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시인의 책가방
개나리 피는 봄에
정세기 시인의 「모락모락」
원고 청탁을 받고 작고한 시인과 원로 시인, 젊은 신인들의 작품집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함께 읽을 만한 동시 한 편 고르는 일이 이리도 힘든 일일 줄이야! 마치 시인 한 사람을 고르는 일과도 같아서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정세기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아직도 생전의 목소리가 생생히 기억나는 시인, 그래서 저는 잊을 수 없는 시인입니다.
정세기 시인은 심근경색으로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2004년에는 뇌종양까지 앓게 되었지만 무서운 병마도 시인의 시심을 꺾진 못했습니다. 병상에서도 시를 썼는데 누워 글씨를 쓸 수 없어서 구상한 시를 불러 주면 부인과 딸이 받아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쓴 동시가 모여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 2006년 1월 시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파트 뒷마당에 갔더니
어떤 개가 방금 누고 갔는지
누런 똥에 김이 난다.
개나리 가지에도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해님이 누고 간 똥
긴 겨울 웅크리고 있던
땅이 더운 입김을 내쉰다.
-「모락모락」전문
이 작품은 정세기 시인의 동시집 『해님이 누고 간 똥』에 실린 작품입니다. 개나리꽃이 ‘해님이 누고 간 똥’이라니 참으로 기발한 비유이고 발견입니다. ‘덕지덕지’란 표현도 참 좋습니다. 단순히 꽃으로만 보았다면 다닥다닥 피어있다고 해도 되겠지만 여기서는 ‘덕지덕지’가 적확한 시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나리꽃의 특징을 살리되 누렇고 구린내 나는 똥과도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아파트 뒷마당’을 보며 시상을 떠올렸지만 독자인 저에겐 시골집 뒷마당이나 봄기운과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개나리 울타리의 이미지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립니다.
90년대 후반 어린이문학 모임에서 정세기 시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같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터라 시와 동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연하인 나에게 동시단의 선배라며 대놓고 농을 건네곤 하였습니다.
“나 동시 쓰는 것 좀 가르쳐주라.”
“아이고 형, 내가 어떻게 형을 가르쳐?”
“니가 나보다 먼저 동시를 썼잖아.”
“형이 시인이면서 왜 그래, 성인시 쓰는 사람 따로 있고 동시 쓰는 사람 따로 있 나?”
하면서 비켜가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시인을 자주 만나진 못했습니다.
정형에게,
정형이 보내주신 시들 잘 읽어 보았습니다. 막상 자기 작품을 남에게 내보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형이 이 아우를 믿고 선뜻 보내 주어서 게으름을 다그칠 기회가 되었습니다.(중략)
아우랍시고 주제 넘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형이 속으로 서운해 하고 욕을 하면 달게 받지요. 그렇다고 언제든 만나면 쓴 소주 한 잔 마다하실 형이 아니란 걸 믿기에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2000.12)
은영 아우에게,
동시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쓴 게 사실상 처음이어서 자네의 말마따나 쉽게 쓴 것이라 할 수 있겠네. 하지만 그동안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나름대로 생각했던 게 있었기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도 글 쓰는 아빠로서 뭔가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름대로 고민을 했던 것 또한 사실이지.
나는 시보다는 동시를 쓰는 게 더 어렵다고 느껴왔던 터라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동시를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들에겐 미안함도 느꼈다네. 나름대로 꾸준히 동시를 읽어 왔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 발언해보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지만 성인의 관념이 노출된 경우가 많은 것 같으이.(중략)
대체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비평이었고 이걸 당장 발표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두고두고 퇴고하면서 자네 의견을 참조하도록 노력하겠네.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문학을 하는 좋은 도반이고 친구이고 아우로 자네를 생각하네.
서로 좋은 일 궂은 일 연락하고 자네가 새로 쓴 동시가 있으면 보내주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아 나갔으면 하네. 벌써 새해가 가까웠네. 새해엔 더욱 건승하고 건필하고 특히 동시집을 낸다고 하니 많은 이에게 읽혀져서 좋은 생각을 공유하는 해가 되길 바라네.(2000.12)
위 글은 정세기 시인 생존 당시 저와 주고받았던 이메일입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 메일함에서 지워 사라졌지만, 다행히 한글 형식으로 저장해 둔 파일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렇게 불쑥 공개하여 작고한 시인이나 유가족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정세기 시인은 자신의 속내를 다 보여준 참으로 솔직하고 투박한 시인이었습니다. 학교 울타리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니 봄볕 아래 개나리 피는 봄을 노래한 정세기 시인이 생각납니다.
김은영
1964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전주교대를 졸업했고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며, 동시집 『빼앗긴 이름 한 글자』, 『김치를 싫어하는 아이들아』, 『아니, 방귀 뽕나무』,『선생님을 이긴 날』,『ㄹ받침 한 글자』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