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베이지와 그리그를 만나던 날
“그 겨울은 지나가도 그리고 봄이 보이지 않으리라.
여름 역시 사라지고 한 해가 지나가리라.
그러나 이것을 확실히 아노라.
당신을 다시 돌아오리라.
그리고 내가 약속한 것 같이
당신은 내가 그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당신은 발견 하리라.
오오
(중략)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나는 여기서 기다리리라.
만일 당신이 저 높은 곳에 기다린다면, 나는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리라.
나의 친구여.”
계속 듣고 싶은 오래다.
한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애끓는 사랑의 절절함이 끊임없는 사람들의 발길로 이어진다. 가냘프면서도 고음으로 가늘게 시골 여인들의 물레질 하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 고운 노래 소리는 무심한 사람들도 발길을 느리게 했다. 솔베이지 생가 앞에서 꿈같은 환상에 난 젖어 들고 말았다.
노르웨이 어느 산간마을에 가난한 청년 페르 귄트와 아름다운 소녀 솔베이지가 서로 사랑을 했고 너무 가난한 탓에 돈을 벌어서 결혼하리라는 약속을 하고 먼 길을 떠났었다. 그런데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해적을 만나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고,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이국땅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돈은 쉽게 벌지 못한 채 병든 노숙자로 전략하여 세월이 흘러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옛날 솔베이지와 살았던 오두막집은 다 쓰러져 가는 채로 있었고, 백발의 노파가 되어 바느질은 하고 있는 솔베이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부둥켜안은 채 한없이 울기만 하다가 그날 밤 페르 귄트는 솔베이지의 무릎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페르 귄트의 몸을 끌어안고 ‘솔베이지의 노래’ 노래를 부르며 그녀도 남편을 따라 숨을 거두었단다. 푸른 초원이 드넓게 펼쳐 진 곳에 지금도 낡은 이층 통나무 집 지붕 위에 파란 이끼와 풀만이 무성하게 미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향토적인 냄새는 우리의 것과 비슷했으나 ‘한’이라는 절절한 감정이 아닌, 그윽한 슬픔이 와인 향이 날아가듯 잠시 머물렀다 곧 사라졌다. 그곳을 떠난 후에도 내 마음 한 곳에는 그 여인의 숨결을 느끼기라도 하듯 가슴이 먹먹했다. 꿈같은 여행길에 빚어진 행복한 슬픔으로 승화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급히 찾아오는 감정이라기보다, 그를 만나게 되는 기쁨과 더불어 애잔함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오래전에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 또는 점심시간에 교정에서 가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솔베이지의 노래를 감상했는데 직접 여행을 통해서 작곡가 ‘그리그’를 만날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우리는 바삐 노르웨이의 제2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베르겐으로 향했다. 먼저 외각 지역에 자리한 솔베이지의 노래를 작곡한 그리그 생가를 찾았다.
주차장에서 생가까지 걷는 동안 길 양옆으로 풋풋하게 이끼와 높이 솟은 울창한 푸른 가로수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울타리로 이루어지는 꽃무리가 시선을 이끌었다. 그곳은 에드바르 하그루프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가 39세 때 이사를 와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라고 했다. 22년간 살았다는 작은 집 위층에는 박물관이 있었다. 그리그가 생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과 페르 귄트 등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작은 그랜드 피아노, 악보, 편지 등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리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사진, 그리고 여류 성악가였다는 그의 아내와 가족들의 사진 등을 보면서 예술성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인 그의 가족들의 삶이 넘쳐나는 감성으로 풍요로웠을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리그의 조각상은 살아생전 모습 그대로 본을 떠서 만들었고 했다. 연미복을 걸쳐 입고는 늘 지팡이를 짚었고, 살짝 옆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은 폼이 깡마른 체구와 아담했다. 다소 예민해 보이는 그리그를 만나니 실존의 인물을 대하는 듯 가슴이 벅차고 아무리 조각상인데도 옆에 서 있기가 조심스러웠다. 이곳을 어제 또 오겠는가 싶어 편안한 맘으로 카메라에 흔적을 남겼다. 바로 아래 조용한 호수가 보이는 작은 별채가 있는데 거기서 그리그는 오직 작곡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호수를 비롯한 주변의 아름다움에 영감을 받은 것이리라. 호수를 좋아했던 그가 남겼던 세브르 섬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처럼 그날도 역시나 햇볕이 잘 드는 조용한 곳에 무덤을 바위 사이에 구멍을 뚫고 만들었는데 바다가 바로 보이고 석양을 바라다 볼 수 있는 명당자리임이 틀림없었다. 이끼와 이름 모를 넝쿨 식물들이 둘러싸인 곳에 그리그의 모습을 다시금 그려보며 언제나 평온한 그곳에서 쉬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에 그곳을 떠나서 온 지금도 "솔베이지의 노래"와 그리그 작곡가와 생가가 추억처럼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