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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2 12:41 정운현
오늘은 임종국 선생의 20주기 기일입니다. 1929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인, 문학평론가, 재야사학자 등으로 불렸는데, 그 가운데서는 친일파 연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초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천안으로 내려가 밤나무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활하셨는데, 1989년 폐기종으로 타계하실 때까지 오직 친일파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셨습니다. 강단사학계의 어떤 자는 선생은 두고 '넝마주이'라며 얕잡아보기도 했습니다만, 선생의 기개와 열정을 능가하는 이를 전 여태 본 적이 없습니다. 1966년 선생이 대표저서인 <친일문학론>을 출간했을 때 한국의 지성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으나 자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요즘처럼 지식인의 기개와 양심이 그리운 때도 없다 할 것입니다. 선생의 20주기를 맞아 신산의 삶을 살다가신 선생이 더욱 그립습니다. 이에 선생의 희생적 삶과 탁월한 연구성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06년 이맘때 선생의 17주기를 맞아 필자가 펴낸 <임종국평전> (시대의창 펴냄)을 여기 연재하기로 합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필자 주
2006년 11월 필자가 펴낸 <임종국평전> 표지
<제1부> 잘못 끼워진 첫 단추-방황과 좌절의 시절
- ‘그’를 찾아 3남과 ‘여행’을 떠나며
서울에서 출발해 경남 창녕-합천-충남 천안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는 먼 길이다. 3남 정택에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첫아이를 임신해 만삭이 된 아내를 두고 일요일 하루 종일 집을 비운다는 게 마음에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출발 하루 전 날 정택(1974년생, 회사원, 경기도 일산 거주)은 동행하겠다고 내게 알려왔다. 나는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물난리가 끝나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2006년)8월 20일. 나는 새벽 4시 30분 정각에 정택과 만나기로 약속한 독립문 사거리 인근 영천시장 건널목에 도착했다.
정택이 타고 온 차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인근 자판기에서 율무차 한 잔을 뽑아들자 그 순간 정택이 타고 온 차가 눈에 들어왔다. 정택은 집이 코앞인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산서 출발했으니 나보다 한 시간은 먼저 일어났을 것이다. 차에 오르면서 나는 “내 일이지만 부친 일이기도 하니 기쁜 마음으로 다녀오자”고 했더니 그는 이미 그리 마음먹고 나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율무차 컵이 비자 차가 출발했다. 그의 궤적을 찾아 나선 나와 3남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빈속으로 출발한 두 사람은 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을 비웠다. 이윽고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아침 6시’였다. 태풍이 막 소멸된 주말 이른 아침은 날씨는 맑았고, 우리 두 사람의 기분도 상쾌했다. 둘 다 보고픈 사람을 그리며 그를 찾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둘을 태운 ‘9인승’ 차는 텅빈 고속도로를 힘차고도 가뿐하게 내달렸다. 당일치기여서 나는 메모장과 디지탈카메라 하나를 담은 가방 하나를 달랑 챙겨 나섰다. 그런데 운전석 뒷자리에 보니 그런 가방이 하나 더 있었다. 웬 가방이냐고 했더니 카메라를 넣어왔다고 했다. 설명은 안했지만 나와 동행하면서 아버지의 흔적을 담고자 함인 듯 했다. (* 실지로 정택은 곳곳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많은 사진을 찍었다)
정택이와는 이미 몇 번 만난 적이 있어 서먹한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 둘이 있기는 처음이다. 먼 거리를 다녀오자면 심심풀이로라도 얘깃거리가 필요하겠지만 둘이 얘기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은 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택의 부친, 그러니까 내가 쓰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선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도 적지 않지만 이번 인터뷰 과정에서 새로 알게 된 것도 적지 않다.
어쩌면 그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 내가 더 많이 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궁금한 것은 자녀들이 그를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워밍업 식으로 먼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라고 가볍게 주문했다. 정택의 말문은 어렵지 않게 터졌다. 머리 속에서의 작문이 아니라 마치 누에가 실을 뽑듯 정택은 말을 이어갔다.
“학교 갔다 오면 늘 원고 쓰시는 모습뿐이었습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께 어리광 부리고 자랐겠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어리광 부려본 기억이 전혀 없어요. 아버지였지만 가까이 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겐 가히 절대적인 존재였죠”
정택(1974년생)이 부친이 돌아가신 1989년까지 16년을 같이 산 기억의 편린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이번 평전 집필 건으로 정택의 모친, 즉 그의 아내를 청량리 인근에서 다시 만났다. 이 여사(이연순, 1947년생, 서울 거주)는 말끝마다 남편을 일러 ‘임 선생님’ 또는 ‘우리 임 선생님’이라고 했다. 여느 아내들처럼 ‘정택이 아빠’ 또는 ‘수연이 아빠’ 이런 식이 아니었다.
임종국 선생의 부인 이연순씨
30년을 같이 살고, 세 아이를 낳은 사이지만 남편과의 사이에선 그 뭔가의 어려움, 혹은 ‘쉽지않음’이 존재했었음이 읽혀졌다. (* 물론 이 여사는 남편인 그와는 18세 나이 차이가 있었고, 또 그의 두 번째 결혼상대였음은 감안하기로 한다) 정택의 얘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거의 ‘절대복종’이었다고 한다. 부친은 모친에게 잔소리를 더러더러 했는데, 어떤 때는 조선시대 얘기부터 시작해서 몇 날 며칠간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내와 3남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그는 가족에게는 그리 살갑고 따뜻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비단 가족들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지켜본 사람들도 그 점은 대개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나 열에 열 모든 구석이 다 그랬을까? 누구에게나 한 구석에는 따뜻한 정은 있는 법. 그도 역시 그랬다. 정택도 그것을 인정했다.
“가끔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시면 빈손으로 오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늘 제과점에 들러 과자를 사오시곤 했습니다. 또 내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나를 당신 무릎에 앉혀서 첼로나 클래식 기타를 가르쳐 주시곤 했다. 그럴 땐 깊은 정이 느껴졌습니다”
어렵기만 했던, 어떤 면에서는 ‘남과 같은’ 아버지, 경제적으로는 쪼들려 아이들에게 궁색해 보였던 아버지, 그래서 기억의 저편에서는 더러 원망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대한 ‘평가’는 과연 어땠을 지가 궁금했다. 열여섯에 아버지를 여읜 아들에게는 다소 가혹한 질문이었겠지만 우선 내 궁금증을 풀 요량으로 다시 물어 보았다.
임종국 선생과 3남 정택. 1974년생인 정택의 나이로 봐 천안으로 내려간 직후의 사진으로 보인다.
“집안이 가난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 불만은 없었습니다. 다만 같은 또래들처럼 TV 같은 것을 보지 못하고 또 친척집엘 거의 못 가봐서 그런 점은 다소 불만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았습니다. 학기 초 학교에서 학생 인적사항을 파악할 때 부모 직업란에 문학평론가, 시인이라고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역사학자라고 적어서 냈습니다. 담임선생님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때부터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는 알았고, 또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 어렵기만 했던, 그러나 자랑스런 아버지
한편 아들과 아내에 비해 딸에게는 종국도 대하는 게 좀 달랐던 것 같다. 장녀 수연(1969년생, 충북 음성 거주, 두 딸의 엄마)은 얘기가 좀 다르다. 수연이는 우선 아버지에게 귀염을 받고 자랐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리움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화통화를 마칠 무렵 수연은 “모처럼 아버지 얘기를 하니까 눈물이 날려고 한다”고 했다. 수연이 얘길 들어보자.
“어릴 때 나는 아버지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귀염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건 내가 첫아이이자 딸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외부에 특강을 가시거나 출판사에 볼일이 있어 가실 때는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언젠가 배재대에 따라 간 기억이 납니다. 또 천안 삼룡동 시절 집이 외지다 보니 과외 같은 걸 하기가 어렵자 아버지께서 내게 영어를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젠가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등교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아버지가 집 아래 있는 저수지 밑에까지 눈을 치워주신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앞에서 빗자루로 눈을 치우면 우리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죠.
평소 내색을 잘 안하시는 성격이지만 자상하신 면도 많았습니다. 또 하루는 아버지께서 정택이에게 먹물을 갈도록 시키신 뒤 그걸 손바닥에 묻히시더니 당시 막 출간된 <한국문학의 민중사> 속표지 백지에 손도장을 찍어 주시며 ‘나중에 내가 생각나면 보라’고 하시더군요. 전 아직도 그 ‘선물’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하시는 일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특히 어머니가 힘드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와 같이 사는 여자는 누구나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이룩한 성과가 있다면 그건 어머니가 뒷받침을 잘 하신 때문입니다.” (* 수연이와의 대화는 9월 중순 전화로 나눈 것임)
장녀 수연이 첫돌기념 사진
선생이 장녀 수연이에게 준 손바닥도장과 글귀
정택과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차는 대전-구미-서대구를 지나 경남 방면으로 빠지는 88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곳은 경부선보다 도로가 더 한산했다. 마치 우리가 도로를 전세를 낸 느낌이었다. 간밤에 비가 온듯 도로는 촉촉하고 바람도 시원했다. 시나브로 달린 차는 어느새 창녕 읍내 입구에 도달했다.
시간대는 새벽-아침을 지나 오전이었다. 창녕은 이런저런 일로 나도 몇 번 온 적이 있어 낯선 곳은 아니다. 차에서 보니 저만치 화왕산이 눈에 들어왔다. 또 저기 앞 네거리를 돌아 오른쪽으로 가면 옛날 버스정류장이 있었던 기억도 났다. 창녕은 서울에 비견하면 동(洞) 하나 크기도 안되는 그런 작은 곳이다.
흔히 인걸이 태어난 곳이라면 산세가 어떻고, 물이 어떻고들 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소도시의 읍내. 따라서 그런 걸 따지고 말고 할 구석조차 없어 보인다. 경상남도 내에서도 창녕은 외진 곳이다. 물산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곳에 속한다. 그래서 같은 도 내 여러 군 가운데서도 뒷줄에 속한다. 그런 사례가 하나 있다.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이항녕(전 홍익대 총장, 2008년 작고) 박사의 경우다.
경성제대 졸업 후 1939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이 박사는 1년간 시보 생활을 마치고 1941년 첫 보직으로 경남 하동군수 발령을 받았다. 때는 일제가 ‘15년 전쟁’ 막바지에 인력과 물자공출을 압박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군수가 도(道)에서 지시한 공출 등 소기의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자 총독부는 이듬해 그를 창녕군수로 발령을 냈다. 말하자면 군세(郡勢)가 약한 곳으로 그를 ‘좌천’시킨 셈이다. 창녕은 근세 이후 인물도 손에 꼽을 정도다. 혹자는 창녕 출신 전국권 명사로 친일파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과 인권변호사 출신의 박원순(1956년생, 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변호사를 겨우 꼽기도 한다.
한편 이곳 창녕에서의 우리의 과제는 그의 태(胎)자리, 즉 생가(터)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나는 처음엔 그냥 의례적으로 몇 줄 태생지를 언급하고 지나갈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명색이 평전을 쓰면서 그의 생가터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쓴다는 게 아무래도 찝찝해 결국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오고 보니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택은 몇 년 전에 시제(時祭)를 지내러 아버지 고향에 갔다가 삼촌(종철)에게 부탁하여 부친의 생가터를 찾아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삼촌(종철)도 오랜 세월이 지난 탓에 그 곳을 찾는데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택도 그 곳을 다시 찾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소도시 읍내의 골목집인데다 한번 슬쩍 지나친 곳을 그리 뚜렷하게 기억하기란 쉽지도 않았을 것이다. 승합차 그 큰 차로 이 골목 저 골목을 20여 분간 뒤지고 다닌 끝에 겨우 생가터를 찾아냈다. 언젠가 부친 생가터 사진이라며 보내준 그 파란 대문집이 마침내 우리 둘의 눈앞에 들어왔다. 나는 디카와 메모장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정택은 큼직한 카메라를 들고 마치 사진기자처럼 내 뒤를 따라 내렸다.
그의 부친(문호)의 제적등본에 따르면, 그는 창녕군 창녕면 교동 202번지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와 있다. 현재 202번지는 -1, -2, -3번지 셋으로 나뉘어져 있다. 파란 대문집, 즉 그가 태어난 집은 202-3번지, 그 뒷집은 202-2번지. 202-1번지는 밭이었다. 그가 태어난 집인 202-3번지의 집도 헐리고 그 자리엔 1층 양옥집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집주인 말로는 1989년에 새로 지었다고 했다.
정면의 녹색 대문집이 임종국 선생이 태어난 생가로, 옛집은 헐리고 이 집은 새로 지은 것이다.
바로 그 뒷집, 즉 202-2번지의 집은 절반은 옛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이 집은 과거 그의 큰집이 살던 곳이다. 철대문 사이로 들여다보니 오른쪽 문간방은 새로 지은 것이나 정면으로 보이는 안채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집은 초창기 창녕 천도교 교당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종철이 6.25 때 피난 와서 공부를 하며 지낸 집은 이 집 정남쪽 맞은 편 언덕에 있던 고모네 집이다.
- 평범했던 그의 태(胎)자리, 경남 창녕읍
그 당시 이곳에서 천도교 포교활동을 했던 그의 부친은 이 일대에서 지식인이자 명망가로 통했던 모양이다. 그런 증언이 여럿 있다. 인근에 사는 전직교사 출신의 김대주씨(1926년생, 80세)는 “임문호씨는 성격도 무던하고 인격자였으며, 지식인이었다”고 평했다.
그와는 동향이자 그의 동생 종철의 고교(보성고) 동기생인 성대경씨(1933년생, 전 성균관대 교수, 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는 “임문호 선생은 창녕 지역에서 명망가로 불렸으며, 일제 때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그의 부친 임문호(1900~1972)는 서울로 유학해 학교(오성중)를 마쳤으며, 동아일보 기자와 천도교 총부의 고위간부직을 여럿 맡기도 했다. (* 임문호의 이후 사회활동이나 친일행적 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그의 태자리에 온 만큼 이제 주인공 임종국(林鍾國), 1929~1989)의 집안내력을 살펴보자. 나주임씨 족보와 바로 아래 남동생 종철(1933년생, 전 서울대 상대교수, 서울 거주), 둘째 여동생 순화(1939년생, 서울 거주)의 증언 등을 참고로 재구성 해보면,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 겸 시인이었던 백호 임제(林悌)의 12세손이다.
시조인 고려시대 대장군 임비(林庇)로부터 치면 29세손인 셈이다. 이 집안이 창녕에 거처를 정한 것은 8대조(祖)부터. 그의 조부(임병곤) 시절 때만 해도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증조부(봉상)는 아들 둘(병조, 병곤)을 두었다. 다시 병조는 기규(起圭), 병곤은 문규(文圭) 각각 아들 하나를 두었다. (* 그런데 이들은 나주임씨 족보에는 기규, 문규로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실지로 호적에는 모두 기호(起虎), 문호(文虎)로 바꿔서 사용했다)
그런데 맏이인 기규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인 그의 부친 문규(문호)는 아들 넷 가운데 둘째 종국을 큰집에 양자로 보낼 요량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앞세우면 둘째 종국 대신 넷째 종한(1934~1995)이 큰아버지 양자로 족보에 올라 있다. 종국과 큰어머니와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하나 놀라운 것은 창녕에 뿌리를 뒀던 그의 부친조차 제적등본에 따르면, 본적이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109번지’로 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부친 문호의 불행한 개인사 때문이다. 1914년 창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의 부친은 서울로 유학을 와 보성중학을 다니다가 오성중학교를 졸업(1918년)했다. 그리고는 신학문을 배우러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부산에 들렀다가 거기서 천도교인 신용구를 만났다.
선생의 부친 임문호
여기서 그의 부친의 인생이 바뀌었는데 결국 그의 부친은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천도교에 입문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의 부친이 유학을 포기한데는 홀로 된 고향의 모친의 권유도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서울서 하숙생활을 하던 그의 부친은 1918년 ‘서울처녀’ 이흥순(1902~1964)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 장남 종원(1919~198?)을 낳았다. (* 그의 부친이 본적을 서울로 옮긴 것과 관련해 종철은 “당시 일제가 실제 거주지로 본적을 옮기도록 장려한 것도 한 요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결혼 초부터 원만치 못했던 것 같다. 그의 부친은 고향의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포교활동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 이흥순의 생각은 달랐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시골생활에 대해 강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창녕에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깡촌인데다 시어머니(박경모)의 시집살이가 무척이나 호되기도 했다. 결국 이흥순은 서울 친정으로 짐을 싸서 올라가버렸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함께 살든지, 아니면 이혼을 하자며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그의 부친은 홀어머니를 버릴 수 없어 결국 이혼(1924년 9월)을 택했다. 그러나 양반출신의 체면 때문에 고향에서 이혼을 할 수 없었던 문호는 본적을 서울 처가 주소(서울 종로구 낙원동 109번지)로 옮기고 거기서 이혼을 했다. 종철은 큰어머니에 대해 “인물도 곱고 좋은 분이었다. 그런데 시골살이에 적응하지 못한데다 어린 딸을 잃고 시집살이도 힘들어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