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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4일 주일메시지
룻기 제 1강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말씀 / 룻기 1:1-22
요절 / 룻기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룻기가 아름다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몸된 교회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로 가득한 모압 땅에서 유대 가정과 맺어진 한 여인이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하는 다윗왕의 족보에 올라옵니다. 룻기를 통하여 세상 만민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룻기를 통하여 자격 없는 죄인이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룻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맛보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룻이 살던 시대는 사사들이 치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삿21:25).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우상 숭배가 파고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주변 나라를 통하여 징계하셨습니다. 흉년이나 기근 등 자연재해를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임한 때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이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이고 ‘나오미’는 ‘나의 기쁨’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입니다. 그 가정은 베들레헴에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에 큰 흉년이 발생하였습니다. 엘리멜렉은 온 가족을 데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모압’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자연재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진, 해일, 홍수, 가뭄, 냉해, 우박, 병충해 다양합니다. 이중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하는 재해가 가뭄과 병충해에 근거한 기근입니다. 룻기에서는 흉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식량 부족이 근심한 것입니다. 기근또는 흉년으로 인한 피해는 전쟁보다 더 큽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사망한 사람보다 전쟁 중 발생한 기근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중국에서 기근으로 35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봅니다. 아일랜드는 1846년~1847년에 발생한 기근으로 10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25%가 감소하였는데,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그때 감소한 인구가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모압 지방에서 엘리멜렉은 죽었습니다.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아,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장가 보냈습니다. 이때 들어온 며느리의 이름이 하나는 오르바, 다른 한 사람은 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여자에게 아들을 장가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집은 두 며느리를 모두 이방 여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다 죽었습니다. 이로써 이 집에는 과부만 세 사람 남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이스라엘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흉년이 아니었다면 고국을 떠나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려움을 겪었던 고국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흉년이 그치게 하시고 먹을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나모미에게 전해졌습니다. 나오미는 이스라엘로 돌아가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때 시어머니를 따라 두 며느리들도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두 며느리는 모압 사람들이었지만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끝까지 따르는 훌륭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젊은 며느리들이 자신을 따라 가게 될 때 겪게 될 어려움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집에 그녀들을 보호해 줄 남자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이방인들에게 대단히 가혹합니다. 나오미는 그녀들을 만류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기를 원하노라.” 나오미의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병약한 남편들을 잘 섬겼습니다. 나오미의 아들들의 이름이 ‘말론’과 ‘기룐’ 인데, ‘병약한 자’ ‘연약함’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며느리들은 연약한 남편을 잘 섬겼습니다. 더 나아가 혼자 된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효도하였습니다. 이런 며느리들을 나오미는 딸처럼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두 여인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9b,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녀들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르고자합니다. 두 여인은 모두 훌륭한 효부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계대결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율법은 결혼한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아내는 동생과 결혼하여 후손을 계승하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그 대가 끊어지는 일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나오미에게 죽은 두 아들 외에 자식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이 늙어 자식 낳을 수도 없고 만일 아들을 낳는다 하여도 그가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자기 자식들이 죽은 것은 자신의 잘못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기 때문임을 말합니다. 한국의 옛날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향해 남편 잡아먹은 것이라고 악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에 비하면 나오미는 내면성 있는 시어머니였습니다. 나오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젊고 착한 며느리들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이 남아 있지 않으며, 자신과 함께 하는 환경이 며느리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음을 다시 알리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기와 함께 하는 며느리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행복의 기회인 ‘젊음’을 자신과 함께 하느라 소모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나오미와 며느리들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지만, 함께 하면 할수록 한쪽이 일방적 희생과 고통을 감당하여야 하는 현실을 안고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 높여 다시 울었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만 함께하기 힘든 운명이 된 것을 서로 슬퍼하였습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돌아서서 길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어로 작별인사가 ‘오르브와!’인데 혹시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아끼고 사랑하였지만, 이성적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마음 아픈 이별이지만, 자기의 남은 삶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에 비하여 룻은 다른 결정을 하였습니다. 룻은 계속하여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붙좇았다’는 말은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유아기의 어린이가 엄마와 딱 붙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자한 나오미는 룻을 다시 한 번 더 설득합니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나오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룻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오르바와 같이 떠나라고 말합니다. 마음 아프지만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에게 마땅히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괜찮다. 너라도 행복하거라’
16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자신은 시어머니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떠나라고 하거나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시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죽을 때까지 함께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방여자라 멸시한다 하여도 그 사람들이 어머니의 백성이라면 자기의 백성이 될 것이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 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르는 것은 룻에게 부담이 더 큰 것입니다. 젊은 룻이 자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이 많은 나오미와 함께 하기 위해서 자신이 더 많이 일하고 자신이 더 많이 헌신하여야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홀로 된 여자가 자기 하나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데, 노인까지 봉양하여야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룻에게 일방적인 헌신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는 이방인들에게 인색하고 혹독합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는데, 그곳은 룻에게는 오래 지속되는 차별과 설움을 줄 것이 분명한 곳입니다. 제가 군대 갔을 때, 이미 구타가 많이 사라졌을 때였습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것은 낯선 분위기 낯선 환경이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근무할 자대로 갔더니 여기서 더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몸은 매우 편했지만, 아주 이질적인 규칙들이 많았습니다. 이 낯선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어 아주 오래 거북하고 부담이 컸습니다. 요즘 목자님들은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낯선 사람들 앞에 서거나 교제하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하는 양들을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민족 다른 커뮤니티에 소속되어야 하는 룻의 부담도 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시어머리를 붙좇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룻은 어떤 점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룻은 사랑하는데 희생이 따르는 것을 알고 실천하였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희생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내가 아픈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연약한 삶을 사랑하는 룻은 그를 사랑하는데 따르는 희생과 아픔과 수고를 감당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희생없이 사랑할 수 없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자신의 양보와 인내와 헌신 없이 사랑하는 일은 이룰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사랑하는데 따르는 인내를 룻은 기꺼이 감당하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룻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 룻은 자기의 삶을 다 하여 어머니와 함께 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룻은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고 사랑의 헌신을 다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삶을 다 쓰겠다고 합니다.
룻의 이러한 사랑은 자기가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기의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였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붙좇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Gemeinschaft”와
“Gesellschaft”가 있습니다. 사회과학에서 널리 이용되는 용어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처음 들었습니다. Gemeingschaft는 공동사회, Gesellschaft는 이익사회를 말합니다. 가족, 친족, 민족, 마을 과 같이 혈연이나 지연 등 애정으로 기초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Gemeinschaft라 하고, 회사, 도시, 국가, 조합, 정당 과 같이 계약, 조약, 협정에 의하여 인위적이고 이해타산에 얽혀 이루어지는 집단을 Gesellschaft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Gemeinschaft라 하더라도 이익과 이해타산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생활능력을 상실한 부모에 대한 봉양을 회피하는 자녀들이 많은가 하면, 집 없이 월세 사는 자식에게 집을 장만해주기 싫어하거나 손자들에 대한 양육의 짐을 맡기지 말라 선언하는 노인들도 많습니다.
애정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사회 개념이 많이 퇴색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느 집에서 그 집에 놀러온 중학생에게 반갑게 인사해주었습니다. 이때 그 중학생의 반응은 ‘뭐냐? 기분 나쁘다’ 였습니다. 그 중학생은 ‘왜 나한테 인사하느냐’ ‘왜 나에게 아는 척 하며, 왜 나의 기분을 쿨하게 해주지 않는 말투로 아는 척 하느냐’ 짜증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른이 관심 가져 준다고 해도 직관적인 기분이 충족되지 않으면 짜증내는 시대입니다. 누군가 겸손하게 관계 맺으려 한다 하여도 그 사람의 모습, 그의 말이 Nice하지 않다면 거북해 하는 것이 우리가 대하는 청년들입니다. 그 중학생의 모습은 어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개척하여 돕는 어느 캠퍼스는 대학생들이지만 이 현상이 유독 심합니다.
우리 시대의 어른들은 ‘이익이 없다면 공동체를 이루지 않겠다’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겠다’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기분 나쁘면 공동체가 부담된다’ ‘나의 감정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공동사회의 일원인 것이 힘들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캠퍼스 양들의 선악 기준, 착하냐 나쁘냐의 기준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닙니다. ‘재미있냐? 재미없냐?’입니다.
이런 시대에 룻의 선택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좋은 교훈입니다. 룻은 개인의 이익보다 나오미와의 관계를 선택하였습니다. 룻은 이해타산보다 사랑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택하였습니다. 자기 존재를 희생하여 사랑을 완성하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이런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이익중심 사람이 잘 살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풍요롭지 않습니다. 많은 소유는 있으나, 좋은 관계가 없으니 얼마나 고독합니까? 저는 얼마 전 메시지에서 제가 아는 수백억 부자의 삶이 고독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언급한 적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메시지에서 이익중심으로 사느라 관계를 희생하며 살았는데, 관계도 잃고 이익도 상실한 사람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되감기도 없고 다시 살기도 없기 때문에 항상 Best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이익보다 사랑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계산하기보다 배려하여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좋겠다고 여기지만, 희생하고 손해나는 것을 보면 사랑할 힘이 급격하게 감소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좋은 관계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참아야 할 것이 늘어나고 양보해야 하는 자신을 보면 회의에 빠집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몰라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내와 배려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고 배려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영적 역량이 부족한 것이 우리 실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을 때, 우리 인생은 이익보다 관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휴머니티의 한계를 넘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사랑을 믿는 사람은 근심과 불안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는 다면 이익보다 사랑을 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살뜰 규모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며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룻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를 자기 길로 가라고 말리지 않았습니다. 19~22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온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나오미는 더 이상 자기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라’라고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기쁨’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마라’는 ‘괴로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흉년을 피하여 이방 땅으로 갔던 나오미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재산을 모두 잃고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물질 중심, 이익 중심으로 살았던 자기의 삶이 아무 열매 없이 괴로움으로 가득하여 졌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익을 좇고 세상 풍조를 따를 때,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빈그물 인생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 자기를 버리고 함께 하는 룻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러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우리와 함께 해주시러 오신 사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물질과 이해타산을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 분의 낮아지심과 사랑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귀하게 받으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캠퍼스 친구들 다른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전하는 주의 종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