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아산 UBF 특강(11강_빌립보서 2: 1~11)메시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말씀: 빌립보서 2:1-11
요절: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겸손을 배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마음을 같이 하라(1-4)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체험한 훌륭한 신앙적 경험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과 사랑과 위로와 성령의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맛보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이러한 것들은 각 사람의 내면에 변화와 감동을 주는 것이었고, 성도들을 서로 예수 안에서 가족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신과 천국 소망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인한 소망이 모든 고단한 마음에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 배웁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나의 존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자아를 회복하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도 인내하며 비전을 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삽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예수 안에서 그런 체험을 한 빌립보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4절 후반절의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말씀과 연결이 되는데, 2절은 모두 한 마음을 품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시오. 3절도,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낫게 여겨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시오. 4절도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아서 나의 기쁨이 가득하게 해주시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목자나, 교회의 리더가 볼 때 형제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등이 있으면 근심이 되고 입맛까지 뚝 떨어집니다. 양들 돌보는 입장에서 볼 때, 누군가 자꾸 형제들 앞에서 자기 자랑하고 자기를 내세울 때 걱정이 됩니다. 또한, 다들 헌신하고 희생하는데 내 것에 집착하는 사람, 나는 이렇게 하겠다, 이렇게 안하면 나는 빠진다 하며 고집으로 형제들에게 부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심이 깊어집니다.
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유발하는 이런 어린 아이 같은 요소를 바라보는 심정은 우리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비슷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메시야 왕국을 이루시면 그 나라에서 누가 첫째가 될 것인지 경쟁하는 제자들을 향해서도 서로 하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서로 섬기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종과 같이 되어 제자들을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유언적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후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합심하여 기도하였으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일에 한 마음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이제 그 다음 세대에서도, 또 그 다음세대에서도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사도들이 순종한 대로, 그 제자들이 배우고 실천한대로 한 마음, 한 뜻으로 주와 복음을 위하여 하나가 된 교회와 그 지체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모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빌립보 성도들 간에 이런 갈등이 나타나는 것은 각 사람이 추구하는 바에서 차이가 있고 사랑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고 이런 헌신과 사랑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른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2절 말씀에는 Purpose, love, mind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는 행사나 이벤트가 없는가? 행사 중심, 이벤트 중심으로 역사를 섬겨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 전면에 나서서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데, 성과가 나면 그것을 인정해주고 알아주기를 열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충성하고 헌신하고자 하는데, 저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적과 의도는 같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목적과 의도가 있다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하는 말이 내 자랑인가, 나를 알아달라는 바람이 섞여 있는가? 나를 드러내려는 것이 있다면 즉시 회개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는 마음 90퍼센트, 거기에 나를 드러내는 마음 10퍼센트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느끼기에는 자기 드러내려는 마음 99퍼센트, 주님 위하는 마음 1퍼센트입니다. 그 1 퍼센트의 주님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사람에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근거로 삼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는데, 본인만 스스로 속고 남들도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추구하는 바와 의도에 100퍼센트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의도와 목적을 늘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계속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한 마음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주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3a절을 보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다툼’은 NIV성경에서는 selfish ambition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목적의 구체적 동기는 ‘이기적인 야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해 주셨는데, 그것이 실제로 와 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귀한 생명으로 자기를 구원해주셨는데, 나는 예수님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고 다시 살아난 귀한 존재인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 사람들의 존경, 사람의 인정, 사람들의 경청, 사람들이 보내는 갈채, 사람들이 해주는 귀하다는 말을 갈구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에게 내세울 만한 것을 궁리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랑거리를 구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자기 본성과 살아 온 습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그 부모님들이 자녀를 여러 명 잃었습니다. 그 분은 번번히 자식을 잃은 부모가 살린 첫 자식입니다. 부모님들은 뭐든지 들어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관심 가져주었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너는 집에서 가만히 있어라’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다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며 평생 키웠습니다. 이렇게 자라난 그 분은 주변 사람들이 잠시라도 자기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 분은 누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면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돌아보아서 스스로 이런 것은 내가 잘못했구나 속으로 생각할지언정 사람들 앞에서 ‘내가 잘 못했어’ 이 한마디를 절대 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결정으로 나쁜 결과가 빚어져도 그 결과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절대로 나의 결정이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요즘 아주 많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내면의 인격, 살아온 패턴 그리하여 굳어진 본성과 습관이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 언급한 그 분은 늘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아버지는 내게 큰 소리 한 번 안 내셨어, 우리 어머니는 정말 나에게 잘해주셨어’ 자기를 가장 완벽하게 아끼고 관심 가져 준 사례를 현재 자기 주변인들에게 기회가 되는대로 이야기 합니다. 마음 중심, 마음의 추구하는 바가 자기중심인 사람과 그 습관이 자기중심인 사람들은 형제들에게 부담을 주고 결국은 갈등을 유발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다음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허영’입니다. 허영이란 헛된 자랑, 허무한 자랑거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허영심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이 지식이 있는 척하고자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 힘이 있는 척 하고자 합니다. 영성이 부족한 사람이 영적인 척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인 척 합니다. 허영심은 세대 불문입니다. 지금 MZ세대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월세 살아도 차는 고급차를 사겠다고 합니다. 소득 없는 대학생들인데도 루이뷔똥, 프라다, 반 클리프, 샤넬, 구찌 핸드백, 액세서리를 장만합니다. 이런 허영이 말 그대로 허무하다는 것을 느끼는 30대들이 또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20대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녔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허무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자기 모습,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가식과 거짓을 보태서 드러내는 자기의 위선적인 모습은 허무합니다. 시카고에서 제 이름을 알아준다고 합니다. 어제 주례사에 대하여 여러 목자님들이 칭찬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찬사를 표현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여전히 새로 오는 학생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나 고민이 많습니다. 저는 여전히 젊은 중간리더가 없어서 고심하고 있고 이 베드로 형제가 일본 가야 하는데 면역력이 떨어져서 걱정입니다. 여전히 우리 큰 아들은 결혼할 믿음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체중을 줄이지 못해서 고민입니다. 나의 고민과 나의 문제는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도 나아진 것 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찬사를 보내준들 누가 칭찬해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과 찬사가 이 문제들을 다 해결해주는 것이라면 저는 인정과 칭찬을 구하겠지만, 사람의 말이나 사람의 인정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고 종국에 나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허영은 이와 같이 헛된 것일 뿐인데, 여기에 더하여 이 ‘허영’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칩니다. 허영심 있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3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처한 상황과 내가 겪는 문제에서 역사 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셔야 그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은 모두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연단하셔서 변화된 사람들 역시 모두 겸손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덕목이며 겸손은 성령께서 주시는 변화된 내면의 열매입니다. 아브라함이 겸손하였고 이삭이 겸손하였고 변화된 야곱이 겸손하였고 모세가 겸손하였고 다윗이 겸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때 겸손한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어야 진정한 겸손인데 이 겸손은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자신처럼 경외심이 없을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긴다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영적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위대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큰 은혜 받을 수도 있고 더 큰 일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자신을 낮춥니다. 마치 자신은 무엇을 잘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은 절대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얕잡아 보는 말을 한 적 없다고 항변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 상대방을 깔보는 말, 상대방의 자존심에 상처주는 말은 직접적인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말은 말을 하는 기본 전제를 추론할 수 있게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나요?” 이런 말을 할 때, 말을 잘 해야 합니다. 놀랍다는 경탄의 의미를 줄 수도 있지만, ‘(네 수준 낮은 것 다 아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나?’ 말의 기본 전제가 멸시를 품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비언어적 언어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의 내용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 분은 말할 때 입가의 미소나 눈빛이 상대방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나는 남을 무시하는 말을 한 적 없다고 하겠지만, 상대방은 무시당했다고 여기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람을 보는 관점, 마음의 인간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형제에 대하여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산 귀한 영혼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저 사람에게 역사하시면 놀라운 기적과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한 사람이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사례는 허다하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로 산 귀한 영혼이며, 앞으로 성령이 저 사람에게 역사하시면 나보다 더 위대하고 큰 일 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형제를 대하고 학생들을 대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조금 알아보면 정작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성도는 먼저 자기가 해야 할 일, 자기를 위한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해내야 합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에 참견하고 나서고 가르치고자 하면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열매도 없이 본을 보이는 것도 없이 왜 남의 일과 남의 말에 몰두하는가?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성실하게 자기 일을 먼저 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일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데 여기서 ‘다른 사람의 일’이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살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것조차도 내 관점, 내 방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는 방식과 시기와 내용까지 그 사람 편에서 이해하고 그 사람 중심으로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도 유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상의 권면들은 큰 유익을 주고 예수님의 교회를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렵습니다. 문제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해법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는 결심과 노력으로 못하는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잘 안 됩니다.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겸손해지는 것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안 됩니다. 이기적인 야심을 버리는 것이 안 되며, 헛된 자랑을 버리는 것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내면에 가질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배운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품는다면 우리도 오만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맺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마음은 높은 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뜻은 높은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높은 곳에 마음 두지 않으신 것을 배워서 우리도 마음을 높은 곳에 두려는 것을 먼저 자제하고 버리고자 내적 투쟁을 하여야 합니다. 전요한 박사님은 수양회 하면 학생들과 같이 줄을 서고 누구와도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예전 충청도에서는 따로 상을 봐서 차려 드리고 리더들끼리만 식사를 하였습니다. 행사를 하면 단상에 누가 올라가 앉는가? 예민하고 왜 나는 저 단상에 올라오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것을 따졌습니다. 마음을 높은 곳에 두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성전 높은 곳, 가장 높은 곳에 데리고 올라가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7,8 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마음만 낮은 곳에 두신 것이 아니라 낮아지심을 행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낮아지심을 행하셨냐 하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낮아지심을 목숨을 다하여 행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고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모욕받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짐을 행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실행하였습니다. 생명을 다하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음을 낮은 데 두시고 그 지극한 겸손의 마음을 따라 낮아짐을 죽기까지 행하셨을 때 어떻게 되셨는지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9~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낮은 곳에 마음을 두시고 가장 낮은 곳에 임하사 겸손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자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낮은 데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은 낮아지는 것으로 끝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하다가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거나 무시하면 그대로 비천하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낮게 평가하면 그것이 내 존재에 대한 진짜 평가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지적하는 말을 참고 듣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라 겸손한 자리에 마음을 두고 겸손을 행하는 사람을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높여 주십니다. 이러한 겸손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마음을 낮은 데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낮아질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더 높여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주 하나님을 높여 드릴까?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수치와 모욕과 불명예와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여 실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크게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겸손의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높여 주십니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다가 결국에는 낮아지는 길을 가는 것이 낫겠습니까? 예수님처럼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겸손을 실천하여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길을 가는 것이 낫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선택의 열매를 먹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아산 UB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