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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0일(화) 1일차
밤 늦게까지 여행의 설레임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녁에 잠시 잠이 들었다.
5시에 가족 모두 일어나 씻고, 머리감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는둥 마는둥...
6시 인천공항가는 리무진 버스에 시간을 맞추려고 헐레벌떡 길을 나섰다.
인천공항 가는 리무진 버스를 6시에 출발하면서 여행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보며 즐거워 했다.
공항리무진 버스에서 내렸는데 아들 가방 손잡이가 파손되었다.
운전수께 손해배상을 요구했는데 여행가방은 배상책임이 없단다. 씁쓸했다.
어쩐데...
손잡이 파손으로 이동에 약간의 어려움 따른다.
하지만 어쩔수 없다.
받아들이고 적응하기로 생각을 다잡는다.
노끈이라도 찾아 손잡이 부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공항 이곳 저곳을 찾고 물어보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임시 방편 손잡이 꾸미는데 까지만 처리하고 차후에 고쳐 보기로 했다.
가방 문제로 괜시리 기분나빠 하거나 속상해 하지말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로 했다.
이것은 사소한 것일 뿐이므로...
8시에 티켓을 받고 출국 신고후 면세점을 둘러보았다.
술과 담배 이외에 생각보다 저렴하지는 않아 구매할 것은 없었다.
구찌와 프라다는 매장에는 거의 손님이 없다.
왜일까?
너무 고가의 물건들이므로 감히 들어갈 엄두는 못내는 듯...
한참을 구경하다 카페베네에서 커피와 요거트 쥬스를 마시고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121번 게이트를 향해 출발했다.
지하로 내려가 지하철을 타고 이동 후에 121번 게이트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이 크긴 크구나!
공항내에 지하철 운행하고... ㅎㅎㅎ
10시30분 비행기에 탑승하고 자리를 정하는 어수선한 시간이 흐른 후 이륙했다.
아찔한 이륙은 언제나 불편하고 울렁됨이 똑 같네...
기내에서는 비행기의 운행 안전을 위해 스마트 폰이나 노트 북의 사용을 자제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스마트 폰에 비행모드가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동안은 스마트 폰에 비행모드가 있는것을 무심코 지나쳤고 문득 비행모드가 뭔가 했는데 이제 알았다.
모든 통신기능은 차단되고 플레이어 기능만 된다.
아하 이것이 비행모드 였구나.
역시 경험보다 더 좋은 선생은 없구나... ㅋㅋㅋ
잠시 후 기내에서 제공하는 맥주 한 잔 먹고 나른하고 졸음이 올만할 때 점심이 나왔다.
치킨과 떡갈비 둘 중에 택일이다.
둘이 같이 맛보려고 아내는 떡갈비 나는 치킨 세트를 주문했다.
푸짐하고 맛있듯 하면서도 좁은 좌석에서 먹으려니 입으로 코로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먹기 불편하고해서 그런지 맛도 모르겠다.
먹고나니 속도 불편하다.
비행기에서는 비빔밥을 비벼 먹는것이 제일 편하고 맛있을 것 같다고 아내와 이야기 했다.
4명이 앉는 내측 자리인데 움직일 수 없어 갑갑하고 힘들다.
다행이 창측에 앉은 우리 딸이 자리를 바꿔주어 움직임이 편해 좋았다.
시간에 지나니 더 불편하고 피곤해서 맥주 한 잔 먹고 자려니 옆에서 아내와 딸의 눈치가 밀려온다.
고도 높은 곳에서 술을 먹으면 3배나 더 취한단다.
근데 난 별차이 모르겠다.
잠시 후 또 후식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이다.
맛있어 보인다.
근데 겁나게 딱딱히 얼어있었다.
한참을 녹인 후에야 먹을수 있었다.
식사보다는 그래도 맛있네...
한숨 자고 영화 한편 보고나니 헬싱키 도착 2시간 전이다.
아마 러시아 혹은 시베리아 상공을 날고 있을것 같아 창밖으로 사진 한장 찍었다.
구름 위 태양은 눈부시고 신선했다.
이곳은 혹시 백야인가?
눈부심이 강하다.
찬란한 태양이란 이런걸까?
잠시 후 한국시간 저녁 7시경에 저녁식사가 나왔다.
따끈한 파스타이다.
고소한 냄새와 깔끔한 포장 음식이 맛있어 보였다.
그러나 가족 모두 맛있어 하는 얼굴이 아니다.
파스타가 이 정도는 아닌데 영 별로다.
가족 모두 남기고 약간 속이 거북한 듯... ㅎㅎㅎ
역시 빠다 냄새다. ㅎㅎㅎ
공항에 도착하여 스마트 폰을 로밍하고 시간을 맞추었다.
사방이 모두 이국적이다.
특히 화장실이 남달랐다.
아들이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한참을 웃으면서 말한다.
소변기의 높이가 엄청 높이 달려 있단다.
이곳 사람들의 평균신장이 얼마는 큰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핀란드 입국 절차가 다소 까다로운 느낌이다
얼마전 프랑스 언론사 폭파 사건때문인지 인터뷰가 철저하고 까다로운 느낌이 든다.
헬싱키 공항의 느낌은 자연 친화적이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지고 주위에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편안하고 청정의 느낌이 든다.
지나다니는 여행객들의 느긋함과 여유로움...
가족 모두 이러한 여유로움이 부럽고 좋아 보인다고 한다.
이런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것 일까?
우리도 적당히 여유있게 사는데 이런 정도의 여유는 쉽게 갖질 못하네...
조급함과 기둘리지 못함.
우리네 성품에서 기인 한것은 아닐까?
암튼 여유로움 확~느낀다
혤싱키 공항 환승을 기다리며 1시간의 시간이 남아 면세점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가방가게, 문방구, 커피숖 이후 기내에서 거의 먹지 않은 파스타이고 보니 간단한 간식을 먹었다.
이런 선택의 실수 연속이다.
생야채 음료, 망고 요쿠르트, 초밥까지 모두 맛이 영 이상하여 성에 차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서 컵라면 먹는것이 훨씬 나을것을 괜시리 돈만 날린 느낌이다.
그래도 헬싱키 공항에서 물건값을 계산하는 첫 구매 경험으로 타국에서의 자신감과 용기를 가졌으니 좋다.
아들이 부끄러워하고 창피해 한다.
아직도 어리구나.
넌 우리집안의 희망이란다.
용기있고 자신감 있는 주어진 환경을 헤쳐나가는 믿음직한 아들이면 더 좋겠구나.
ㅎㅎㅎ
드라마 미생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 청춘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것 같다.
우리 아들 딸은 그런 어려움 없이 성장하기를 바래본다.
헬싱키 시간 오후 3시 35분에 파리행 비행기 탑승했다.
이륙하는 비행기 밖을보니 오후 4시 15분이데 차창 밖이 어둑어둑하다.
북쪽 지역이라 그런지 확실히 어둡다.
더 북쪽은 겨우내 밤만 지속된다더니 조금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이것도 이국 땅에서의 색다른 경험이네.. ㅎㅎㅎ
3시간 정도 비행하면 파리 도착했다.
어릴적 교과서에서만 보던 파리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트 언덕, 루브르 박물관 등 정말 새롭다.
오후 4시 20분(한국시간 오후 11시 20분) 가족들이 몹시 힘들고 지쳐있고 연신 하품을 하며 졸려한다.
하기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왔으니 당연한 것이다.
기내에서 블루베리 쥬스 한 잔에 물 한잔 추가...
말로만 듯던 찰스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어린시절 드골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조금 알았는데... 세계의 유명 대통령중 한 명으로...
파리까지 830킬로미터 남았다.
슬슬 힘들고 지친다.
오후 6시30분에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은 8시간 시차로 다음날 새벽 2시 30분인 샘이다.
새벽부터 거의 24시간 동안 진행된 일정이 었으니 모두들 지치고 힘들어 하지...
이국적인 느낌!!!
키 크고 색다른 외모!!!
하도 위험하고 도둑이 많다고 들어 첫인상부터 수상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내 눈빛...
속주머니 여권과 현찰 지갑을 다시 한번 확인차 쓰윽 타인들 눈치 못채게 속 주머니를 한번 만저본다. ㅎㅎㅎ
선수 다 되었네... ㅋㅋㅋ
짐을 찾았다.
컵라면과 빵 등을 넣은 비닐팩이 이동중에 조금 손상되었지만 모든 짐은 정상적으로 찾았다.
파리 특히 유럽의 겨울은 살을 파고드는 추위라는데 어떨지?
숙소 발라딘스(Balladins) 호텔까지 이동할 버스를 타고 파리 시내를 가로질러 갔다.
월드컵이 열렷던 축구장을 지나고 중간에 유명한 세느강도 보였다.
누구나 같은 느낌 이겠지만, 볼품없고 초라한 세느강이다.
하지만 이 세느강을 프랑스 사람들은 아끼고 사랑하다니...
우리의 한강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새롭게 다짐 해본다.
숙소에서 객실 열쇠를 받도 엘리베이터로...
-1층, 0층, 1층
이런식의 건물 층간구분 방식...
생각해 보면 우리식의 층간구분은 수학적으론 안맞는다.‥ㅎㅎㅎ
306호 307호..
우리식의 4층에 해당된다.
함께 온 젊은부부의 배려로 우리가족 4명이 두 방이지만 한 방같이 연결된 숙소를 배정받게 되었다.
선뜻 방을 바꿔준 젊은 부부에게 감사했다.
기회가 되면 우리도 넉넉하게 베풀어야 할텐데...
객실 교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작은 카스텔라와 믹스 커피 2개로 전하였다.
숙소에 들어오니 모두 힘들고 지친다. 에공~~~
음료가 부족하여 0층 로비에서 1유로 생수 2개를 사고 5유로 주고 3유로 거슬러 받았다.
그때 처음 1유로 동전과 50센트 유로를 보았고 가족들에게 동전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50센트 유로가 1유로 보다 더 크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작은 지식하나 추가요. ㅎㅎㅎ
씻고 잠자기전 속이 출출하여 우리 가족 모두 껍라면 한개씩 먹었다.
오늘 먹은 식사 중 제일 맛있었다. 얼큰해서 우리 입맛에 제일 잘맞았다.
그래 이 맛이야.!!!
씻고 먹고 정리하니 오후 10 시30분(한국시간 다음 날 새벽 6시 30분)
모두 지친다.
아무도 말이 없다.
모두 잠이 들었다. 꿈나라로...
2015년 1월 20일(화) 유럽여행 2일차
한참을 잤는데도 프랑스 시간으로 새벽이다.
프랑스식 아침 식사를 먹었다.
바게트, 크로와상, 커피, 음료, 씨리얼...
생각보다 맛있게 먹었다.
파리 시내를 관광하기 위해 출발...
파리 시내 중심가를 지나면서 함께온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연발한다.
어쩜 모든 것이 하나같이 예술품이다.
건물 하나 하나 이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도로며 상점이며...
프랑스 사람들은 불편한 것은 참아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못 참는단다.
버스 창으로 들어오는 프랑스의 첫 느낌은 잘 정돈됨, 깔끔함, 고풍스러움, 아름다움 등 모든 이들을 감탄케 한다.
사요광장에서 에펠탑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프랑스의 진면목을 보았다.
꽃보다 할배에서도 이곳에서 점프하면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있다.
사진 몇 장 찍고~~
에펠탑 주변의 흑형들
잠깐만 언니 이리와 봐, 하나 들 셋 찰칵, 언니 왜 그래,
서틀지만 우리말을 하며 호객행위를 한다.
열쇠고리가 싸고 좋았는데
흑형들이 무서워보이고 호객행위가 어색하여 구입을 못했다.
미련이 남는다.
다시 멋진 풍경의 파리 시내을 구경하며서
드리어 개선문에 도착.
와~ 이게 개선문이구나.
첫 느낌의 거대함. 웅장함.
사방으로 뻣은 길과 주변 건물과의 멋드러진 어울림.
가이드의 개선문에 대한 역사적 내용을 알고보니 전쟁의 슬픈역사가 그려진다.
사방 팔방으로 길이 잘 정리 정돈된 느낌.
하지만 강한 권력의 인물들에 의해 계획되고 조성된 도시의 느낌.
파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미적 아름다운 느낌 보다 강력한 힘에 의해 조성된 느낌이 공존했다.
사진을 이리 저리 찍어보며 순간을 간직한다.
개선문 옆으로 말로만 듣던 샹제리제 거리
노래말에서만 듣던 그 샹제리제 거리
잠시 거리를 걸어보고 차량으로 구경하면서 지나친다.
예전의 명성보다 준상업지역의 느낌이 든다.
중간중간. 오페라 하우스, 등등 의 건축물을 보았다.
시간에 허락한다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구경한다면 더욱 좋겠구나 생각했다.
프랑스는 하나 하나가 예술품이다.
사크레쾨르 성당을 지나 파리에서 제일 높은 곳인 몽마르트 언덕
일단 떠오른 것이 집시이다.
대놓고 집시들은 사인한다며 접근하고 물건을 팔려는 듯하다.
몽마를트 언덕에서 바라보는 파리 시내가 제일 멋지단다.
올라가니 기념품, 미술작가 그림들이 많이 보인다.
물랑루즈을 지나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프랑스 현지식사 란다.
점심시간 처음 맛보는 달팽이 요리, 스테이크, 바게트 빵 모두 느끼하고 익숙치 않은 향신료 냄새들... 먹기 힘들다.
루브르박물관
피라미드 출입구.
디긋자형 구조
단체입장, 음성 수신
그리스 조각
로마조각
중세 조각
모나리자
각종회화
나폴레옹 대관식
저녁 악~ 닭도리땅... 이건 영 나와는 잘 않맞음.
김치, 오이, 무생채, 콩나물우침등
세느강 유람선
에펠탑 관람
2015년 1월 20일(화) 유럽여행 3일차
4시 30분 기상
부리나케 준비하여 5시 20분 모여서 숙소출발
한 사람도 약속시간에 늦지않는 성숙한 공동체이다
파리 외곽을 지나 TGV 전용 리용역에 도착
파리를 떠난는 아쉬움.
리옹역에서 산진 몇장찍으며 프랑스와 이별함
7시11분 리옹역 출발
17 Coach 64~67 좌석표
TGV미끄러지듯이 잘간다.
어린시절 꿈을 떠올림.
마트에서 쵸코쿠키, 멘토스, 키스쿨 구입
아침 도시락 보통 우리식 도시락 단무지가 맛남
종이컵 얻어서 커피한잔
TGV에서 옆자리에서 종이컵을 얻어서 믹스 커피 한잔. 간만에 맛보는 믹스커피라 그런지 맛나다.
아들 녀석이 가격도 생각하지 않고 사가지고 온 4유로 콜라 한잔.
TGV는 우리나라오 다를바 없는 프랑스 농촌 마을을 통과한다.
스위스에 가까이 오니 산과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차 속도가 느려지면서 산악을 오르는 느낌이 전해진다.
9시 45분 벨레가드(Bellegarde) 경유, 10시 16분 제네바(Jeneva)역 도착
제네바(Jeneva)
프랑스의 국경 근처인 제네바 호(레만 호)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론 계곡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칼뱅주의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에는 금융 중심지이며 많은 공공, 민간 국제기구들의 본부가 있다. 현재 프랑스어 사용지역에서는 주네브라고도 한다. 이 도시는 알프스 산맥과 쥐라 산맥 사이, 론 강이 제네바 호와 만나는 천연적인 분지의 중심부에 있는 구릉에서 발달했다. 인근의 론 강과 레만 호를 이용하여 로마 제정시대부터 수상 및 육상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인터라켄 가는 고속도로가 눈이 많이 와서 평소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듯 하다.
고속도로 풍경이 스위스 특유의 한적한 시골의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이 든다.
인터라켄(Interlaken)지역의 라우터부르넨(Lauterbrunnen)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10분을 올라가면 뮤렌(Murren)에 도착한다.
인터라켄(Interlaken)이란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툰(Thun) 호수와 브리엔즈(Brienz) 호수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스위스 최고의 관광지이자 알프스의 3봉인 아이거(Eiger), 묀히(Monch), 융프라우(Jungfrau)가 나란히 있는 베르너 오버란트(Berner Oberland)로 올라가는 관문으로 고도는 569m이다.
케이블카에 스키를 신고 케이블카에 직접 타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바로 내려오려나 보다.
3봉 융프라우(Junfrau), 아이거(Eiger), 묀히(Monch)산과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
융프라우(Junfrau)-라우터브루넨 계곡에 우뚝 솟아 있으며 해양도시인 인터라켄에서 남남동쪽으로 18㎞ 떨어져 있다. 베른알프스 산맥에 속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산으로 베른 주와 발레 주를 나눈다.
케이블카, 산악기차를 갈아타고 3000미터 마을에 도착
스위스를 뒤로하고 이탈리아로 간다.
고타도르 터널을 지나니 흐린던 날씨가 맑아졌다.
파리와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관문 밀라노.
이탈리아 북부 패션의 도시 밀라노.
지나는 사람들이 서유럽풍의 패션과 외모를 지닌 곳이다.
고딕 양식의 최고 건축물, 화려하고 웅장한 밀라노 두오모
높이 157미터, 너비 97미터, 1397년 착공하여 570년간 건축하였다고 한다.
중앙의 탑끝엔 금으로 만들어진 성모마리아 상, 성당 출입문에는 화려한 청동조각들이 있다.
과거의 도시설계자들은 중앙에 두오모를 배치하고 주변에 시민광장, 관공서, 상가를 배치하였다.
빅토리오 엠마뉴엘 2세 아케이드 갤러리아.
바닥은 프레스코화로 칠해진 고급스럽고 화려한 갤러리아이다.
주변의 상점과 호텔, 식당이 고급스럽다.
아케이드 중심에 프라다 1호점이 있는 최고급의 명품점들이 밀집해 있다.
바닥의 황소그림을 뒷꿈치로 한바퀴 돌면 행운과 함께 밀라노를 다시 찾는다고 한다.
로마의 건국신화인 늑대 젖을 먹고 있는 쌍둥이 그림과 SPQR의 문양의 바닥 장식이 보인다.
베르디와 푸치니가 오페라가를 초연했던 세계 최고의 스칼라 극장.
나름 고급스러운 ibis호텔에서 지쳐 잠들다.
2015년 1월 20일(화) 유럽여행 4일차
1급 호텔에서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아침일찌 피렌체를 향하여 출발한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이탈리아는 북쪽이 평원이다.
한 없이 넓은 평원을 지난다. 고속도로가 한없이 직선으로만 이어질 것 같다.
롬바르디아 대평원
고속도로 질주
10시 휴게소 에스프레소, 붉은색 오렌지 쥬스, 킨더쵸코릿, 바비인형셋트를 구매하다.
피렌체(Firenze, 영어명 Florence)
[르네상스]의 발원지로 꽃의 도시이자 유명한 예술가들의 고향입니다. 로마가 이탈리아 행정적인 수도, 밀라노가 산업금융의 경제적 수도라면 피렌체는 예술의 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르노(Arno) 강가의 평원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피렌체는 토스카나(Toscana) 주의 주청 소재지로 기원전 200년경에 에트루스카(Etrusca) 족에 의해 세워진 피렌체는 그 이름이 꽃이란 말인 피오레(Fiore)에서 유래 됩니다.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
산 지미냐노는 중세 그대로의 풍광을 가지고 있는 점은 인근 도시 시에나(Siena)와 같지만 전체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시에나가 캄포광장을 중심으로 고풍스런 중세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밀집돼 있다면 산 지미냐노는 웅장한 14개의 첨탑들이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낸다. 이 첨탑들 사이로 난 고색창연한 골목들을 헤매다 보면 포폴로 궁전과 두오모 광장 등 중세풍의 아름다운 고전미에 흠뻑 빠지게 된다.
시에나(Siena)
토스카나주에서는 피렌체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피렌체에서 약 68킬로정도 떨어져있는 도시로서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 버스로 약 10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12~14세기 중세 이탈리아에서 최고로 번영했던 도시 국가중의 하나이다. 지금도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시이다. 피렌체파에 대응해서 시에나파를 형성한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연 2회정도 열리는 각 지역별 말경주대회인 팔리오라는 축제가 유명하다. 구시가가 17지구로 나눠져있고,그 중에 선택된 10개지구에서 뽑힌 말들이 대회를 벌인다. 시에나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로 많은 관광객들과 구경꾼들이 모인다
피사(Pisa)
유명한 '피사의 사탑'이 있는 도시로 토스카나 지방 피사주의 주도이다. 중세에는 해양도시 국가로 군사적, 상업적 입지가 강력했으나 1905년이후 피렌체에 정복되면서 소박한 도시로 변하였다.
피사는 피렌체와 제노바라는 강력한 라이벌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시달림을 받았으나 나름대로 화려했던 과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이탈리아 최고의 고딕 조각가 조반니 파사노의 고향이기도 하다.
피렌체에서 피사로 가는 버스가 많으며 거리도 가깝다. 피사에는 피사의 탑만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두오모와 세례당 등 그 외에도 유명한 건축물들이 많이 있다
익숙해지지 않는 스파게티,
피렌체 두오모, 광장,
하루종일 이동만 함
로마의 남쪽에 있는 니자(Nizza) 호텔에 투숙했다.
영 시설이 엉망이다. 객실은 춥고, 지저분하다.
저녁에 아들과 함께 동네 센터에 나가서 구경하고 돌아 왔다.
2015년 1월 20일(화) 유럽여행 5일차
폼페이(Pompeii) 유적지,
1. 개요
폼페이(Pompeii)
고대 로마 제국의 도시로 이탈리아 나폴리 부근에 있었다. 역사 속 '멸망한 도시들' 가운데 손꼽히는 도시로, 본래 농업과 상업이 활발했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매우 번성했던 도시였다. 그러나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단 18시간만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졌다가 발굴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2. 역사
본디 폼페이는 로마보다 앞선 역사를 가졌다고 알려진 도시국가였다. 최소한 BC 8~7세기 경 폼페이는 그리스인들의 세력하에 있었고, 에트루리아를 BC 6세기에 몰아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스타비아이가 속했던 동맹을 누케리아(현재의 노체) 시가 주도했다. 이 시기 그리스 식민지 출신들이 다 그랬지만 로마보다 문명도가 높았던 상업도시로 여겨지고 있다.
폼페이가 역사기록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BC 310년 제2차 삼니움 전쟁 때 로마의 함대가 사르누스 항에 상륙하여 누케리아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일이었다. 삼니움 전쟁이 끝날 무렵 캄파니아는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그곳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同盟市)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완전히 종속되어 로마화된 것은 동맹시 전쟁을 치른 후이다. 결국 술라에게 BC 89년에 정복되었다.
하늘에서 바라봤을 때 물고기 모양의 도시로 설계 된 계획도시로, 원형경기장을 물고기의 눈으로 보고 왼쪽 위의 "미스테리 하우스"를 꼬리 지느러미로 보면 된다. 현재의 관광이나 당시의 도시 입성, 퇴성도 모두 입으로 들어와서 꼬리로 나오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물고기한테 잡아 먹혀서 소화된 뒤 물고기 변으로 배출
3. 폼페이 최후의 날
의외로 로마는 다른 건 몰라도 화산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지한 편이었다. 심지어 원래 라틴어에는 대놓고 '화산'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는 생겼지만... 거기다가 폼페이는 이탈리아 최대의 화산인 베수비오 화산과 대략 10km정도밖에 안 떨어져서 건설된 도시였다. 이는 사실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껴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메가톤? 이 정도면 화산의 위험성을 몰랐다기보다 화산의 개념 자체를 몰랐던 거 아님?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날, 서기 79년 8월 24일은 불의 신 불칸을 기념하는 축제를 하던 날이었고, 불칸 님, 오늘도 뜨거운 남자라서 멋져보이네요 어, 그래 감사. 쿠쾅쾅(...) 도시 내에서 한참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상한 구름이 밀려오고 시민들이 동요했으며, 이에 플리니우스 등이 해변으로 가서 조사를 하다가, 마침내 화산이 터지고, 화산재가 하늘을 덮은 뒤 18시간동안 무려 수 백 억 톤에 달하는 뜨거운 화산재, 화산쇄설물들이 도시로 쏟아져 내려왔고 폼페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한가지 오해가 있는 것은 이것으로 폼페이 주민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80년대 초중고 국내 과학 및 지리 관련 교과서에서 화산 폭발 관련으로 언급될 당시 폼페이에서 약 1만 6천여명이 죽어서 거의 몰살되었다고 나오던 적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 폼페이 주민은 6000여명에서 20000여명으로 추정되는데, 사망자는 대략 2000명 정도로만 추산된다고 한다. 즉 나머지 최대 18000명 가량은 어떻게든 도시를 빠져나와 피신했다는 뜻이다. 도시는 3m가량의 화산재로 뒤덮였다고 한다. 그래도 최소 10퍼센트의 인구가 사망했으니 부상자는 더 많았을 것이고, 괴멸적인 피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어쨌든 몰살은 오해다.
물론 로마에서도 이 폭발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은 있어서, 백과사전격인 '박물지'를 남긴 문인이었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흔히 大플리니우스로 불림)가 이 폭발을 보고 기록한 것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大플리니우스는 당시 폼페이 인근 미세눔에 주둔하던 해군 함대 사령관이었는데, 폭발을 기록한 후 휘하 병력을 이끌고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을 구조하다가 화산 가스에 중독되어 현장에서 순직했다. 향년 56세. 하지만 그를 따라갔던 열여덟살의 조카 小플리니우스[4]가 이 모든 일을 기록에 남겨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는 베수비우스 산 화산폭발에 대한 글을 타키투스의 〈역사〉에 기고했다.
시기적으로는 10년간 로마를 안정화 시켰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죽고 티투스가 황제가 된지 2달만에 벌어진 참사였다. 티투스 황제는 짧은 2년의 재위동안 베수비오 폭발, 로마 화재 등의 여러 재앙 속에도 콜로세움을 완성시키는 등 재건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했고, 그가 살해 당한 후 오현제 시대가 열린다.
4. 발굴
화산 폭발로 한번 망한 이후 장장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그러다가 서기 1549년 이탈리아에서 수로 건설을 목적으로 땅을 파다가 폼페이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무려 14세기만에 폼페이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18세기인 1748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여러가지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한창 전성기였을 때 갑자기 멸망해버려 전성기 로마의 유물과 유적들이 잔뜩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3분의 2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았다 할 정도.
좋지 않은 이야기도 있는데 빙켈만이 발굴 현장으로 갔다가 인부들이 제멋대로 파헤치는 것도 모자라 장신구가 나오면 삥땅치거나 왕에게 진상을 하는 바람에 간언했다가 쫓겨나 인부를 매수해 기록했다고.
보다시피 이 화석은 우리가 아는 그 형태의 화석이 아니다. 그 화석은 압력에 의해 신체의 단단한 부분(예시로, 공룡 뼈나 삼엽충)이 그대로 돌과 같은 성분으로 변성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폼페이 화석은 화산재에 묻힌 시체가 부패 등 풍화과정을 거쳐 사라진 후 마치 거푸집처럼 남은 화산재에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석고를 부어 만든 형태의 일종의 석고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발굴을 진행하던 고고학자들이 유물은 매몰 당시의 흔적 그대로 발견되는데 정작 사람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던 중 현장에서 보이는 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으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뼈라든가 기타 등등의 부분은 남아있으니 연구하기에 문제될 건 없다.
최근에는 석고 대신 유리 섬유를 부어넣어서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면서도 내부의 유골이나 공반유물도 같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내부가 투명하게 비치는 크리스탈 조각상 같은 모습을 생각하면 오산. 작업공정상 그렇게 깔끔하게 나오진 않는다.
현재 이 발굴지역은 관광지로 보존되어 있는데, 천년 넘게 화산재에 뒤덮혀 차단되어 있었던 관계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당시 죽은 사람의 모습 또한 남겨져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망한 사람의 몸 위에 화산재가 덮어져 굳어진 다음 시신이 삭으면서 생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흔적이 남은 것이다. 사망 당시의 자세를 비롯해 옷주름과 표정까지 고스란히 남겨져 있어 비극성을 더한다. 대신에 나무가 없어서 여름에 매우 매우 덥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관광객 유치와 관리 소홀로 2010년에 들어 유적 중 '검투사의 집'이 무너지는 등 여러가지 악재를 겪고 있다고 한다.外#外# 현재 이탈리아는 유럽연합(EU)과 '폼페이 복원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전문 복원 기술은 독일이, 고고학과 역사적 고증은 이탈리아가 그리고 지리와 환경 자문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팀이 책임지기로 하였다.外#
술집이 매우 많다. 직접 가 보면 술집처럼 보이는게 그다지 없는데, 집 내부에 外세숫대야 같은 바(Bar)가 있는 집이 전부 술집이다. 굉장히 외설적인 벽화가 그려진 매음굴도 많은 편이니 어린 아이와 관광올 땐 주의를 요한다.
5. 기타
이것을 주제로 영화로 나왔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로서 대략적인 내용은 검투사와 높으신 분 따님과의 로맨스 겸 재난 이야기. 하지만 로마시대 검투사는 이젠 진부한 소재인데다, 제대로 된 재난 영화도 로맨스 영화도 되지 못해서 반응은 좋지 않다.
닥터후에서는 원래 일어날 예정이 없는 사건이였지만, 10대 닥터와 도나 노블이 파이로바일들을 막기 위해 베수비오 화산을 폭발 시켰다고 나온다. 근데 이 에피에서 조연으로 출연한 피터 카팔디가 후일...
박물관이 살아있다 3편에서는 길을 잘못든 제레다야와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 미니어쳐에 떨어지는데 대리석 흉상이 위험을 알렸지만 못알아듣고 다른 인형들은 전부 도망갔다. 결국 용암에 갇혀 죽을뻔했지만... 원숭이가 오줌을 싼 덕에 둘은 위기를 모면했다.
식당 스파게티, 해물튀김 맛있다.
선물가게 물건흥정
한적한 폼페이 거리를 거닐다.
쏘렌토 가구공장에서 민서 피아노 치고 이탈리아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이 됨.
부산의 감천마을과 흡사한 느낌이 든다.
쏘렌토항,
나폴리항에서 3가족이 중심가를 돌아다녔고 이후 이탈리아 피자집에서 가족과 함께 피자를 시켜 먹었다. 여행 중에서 그래도 맛이 있었다. 간단한 맥주 한잔과 더불어
돌아 오는 길을 길고도 지루했다.
저녁에 역시나 스파게티와 믹스볼을 느끼하게 먹거 쉬었다.
아들과 딸 그리고 딸의 친구와 함께 센터를 돌려 여행의 마무리를 아쉬워 한다.
2015년 1월 20일(화) 유럽여행 6일차
바타칸 박물관
성베드로 성당
교황님의 강복
로마시내 밴 투어 여행
콜로세움
세베루스 개선문
카피톨리노 언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동상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
베네치아 광장과 캄피돌리오 광장 사이에 위치한 통일 이탈리아 초대 왕인 빅토리오 엠마뉴엘 2세의 기념관. 1925년에 완성된 로마시내에서 가장 큰 기념관.
대전차 경기장
진실의 입
로마시대 하수도 뚜껑
판테온
분수와 오벨리스크(원래 고대 이집트의 사원 입구에 세워진 1쌍의 커다란 뾰족 기둥)
광장에서 이름 모를 테너 가수의 공연
스페인 광장
2015년 1월 20일(화) 유럽여행 7일차
아침일찍 공항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