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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문인 돌아보기 - 서상연 시인
(1941~2003)
작가 화보
작가연보
古家에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 이연옥
구름이 모이는 곳, 운정雲停/ 서만교
작가 연보
1941년 울주군 사연리(사일) 달성 서씨 집안의 8대 주손으로 출생
울산제일중학교 졸업
울산고등학교 졸업
동아대학교 법학과 졸업
1979년 첫 시집 ⌜계절의 여적⌟ 출간
1981년~1984년 울산문협 지부장
1984년~1987년 한국예총울산지부 부지부장, 울산문화원 이사
1988년 ⌜떠나는 봄 ⌟출간
1989년~1990년 울산문협 지부장 재임
1990년 울산시민의 장章수상
1991년 경남예총 문화상 수상
1992년 ⌜까치소리 ⌟출간
2000년 울산 중구문화원 부원장
1993년~2003년 경상일보 논설 실장
2003년 6월 별세
古家에도 어김없이 봄은 오고
이 연 옥 (시인 , 오영수 문학관장)
지난 2월 23일(음력 1월 초닷새).
절기상으로는 아직 한겨울인데도 유난히 햇살이 따사로운 날, 울주군 범서읍
사일泗日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사일마을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아동문학가 장세련 선생으로부터 울산문인협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고인이
된 문인들을 회고하는 지면을 꾸미기로 했다는 설명과 함께 서상연 선생님을 추
억하는 글을 써 달라는 말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노라고 답한 지 10여 일
이 훌쩍 지나서였다. 2003년 6월 30일 이후 오랜만에 찾은 사일마을은 예전과 크
게 다르지 않았다.
원고 마감일을 앞두고 찾은 사일 서씨고가徐氏古家는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과 박
상지 선생님, 수필가 윤모촌 선생님이 오시면 당시 울산에서 유일한 여성문학 동
아리였던 우향友香동인 회원들이 지역의 선배 문인들과 자리를 같이해 하늘같은
선생님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밤 깊은 줄 몰랐던 곳이어서 내게는 각별한 곳
이다.
선생님 특유의 친화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동리 선생님뿐 아니라 성기조 선
생님 등 중앙 문인들이 사랑채에서 시골 정취에 흠씬 취해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
꽃을 피우다 이튿날 아침, 사모님께서 정성들여 차려 내는 아침식사를 하신 뒤 한
차례 더 이야기꽃을 피우다 돌아가시곤 했다.
그때마다 운 좋게도 자리를 함께 하며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문
인의 꿈을 키웠다.
그런 인연으로 문단 데뷔도 하기 전에 울산문인협회 회원이 되는 특전도 누릴
수 있었다.
돌아보면 까마득한 시간 저편의 일이다
사랑채에서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있다 밤이 이슥하면 안채로 옮겨
사모님(최병명)과 한 방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사랑채는 방문을 열면 멀리 천상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앞이 확 트여
속까지 시원했다.
특히 정원에는 석류나무와 매화나무, 목련 등을 질서정연하게 가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들 나무는 선대 할아버지들이 저
마다 의미를 부여해 심은 것이라며 선생님은 각별히 애정을 쏟아 가꾸셨다.
그에 비해 모란이 계집아이 치마폭만한 꽃잎을 툭툭 떨구는 정경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는 안채 뒤란에는 대나무를 심어 살풋 잠이 들려고 하면 ‘서걱서걱’
댓잎 부딪히는 소리에 놀라 서로를 쳐다보며 무섬증을 달래곤 했다. 이럴 때쯤 사
모님은 ‘대밭집 며느리는 게으르다’는 속설을 들려주시기도 했다. 작은 바람결에
도 댓잎 부딪히는 소리가 왠지 오싹하게 하는 까닭에 선뜻 문 밖을 나오기 어려운
때문이라는 설명을 곁들여.
불현 듯 선생님의 시 달빛에 젖은 古家가 생각난다
종가를 지켜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사슬이 되어
쓰러져 가는 기둥을잡고
사람 없는 마당을 쓸며
박쥐가 떨어져 죽은 대청마루
연기를 피운다
조상이 떠날 것 같지 않아
제사 때면 돌아와 큰 방에서
제사를 모시고
중수해야 한다는 마음만
돌처럼 가슴에 얹혀 있는 古家는
달빛조차도
代代로 내려와 낡아 있다
〈달빛에 젖은 古家〉 전문
평소에는 중구 학산동에서 생활하셨던 선생님은 틈날 때마다 사모님과 함께 고
가에 들러 뜰의 화초를 돌보고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 가는 고가의 담벼락을 매
만지며 안타까워하셨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양 가는 버스를 타고 지금의 UNIST 앞 넘내 마을 입구에서 내려 청설모가 소
나무 가지 사이를 오가는 길을 지나 고가에 다다르자 마침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는 드넓은 집안 곳곳을 손질하고 계셨다.
잡초 뽑던 손길을 잠시 멈춘 선생님은 먼데 하늘을 쳐다보시며 함부로 고칠 수
도 없는 상황을 속상해 하셨다. 그러한 선생님의 마음은 그대로 시가 돼 지금도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빈 뜰에서⌟라는 작품이다.
바람은 자고 있었다.
초록 햇빛은 연잎으로 물 위에 떠오르고
과거를 지키는 고목의 수양버들
下馬石이 무늬도 바래 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잠겨 있는 대문 앞
九代로 내려온 그 무상함에 목이 메 이고
주인 없는 뜰 앞은
세월이 지쳐 떠나 버리고
六月은 담장 안으로
설움 덩어리 적막을 추스르고 있다
뒤산의 뻐꾸기 울음은
마당에 그림자로 내려앉아
모란으로 피고 있다
〈빈 뜰에서〉 전문
서상연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80년대 초 작문에 관심이 많았던 20대 초반의 몇
몇이 우향동인友香同人을 결성하고 문협文協언저리를 맴돌면서였다.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에서 아스라한 아그네스며 추상, 보리수, 예나르, 명다방,
금잔디다방, 르네상스 등 커피숍과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시낭송과 시화전을 열면
김태근 선생님 · 조홍제 선생님과 함께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시며 격려와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다.
우향 동인 행사 때만 아니라 더러는 선생님 친구들과 태평식당이나 남산민물
등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즐거움도 주셨다. 식탁에 둘러앉으면 누구보다 맛
있게 음식을 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여느 가정의 식탁처럼 소박한 상
차림이 좋아 편하게 드나들던 곳이었던 태평식당은 선생님과 함께 들르면 언제나
적당히 삭아 감칠맛이 더하는 통멸치 젓갈을 내놓곤 했다. 식사 속도가 누구보다
빨랐던 선생님은 금세 밥 한 공기를 다 드시고 다른 일행의 식사가 끝나기를 조용
히 기다리시곤 하셨다.
누구에게라도 싫은 소리를 못하시는 성품의 선생님은 어느 날 벗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독백처럼 ‘너무 오래 사는 것은 싫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절친한 벗이
었던 김성남 선생님이 고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군가 ‘왜?’라고 되묻자 선생님께서는 “친구들 다 저 세상에 가고 없는데 혼자
남아있으면 슬퍼할 벗이 없을 것 같아서”라며 소리 없이 웃으셨다.
그러시던 선생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날도 얼음이 녹고
새순이 하나 둘 움을 틔우기 시작하는 이즈음이었던 것 같다.
매화가 막 벙글기 시작하고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소생의 기지개를 켜는 때,
선생님은 병상에 누운 채 봄을 맞이하셨다. 봄이 절정을 이룬 4월 어느 화사한 날,
병실을 찾은 우리들에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려 애써 웃으시며
“괜찮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언제 투병생활을 했느냐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나실 것 같으시던 선생님은 2003
년 6월 30일, 예순 둘의 나이에 사일 고가 안마당의 모란이 지듯 홀연히 하늘나라
로 가셨다. 병석에서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領洗를 받으면서 천주교 신자가
된 선생님은 성 바오로 축일(6월 29일) 다음날 누가 재촉이라도 하듯 친구들보다
앞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로 평가받는 선생님은 생전에 속엣말을 함부로 드러내
말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지인들은 기억한다.
종가를 지키는 장손으로 많은 것을 속으로 삭이고 혼자 힘들어 하시던 선생님
은 그렇게 우리들 곁을 서둘러 떠나셨다.
장례식날, 사랑채와 솟을대문 사이의 마당에는 마치 초록 카펫을 깔아놓은 듯
클로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곳에서 네잎클로버 대여섯 잎을 따 선생님
의 절친한 벗인 황우춘(울산예술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등 몇몇 안면 있는 문상객
들에게 나눠드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선생님께서 떠나신 지 올해로 12주기
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묘소 한 번 참배하지 못한 것이 새삼 죄스럽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전망 좋은 산언저리에 유택幽宅을 마련한 선생님은 ‘詩人 서상연, 여기 잠들다’는
묘비명과 함께 바람으로 누워 계신다.
선생님의 묘비명은 왠지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미학적 계승자로
평가받고 있는 소설가 난계 오영수 선생님의 묘비명(作家 吳永壽, 여기 잠들다)과
닮아 있는 까닭이다.
닮은꼴의 묘비명에서 생전에 선생님께서 난계 선생님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셨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영수 선생님의 묘비는 4주기를 맞이해 울산문인협회와 부산소설가협회가 함
께 1983년 5월 15일 세웠다. 당시 선생님께서 한국문인협회 울산지부 지부장으로
활동하신 때의 일이다.
3년 전 오늘은 熊村으로 갔다
철따라 꽃지듯 五월 어느날
선생은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송대리 뒷산으로
어여 어여 상여타고 가시던 선생
작년에는 솔바람 소리만 쓸쓸하더니
오늘은 산비둘기가
선생을 기리며 울고 있다
파란 향내음이
구름 되어 흐르다가
한 포기 제비꽃으로 피어 있다
선생의 후학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뒤척이듯
일상의 언어들을
잔디밭에 깔았다
~ 중략 ~
송대리 뒷산 비둘기는
이승 저승을 날아다니는지
한으로 이어진 작품들
그 소리들에
목이 메인다
내년엔 碑라도 세워야지
作家 吳永壽 여기 잠들다
그렇게 碑라도 세워야지
〈作家 吳永壽, 여기 잠들다> 중에서
시를 통해 묘비 건립을 스스로 다짐하셨던 선생님은 뜻있는 문인들과 이듬해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화장산 기슭에 자리잡은 오영수 선생님의 묘소에 묘비를
세우신 것이다.
오영수 선생님 10주기에는 서상연 선생님을 비롯해 박종해 · 김 웅 · 김영진 ·
김성춘 · 홍수진 · 정형남 · 최해군 · 윤정규 선생님 그리고 유족(오숙희, 오 건)과
묘소를 참배한 기억이 새삼스럽다.
누구보다 선배문인을 잘 섬기고 후배를 아끼셨던 선생님과의 인연은 1980년대
초부터 2003년 돌아가실 때까지 햇수로 무려 20여 년에 이른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자상하셨던 선생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지 12년에 접어들
었다.
선생님의 두 번째 詩集 표제작인 ‘떠나는 봄’이 저만치서 되돌아오고 있는 서씨
고가에는 수선화가 새 잎을 틔우고 목련도 곧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2월의 끝자락.
금방이라도 선생님께서 사랑채 마루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어서 오라고 반기실
것 같아 대문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꽃망울을 틔우기 시
작한 매화 향기만 코끝에 와 닿을 뿐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정적에 휩싸인 고가의 낡은 기와지붕 위로 철 이른 뻐꾸기 한 마리 날아와 나를
대신해 한참을 울어대더니 연화산 기슭으로 유유히 날아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연당 앞에 앉아 선생님의 시 [떠나는 봄]을 소리
내 읊조려 본다. 잠시 왔다 서둘러 가버릴 봄을 기다리며.
어디 낯선 집 들어서듯
황량한 마당가에는
봄이 도란거리고
비워 둔 장독간 뒤는
담장이 세월을 먹고 어깨를 내리고 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잠궈진 대문을 열고
시간의 저쪽이
어둠으로 쌓인 봄날이면
하염없이 지고 있는 매화는
제 설움에 겨워 떨어져 가고
걸린 빗장 벗기며
가슴을 연다.
대숲을 우는 바람은
선조의 음성으로 다가오지만
저 산 넘어 구름은
봄을 떠난다.
〈떠나는 봄> 전문
구름이 모이는 곳, ‘운정雲停’
서 만 교
얼마 전 가족들을 데리고 영화 ‘국제시장’을 보러갔다.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
옆에 앉은 중학생 큰놈 몰래 난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는데 잔잔하게 이어지는
내용은 입소문처럼 감동적이었다.
특히 내 눈물샘을 터트린 것은 영화가 끝나갈 무렵 주인공이 아버지의 두루마
기를 부둥켜안고 회상하며 독백하는 장면이었다. 나의 망막에 생생히 가득찬 부
자간의 대화 장면에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시공을 초월해서 또렷하게 말을
걸어오는 착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시인이었다. 온화한 성품에 항상 부드럽게 매사를 처리하는 편
이어서 주변에는 항상 많은 분들의 유쾌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었다. 또, 몇 백년
을 이어온 종갓집의 종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집안의 친척들이 엄청 많았다.
내가 어렸을 때엔 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들과 정확한 호칭을 몰라 대
충 얼버무릴 때마다 “이분은 왕고모님이고 저분은 왕고모할머니다.”라며 한분 한
분 장남인 내게 알려주시던 기억이 난다.
글을 쓰는 시인이었고 맺힌 것 없는 부드러운 분이었지만 종갓집 전통을 이어
나가야하는 의무감이었을까? 장남인 내게는 대단히 엄격한 분이었다. 아니, 어릴
때부터 내게만 유독 엄격하셨다. 필요 이상으로 항상 혼을 냈기 때문에 당연히 부
자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특히, 사춘기였던 고등학교때는 일상적인 것 빼고는
거의 3년 넘게 대화를 한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아버지 쪽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버
지 시집의 작품들을 읽고 나서였다. 가족들 얘기를 그린 작품들에서 당신의 마음
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조금씩 부자 관계의 친밀도
는 회복되었다. 그러면서도 잔잔하게 미소 띤 시간들은 흘러갔다.
어느날 내게 온 한통의 아버지 전화, 평소처럼 예의 온화한 목소리 그대로였고
다른 느낌은 없었다.
“밥은 묵었나? 아부지 지금 운전을 못하겠는데, 좀 데리러 온너라. 여기 ××병
원이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투병생활은 시작되었고 움켜잡은 고운 모래가 순식간에 손
틈 사이로 흘러 버린 것처럼 시간들이 빨라졌다.
생전에도 그랬듯이 아버지는 장례식때도 사람들이 많았다. 상주인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분향하는 분들 중 통곡하는 분들이 유독 많아서였는데, 다
정했던 아버지의 향기를 한층 짙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운정雲停’이라는 아버지의 호號가 참으로 아버지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슴저린 여러 탄식들을 뒤로 하고 또 몇 년이 흘렀다.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늦은 가을 오후였다.
중구청에 볼일이 있어 계단을 오르는데 커다랗게 걸린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
다. 아버지 시였다
바람이던 것을
서 상 연
화내고 싸우던 젊음도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아쉬움이던 것을
귀밑머리 희끗거릴 때야
돌아보는 사연
그렇게 수북이
후회로 쌓이던 것을
산마루에 앉아
억새가 만장처럼
하늘 바라고 날리는 이유
가을이 왜 쓸쓸한지
깨닫게 되는 것도
지나고 보니 모두가
바람이던 것을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엉거주춤 어둑한 계단에 서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눈부
실 정도로 환한 창밖 너머 햇살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 이후로도 몇 년이 훌쩍 지나갔다.
나도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처럼
“아부지 내 이만하면 잘 살았지요?”
라고 아버지 사진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오늘밤 내 방 책꽂이에서 아버지 시집을 다시한번 펼쳐보려 한다. 그런데 자신
이 없다. 지금 살고 있는 내 모습에 뭐라 하실지….
야단을 맞더라도… 아부지, 함 보고 싶습니더.
작가의 대표작
천성산의 봄
봄은 바람으로 와서
안개로 떠나는 것일까
잡힐듯 가버린
봄의 얼굴은
그림자로 지워진다
녹색 엷은 옷자락에
꿈밭을 일구며
산모롱이 돌아 구름으로 된다
계곡을 건너다 마음 빠트린
하루의 언어들이
옛 이야기처럼 흘러간다
금강교를 흐르는 연둣빛 물소리에
천성산의 숨소리가
마음밭 이랑마다
봄을 피우고 있다
여름날의 주전
수평선 끝으로
바다는 흐르고 있었다
돌담 밑에서
속삭이는 바다는 사연이 많다
햇빛은 바람으로 부채질하고
그렇게 부서져 내리는
여름날 오후
옥이네가 잡아온
물때 좋은 소라 멍게 앙장구들
바다 속의 사연을 듣는다
청각 도박 곤피를 말리는 옥이는
소금물이 빛나는 이마 위로
동심을 바다에 헹군다
파랗게 물든 바람이
마루 끝에 닿으면
꿈은 수평선을 넘어
떠나고 있다.
가을 죽림사
죽림사 뒤뜰에 앉아
개울을 내려다보며 이야기 했지
우리도 죽으면 개울물로 흐를까
관음전 앞에서 합장하고
명부전 앞에서는 저승길을 물었지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우리 저승 가면
바람으로 만날까
낙엽으로 지는 죽림사
유난히 대추나무 잎새가 반짝이더니
길마다 대추는 햇볕을 쬐고
바람 같은 사람은
억새 덮인 천왕봉으로 떠나고
보릿짚 모자 쓴 스님 한 분이
아이와 장난하며 밭으로 간다.
중이나 될까보다
돌아서며
햇빛 가득 담은 눈으로
자꾸만 저승 이야기를 하군 했지
이승의 다 못한 이야기
황토흙으로만 된
저승의 어느 길 모퉁이
말없이 우리
그렇게라도 만날까
겨울 가지산
밀양 가는 길
눈 쌓인 산으로 터널이 있고
거기서 내려다보면 울산이
언양이 발아래 보이는 곳
커피 끓이는 아주머니의 손이
삶의 고샅길을 오르내리는 이야기로
얼었고
쉬어가는 차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산 아래 눈바람으로 날려 보내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차들은 또 떠나고 있다
멀리서 보는 가지산은
그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눈으로 덮였는데
산 아래 마을은 봄으로 오는가
햇볕들이 모여 속삭인다.
가파른 눈길을 오르면서
가슴을 틔우고
살바위 쪽으로 난 길이 지렁이 자국처럼
보이는 능선 위로
겨울은 눈 덮고 쉬는지
헐벗은 잡목들이
눈꽃을 달고 있는 가지산
골짜기로 흐르는 물소리 아득한데
등성이에 눈 쌓인 무덤 하나
문득 바람 되어
백운산 자락으로 떠난다
막내
그놈에게서는
언제나 초여름 산 냄새가 난다
땀 흘리며 들어와도
녹음 같은 바람으로 들어오고
구석에 앉아 장난질해도
바람을 일군다.
잠든 그놈을 보면
여름산이 서늘하고
꿈 여울이 깊어선지
물장구 소리도 아득하게 들린다
방울소리 같은 그놈은
이야기가 많다
선생님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
그런저런 이야기들은
덜 깬 수사슴의 눈망울로
산마루를 달린다.
그놈에게서는
언제나 초여름 산 냄새가 난다
산소에서
해마다 묘제 때면
햇발 고른 산소마다
유세차로 음성을 가다듬던
할아버지
올해는 가을비가
서럽도록 내리고 있었다
곰마을 헌경
그는 언제나 말수가 적다
어쩌다 하는 말이라야
안 있나,부터 시작하는 더듬는 그의 말은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을 못 알 듣는 사람 또한 없다
몰라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이쪽 사람이 아니면 몰라
같이 있으면 있는 시간이 무료하다가
없으면 또한 빈자리가 눈에 띄는 그런
그림자 같은 사람
고샅길을 올라 채전밭에 감나무 한 그루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아래채가
제 자리를 지키고
넓지 않은 마당에 잡초 같은 화단
측백나무 두 그루 서 있는
그런 화단이 있다
뒤란에 우물이 있고
시누대가 우물가에
울타리로 쳐진 옆으로 외양간이
시골 어디서나 보는 그런 집이다
그도 시골 어디서나 보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 그런지 모든 게 쉽다
그의 시는 흙냄새를 빼면
자갈만 남을 께다
그는
그런 시인이다
사진
할아버지 모습인가 하면
아버지 모습이었다
사진으로 본 나는
기억 속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주름진 세월의 저쪽에서 나와
액자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설움 같은 하늘빛이
현기증을 데불고
잊어버린 날들
그리움이 거기 있었다
아쉬움도 꿈도
떠나버린 빈 가슴
사진 속의 나는
할아버지 모습이었고
우수에 젖은
아버지 모습이었다.
그림자
죽음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와
불안의 늪으로 자꾸만 내몰았다
얼핏 돌아 보이는 하잘것없는 삶이
새삼 그리워지는
그런 죽음의 그림자로
며칠을 앓았다
검은 하늘에 가득한 별들의 이야기와
바람에 날려가는 낙엽의 사연과
늘상 담아가지고 다니는 자식과 아내
마음 주던 여인의 이름
가을하늘 흰 구름과 햇빛의 속삭임
인생이란 아름다운 줄거리로 끝이 없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깨가 내려앉는 아픔이
계절 탓이었을까
새삼 돌아 보이는
때 묻은 삶이
그 많은 이야기들이
반갑게 와 닿는
그날은
유난히도 하늘이 깊었다.
대춘待春
봄이 온다기에
봄 마중 갔더니
봄은 아득하고
겨울이 울고 있네
꽃바람 분다기에
대문을 나서니
얼어붙은 대지에
봄이 와 울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