑에 있는 마을. 두레박 우물이 있던 곳이다.
22 매봉 : 읍내리와 현가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23 부군터(府君 -) : 매봉 남쪽에 있던 부군나무. 6·25 전까지 무인들이 부군굿을 올렸던 곳이라 한다.
24 가재울고개(加尺峴, 邑峴) : 읍내리에서 현가리의 가재울로 넘어 가는 고개.
25 연천관아터(漣川官衙 -) : 솟대봉 북쪽에 있던 조선시대 연천현의 관아 터. 조선 후기 ≪광무읍지≫에 실린 관아의 규모는 총 79칸으로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객사(客舍) : 6칸, ·동헌(東軒) : 10칸, ·책방(冊房) : 10칸, ·관수고(官需庫) :2칸, ·공방고(工房庫) : 1칸, ·삼문(三門) : 3칸, ·내아(內衙) : 20칸, ·향청(鄕廳) : 10칸, ·무청(武廳) : 9칸, ·사령청(使令廳) : 8칸 등 총 10동의 건물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10년 일제 강점 후 철도가 부설되면서 지형적 조건이 편리한 차탄리 지역으로 군청사가 새로 건립되어 이곳에 있던 관아 건물은 자연히 철거되고 지금은 그 터가 농경지와 민가로 변해 있다.
26 움풍배미 : 연천관아터 옆에 있는 움푹 들어간 논.
27 효자문(孝子門) : 연천관아터 동쪽에 있었던 효자문 자리. 현재 이 효자문에 대한 자료가 전해 오는 것이 없어 자세한 사적은 알 수 없다.
28 축동자리(築 -) : 읍내리 개천말 부근에서 효자문까지 남북으로 있었던 축동나무 자리.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읍내리의 지형이 동쪽에 위치한 차탄천으로 인하여 재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 되어 이 곳에 지기(地氣)를 돕는 수구막이(水口 -) 역활의 축동나무를 심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6·25 이후 이 곳에 있던 밤나무, 전나무 수종의 축동 고목들을 모두 베어 버려 지금은 아무런 자취도 남아있지 않다.
29 연천현감 허 혼 선정비(漣川縣監 許混 善政碑) : 문화유적·유물편 "선정비" 참고.
30 구읍논 : 망곡산 서쪽에 있는 고래실논. 예전에 읍내리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논으로, 봄에 한 되의 종자를 심어 한 섬의 수확을 거두었던 되번지기논이었다 한다.
31 동지중추부사 김 잠 묘(同知中樞府事 金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32 아랫샘골 : 김 잠 묘가 있는 골짜기.
33 망곡산(望哭山) : 차탄리편 참고.
34 연천현감 조 린 선정비(漣川縣監 趙 善政碑) : 문화유적·유물편 "선정비" 참고.
* 제 보 자 : 한 정 수(86) 연천읍 차탄1리 9반
최 성 련(65) 읍내리 1반
7. 동막리(東幕里)
본래 연천현 현내면의 지역으로, 조선 초부터 분청사기, 백자, 옹기 등을 굽던 요업(窯業)이 번창했던 곳이 되어 '독막(陶幕, 甕幕)'으로 불리워오다 차츰 어휘가 변하여 '동막'으로 굳어져('독'뒤에 ㄴ.ㅁ의 음이 따라오면 '동'으로 발음되는 현상에 의해) 한자표기로 '東幕里'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내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 ·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4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동막리 태실 I(東幕里 胎室 I) : 문화유적·유물편 "태실" 참고.
2 망근도리 : 동막리 태실 옆에 있는 마을. 이 곳의 지형이 머리에 쓰는 망건처럼 생겼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 성균관사성 임계중 묘(成均館司成 任繼重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4 오리터 : 임장서원터 서쪽에 있던 큰 연못. 예전에 오리들이 떼지어 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논으로 변해 있다.
5 부물현(復武夷洞) : 임장서원터 남서쪽에 있는 마을. 이 곳의 지형이 중국의 주부 자(朱夫子)가 생장한 고부현(皐阜縣) 무이촌과 흡사하다 하여 '또 다른 무이촌'이라는 뜻의 부무이동으로 명명하였다 한다.
또한 숙종 39년(1713)에 사액된 연천을 대표했던 임장서원은 위와 같은 개연성 때문에 주자를 봉향하는 서원이기도 했던 곳이며, 6·25 전에는 곡성 임씨가 큰 집성부락을 이루었던 곳이다.
6 임장서원지(臨 書院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7 비아골 : 임장서원지 동쪽에 있는 골짜기.
8 아미천(峨嵋川, 九曲川, 동막골개울) : 신서면 내산리의 고대산에서 발원하여 연천읍 차탄리의 차탄천으로 합류하는 준용하천(準用河川). 6·25 전에는 동막리 입구에서 내산리 심원사까지 이르는 동안 열두번을 곡류한다 하여 '열두구비개울'이라고도 불리웠다.
9 용수꾸미 : 부무이동 동쪽, 아미천에 있는 약 4m 깊이가 되는 소(沼). 큰 바위굴이 있어 이무기가 산다는 전설이 전해 오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변해 버렸다.
10 장가물 : 용수꾸미 동쪽에 있는 우물. 예전에 장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동막리에 있었는데, 이곳에 있던 약수물을 그가 매일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매몰되어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11 서낭댕이 : 용수꾸미 동쪽에 있었던 서낭당 터. 지금은 이 곳에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12 동막골(東幕洞) : 부무이동 동쪽에 있는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13 항막술 : 양금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항막골'이라고도 불린다.
14 큰골 : 동막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15 양금재봉(養金財峰. 310m) : 동막골 북쪽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 일설에는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지만, 중국의 주부자(朱夫子)가 생장한 고부현 무이촌과 흡사한 부물현 마을의 지형 조건 때문에 중국 무이촌에 있는 지명을 그대로 옮겨와 명명한 예이다. 중국 무이촌의 한자표기는 "陽琴嶺"으로 되 어 있으나, 지금의 표기인 양금재봉은 세월이 흐르면서 금(金)을 대입시켜 본래의 의미를 벗어난 지명으로 보여진다.
16 자가골 : 양금재봉 동쪽에 딸린 골짜기로, '작은 골짜기'의 뜻을 지닌다.
17 새매기 : 독조골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18 밤나무골 : 자가골 맞은 편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밤나무가 많았다 한다.
19 버섯바위 : 독조골 중앙에 있는 버섯처럼 생긴 바위.
20 호랭이굴 : 자가골 남쪽에 있는 바위굴. 예전에 호랑이가 살았다 한다.
21 오피고개 : 독조골에서 삼봉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6·25 이후 군부대에서 관측소(O.P)를 세웠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2 가마소 : 독조골에 있는 소(沼)로, 모양이 가마솥 같다 한다.
23 독조골 : 동막골에서 새매기까지 있는 큰 골짜기. 조선시대에 백자를 굽던 도요지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그 가마터는 도로개설로 인하여 멸실된 상태이다.
24 기차바위 : 가마소 동쪽에 기차처럼 생긴 바위. 일명 '줄바위'라고도 한다.
25 벌봉 : 동막골 동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로, '덜봉'이라고도 한다.
26 둔치 : 동막골 동쪽, 둔덕에 있는 마을.
27 중수꾸미 : 삼봉동 앞에 있는 큰 소(沼).
28 삼봉동(三峰洞) : 중수꾸미 북쪽에 있던 마을. 이 마을 주위에 보개산 서남쪽의 세 개 봉우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29 자라바위 : 삼봉동 북쪽, 아미천 물 가운데에 있는 자라 모양의 큰 바위.
30 수리봉(477m) : 새매기 북쪽, 옥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옥산리편 참고)
31 열두고팽이 : 수리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감투봉에서 뻗어 내린 산 등이 열두개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2 감투봉 : 수리봉 북쪽에 있는 봉우리로, 감투모양을 하고 있다.
33 여내골 : 감투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얕은'의 다른 말인 '여내'에서 뜻을 따온 낮은 골짜기 이름이다.
34 법화골(法華洞) : 불견이고개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신서면 내산리편 참고)
35 왜둔치(瓦屯洞) : 여내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기와말'이라고도 불리웠으며, 현재 군 유격장이 있다.
36 작은왜골 : 왜둔치 동쪽에 있는 골짜기.
37 큰왜골 : 왜둔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왜골에 상대되는 지명이다.
38 신주바위 : 왜둔치 남쪽, 아미천변에 수직으로 솟은 넓고 큰 바위.
39 동막리 분청사기요지 I(東幕里 粉靑沙器窯址 I)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 참고.
40 벌바위골 : 청소년수련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어떤 사람이 벌을 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1 동막리 분청사기요지 II(東幕里 粉靑沙器窯址 II)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참고.
42 피묵골 : 벌바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43 벙골(富興洞) : 자라바위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강릉 김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44 성재(城嶺) : 벙골에서 부곡리 가마골로 넘어가는 고개. 동막리 산성의 뒤에 있는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5 동막리 성령산성(東幕里 城嶺山城)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46 찬우꾸미( 翠巖) : 삼봉동에 있는 경승지로, 조선 고종 때에 편찬된 ≪光武邑誌≫에는 '찬취암은 연천관아에서 동쪽으로 10리 쯤에 있는 경승지로, 층층이 쌓여있는 크고 험한 바위들이 서로 마주 대하며 서 있는 형상인데 일명 '삼봉암(三峰巖)'이라고도 한다. 주위에 골짜기는 깊고 그윽한데 그 사이를 흐르는 아미천의 깊고 푸른 물은 바위 위에 피어난 많은 꽃들과 골짜기에 푸른 소나무와 함께 어우러져 경치는 가이 선경이라 할 만한 곳이다. 또한 이 곳에는 연천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면 보개산에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단이 있다.' -- 翠巖在縣東十里許層巖鼎 峙一名三峰巖洞壑深邃溪潭湛泓巖花澗松景致殊絶有祈雨壇 -- 라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 현종조에 편찬된 ≪東國輿地志. 1656년≫에는 연천 현감직에 있었던 오음 윤두수가 이 곳의 경치에 매료되어 '찬취암'이라 명명했다는 간략한 기록도 보인다.(원문 : 翠巖在寶盖山上高聳蒼翠通望遠近本朝尹斗壽縣監時遊其上名之) 또한 조선 후기 연천현감을 역임했던 청천 신유한(靑泉 申維翰)의 문집≪靑泉集≫에 있는 「 翠巖記」,「寶盖山川祈雨文」등의 기록에서도 이곳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 일대가 유원지로 개발되어 많은 피서객과 탐승객들이 찾아오는 명승지가 되어 있다.
47 지당물(池塘 -) : 현 동막리 유원지에 있는 소(沼).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곳에 절이 있어 이 소의 물로 매일 아침 불전에 다례(茶禮)를 올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8 동이점모퉁이 : 삼봉동 남쪽에 있는 모퉁이. 옛날 이 부근에 동이(옹기)를 굽던 요지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9 낚시내골 : 둔치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서 낚시를 즐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50 등정거리 : 동막리 산성에서 샘골로 뻗어 내려온 산 등.
51 풍혈(風穴) : 동막동 남쪽에 있는 천연 바위 굴. 전체 깊이 16m. 높이 2,2m 규모로 무더운 여름철에는 얼음이 녹지 않을 정도로 찬 공기가 흘러나와 추운 겨울을 연상케 하고, 반대로 겨울철에는 얼음이 얼지 않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 오르는 기현상을 보이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냉동시설이 불비했던 관계로 이 곳에다 잠종(蠶種) 1,000여매를 저장했다 한다.
52 범바위 : 풍혈 서쪽에 있는 바위. 부엉이집이 있다 하여 '벙바위'로도 불리운다.
53 너벅소 : 풍혈 북쪽, 아미천에 있는 넓은 소(沼).
54 피반나저리소 : 너벅소 아래에 있는 소.
55 옛날소 : 서낭댕이 남쪽에 있는 소. 현재 매몰되어 남아 있지 않다.
56 동막리 태실 II(東幕里 胎室 II) : 문화유적·유물편 "태실" 참고.
57 도장골 : 태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도장주머니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 오나, '산 안쪽의 골짜기'란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군남면 왕림리 "도장골" 참고)
58 애기봉 : 샘골 남쪽, 통현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작은 봉우리가 되어 아기에 비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9 샘골(泉谷) : 태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샘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가 끝난 후 마을이 새로 형성되어 있다.
60 옻우물 : 샘골 서쪽에 있는 약수. 옻 오른데 효험이 있다 한다.
61 애미내벌(峨嵋川坪) : 부물현 남쪽, 차탄천까지 펼쳐진 넓은 들. 아미천이 흐르는 옆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이 호 근(84) 연천읍 동막1리 샘골
이 우 창(65)
임 석 준(75) 부물현
8. 통현리(通峴里)
본래 연천현의 현내면 지역인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현내면을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면서 통재에서 이름을 따 하나의 법정리인 통현리라 하여 군내면에 속하게 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2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가사평(袈裟坪) : 통재 남쪽, 전곡 지역까지 펼쳐져 있는 넓은 들. (전곡읍 은대리편 참고)
2 가래나무골 : 가사평에 있는 우묵한 골짜기. 예전에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 수달피굴 : 통재마을 서쪽, 장진천 절벽에 있는 천연굴. 6·25 전까지도 수달이 서식했던 곳이라 한다.
4 배산(舟山. 92,7m) : 통재 서쪽, 차탄리와 경계에 있는 둥근 산. 배가 물 위에 떠가는 형상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이 산 중앙에 수 길 깊이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확인이 어렵다.
5 통재(通峴) : 통현리와 동막리, 차탄리 경계에 있는 고개. 현재 이 고개로 3번 국도가 나 있고 6·25 전에는 주변에 전주 이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6 통현리 지석묘군(通峴里 支石墓群)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7 새말(新村) : 현 통재마을 북쪽에 있던 마을. 일제 강점 초기에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8 위러지 : 새말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오로지'라고도 불리운다.
9 비석거리 : 새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도로 옆에 조선 중기 전옥서봉사(典獄暑奉事, 贈領議政)를 역임한 김득원(金得元)의 신도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예조판서 김첨경 묘(禮曹判書 金添慶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1 이조판서 김상성 묘(吏曹判書 金尙星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2 애기봉 : 김상성 묘 북쪽에 있는 봉우리. (동막리편 참고)
13 건쟁이(乾貞洞, 팔판서마을) : 통재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까지 강릉 김씨 25호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조선 중기에서 후기까지 팔판서가 배출되있던 유서 깊은 곳이며, 연천 관내에서 강릉 김씨의 명성과 권세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높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군부대가 들어서 있어 민간인 살고 있지 않다.
14 가마봉(釜峰) : 건쟁이 동쪽에 있는 봉우리. 가마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고문리와 경계가 된다.
15 오봉고개(五峰峴) : 건쟁이에서 고문리의 오봉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16 수리봉 : 건쟁이 남쪽에 있는 봉우리. 하늘에 날아다니는 수리와 연관이 없는 단순히 '높은 봉우리'의 뜻을 가진 곳이다.(신서면 대광리 참고)
17 예조판서 김시환 묘(禮曹判書 金始煥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8 능안(陵內) : 김시환 묘 서쪽에 있는 골짜기. 회인현감 김종윤(金宗胤), 예조판서 김시환 등의 강릉 김씨의 큰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9 성균관대사성 김상규 묘(成均館大司成 金尙奎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0 고돌이 : 김첨경 묘 남쪽에 있는 골짜기.
21 예조판서 김상익 묘(禮曹判書 金尙翼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2 방메 : 김상익 묘 남쪽에 있는 골짜기.
23 남봉고개(南峰峴) : 통현리와 고문리 사이에 있는 고개.
24 작은금장골 : 통현리 지석묘 북쪽에 있는 골짜기.
25 금장골 : 통현리 지석묘 동쪽에 있는 골짜기.
26 금장골고개 : 금장골에서 고포리로 넘어 가는 고개.
27 통현리 지석묘(通峴里 支石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28 홈방골 : 고포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29 능골 : 홈방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강릉 김씨의 큰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0 고포리 : 통현리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 1950년 6·25 당시 이 마을 앞 벌판에 고사포부대가 주둔하며 피난민을 입주시켜 마을이 새로 형성되자 주둔 부대장이 이 마을을 고사포부대와 인연이 있다 하여 고포리라고 명명하였다 한다.
* 제 보 자 : 오 흥 만(66) 연천읍 통현1리
9. 고문리(古文里)
본래 연천현 현내면의 무수동리(無愁洞里) 지역인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무수동리를 고문리로 개칭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 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3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느즌모루 : 아랫삼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 이 곳의 지형이 '낮은 산 모퉁이'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청산면 장탄리의 풀무산과 연관시켜 모루(隅)를 대장간의 연모인 '모루'와 같다 하여 풍수지리설에 연관된 것 처럼 해석하고 있다. 한자로는 '晩隅洞'으로 씌어지고 있다.
2 붉은덕고개 : 느즌모루에 있는 고개.
3 붉은데기(赤峴) : 느즌모루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 흙빛이 붉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 남봉고개(南峰峴) : 고문리와 통현리 사이에 있는 고개.
5 함경도관찰사 김계하 묘(咸鏡道觀察使 金啓河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6 원배미골 ; 김계하 묘 동쪽에 있는 골짜기.
7 선바위 : 수리봉 남쪽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
8 수리봉 : 남봉고개 동쪽, 통현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9 오봉고개(五峰峴) : 오봉동에서 통현리의 건쟁이로 넘어 다니던 고개.
10 오봉동(五峰洞) : 오봉사지 입구에 있는 마을.
11 가마봉(釜峰) : 오봉고개 동쪽에 있는 봉우리. 통현리와 경계가 되며 가마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2 허궁다리(虛空橋) : 오봉사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큰 돌다리가 있었다 한다.
13 오봉사지 부도(五峰寺址 浮屠) : 지정문화재편 참고.
14 오봉사지(五峰寺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15 안장봉(鞍峰) : 오봉사지 뒤편에 있는 봉우리. 안장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6 고문리 일명사지(古文里 逸名寺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17 낡은절골 : 오봉사지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고문리 일명사지가 빈대로 폐사가 되어 낡은절이 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무엄밭골 : 오봉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19 당재너머 : 오봉동에서 무시울로 넘어 다니던 고개. 예전 이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 한다.
20 아랫삼거리 : 느즌모루 동쪽에 있는 삼거리. 통현리·고문리·신답리로 갈라지는 삼도품이 된다.
21 도정 임기창 영세불망비(都正 任基昶 永世不忘碑) : 문화유적·유물편 "선정비" 참고.
22 덕고개 : 아랫삼거리에 있는 고개.
23 무시울(無愁洞) : 아랫삼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이 곳은 현재 불리워지고 있는 '무시'와 한자표시인 '무수'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아래와 같은 본래의 뜻을 담고 있는 곳이다.
전국적으로 '무수' 또는 '무시'의 땅이름을 가진 곳의 공통점과 어원의 분석을 통해 보면 모두다 '물'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고어로 '믄', '믐', '뭇', '믈'로 발음과 표기가 되어왔는데, 무시울의 어근은 '뭇'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매개모음 '의'가 개입되고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의 무시울로 정착되어 쓰이게 된 것이다. 뭇 + 울 = 뭇(의) 울 > 무승울 > 무시울 즉, 고문리 무시울의 뜻은 '마을 밖으로 한탄강이 크게 휘돌아 흐르는 곳'으로 풀이 되어야 하는데,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단순히 발음 그대로인 '무수'를 아무런 연관이 없는 '無愁'로 음차하여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땅이름이다.
24 꽃창모루 : 무시울과 번드리 사이에 있는 산 모퉁이.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 선대 묘를 쓰고 그 주위에 진달래, 철쭉, 개나리 등의 꽃나무를 많이 심어 매년 봄이 되면 활짝 핀 꽃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5 삼거리 : 고문초등학교 남쪽에 있는 삼거리. 무시울·재인폭포·신답리로 가는 세 갈래 길이 된다.
26 번드리(返道洞) : 고문초등학교 주위에 있는 고문1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들이 번듯하고 넓다 하여 '번'과 '들'이 합쳐지며 '번들이 > 번드리가 되었으나, 한자로는 반도동으로 씌어지고 있는 곳이다.
27 불탄소 : 번드리 동쪽, 한탄강에 있는 소(沼). 현재 농업용수 취수장이 있다.
28 진사래밭 : 번드리 동쪽에 있는 긴 밭.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29 장승모루 : 진사래밭 북쪽에 있는 모퉁이.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0 아가바위골짜기 : 장승모루 북쪽에 있는 골짜기.
31 가래동 : 장승모루 동쪽에 있는 마을.
32 귀웅소 : 가래동 동쪽, 한탄강에 있는 소(沼). 소의 먹이통인 구유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3 고문리(古文洞) : 토토봉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고문2리의 중심지가 된다. (부곡리 "재인폭포" 참고)
34 연당(蓮堂) : 고문리 중앙에 있는 집.
35 토토봉(411,2m) : 고문동 서쪽에 있는 두 개의 높은 봉우리.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특이하게 톡 볼가져 나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6 작은토토봉 : 토토봉 동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
37 썰래터 : 작은토토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38 복호낭 : 작은토토봉 북쪽에 있는 긴 낭떠러지.
* 제 보 자 : 이 태 식(70) 연천읍 고문2리
임 영 진(70) 옥산3리 (태양주택)
10. 부곡리(釜谷里)
본래 강원도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 관인면(官仁面)의 하리(下里) 지역인데, 조선 고종 43년(1906)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의하여 관인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연천군 지역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재인폭포 북쪽에 있는 가마골에서 이름을 따 부곡리라 하였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포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577호"에 의하여 관인면에서 부곡리 지역만 다시 연천군 연천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6·25 이후 전지역이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는 곳이다.
1 재인폭포(才人瀑布) : 가마골 입구에 있는 18.5m 높이의 폭포. 현재 이 폭포는 고을 원의 탐욕으로 인한 재인의 죽음과 그 아내의 강한 정절이 얽힌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전설과는 상반된 기록으로도 전해 내려 온다.
옛날 어느 원님이 이 마을에 사는 재인(才人) 아내의 미색을 탐하여 이 폭포 절벽에서 재인으로 하여금 광대줄을 타개한 뒤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절개 굳은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짓으로 수청을 들며 원님의 코를 물어 뜯고 자결하였는데, 그후부터 이 마을을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코문리'라 불리워지게 되었으나, 차츰 어휘가 변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반면, 조선 영조조(1765년)에 편찬된≪輿地圖書≫ 연천현 산천조에는, '재인폭포는 연천관아에서 동쪽으로 20리 거리인 원적사(圓寂寺) 동구에 있는데, 벽립(壁立)해 있는 양 절벽사이로 수 십길 높이를 수직으로 흐르며 떨어진다. 옛날에 한 재인(才人)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과 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게 되었으나, 그 마을 사람의 아내가 매우 미모가 뛰어난고로 자기 재주를 믿고 흑심을 품은 재인은 그 자리에서 장담하며 약속하기를,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 !.'라고 호언장담하자, 마을 사 람은 재인의 재주를 믿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게 되었다. 잠시 후, 재인은 벼랑 사이에 놓여 있는 외줄을 타기 시작하는데, 춤과 기교를 부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평지를 걸어가듯 하자 이에 다급해진 마을 사람은 재인이 줄을 반쯤 지났을 때 줄을 끊어 버려 재인은 수십 길 아래 구렁으로 떨어져 죽게 되었고 이 러한 일로 인하여 이 폭포를 재인폭포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원문 : 才人瀑 在縣東二十里圓寂寺洞口懸流數十丈兩崖壁立古有一才人與村氓遊此悅其氓之妻美約日繫 繩兩崖我能步過氓不信遂約以奪妻才人舞蹈如履平地半過氓斷其繩才人落死坑中仍爲名) 라고 기록되어 있어 두 가지의 상반되는 전설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재인폭포는 보개산과 한탄강이 어우러지는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맑은 물로 인하여 사시사철 탐승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연천군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가마소(釜沼) : 재인폭포 위에 있는 소(沼). 모양이 가마솥처럼 동그랗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 해골 : 재인폭포 서쪽에 있는 골짜기.
4 산제당터 : 해골 북쪽에 있는 산제를 올리던 터. 6·25 전까지 가마골 주민들에 의해 매년 정월 초에 소를 잡아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특히 이 곳에는 큰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으나, 6·25가 일어나기 이틀 전에 원인모르게 부러져 전쟁을 예고했던 영험한 나무였다고 한다.
5 퉁막골 : 작은골 안에 있는 골짜기.
6 홀짝골 : 퉁막골 위에 있는 골짜기.
7 명지미기 : 무당소 서쪽에 있는 골짜기.
8 성재(城嶺) : 작은골에서 동막리의 벙골로 넘어가는 고개. 동막리 산성의 뒤에 있는 고개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9 불당골(佛堂谷) : 명지미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일방아골 : 무당소 북쪽에 있는 골짜기.
11 무당소 : 작은골 중앙에 있는 소(沼).
12 작은골 : 가마골 안에서 서쪽으로 있는 큰 골짜기.
13 가마골(釜谷) : 재인폭포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골짜기 안에 숯가마가 많았다 하여 가마골이라 불리워진다 하지만, 실제 '크다'는 뜻의 고어인 '감'과 '골'이 합하여 '감골'이 되었다가 그 중간에 매개모음 '의'가 개입되어 '감의골'이 '가마골'로 불리워오다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음 차되어 실제 뜻과는 거리가 먼 '釜谷'으로 의역되어 엉뚱한 이름 풀이가 된 골짜기 이름이다.
가마골은 재인폭포에서 다라미고개까지 있는 '큰골'과 그 왼쪽인 '작은골'을 합친 전체의 큰 골짜기 이름이기도 하며, 6·25 전 이 골짜기 안에는 전주 이씨들이 살았고 관인면이 철원군에서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최초의 관인면사무소가 이 곳에 있기도 하였다.
14 큰골 : 재인폭포에서 다라미고개 정상까지 있는 가마골 내의 큰 골짜기.
15 성지골 : 큰골 입구에 있는 골짜기.
16 작은농바위골(= 작은은바위골) : 성지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 안에 농짝같은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7 큰농바위골(= 큰은바위골) : 작은농바위골 위에 있는 골짜기.
18 과바위(過岩) : 큰골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예전에 다라미고개로 올라가자면 이 바위 밑을 모퉁이를 지나가듯 굽어서 돌아가야 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이 바위 옆으로 곧은 도로가 나 있다.
19 찍쩍골 : 과바위 서쪽에 있는 골짜기.
20 외나무다리골 : 과바위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이 골짜기 입구에 외나무다리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1 원적사지(圓寂寺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22 지튼골 : 원적사지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23 다라목골 : 지튼골 북쪽, 다라미고개에 딸린 골짜기.
24 다라미고개 : 가마골에서 신서면 내산리의 절골로 통하는 높고 큰 고개.
다라미의 어원은 고구려 계통에 많이 나오는 산(山)의 옛 음인 '달(達, 月)'이 '달아 > 다라'로 연철되어 변하는 과정에서 뒤에 산의 원음인 '뫼'가 발음 습관에 따라 변한 '미'와 '고개'가 합친 '다라미고개'가 된 것으로, 원래 '높이 솟아 있는 산 사이의 고개'라는 뜻임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아무런 의미 없이 음차 한 한자 표기의 '多羅美峴'으로 되어 있다.
25 수내미 : 큰골 가장 북쪽에 있는 골짜기.
26 가치목(加齒項) : 큰골과 지장골 사이에 있는 목.
27 가치봉(加齒峰) : 가치목 남쪽에 있는 바위봉우리. 치아처럼 생긴 길고 큰 바위들이 열지어 서서 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8 새대기 : 가치봉 남쪽, 높은 곳에 있는 넓은 평지. 억새풀이 많이 자라는 곳이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29 가치목골(加齒項谷) : 원적사지 동쪽, 가치봉 밑에 있는 골짜기.
30 퍼렁소 : 원적사지 남쪽에 있는 소(沼). 약 5m 높이의 퍼렁소폭포 밑에 있는 이 소는 6·25 전에 가마골 내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으로, 이 소에 명주실을 담그면 고문리 한탄강에 있는 귀웅소로 나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이 소를 메워버려 지금은 깊고 푸른 옛 모습을 찾 아볼 수 없게 되었다.
31 나막골 : 외나무다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32 돌고개 : 과바위 북쪽에 있는 고개. 원적사지까지 오르는 일부 구간에 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3 숫돌바위 : 과바위 위에 숯돌처럼 생긴 바위.
34 과바위골짜기 : 과바위 동쪽에 있는 골짜기.
35 가는골 : 큰농바위 동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36 초막골(草幕谷) : 가는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초막이 있었다 한다.
37 칡목이(葛項洞) : 가마골 동쪽, 벌판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인동 장씨가 많이 살았던 곳으로, 이 곳의 칡목은 이 마을과 뒷골 사이의 고개를 뜻하며 예전에 칡넝쿨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8 두태봉(頭泰峰) : 칡목이 동쪽에 있는 봉우리. 정상부분 전체가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9 점말(店村, 沙器幕) : 두태봉 북쪽에 있던 마을. 조선 초기에 번성했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0 부곡리 일명사지 I(釜谷里 逸名寺址 I)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41 부곡리 분청사기요지(釜谷里 粉靑沙器窯址)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 참고.
42 뒷골 : 점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점말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3 부곡리 일명사지 II(釜谷里 逸名寺址 II)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44 가치목골 : 뒷골 북쪽, 가치봉쪽으로 있는 골짜기.
45 덜거렁바위 : 지장동 입구에 있는 약 8m 높이의 바위. 윗부분에 천연적으로 올려져 있는 바위 모양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이 들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6 지장골(地藏洞) : 점말 북쪽에 있었던 마을. 신라말 조선 초에 있던 유명한 사찰인 지장사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7 옹장골 : 지장동 서쪽에 있는 입구가 좁고 안이 넓은 골짜기.
48 병풍바위(屛風岩. 赤壁) : 옹장골 안에 있는 병풍처럼 생긴 큰 바위절벽. 바위색깔이 붉어 '붉은벽낭'으로도 불리워지는 이 곳은 6·25 전까지도 호랑이가 많이 나타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49 찬물내기 : 병풍바위 옆에 있는 좁은 골짜기. 얼음처럼 차가운 약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0 불선바위골 : 옹장골 안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부처가 서 있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1 절터밭골 : 지장사지 옆, 화전밭 터가 있는 골짜기.
52 지장사지(地藏寺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53 검은박골 : 지장사지 북쪽에 있는 골짜기.
54 북대(北臺) : 삼형제바위 서쪽, 포천군 관인면 중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유래는 자세하지 않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땅이름으로 보인다.
55 삼형제바위(三兄弟岩) : 지장동 북쪽에 우뚝 솟은 세 개의 큰 바위. 그 모습이 삼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6 큰고개 : 지장골에서 관인면 중리의 큰골로 넘어 가는 고개.
57 문바위골 : 큰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58 사태나무골 : 문바위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59 향로봉골짜기 : 문바위골 남쪽, 향로봉에 딸린 골짜기.
60 향로봉(香爐峰. 616m) : 지장동 동쪽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향로와 같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1 사기막고개(沙器幕峴) : 부곡리와 포천군 관인면 중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 부곡리에 있는 사기점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62 부곡리 백자요지(釜谷里 白磁窯址) : 문화유적편 "도요지" 참고.
63 사기터골 : 백자요지 옆에 있는 골짜기. 조선 후기에 경영되었던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4 부곡리 옹기요지(釜谷里 甕器窯址)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 참고.
65 작은두묵골 : 점말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두묵골에 상대되는 지명이다.
66 구들데기 : 두태봉 동쪽에 있는 둔덕. 6·25 전까지도 이 곳에서 나는 구들돌을 주변 마을에서 많이 캐 갔던 곳이다.
67 큰두묵골 : 두태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山)' 또는 '등성이'를 뜻하는 고어의 '둠'에 뿌리를 둔 땅이름으로, '둠'과 '골'이 합하여 '둠골'로 불리웠던 것이 '둠'이 '둠( ) 골 > 두ㅁ골 > 두무골 > 두묵골'로 연체되어 굳어진 '산골짜기'를 뜻하는 이름이다.
68 종자산(種子山. 642,8m) : 두태봉 동쪽, 포천군 관인면 중2리와 경계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아주 예전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이 산 정상이 종지(種子는 그릇의 일종인 '종지'의 대역자로도 쓰인다.)만큼 남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69 부곡리 고려고분군(釜谷里 高麗古墳群) :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70 다락터(樓垈) : 한탄강 북쪽, 고려고분군 주위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누각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 오나, 원래의 의미는 산(山)의 옛 이름인 '달'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이 마을은 보개산 남쪽의 높은 산인 종자산, 가마봉, 보장산 등이 주위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山村)인데, 아래와 같이 '달(山)'과 '터(垈)'가 합하며 어휘가 변하여 '다락터'로 불리우게 되었고, 다시 한자로 음차하여 전혀 다른 뜻의 '다락터(樓垈)'가 된 곳이다. 달ㅇ터 > 달아터 > 다라터 > 다락터
71 샛말 : 다락터와 문지터 사이에 있던 작은 마을. 6·25 전에는 안동 권씨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72 문지터(文址基) : 다락터 서쪽에 있던 작은 마을.
73 개옻약수 : 문지터 남쪽, 한탄강 절벽에 있는 약수. 많은 양의 맑은 물이 폭포와 같이 장관을 이루며 떨어지는 이 약수폭포는 6·25 전까지도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이 찾던 명소이다.
74 총대여울 : 부곡리 안터와 포천군 창수면 신흥리 사이에 있는 한탄강 여울.
75 안터(內垈) : 가마봉 남쪽에 있던 마을.
76 시강원보덕 이민곤 묘(侍講院輔德 李敏坤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77 낟가리바위(露積岩) : 가마봉 남쪽, 한탄강변에 있는 큰 바위. 그 모양이 곡식을 쌓아둔 노적가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8 가마봉(釜峰. 282m ) : 재인폭포 동쪽에 있는 가마처럼 생긴 바위 봉우리.
79 재인고개(才人峴) : 칡목이에서 재인폭포로 넘어 가는 고개.
* 제 보 자 : 이 필 흥(81) 포천군 관인면 초과2리
이 태 식(70) 연천읍 고문2리
첫댓글 모리아파서리
어렸을적 듣고 부르던 지명이랑 쪼께 다르군요. 하지만 새록새록 많은 지명이 머리속에 되 살아나는군요. 잘 배워 갑니다. 감사 드립니다. 지기님
아 정말 대단 하십니다 지명을 찿아서 사연을 찿아서 많은 분들도 만나 보셨군요 협조 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꽃봉이님 제보자들을 제가 일일이 만난 것은 아니고요. 이 자료는 94년도 자료입니다.군청 홈페이지와 네이버 다음에서 옮겨 오는데 틀린 부분도 많아 수정도 하고 워드로 끌어다가 수정 작업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답니다. 감사합니다.
읍내리의 지명중 제가알고있는 것과 틀린곳이 있네요 현재 군도의 고개는 재장골 고개이고 샘고개에는 성황당이 있어서 서낭당 고개라 불리기도했어요 또 일부 빠진곳이 용의머리 비석거리 지금은 없어진 솟대봉이 사실은 남성의 거시기모양이라하여 ㅈ대봉이라는것 (건너편에는 여성의 지형이라고함) 이곳에 묘를 쓰면 연천군 의 제일 큰동리인 읍내리에 화가미친다하여 누가 몰래 묻지도 못했다네요 전에 한글학회인가 어디서 지명과 유래를 조사해간 학자가있었다고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이곳에 표기된 지명들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오는 말을 그대로 올렸기 때문에 조사과정에서 약간 다른 답을 들을 수도 있거든요. 다음번 향토사료집을 만들때에는 나물꾼 후배의 도움을 약간 받아야 할 듯 하네요 향토사료집은 문화원에서 발간 하거든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