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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나기들의 추억 만들기...
사진, 글: 이원희, 김행란, 이미성
내가 가입한 사진동아리에 우연히도 동갑내기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1박2일, 여행을 가기로.... 사진도 찍고 여행도 하고,.., 떠난다는 자체만으로도 즐겁지 않은가? 근데 어디로 가지?... 떠나기로 결정은 했지만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여기 저기 수소문해 장소를 물색하던 중 경주에 ‘수오재’라는 한옥을 알게 되었다. 대구에서 그리 멀지않고 또 고택이 풍기는 분위기와 멋이 동갑나기들의 하루 밤 추억 만들기에 “딱!”이라는 점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그렇다, 그동안 도심의 세련된 현대가옥에서 답답함도, 불편함도 모르고 살아왔지 않은가? 또 여행을 가도 호텔이나 팬션과 같은 곳을 주로 이용하지 않았던가?... 하루면 어떤가? 한번쯤 전통가옥인 한옥에 머물면서 옛 조상의 숨결과 문화를 느끼고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은가?
날짜가 정해지고 나니 1박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더 커지는 느낌이 든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설렘이 이런 것이었나?... 나이답지 않게 빨리 떠나고 싶은 조급함마저 들었다.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았나?.. 하루해는 왜 이렇게 긴 거야!.. 그런 투정과 기다림 끝에 가방을 챙기는 날이 왔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의 즐겁고 아름다운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수오재로 가는 마을입구의 솟대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의미가 함축된 수오재 현판, 조선후기의 문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수오재기(守吾齋記)'‘ 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수오재로 가는 길목에는 송림으로 유명한 삼릉이 있다. 새벽 비가 내린 뒤라서인지 고속도로에서 바라 본 남산 기슭에는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안개낀 삼릉 숲! 수많은 사진가들이 이곳의 소나무와 안개의 찰떡궁합을 찍기 위해서 자주 찾는 사진촬영의 명소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우리도 한 컷하기로 하고 삼릉에 들렸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안개가 걷혀 기대하던 몽환적인 삼릉 숲의 분위기는 볼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목적지인 수호재로 발길을 돌렸다.
무연정 마루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 아름답다 방문객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오재 전경(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본채, 왼쪽 건물이 사랑채이며, 본채 오른쪽 건물이 무연정이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본채 앞 쪽으로 매곡당과 식당이 있다)
수오재는 경주 배반네거리에서 불국사 가는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내려 가다보면 수오재를 알리는 팻말이 군데군데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솟대가 먼저 낮선 여행객의 방문을 반겨 주고, 철길을 넘어서자 배추밭과 황금들판이 보이는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펼쳐졌다.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을 찾아가던 길 같은 굽이진 도로를 지나자 그 끝 지점에 한옥 몇 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곳이 오늘 우리가 하루 밤을 지낼 수오재이다.
수오재는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위해 기행작가 이재호 님이 전북 김제 만경의 고택, 경북 칠곡의 고택, 등 사라져가는 전국의 고택 5채를 그대로 옮겨와 만들었다고 한다.
본채와 사랑채, 별채와 바깥채의 4동으로 구성된 수오재는 각기 다른 지역의 한옥들을 옮겨와 한 자리에 복원했는데도 원래 이 자리에 지어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80여년 된 경남 마산의 황부자 집 사랑채에, 200여년 된 청송의 옛 기와를 얹어 복원한 별당 무연정은 우리한옥의 운치와 기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달 밝은 밤이면 책을 읽을 정도로 달빛이 밝다
‘수오재(守吾齎)’라는 이름은 조선후기의 문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따온 것으로 ‘나’를 지키는 집을 뜻한다고 한다. 즉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본질적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수건 바구니가 책장 사이에 놓여있다 온돌방은 여러 사람이 숙박하기 편한 구조로 되어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오재로 향했다. 수오재 입구의 담장은 담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기와를 쌓아 만든 나지막한 담장이다. 그래서 반듯하고 육중한 한옥이 담장 너머로 보이고 그 주변으로 오래된 감나무와 가을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고택의 가을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고택인줄로만 알고 찾았던 수오재는 정작 이곳에 와 보니 이미 매스컴을 통해 소개 된 적이 있는 알려진 곳이었다. 최근에 TV인기프로인 1박2일 방송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시가 곳곳에 보인다. TV 1박2일 방송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깃발이 투호에 젊은이들이 투호놀이를 즐기고 있다 꽂혀있다
비오는 날 방문객의 신발이 더러워질까봐 마당 앞에 깔아놓은 맷돌 징검다리를 밟으며 안으로 들어서니 젊은이들이 우리의 전통문화 놀이인 투호 던지기를 하고 있고, 먼저 온 손님들의 재잘거림과 흥겨운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여장을 풀어놓고 고택 주변을 둘러보던 중 마당 뒤편에 잘 묻어둔 김치항아리가 눈에 띄었다. 순간 누구랄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우리, 점심 안 먹었잖아?...” 살기 위해 먹든, 먹기 위해 살든, 의식주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식(食)이 아닌가? 우리는 100여명이 한 번에 숙박할 수 있다는 매곡당 앞의 식당으로 향했다. 비닐하우스 같은 식당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외양과는 달리 식당 안은 넓고 깨끗했다. 식당 한쪽에는 커피자판기와 과일이 가득 담겨있는 바구니가 있었는데 그 옆에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알아서 지불하라는 안내문이 있다. 무인판매로 운영하는 주인장의 훈훈한 인심을 엿볼 수가 있었다.
부추전과 동동주, 숙성이 잘된 묵은지, 더 이상의 안주가 식당 내에 비치된 상품들은 무인판매로 운영된다 필요없다
맛있는 식사를 끝내고 수오재 촬영에 들어갔다. 제법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약간의 취기도 있다고 느꼈는데... 카메라를 들자 동동주 술기운은 사라져 버렸다. 나뿐만이 아니다. 누구 하나 자세가 흐트러진 사람이 없다. 한옥의 정기를 받았나?.. 옛 조상들이 남긴 수오재의 멋과 세월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눈빛들이 예리하고 바쁘다.
촬영을 끝내고 대숲 방에 여장을 풀었다. 황토벽에는 전통 한지가 발라져 있고, 콩기름을 먹인 방바닥은 많은 이들의 다녀간 흔적이 남아있다. 벽 면 한곳엔 주인장의 손때가 묻은 서적들로 가득 찬 책장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창문이 달려있다. 문을 열어보니, 건물 뒤편의 대나무 숲이 한 폭의 아름다운 동양화처럼 창틀 안에 들어와 앉는다.
이곳에는 일반 숙박업소와 같이 TV나 컴퓨터, 게임기가 없다.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즐길거리가 없어 답답하고 지루해 할지 몰라도 오히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과 대화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도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다 수다도 떨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대숲 방에서 바라 본 수오재 풍경 해가 저물면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은은하다
대나무 잎새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밤이 꽤 깊어진 것 같아 방문을 열어보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방안 가득 쏟아진다. 오늘따라 밤하늘이 유난히 맑은 것 같다. 체험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어두운 밤, 보석같이 빛나는 별빛아래 신라의 유적을 찾아 떠나는 낭만적인 별빛기행도 이곳에 오면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주인장의 애잔한 단소가락소리가 여행객의 고단함을 풀어주고, 교교한 달빛이 달빛 방에서, 별빛 방으로, 또 대숲 방에서 행복의 방으로 스며들며 고택의 가을밤이 점점 깊어만 간다.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수오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대나무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뒷동산에 올라가 보았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산책길이 참 아름답다. 특히 숲길 여러 곳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이 의자에 앉아 상쾌한 솔향기를 맡으며 잠시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와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는 새로운 체험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여기까지 왔다면 수오재로 바로 내려가지 말고 조금 더 올라가 오솔길을 돌아 내려가면 신라 제25대 효공왕릉 묘가 있고 사적지 주변의 울창한 대나무 숲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나무 숲 터널도 있다. 이곳은 산책하면서 덤으로 즐길 수 있는 코스이다.
산책하다 잠시 쉬거나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숲길 곳곳에 빈 효공왕릉 주변에는 혼자 걸어도 좋을 대나무 숲 터널이 있다 의자가 놓여있다
한옥에서 보낸 짧은 하루 밤, 아쉬움이 많지만, 이제 일상의 탈출에서 얻은 자유와 여유로움을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곳에 왔을 때의 기대보다 떠날 때의 아쉬움이 더 큰 것은 그만큼 채워가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루를 지내고 나서야 “나의 맑은 영혼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키겠다고 ‘수오재’”라 지었다는 주인장의 말이 주변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수오재’는 단순히 잠만 자고 가는 잠자리 장소가 아니다!....
수오재에서는 주인장이 부는 애잔한 단소가락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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