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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독교와 종교대화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한사람
제 9강. 우리나라 민족운동과 기독교
1. 기독교 민족 운동의 전개
(1)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종래의 중세적 신분질서와 계층 간의 위화감을 배제한 서양식 근대교육 방법은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남녀 평등을 실천에 옮겼으며, 근로에 대한 인식 또한 새롭게 하였다. 한편 자주 자립 정신에 입각한 민족의식을 고양시켰을 뿐 아니라 운동회 연설회 토론회를 장려함으로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이른바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혁명적인 교육방법이 과거 개인과 가족의 이익을 최고의 교육적 목적으로 삼았던 가치관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신교육을 수학한 사람들의 사고는 보다 합리적인 판단 하에 자신과 국가와 민족을 생각할 수 있는 근대적인 사고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주도한 기관은 기독교계 학교들이었다.
민족계 교육기관의 설립운동은 대체로 1905년 이후부터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기독교인이자 구한국군 참령을 지냈던 이동휘는 강화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100여 개의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동휘(1873~1928)는 1899년 서울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 육군참령을 지내고, 1902년 개혁당을 조직, 개화운동을 하였으며, 1907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 그 해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 시베리아로 망명,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2월 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 역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모든 민족계 학교의 귀감이 될 이상적인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안창호(1878.11.9~1938.3.10)는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며,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에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어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1908년(융희 2) 안창호(安昌浩)가 평양에 설립한 중등교육기관으로, 독립사상 고취와 국민계몽을 주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였으며, 인재양성을 통한 구국의 이념 아래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고 국민교육의 사표(師表)가 될 인재를 양성하려 하였다. 다른 중등학교와는 민족정신의 고취, 민족성의 계도 등에 중점을 두었다. 처음 계획으로는 조선 각 도에 1개씩의 분교(分校)를 세워 그 학교의 출신자로 하여금 각 군 ·면의 초등학교를 운영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909년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립학교에서 전개한 일본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과 105인사건 등이 원인이 되어, 1912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입교한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 가명학교도 모두 민족계 학교이자 기독교 정신을 건학의 이념으로 삼았던 학교였다. 남강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하였다. 빈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으며 10여 년 동안 유기행상과 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뛰어난 경영가로서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여 근로자들의 생산능률은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 전쟁의 발발로 파산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과 고종 강제 퇴위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이승훈은 40대의 나이에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교육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한평생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 봉사했다.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워서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0년 장로교 신자가 되었으며, 1916년 장로로 선출 될 정도로 성실한 신자가 되었다. 오산학교는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이 지역 민족주의 교육의 두 축이 되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불교, 천도교와 더불어 조선의 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래서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도 교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탄압을 면하지 못했으나,조만식, 유승모,박우병,장지영,백봉제,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1922년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분신처럼 생각했던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학교를 운영하며 실력양성론을 주창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만식을 영입해서 교사로 삼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에게 학교의 경영권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 당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의 오산학교에서는 류영모, 함석헌 등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1930년 사망하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하였다.오산학교는 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에 남강 이승훈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로 현 오산중고교의 전신이며, 민족교육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교육을 맡았던 지도교사에는 여준, 윤기섭, 유영모, 장지영,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이 있었고, 운영을 맡았던 교장으로는 백이행의 뒤를 이어 이종성, 나부열, 박기선, 조만식, 유영모, 주기용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심혈을 쏟았다. 3 ·1운동 후 일제는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하여 탄압을 강화하였고, 끝내는 교사(校舍)를 불태웠다. 1923년 출감한 이승훈이 김기홍 ·오치은 ·조시연 등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재건, 종합교육기관으로서의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30년에 이승훈의 급서(急逝)로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 후 근근히 명맥만을 이어오다가 광복 후 오산의 전통과 이념을 되살리게 되었으나, 6·25전쟁으로 학교를 부산으로 옮겨 1953년 4월에 오산고등학교로 재건하였다. 1956년에 현재 위치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普光洞)으로 이전하였다.
이 시기에 민족의식 고양에 기여했던 것 중의 하나는 언론의 공헌이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의 공헌은 지대했다. 한글 창제이래 일반 백성의 권익을 대변할만한 대중적 매체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주권재민을 기초로한 한글판 독립신문의 계몽적 기능은 일반인들의 국가의식과 민권사상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국정의 잘못을 비판하고 열강의 경제적 침탈 등을 고발함으로 그간 느끼지 못했던 자주국권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로 발간되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발간했으나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 헨리 아펜젤러를 발행인으로 하여 윤치호가 맡아 발행하다가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폐간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 보다 가까이서 친근감을 주며 근대 신문명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던 죠션그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등의 역할도 컸다. 1897년 2월과 4월 감리교측과 장로교 측에서 각각 발행하였던 이 신문은 성격상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었으나 건전한 사회윤리관과 도덕심을 함양시켰으며 근대적인 농법과 산업육성을 위한 새로운 기술 등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는,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감리교측에서 발행했던 주간 신문으로, 1897년 2월 2일 아펜젤러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진리 보급과 사회계몽운동을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1905년 7월 1일 당시의 교회연합운동의 분위기에 따라 언더우드가 발행하던 〈그리스도 신문〉과 합쳐져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신문인 〈그리스도 신문〉이 되었으며, 1907년에 제호가 다시 〈예수교신보〉로 바뀌어 1910년 한일합병 때까지 발행되었다. 신문의 성격상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었지만 교회소식이나 교리지식적 내용뿐만 아니라 서구문화와 문명을 소개하는 데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외에 농사나 공업에 대한 일반지식의 보급과 함께 사회윤리관과 도덕심을 함양시키는 데도 이바지했으며, 특히 당시의 〈독립신문〉·〈대한매일신보〉 등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보다 심도 깊은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대한매일신보였다. 1904년 7월 쇠잔하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당대 대표적 논객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에 의해 운영 편집되었던 이 신문은 민족의식 고양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베셀: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한 신문이다.《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으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2) 기독교 민족운동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서구열강의 침투가 노골화되자 외압으로부터 자주권을 보호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자유민권 운동을 통한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독립협회와 만민동공회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정치운동에는 기독교가 직. 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만민공동회에는 연사들의 강연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나선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박성춘은, 우리나라 최초 의사 7명 가운데 하나인 박서양의 아버지로, 그가 장질부사를 앓던 중 고종의 어의였던 제중원 의사 에비슨의 지극한 정성과 치료로 건강을 회복한 후 기독교 신자가 되어, 신분 철폐를 명한 고종에 의해 평민이 되었다. 그는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기독교인사들이 항일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한 시기는 1905년 을사5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강탈당하던 제1시기, 사실상의 주권 상실을 의미하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던 1907년까지의 2시기, 1910년 일제에 강토가 병탄되던 제3시기 등으로 추진되었다. 기에는 대체로 기도회를 통해 민족의 비운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복음주의적인 초보적 민족운동 단계였다. 한국인은 물론 선교사들 모두는 노일전쟁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였으며, 그렇게될 때 한국의 독립이 보장될 것으로 믿었다. 이는 신생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경쟁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착오였다. 한반도가 서서히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미국이 묵인하였던 것이다. 구국기도회의 대표되는 예는 1905년 을사5조약의 체결이 알려지자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과 감리교 계통의 엡윗청년회 등이 연합하여, 같은 해 11월 수천명의 청년과 교인들이 모여 일주 간 기도회를 열었고, 이때 기도회를 주도했던 상동교회 전덕기 전도사와 김구 이동녕 옥관빈 등은 기도회가 마쳐진 뒤 궁궐로 나가 도끼를 메고 조약반대 상소문을 올렸고, 정순만 들은 평안도 장사 수십 명을 모아 을사5조약의 채결자 박제순 등 소위 을사 5적 암살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상동청년학원의 회원들은 신민회의 핵심적인 회원들이었다. 전덕기 목사는 운양호 사건에 이은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고 개항을 표시햐던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全漢奎)와 어머니(林)씨는 그가 9세 되던 해 모두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고, 이후 숙부인 전성여(全成汝)의 집에 들어가 성장하였다. 숙부의 직업이 숯장수인 것으로 미루어 전덕기 가문의 신분 계층은 상인계층일 것으로 추측되며,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적인 고독과 경제적 곤란을 체험하며 살았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892년 그는 당시 "양귀자"(洋鬼子) 즉 '양도깨비'로 오해받던 서양 선교사를 스스로 찾아갔다. 정동에 있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W.B.Scranton)의 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가 스크랜턴을 찾아간 동기는 신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경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장하여 이제는 자립의 생활을 해야 할 그로서는 경제적 수단의 하나로 선교사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스크랜턴은 그를 자기집 고용인으로 맞아 들였고 전덕기는 신용있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러나 스크랜턴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 수단으로 선택한 선교사, 그의 뒤에 있는 기독교가 그를 정신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4년만인 1896년 그는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전덕기는 1898년 상동교회 속장이 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때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조직,민주적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9년에는 교회 안에 설립된 공옥학교 교장이 되어 주로 불우한 형편에 있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3년 엡윗청년회가 정치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선교사에 의해 해산당하자 교회안에 청년학원을 설립, 보다 적극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같은 민족주의 사상을 지닌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이나 1907년의 헤이그밀사 사건은 상동청년학원 내지는 '상동파'로 불리는 민족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이었다. 그러면서도 감리교 선교부가 주관하는 교역자 양성과정인 '신학회'에 꾸준히 참석하여 마침내 1907년 집사목사(현재의 감리교 준회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스크랜턴의 후임으로 상동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여 별세하기까지 목회하였다. 상동교회 담임목사 외에 그는 공옥학교 교장으로 계속 교육에도 종사하였고 황성기독청년회(현YMCA)조직과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1907년 미국에서 안창호가 일시 귀국하면서 산재해 있던 민족운동 세력들이 규합되어 소위 신민회가 형성되었는데 전덕기는 이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어 본격적인 민족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이 신민회 조직은 일제의 조선 합병에 걸림돌이 되었고 이에 일제는 합방(1910년)직후 항일 민족세력 제거에 나서 그 첫 대상으로 기독교인이 주축을 이룬 신민회를 삼았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1911년의 '데라우찌 암살음모사건'으로도 알려진 '105인 사건'이다. 윤치호,이승훈,양기탁,임치정 등 신민회 핵심 멤버들이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는데 이때 전덕기도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11년 봄,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그해 겨울에 졸업하였는데 졸업 즉시 체포되어 악형을 받았다. 재판에까지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고문으로 병을 얻어 불기수로 풀려난 것이다. 고문의 여독으로 늑막염과 폐결핵을 앓기 시작한 그는 이후 투병생활을 하여, 1914년 1월부터는 아예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한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14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3) 선교사와 민족운동
일본에 대하여 반대적인 입장을 취한 선교사 가운데 헐버트(H. B. Hulburt)를 꼽을 수 있다. 그는 1886년 육영공원 교사 자격으로 입국한 이래 1909년 일제의 압력으로 출국 당하기까지 23년 간 한국민과 한국의 역사, 풍습 언어 등 한국문화 전반에 걸친 연구를 통해 한국민족과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바 있었고, 그는 한국 민족운동에 실천적으로 참여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 땅을 다시 찾았고,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안장돼 있다. 헐버트는 본국의 압력과 지시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정치문제에 손을 끊은 이후에도, 한국관계 언론을 편집 발간하여 한국의 정치적 어려움을 세계에 알렸으며, 한국 YMCA초대 회장으로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남다른 활동으로 그는 1905년 10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행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협조를 호소하는 고종의 친서를 품고 워싱턴에 밀파되어 백악관과 국무성 그리고 의회를 수차에 걸쳐 왕래하면서 외교적인 노력을 시도하였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나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담이 개최될 것을 상동청년학원에 알려 이른바 헤이그 밀사를 결행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을사조약에 의하여 일본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극심한 착취와 탄압에 시달리게 되자,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였다.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사람의 밀사는 국제정의 앞에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상설을 비롯한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인 공고사를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세 특사들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대표와 언론에 공개하자 각국 언론들은 동정적이었으나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러한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갖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 하였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으며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 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 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으로 하여금 불어로 연설하도록 하였다. 이위종의 열성적인 호소는 참석한 각국의 이름난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대표 및 그들의 수행원들까지도 감명을 주어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이 공례를 빙자하여 한국의 청원을 공감하지 않자, 선생은 분격을 금하지 못하고 연일 애통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
2. 국권상실과 기독교의 수난
105인 사건과 기독교인의 수난 :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직후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국내의 애국인사를 한꺼번에 제거할 목적으로 날조한 1911년에 있었던 대규모 항일민족 탄압사건이다. 1910년 평북 선천에서 안명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 경찰은 이것을 구실 삼아 신민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기독교 신자 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억압할 계획을 세워, 안명근 사건을 신민회원 등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처럼 조작하여, 유동열,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이동휘 등 6백여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신민회원이나 기독교 신자들은 총독암살 음모를 꾸민 사실이 없으므로 그 사실을 부인하자, 일본 경찰은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의 총독부 경무총감(아카시)의 지시로 이들에게 가장 악독한 고문을 자행했는데, 그 결과로 6백 명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105명을 기소하였다. 1심(審)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105명은 불복상고를 제기하여, 2심에서 99명은 무죄 석방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등 6명만이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선고를 받고 복역하였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교회를 비롯한 기독교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목적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사건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개항 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민족사 및 한국교회사적인 의미 또한 크다 할 수 있다. 첫째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05년 이후 '합방'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교회, 특히 선교사와 민족운동 진영 사이에 다소간 야기되었던 불신과 괴리현상이 크게 회복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에 임하는 선교사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종교상의 이해관계 이상을 넘지 않으려 했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이 사건의 허위성과 부당성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일제의 올무로부터 항일 민족 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점은 하나의 공헌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이 사건으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고초를 직접 당함으로, 이들이 이전까지 다소 열악했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결과적으로 고양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고통과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성숙한 신앙을 갖게되었다는 점이다.
3. 기독교의 항일운동
(1) 무장투쟁운동의 전개
여기서 말하는 무장투쟁이란 1910대를 전후하여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테러와 암살 등의 방법으로 진행된 항일무장투쟁운동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견들이 있다. 개인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 의해 결행된 폭력과 테러를 기독교 항일운동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초기부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종교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갔다는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될 부분이라고 본다. 항일무장투쟁운동에 가담했던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정치 사회적 추이에 민감한 서울과 서북계 출신 그리고 해외에 망명 중이던 신지식인 계층이 구성체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교회의 조직체에 매였던 이들이 아닌 '개별성'이 강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교회를 통해 근대적인 문명에 눈을 뜨게 되었고, 기독교 정신을 통해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 받았으나 교회 조직이나 교단에 속하지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그러한 성향은, 입교 동기 역시 수수한 종교적 신앙심보다는 사회. 정치적 관심에서 출발한 점도 그 중 중요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성향의 인물로는 안중근, 이제명, 장인환, 안명근, 이동휘 등을 꼽을 수 있다. 본격적인 기독교인의 무장투쟁의 예로는 1905년 전덕기 정순만 등이 박제순등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하여 암살을 계획한것에서 찾을 수 있다. 경기도 양주의 목사 홍태순은 고종의 강제 퇴위에 격분하여 대한문 앞에서 자결하였고, 당시 기독교 교육가로 명성이 높았던 정재홍 또한 이토오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바 있다. 아무튼 일부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항일저항 운동은 그 후 국내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 항일 경제운동의 추진
기독교계의 항일경제운동은 두 가지 양태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열악한 소규모의 토착자본을 규합해서 강력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일제의 자본과 상품에 대항할만한 민족기업 기업을 성장시킨다는 장기적인 대응책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과 시장세 등 잡세 징수에 대한 항세운동을 펼치는 방법이었다. 또한 1900년대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을 꼽을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융희 1) 2월 대구에서 발단된 주권수호운동으로, 1904년의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5년 6월에 국채상환 및 세계보충비로 도쿄에서 200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 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전 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 박해령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국민의 호응으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치하여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帝國新聞)',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적극 지원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 원 이상이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에서는 남일패물폐지부인회, 국채보상탈환회가 결성되어 패물을 보상운동에 의연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부인감찬회,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가 결성되어 '대한매일신보'에 자발적으로 의연할 것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이 외에도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원일부인회 등에서 보상금 모집소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부산에서는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를 조직하고, 진남포에서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여 패물을 모아 보상금으로 내놓았다. 당시 사회계층 가운데 최하류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진주애국부인회를 결성하는 등, 서울, 평양, 진주 등지에서도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운동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유학중인 800여 명의 유학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였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하였으며, 송병준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방해로 인해 더 이상 진전 없이 좌절되었다.
(3) 해외에서의 민족운동
해외에서 전개된 기독교인 중심의 독립투쟁은 지역적으로 중국 러시아 미주 지역 등 3개 지역에서 추진되었다. 그러므로 그 운동의 양태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중국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의 양태는 대체적으로 무장독립전쟁론을 기조로 한 강력한 독립투쟁노선으로 진행되었다.
이외에도 미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일본 동경 한국 기독교청년회(YMCA)등의 장소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상해 한인교회는 3.1운동의 모체가 되었던 신한청년당을 비롯하여 민족운동 단체의 설립 배경이 되었다. 만주 특히 간도 지역의 교회와 학교들은 국내에서 망명해간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였다. 이같이 국외에서 꾸준하게 민족 독립운동이 전게된것과 함께 국내에서도 의식있는 선각자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은 일제가 교회 내부 조직까지 미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일반 사회조직이나 기구가 붕괴된 이후에도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이것이 3.1운동과 같은 민족 독립운동을 가능케하는 내재적인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