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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건축가 곽영훈 회장과 반기문 총장의 특별한 인연
대한민국을 그린 보이지 않는 손 ...
8월 26일 미국 워싱턴이 특별한 동창회로 들썩했다.
백발이 성성한 것을 제외하면 공통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33명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국가도, 출신 학교도, 직업도 모두 다르지만 50년 전 딱 한 달간의 만남으로 끈끈한 인연을 만들어온 사람들.
그 속에 UN 반기문 사무총장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국인, ‘사람과환경그룹’ 곽영훈 회장을 통해 기회를 운명으로 개척한 또 다른 신화를 만났다.
정확히 50년 만의 재회였다.
눈은 세월 속에 묻힌 흔적을 걷어내며 정들었던 친구들의 얼굴을 찾아냈고,
손은 익숙한 손길로 서로의 어깨를 얼싸안았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았다.
그동안 지구 여러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왔고,
그들이 맺었던 인연은 비록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함께한 친구들과의 우정은 세월 앞에서도 힘을 잃지 않았다.
그들을 국가와 시간을 초월해 단단하게 묶어준 사건은 미국 적십자사 초청으로 세계 42개국을 대표하는 1백12명의 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땅을 밟은 1962년 7월 30일에 시작됐다.
학생들은 이른바 VISTA(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라는 프로그램으로 미국 33개 도시를 방문하고 NASA우주센터, 백악관, UN 본부 등 주요 공공시설을 견학한 후 현직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만나며 꿈같은 한 달을 보냈다.
당시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반기문 사무총장의 일화는 유명하다.
시골 마을의 작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반 총장이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후 외교관을 꿈꾸게 됐다는 이야기다.
종전의 아픔으로 시름하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 평화를 책임지는 UN의 수장이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미국 방문으로 인생이 뒤바뀐 사람이 또 있었다.
반 총장과 함께 대표로 선발됐던 곽영훈(69) 사람과환경그룹 회장이 바로 그다.
경기고등학교 3학년이던 그는 남학생 2명, 여학생 2명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학생단의 대표이자 전체 VISTA 대표로 활동하며 반 총장이 경험했다던 역사적인 그날을 함께했다.
그 후 반 총장과 곽 회장에게 똑같은 50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50년이 지나 미국 적십자사와 국제적십자연맹 주최로 ‘VISTA 미국 방문 50주년’ 재회 행사가 열렸다.
각자가 서 있는 위치와 모습은 조금 달라도, 똑같은 꿈을 써내려간 두 사람의 인생 속에는 찰나의 순간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역전시킨 두 젊은이의 지혜와 패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인생을 바꾼 30분,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
▲1962년 42개국 1백12명의 VISTA 대표단이 모여 미국 적십자사 앞에서 촬영한 사진(왼쪽), 2012년 19개국 33명이 참가해 같은 장소에서 VISTA 50주년 모임을 가졌다.
“우리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시간이 한 30분 정도 될까?
그동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제각각의 생각들을 했을 거예요.
하지만 한 가지는 모두 같았을 거예요.
자신이 가졌던 꿈을 더 확고하게 다졌다는 점.
반기문 총장이 외교관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것처럼 저도 제 꿈을 재확인하고 더 굳은 다짐을 할 수 있었죠.”
학창 시절 곽 회장의 꿈은 도시환경건축가였다. 그런데 집을 짓는 건축가가 아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건축가를 꿈꿨다.
분단된 국가 현실에 통탄하며 DMZ에 평화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제법 배포 있는 꿈이었다.
법조인이 돼서 통일 헌법을 만들겠다는 형과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찾다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봐라’던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물론 당시의 한국 상황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는 커녕 비행기를 타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들었다. 김포공항이 문을 연 직후였고, 해외여행만 가도 신문에 나던 그런 시절.
서울은 전쟁의 상흔으로 쑥대밭이었고, 변변한 영어 교과서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꿈을 꿨다.
곽 회장 역시 미8군 장교들이나 외국인을 초청해 토론하고 노래도 부르는 모임을 이끌며 꾸준히 실력을 쌓았다.
사회적 뒷받침 없이도 학생들은 학업에 정진했고, 영어를 배우며 세계로 나아갈 꿈을 키웠다.
그런 학생들이 모여 경쟁했던, 그리고 뜻밖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VISTA 대표단의 선발 과정은 그만큼 치열했다.
선발 기준이 ‘얼마나 대한민국을 잘 알릴 수 있는지’였기 때문에 영어 실력은 기본이었고 역사 지식과 더불어 특별한 개인기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반기문 총장은 ‘Long Long Ago’라는 노래를 불렀고 곽 회장은 수련 단체인 청도관 유단자로서 발군의 태권도 실력을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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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VISTA 한국대표단과 아서 그룬서 당시 미국 적십자사 총재가 만나 찍은 기념사진이다. 오른쪽부터 곽영훈(경기고), 신은주(경남여고), 아서 그룬서 총재, 정영애(경기여고), 반기문(충주고). 소아과 전문의인 정영애 박사는 미국에 거주 중이고, 신은주 씨는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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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TA의 마지막 일정으로 백악관 장미정원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만날 때 모습.
3 VISTA 50주년 모임에서 다시 만난 한국대표단. 반기문 총장과 곽영훈 회장 사이에 정영애 박사(현 미국 소아과 의사)가 섰다.
4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취임 후인 2007년 관저로 곽영훈 회장 부부를 초청했다.
“반기문 총장이 참 운이 좋았어요. 원래 남녀 학생 한 명씩 가기로 돼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한 명씩 더 가게 됐고, 그때 반 총장이 뒤늦게 합류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 일을 계기로 반려자도 만나게 됐으니 여러모로 행운이었죠.”
충주고에 다니던 반 총장이 한국 대표로 미국에 가게 되자 이웃 학교인 충주여고에서 가사 시간에 복주머니를 만들어 선물했는데, 그때 그 복주머니를 만든 학생 중에 한 사람이자 미국 방문 후 충주로 돌아왔을 때 환영의 꽃다발을 안긴 여학생이 지금의 아내 유순택 여사다.
곽 회장 역시 미국 방문 한 달 동안 열아홉보다 더 많은 나이를 한꺼번에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적, 다양한 언어를 가진 친구들과의 만남은 신선했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란 그에게 발전한 미국인들의 삶의 터전과 도시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일주일은 미국 가정에서 생활했는데, 피난 생활을 해봤던 나에게는 그 집이 천국 같았죠.
집과 거리도 정말 깨끗하고 그림 같아서 이런 게 바로 바람직한 도시 환경이구나 싶었습니다.” 그 천국 같은 곳에 10대 후반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모였으니 사랑의 핑크빛이 감돌지 않을 수 없었단다. 곽 회장은, 폴란드 대표 여학생이 헤어질 때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서 은근히 자신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곧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왔다. 그렇게 말 그대로 가슴 벅찬 꿈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미국 방문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꿈에 대한 희망도 수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꿈과 이상보다 더 빨리 찾아오는 법.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곽 회장에게는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미국으로 가기 전 경기고등학교 총학생회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돌아와보니 학교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교장직 낙하산 인사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단 시위가 이어졌고, 사태가 수습될 즈음 그를 포함해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무기정학,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졸업은 시켜줄 테니 더 이상 등교하지 말라는 학교 측의 통보였다
. “요즘 말로 ‘멘붕(멘탈 붕괴) 상태’라고 할까요. 그래서 학생 유학을 택하게 됐죠. 형님이 추천해준 MIT에 진학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방법이 없더라고요. 유학이라는 건 꿈도 못 꿀 만큼 경제 상황이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VISTA 일정 중 홈스테이를 했던 솔트레이크시티의 브렌트 서덜랜드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정이 이러하니 나를 초청해줄 수 없겠느냐고요. 편지를 보내고 받는 데만 두어 달이 걸렸습니다. 고맙게도 초청장을 보내줬지만 단 3개월짜리 단기 비자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적십자사 청소년부 담당이었던 서영훈 부장(훗날 적십자사 총재를 지냄)을 찾아갔어요.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니, 직접 당시 최두선 적십자사 총재(훗날 국무총리를 지냄)를 만나게 해주셨지요. 그렇게 또 미국에 가게 된 거니까 VISTA 덕을 크게 본 셈이죠.”
곽 회장은 달랑 2백 달러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대학을 두 번 옮긴 끝에야 장학금을 받고 MIT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석사 동시 이수를 통해 MIT 건축학 학사 학위와 도시설계 석사 학위를 같은 해 취득했다. 하지만 국가 발전 정책을 모르면 DMZ 통일평화시를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정책학 과정을 수료했다.
한편으로는 남북 모두 배우는 도시로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버드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며 교육학 석사 학위까지 받고 나서야 10년간의 학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늘 재킷 주머니에 칫솔을 꽂고 다녔어요.
언제 숙소에 돌아갈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강의실에서 먹고 자며 낮과 밤을 잊은 채 공부했죠.”
그렇게 몰아치듯 공부했지만 실무 경험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건축, 조경, 도시설계, 엔지니어링 종합 회사에 다녔다.
하지만 그는 결국 미국이 아닌 한국의 발전을 위한 도시를 건축하고 싶었다. 어찌해야 할지 한참 망설이고 있을 때 아버지의 암 발병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고국 땅임을 직시했다. 그래서 조경공사 초대 고문으로 일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비롯한 대학 강단에 섰다.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도시
▲대학로 조성,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88올림픽공원 등을 계획하고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장으로도 활약한 곽영훈 회장.
그 역시 반기문 총장과 마찬가지로 50년 전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을 통해 꿈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처음 맡은 일이 대학로 조성 계획이었어요. 원래 서울대학교 부지였던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에 아파트를 짓겠다며 필지를 나눠 분양했더라고요.
그건 아니다 싶었죠. 우선 미술관과 학술원, 예술원 원로들의 사무실을 만들도록 도시설계를 했습니다. 벽돌 같은 건축 자재나 공연장의 위치, 마로니에 광장과 낙산을 시각적으로 연결하도록 미술관에 구멍을 뻥 뚫는 입구의 구도까지 고안했죠.
‘젊은 사람들과 전문인들의 우연한 만남이 빈번히 쉽게 이뤄지며 문화와 학문이 꽃피는 곳’이 되길 바랐던 거죠.” 비록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이뤄지진 않았지만 지금 대학로에는 아파트 대신 공원과 공연장이 들어서 있다.
그렇게 그는 서울 시내의 유일무이한 문화예술의 거리를 지켜냈다.
그 뒤 지금의 지하철 2호선을 원형으로 그 틀을 잡았고 잠실 주경기장과 88올림픽공원 건립을 계획하며 몽촌토성을 지켰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마스터플랜과 2012년 여수 엑스포 구상도 미리미리 완성해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통일 후를 대비해 고구려 유적인 중국 지안(集安), 평양까지 그리고 서울, 대전, 여수를 일직선상에 놓은 것은 곽 회장의 혜안이다.
청계천 복원 사업을 마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곽영훈 박사가 아이디어를 주고 제안한 것을 나는 단지 실행만 시켰을 뿐’이라고 말할 만큼 그는 대한민국 도시를 건설한 보이지 않는 손이 됐다. “사람들은 제게 왜 엑스포가 여수에서 열려야 하느냐고 물었죠.
서울, 대전, 여수가 일직선에 있고 상호 등거리예요. 서울·수도권, 대전·중부권, 여수·남해권 발전을 촉발하는 핵심 이벤트를 구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드넓은 대륙을 향해 뻗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의 가능성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50년 전에 그렸던 아름다운 도시를 꿈꾼다.
대부분 초기 골격만 세웠던 탓에 그의 바람과 뜻과는 달리 왜곡된 도시가 건설돼가는 모습을 보면 슬펐지만 여전히 도시가 갖는 기능과 의미의 중요성에 대한 뜻을 굽히지는 않는다.
그는 한국을 넘어 가나, 이집트, 알제리, 필리핀, 네팔 등 세계 여러 지역에 녹색도시를 설계했다.
지금은 유엔과 네팔 정부의 요청으로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를 ‘세계평화시’로 계획, 설계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난 50년간 그가 이룩한 신화는 VISTA 대표단에 선발됐기에 가능했던 일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VISTA가 아니었어도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을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10년간 공부하고 40년간 일했어요.
밤낮없이 공부하고 밤낮 없이 일했으니 남들 10년이면 저는 20년 공부했고, 40년이면 80년간 일한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이 전부 길잖아요.
다른 나라들은 근로 시간이 일주일에 최대 40시간인데, 우리는 80시간씩 일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지금의 국가 발전을 이룩한 거죠. 저는 누구의 노력이 더 값지고, 누구의 노력이 더 헛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성공이 더 값지고, 누구의 성공이 더 하찮을 수는 없는 거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올렸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 아닐까요?” 나의 그 녀석, 반기문이란 친구 50년 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곽 회장은 행사장을 두리번거리며 그때의 폴란드 여학생을 찾았다. VISTA 마지막 날, 자신이 작사한 ‘Remember’라는 노래가 ‘VISTA Song’으로 선정돼 참가 학생 전원이 합창을 했고 본인이 지휘를 하며 대망의 막을 내리던 그때. 자신의 어깨에 기대 울며 헤어짐을 유난히 슬퍼했던 그녀였다.
귀국하고 나서야 그녀의 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은 상태. 당시의 연락 체계로서는 그녀를 찾기가 불가능했기에 50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 그녀가 궁금했던 터였다. 내심 ‘VISTA 미국 방문 50주년’ 행사에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랐지만 행사장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만큼 보고 싶고 궁금했던 친구들이 많았다. 회의 때마다 딱 붙어 앉아 애정 전선에 전념하던 칠레 여학생 엘리아나 지미네즈(Eliana Jiminez)와 터키 남학생 아실 틴(Asil Tin)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각별한 우정을 자랑한다고 한다.
그들의 우정만큼 그에게도 특별한 친구가 있다. 바로 반기문 총장이다. 곽 회장에게 반 총장은 충주 시골에서 서울에 왔는데, 서울 구경도 못하고 미국 구경부터 먼저 한, 그래서 내내 챙겨주고 싶은 그런 친구였다.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 만나도 술을 마시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늘 나라 걱정만 했죠.
그리고 각자 해야 할 일을 하자는 생각이었고요.
반 총장은 전형적인 모범 공무원이었습니다.
늘 끈기 있고 성실하게 일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 꿈꾸던 두 젊은이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30분을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한 사람은 UN 사무총장으로 세계 무대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한 사람은 올림픽, 엑스포, 한강 개발, 지하철, KTX, 제주도, 두만강 개발 등 국내 인프라와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만들고 세계를 무대로 국위를 세울 땅을 만들었다.
각자 위치와 생각은 달라도 늘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한결같았다는 두 사람.
이제 자신들이 개척해놓은 자신의 길에서 또 다른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지금, 그들이 걸어간 그 길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출처] 도시건축가 곽영훈 회장과 반기문 총장의 특별한 인연|작성자 두더지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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