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
2024년을 시작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루시조’를 통해 안부를 나누었거늘, 새 꼭지 이름을 ‘흠흠시조’라고 붙여 작업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지난해에는 옛시조 중 무명씨 작품을 돌아보았건만, 올해부터는 이름이 있는 ‘유명씨(有名氏)’로 바꿔 먼저 여류(女流)에 주목합니다. 매일 쉼 없이 작업하기는 버거워서 ‘되는 대로’ 올리렵니다. 애정(愛情)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도움말 또한 주시리라 믿습니다.
‘흠흠’은 순우리말 어휘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으려는 의성어이기도 하고, 감탄사 ‘흠’의 겹침 강조의 뜻이기도 합니다. 시조를 뜯어보기 하면서 감상해 보자는 의도를 담았습니다.
흠흠시조 001
가마귀 싸우는 골에
영천이씨(永川李氏) 지음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올셔라
청강(淸江)에 잇것 시슨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가마귀 – 까마귀. 까마귓과의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몸은 대개 검은색이며, 번식기는 3~5월이다.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고 하여 ‘반포조(反哺鳥)’ 또는 ‘효조(孝鳥)’라고도 한다. 잡식성으로 갈까마귀, 떼까마귀, 잣까마귀 따위가 있다.
백로(白鷺) - 왜가릿과의 새 가운데 몸빛이 흰색인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부리 · 목 · 다리는 길고, 두루미와 비슷하나 다소 작다. 보통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무논, 호수, 해안 등지에서 물고기, 개구리, 수생 곤충 따위를 잡아먹고 산다.
새올셔라 – 시기(猜忌)하나니. 샘을 내어 미워하나니.
청강(淸江) - 맑은 물이 흐르는 강.
잇것 – 기껏. 힘이나 정도가 미치는 데까지.
시슨 – 씻은.
더러일까 – 더럽힐까.
지은이는 여말(麗末)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어머니입니다.
조선(朝鮮)의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로 대표되는 고려 충신들과의 대립은 목숨을 건 치열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 시조는 포은 정몽주의 모친이 지었습니다.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피살된 포은. 당일 집을 나서는 아들을 향해 어미로서 걱정과 만류의 심정을 담아 불렀던 노래입니다.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옛 한글로 적힌, 특히 여류 시조로 귀한 유산입니다.
용인땅에 묻힌 포은 묘역에 부모의 묘소도 같이 조성되어 있고, 이 작품도 시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흠흠시조 002
반갑다 밝은 저 달
일타홍(一朶紅) 지음
반갑다 밝은 저 달 이 밤도 뜨는구나
저 달은 고금(古今) 일을 낱낱이 다 알으리
이 밤엔 누구누구가 울고 웃고 하는가
고금(古今) - 옛날과 지금. 고왕금래(古往今來).
일타홍(一朶紅) - 조선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때 기생(妓生). 금산(錦山)에서 태어남.
작가가 여성입니다. 이름자를 풀면, ‘한 가지의 붉음’인데,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쭉쭉 늘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흥취를 일게 하는 상태가 연상됩니다. 유명(有名)이긴 해도 무명(無名)에 가까운 기녀의 이름입니다.
선조 때는 일본과의 칠년 전쟁을 겪은 시기이니 기녀들에게도 국난을 견뎌야 하는 시련기였을 것입니다. 금산은 지금은 충남(忠南)에 속하지만 처음에는 전북(全北)에 속했었습니다. 인삼(人蔘)으로 유명해졌죠. 아무튼 지금도 한적한 시골입니다.
달을 끌어와 전지전능(全知全能)의 능력을 추어 궁금한 것을 묻고 있습니다. 초장에서는 오늘밤에도 떠오르니 우선 반갑다 칭송하고, 중장에서는 동서고금의 내력을 알 것이라 추켜세운 뒤, 종장에서는 오늘밤에 누구는 울고 누구는 우느냐며 자신의 처지와 견줍니다. 자신은 아마 우는 쪽이 아닐까요. 웃는 쪽이었다면 이런 우문(愚問)은 아니 할 터이니까요.
방철환
一朶紅은 우리식 해석으로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양인가본데, 중국 백화로는 한 송이 붉은 꽃입니다 ~
전자의 해석은 농염한 여성의 이미지고 후자는 丹心을 지닌 청초한 이미지로 느껴지네요 개인적 감상입니다 ㅎ
흠흠시조 003
오지 말라 하면
문향(文香) 지음
오지 말라 하면 실커니 아니 말랴
하늘 아래 너 뿐이면 아마 내야 하려니와
하늘이 다 삼겼으니 날 괼 인들 업스랴
작가는 기생입니다. 성천(成川)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이름이 참 문학적(文學的)입니다. 문향(文香)을 글자로만 풀면 ‘글의 향기’라 할 것이니, 현대 작가들의 문예지(文藝誌) 이름으로도 손색이 없겠네요. 기생을 미화해서 ‘해어화(解語花)’라 했다는데, 그 꽃에 향기까지 엄연했다는 뜻으로 풀어봅니다.
초장이 다분히 여성스럽습니다. ‘오지 말라’ 하면 싫다는데 어찌 굳이 가겠습니까. 이리 전제하고 중장으로 이어집니다. 세상 천지에 당신 뿐이라면야 아마 ‘나다’고 뽐내려니와. 중장의 감고 도는 말투에는 다분히 기생으로서의 직업적 판단이 드러납니다. 종장에서는 세칭 갑(甲)을 이겨내는 ‘여유만만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대가 날 싫다고 해도, 이 세상 천지에 어디 날 사랑해줄 이 없겠습니까.
재차 삼차 읽어보노라니 어딘지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마주하고 보는 그대와의 시공(時空)을 세상천지로 넓혀 어렵사리 자존(自尊)을 지켜내고 있군요.
흠흠시조 004
압못셰 든 고기들아
궁녀(宮女) 지음
압못셰 든 고기들아 네 와 든다 뉘 너를 몰아다 넣었느냐
북해청소(北海淸沼)어듸 두고 이 못새 와 들었느냐
들고도 못 나는 정(情)이야 네오 내오 다르랴
압못셰 – 앞 못에.
네 와 든다 – 니가 스스로 와서 들었느냐.
북해청소(北海淸沼) - 북녘 바다 맑은 못.
어듸 – 어디.
네오 내오 – 너와 나와. 너나 나나. 너랑 나랑.
작가가 궁녀(宮女)입니다. 특정인이 아니라 범칭(汎稱) 보통명사입니다. 무명씨(無名氏)인 셈입니다. 궁녀는 궁궐 안에서 왕과 왕비를 가까이 모시는 내명부(內命婦)를 통틀어 이르던 말. 엄한 규칙이 있어 환관(宦官) 이외의 남자와 절대로 접촉하지 못하며, 평생을 수절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갇힌 신세에 대한 하소연을 앞 못에 든 고기를 불러와 한탄합니다. 초장은 스스로 왔느냐 누가 몰아다 넣었느냐 묻고 나서, 중장에서는 세상천지 너른 데 하필 이 못으로 왔느냐 재차 묻습니다. 종장에서는 앞에서 물은 바 답이 있건 없건 내 신세가 곧 너와 같다고 감정이입(感情移入) 상태로 탄식하며 맺습니다.
흠흠시조 005
그리고 못 불 제는
무명씨여(無名氏女) 지음
그리고 못 불 제는 일단상사(一但相思) 뿐일러니
잠간(暫間) 보고 여읜 정(情)은 맷치거다 구곡간장(九曲肝腸)
저 님아 내 한 말 잊지 말고 변개(變改) 없이 하여라
불 – 볼.
제 – 때.
일단상사(一但相思) - 오작 하나 서로 그리는 일.
여읜 – 헤어진.
맷치거다 – 맺혔구나.
구곡간장(九曲肝腸) - ‘굽이굽이 서린 창자’라는 뜻으로, 깊은 마음속 또는 시름이 쌓인 마음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변개(變改) - 변경(變更). 변심(變心).
지은이가 ‘무명씨여’로군요. 그런데도 ‘실명(失名)’이 아닌지라 ‘유명씨(有名氏)’ 작품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굳이 여(女)라 칭한 점은 가전에 ‘평양(平壤)인 무명씨여인’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기생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서로 못 볼 때는 일단 그리움뿐이었더니, 잠시 잠간 보고나니 더욱 미쳐버리겠노라 격해지더니, 종장에서는 다시 서로 변치 말자고 강다짐을 합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작품 속 두 사람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