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국선열(殉國先烈) 인화(畵) > 전시 예정 Space
2019년 3.1운동 100주기
< 순국선열(殉國先烈) 인화(畵) > 전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이 남긴 사진들로 끔직한 일제의 잔인성이 드러나고 있는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선열들의 정신을 길이길이 후세에 전달하는 < 순국선열(殉國先烈) 인화(畵) > 전을 갖고자 한다.
순국선열(殉國先烈) 인화(畵)전은 일제강점기 외국선교사들이 촬영하여 남긴 독립투사 얼굴사진을 인화지에 현상시킨의미 (인화 (印畵)와 그렇게 남겨 기록되어 오늘날에 전해지는 사진을 근거로 하여 시각미술가들의 개개인들의 감성색채와 붓 터치로 번안한 인물화 ( 人畵) 작품 전시이다.
2019년도는 1919년 3.1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가 된다. 5.18민주항쟁이 독재에 맞선 시민자율운동으로 민주화를 이끌어낸 인권회복 등 국가의 존엄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가치 등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과 같이 친일행각에 앞장선 조선대신 이완용 등 8인의 매국정신에 의해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기미년에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민족응징의 날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3시부터 오후 4시까지 조선의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여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자리에 나와 만세운동을 펼쳤던 민족대표 29인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면서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 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당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 3·1독립선언서 > 부문발췌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3월 1일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 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 여명에 이르렀다.
3.1 운동의 참여 인원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 중의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전국에서 고종의 장례를 위해 50만명의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삼일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2]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3.1 운동의 비폭력 항쟁 중에서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1] 이는 1919년 3월 당시 전체 인구 1,678만 8천400명 중 2.76%에 해당되는 인원이었다.[1]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1919 년 3 월 1 일에 한국 독립 선언문을 기념하기 위해 1948 년 8 만 명의 한국인이 모였다.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그토록 일치단결해, 한꺼번에 외세의 압제에 저항한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공식 기록만 봐도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 시위가 2개월간 1500여 회나 일어났고 여기에 200만 명이 참가했다. 7500여 명이 일제의 손에 의해 피살됐고, 1만 6000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 6000명이 검거됐다. 규모만 컸던 게 아니다. 시위 범위도 전국적이었다. 시위와 관련해 체포된 사람이 없는 데가 5개 군과 1개 섬에 그쳤을 정도였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그간 식민지 조선에 폈던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꿨고, 중국 상하이에선 임시정부가 발족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파급효과가 컸다. 중국의 5·4운동도 3·1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처럼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점만으로도 역사적인 의의가 충분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절반의 성공이라 하겠다. 결과적으로 요구했던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 운동이 두 가지 ‘환상’에 기초해서 이뤄진 탓이 크다. 우선 일을 꾸민 민족 대표들은 윌슨 미국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됐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 자체가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 식민지가 별로 없는 미국이 제창한데다가 독일 등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에만 적용됐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환상은 민족 대표 33인이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지향했다는 사실이다. 제국주의가 판치던 시대에 목청 높여 요구한다고 해서 독립이 부여될 리 있었을까. 시작부터 한계를 지닌 독립운동이었다.
1919 삼일 운동 미공개사진
일제억압에 의해 민족말살에 항거하는 삼일 독립 운동에 관한 1919년 국제적십자 팜플렛 페이지를을 스캔 한 당신의 사진이다.
한국 독립 선언서, 사진 34 점, 대한 적십자사의 성명서 등이 포함돼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사진들이다.
팜플렛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외국인 (단수)에게 데려 간다고 말했고 그 중 한 명은 프란시스 스코필드 (Francis Schofield)로 가장 잘 찍혔습니다.
두 장의 사진을 이용하여 파노라마 경관이 만들어 졌는데 왼쪽에는 덕수궁 (일종의 어닝 설치 - 고종의 장례식 용)이 있고 오른쪽에는 오래된 시청 건물이다.
이 사진의 캡션에는 "일본군이 공원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탑 공공원 문이 확실하다.
다음 사진의 캡션에는 일본 병사들은 서울과 한국의 다른 중요 도시의 거리에 파리처럼 응집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머리를 가리고 재판을 위해 한국 독립투사를 숨겨 뒀다가 체포 된 외국인" 미국 선교사 엘리 밀러 모리 (Eli Miller Mowry)이며 6 개월의 징역을 선고 받았다.
선교사들이 남긴 사진들로 끔직한 일제의 잔인성이 드러나고 있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선열들의 정신을 길이길이 후세에 전달할 전시가 되기를 염원한다.
덕수궁 담
일본군의 잔인한 독립투사 처형
탑공공원 입구
중무장한 일본군 도시 거리를 지킴.
일본군의 의해 잔인하게 양팔이 절단당한 독립투사
잔인한 고문에 의해 온몸이 만신창이된 상처
압록강을 아홉번 넘어 독립자금 조달한 조선의 잔다르크
여성 독립투사 정정화 의사
일제강점기 일본군 정교들
3.1운동 유네스코 세게기록유산 등재 국민추진위원회
http://unesco31.kr/
순국선열 유족회
http://www.soongook.org/
이명환 홈페이지
http://leemh.egloos.com/
한국인이라면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제침략... - 가장 많이 본 뉴스
https://youtu.be/MGJlQyCk_D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