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시절 1 (위대한 탄생 ~ 취학 전) 1950년대 (사진)
기억나는 주요사회사건
부모님/형제자매/태어난 곳(집)
동네(고향)/동네 친구들
할아버지.할머니
갖고 싶었던 것/먹고 싶었던 것/자랑거리
생각나는 사람/미운사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주요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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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의 어린시절 1 (위대한 탄생 ~ 취학 전) 1950년대 (사진)
기억나는 주요 사회 사건 : 너무 어릴 때라서 기억 나는 것이 없다.
부모님 : 이 태원 이 상순
형제자매 : 위로 두살 위 형 1. 남동생 3. 여동생1.
형 위로 누나가 있었으나 전란 중 사망
태어난 곳(집) : 수름재 할아버지 댁
동네(고향) : 인천 송월동 기찻길 동네
동네 친구들 : 또래가 없고 동생들만 많음
할아버지.할머니 : 두분 생존하심은 증조할아버지도 생존하셨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외증조 할아버지 까지 정말 다복.
갖고 싶었던 것 : 자전거
먹고 싶었던 것 : 짜장면 탕수육
자랑거리 : 노래 잘했음
생각나는 사람 : 옆집 순자네 할아버지
미운사람 : 없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 먹먹하다. 무슨일이 하고 싶은지 생각나지 않는다.
주요 키워드 : 전쟁 후의 혼란기
나의 어린시절은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처참하고 암담하고 무질서하며 온갖 악행이 버젓이 횡행하던 암울한 기억들로 점철 되어 있다.
사람들은 오직 굶지 않고 살아 남기위해 온 힘을 쏟는 듯 보였으며 지금은 상상할수 없는 수많은 악행들이 버젓이 행해지던 시절이었다.
누가 누구를 비난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도둑이었고 사기.협박이 횡행했고 말은 거칠다 못해 욕설과 폭언이 대종이고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에서 바닷가에는 불발포탄이 널려있고 언제라도 교전이 있을것 같은 살벌하고 아슬아슬한 분위기의 나날이었다.
전쟁의 아픔은 나의 출생기에서도 엿 보인다.
어머니는 인천에 사시다가 전쟁이 나자 만삭의 몸을 이끌고 양손에 아들딸 손을 잡고 시가인 수름재로 가셨다.
1.4후퇴의 대량 피난민이 할아버지댁의 외양간까지 점거한 북새통속에 나를 기르셨는데
산후 조리는 커녕 편히 아기와 누을 자리 조차 없는 아수라장에서 나는 배고파 울어댔다한다.
산모가 먹은것이 없으니 젖이 나올리 없고, 엄마는 간신히 구한 쌀 한줌을 생쌀인채로 꼭꼭 씹어 내게 먹이는 등으로 꺼질듯한 생명을 겨우겨우 보존 시키셨다한다.
1.4후퇴의 북풍한설 속에 달리는 기차에서 던져지지 않음이 행운이오.
빗발치는 포탄의 파편을 용케 피하고 살아 났음도 기적일수 있다.
내 기억이 시작되는 인천 송월동 기찻길옆 오두막집은 비록 허술한 슬레이트 지붕에 기찻길 바로 옆이라 시끄럽고 진동까지 느껴 졌지만 너무나 돌아가고 싶고 보고 싶은 집이다.
철도 부지에 무허가 건축물이었기에 지금은 허물어지고 흔적도 없는것이 너무 아쉽다.
매일 교체되는 미군들이 열차 가득 타고 오고 갔는데 우리는 열차에 대고 손을 벌리며 간절하게 외쳐댔다.
"기브 미 쬬꼬랱!!"
때로는 먹다남은 비스킷이며 쬬코렡이며 깡통등을 던져 줬는데 먹지 않은 새것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고 어쩌다 동네 누나들이 보이면 새것을 던져줄때가 아주 간혹 있었다.
그때면 누나는 물론 예외이고 동네 꼬마들의 피나는 쟁탈전이 벌어 지곤 했다.
그때 가끔 커피도 던져 줬는데 쓰기만 할뿐 "맛 대가리가 하나도 없는" 그 물견의 정체가 궁굼했었다.
한국에 파견되는 미군들의 수준이 좋을리 없어서이겠지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온통 하얗게 쓰레기 더미가 쌓이곤 했다.
주로 담배 꽁초이고 과자 껍데기등이다.
나는 동네 할머니 한분이 담배를 좋아 하셔서 공초를 성의껏 주워다가 드리드리곤 했는데 그렇게 고마와 하실 수가 없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담밸르 맛있게 피우시는데 이가 몽땅 빠져서 양쪽 볼이 푹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유년의 하루가 가고 있었다.
밥 먹기도 어려운 시절에 담배들은 왜 그리 피워 댔는지 모를 일이다.
전쟁의 후유증은 생활 전반에 난타 났는데 크게 언어폭력과 도둑질 기아 등이 기억난다.
당시의 일상 언어에는 욕이 꼭 들어 갔는데 아마도 전쟁의 여파이면서도 극한 현실의 반영인듯 싶다.실제로 월남전때 실황 중계르 들어보면 곁에서 전우가 죽어가면 마구 욕설을 내뱉으며 절규하는 방송을 들은 기억이 난다.
자식이고 친구고간에 걸핏하면 "죽인다"라고 했고 그외 온갖 쌍욕을 입에 달고 살앗다.
내가 어릴때 충격받은것은 자기 자식에게 퍼 붓던 엄마들의 욕설이다.
"야 이 웬수 같은 새끼야 나가 뒈져라!!"
"이누무 시끼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 버린다!!"
"이 쉐끼 쥑여 버릴까보다!!"
이런 욕설이 이집 저집 거리 거리에서 아주 자연스럽고 흔하게 들렸다.
친구들과의 대화도 "공갈 마 새끼야!!" "까불면 죽인다!!" 죽인다란 말이 왜 그리 쉽게 나갔는지.....
어린맘에 "니미 씨*"이 무슨 뜻인지 , 또 그게 왜 욕이 되는지 알듯 모를듯도 했다.
또 좆이란말을 욕으로 자주 쓰면서사람을 죠지라고 부르는것도 신기했다.
죠지라고 불리운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편히 대답해서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중학생이 되어서야 그것이 서양 남자의 흔한 이름인것을 알고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내가 발견한 우리 조상의 지혜 하나.
어릴적 동네 개 이름중 쭁과 매리가 많았는데 내가 발견한 그 이름의 유래를 꼭 함께 음미하고 싶다.흔한 우리 이름인 바둑이 검둥이 그런걸 두고 굳이 외국이름을 붙인이유가 뭔지 생각하다가 우리 선조의 기지에 화들짝 놀랐다.
미국은 우리에게 우방임은 틀림없지만 우리의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고 그
로인한 동족 상쟁으로 수백만명이 죽고 천만 이산 가족의 아픔을 부른 원인 제공자인점으로는 미울수 밖에 없다.
하여, 개 이름에 서양의 대표적인 이름 죤과 메어리를 갖다 붙이게 되었는데 핵심은 당시 개들에 대한 대우를 생각해봐야 답이 나온다.
천만 애견시대인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 개의 역할은 살아 생전 화풀이 대상이다가 복날 흠씬 두둘겨 맞고 솥에 들어가야하는 운명이었다.
시어머니의 온갖 행패를 견디기 어려운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등쌀을 받고나면 꼬리 흔들고 닥아오는 개를 사정없이 걷어차므로서 다소 분을 삭혔고, 생활에 쫒겨 분풀이 할데 없는 남정네들은 찌는 여름 쭁이나 매리를 나무에 걸어 놓고 산채로 몽둥이로 후려패므로서 스트레스를 해소했던것이다.
주변에는 굶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밥을 끼니마다 먹는것이 잘사는것이던 시절.
모두가 도둑질을 했기에 온통 도둑들 뿐인 세상이었다.
본인이 도둑이면서 가끔 도둑을 당하고는 도둑은 아주 나쁜거라고 거품을 무는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곤하는데 도둑과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련다
1. 멍청한 도둑 : 저녁 일찍 숨어 들어가서 할 일이 없었는지 과일주 담가놓은것을 홀짝 홀짝 마셔 버렸다
깜박 잠든것은 그렇다치지만 코를 골다가 주인 남자에게 들켜 도둑질은 커녕 흠씬 두들겨 마\ㅈ았다.
2. 양심에 털 난 도둑 : 내 바로 밑의 동생은 외가를 닮아 무척 잘 생겼다 . 물론 똑똑하고. 그러나 그 동생도 어릴때(4살)ㄴ느 여느 애들과 같이 사리 분별을 못했기에 어느 ㅈ은 강르 에 어머니까 소털실을 사다가 힘겹게 밤새워가면떠중ㄴ 털옷 한벌을 처음 입고 나간날 도둑에게 벗기우고 알몸으로 집에 돌아온일이 있다.
세상에 벼룩의 간을 내 먹지 4살박이 어린애의 옷을 벗겨가는 그런 도둑중에도 파렴치한이 그 시절에는 있었던것이다.
3. 도둑 잡아라
한여름날이면 당시에는 평상을 밖에 내 놓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ㅎ
앉아 대화도 하고 소줏잔을 기울이기도 했는데 어느 여름 해질녘에
4. 액땜..똥
...............3. 어린시절(취학 전 끝.......................................................................))
4.나의 어린시절 2 (7~18세)
기억나는 주요사회사건
1959년 4.19....국4년....영문도 몰랐지만 國父행세하던 이승만이 하와이로 도망가고 매일 갖가지 데모가 있엇는데 심지어 국민학생들이 담임 바꿔달라는 데모까지.
1960년 5.16....국5년..담임선생님 과외를 반장이라 공짜로 받고 있었는데 술이 취해 ㅡ늦게 귀가한 선생님이 오늘"군사 혁명이 있었다"라 했는데 자세히 몰라도 큰 변화가 있음을 직감. 3공화국이 됬다해서 의아해 하니 불란서는 현재 5공화국까지 됬다고 들음
1968년 여름방학...군사독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매우 험악한 분위기 속에 느닷없이 방학중 불려가 학생주임교사에게 불문곡직 많이 맞았음.
아마도 누가 데모 주동할 것 같냐란 질문에 강직한 성격의 나를 지목했던듯.
초 중 고 주변인들
짝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음...반장 일 보느라 옆 친구와 소원
| 초 | 중 | 고 |
친구(첫사랑) | 변 동선 ,성홍제, 김두응, 이호길, 한경섭,박병모(이상4명은 지금도 同夫人하여 주기적으로 만남)
한마을에 살던 양순*과 10년을 열열히 정을 나누었음. 군 입대로 빼앗김 | 최태석, 양원호, 조영철 | 김진환(갈비), 정성식(대포), 윤??(코시킨),나 판토마 4명은 밤낮없이 어울림 조 영진(졸업후 더 친함,술 매일 함께 퍼 마시다가 술에 맞아 여러해전에 먼저 감) |
선생님 | 1년 김?? 보잘것 없는 나를 잘 대해줌. 3년 이부순 오늘의 나를 만든 계기부여 끔직이 날 아껴줌. 4년 김경언..남자다워 흠모 | 물상담당..이갑준 누구야? 해서 손들으니 너 시험 빵점!! 알고 보니 100점 | 3년 백남언..애증의 관계...나를 삼성그룹에 입사케한 은인 그러나 반장일을 하면서 잡부금 걷어 바치는거 정말 괴로웠음 |
부모님 | 두분의 눈물겨운 헌신으로 내가 컸다 |
특히 어머님의 선구자적인 혜안으로 우리 6남매 모두 대학 졸업은 물론 박사2명(1명은 대학 총장, 1명은 현 학과장) 석사2명 됬으나 정작 촉망받던 나는 둘째로 태어난 업보로 취업 전선에 조기 진입 끝내 꿈을 못 이뤘다. | 늘 부족한 살림인데도 학비라고 손벌리면 꾸어서라도 마련해 주신 엄마. 가끔 책산다고 거짓말씀 드리고 딴데 쓴거 죄송해요 엄마(또 생각난다 엄마...편히 쉬고 계신거죠?) |
갖고 싶엇던것...엄마는 매우 수완이 좋으셔서 6남매가 원하는 것을 거의 들어 주셨다.
겨울이면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탔고 여름이면 뚝섬 안양 자연 풀등에서 수영을 했다(수영 팬티는 빌려입음..찝찝) 악기 욕심이 많은 나는 중3때 guitar가 너무 갖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합격하면 사준다 하시던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느날 집 현관에서 "딩딩딩" 기타 소리를 내실때 정말 하늘로 솟는 감격을 느꼈다. 오우 울 아버지가 이런 때도 있다니!!(아버지! 엄마 곁에서 잘 지내시죠?)
하고 싶었던것 ....언제 부터인지 나의 인생 목표를 설정할때
1. 여자는 딱 한명을 그녀의 과거와 현재와 영원한 미래까지 至高至順한 순애보 적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첫사랑의 여인이 군대 간 사이에 나쁜 놈에게 당해서 좌절.
2. 돈 : 나는 돈에 대해서는 세끼 밥먹고 등 뉠곳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현대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자식 고생 시킴은 물론 본인의 대우도 형편 없는 줄 잘~~ 알면서,
그리고 삼성그룹 재직시에 이병철 회장이 돈에 묻혀 호사스럽게 자기 하고픈대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도 부럽지 않음은 왠일인지.
잠깐 이병철 이야기 하자면 그분의 정확한 재산은 본인은 물론 주변 어느 누구도 모른다.
매 순간 늘어가는 이자, 기복있는 주식, 그리고 각 사업장 마다 꽂아둔 비자금 고가구에 심취하여 공방 차려 제작까지 했던 그가 소장했던 고 미술품이며 보석류, 태평로 신사옥 준공 무렵의 생일 선물로 순금으로 빌딩 모양을 꽤 크게 만들어 헌정했었고......
1969년 당시 내가 갖고 싶어했던 독일제 agfa사진기(일명 배꼽사진기)를 손자가 장난감으로 들고 다녔고,용인 자연 농원에 지은 한옥은 궁궐을 그대로 본따 만들고 뜰에는 공작새가 노니는..... 업체마다 있는 회장실에 즐비한 100년 200년된 양주들....
휴~~
이런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서도 하나도 안부러웠음.
준비가 덜 된 노년을 맞아 힘들긴 하지만 여전히 후회는 않고 다소 불편하고 아내에게 제일 미안함. 정말 아내에게 만큼은 이런 내 기질이 나도 싫음. 참고 살아줘서 고맙고.
3. 출세 : 돈에 대한 욕심은 없는 반면 출세욕은 매우 높았었다.
사나이 한번 살다 가는 것 남들앞에 군림 하고픈 욕망은 높았다.
국민학교 6년때 대의원 수가 워낙 많아서 강당에서 어린이회를 하자면 강단 높은 곳에 앉아 수많은 대의원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의사봉을 두드리던 쾌감은 해보지 않은자 말 말지어다.
그래서 대학교 때 취미 따라서 선택한 국문과 3년때 다시 2학년으로 낮추면서까지 법과로 전과 했다.
그런데 거기 까지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사법고시 한번 응시 못해 보았고
아마도 물려 받은 재산이 많았거나 재주 부려 돈을 많이 벌었으면 국회에 출마했을것이지만 현실은 늘 동 떨어 져 있었다.
실제로 친분있는 사람의 유세를 도와준 후 지역당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적도 있으나 지금와서 생각하면 정치 쪽에 발 담그지 않은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썩어도 너무 썩고, 흐려도 너~무 흐린 그 아수라장에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다.
자랑거리
후회되는 일
생각 나는 사람
미운사람
그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주요 key word : 애어른
어른이 어른답지 않으면 비난 받는다.
그러나 어린이가 어린이답지 않게 어른 스러울때는 "점잖다"고 칭찬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 점에서 많이 아쉽다.
‘점잖다’ 라는 말은 기실 젊지 않다란 말이고 중년을 넘어서 노년의 행동거지를
했다는 말도 된다.
이점을 짚고 가고 싶다.
주변에 점잖은 어린애가 있을 때는 가능한 아이답게 행동하도록 유도함이 옳을 것이다.
인생의 마디 중에 한 마디가 빠져서 되겠는가?
그때가 너무 아쉬워서 "죽을 때 까지 철 들지 않기를"이란 인생motto를 말했다가 아내에게 디지게 혼났다.
나는 6살 때 심한 염세주의에 빠졌었다.
쬐그만 놈이 뭘 안다고 염세주의 운운 하냐고 남들이 믿지 못할 것 같아서 나 혼자 간직해 왔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꽤 오랜 동안을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고민하고 좌절했다.
나는 죽어야 한다.
죽으면? 썩는다. 썩고 나면? 흙이 된다.
흙이 된 후에도 세월은 계속 흐르겠지.
천년,만년,억년 ...... 그렇게 끝없이 흐르는 시간속에 내 남은 육체의 조각은 어찌 될까?
내 육체는 그렇다 하더라도
내 영혼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남아 있기나 하는 건가? 지금 내 몸속의 혼은 어디 있는 거지?
정말이지 너무 혼란 스러워서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늘어 갔다.
그리고 죽는 게 너무 무서웠다.
그렇다고 영원히 죽지 않아도 문제일 것 같다.
지겹고 괴로울 땐 어떻게 하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 무서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무서워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사회학자의 말에 절대 공감한다.
來世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믿으면 맘이 편해지니까.
그러나 6살 꼬마에게 전도하는 눈치 9단이거나 띨띨한 전도자가 없다보니
나는 밤이면 밤마다 숙제하는 2살 터울의 형이 앉은 책상 머리에서 깊은 절망에 빠지곤 했다.
잠이 올리가 없고 새벽 2~3시경 아버지 코고는 소리는 무섭게 그르렁 댈라치면 "아버지 잠이 않와요" 코골기도 멈추게 할 겸 구원을 청하면 "숫자를 세라 끝까지 계속 세~ ....그르릉 쿨~" 이런 밤이 지속되었다.
그 명제는 당연히 지금까지도 못 풀었고 영원한 인류의 화두임을 알게되었다.
별로 갈 데도 없고 장난감도 없던 그 시절, 戰後 베이비 부머(baby boomer) 들은 온종일 모여 노는게 전부였다(난 당시 어른들이 그 지독한 가난을 겪으면서 왜 그리 자식들을 대책도 없이 많이 낳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동네 골목마다 애들은 아침부터 넘쳐났는데 겨울이면 남향 담벽에 옹기종기 붙어 서서 햇볕을 쪼이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당시 남자애들은 딱지치기, 구슬치기(뎅구치기), 비석까기, 가이생, 여자 애들은 공기, 고무줄, 소꼽놀이 등을 열심히 했는데
나는 국교 3학년 되도록 거의 책만 보고 공상에 빠지다보니 딱지 접을 줄도 모르고 구슬로 하는 “으찌니 쌈”도 안 해 봤고, 묵찌빠도 안 해봐서 지금도 그 방법을 모른다.
그런 것들을 못해 본것이 너무 아련하게 아쉽기에 우리 자식이나 손자들은 공부에 내 모는 것을 결사 반대 하지만 내 마누라한테도 졌고 내 아들딸한테도 지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조금만 깊이 들여다 봤다면 우리의 엄~청 잘못 된 바보 교육 짓거리를 부러워하고 칭송하지 않았을텐데....
내 리즈시절의 정점은 전교어린이회장이 된 것이다.
돈 여유가 조금만 되도 학교 문턱이 닳도록 치맛자락 휘날리는 것이 우리의 엄마들이다.
그때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학교 육성 회원 자녀들은 특별한 보호와 지도를 받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신경 써주기, 시험문제 미리 알려주기, 시험성적 올려주기(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성적은 물론 이고 분단장(줄반장)부터 전교회장까지 간부직을 노리는것도 지금과 비슷했다.
철도청 하위 공무원의 6남매 중 둘째인 내 뒤를 돈으로 밀어 준수 없었던 어머니는(갑자기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난다 엄마!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 사랑해요)
지독히 내성적인 내가 혹여 따돌림 받을까봐 그러셨는지 담배 2갑을 곱게 싸서 치마폭에 숨겼다가 담임선생님과 면담이 끝나고 나올 때면 내 손에 쥐어 주시며 선생님 갖다 드리라고 하시곤 했는데 나는 뭣 때문에 이래야 하나 싶어서 정말 싫었고 겸연쩍기도 해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갖다 드렸다.
이상한 것은 선생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주 자연스레 받는 것이었다.
인천 동인천역 근처에 인천축현국민학교가 있었다.
학생 수가 자그마치 5천명이 넘어서 전국에서 몇째 안 간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시험제 이었기에 6학년 2학기 때는 수험에 전념하라고 축현국민학교전교어린이 회장의 임기가 5학년 2학기부터 6학년 방학 때 까지 였는데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 노량진 국민학교로 6학년 여름 방학에 전학했는데 거기서 다시 공석이 된 전교어린이회장직에 당선 되어 1년 6개월을 재직 했으니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유래가 없을 터 인 즉 기네스 사에 한번 들러 볼까나.
요즘 같이 현수막까지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나름 유세전이며 선전 ,포섭 등이 있은 후 선거일이 닥쳤다.
마지막 입후보 연설은 커다란 운동에서 있었는데 그날 이후 그 만큼의 청중 앞에 서본 일이 없다.
막강한 라이벌은 육성회장 아들이며, 전국 웅변대회에서 수상 경력이 있고, 잘 먹어서 얼굴에선 기름이 줄줄 흐르고, 옷이며 구두도(나는 고무신 신다가 겨우 운동화 신었음) 최고급이요, 알려 하지 않았지만 주변 애들에게 무엇이든 뿌린 것이 틀림 없을 터. 이름은 이 상*, 잊히지 않는 이름 중 하나다.
선거 며칠 전엔 전국대회에서 했던 웅변을 전교생 앞에서 하게 해 줬다.
유려한 말솜씨, 힘이 들어간 목청, 화려한 제스추어........
왜 하필 오래전에 시연했던 내용을 선거전에 재탕 했는지 당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무슨 일인지 몰랐고 생각하기도 싫었다는 게 맞겠다.
나는 비록 형이 입던 낡은 거지만 어머니가 깨끗이 빨아 기워주신 골덴바지를 입고
검정 운동화를 깨끗이 닦아 신고 연단에 올랐다.
물론 과자 한개 연필 한 자루 주변에 뿌린 적 없다.
그런 능력도 안 되지만 결코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비록 달변은 아니지만 평소 생각이 많은 터라 소신껏 학교의 미래를 제시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의아 했다.
압도적으로 내가 승리 했고 또 이해 않되는 것은 여학생표가 많았다는 점이다.
여학생들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알았으며 무엇이 호감 가게 했는지 귀신도 모를 일이다.
나는 한달음에 뛰어가 이 기쁜 사실을 엄마(특별한 경우 아니면 난 엄마라 한다. 어머니는 거리감이 있어 지금도 잘 안 쓴다)께 고했다.
"엄마! 저 전교 어린이 회장 됐어요!!"
마당에서 빨래하시던 엄마는 얼굴가득 활짝 웃으시며
"그으래?! 장하다 울 아들!! 최고네!!" 하며 안아 주셨다.
(또 눈물이 난다. 그립다 그 포근한 엄마 품. 그리워서 보고파서... 엄마.......
왜 우리 인간들은 유한한 삶을 살게 되어 이렇게 눈물 짓는 건지
자서전 쓰면서 우는 게 나만은 아닐 듯 싶다.)
차점자는 규정대로 남녀 2명의 부회장 중 하나가 되었고 이상*의 집은 그날 밤
난리가 아니었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교장을 비롯한 전교사들이 초대되어 갈비 잔치를 벌였다하는데 봉투가 돌려진 것도 뻔 한 일.
다음날 상*이는 번쩍번쩍한 외제 자전거 자전거를 끌고 학교에 나타났다.
요즘으로 치자면 자가용 승용차 정도의 큰 선물이다.
나? 선물은 있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지.
그러잖아도 친구 집을 방문하면 친구 엄마가 더 반겨 줬었는데 그 날 이후는 더 할 수밖에.
다른 점은 다 어른 스러웠는데 여전히 애 일수 밖에 없었던 점은
자랑할 일이 있으면 우선 친구 집부터 들러서 칭찬을 딥다 받고서 집으로 가곤 했는데, 우리 엄마에겐 볼 수 없는 호들갑, 애교, 과찬등에 푸짐한 먹거리가 있어서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입장에선 날벼락을 맞는 날이 아니었나 싶어 후회된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오늘 성적표 나왔지? 갑준아 네 것부터 좀 보자
아유~~ '수'말고는 없네! 정말 대단하다 얘! 그런데 성*야 넌 어떠냐 내 놔봐 "
매사 이런 식이었다.
어떤 날은 친구 엄마와의 대화가 더 많아서
내가 친구를 보러 왔나 친구 엄마 보러 왔나 자신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말수도 적고 친구도 많이 없음을 염려하신 엄마는 그 없는 살림에 국교 3년 때 보이스카웃에 넣어주셨고
그때 3학년 담임이셨던 이 부순(여)선생님은 나만을 극진히 예뻐하면서 키워 주었기에 내 인생이 역전 되었다.
엄마의 보이스카웃 선택은 사회활동 사교성을 키우는데 최고였고 이 부순 선생님이 반장이 되도록 유도하고 반대표로 어린이회 참관을 시켜준 바람에 이날까지 이 갑준 이름 뒤에"長"字가 붙지 떨어진 적이 없게 되었다.
이 부순 선생님이 날 귀여워하는 만큼 나 또한 꿈에도 뵐 정도로 따랐는데 나이 들면서 선생님의 나에 대한 偏愛의 출발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시 처녀였던 선생님이 좋아했던 분이 주임 선생님인데 나와 외모가 거의 같아서 였던것 같다.
나의' 애어른' 蠻行은 중딩을 지나 고딩까지 이어 졌는데
친구 집 10집중 7~8집은 그 친구 보다 그 엄마가 나의 말相對이고 그 엄마들이 날 더 반겼다.
양** 친구에게는 아주 예쁜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엄마는 날 사윗감으로 점찍은 눈치였고 훗날 그 동생 역시 생각이 있었다는 본인 얘기도 들었다.
최** 엄마는 일제 때 고등학교 까지 나온 인테리였는데 나만 가면 대화는 물론 바둑을 두곤 했다.
또 고교 때 조금 엇나가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는데 엄마는 아들 말은 못 믿겠다고 반장인나한테 매사 확인 하는 바람에 그 친구가 날 역이용해서 제 하고픈 일을 하거나 돈을 타 내는 일이 많았다.
친구를 위해 친구엄마의 신뢰를 배반한 것이다.
난 이 같은 상황들이 후회 되고 할 수만 있다면 어린애답게도 지나고 싶지만 다 지나간 일이기에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내 어린 시절로 남아 있다. 끝
5. 나의 청년시절 1 (19세~23세) 69년~73년
기억나는 주요 사회사건
한비사건(사카린 밀수),...박정권의 비호 아래 돈벌기에 혈안이던 삼성은 밀수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당시에 차액이 컸던 사카린을 밀수입 했다가 들통이 난다.
당시 내가 소속 되었던 회사(중앙개발)에도 한비 소속이었던 직원 몇 명이 전속 되어 와서 피부로 느꼈다.
우리나라의 재벌들이 지탄을 받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몇가지를 나는 몸소 체험을 했다.
로비 자금으로 쓰기위한 비자금 조성을 내가 담당했었는데 나를 보증 서준 아버지와 삼촌의 재산을 합한것의 수십배의 현금을 돈세탁하는 것이 주 임무였고, 당시의 허술한 금융체계에서
가명을 동원한 자기앞 수표 배서를 몇 번 거치면 어느 누구의 돈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돈이 된다.
승용차가 귀했던 당시에 만약 내가 세탁을 마친 돈을 지니고 길을 걷다가 이를 미리 아는 괴한에게 빼앗긴다면 내 인생은 끝장이었고 삼성에서도 고발도 못하는 아슬 아슬한 나날이었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일개 신입 사원이며 보증인도 탄탄하지 않은 내게 어떻게 그런일을 시켰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내가 그돈을(하루 세탁하는 돈이 요즘시세로 10억 가량) 탐내서 일본으로 밀항한다면 삼성은 내놓고 수사 의뢰를 못하고 기껏해야 민완한 직원을 동원해서 나를 찾아 나서겠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갖고 싶엇던 것 : 악기를 좋아 했으므로 모든 악기 특히 바이올린과 손풍금을 갖고 싶었는데 지금도 변함없이 갖고 싶을 뿐.
하고 싶었던 것 : 세상 만사에 관심이 많고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 살다 가는데 사기, 도둑질 빼고 모두 하고픈 욕심장이...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무시무시한 삼성 그룹에서 관례를 깨고 야간대학을 졸업한 것은 자랑해도 될 듯하다.
난 거의 매일을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나? 절대 그럴수는 없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대 놓고 학교를 그만 두라는, 아니면 퇴직을 하라는 말을 거의 매일 했다.
정말 듣기 싫고 서러운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5년간 대학을 다니고 드디어 졸업을 하기까지, 나의 굳은 의지도 컸지만 엄마의 지혜도 한몫했다.
즉, 경리 업무는 장부기장, 전표정리,결산서작성 등 혼자서 하는일이 많으니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일을 하도록 제안해 주셔서 그리 했다. 새벽5시 출근 학교 끝나 사당동 집에 11시 넘어 도착.
얼마나 고단했으면 내 막내동생이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게 주 임무였다.
나는 조금 더 자려고 “ 야! 야! 시끄러 임마” 라고는 했지만 참 좋은 동생이고 지금까지도 잘 따르는 동생이다.
후회 되는일 : 일단 법과를 나왔으니 사법고시를 응시하고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와 가족 생계등으로 고시공부를 못한 것 평생 후회된다.
내 대학 동창은 대학 3년때 공무원 팽게치고 고시공부를 했다.
그가 패스하고 안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과감하게 직장을 던지고 자기길을 갔다는게 부럽다.
생각나는 사람 : 많다 그런데 거의 위에 언급 되었다.
미운사람 : 특별히 없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