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는 현존하는 바울서신 중에서 가장 짧고도 가장 개인적인 서신이다. 본 서신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서신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주의 한 몸으로 보는 자신의 교회관을 그리스도교 가정 공동체의 실제적인 삶에서 어떻게 전개시켜 나가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서신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하나는 노예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 빌레몬의 집에 다시 받아들여지도록 종용하는 요청이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 오네시모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용해 달라는 요청으로 보는 해석이다. 물론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고, 빌레몬이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어 선교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울이 바라는 바이지만 이점은 본 서신에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한편 빌레몬서는 어떤 교리를 전하기 위해서 기록된 서신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교의 효력이 사회생활에 적용되고 관철되는 것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제1부 빌레몬서의 역사적 배경
I.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빌레몬서의 저자는 바울이다. 옛 '튀빙겐'(Tuebingen)학파의 비평학자들은 본 서신이 위경 클레멘트서들과 마찬가지로 정경이 아니고 그리스도교 문학의 맹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빌레몬서가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고 보는 주된 근거는 본 서신이 골로새서와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또 골로새서가 다른 바울서신과 내용이나 어휘 면에서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점들은 본 서신이 기록된 상황과 또한 그것이 의도하였던 목적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비평학자들조차 빌레몬서를 진정한 바울서신으로 인정한다. 한편 본 서신의 저자 문제와 관련해서 골로새서를 언급하게 되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사이의 유사성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유사성을 근거로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에베소서에 대한 비평학자들의 견해가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대한 바울 저작설을 부인할 만한 타당한 근거는 없다. 동시에 빌레몬서는 바울서신으로서 초대 교부들의 문헌 속에서 발견된다. 빌레몬서를 최초로 인용한 사람은 '오리겐'(Origen)인데, 그는 빌레몬서를 바울의 것으로 돌린다. 또한 말시온과 무라토리 단편들도 빌레몬서를 바울서신 포함시키며, 그밖에 다른 모든 증거들도 본 서신이 최초의 바울서신 목록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본 서신의 저자는 바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2. 수신자
빌레몬서의 서두에는 빌레몬을 비롯하여 압비아와 아킵보 등 여러 사람의 이름이 언급된다(참조,
몬 1:1, 2). 때문에 본 서신의 수신자를 결정하는 문제는 한때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 주요 비평학자로는 '굿스피드'(Goodspeed)와 '녹스'(Knox)인데 이들은 본 서신이 원래는
골 4:16에서 바울에 의해 언급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진 서신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의 근거는 바울이 골로새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하여 보낸 서신(빌레몬서)으로서,
골 4:16에 언급된 서신이 분실될 수는 없으므로 두 서신은 동일한 서신이라는 가정에 있다. 보다 유력한 근거로는 본 서신의 내용과 인사물이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이 아니라 실제로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이며 여러 회중 앞에서 읽혀지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든다. 하지만 본 서신의 전체 내용은 4절부터 시작되며 본 서신을 받는 이는 실제로 그 집의 주인인 빌레몬뿐이다. 따라서 비평학자들의 견해가 비록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지라도 본 서신의 수신자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하겠다(Gnilka, Harrison). 한편 빌레몬에 관한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나타난다. 그는 골로새에서 아내 압비아와, 아들 아킵보와 에바브라와 복음의 일꾼인 교회의 설립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참조,
골 1:7; 4:8, 9, 12, 17). 빌레몬은 종을 소유한 부자로 보이는데(참조,
몬 1:15, 16), 그는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서 자신의 집을 제공하였다. 그는 본 서신 전체의 분위기가 나타내듯이 바울과 잘 아는 사이였으며(참조,
몬 1:1-17),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참조,
몬 1:19). 또한 그는 바울의 동역자로 불리는데(참조,
몬 1:1), 성도들에게 행한 사랑에 대해서도 칭찬받고 있다(참조,
몬 1:5, 7). 빌레몬이 사역한 교회는 가정 교회로서 그의 가족과 노예들을 포함한 가족의 구성원이 교회의 회원이었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특히 도시 지역에 거하는 회중들은 흔히 함께 모일 수 있는 적당한 교회나 장소가 없을 때에는 부유한 개인의 집에서 적은 모임을 가지는 예가 많았던 듯하며, 이때에도 역시 교회로 간주되었다. 아마도 빌레몬의 집은 보다 넓은 지역의 회중이 모이는 곳이었을 것이며, 함께 살면서 공동의 관심사를 위해 헌신하였던 것 같다.
II. 기록 연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할 때의 상황은 투옥 중이었다(참조,
몬 1:1, 9, 22, 23). 또한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열거한 동역자, 혹은 같은 감옥에 수감된 죄인들이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참조,
골 4:10, 12, 14;
몬 1:23, 24). 따라서 이 두 서신이 쓰여진 때는 같은 투옥 기간 중이었다고 보인다. 그뿐 아니라 이 두 서신은 같은 경로로 골로새서 전달되었다. 즉 두기고가 골로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을 가져왔는데(참조,
엡 6:21, 22), 그와 함께 로마에서 골로새까지 오네시모가 동행하였다. 왜냐하면 오네시모는 같은 도시에 거하는 빌레몬에게 보내는 서신을 배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참조,
골 4:1, 9;
몬 1:10-12). 한편 18세기말부터 옥중서신들이 기록된 장소로 가이사랴를 변호하는 견해들이 등장하였고, 1900년 이후부터는 바울이 옥중서신들을 쓴 곳은 에베소였다는 가설들이 주장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러한 가설들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고 단지 옥중서신의 기록 장소가 로마라는 입장만을 견지하고자 한다(참조, 빌립보서 서론). 먼저 본 서신의 기록 장소가 로마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고대 교회의 모든 전통들로부터 근거를 찾는다. 즉 바울이 로마에서 처음 투옥되었을 때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는 견해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로마에서 재판받기를 호소한 이후, 재판을 기다리면서 로마에서의 2년 간 투옥을 분명히 언급한다(참조,
행 28:16, 30, 31). 따라서 이 시기가 옥중서신들을 기록하기에 최적기였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로 로마에서 바울은 여전히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지만(참조,
행 28:16, 30, 31) 가이사랴에서는 갖지 못했으며, 사도행전은 어느 곳에서도 에베소에서 투옥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마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골 4:11과
엡 6:19, 20에서와 같은 장소들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로마에서의 투옥 상황이 바울에게 직접적인 설교와 그 도시에 있는 동역자들과의 정규적인 접촉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그 동역자의 몇몇 이름들이
몬 1:14-18에서는 물론
골 4:10, 11에서 분명히 언급된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본 서신이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전통적인 견해와 상반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본 서신으로 로마에서 바울의 2년여에 걸친 투옥 생활 마지막 즈음에, 곧 61년 내지 62년 경에 쓰여졌을 것이며, 빌립보서보다 먼저 쓰여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III. 기록 목적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으며(참조,
몬 1:9), 성도들을 사랑하였다(참조,
몬 1:7).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그의 집에 정기적으로 모였다(참조,
몬 1:2). 그리고 이 모임에는 노예들도 포함되었다. 본 서신에 등장하는 오네시모도 빌레몬 가족의 노예였다. 그는 도망하여 멀리 로마까지 갔었는데 거기에서 바울을 만났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갇힌 중에 회심한 이방인이었다(참조,
몬 1:10). 바울은 그를 소중하게 여겨 '저는 내 심복'(
몬 1:12),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몬 1:16), 또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골 4:9)라고 하였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조력자로서 바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로마에 머물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결심하고, 더 이상 노예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서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사려 깊은 편지와 함께 그를 빌레몬에게 보냈다. 또한 바울은 서신에서 자신이 풀려날 것을 소망하고 있으며, 빌레몬이 자신의 처소를 마련할 것을 기대하였다(참조,
몬 1:22). 따라서 바울이 빌레몬서를 기록한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오네시모에 대한 용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노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도록 지혜롭게 요구함으로써 노예 제도를 정죄하지는 않지만 그 근본정신을 뒤집어엎고 그 노예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로마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자신을 위한 처소를 빌레몬이 예비하였으면 하는 소망을 전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IV. 특징 및 구조
1. 특징
빌레몬서는 순수한 사신으로서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때문에 본 서신의 정경성에 대한 논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학자들은 많은 권위적 내용들이 사사로운 사실의 이면에 간직되어 위대한 교훈을 준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칼빈'(Calvin)이나 '루터'(Luth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본 서신에서 취급하는 문제는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보여 진 고귀한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울은 서신들 속에서 위대한 신학자요 탁월한 사상가로 나타난다. 하지만 본 서신에서 보여준 개인적인 권면에서는 대 사상가의 심오한 신학적 변증은 자취를 감추고 인간 바울의 끝없이 의롭고 자비로운 모습이 나타난다. 즉 다른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신학을 보았다면 본 서신에서는 바울의 윤리관을 보게 된다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본 서신의 가치는 소중하다. 왜냐하면 윤리적 실천으로 증명되지 못할 신학이라면 거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 서신에서 바울의 위대한 사랑의 행동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바울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의 모형적인 것이며, 비천한 노예를 위해 용서와 환영을 간청하는 태도는 인간 바울을 재인식하게 하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바울의 이 같은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시는 모습에 비견된다고 하였다(참조,
눅 15:4;
요 10:11). 즉 '사바티에'(Sabatier)는 바울에게서 자신의 피를 흘려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면서 멸망할 인류의 용서를 하나님께 비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다.
2. 구조
빌레몬서의 구조는 매우 의도적인 구성 양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조면에서 보면 본 서신은 순수한 개인 서신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형식은 다른 바울서신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한 문장 한 문장이 신중하게 짜여져 있으며, 뚜렷하게 구분되는 단락들은 개인 서신이라는 느낌보다는 공문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참조,
빌레몬서 도표1).
제2부 빌레몬서의 특별 주제들
I. 노예 제도
빌레몬서가 다루는 노예에 관한 문제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로마 제국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해 준다. 노예 제도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으로서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사회 구조의 정상적인 일면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노예들은 대부분 무자비하게 다루어졌으며, 어떤 경우에는 아주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 잔혹한 벌을 받기도 했다. 노예들은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거의 물건과 같이 취급되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에 대해 절대 권리를 행사하였다. 하지만 그들을 좀더 인격적으로 대하자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들을 좀더 자비롭게 대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조그마한 소집단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영향력이 약했다. 대체적으로 볼 때 노예들의 형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1. 용어
신약성경의 배경을 이루던 시기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노예에 대한 일차적인 용어는 <dou'lo" ; 둘로스>와 <dou'lh ; 둘레>인데 이 용어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사람을 가리켰다. 이들은 법적으로 자유인과 구별된다. 그밖에도 노예의 특수한 형태나 기능에 따라 달리 부르는 용어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전쟁에서 포로된 자를 노예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주인집에서 태어나 자란 노예를 가리키는 용어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 노예, 내국 노예, 노예 집단, 어린 여종, 가사 및 재산 관리 노예 등 노예를 부르는 용어는 매우 다양했다. 이는 노예 제도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2. 노예의 공급 및 매매
당시 노예의 공급원은 매우 다양하였다. 예를 들면 탈취에 의한 노예(참조,
딤전 1:10), 여자 노예의 자식인 가내 출산 노예(참조,
갈 4:21-31), 부채 노예, 포로 노예 등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 포로나 탈취에 의한 노예 공급원이 줄어들면서 아구스도 시대 이후에 와서 로마는 가내 출산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차 커졌다. 그 이전에는 전쟁 포로의 대량 노예화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무려 삼만여 명의 노예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한편 노예는 공개적으로 경매에 붙여졌으며, 동방의 노예들(애굽, 시리아, 유대)이 서방의 노예들(게르만, 갈리아, 사르디니아)보다 더 비싼 값에 팔렸다. 또한 인구 통계에 의하면 로마 제국 전역에서는 노예와 자유인의 비율이 1:5였고 로마시에서는 1:3이었다. 가구당 노예 수는 남녀 합해서 가이사의 집에 2만 명의 노예가 있었고 중?하류층에서는 8명 정도 노예를 소유하였다. 그런데 로마 공화정 시대에 엄청난 수의 노예가 해방되고 뒤이어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 통혼이 이루어짐으로써 1세기 말엽에는 로마 인구의 6분의 5가 노예이거나 노예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었다.
3. 노예의 법적 지위
사실 노예의 법적 지위 및 권리란 보잘것없었다. 노예들은 관습법에 따라 혼인을 할 수 있었지만 그 혼인이 법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배우자나 자녀들에 대해서도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노예는 로마의 시정부나 국가 종교에 참여할 수 없었고 다만 정부가 허가하는 집회에 가입하여 노무를 제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에 병역과 직접세의 면제는 노예들이 향유할 수 있는 두 가지 혜택이었다. 한편 노예들은 대개 집단 노동으로서 제국의 대공사에 참여하였다. 그 외의 노예들은 상전의 집에서 몸종이나 하인으로 일하거나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4. 노예의 해방
노예 해방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하나는 공식적인 노예 해방으로서 유언에 의한 해방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인 노예 해방으로서 상전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예식을 거쳐 해방되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즉 공식적인 노예 해방은 상전이 사망할 때 어떤 노예를 지정하여 해방시키는 방법인데, 이는 '율리아누스' 시대부터 시작된 제도였다. 이 제도는 노예 소유의 대형화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로마 정부의 정책으로서 노예를 심사하여 해방의 적격 여부를 판단한 다음 주인에게 통보하여 해방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제도는 국가에서 일괄 처리하였기 때문에 노예들은 국가의 은혜에 감사하곤 하였다. 한편 비공식적인 노예 해방은 공식적인 해방과는 별도로 상전이 어느 특정 노예를 신임하여 식사에 초대하거나 상전의 불리한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두한 대가로 해방을 약속받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의 해방은 주인이 5퍼센트의 해방세를 면제받는 이점이 있었지만 공식적인 해방이 노예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한 것에 비하면 매우 불리한 제도였다. 또한 공식적인 노예 해방을 거쳐 해방된 노예는 때가 되면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완전한 공민권을 부여받았다. 그때부터 해방 노예는 불법적인 구속과 이유 없는 가혹 행위를 받지 않았다. 동시에 옛 주인과의 관계도 단절되지 않고 관습적인 의무에 따라 일정한 조건 하에서 그의 주인이나 후견인을 위해 전문 직종에서 노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5. 신약성경과 노예 제도
신약성경에서 노예 제도 자체를 비난하는 구절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물론 노예 제도가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 구절은 몇 군데 발견된다. 하지만 노예 제도가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단정한 선언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노예 제도는 사회 조직 속에 너무 방대하고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공격한다는 것은 당시 혁명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만약 신약성경에서 노예 제도를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못한 이유를 권력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박해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서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직 진리에 의해서 로마 제국의 사회적 기반이었던 황제 숭배도 가차 없이 공격하였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교도 주인 밑에서 종노릇하는 그리스도인이 무저항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당연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노예가 이 같은 이유로 주인에게 복종해야 했다면, 그러한 복종은 노예 제도 안에 존재하는 고유한 악에 대한 승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승인은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더 충격적인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인 노예 소유주 빌레몬에게 간청하는 가운데 노예 제도 자체가 비도덕적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바울은 노예제도 자체의 가부에 대해서 쓴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것의 도덕성에 대해 논하지 않은 것은 일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신약성경에서 노예를 다루는 부분이 많지 않은 가운데 바울과 같은 대사도가 노예 문제를 언급하면서 그것의 비도덕성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의아할 뿐이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매우 소극적인 면에서 노예 제도를 다룬다. 즉 바울은 노예들에게 스스로 하나의 인간으로 여기라고 가르친다. 또한 그리스도인 노예들에게 새로운 자존심을 지니라고 가르친다. 즉 노예는 해야 할 일의 멍에를 진 짐승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하나로서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이 노예 제도를 긍정, 혹은 부정했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는 매우 애매모호하다 하겠다.
II. 원시 공동체의 가정 교회
초대교회의 전도는 유대인 회당이나 개인의 집에서 행해졌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모임과 식탁에서의 친교를 시사한다(참조,
행 1:13; 2:46; 5:42; 12:12). 또한 가정 모임은 바울의 전도 지역에서 실시되었다(참조,
행 18:7; 20:8, 20). 그런데 이러한 모임은 비단 초대교회에서만이 아니라 2, 3세기의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저스틴'(Justine)은 로마에 가정 공동체가 2세기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클레멘트'의 서신에는 '데오빌로'(Theophilus)라는 유명한 인물이 전설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그는 안디옥에 있는 대저택을 내어 놓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마침내는 교회에 저택을 헌납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유브라데강 중류 지역에서 발견된 한 채의 고대 가옥은 그리스도교 가정 교회로 변용된 흔적을 보여준다. 본 서신에 등장하는 빌레몬의 집도 가정 교회로 모이던 곳이었다.
1. 가정 교회의 다양한 형태
단순히 사람들이 거처하던 고대의 가옥들과 주거 시설들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없거나 안락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가정 공동체 회중들이 모일 수 있었던 집들은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소유였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소상인이었고(참조,
행 18:2, 3), 빌레몬은 거상으로 노예를 부리며 자선을 베풀기도 했던 재력가였다. 또한
행 12:12 이하에 의하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대문이 따로 있는 큰 집에서 살았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는 얼마 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말년에 예루살렘에 땅을 사서 정착한 유대인 개종자였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 가정 교회가 탄생하여 존립할 수 있었던 주요 재력은 개종자들 가운데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 담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처음부터 교회 집회를 목적으로 건축한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예배와 성찬을 위해 모이던 건물의 크기나 형태는 매우 다양하였다. 120명의 성도들이 모였던 마가의 다락방(참조,
막 14:15;
행 1:13)이나 창문이 달려 있는 2, 3층의 다락방(참조,
행 20:8)은 근동에서 가장 높고 최고로 시설이 좋은 장소였다. 또한 로마 양식으로 지어진 집은 그것이 어디에 있던지 주실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회랑이나 안마당을 부속 시설로 갖추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집회에 필요한 장소들을 충분히 제공하였다. 유브라데강 중류 지역에서 발견된 가정 교회의 집회 장소는 대략 5?3m의 크기였고 안마당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Thiessen). 그 정도의 크기라면 성인 4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한 가정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대략 10명에서 4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 헬레니즘 세계의 가정 제의
예로부터 헬라인들과 로마인의 주택 공간은 생활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정의 수호신에게 가정 제의를 드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교도의 다락방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정 교회와 유사한 모임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루디아 지방에서 B.C. 1세기 초에 디오니소스 교도 한 사람이 가정 제단을 세웠다. 이 제의 공동체에는 남녀 자유민들뿐만 아니라 노예들도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제의 장소로 꾸며진 집회 장소를 소유하였으며 제의 참여자들로 하여금 차원 높은 도덕적 교의에 따라 서약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교의는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윤리와 후대 그리스도교 윤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여러 가족들이 연합하여 디오니소스 밀의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주변 세계에서는 이미 가정 제의를 가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가정 교회는 쉽게 종교 단체로 인지되었으며 용인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가정 교회와 유대인 회당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긴밀하고 직접적이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 된 회당들은 가정 회당이었다. 개인 집을 개축한 이 가정 회당들은 이미 B.C. 1세기에 델로스 지역에 존재했으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마게도냐의 내륙 지방에서부터 근동 지역의 유브라데강 유역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때문에 선교하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회당과 회당에 모이는 신자들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유대교 가정 회당은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 가정 교회의 원형이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가정 교회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세워졌고(참조,
행 2:46; 5:42; 12:12), 그 다음 유대인 회당으로부터 분화되어 유대인 회당과 대립하는 형태로 빌립보(참조,
행 16:13-15, 30-34)나 고린도(참조,
행 18:1-8)에서 세워졌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는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하겠다(Thiessen, Marxsen, Weiss).
3. 가정 교회의 사회학적 구성
가정 교회에는 여자와 남자, 부모와 자녀, 자유인과 노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참조,
골 3:18-4:1; 몬 1장). 특히 빌레몬의 집에서 모인 가정 교회의 구성원도 가장을 비롯하여 부인, 다수의 동료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오네시모와 같은 노예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예는 낯선 도시로 초청되어 온 사람들이 그들과 소명과 신념을 같이 나누는 동료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에 대해 '저스틴'은 이주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진하여 기존의 가정 교회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또 그 교회에 받아들여졌다고 함으로써 가정 교회의 구성원과 성립에 대한 보완적 자료를 제시한다. 즉 초대교회 공동체의 탄생은 유대교 회당과 무관하지 않으며, 공동체는 장소와 친밀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집단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골 3:18 이하에 열거된 모든 신분들이 가정 교회에 참여하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가정 교회 공동체들이 어떤 신분과 어떤 출신의 그리스도인이든 이들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4. 가정 교회에 대한 평가
바울은 가정 교회에서 생활하고 가르쳤으며, 또한 가정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초대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정 교회에서도 각종의 사회적?인종적?종교적 장벽들, 예를 들어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귀족과 천민, 지식인과 무식자들 사이의 장벽들이 철폐되고, 모든 사람들이 주 되신 그리스도와 새롭게 결합하여 상호간에 동등하게 된다고 보았다(참조,
고전 1:26 이하; 12:12, 13;
갈 3:27). 따라서 가정 교회는 사람들이 주의 만찬이라는 공동 식사 및 공동 의식을 통해 서로 결합됨으로써 여러 지체로 된 그리스도의 한 몸,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장소였다. 때문에 가정 교회는 순수한 말씀의 선포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연대 의식과 자유로 충만한 삶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선교하는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다른 종교 단체들 가운데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그리스도교가 1세기의 로마 세계에서 가정 교회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가정 교회는 최소한 모든 구성원들이 앉을 수 있을 만한 공간만 확보되면 어디서나 모일 수 있었다. 그들은 제의를 집행할 만한 특별한 건축물이나 장식을 처음부터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 회당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교 가정 교회는 유대교 집단들보다도 훨씬 더 용이하게 조직되고 훨씬 더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정 교회가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존속하거나 그리스도교 공동체임을 입증해야 하는 경우에서도 가정 교회는 허가나 관용을 얻기에 보다 용이하였다. 따라서 원시 공동체 내에서 가정 교회는 그리스도교 형성사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선교적 측면에서나 신학적인, 측면, 조직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