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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브대중2409철1권00입문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입문, Introduction. pp. 1-33
입문 – Introduction 1-33
종종 철학의 역사는 생생한 사유에 장애물만, 즉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데 침체와 거북함만이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에머슨(Emerson, 1803-1882)이 자연에게 말하게 한다: “과거를 믿지 말라. 나는 너에게 새로운 세계 그리고 항상 결코 맞이하지 않았던 세계를 제공한다. 너는 여가의 매 순간들 마다, 사상을 끝까지 이용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미래만큼이나 너의 미래를 너에게 부과하기 위하여, 너의 뒤에 충분한 역사, 문학, 과학이 있다고 몽상한다. 밝은 날들마다, 너는 아직 한 줄의 글도 없다는 것을 볼 것이다.”정복하는 선구자의 말투[말씀]인데, 이 말투는 마치 미래의 자유에 반대하는 과거의 둔탁한 복수처럼 걱정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의미에서, 저작물들의 기초위에 철학의 건축물을 다시 세우면서,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가 과거의 힘들에 반대하여 옹호했던 것은 정신의 자유였다. (1)
진실로 과거를 싫어할 너무나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그때는 마치 유일한 지속이 어떤 권리를 창조하기나 하는 것처럼, 과거가 현재 속에서 연속되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영원하다고 주장할 때이다. 그러나 역사는 정확히 과거를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 학문이 과거를 더욱 침투함에 따라, 학문은 역사의 찰나들 중의 각 찰나에서 전대(前代)에 없었던 독창성만을 본다. 그리고 이 학문은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족쇄가 되기는커녕, 역사는 다른 학문에서와 마찬가지 철학에서도 진실한 해방자이다. 인간 정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서, 오직 역사만이 편견들을 뿌리 뽑을 수 있고, 너무 과도한 판단들을 중지시킬 수 있다. (1)
그러나 철학적인 과거에 관한 하나의 관점의 일체라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들의 매우 거대한 복잡성 때문에 그 관점이 위험에 처하지 않는가? 또는 만일 그 관점이 선택하지 않고서 단지 무한정하게 다양한 사유들의 리듬에 따라가게 내버려 두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되거나, 또는 만일 선택했다면 그것은 피상적이 되거나,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실들을 분류함이 없이 과거를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분류는 몇 가지 요청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철학사를 기획한다는 생각 자체는 다음을 가정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적어도 임시적인 방식으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문제들을 제기했고 해결했다고 한다. (2)
1.철학의 기원들은 어떤 것이며, 그리고 철학의 경계선들은 어떤 것인가? 철학은 기원전 6세기경에 이오니아지방의 도시국가들에서 등장하였는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전384-322)에게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그리스 지방들에서든지 동방의 나라들에서든지, 이 철학이 보다 더 오랜 기원을 갖는가? 철학의 역사가들은 그리스에서 그리고 그리스-로마 기원의 문명국에서 발전을 따라가기에 만족할 수 있고 또 만족하기를 원하는가? 또는 그 역사가는 동방의 문명에까지 자기의 관점을 넓혀야 하는가?
2.둘째로 어떤 점에까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철학적 사유는, 지적인 다른 학문들의 사유와 구별된 역사를 대상으로 만들기[삼기] 위하여, 충분히 자치적인 발전을 하였는가? 철학적 사유가, 사람들이 철학적 학설들을 가지고 따로 탐구의 대상을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너무나 내밀하게 과학들, 예술, 종교, 정치적 삶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3.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철학의 규칙적인 진화또는 진보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또는 인간적 사유는 초기 등장에서부터 사유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모든 가능한 해결들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유는 이어서 무한정하게 반복되게 하는가? 또는 체계들이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방식으로 체계들 서로 간에 대체하는가? (2)
이 세 가지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엄밀한 해결책도 없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주장하는 모든 해결책들은 암묵적 요청들(des postulats)을 포함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들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만일 사람들이 철학사에 접근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가능한 유일한 방편은 우리가 인정한 해결 속에 포함된 요청들을 매우 명시적으로 분간해내는 것이다. (2) (57SMF)
I.
첫째 질문은, 기원들의 문제인데, 정확한 해결책 없이 남아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 더불어, 기원전 6세기에 탈레스를 최초 철학자로 만든 자들 이외에도, 이미 그리스에서는 헬레니즘 저너머로 이방인들(Barbares, 야만인들)에게까지 철학의 기원들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는 역사가들이 있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ène Laërce, 3세기경 활동)는 자신의 철학자들의 삶들과 사상들의 서문에서 우리에게, 페르샤인들과 이집트인들에게서 우화적으로 철학의 고대시대에 대해 말했다. 이리하여 이 고대시대로부터 두 가지 주제가 대치되었다. 철학은 그리스인들의 발명인가 또는 그리스 인들이 “이방인들(Barbares)”로부터 얻었던 유산인가? (3)
동방학 학자들은, 마치 그리스 철학의 요람인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이들과 접촉했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처럼, 이들이 앞선 헬레나 문명들을 우리에게 베일을 벗기는 정도에 따라서, 이 주제들의 둘째 주제에 근거를 제공한다. 모든 사물들은 물[수 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그리스의 첫 철학자인 탈레스로부터 알려진 주제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미 수세기 이전에 쓰여진 창조의 시(Poème de la création)의 앞부분과 사이에서 사유의 근친성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에 하늘이 이름지어지 않았을 때, 또한 아래에 땅이 이름을 전혀 갖지 못했을 때, 이들의 아버지인 원초적 앞수(Apsous)와 모두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요동치는 티아마트(Tiamat)로부터 물들(les eaux)은 하나로 뒤섞여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원문들로부터, 탈레스가 독창적 우주발생론의 발명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데 충분하다. 아마도 그가 간략하게 간추렸던 우주발생론적 이미지들은 기나긴 세기 이래로 현존했다. 우리는, 이오니아의 초기 생리학자들의(physiologiques) 철학은 아주 오래된 주제의 새로운 형식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수학들의 역사에 관하여 가장 최근의 탐구들은 유사한 결론으로 이끌었다. 1910년이래로 밀오(Milhaud, 1858-1918)는 이렇게 썼다. “동방인들과 이집트인들에 의해 수학적으로 축적된 재료들이, 10여년 전만해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한 것을 여전히 의심했던 것보다, 결정적으로 보다 더 중요하고 보다 더 풍부하다.” (3)
결국 열등한[토착적] 사회들에 관한 인류학자들의 작업들은,철학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새로운 자료들을 도입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 속에서, 초기적[토착적] 심정성(la mentalité) 속에서 그것들과 유비만을 갖는 지적인 특징들을 발견한다. 초기 철학자들이 사용한 용어들은, 즉 운명, 정의, 영혼, 신 등의 용어들은 그들이 창조해낸 용어들도 아니고, 그 자체들로서 정교화 된 용어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민중적 관념들이며, 그들이 발현했던 집단적 표상작용들이다. 이것들은 아마도 그들에게 외부 자연을 생각하기 위하여 도식들 또는 범주들로 쓰이는 용어들일 것이다. 이오니아의 생리학자들은 자연의 질서로부터 스스로를 만든다는 생각은, 마치 최고 존엄한 숙명이 그들의 한계에 부과하는 존재들의 또는 힘들의 규칙적인 묶음(덩어리)처럼 여기는 그 생각은, 외부 세계 속에 사회적 질서의 이전하는데 기인한다. 철학은, 아마도 그 기원에서, 일종의 사회적인 거대한 은유일 뿐일 것이다. “모든 것은 수(數)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퓌타고라스학자들의 수적 상징주의만큼이나 낯선 사실들이, 최근에 독일철학자가 원시인들(토착인들)의 “구조적 형태론의 사유”라고 불렀던 사유의 형식에 의해, 그리고 그 독일 철학자[카시러]가 원인성의 원리 위에 근거한 기능적[함수적] 사유와 대립했던 사유의 형식에 의해, 설명되었다. 마치 북아메리카 인디언 주니스족(Zunis)의 원주민은 그들의 씨족을 일곱 부분으로, 마을을 일곱 부분으로, 또한 세계를, 요소들을, 시간을 일곱 부분으로 상응[대응]하게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퓌타고라스파학자들 또는 심지어 티마이오스편에서 플라톤(Platon, 전427-347)도 연속적으로 동일한 질서의 수적 상응성[대응성]들을 발명했다. 행성들의 간격들과 음악의 음계 사이에서 티마이오스편에서 주장된 유사성은 우리에게는 완전히 자의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논리학은 참여(la participation)의 논리만큼이나 우리에게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회피하게 하는데, 이런 참여의 논리는 레비-브륄(Lévy-Bruhl, 1857-1939)에 의해 원시적 심정성(la mentalité)에 관한 그의 작업들 속에서 연구되었다. (4)
만일 사정이 이러하다면, 그리스 인들의 초기 철학적 체계들은 전혀 원시적이지 않을 것 같다. 그 체계들은 보다 더 오래된 사유로부터 정교하게 된 형식일 뿐일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진실한 기원을, 적어도 사유의 국면들 중의 한 국면을, 찾아야 했던 것은 틀림없이 심정성 안에서이다. 꽁트(Comte, 1798-1857)는, 그가 물신주의(le fétichisme)이라 불렀던 것에서 우주의 철학적 표상작용의 뿌리를 보았다는 점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민속 이야기와 문명화되지 않는 인민들에 관한 연구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원시인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보다 실증적인 인식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의 진화된 형이상학 속에서 그들로부터 존속하는 모든 것을 더 잘 예감한다. (4)
이처럼 그리스의 초기 “철학자들이 진실로 [철학을] 발명하였다고 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들은 복잡성과 풍부성에 대해 또한 뒤섞임의 표상작업들에 관해 작업했다. 이런 표상작업들로부터 우리는 어렵게 우리에게 맞는 하나의 관념을 만들 수 있다. 그들은 발명하기보다 얽힌 타래를 풀고 선택해야 했고, 또는 오히려 발명은 분간작업 그 자체 속에 있었다. 만일 그들이 무엇을 간직했었는지 알면서도 무엇을 거부했는지를 사람들이 알았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이들을 더 잘 이해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가끔 억제되었던 표상작용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밑에 깔려 숨겨진 원시적 사유는, 그 속에 원시적 사유가 포함되어 있는 둑들(장벽들)을 전복하기 위하여, 가끔 성공했던 연속적인 노력을 한다. (5)
이런 주목할 만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탈레스로부터 우리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한다면,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기나긴 이전 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실천적 이유에서이다.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들의 금석학적 기록물들은 숫적으로 매우 적고 또한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왜냐하면 야생적[원시적] 인민[부족]들에 관한 기록물이 원시 그리스가 무엇인지에 관해 정보들(les indications)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
철학사의 경계선들에 관한 문제는, 기원들에 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기원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 시대에 극동[중동]의 나라에서, 특히 인도에서 철학적 체계들의 진실한 개화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리스-로마의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 극동[중동]의 세계가 서로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지적인 발전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경우에, 서구 철학의 어떤[한] 진술 속에서 극동[중동]의 철학을 추상화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그처럼 말끔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한편] 고대에서,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아랍의 침공들에까지[콘스탄티노플 함락] 그리스-로마의 세계와 극동[중동] 세계 사이에 있었던 손쉬운 상업적 관계들이 지적 관계들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정확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여행가들이자 철학자들이며, 이 시기에 인도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이런 문학의 파편들은, 특히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 적어도 인도 사상에 대하여 생생한 호기심을 증거하고 있다. 다른 한편 중세 초기에 이슬람[회교]의 나라에서 하나의 철학이 전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또는 네오플라톤학파의 그리스 사유가 그(이슬람) 철학의 본질적인 것을 분명하게 형성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이슬람의 철학은 인도 주변의 영향을 감당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아랍의 철학이 13세기이래로 16세기까지 크리스트교에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를 볼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거나 또는 간접적인 이런 영향의 정도들과 한계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그리스가 극동[중동]에 끼친 영향은 오늘날 예술 분야에서 증명되었고, 틀림없이 지적인 영역에서도 매우 강하였고, 인도가 헬레니즘에 거꾸로 끼친 영향 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인도 문학의 시기들에 대한 불확실함이 주어지면서, 그리스 사유와 인도 사유의 유사성들은 둘 중의 어느 것으로부터 영향이 왔는지를 증거 할 수 없다. 힌두교도들이 그들의 관념들의 진술에서 체계적이고 질서 있는 성격[특성]을 부여했던 것은 단지 그리스 영향 하에서 인 것 같다. 그리스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들의 지적 습관들은 우리에게 그[체계적이고 질서있는] 특성을 마치 철학의 용어 자체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7)
이런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철학사는 극동[중동]의 사상을 무시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동방의 영향들에게 부여했던 정보들 이외에도, 그 영향들이 서방에서 드러났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도 사상에 관해 알려진 한 전문가이며 동시에 철학자인 마송-우르셀(Masson-Oursel, 1882-1956)에게, 이 철학사를 중동과 극동에서 철학의 발전에 대한 진술을 통해서 완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6) (57SMG)
II
우리의 둘째 문제는 다른 지적 학문들의 역사에 비추어서 철학사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이 마치 종교, 과학,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물 자체인 것처럼 다루어져서, 마치 철학의 연관들의 문제를 단호하게 해결할 것처럼, 독단적으로이 문제를 제시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제시하고 해결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해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철학의 역사가 충실하기를 원한다면, 그 철학사는, 저자들의 의도들로부터 그리고 저자들이 태어난 도덕적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분리된 관념들과 체계들로부터 추상된 역사일 수 없다. 여러 다른 시기에, 사람들이 시대의 지적체제라 부를 수 있었던 점에서, 철학이 매우 다른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는 철학자들을, 특히 과학자들이라는 철학자들을 만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와 다른 철학자들이 있는데, 오귀스트 꽁트(1798-1857)같은 사회 개혁가들이 있고,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처럼 도덕적 스승들도 있고, 퀴니코스학자처럼 설교자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마치 어떤 데카르트와 어떤 칸트처럼 고독한 성찰가들[명상가들]과 사변적 사유의 전문가들이 있고, 마치 볼테르처럼 직접적인 실천적 영향을 목표로 하는 인물들도 있다. 개인적 성찰은 때로는 자신에 관한 단순한 반성이며, 때로는 황홀경에 닿아있다. (7)
이들이 매우 다른 것은 그들의 개인적 기질 때문만은 아니다. 각 시대에 사회가 철학자로부터 요구하는 그 ‘뭣’ 때문에 다르다. 의식[양심]의 지도자를 탐색하던 귀족적 로마인, 파리 대학의 철학적 교육에서 크리스트교를 굳건하게 하려는 수단을 찾은 13세기의 교황들, 과거의 권력의 억압에 종말을 고하고자 원했던 백과전서파 학자들, 이들은 철학에게 매우 다른 사태들을 요구했다. 철학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임무적, 비판적, 학설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7)
사람들이 나중에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것들은 우발적인 것들이다. 사회가 철학으로 ‘무엇’을 만들기를 원했는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여러 의도들 가운데, 철학을 이용하려는 자들로부터 남겨진 것이 ‘뭣’이냐는 것이다. 이들의 분화들이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추론적 사유가 있는 거기에, 다시 말하면 이법들에 의해 정당화되기 위하여 스스로 비판하고 노력할 수 있는 사유가 있는 거기에, 철학이 있다. 사람들이 [가치를] 사유할 수 있다면, 추론적 가치에 대한 열망은, 학설들의 추상적 역사를, 칸트가 말한 것처럼, 학설들의 관념을 묘사했던 이런 “순수 이성의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충분히 특성 있고 영속적인 특징이 아니겠는가?이 특징은 철학을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또한 철학을 실증 과학들로부터 구별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증 과학들의 역사는 [기예]기술들의 역사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역사로부터 실증과학들이 나오고 또한 실증과학들이 기술들을 완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물[사태]들에 대한 행동 규칙이 없는 과학적 법칙은 없다. 철학은 다른 선입견 없이, 이해하기 위한 순수 사변이며 순수 노력이다. (8)
이런 해결책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데, 만일 그 해결책이, 철학사로부터 모든 학설들을 제거하는 것을 직접적인 귀결로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학설들은 믿음[신념]에게, 지적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직관에게, 감정에게, 몫을 맡기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당대에] 지배적인 학설들이다. 따라서 이 해결책은 철학에 관하여 고정된[당대에 멈춰진] 견해를, 즉 철학사의 정확한 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견해를 포함하고 있다. 이 학설을 이끌었던 관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리고 학설을 인도한 감정과 의도로부터 따로 떼어내는 것, [또한] 학설을 마치 증거 해야 할 정리(théorème, 定理)처럼 고려하는 것, 이것은[이것들은] 살아있고 기호화하는[의미있는] 사유를 죽은 사유로 대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용어가 일체의 한 국면인데, 그 일체와 연관해서만 철학적 용어를 이해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Socrate, 전469-399)에게서 자기의 인식은 변증법적 검토를 의미하며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견해들의 시금석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에게서 자기의 인식은, 우리가 우리 속에서 발견하는 삼신성(Trinité)의 이미지에 의해 신의 인식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자기의 인식은 마치 확실성에 대한 도제 수업과 같다. 인도의 우파니사드 경전들에서 자기의 인식은 자아와 보편적 원리와 동일성에 대한 인식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용어[자기인식, γνῶθι σεαυτόν]를 이용함에서 목적들과는 독립적으로, 이 용어를 어떻게 파악하며, 용어에게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 (8)
사람들이 체계들의 추상적 역사의 관념에 대립할 수 있는 가장 큰 난점들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학설들의 수준에서 이동(le déplacement, 전환)이라 부를 수 있는 사실이다. 그 중에 하나의 돌출적인 예를 삼기 위하여, 우리는 이법(la raison)과 신앙(la foi)의 영역들의 한계들에 관하여 여러 세기 동안에 연속되었던 뜨거운 논쟁들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마치 계시된 신앙처럼 어떤 찰나에 주어진 많은 학설들을, 그리고 마치 이법의 이론들처럼 다른 찰나들에서 고려된 학설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소위 말하는 초기 중세에서 철학의 건조함과 빈약함은 정신적 삶의 보물들에 의해 보상되었다. 이 보물들은 이방종교의 철학으로부터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와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학적 저술들로 이행되었다. 데카르트(1596-1650)에게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주장은 합리적으로 증거[증명] 되었고, 로크(Locke, 1632-1704)에게서는 신앙의 진리였다. 그 종교적 용어를 데카르트주의로부터 영감 받는 용어들에 의해 해석하면서,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가 영원한 삶의 종교적 용어에 [진리의] 치환(la transposition)을 감내해야 했던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는가! 사람들이 쉽게 다수화할 수 있었을 사실들로부터, 다음의 같은 결과가 나온다: 즉 사람들은, 철학이 주장하는 학설들을 지적하면서도, 철학을 충분하게 성격규정하지 못했다. 철학이 어떤 정신 속에서 학설들을 지지하며, 철학이 어떤 심정적 체제에 속하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9)
말하자면 철학은, 과학들에 의해, 종교, 예술, 도덕 또는 사회적 삶에 의해 표현되는 정신적 삶의 나머지로부터 분할될 수 있었으리라. 철학은 그것의 시대에 가치들을 시인하기 위하여, 비판하기 위하여, 변형하기 위하여,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고려한다. 가치들을 위계적으로 정돈하기 위한 노력이 없는 곳에는 철학이 없다. (9)
따라서 철학의 역사가에게 항구적인 고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 정치 역사와 정신의 모든 학문들의 역사와 접촉 속에 있는 것이다. 비록 철학이 마치 다른 학문들과 떨어져 있는 기술(technique)로서 따로 홀로 있고 싶어 할지라도 말이다. (9)
오로지 정신적인 다른 학문들과 연관들은 전혀 획일적이지도 불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시대들에 따라 그리고 사상가들에 따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들에게 제시한다. 철학적 사변[통감]은 때로는 종교적 삶과, 때로는 실증적 과학들과, 때로는 정치학와 도덕론과, 가끔은 예술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이 학문들 중에 하나 학문의 역할이 지배하는 찰나들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문들은 거의 지워져 있다. 이리하여 고대 고전시대의 과정에서 우리는 대체로 과학들의 역할이 점진적으로 축소되고, 종교의 역할이 증가하는 과정에 있었다. 반면에 플라톤의 시대에서 수학들의 진화는 역사가들에게 아주 특별한 흥밋거리였다. 플로티노스 시대에, 사람들이 긴장(l’attention, 주의)이라고 불러야만 할 구원의 동방 종교의 침입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철학에 끼친 크리스트교의 고유한 영향의 문제를, 또한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제기해야만 할 것은 이 찰나에서이다. 현[실의] 시대는, 철학의 주변에서, 과거에 관한 이런 성찰이 완전히 무용하지 않을 만큼이나 충분히 매서운 영향을 입은 투쟁을 본다. (10)
III.
철학 역사가가 명백하게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 셋째 문제가 있다. 철학은 발전의 법칙인가, 또는 체계들의 계속은 우연적(contingente)이며 개인적 기질들의 아자르(hasard, 요행)에 의존하는가? 이 물음은 모든 물음들 중에서 중요한 물음이다. 철학의 역사에는 그 역사 뒤에, 그 역사를 무겁게 짓누르는 기나긴 과거가 있다. 철학의 역사에는 우리가 전념하는 관점에 관하여 특별한 전통들이 있다. 그 역사가 전통들에게 다소 간에 순응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이것들을 평가하기 위하여 적절하게 우리가 분간해 내고 원하는 것은 이런 전통들이다. (10)
철학의 발전의 일체와 통일성 속에서 철학사를 고려하는 생각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이런 생각은 18세기 말에서야 밝혀지기 시작한 “인간 정신의 진보”에 대한 학설들의 측면이다. 한편으로 오귀스트 꽁트의 실증철학이, 다른 한편으로 헤겔의 철학이 그 학설들 속에 마치 필연적인 요소처럼 인류의 철학의 진행들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 정신은 그의 고유한 역사를 분리하면서는 정의되지 않는다. (10)
그러한 것은 근대 시대의 여명기에서 철학사가 전혀 아니었다. 우리의 철학사는 진실로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다. 그때 사람들은 서양에서 고대 말기의 편찬자들을 발견한다. 즉, 편찬자들로서는, 저술들 중에 개론서로서 철학자들의 견해들(Sur les Opinions de Philosophes)을 쓴 플루타르코스(Ploutarkhos, 46-125),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190년경 활동), 스토바이오스(Stobaios, 400년대 중기 활동), 잡문집(Stromates)을 낸 알렉산드리아 출신 클레멘스(Clemens, 150경-215경),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들을 저술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os, 200년대 활동)가 있다. 특히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철학사의 고대 전 작품들의 부스러기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질서하게 모았다. 이 작가들에 의해서 고대의 다양한 분과[학파]들에 관하여, 학파의 스승들로부터 계승과 학파들 자체의 계승에 관하여, 중세 사유에서는 전적으로 회피되었던 전망들이 열려졌다. 초기의 역사들은 이런 편찬 작업들을 모방하였다. 이것들은 마치 철학자의 생애(1477)에 관한 부를레우스(Burleus, Walter Burley, 1275–1344)의 논집처럼 개론서들이었다. (11)
이로부터 철학사는 우선 고대철학에, 보다 정확하게 우리들의 시대의 초기에까지 가는 시기에, 우리가 명명했던 편찬자들이 일반적으로 멈추었던 시기까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후기 고대철학사는, 사실상 신플라톤주의의 많은 저술들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 덕분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고대는 이처럼 중세시대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연속성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런 분리작업이 고발될 정도였으며, [독일의 박식가인] 욘시우스(Jonsius, 1624-1659)는 철학사의 원천들을 수집하면서, 1649년에 한 짧은 장에서를 제외하고, 철학사에 관해 썼던 고대 작가들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철학 역사의 서술에 관해(1649)(4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중세의 철학사는 그 자체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교회법 학자인] 로느와(Launoy, 1603-1678)는 중세 학파들의 역사를 썼다. (11)
따라서 철학의 역사는 무엇보다 이 찰나에는 분파들의 역사이다. 베이컨(Bacon, 1561-1626)이 과학들을 묘사했던 계획들에서 그가 역사를 생각한 것은 이와 같다.분파들의 역사는 그에게서는 문학사의 한 부분, 즉 마지막 부분이다. 문학사는 그 일체에서 “학설들과 예술들”에 대해 기원, 진보들, 퇴행과 재탄생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베이컨이 말하기를 “거기에다가 사람들이 분파들을 그리고 학자들이 다루었던 가장 유명한 논쟁들을 덧보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작가들, 저작들, 학파들, 학파 수장들의 계승, 대학들, 학회들, 고등교육기관들, 수도원들을 나열한다는 것이다.” 철학에 대한 첫 일반역사를 쓴 저자인, 호르니우스(Hornius, 1620–1670)는 베이컨의 계획을 이어간다. 그는 [철학의] 기원들에서 18세기에까지 발전을 서술한다. 그는 베이컨에게 보내는 서문과, 이 작품의 완전한 제목이 이 책의 특성을 잘 지적 한다: 철학사 일곱 권: 철학의 기원, 계승, 분파들, 철학자의 생애 등을 다룬 기원에서부터 우리들 시대까지(1645)이다. 그에게 관심 있는 것, 그것은 학설들 내용의 정확한 분석과 인식이라기보다, 학설들의 열거와 그 연속에 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철학사에 비추어서, 교회의 역사가 교리들의 역사에 비추어 보는 입장을 가졌다. 그리고 이 찰나에 보아, 독단들의 역사가 현존하지 않듯이, 철학의 진실한 역사가 현존하지 않는다. (12)
르네상스시대에 인간들의 목표는 과거에 대해 정보를 조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정신을 살아있는 원천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연구한 분파에게 열중하였듯이, 사람들은 플라톤주의자가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플라톤주의의 역사가도 되지 못했다. 이렇게 플라톤주의자들, 스토아주의자들, 에피쿠로스주의자들, 아카데미학파학자들, 심지어는 선(先)소크라테스주의자들이 있었다. 역사는 이런 충격들로부터 가장 이득이 있는 것을 끌어낸다. 피치노(Ficino, 1433–1499)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알게 해주었다. 17세기기 전반부에, 립시우스(Lipsius, 1547-1606)는 스토아학자들에 관해 알려진 원문들의 일체를 주의깊게 연구하고 분류했다. 베리가르(Bérigard, 1578–1663)는 자신의 저술 피사누스의 원(Circulus Pisanus)에서 그리스의 초기 자연철학자들에 관해 주의를 불러일으킨다. 가상디(Gassendi, 1592-1655)는 에피쿠로스의 충실한 초상화를 그리고자 애썼다. (12)
소위 말해서 학설들의 역사를 탐구해야만 하는 것은 순수한 학문작업들 속에서라기보다 오히려 “분파자(sectaires, 분과학자들)”의 작업들 속에서 이다. 이 분파들 중의 하나는 우리가 다루었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아카데미아학자들의 분파와 퓌론주의자들의 분파이다. 회의주의의 전통적 논증들 중의 하나가 사실상 분파들의 다양성의 현존이다. 역사가의 중요한 근원들 중의 하나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거대한 개론서, 즉 독단론자들에 반대하여[전5권]이다. 이 책은 1562년에 앙리 에스띠엔(Estienne, 1528-1598)에 의해 부분적으로 편집되어 번역되었다. 엠피리쿠스는 여기에서 동일한 주제에 관한 견해에 대해 여러 변이[변종]들을 매우 길게 제시한다. 이 시대에 많은 아카데미학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들 중에 동일한 진행 절차를 실행하는 학자는 하나도 없었다. (12)
이리하여 르네상스의 모든 박학다식으로부터, 사람들은 하나의 결과만을 수집한다. 그것은 무한한 분파들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조각조각으로[파편화]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분파들 중의 하나를 선택하고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한 분파론자가 된다. 때로는 사람들은 한 분파로써 다른 분파를 파괴하고서, 회의주의자가 된다. 사람들은, 철학과 문헌학을 완전히 구별함으로써, 이런 숙명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17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작업이었다. 1645년부터 호르니우스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의 세기가 데카르트와 홉스(Hobbes, 1588-1679)와 더불어 철학자들의 세기이라는 것을 주목했다. 반면에 앞선 세기는 문헌학자들의 세기였다.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것은 한 분파를 회복하는 것도 더 이상 아니고, 옛 분파들 대신에 새로운 분파를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분파들의 견해들을 넘어서, 인간 정신의 자연 자체 속에서, 진실한 철학의 원천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13)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한편으로 철학의 역사는 분파들의 역사를 단순하고 순수하게 되도록 계속하여 갈 것이다. 그 철학사는 당대에 인간 정신의 오류들 또는 착오들을 나열하여 갈 것이다. 그리고 철학사는 귀찮고 성가신 박학다식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철학사는 자기의 전망들과 자기의 방법들을 심층적으로 변형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13)
철학의 역사가 마치 인간 정신의 요상한 것들의 박물관과 같다는 것, 그것은 17세기와 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의 공통주제이다. 과거에 관해 마음에 들지 않는 판단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과거가] 철학의 역사들에 의해서 합리주의자들에게 소개되었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또한 브룩커(Brucker, 1696-1770)의 위대한 작업에서, 18세기말까지 특히 백과전서파 학자들에게까지 가장 유용했던 그의 저술인 철학의 비판적 역사(1741-1744)[6권]가 있는데, 이 책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후로 수세기를 통하여 존속했던, 역사적 발전의 전통적 도식과 만나게 된다. 철학은 세계의 시초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최초의 철학자들이라고 말하면서, 거짓말 했다. 그들은 실재로 그들의 학설들을 모세에서, 이집트에서, 바빌론에서 빌려왔다. 따라서 철학의 첫 시기는 그리스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야만]의 시대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에 의해, 즉 브룩커까지도, “이방인[야만]의 철학”에 관한 장들을 긴 계열로 나열하면서 시작한다. 신적 기원을 갖는 철학은 유대인의 족장들에게로 전승되고, 그리고 이로부터 바빌론인들에게, 칼데아 현자들에게, 이집트인들에게,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인도인들에게, 심지어는 게르만인들에게도 전승되었다. 이어서 그리스인들은 점점 더 지워져갔던 전통들을 수집하였다. 전통들은 그리스인들에게서 무한한 분파들로 질적 쇠퇴를 가져왔다. 전통들은 한편으로 새로운 아카데미의의 회의주의에 도달했고, 다른 한편으로 크리스트교의 철학을 망가뜨리고자 애쓰는 신플라톤주의에 이르렀다. (14)
한 마디로 철학사는 인간 정신의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퇴폐의 역사이다. 이런 퇴폐의 증거는 기원적인 통일성을 대체했던 분파들의 수만큼 많다. 특히 그리스 사유는 출발점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개인적 환상이 자유로운 흐름에서 주어지면서, 그 흐름에서 환상은 동방의 전통들을 아직도 진리로서 간직했던 것을 단호하게 거의 파괴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철학의 옛 역사 속에서 그들이 보다 나중에 다루게 될 지위와 가치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 대한 이런 비판은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유래한다. 18세기의 거의 모든 철학자들, 특히 볼테르는 플라톤을 끊임없이 조롱하면서 옛 편견들에 충실하며 집착한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이 있다. 사람들은 근대 철학에 비추어서 동일한 예방조치들을 취한다. 그것은 꽁디약의 체계론들(1749)의 토대이다. 이 모든 철학적 체계들은 “상상작용”의 열매이다. “한 철학자는 쉽게 꿈꾼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체계들을 만들었는가? 사람들은 아제도[아직도] 얼마나 많이 [체계를] 만들 것인가? 만일 적어도 사람들이 체계들 중에서 하나의 체계를, 체계의 모든 찬성자들에 의해 거의 획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하나의 체계를 발견했던가! 그러나 사람들은 수천가지 다른 손길을 거치면서 수천 변화들을 겪은 체계들에 관하여 어떤 토대들을 이룩할 수 있었던가?” (14)
18세기에 그러한 것이 철학의 고유한 과거에 관한 철학적 판단의 도달점이었다. 이는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하는 역사의 개념작업과 철학의 새로운 개념작업 사이에 충돌의 결과이다. 그러나 17세기부터 그리고 동시적으로 반대되는 운동에 의하여, 역사의 개념작업과 사람들이 과거를 보는 각도(전망)는 변형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주제, 그것은 인간 정신의 통일성이 다양한 분파들을 통하여 볼 수 있게(visible) 그대로 남아있다는 생각이다. 17세기 초부터(1609), 고클레니우스(Goclenius, 1547-1628)는 그의 철학의 화해자(1609)에서, 각 주제에 관하여 분파들의 모순들을 분류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는 이율배반(안티노미)들이 겉보기(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이율배반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철학적 사유와 사유자체의 일치를 주장하는 이런 “통합주의(le syncrétisme)”는 호르니우스에 의해 철학사의 진실한 결과로서 고려되었다. (15)
분파들 사이에 차이들을 지우는 이 통합주의에게 절충주의(l‘éclectisme)가 연결되어 있다. 그 절충주의는 또한 모든 분파들 그 위에 있으나, 재통합하는 대신에 [분파들을] 선택하고 구별한다. 립시우스가 이미 말하기를, “한 분파가 있다. 그 분파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스스로를 등록할 수 있다. 그것은 절충한 분파이다. 즉 그 분파는 적용과 더불어 읽고, 판단과 더불어 선택한다. 이런 전체 파당의 외부에서, 이 분파는 쉽게 진리의 전파가 될 것이다.” 화해와 절충주의의 정신은, 17세기에 라이프니츠 같은 유명한 대표자가 있는데, 브룩커의 거대한 작품인 철학의 비판적 역사(1741-1767)[6권]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또한 그 정신에는 원천도 있는데, 그 원천에서 18세기의 후반부의 모든 작가들은 자신들의 인식을 철학사에서 길어 올렸다. 역사의 진실한 용도, 그것은 진실한 철학을 거짓 철학으로부터 구별하는 특성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일종의 인간 지성의 역사를 발전시켰고” 그리고 그 철학의 역사는, “지성의 권능이 어떤 것인지를,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어둠들에서 끌어내어 진리의 빛에 의해 밝혀졌는지를, 어떻게 그것이 많은 요행들[아자르들]과 시련들을 통하여 진리와 축복의 인식에 이르렀는지를, 어떤 우여곡절을 겪어서 그것이 마련되었는지를,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왕도로 이끌어졌는지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분파들의 역사는 우리가 분파들을 뛰어넘어서는 수단일 뿐이다. 브룩커의 절충주의는 백과전서 속에 침투하였다. 디드로는 그의 백과전서 속에 「절충주의」라는 한 항목에서, 절충주의자를 칭찬한다. “절충주의자는 감히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그가 사심 없이 치우치지 않고 분석했던 모든 철학들에 대해 사유하는 자이다. 그는 감히 이 철학들을 특별하게 가정적인 철학으로 스스로 만드는 자이다.” (15)
그러나 통합주의와 절충주의는 과거를 해석하는, 그리고 다양한 분파들을 지배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사람들은 또한 이런 다양성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연결과 역사적 연속성을 발견하고자 애쓴다. 브룩커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작품에서, 데랑드(Deslandes, 1689-1757)는 분파들의 역사에 대한 관념 자체에 대해 항의하였다. “고대와 근대의 철학자들의 다양한 체계를 따로 수집하는 것, 그들의 행위들의 세부사항 속에 들어가는 것, 그들의 작품의 정확한 분석들을 행하는 것, 그들의 문장들, 그들의 금언들, 심지어 그들의 착한 말들을 모으는 것,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서 철학의 역사가 덜 교훈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중요한 사유들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그것들의 무한한 진리를, 동시에 지각할 수 없는 연관을, 사유들 자체들 사이에서 갖는 미묘한 연결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이런 사유들이 어떤 것들 다음에 다른 것들을, 그리고 종종 어떤 것들과 다른 것들 서로서로를 생겨나게 하였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옛 철학자들의 견해들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말했던 것만을 그들이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16)
철학의 역사를 이 분파들의 부스러기와 구별하는 이 노력들은 자연적으로 진보의 이론가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에게서 철학을 분파들[분과들]로 분할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일시적인[지나가는] 상태이다. 철학은 이 상태로부터 조금씩 해방되어서, “증명된 진리들만을” 인정하고, 견해들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역사적 전망에서, 고대 그리스라는 나라는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그 인간 종[그리스인]은 자기 종 안에서 스스로 선도자임을 재인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선도자의 천재성은 인간 종에게 진리로 향한 모든 길들을 열어 놓았다.” (16)
헬레니즘은 더 이상 퇴폐로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등장으로서 생각되었다. 이리하여 철학사의 발전의 틀이 고정되었고, 이 틀에서 사람들은 서양철학을 순수하게 알게 되며, 서양철학은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사상가들과 더불어 시작하며, 그리고 소크라테스에서 철학의 전형을 발견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들에 의해 새로운 체계를 채택하는 것을, 그리고 인간들의 상상작용을 자기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에게 그들 각각의 자연 이법을 사용하도록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철학은 중세의 긴 잠식 이후에 데카르트와 더불어 충분히 실현되었다. 사람들은 데카르트로부터 소위 말하는 이방 종교적이고 동방적인 철학의 잡동사니와, 그리고 그리스인들에 반대하여 표절이라는 고발장들과, 끝장을 냈다. 거꾸로 인간 정신의 진보들의 도식이, 그[데카르트]의 바깥에, 남겨 두었던 모든 것을 바로 말해야만 한다. 그 도식은 18세기를 마감하는 시기에 매우 널리 퍼져있었고, 그리고 결국에서 우리 철학사들의 도식으로 남아있다. [남아있는] 그것은 크리스트교 전체와 동양학(l’Orient)[인도와 중국 포함]의 전체이다. (17)
따라서 18세기의 사상가들은 철학의 역사 속에 통일성과 연속성을 도입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19세기 초반부 전체에서 이미 그려 놓았던 것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보았다. 사람들은 현재에도 학설들을 그 자체로 이해하도록 허락하는, 그리고 학설들의 역사적 기호작용을 파악하게 허락하는, 내적 연결의 원리를 탐구한다. 사람들은 이런 경박함에 대해 항의 했다. 이런 가벼움 때문에 우리들의 관념이 아닌 관념들이 마치 부조리한 것처럼 거부되었다. 역사가들에 가장 부족한 것, 그것은 역사적 의미, 즉 과거로부터 나온 뉘앙스들의 미묘한 지각작용이다. 이것은 1791년에 역사 개념에 관한 한 논문(1791)에서 라인홀드(Reinhold, 1757-1823)가 매우 잘 지적한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근거(la raison, 이유)가 있는데, 그 근거 때문에, 철학사는 우리의 개론서들 속에서 인간들의 지혜의 역사라기보다, 오히려 마치 인간들의 광기의 역사처럼 보인다. 그런 근거 때문에, 고대의 가장 유명하고 종종 가장 칭찬받을 인간이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잘못 취급당하였다. 그 근거 때문에, 진리의 성소에서 가장 깊은 그들의 시선은 잘못 해석되었고, 마치 오류들 중에 가장 평면적인[평평한] 오류들처럼 이해되었다. - 그것은 사람들이 그 [중요한] 인간들의 관념들을 잘 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은 그 관념들을 이해하는데 당연히 잘못했음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그 관념들을 판단하면서, 사람들은 중요한 형이상학적 네 가지 분파들 중의 하나의 분파에 대해 이후의 원리들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또는 왜냐하면 사람들이 민중 철학의 방법들에 의해, 상식의 신탁들에 의해 가장 깊은 탐구들에 이르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17)
[독일 역사가인] 텐네만(Tennemann, 1761–1819)이 자신의 철학사 속에서 따라갔던 것은 라인홀트의 예정 계획(le programme)이다. 이 역사는 그에 따르면, 철학의 어떤 관념도 가정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는 단지 철학의 점진적인 형성의 회화[그림], 즉 자연의 법들과 자유의 법칙들에 대한 과학의 관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법(la raison)에 대한 노력들의 회화이다. (17)
그러나 내적 통일성의 원리는 그 자체 두 가지 방식으로 제시된다. 한편 마치 학설들의 분류작업의 원리처럼 제시된다. 그 분류작업은 가능한 모든 분파들을, 정신의 자연에 의존하면서, 작은 수의 전형들 속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고 뽐낸다. 다른 한편 마치 점진적 발전처럼 제시된다. 중요한 각 학설은 점진적 발전의 필연적인 찰나를 구성한다. (18)
첫째 관점은 제랑도(Gérando, 1772-1842)의 관점이다.그는 자신이 분파들의 역사의 옛 방법을, 마치 불모이고 동시에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 포기했다고 긍정적으로 선언했다. “여러 나라들과 여러 시대들에서 생산된 철학적 견해들이 그렇게 변화도 많고 수도 많아서, 가장 학문적이고 가장 충실한 수집품[잡문집]이 우리의 관념들 속에 혼동과 혼란을 선사할 뿐이고, 생산성 없는 박학다식의 중압감으로[무게 아래] 우리를 짓누르게 할 뿐인데, 만일 행복하게 준비되었던 접근 방식들이 관심를 유도하러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베이컨의 표현에 따르면, “서술하는 역사” 대신에 “귀납적이고 비교된 역사”로 대체해야 한다. 이[후자의] 역사는 우선 각 체계가 응답해야만 하는 원초적인 질문들 중에 매우 적은 수의 질문만을 규정하는데 있다. 이런 응답들[적은 수의 규정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 응답들 중에서 각각의 정신을 파악할 수 있고, 이 응답들을 자연적 계층들[분류들]로 모을 수 있다. 이런 분류작업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이것들[분류들]을 비교할 것이고, 이것들의 분화의 관점을 파악할 것이고, 결국에는 이것들의 각각을 마치 인간정신의 진행에서 이룩된 만큼의 경험들처럼 고려하면서, 최상의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할 것이다. 사실상, 제랑도에게 그의 분류작업의 토대를 부여하는 초보적 질문, 그것은 인간 인식의 자연(la nature)에 대한 질문이다. 체계들의 역사는 “경험 철학의 시론”이다. 이 시론은 인식의 기원의 문제에게 주어졌던 각각의 해결책의 가치를 시금석으로 제시한다. (18)
빅토르 꾸쟁의 방법은 제랑도의 방법에 더 많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은 식물들을 계통수(famille, 과科)에 의해 분류하는 식물학자의 방법과, 식물들을 인간 정신의 원시적 사실들에 결부시키는 생리학적 설명 사이에 일종의 중간이다. “1829년 강의의 시작에서, 철학사에 입장하면서 혼란스럽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나라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들에게 속하는 철학체계들의 굉장히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다르거나 비슷하거나 간에 이런 성격들은 마치 그것들 자체처럼 스스로 분간될 것이고, 그리고 무한히 많은 체계들을 모든 다른 체계들을 포함하는 충분히 적은 수의 체계들로 축소될 것이다.” 이런 분류작업 다음으로 설명이 나온다. 체계들의 이 거대한 계보들은 인간 정신으로부터 온다. 자, 이것이 왜 인간정신이 자연만큼이나 그 자신에도 항구적인지, 이 계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지 그 이유이다. 따라서 철학사는 결국에는 심리학에 귀착한다. 심리학은 건전한 철학전체의 출발점이며 “역사에게 심리학의 보다 확실한 빛을 제공한다.”따라서 사람들은 역사를 부정하면서 역사를 지배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지속 속에서 학설들의 발전을 학설들의 분류에 의해 대체하기 때문이다. (19)
철학사에서 통일성을 도입하게 해주는 둘째 관점은 체계들 사이에 역동적 연결의 관점이다. 이 체계들에서 각각의 체계는 마치 단일한 역사의 필연적 찰나처럼 나타난다. 여기서 철학사는 도덕과학과 사회과학을 탄생하게 했던 19세기 초기에 일반적 경향성들을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 역사가 특별한 종교의 성공을 향하여, 또는 제국의 성공을 향하여 방향 지워져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일반 철학사는 오히려 인류 전체를 이롭게 하는 집단적 문명을 향하여 진보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의 역사는 한 분파의 혜택에 맞게 방향잡혀져 있지 않다. 철학의 역사는 사람들이 직접 관찰에 의해 재인식할 수 있는 내재적인 법칙을 갖는다. (19)
“어떠한 과학도 그것의 고유한 역사 없이 이해될 수 없으며, 항상 인류의 일반사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지적 역사에 관하여 오귀스트 꽁트의 생각들보다 깔끔하게 압축하는 어떠한 논평도 없다. 그의 생각들은 현재를 과거와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과거의 단계들로부터 태어난 역동적 진보에서와 다르게 지성의 현재 단계를 고려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적 발전의 역사를 문명 일체의 역사로부터 따로 떼어놓은 것도 불가능하다. 실증주의는, “고대를 저주하는 카톨릭, 중세를 부인하는 프로테스탄트, 모든 계보학을 부정하는 이신론” 등을 부정하는 “인간적 연속성”을 주장한다. 꽁트의 사유는 우리가 보았던 18세기에 증가하는 일반적 운동에 결합되어 있다. 이런 운동은 철학사의 관념이 마치 불일치하는 분파들의 단순한 나열작업과 같다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역동적인 연속성”(p. 27)은, 인간적인 견해들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결코 없었다고 우리에게 믿게 하는 것을 금한다. 이런 견해들은, 또한 이 견해들을 변모시킨 동일한 충력 덕분에, 다시 말하면 객관적 질서로 우리의 판단들의 증가하는 종속관계로 향하게 하는 충력 덕분에 변모되었다. 현상들을 활성화하는 물신주의자의 “순수하게 주관적인 논리”(p.31)는 “오늘날 과학적인 최상의 방법들이 정상적인만큼이나 그 기원에서 정상적이다.” (20)
후퇴일 수 없는 연속적 진행에 대한 이런 통찰은 꽁트에게 전적으로 가치를 변형 하는 데로 이끌었다. 18세기의 역사들이 과거의 각 시대에게, 특히 그리스사유에게 그리고 중세의 사유에게 [이미] 그 가치를 부여했었다. 그는, “신학적 상태들 이면에 실증적 상태의, 소위 말하는 선행성(une antériorité)에 관한 몇몇 박식가들의, 비합리적 가설들에”(p. 73) 대항하여 형식적으로 항의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중세의 사유보다 앞선 그리스인들의 실증적 과학으로부터 아마도 반대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덧붙여서, 이런 가설들이 “최상의 박학다식에 의해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전복되었다”는 것이다. 중세를 특징지우는 신학과 형이상학의 통합, 즉 브룩커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의 눈에는, 그리고 백과전서파들의 눈에는, 그 통합이 추잡한 소란과 괴물같은 동맹이며,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대보다 중세의 우월성을 만든 것인데, 근대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다. 형이상학 없는 신학,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신론이다. 다신론은 “신학적인 진실한 상태만을 구성하는데, 그 상태에서 상상작용이 자유롭게 우세하다[우세한 가치를 펼친다]. 일신론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신학으로부터, 즉 추론에 의해 허구를 제한하는 신학으로부터, 항상 결과로서 나온다.” (20)
따라서 꽁트는 철학에 의해서 철학의 전문가들의 기술적인 체계들을 이해하기보다, 사회를 관통하여 확산된 심정적 상태를 이해한다. 심정적 상태는, 보다 좋다고는 할 수 없을 지라도, 철학자들의 체계들 속에서 만큼이나 법률적 제도들 속에서도, 문학작품들 또는 예술작품들 속에서도 또한 잘 표출되어 갈 것이다. 특히 지칭[지시]되는 철학적 체계는 사실상 특별한 명석함과 더불어 이런 정신 상태를 제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체계는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특징들을 집중시키기고, 그리고 이 특징들을 분명하게 밝히기 때문이다.그러나 체계는 상징과 징후의 자격으로만 연구되었을 뿐이다. 실증주의 정신으로 활기[생명]을 얻은 역사가들을 흥미 있게 한 것, 그것은 집단적 표상[재현]작용들이다. 그리고 개인적 관점들은, 만일 이 관점들이 집단의 반영인 경우에만, 그것들의 고려할 가치를 얻게 된다. 이로부터 방법의 변화가 나온다. 변화는,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기술적인 부분을 갖는다는 것을 작은 고민[염려]에 의해 표출된다. 또한 흥미 있게 한 것, 그것은 철학자의 기초적 정리들(théorèmes)이며, 정리들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그것들의 견해의 내용이다. 견해들의 각 체계는 한 시대와 관계를 맺고 있고, 이 관계로부터 그 체계 주장할 수 있다고 하는 유일한 정당화를 끌어낸다. (21)
오귀스트 꽁트에 앞서서, 헤겔은 체계들의 다양성이 정신의 통일성에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체계들을 변호하려는 동등한 고민을 가졌다. 그가 말하기를, “철학사는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철학들 속에서, 발전의 여러 정도들의 차이에서도 유일한 철학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한 한 체계가 지지받는 특별한 원리들이 유일하고 동일한 일체의 곁가지들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 최근에 도래한 철학은 앞서 나온, 그리고 이 모든 철학들의 원리를 포함해야만 하는, 모든 철학들의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서로 소통하는 분파주의도 없고, 이 체계들 전체를 되돌려 보내기 위하여 체계들의 분산을 이용할 회의주의도 없다. 분파주의와 회의주의는 여러 철학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역사는, 그 중에서 하나의 철학만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철학의 경멸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른[차이 있는] 철학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철학들의 각각은 하나의 철학(une philosophie)이지, 그 철학(la philosophie)이 아니다. - 마치 열매조차 없는 버찌들이 있는 것처럼.” 철학사는 제정신을 차리면서 “살아있는 유일한 정신”의 발전이다. 철학사는, 철학자체가 “외부적인 철학적 상황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사유의 요소 속에 순수 상태로 제시한 것을” 시간 속에서 진열하여 제시할 뿐이다. (21)
인간 정신의 통일성과 그 정신의 발전의 연속성, 그러한 것들은 “선천적인(a priori)” 확실성들이다. 이 확실성들은, 역사가에게 그의 탐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강제하면서,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도록 허용하는 유도선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런 주제가 가정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역사적 선천성[이란 용어]의 현존(l’existence)이다. 이 선천성은 정신의 자연 속에 있으며, 이것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 방법들에서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 철학사는 온정신(Esprit)의 표출들의 역사이다. 있는 그대로, 철학사는 우연들과 우발들로 혼잡해져 있다. 역사가는 이어지고 있는 체계들 사이에 변증법적 연결을 발견한다고 확신한다. (22)
헤겔과 꽁트와 더불어, 우리는 르네상스가 철학사에 남겼던 상황의 극단적 대립에 있다. 과거는 현재에 더 이상 대립되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를 조건지우며, 그리고 현재에 의해 정당화된다. 과거는 체계적이고 미리 생각한 계획의 통일성을 전개할 뿐이다. 우리시대에까지 철학의 모든 진화는 이 요청에 대한 토론에 근거한다. (22)
이런 이유에서 이 발전에 내재하는 원리의 인식은 역사적 관찰과 귀납의 결과가 아니다. 헤겔에서 철학의 통일성은 확정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요청이다. 이 요청은 법칙의 인식과 한편인 철학과 더불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역사는 선입견 없는 관점으로 나타나는가? “사람들이 철학의 역사가 제공하는 광경의 앞에 미리 두게 할 때, 일상적 판단을 하는 모든 인간은, 헤겔 철학의 소피스트주의가 원했을 법한 것과는 특이하게 다른 관념을 그 광경으로부터 단번에 일체적으로 형성하게 될 것이다.” 르누비에는 이런 견해를 정식화하면서, 결국에는 프랑스 절충주의를 넘어서, 18세기와 19세기는 이런 분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는데도 헤겔과 디드로를 넘어서 분파주의의 전통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분파주의는 인간 정신의 통일성에 대해 열정적인 욕망에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르누비에에 따르면 철학자들이 반대되는 분파들로 나누어진 것은, “빛들 시대[계몽기]”가 사라지게 만들 시대적 편견들의 결과로서 역사적 우발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정신의 통일성에 만족하는 정상적 현상이다. “서양에서 25세기이래로 가장 큰 대립현상들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지되었다. 아마도 실증적 인식들에 대한 논쟁과 진보는 몇 가지 의문들을 제거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일탈들을 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중에서 대부분은, 그리고 가장 위중한 것은 후퇴하게 했을 뿐이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되게 했을 뿐이다.” 인간 정신은 자연적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지배적인 논쟁은 자유의 학설과 결정론의 학설 사이에 있는 논쟁이다. 르누비에에 따르면 이런 논쟁에 모든 다른 학설들이 모여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이 모든 체계들을 분류할 수 있고, 체계들 각각을 두 학설들[자유론과 결정론]의 어느 하나에 속에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구속적[강제적] 근거[이유]들에 의해 설득할 수 있다고는 결코 예견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분파들의 현존이 설명되고 또한 정당화된다. 절충주의와 헤겔주의의 잘못은 분파들 속에서, 때로는 환상[환타지]의 임의적 생산을, 때로는 사유의 발전 속에서 필연적이지만 전적으로 임의적인 찰나를, 단지 보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23)
따라서 르누비에의 관점에서, 철학사는 모순적이고 항상 다시 태어나는 두 주제들 사이에서 비시간적 대화로 엉기어 굳어져 있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철학적으로 중요한 차이들은 없다. “용어학 상으로 변이들, 각 문제에서 생각되어질 수 있는 연관들의 다양성”이, 그리고 “실재적으로는 옛 견해들에게 새로운 표현들과 형식을 부여할 수 있게 하는 연관들의 다양성”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것들이 역사가 있는 그대로 남아있게 하는 유일한 재료이다. 그런데 거꾸로 역사가 영구적인 틀들이며, “학설들의 체계적인 분류작업”을 허용하는 틀들 자체이다. 그러나 이 틀들은 사유에 필수품들이지, 역사적 사실들은 아니다. 인간 정신에게 허락되어 남아있는 유일한 주도권은, 선 결정된 본질적인 것 속에 있는 체계들의 건설이 아니라(제랑도 또는 꾸쟁처럼), 가능한 두 방향들 중의 한 방향의 자유로운 채택이다. 독창성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어왔지만, 체계의 지적 발명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선 형성된 체계들에 견주어 결정하는 의지의 태도 속에 있다. (23)
르누비에의 관점은 이미 소위 말하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학설의 포기를 표시한다. 그의 시대 자체도, 또한 더하여 우리 시대도, 중대한 역사적 종합들에 대한 일종의 붕괴(désagrégation, 분해)의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 시대는 헤겔주의적 구축이거나 또는 실증주의적 구축이라고 하는 거대한 구축들에 대한 반감을 갖는다. 정신 상태의 외부적 기호들(signes)은, 철학사 속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역사의 일체라기보다, 오히려 마치 젤러(Zeller, 1814-1908)의 그리스인들의 철학(1844-1852)[3권]처럼 한 시대에 제한된 작업들이라는 것이다. 또는 마치 뒤앙(Duhem, 1861-1916)의 세계 체계, 플라톤에서 코페르니쿠스까지[10권]처럼 민족과 주제문제에 한정된 것도 있고, 또는 마치 딜스(Diels, 1848–1922)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단편들(1903)과 그리스 학설사(1879)처럼 문헌학적 수집들에 한정되기도 하고, 또는 마치 아믈랭(Hamelin, 1856-1907)의 데카르트의 체계(1911)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1920)처럼 개별연구들에 한정되기도 한다. 철학의 일반 역사는 그 자체로 종합적이라기보다 더 분석적 방법이다. 그리고 발전의 내재적 법칙을 발견하기보다 개별연구들 속에서 이용했던 작업들의 결과물들을 더 많이 수집하기를 목표로 삼는다. 이런 국면들 하에서, 르누비에의 역사에 대한 분석적 철학(1896-97)과 같은 것이 있다. 베버(Alfred Weber, 1835–1914)의 유럽 철학의 역사(1892)와 폴 쟈네(Paul Janet, 1823-1899)와 세아이유(Gabriel Séailles, 1852-1923)의 철학사: 문제들과 학파들(1887)과 같은 것들이 있고, 더하여 보다 분명하게는 위버베크(Ueberweg, 1826-1871)의 철학사 개요(1863-1866)[3권]도 있으며,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각 문제에 관한 독창적 작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4)
이런 새로운 입장의 원인들은 두 종류이다. 첫째는 거대한 문헌학적노역이다. 이 일거리는, 거의 1850년 이래로, 비판적 편집본들 덕분에, 원전들의 발견들 덕분에, 단편들의 수집 작품들 덕분에, 우리의 정보를 정확하게 하고 또 풍부하게 함과 동시에, 역사가들이 지난 시절에 대해 가졌다고 허풍을 떨었던 총체적 관점을 어렵게 하거나 또는 심지어 불가능하게 했다. 만일 사람들이 문헌학적 방법의 조건들을 생각했더라도, 사정은 당연히 마찬가지이다. 이방법의 관점에서, 결국 역사의 주기들은 주기들의 시초와 끝을 표시하는 실증적 사건들에 의해서라기보다, 사건들을 인식하게 하는 원천들의 자연[본성]과 상태에 의해서 구별된다. 사소한 한 예만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고대철학과 관계있는 우리의 원천들의 상태와, 중세 또는 근대 철학의 원천들의 상태 사이에 얼마나 다른지를 사람들에게 인식하게 한다. 전자에서는 철학의 드물게 독창적인 작품들이 있으며, 후자에서는 그 철학의 풍부함이 상상을 두렵게 할 정도이니 말이다. 원전에 대한 비판과 해석의 작업은 두 시대의 경우에서 다른 방법들을 따라야만 한다. 심지어 그 작업은, 사람들이 이 두 방법들을 동시에 소유한다고 허풍 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구별된 정신의 습관들을 함축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들 중에 훨씬 더 짧은 주기들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는 원본들의 조각들에 의해 알려져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와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 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총체적으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24)
다른 한편 문헌학자의 결론들은, 그가 한 사상을 해석하고자 할 때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좀 더 밀착하여 다루고자 할 때, 종종 잠정적이기도 하고, 그리고 새로운 발견 또는 새로운 접근에 좌우되기도 한다. 마치 플라톤주의처럼 옛 체계들의 해석들은, 또는 심지어 마치 데카르트 또는 칸트처럼 근대 학설들의 해석들은 수없이 많다. 어떻게 거기서 종합적 구축을 위하여 굳건한 지지점을 발견하는가? (25)
문헌학적 방법의 요구들에, 철학적 과거의 일체를 묘사할 야망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우회하기 위하여, 아마도 훨씬 더 규정적인 둘째 이유를 보태야 한다. 꽁트와 헤겔, 심지어는 르누비에는 철학에 전념하고 있지, 철학자들에 전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우주의 표상작용들을, 마치 이법의 자연 자체에 의해 부과된 영원한 틀들처럼, 또는 마치 집단적으로 그것들 자체적으로 진화하고 또한 사회와 더불어 변형되는 일종의 집단적인 표상작용들처럼, 고려한 것인데, 그들은 철학으로 하여금 어떤 비인격적(impersonnel) 사물을 만들고 있다.또는 적어도 한 철학자가 자기 시대의 사상들에 대해 부여하는 개인적 표현은 단지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본질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으며, 즉 개별적 의식들이 자연적으로 거기에 복종하는 일종의 신성(déité)과 같은 추론적 또는 사회적 진술(dictamen, 견해) 안에 있으며, - 말하자면 개별적 의식들이란 어떤 플라톤 또는 어떤 데카르트의 의식들이었을 것이다. (25)
그런데 철학사는 마치 역사 일반처럼 진화했다. 원천들의 탐구에 기여한 세심함은, 과거 속에서 개인적인, 환원할 수 없는 인격적인 것이 있다는 점에 도달하는 역사가의 의지 없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예전처럼 전형들 또는 법칙들을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역사가의 탐구들은 완전히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알려진 전형의 새로운 한 표본이, 만일 그 표본이 그 자체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구별하는 것 속에서 그것만의 값어치를 갖지 못했다면, 무엇에 소용 있겠는가? (25)
개인의 취향이 아마도 아직은 우리의 학문적 비평의 지배적인 특성이지만, 그 취향은 완전히 새로운 전망 하에서 우리에게 과거를 알게 해 준다. 그것은 마치 르네상스시대에서처럼 “분파들”도 더 이상 아니고, 꾸쟁에게서처럼 “체계들”도 아니고, 역사가가 도달하기를 목표로 삼는 “집단적 심정성들”도 아니다. 이것은 이들의 정신으로부터 풍기는 뉘앙스의 풍부함 전체에 있는 개별자들이다. 플라톤, 데카르트, 또는 빠스깔은 그들의 환경의 표현들도 역사적 찰나들도 아니고, 오히려 진실한 창조자들이다. 첫째 관점에 타격을 입힌 것은 이들의 노력들의 불연속성이다. 빈델반트(Windelband, 1848-1915)가 주목하였듯이, 어떠한 연속적 진보도 없다. “왜냐하면 거대한 체계들의 각각은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정식을 부여하고, 그리고 마치 다른 체계들이 현존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문제를 해결한다.” (26)
보태야 할 것이 있다. 이 두 이유들은, 즉 문헌학적 방법의 요구들과 개인의 탐구는 비록 역사적 종합에 서로 서로 대립된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은 정신을 동일한 의미(sens, 방향)로 인도하지 않는다. 문헌학자는 사유들과 정식들의 친근성을 찾는 경향을 갖는다. 이런 경향은 가끔 과장되어서, 만일 이 경향이 다양한 사유들의 취향과 방향들에 의해 완화되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한 학설을 가지고 과거의 학설들을 모자이크하는데 까지, 또한 발명가를 표절자와 혼동하는데 까지 이를 것이다. 정신을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비평가는 학설들 속에서 그것들의 흠집만을 찾고자 원한다. 그는 관념들의 역사를, 역사가 감추고 있는 깊은 통일성을 위하여서라기보다 다양한 정신들을 위하여 보다 많은 취향을 가지려고, 회화에서처럼 인상주의식으로 만들고 있다. (26)
고대와 중세시대의 순수하게 학설적인 다양성에게, 근대시대는 그것과 다른 것을 덧붙였다. 그것은 다양한 민족적[국가적] 정신들이다. 이 다양성은 철학들의 각각에게, 영국철학, 독일철학, 프랑스 철학에게 그것의 특별한 뉘앙스를 제공한다. 또한 근대 문화의 거대한 복잡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 거대한 문화들은, 마치 오귀스트 꽁트가 그것을 예견했고 또 그것을 걱정했던 대로, 일련의 특수하고 기술적인 문화들로 분해되는 중에 있으며, 그 문화들의 각각은 한 인간의 삶과 수단들을 흡수하고 있다. 철학자는 이런 문화들의 여러 면들 중에 한 면에 제한되어 있으면서, 마치 오늘날 논리학자 또는 인식론자로 말하듯이, 한 관점과 다른 관점 사이에서 참으로 깔끔하지만 아직 덜 통일성을 갖춘 대응성이 있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철학자는 수학들의 철학자 또는 종교의 철학자이다. 사람들은 피상적인 일반 문화와 협소하지만 깊이 있는 문화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다. (26)
자, 이법으로 환원할 수 없는 학설들의 다양성들이 있지 않는가? 이 다양성들은 인격성들의 차이에, 민족적 특성의 차이에, 문화의 양식과 정도차이에 기인하지 않는가? 어떻게 역사가는 동일한 선상에 매우 다른 기원의 학설들을 놓을 것인가? (26)
또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역사가들 중에서 최상의 역사가들이 ‘따라야 할 방법’에 관해 주저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빅토르 델보(Delbos, 1862-1916)는 철학적 사유의 계속적인 국면들 사이에서 추론적 연쇄의 관념을 거부함이 없이, 정확하지 못할까 또는 역사의 실체 자체를 빠뜨렸을까 하는 두려움에 때문에 균형을 잡으려는 통일성에 대한 그 자신의 욕망을 본다. 그리고 사실상 이 원기 왕성한 델보는 개인별 연구에 관한 찬탄할 만한 계열을 남겼는데, 그것의 제목 자체가,그가 철학의 일반 역사를 쓸 때에 발견해야만 했던, 아마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표시이다. (27)
심지어 빈델반트에게서도 주저함이 있으나 더욱 감추어져 있다. 철학의 발전은, 마치 그가 그의 서문에서 발전을 인정하듯이, 세 가지 요인들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병치된 세 가지 역사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실용적인 역사; 그것은 옛 해결책들과 실재성의 새로운 재현작업들 사이의 불일치에 근거하는 철학의 내적 진화이다. 2) 문화의 역사와 철학의 관계들 속에서 역사; 철학은 한 시대의 문명을 지배하는 관념들에 대한 철학의 문제들을 받아들인다. 3) 마지막으로 인격들의 역사이다. 첫째 국면 아래서 역사는 바로 일종의 발전 법칙이다. 그러나 정신적 삶의 과정을 수많은 아자르들(hasards)에 의존하게 하는 다른 두 국면들과 연관하여 이 국면의 중요성이 정확하게 어떤 것일지라도, 그게 바로 저자가 예감할 여지를 남겨두지 못한 것이다. (27)
거기에 철학의 역사에 대한 결정적 상태가 있는가? 철학은, 문헌학의 한 장 그리고 문예비평의 한 장이 되기 위하여, 그 자체 철학적이 되는 희망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철학은, 모자이크 방법과 인상주의적 방법 사이에서, 이 두 방법을 서로서로 완화하는 것보다는 더 잘 할 수 없을 지경이어서 영구적으로 망설이고 있다고 비난받아야 하는가? (27)
틀림없이 이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어느 꽁트같은 이와 어느 헤겔같은 이의 관념들에 대한 어떤 것이 남아있다. 그들은 과거의 철학체계들 속에서, 닫힌 분파들 또는 개별적 환상들, 즉 인간 정신의 국면들을 더 잘 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지적인 과거를 완전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쳤고, 세대들 사이의 지적인 연대성을 다른 철학자들보다 더 잘 이해했다. 그럼에도 철학의 역사가 처한 위기에서, 사람들은 실증주의자들과 헤겔주의자들에게 값진 발전의 일반적 정식들 중의 하나로 되돌아가면서, 그 위기를 소위 말하는 치유책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시도했던 모든 것은 모자라거나 또는 적어도 덜 성숙되었다.우리가 제기했던 첫 두 가지 문제들처럼, 이 셋째 문제는, 역사가 허용하는 모든 불확실성 때문에, 어림짐작과 임시적인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을 뿐이다. (28)
만일 문헌학적 전문지식은, 우리가 그렇게 주목했던 대로, 꽁트주의자의 또는 헤겔주의자의 구축을 붕괴하게 했더라도, 첫째로 우리에게 실증적 해결의 길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과거의 내밀하고 세부적인 인식에서 더욱더 진보함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전의 학설들 속에서 새로운 학설들의 개입 지점을 다룰 줄 알고, 새로운 학설들을 더 잘 안다. 그리고 사람들이 처음에는 근본적 독창성과 절대적 대립만을 보았던 거기에서, 사람들은 연속성들과 이행들을 확립한다. 꽁트와 헤겔에게서 발전은 숨김없이 분명한 대립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였기에, 이 두 철학자들의 정식들과 같은 일반적 정식들은, 역사가 우리에게 제시한 뉘앙스로 되어있는 실재성을 매우 잘못 이해하게 한다. 반대로, 역사 비평이 폭로한 정신들의 연속성은 일반적 법칙에 의해 표현될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세부적으로 수천가지 탐구들의 대상을 만들어야 한다. 탐구들의 연속성과 발생에서 플라톤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세계체계들을 연구한다는 [뒤앙의] 생각은, 고대와 중세 시대 사이에 근본적인 대립의 생각에 젖은 역사가들에게는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를 통하여 사유의 둘 또는 셋 주제들의 연속성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뒤앙(1861-1916)의 경이로운 박학다식이 필요했다. 중세철학의 역사가 최근에 발견했던 매우 적법한 인기의 회복은 역사에 대한 흥미에 낯선 동기들에 근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근대 철학에 중세의 통합을 제시하는 진실한 발견들에 근거하였다. 선천적(a priori) 방법의 포기는, 철학과 지성의 통일성에 대한 관념에 해를 끼치기는커녕, 따라서 그 관념에게 보다 충만하고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허용한다. 비록 정식들로 번역하기에는 보다 어렵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통일성의 관념은 조금씩 실현되는 계획의 통일성이 아니라, 일련의 독창적인 노력들의 계열과 다양한 발명들의 계열이다. (29)
둘째로1850년경까지 철학사를 지배하고 있었던 숙명적인 진보의 관념의 포기는 철학발전의 정확한 평가 작업에 우호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연속적인 행진의 관념은 역사적 실재성에 완전히 반대였다. 베이컨은, 그가 진보들의 시대들 이외에도 퇴보의 시대들과 망각의 시대들과 곧 이어 나오는 재탄생의 시대들도 언급했을 때, 18세기의 그의 제자들보다 보다 정당하게 보았다. 진실로, 지적인 삶의 곡선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복잡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세부사항의 연구들만이 그것의 우여곡절들에 대한 관념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진실로, 그 연구들이 그것들에 대해 관념을 부여할 수 있고, 그리고 거기서 문헌적 비평이 전혀 반대로 파괴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문헌적 비평은 단지 발전하는 가능한 여러 도식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거기서 역사적 선천주의(l’apriorisme)는 그 도식들 중의 하나만을 보았다. [하나] 때로는보다 큰 불일치로 향하는, [즉] 마치 그리스에서처럼 소크라테스 죽음 이후에 이어졌던 시대에 서로서로 대립되는 부스러기 분파들로 흩어지면서도 그것들로 향하는 사유의 진행이 있고, 때로는반대로, 사유의 통일성을 향하는, 마치 18세기 후반에서처럼 영국 경험론이 지배하는 세기에 거의 완전한 일치로 향하는, 행진도 있다. [또 하나] 때로는 철학적 사유가 운동하고 암시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신적 삶의 한 방법으로, 즉 마치 소크라테스에게서 또는 플라톤에게서처럼 심정적 방향으로 변형되기도 하고, 때로는 철학적 사유가 결정적 학설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 학설은 모든 질문들에 응답하기에 적합하기도 하고, 마치 스콜라철학의 시기처럼 반박할 수 없는 변증법에 의해 응답을 부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 사유의 찰나들도 있으며, 그 찰나들에서 지적 사유가 마치 피곤에 지쳐서, 그의 고유한 가치를 주장하기를 거부하기도 하고, 직관, 감정 또는 계시에 의해 실재성에 도달한다고 소위 주장하는 학설들에게 한발자국 양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8세기의 주지주의에서는, 이법에 대한 자신의 신뢰와 더불어, 낭만적 디오니소스축제가 거의 가깝게 뒤따라 나왔다. 매우 교훈적인 다른 대안이기도 하며,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사유 역사의 일반법칙이다.이러한 예들에 의해서 어떻게 사유 역사에게만 비평이, 최소한 선천성에 관계없이도, 체계들을 분류하고 질서지우도록 해줄 것인지를 사람들은 안다. (30)
역사는 그래도 어떤 점에까지 체계들을 판단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체계의 가치는, 체계가 창조했던 정신적 도약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다. 철학적 학설들은 사물들이 결코 아니고, 사유들, 성찰의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은 미래로 제안되고, 그리고 주제의 풍부성은 겉보기에 소진되지도 않는다. 또한 그 학설들은 항상 되풀이 될 수 있는 심정적 방향들이다. 학설들이 만들어졌던 관념들은 무너질 수 있을지 모를 심정적 구축물의 무기력한 재료들이 아니다. 구축물의 재료들은 다른 구축작업들에서 재활용된 어떤 것과 같은 것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스스로 발전되기를 원하는 배아들이다. 철학적 학설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착함”이라고 소위 주장한다. 그런데 역사적 탐구는 기원적 도약을, 그리고 도약이 전개되는 방식을, 도약이 그치고 가끔은 다시 시행하는 방식을 당연히 우리에게 허락한다. 역사는 완성되지 않았다. 이것은 사유의 역사가가 결코 잊지 않아야만 할 것이다.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또는 스피노자가 살아있기를 그치지 않았다. 역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들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학설이 어떤 방식으로, 경우들에 따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가끔 학설은, 영속적이 되어 하나의 독단으로 뻣뻣해 지면서, 스스로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현존했던 3세기 이후에, 스토아주의는 에픽테투스에게서는 증명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법칙이 된다. 또한 철학적 주제가, 학설로서 고정되고 독단으로서 실현되기를 애쓰면서, 마침내 일종의 복잡성과 기교주의로 소진하며 끝난다. 이런 기교주의는 예술적인 학파들의 찬란한 퇴폐들을 공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 시대에 이오니아 철학은 마지막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들의 웅얼거림[말더듬]으로 축소되는데, 이들은 사물들의 움직이는 강을 고정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여, 언어를 더 이상 이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한 지성적인 사물들의 서술은, 프로클로스((Proclos, 412-485)와 다마스키오스(Damascios, 485-533)와 같은 마지막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사람들이 거기서 전문적인 기술자의 인공물 전체를 느끼고자 힘썼고, 또 거기서 진정성의 부족함을 알고자 힘썼던 만큼이나 세밀한 정확성에 이른다.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 피히테(Fichte, 1762-1814)와 셸링(Schelling, 1775-1854)에게서 체계들의 마지막 형식들에 대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마치 역사적이고 움직이고 변모 가능한 범주들처럼, 사유의 일반적 주제들이 태어나는 것을 본다. 이 일반 주제들은, 절충주의 역사가들 또는 헤겔주의자들이 예전에 이용했던 대중적인 범주들을 대체해야만 한다. (31)
이런 매우 간단한 지표들은, 철학적 사유의 발전법칙에 닮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정식화하면서, 이 입문을 끝내게 할 가능성을 배제한다.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역사[역사가]를 예언자로서 나중에 묘사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철학적 사유가 조금씩 생겨날 것이고 점진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인상을 부여하고자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철학사의 아버지를 아리스토텔레스로서 인정할 수 없으며, 철학사가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한 학설로 향해 방향 잡혀져 있다고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다. 철학적 사유는, 일단 발견되면 기술적 발명처럼 존속하는 안정된 실재성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런 사유는 물음의 상태로 끊임없이 다시 제기하고, 물음을 고정하면서 물음을 배반하는 정식들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릴 위험한 상태에 끊임없이 처해 있다. 정신적 삶은 [작업]노동 속에서만 있으며, 소위 말하는 획득된 진리의 소유 속에는 있지 않다. (31)
현재 저술은 이 작업에 대해 가능한 만큼 명석하고, 가능한 만큼 생생한 묘사[서술]를 부여하고자 애썼다. 이 저술은, 세부적인 역사적 탐구들이 매일 매일 보다 복잡하고 보다 풍부한 뉘앙스를 폭로한다는, 철학의 거대한 과거 속에서 안내인이 되어줄 욕망에 의하여 착상을 얻었다. 또한 이 저술은 독자에게 이런 서술의 충실성에 대해 판단할 수단들을, 그리고 이것의 특징들을 정확히 할 수단들을 제공하는데 불가피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각 장에는 가장 중요한 원문들의 참조사항들을 동반하게 되었고, 그 뒤에는 간략한 참고문헌에 저자들의 판본들과 더불어, 핵심적인 것으로 출판되었던 저술들과 논문들을 보탰다. (31) (27:10, 57TKG) (28:08, 57TLE) (29:02 57TLH) (23:08, 57T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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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일반 - Bibliographie générale,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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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ues
Revue philosophique (depuis 1876)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depuis 1893)
Revue des sciences philosophiques et théologiques (depuis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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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 fü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puis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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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depuis 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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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브대중2409철1권00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