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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도시의 양지
장미가 피면서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천을 덮어 생긴 공터에 시 당국에서 주차장을 만들었다. 복개천변에 늘어선 상가들은 지붕 위에 그물 같은 검은 망을 둘러서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하천을 흐르던 물소리는 콘크리트 아래로 묻히고, 태양열과 지면의 복사열로 시장이 후끈후끈하다. 어느 지방에선 기왕에 덮었던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오염된 하천을 되살리려 한다는데 시의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시장 사람들 중에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 이도 있다. 판매대에 올라 있는 푸성귀들이 정오도 되지 않아 축축 늘어져 간다. 수지는 스쿠터 스텝 위의 양 발 사이에 커피 두 잔을 싼 보따리를 끼고 시장 길을 달린다. 스쿠터 뒤쪽에 꽂은 막대기 끝에서 어른 손바닥만 한 태극기가 펄럭인다.
수지가 스쿠터에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가끔씩 보는 TV에서 군대 간 남자들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하면 수지는 괜히 미안했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 그것 하나만으로 2년 가까운 시간을 국가에 바친다는 건 어느 모로나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만개한 시간을 바치는 일도 억울할 텐데 그 시간을 견디는 일이 얼마나 힘들면 자살까지 하겠나. 여성으로서 남녀평등을 외치며 자발적으로 입대할 용기는 없지만, 스쿠터에 태극기라도 달고 다니면 어쩐지 그들에게 조금은 덜 미안할 것 같았다. 물론 스스로 낸 아이디어는 아니고 어느 중국집 배달원을 흉내 낸 거지만.
수지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줬다. 나이트클럽의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가 좋아한 노래의 제목이 ‘수지 큐’였기 때문이었다. 나이 마흔도 못되어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분이 좋거나 술 한 잔 했을 때 버릇처럼 부르던 노래. 오 수지 큐, 오 수지 큐, 오 수지 큐 하고는 매번 허밍으로 흥흥거리다 말았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오로지 오 수지 큐라는 네 글자로만 다 부르는, A자 뒷다리도 모르면서 팝송을 연주하는 그야말로 흉내쟁이 인생이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같은 곳에서 일하던 열아홉 살 엄마에게 임신을 시키고, 방치했다가 아이를 떠맡을 정도로 매사에 맺고 끊음이 없었다.
지하로 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오히려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뜨거운 거리보다 지하가 더 시원한대도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돈 잘 쓰는 손님이 든 모양이었다. 배달보자기를 풀자마자 구석자리에서 주인마담이 수지를 불렀다. 수지는 알았어요, 하면서 기계처럼 제가 마실 토마토주스를 만들어 들고 구석자리의 손님들 옆에 앉았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오는 손님들이었다. 건설회사에서 파견근무를 왔다는 그들은 대낮에도 다방에 죽치고 앉아 술판을 벌였다. 처음에 주인마담은 다방용 술인 하수오주를 팔더니 차츰 간이 부어 요즘은 아예 대놓고 양주를 팔고 있다. 한 잔에 오천 원씩이나 하는 싸구려 양주에 비싼 과일 안주나 오징어구이를 먹고 그들은 돈을 척척 내고 갔다. 무슨 일을 하기에 그들이 그럴 수 있는지 수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주머니 사정과 그들의 씀씀이를 생각하다가 수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려면 어떠냐. 책임질 일도 없는데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지 뭐.
아버지가 죽었을 때 수지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 하는데 방법을 알지 못했다. 사실 수지아버지가 딸에게 들인 공에 비해 수지는 훨씬 잘 자라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스스로 밥해 먹고 빨래하고 살림도 곧잘 해냈다. 아버지는 그저 최소한의 생활비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시간들을 수지에게 주었을 뿐이었다. 수지가 자랄수록 아버지가 오히려 수지에게 기대어 살았다. 아버지는 노래만 끝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아 걸핏하면 길가에서 망신을 당했다. 누구에게 빌려준 돈 역시 받은 생각을 하지 않아 떼이기 일쑤였다. 술에 취하면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어서 매를 벌었다. 수지의 꿈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이었다. 성적도 상위권이어서 어떻게 해서든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능력 없는 아버지는 명까지 짧았다. 아, 이렇게 고아가 되는구나. 수지는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엄마는 찾을 수 없었다. 세상과 떨어져 아버지하고만 섬처럼 살아온 수지에게 아는 사람이라곤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돈 문제에 줏대가 없는 아버지는 일터를 너무 많이 옮겼고 아버지의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여성들 또한 너무 자주 바뀌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옛 사람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지배적이었다. 하기는 나이트클럽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재수 없게 아버지를 만나 아이까지 낳게 되었다고 원망하면서 핏덩이를 버리고 떠난 여자가 흔적을 남길 리 없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본명조차 모르는 허술한 사람이었으니. 시청 직원들의 도움으로 수지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수지는 마음이 급해졌다. 시에서 주는 지원금으로 혼자 살면서 3년 동안 고등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수지는 그 시간을 못 견딜 것 같았다. 아버지의 술주정 받던 때가 차라리 그리웠다. 누군가 자신을 챙겨주는 이가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자신이 챙겨줘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었구나, 생각하면서 수지는 텅 빈 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는 일거리도 없었다. 빼빼 마른 아버지를 위해서 만들던 음식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이런 상태로 어찌 3년을 버틸까. 수지는 자신이 없었다.
엄마 쪽을 닮았는지 또래들보다 덩치는 컸으므로 수지는 나이를 속이고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빈집에 우두커니 있자니 자꾸만 죽고 싶어져서 일이라도 해야 했다. 사람들과 섞이고 적으나마 시급도 받고 하다 보니 세상 사는 일의 가닥이 잡혀왔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택했다. 인터넷에서 중고 교재를 구입해 공부를 시작했다. 때때로 삶은 고통을 겪은 후에 더욱 명료해진다. 아버지의 죽음과 앞날에 대한 갈등을 넘어선 열여덟의 집념은 놀라우리만치 뜨겁게 타올랐다. 조용한 방에서 교재를 마주하면 활자 하나하나가 뇌리에 와서 쏙쏙 와서 박혔다. 수학보다는 국사가 흥미로웠고 국사보다는 국어가 더 재미있었다. 특히 교재의 지문에 실린 시나 소설이 정말 좋았다. 아버지 치다꺼리 하느라 집중도가 떨어졌던 중학교 때는 미처 몰랐던 세상이 거기 있었다.
어떤 날 수지는 교재의 지문에서 백석의 시를 읽다가 숨이 멈추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어린 누이는 도라지가 좋아 돌무덤으로 갔습니다, 라는 대목에서 그만 울컥 설움이 복받쳤다. 잠깐이나마 자신이 따라가고 싶었던 아버지의 나라, 죽음의 세계, 그 깜깜한 시간과 공간이 시어 속에 있는 것 같아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도 한 번은 타올라보고 싶어서 재가 된 것일까, 생각하면서. 또 어떤 날은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서 화자가 점순이의 키가 안자라는 걸 통탄하면서 제미, 키두…하는 대목에서 수지는 혼자 목청껏 웃었다. 수지는 그렇게 맑은 마음으로 혼자 사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다방은 밤 열한 시나 되어야 문을 닫는다. 언니들은 티켓을 끊어 나갔고 주인마담은 단골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 그 틈을 이용해 주방이모는 미리 퇴근을 했다. 열한 시가 넘었기 때문에 수지가 셔터를 내리려고 계단을 막 올라가려는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끝났는데요.”
수지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그 남자는 테이블에 앉아 상체를 흔들면서 커피를 주문했다. 마지 못해 커피 한 잔을 테이블 위에 갖다 놓자 그 남자는 충혈된 눈으로 수지를 빤히 바라보면서 커피를 꿀꺽 삼켰다.
“앗 뜨거. 앗 뜨거. 야! 씨팔 이렇게 뜨거운 커피 마시고 죽으라는 거야? 너 이리 와봐.”
남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거칠게 다가오자 수지는 숨이 멎도록 놀랐다. 놀란 수지는 비명을 지르며 얼떨결에 쟁반으로 그 남자를 정신없이 때리고 말았다. 그 남자가 수지의 공격을 받고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테이블을 짚자 테이블이 기울면서 그 남자 위로 넘어졌다. 그 바람에 커피잔이 박살이 났다. 수지는 그 상황이 너무나 무서웠다. 무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정지된 화면처럼 한참을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여기 술취한 아저씨가 넘어졌는데요...”
말을 하다 수지는 울고 말았다. 무서워요, 무서워요,를 반복한 때문인지 경찰은 5분도 안되어 도착했다. 연락도 안했는데 주인마담도 귀신처럼 같은 시간에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 커피잔이 깨져서 널려 있고 테이블이 넘어져 있고 술취한 남자가 그 밑에 깔려 있는 상황을 보고 경찰관과 주인마담은 취객의 난동이라는 결론을 초고속으로 내렸다. 그러니까, 다방종업원이 문을 닫으려는데 술취한 사람이 들어와 커피를 주문한 후 시비를 걸어 커피잔을 깨고 테이블과 함께 쓰러졌다는 것이다. 수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지가 미성연자였기 때문에 주인마담은 경찰관에게 수지가 노출되지 않도록 자기가 전화한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
수지는 계속되는 놀라움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슬며시 그 자리를 피해서 숙소로 들어갔다. 정리를 해보면, 술취한 남자가 뜨거운 커피 줬다고 수지에게 달려들었고 수지는 엉겁결에 그 남자를 쟁반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고 그 남자가 넘어졌다 일어나면서 짚은 테이블이 넘어져서 커피잔이 깨졌고 그 상황이 너무나 무서워서 수지가 경찰서에 신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술취한 남자를 난동 부렸다고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그 뒤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그 남자는 난동죄를 처벌을 받은 것 같았다. 수지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냥 침묵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갑지기 죽은 것처럼, 수지 자신이 어린 나이에 이렇게 험한 곳에서 일하는 것처럼 세상은 늘 이유도 없이 불공평하니까.
사람들의 편견은 참 무섭다. 여자는 무서우면 약해진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얼마나 웃기는 발상이냐. 여자나 남자나 무서울 때 나타나는 양상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도망가는 남자도 있을 수 있고 맞장 뜨는 여자도 있을 수 있다. 소리를 질러 제압하는 남자가 있을 것이며 수지처럼 두려움을 공격으로 표현하는 여자도 있다. 타이르는 남자나 싹싹 비는 여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수지는 가진 게 없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사람들의 편견에라도 기댈수 있으면 기대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서움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었다.
파견 근무 왔다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오다시피 했다. 주인마담이 위생교육 받으러 간 날 그들이 왔을 때 다방에는 수지 밖에 없었다. 반찬거리 사러 나간 주방이모를 기다리며 수지는 그들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수지의 손에 쥐어주었다. 수지가 보기에 그는 죽은 아버지 나이 정도 돼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수지의 손바닥을 간질거리며 혹시 시간 나면 연락해 아저씨가 맛있는 것 사줄게, 라고 말했고 수지는 전화에 눈을 둔 채 알았어요, 하면서 명함을 받았다. 재건축이니 경매니 하는 직함들 위에 적힌 그의 이름은 김종삼이었지만 수지는 전화에 똥덩어리, 라고 적어 넣고는 혼자 낄낄 웃었다. 외상에 넌덜머리가 난 수지는 요즘 들어 부쩍 외상을 자주하는 그들이 동물적 감각으로 의심스러웠다.
그들의 얼굴에 취기가 오르고, 주고받는 말들이 왁자지껄해졌을 때 쯤 주인마담이 돌아왔다. 그녀는 입구에서부터 오빠들 왔어 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더워 더워 하면서 윗옷을 벗고 끈 티만 입은 채 커다란 엉덩이를 들이밀며 그들 사이에 비집고 앉았다. 주인마담은 잘 있었쪄, 하면서 김종삼의 다리 사이를 한번 쓰다듬더니 수지야 언니 주스 한 잔 줄래, 라고 코맹맹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김종삼도 우리도 한 잔씩 더 돌리고, 하면서 주임마담의 벗은 어깨를 쓰다듬었다. 수지는 양주 네 잔과 키위주스 한 잔을 그들에게 갖다 주고 배달을 나갔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며 답답했던 속이 확 뚫린다. 남자애들이 오토바이만 타면 왜 그렇게 속도를 내는지 이해가 간다. 그건 그들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빠르게 달리는 일밖에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모든 힘과 모든 돈과 모든 기회를 가진 어른들에게 대들어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속에서 들끓고 있는 활화산 같은 분노를 배출할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체념한 결과일 수도 있다. 세상일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수지에게 가장 재수 좋은 날은 외상없이 넘어가는 날이다. 같은 이유로 가장 재수 없는 날은 외상도 많이 나가고 욕도 배터지게 먹는 날이다. 수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주문했으면 커피만 마시면 될 일이지 왜 남의 몸을 저희 맘대로 주무르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건 나이가 많든 적든 마찬가지였다. 내 몸을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그들의 기분이 나쁜지 수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엉덩이나 가슴으로 손이 쑥 들어오면 토할 것만 같아서 수지는 얼른 피하고 본다. 두어 번 반복해서 그들을 거부하면 그들은 야! 오늘 찻값 외상이다, 그런다. 아, 더러운 새끼들. 수지는 익숙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스쿠터의 속도를 올렸다.
배달 나가는 찻값의 수금은 배달 가는 사람이 해야 한다. 그것이 다방의 법이다. 다른 종업원들은 두세 달 만에 선불로 당겨 쓴 돈을 다 갚고 떠나가는데 수지는 그 놈의 외상값 수금이 안 돼서 발목이 잡혀 있다. 주인마담 입장에서는 수지가 티켓장사를 안하는 것이 불만이긴 해도 그럭저럭 심부름이나 시키면서 데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데리고 있는 것이었다. 티켓장사를 하지 않는 대신 월급을 깎으면서도 조금 더 키운 후 살살 구슬려서 큰 건에 한번 써 먹겠다는 계획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주인마담은 작은 눈을 빛내며 수지의 머리를 올려줄 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업원들은 모두 하이힐을 신고 스쿠터를 탔지만 수지는 운동화를 고집했다. 스쿠터에서 내린 수지는 사뿐사뿐 걸어 계단을 내려왔다. 다방으로 들어와 배달보자기를 풀어 주방 안으로 밀어 넣다 돌아본 광경에 수지는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저만치 구석의 붉은 조명 아래서 김종삼이 주인마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녀의 허연 젖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받치고 오른 손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김종삼의 작은 머리가 주인마담의 가슴보다 왜소해 보여서 그건 마치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모습 같았다. 담배를 피우며 젖을 먹이는 엄마. 핏덩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 아버지가 죽고, 살길이 막막해 자식이 죽음을 연습하고 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 술을 파는 엄마. 엄마들은 다 더러운 존재들이다. 수지는 화장실로 가서 아침에 먹은 걸 모두 토했다.
8월의 검정고시 고사장은 수험생들과 보호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검정고시 응시자가 그렇게 많을 줄 상상도 못해 봤다. 수지의 자신감이 조금 상승했다. 이런 시험은 자신처럼 아주 불쌍한 아이들만 보는 줄 알았다. 고사장의 수험생들은 십대 초반의 월반하는 아이들부터 70대 노인들까지 다양했다. 특히 머리카락을 탈색하거나 피어싱을 하는 등 문제학생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많아서 이채로웠다. 그들은 휴식시간마다 그늘에 모여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담배냄새가 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시험문제를 서둘러 풀고 엎드려 있었다.
8교시 시험을 끝내고 내려오니 1층 로비에 사설학원에서 걸어 놓은 답안지가 눈에 띄었다. 수지는 교사들 몰래 적어둔 자신의 답안지를 꺼내 학원의 답안지와 맞춰보았다. 수학을 망치고도 평균 92점. 그러면 되었다. 이제 대학 가는 건 일도 아니다. 자신감이 충만해져서 집에 돌아와 대학들의 입학사이트를 검색하다 수지는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검정고시를 잘 보았다고 좋은 대학에 갈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검정고시는 말 그대로 고등학교 졸업에 대한 자격시험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다시 수능을 봐야 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밥상을 밀어 놓고 침울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수지를 집주인이 찾아왔다. 집주인은 계약서와 통장을 수지에게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지야, 내가 그동안 맘이 약해서 말을 못했는데 잘 들어봐! 지금 네가 살고 있는 방은 보증금 오백에 월세 이십만 원이거든. 근데 너희 아빠 돌아가시기 전부터 방세가 밀려서 이미 다섯 달 전에 보증금이 월세로 다 까졌어. 어린 너에게 도저히 방을 비워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왔는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혼자 살잖니. 들어오는 돈은 방세 밖에 없는데 병원 치료 받느라 어디 일도 못하고. 그러니 수지야, 미안하지만 네가 엄마라도 찾아서 이 문제를 좀 해결해 주면 안 되겠니?”
집주인이 나가자 수지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세상은 나에게 적대적이다. 무슨 횡재처럼 검정고시 점수가 높게 나온다 싶더니 기어이 기쁨보다 몇 배의 절망을 주고야 만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기초수급이나 받으면서 느긋하게 고등학교에 다닐 걸. 빨리 가겠다고 질러온 길에 이리도 많은 장애물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자 자동으로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했다. 이제 어쩔 것인가.
생활정보지를 샅샅이 뒤져도 선불로 월급을 주는 직장은 없었다. 집주인한테는 한 달만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한 달이 지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인력시장에서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일이나 술집 같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식당 일은 선불이 안 되고 술집은 아직 자신이 없었다. 그때 수지의 눈에 들어온 구인 광고는 다방 종업원 선불 가능이라는 문구였다. 어떻게 내 사정을 이렇게 잘 알고 이런 광고를 냈을까. 수지는 바로 전화를 걸었고 다방에서 먹고 자는 조건으로 즉석에서 취직이 되었다. 수지는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꼈다. 다방에서는 차 같은 걸 팔겠지 하면서.
먹은 걸 다 토한 수지는 너무 어지러워서 눕고 싶었다. 주인마담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반대편 계단으로 살금살금 내려가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수지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며칠 전에 들어온 김 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최대한 젊게 꾸미고 있었지만 나이가 마흔도 훨씬 넘은 아줌마였다. 김 언니는 윗옷을 입은 채 치마를 올리고 김종삼 일행 중 한 명의 허리 아래쯤에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누운 채로 야 뭐야. 하다가, 하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수지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와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잠자던 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며 아빠, 하고 불러보았다. 아빠, 세상 사람들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손님들은 내 몸을 더듬고, 왜 주인마담은 손님한테 젖을 물리고, 왜 김 언니는 배달 간다더니 숙소로 돌아와 손님 몸을 타고 앉아 있는 거야. 왜 다들 저렇게 이상한 거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세상이 나에게 이러는 거야. 나는 검정고시 쳐서 평균 92점이나 받았는데 뭘 덜 배운 거야. 말 좀 해보라고 아빠, 제발 말 좀 해 보라고.
수지에게 세상은 지금 온통 날 선 칼날 같다. 곡예사처럼 재주를 부려 피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심장을 베이고 말 것 같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도시는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어둠과 음모로 가득하다. 부모 잃은 아이는 그들에게 길들여져서 그들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수지는 터벅터벅 다방으로 돌아왔다.
파견 근무하는 사람들의 출입이 뜸해져가고 있었다. 오전 중에 주인마담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대다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김종삼의 명함을 찾았다. 금고와 서랍을 모두 뒤져도 안 나오자 주방의 구석구석을 뒤집고 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수지에게 물었다.
“수지야, 혹시 김종삼 명함 못 봤니?”
수지는 전에 받았던 김종삼의 명함을 어디 두었는지 생각이 안 나서 전화에 똥덩어리 라고 저장한 번호를 알려 주었다.
“너, 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 니네 혹시 몰래 만나고, 뭐 그런 사이야, 엉?”
주인마담은 눈을 심하게 깜박거리면서 수지에게 따지듯 물었다. 수지는 주인마담의 젖을 물고 있던 김종삼의 작은 머리가 생각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닌데요. 그때 언니 위생교육 가셨을 때 아저씨가 준 건데요.”
주인마담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래? 하면서 전화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다방에서 받은 선불로 다시 살게 된 아버지의 집이 수지에게는 더없이 고마웠다. 세상 어디에도 수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지만 그 집에서 만큼은 혼잣말이라도 누군가를 불러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밉긴 해도 아버지의 냄새가 남아 있고 아버지가 쓰던 물건들이 남아 있고 아버지가 부르던 수지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수지는 다방에서 못 볼꼴을 보아도 꾹꾹 눌러 참는 것이다. 함께 일하는 언니들은 티켓을 끊고 나갔다가 몇 시간 만에 돌아오곤 했다. 그녀들이 술에 취해 돌아와 옷을 벗으면 만 원짜리 지폐들이 툭툭 방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수지는 그 돈들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다방에서 먹고 자면서 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눈치만 늘었다. 궁금해 하지 말기. 급한 마음에 서두르지 말기. 모르는 척 하되 가능하면 모든 일의 이유 알기. 절대로 손해 안보기. 내 실속은 내가 챙기기. 수지는 주인마담이 외박을 할 때마다 눈치껏 집에 가서 수능공부를 했다.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들어가면 지금 저들이 함부로 벌어서 함부로 쓰는 돈보다 훨씬 당당한 돈을 벌어서 당당하게 쓸 수 있을 것이었다.
주인마담은 11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배달 준비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지야, 언니가 지금 위경련으로 입원을 했다. 그러니 네가 김종삼한테 가서 수금 좀 해 와라. 걔네들 낼 모레 여기 뜬다니까 지금 얼른 가서 해 와야 된다, 알았지. 외상장부는 금고에 있고 외상값은 2백 15만 원이다.”
자기 말만 하고 주인마담은 전화를 끊었다. 2백 15만 원이면 내 방 보증금의 절반에 육박하는데 그 돈을 모두 다방에서 탕진했다고? 현찰 내고 먹은 게 더 많은데 그러면 내 방 보증금보다 많은 돈을 다방에 앉아 희희낙락 없앴다고? 마담 언니 젖이나 먹으면서? 헐! 대단한 사람들이네. 어안이 벙벙했지만 수지는 그들이 낼 모레 뜰 거란 주인마담의 말 때문에 서둘러 김종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지금 저희 마담 언니가 병원에 입원했는데요, 저더러 외상값 수금을 하라고 해서…”
김종삼은 몸도 왜소했지만 목소리도 가늘었다.
“그래? 그럼 네가 이리로 올래?”
“어딘데요?”
“사무실은 찾기가 복잡할 것 같고, 그럼 지금 점심시간이니 밥이나 먹자. 요 아래 미도일식으로 와. 밥 먹고 외상값 계산해 줄게. 얼마지?”
“네 2백 15만 원인데요.”
“그래, 알았어. 12시에 미도일식에서 보자.”
생긴 건 오종종한데 그 많은 액수에 토를 안 다는 걸 보면 성격은 시원시원하네, 하고 생각하면서 수지는 외상장부를 챙겨들고 일식집으로 갔다.
식당에는 점심 손님이 별로 없었다. 어느 새 왔는지 김종삼은 이미 음식을 주문한 후 양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수지는 뭔가 이상했다. 약속시간은 열두 시였지만 급한 마음에 서둘러 와서 지금 열한 시 사십 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저 인간은 어찌 벌써 왔을까. 혹시 전화할 때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마담 언니에게 연락을 받았을까. 그래 그랬을 것 같다. 주인마담이 병원에서 김종삼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수지는 이런저런 생각을 꿰맞추면서 느끼한 초밥을 억지로 다 먹었다. 밥은 먹지 않고 술만 마시고 앉아 있는 김종삼의 식사가 언제 끝날지 몰라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하기만 했다.
참다 참다 수지가 외상장부를 조심스럽게 내밀자 김종삼은 게게 풀린 눈으로 장부를 들여다보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 한잠 자고 계산해야겠다.”
김종삼은 수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수지의 손을 잡은 채 식당을 나왔다. 얼굴에 벌겋게 취기가 오른 김종삼은 골목을 기웃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모텔이었다. 수지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이달 말이면 선불로 당겨 쓴 돈을 겨우 다 갚게 되는데. 그동안의 행태로 짐작해볼 때 주인마담은 만약 수지가 외상값 수금에 실패하면 어떻게든 엮어서 어느 정도 수지가 책임을 지게 하여 계속 데리고 일을 시킬 것이었다. 수지에게는 아주 특별한 결정이 필요했다.
수지는 김종삼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한편으로 호텔의 구조를 살폈다. 창문이 있어야 한다. 그래, 창문이 있어야 해. 그러면서도 수지는 아저씨 얼른 주세요, 라며 채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줄게. 내가 지금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런다니까. 어디 가서 잠깐 눈을 붙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대낮에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요.”
김종삼은 자신의 말에 수지가 씨근덕거리며 대꾸를 하자 그래그래 미안하다, 하면서 은근슬쩍 어느 모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아저씨는 얼른 들어가서 주무시고 나오세요.”
수지는 김종삼의 손을 뿌리치고 모텔 밖으로 나왔다.
“너 외상값 안 받을래?”
김종삼은 애원조로 말하며 다음 모텔로 수지를 이끌었다. 그렇게 다섯 군데쯤 실랑이를 하다 김종삼의 얼굴이 노랗게 변하자 수지는 마지못해 모텔로 따라 들어갔다.
대낮이라 모텔의 방들은 모두 문이 열려 있었다. 예전에 자주 술에 취한 아버지를 데리러 갔던 터라 수지에게 모텔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김종삼을 따라 4층으로 올라가는데 안내실에 있던 두 여자의 수군거림이 뒤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나이 먹고 술 취한 남자 손에 끌려 들어온 어린 여자아이를 한심하다고 말하고 있겠지, 라고 짐작하면서 수지는 김종삼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잠근 깁시종은 옷부터 벗었다. 그 과정에서 침대 다리에 바지벨트 부딪치는 쇳소리가 났다. 그 순간 수지의 눈빛이 반짝하며 빛났다. 수지는 당황하지 않고 김종삼이 벗어 놓은 바지를 들고 창문 쪽으로 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수지는 벨트를 빼서 손에 감은 후 창문을 열고 창문 밖으로 김종삼의 바지를 던져 버렸다. 게게 풀려 있던 김종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뭐하는 짓이야, 지금?”
그 순간 수지는 아버지가 부르던 수지 큐, 노래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딱 한 장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엄마의 사진을 떠올렸다. 예쁘지도 않고 화장만 떡칠한 사진이었다.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내가 그 가사를 알려 줬을 텐데. 아이 러브 더 웨이 유 워크, 아이 러브 더 웨이 유 토크. 별 가사도 아닌데 아버지는 그걸 몰라 그 노래를 평생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을 것이다.
“뭐하기는 아저씨, 여관에 왔으니까 빨랑 외상값 달라는 거지. 5분 안에 안 주면 이 버클로 아저씨 대가리를 내려칠 건데…”
수지는 주인마담의 젖을 물고 있던 김종삼의 작은 머리를 정말로 박살내 버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굴욕과 엄마의 무책임까지도 그 작은 머리가 원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김종삼이 일어설 기미를 보이자 수지는 손에 감은 벨트의 반대쪽 끝에 달린 금속 버클로 김종삼의 머리를 가격했다. 수지의 공격은 약간 빗나갔지만 김종삼의 벌겋던 낯빛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다시 한 번 수지가 버클을 휘두르며 빨리 안 줘, 하자 김종삼은 네가 지갑 갖고 있잖아 꺼내가, 라며 이불로 자신의 하반신을 가렸다. 참담한 몰골로 흩어진 머릿결을 수습하는 김종삼을 뒤에 두고 수지는 외상값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모텔을 뛰어 나온 수지는 거리로 들어섰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만 같고 어느 순간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잡을 것도 같다. 창밖으로 던져버린 김종삼의 바지만 생각하면 목이 말랐다. 수지는 다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며 어두워질 때까지 물만 사서 마셨다. 그러나 그곳에 다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던져버린 바지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 모텔 근처로 갔다가 수지는 잠복하고 있던 경찰관에게 제대로 붙잡혔다. 신고는 모텔에서 수지의 뒤에 대고 수군대던 여자들이 한 모양이었다.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올라 경찰서로 가면서 수지는 에라 모르겠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하는 배짱이 뱃구레 저 밑에서 올라오는 걸 느꼈다. 수지를 경찰서 의자에 수갑으로 묶어두고 경찰관은 전화로 김종삼을 불렀다. 김종삼이 오는 동안 수지의 조서를 꾸미면서 그는 동료에게 초범들은 꼭 이렇게 범죄 현장으로 돌아와 준다니까, 하면서 껄껄 웃었다. 웃는 눈빛이 경찰치고는 무척 순해 보였다. 그는 다시 조서를 들여다보다가 얘 미성연자네? 떽, 어린 것이… 하면서 혀를 찼다.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에 출두한 김종삼을 보자 수지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수지는 경찰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왜? 할 말이 뭔대?”
“저 아저씨 안 보이는 데서 할게요.”
수지가 눈을 순하게 뜨며 말하자 그는 수지를 데리고 지하 유치장으로 가는 계단에 앉았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수지는 준비한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면서, 속으로는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경찰관에게 울먹였다.
“ 아저씨! 사실은 제가 다방에서 일하는데요, 저 아저씨가 외상값 받으려면 술 같이 마시자고 해서 먹었거든요. 근데 또 여관에 가면 준대요. 그래서 모텔에 갔는데 저 아저씨가 막 바지를 벗고. 저는 수금 안 해 가면 주인 언니에게 혼나니까 따라간 건데. 그리고 저 미성연자잖아요…”
경찰관은 1층에 있는 김종삼에게 가서 당신이 외상값 준다고 여관 가자 그랬어? 저 애한데? 술이 깬 김종삼은 얼떨결에 네, 라고 대답했고 경찰관은 이거 나쁜 자식이구만. 수갑은 당신이 차야 되겠네, 했고 김종삼은 죄송합니다, 라며 오종종한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마담의 죄가 더 컸으므로 김종삼은 수지의 합의를 받고 사회봉사명령을 전달받은 다음에야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 밖에서 김종삼을 기다리고 있던 수지는 그의 뒤를 한참 따라가다가 불쑥 그의 앞으로 나섰다. 김종삼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아저씨, 아까 보니까 지갑에 돈 많드만. 나 오늘 아저씨 땜에 일 못한 거, 택시 타고 여기 온 거, 그리고 갈 차비까지 주세요.”
말하면서 수지가 빤히 바라보자 김종삼은 얼마면 돼? 하면서 지갑을 열었다. 오십만 원요. 수지의 대답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체념한 듯 십만 원 권 자기앞수표 다섯 장을 꺼내 주었다. 수지가 오른 손 검지를 세워 좌우로 흔들며 아니 아니 현찰로. 거기 신사임당 많구만, 하고 말하자 김종삼은 한숨을 푹 쉬며 수표를 집어넣고 오만 원 권 지폐를 모두 꺼내 수지의 손에 던지듯 놓았다. 얼핏 보기에도 오십만 원은 훨씬 넘어 보였다. 수지는 미성연자 강간미수치고는 엄청 싸구만, 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다방으로 돌아와 보니 주인마담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아침에 위경련으로 입원한 사람의 얼굴치고는 지나치게 윤기가 흘렀다. 흡사 고가의 마사지를 받고 온듯 그녀의 피부는 촉촉하기조차 했다.
“수금해 왔냐?”
뚫어지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지의 눈길을 은근슬쩍 피하며 그녀가 물었다.
“30분 후에 이 앞에서 준대요. 배달 들어온 거 없어요?”
수지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전표를 본 후 배달 보자기를 챙겼다.
“배달 갔다 와서 바로 수금 해다 드릴게요.”
수지는 문을 열고 다방을 나섰다, 그녀는 달게 웃으며 그래 조심해서 갔다 와, 라는 대답에 콧소리를 섞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빨간 스쿠터를 타고 수지는 부산 쪽으로 길을 잡는다. 유월의 바람이 시원하다. 스치는 도시마다 장미꽃이 붉게 피어 있다. 수지는 이제 막 열여덟 인생의 가장 높은 고개를 넘었다. 이제 엄마는 필요 없다. 경찰에서 미성연자 고용을 따져 물으면 주인마담은 차라리 수지가 사라진 사실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수금한 돈 들고 튀었다고 절대 고소 같은 건 못할 것이다. 안녕 아빠! 난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와 김종삼 아저씨를 협박해서 생활비를 뜯겠어요. 그걸로 피나게 공부해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거예요. 남자만 군대 가라는 법은 틀렸어요. 육사를 졸업한 후 특전사 간부가 되겠어요. 그래서 개머리판으로 적들의 대가리를 내려치겠어요. 고마워요! 마담 언니 그리고 시종 아저씨, 지독하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줘서. 난 아주 짱짱한 어른이 될 거예요. 오 수지 큐, 아빠 안녕! 에버 아이 러브 유 수지 큐…
2015 공주문학
첫댓글 주눅들지 말고....세상 탓만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기.....드세게 살기......
오, 수지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