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행문)
난생 처음 다녀온 서유럽(2부) / 남구 이진재 감사관
2012. 5. 3 ~ 5. 12
난생 처음 유별나게 다녀온 서유럽[2부]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2012. 5. 8(화) 여섯째 날
여지없이 지구는 돌고 있었다. 여명이 어둠을 깨우고 검은색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뜨기 싫은 눈을 자극하고 있었다. 환상의 인공 섬, 물의도시 베네치아를 관광하는 날이다. 그녀는 도저히 아침을 먹을 수가 없었는지 포기를 한 상태로 잠이나 더 자겠다고 일어나질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굶을 수가 없었다. 식당입구에서 살펴보니 우리 식구들이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전날 밤 국장님 방에서 잔치(?)하느라 늦잠들을 자는 모양이었다.
미국인들 몰려들어 법석을 떨기 전에 좌석을 잡았지만 그녀 없이 혼자 앉아서 식사를 하려니 썰렁해서 그런지 입맛이 사라졌다. 그래도 먹어야했다. 매일 아침 먹던 대로 질긴 빵에다 빠다 듬뿍 바르고 치즈를 얹어 위속으로 우겨넣었다.
뷔페메뉴 중 다행스럽게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미 복숭아가 눈에 띄었다. 그녀도 좋아하는 복숭아인데 한 그릇 퍼서 배달해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웨이터가 눈치를 줄까봐 쪽팔리기도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아마도 우리 일행 중 몇 분은 아침식사를 포기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베니스 본섬으로 들어가려면 수상버스 출발시간에 맞춰야 한다며 동행가이드가 서두르고 있었다. 다들 버스에 탑승을 했는데 국장님 부부가 보이질 않았다. 서두르던 가이드가 룸으로 뛰어 올라 간지 얼마 안 되어서 고통스러운 표정의 사모님을 부축하는 국장님을 모시고 나타났다. 이유인 즉슨 지난 밤 늦은 음식물(?)섭취로 인한 체기 때문에 괴로워하다 출발시간을 착각하신 것 같았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버스는 선착장을 향해서 상큼하게 출발을 하고 있었다. 국장님이 가이드에게 멀미용 비닐봉투를 찾으시는걸 보면서 사모님이 오늘 관광을 소화해 내실지 걱정이 되었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젊고 활기찬 모습의 핸섬한 현지가이드가 이탈리아 현지 韓人 마피아두목 비슷한 체구에 개똥모자 눌러쓴 보조가이드까지 대동을 하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악을 위해 유학중에 아르바이트로 가이드를 하는 젊은이들이, 앞선 가이드처럼 전공을 포기하고 현지가이드로 눌러 앉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해설용 이어폰을 목에 걸고 수상버스에 승선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 쪽 아드리아海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닷바람은 수상버스가 운행하면서 부딪치는 파도와 어울려 그동안 가슴속에 쌓여있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바다 처음 봤는지 모두들 사진촬영에 몰두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인천이라는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상버스의 롤링 때문인지 여전히 국장사모님은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쓰~헐! 관광이고 나발이고 그냥 쉬고 싶다. 그저 눕고 싶다!!!”할 심정이었을 것이다. 국장님의 표정을 보니 아픈 사모님보다 더욱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틋한 사랑이 담긴 느끼한(?) 눈길로 사모님을 바라보면서...
수상버스가 本섬의 선착장에 도착하고 가이드가 베니스 관광 일정을 소개하는 중에 아픈 사모님이 쉴 장소를 물색해 달라는 요청으로 동행가이드와 근처에 남겨두고 나머지 식구들은 현지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라서 본격적인 베니스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선착장을 따라가다 도착한 산마르코성당은 건축양식이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유명한 성당이었다. 그리스 십자형의 바실리카로 다섯 개의 돔을 받치고 있으며 파꽃 모양의 아치와 고딕풍의 정면(파사드)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물로 황금빛의 배경을 지닌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건축에 쓰인 대부분의 물건과 조각상, 浮彫 등은 그리스 등에서 가져와 장식한 것이었고 내, 외부를 장식한 모자이크벽화는 미술사적으로 아주 귀중한 자료로 되어 있다고 한다. 말로는 형언 할 수 없는 감탄사를 연발할 따름이었다.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여 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었던 두칼레궁전은 최초에는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양식이 복합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북방의 고딕 양식과 베네치아의 동방적 양식과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베네치아 고딕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베네치아 고딕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건물은 흰색과 분홍빛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회랑은 36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칼레 궁전에는 두 개의 정문이 있는데,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의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은 옛날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이던 곳이었고,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 라 한다.
대충 도보로 눈을 어지럽히고 나서 영화에서 많이 봐 왔던 베네치아의 운송수단인 곤돌라를 타기위해 선착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국장님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어디에서 몸을 추스르셨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2대의 곤돌라에 나누어 타고 수로로 진입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건물의 구조와 삶의 방식을 살펴보았다. 곤돌라가 아니면 수영이외에는 도저히 이동하기가 어려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현장을 보면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곤돌라는 이탈리아말로 “흔들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길이는 10m 이내, 너비는 1.2∼1.6m이며 관광객 유람용으로 이용되는 곤돌라는 고대의 배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선수(船首)와 선미(船尾)가 휘어져 올라가 있었다.
배중앙의 지붕이 낮은 객실에 5∼6명을 태우고 선수와 선미에서 두 사람의 뱃사공이 3m 정도의 긴 노를 저어 움직이는 그런 배였다.
가이드가 탄식의 다리를 손짓하며 설명을 하고 있었다. 1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총독부가 있었던 두칼레궁전과 누오베 감옥을 연결했던 다리로,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칼레궁전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던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고 해서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특히, 이곳의 감옥은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남녀 불문하고 카사노바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되었던 베네치아를 반나절 만에 섭렵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베네치아의 모든 것을 모두 머릿속에 담으려고 내 눈동자와 카메라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조작되고 있었다.
마침내 총무님이 가이드와 협상 끝에 수상택시를 타고 S字 운하를 관광하는 옵션비용을 1인당 50유로에서 10유로(20%)를 깎아 결정한 덕분에 이번 여행기간 중 쌓여있었던 로마 현지가이드에 대한 증오, 저질 호텔과 식사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리는 가장 스릴 넘치는 시간이 되었다.
수상택시 역시 식구들이 2대에 나눠 탔는데, 우리 배를 운전하는 기사의 기술력이 앞섰는지 운하를 빠져나와 수상터미널로 향하는 구간에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더니 앞서서 달리던 택시를 제치며 곡예운전을 하는 바람에 모두들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내지르며 아찔함을 맛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내지르는 소리 때문에 한가로이 하늘을 날던 갈매기가 기겁해서 도망칠 정도로 난리법석을 떨었으니... 정말 가관이었다.
이탈리아말로 “니가 최고~여! 그라제~이! 그라제~이!”(감사합니다의 이탈리아말인 “그라치에”의 전라도사투리)라고 기사에게 엄지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격려하면서 베네치아 본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가득 담고 하선하였다. 추월당한 택시에 탄 사모님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시샘을 하는 것 같았다. 겪어보지 않으면 정말 모른다. 그래서 비싼 돈 들여가며 여행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점심을 먹고 나서 이탈리아 마지막 여정인 밀라노로 향했다.
이 기행문을 쓰고 있는 중에 이탈리아 북부지역인 밀라노와 베네치아 인근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발생한 몇 번의 지진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세 번에 연이은 지진소식에 귀 기울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행기간 중 느꼈던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마음과 안타까움, 그리고 우리가 다녀오고 나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는 느낌 등...
전 세계 패션을 선도하는 도시, 밀라노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가지에 버스가 진입하는 순간부터 여태까지 봐왔던 느낌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비좁은 주차 공간, 현대식 건물들, 거리를 활보하는 시민들이 입고 있는 옷의 패션 등 등 거리에 전차 길도 있고 현대와 근대, 중세가 혼재된 도시, 바로 그 밀라노였다.
밀라노 관광의 시작점으로 이용되고 있는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서 하차하여 저녁을 먹기 전까지 관광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수박 겉핥기식이었다. 지금이 몇 시 몇 분이니까 몇 분까지 모여야 하는 일정... 그 빡빡한 일정이 정말 미웠다.
두오모 광장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 고딕건축물의 상징인 밀라노 대성당은 135개의 크고 작은 첨탑과 2,245점의 조각상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정말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가장 높은 첨탑에 올라서서 도시를 지키고 계시는 황금 마리아상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1386년 공사가 시작되어 완성까지 무려 500년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밀라노 대성당 앞 두오모 광장에는 밀라노 시민들이 휴식의 장소로 즐겨 찾는 명소였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관광지가 몰려있어 더욱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관광객 모두가 뒤엉켜서 사진 찍고 구경하느라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우리식구들도 그 일원으로 법석을 떨었다.
밀라노는 역시 콧대 높은 도시였다. 누구나 동경하는 “명품 1번지”이였고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 두오모는 웅장함에다 세련미까지 갖추고 있었다.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깔끔한 슈트 차림의 멋쟁이들이 활보하는 골목길에서 덩달아 폼을 내고는 있었지만 어색함은 감출 수 없었다. 밀라노에서 옷 자랑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붉은색 벽돌의 한 건축물에 눈길이 갔다.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이었다. 성당의 숨겨진 자존심만은 밀라노의 어느 공간에도 뒤지지 않는 건축물이었는데 건축의 대가인 브라만테가 1492년 완성했고 내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이 보존돼 있었다.
本堂은 고딕양식이지만 브라만테의 손길이 닿은 부분은 新르네상스 양식이었다. 그렇게 화려한 밀라노에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이 성당이 유일하다고 한다.
전 세계 오페라극장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장 중 하나인 라스칼라극장의 기품이 살아 숨쉬고 있는 모습과 엠마누엘 2세 아케이드는 쇼핑 공간인데도 바닥에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오렌지색 목조로 된 전차는 밀라노의 명품거리 한 가운데를 지나며 더욱 클래식한 분위기와 함께 고풍스러운 소재들이 뒤섞여 한껏 그 품격을 높이는 것 같았다.
저녁식사를 위해 급히 광장을 가로질러 가던 중 눈에 뜨이는 중년부부가 나란히 서있었다. 누군가와 만남을 기다리는 듯 했는데, 두 사람 모두 정장차림의 검정색 수트를 입은 모습은 정말 감각적이고 흔치 않은 우아한 패션이었다. 멋~져 부렀다! 그녀도 덩달아 멋지다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마치 우리부부가 그들의 모습인 양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착각은 자유다라며 누군가에게 항변하는 우리의 모습도 그려보면서 저녁식사를 위해 빠른 걸음으로 잽싸게 허겁지겁 버스로 달려갔다.
밀라노에서 한식이랄 수 없는 한식 같은 한식을 먹고 다시 버스로 모였는데 버스기사가 바뀐다고 엄가이드가 안내를 하고 있었다.
밀라노까지 계속해서 우리를 안전하게 모셔준 버스기사는 집안의 급한 사정으로 인하여 독일출신 버스기사에게 바통을 넘기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래도 4일간 우리를 위해 고생한 그 대머리 기사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냈더니 남은 물을 모두 선물하고 떠나는 인정을 보여 주었다. 나름대로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라제~이! 그라제~이!” 우리들 모두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감사를 표했다.
새로 바뀐 독일출신 버스기사는 불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모두 다하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스위스를 거쳐 파리행 TGV출발역까지만 운행을 맡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 밤을 묵을 호텔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호텔은 당초에 안내하였던 호텔이 아니고 새로 신축된 호텔이었다.
"CENTRO CONGRESSI RIMBIATE FIERA HOTEL", 외우기 쉽지 않은 정말 길고 긴 이름을 가진 호텔이었다.
가이드가 수속을 밟고 룸키를 나눠주자 말자 룸키에 적힌 넘버대로 421호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정연숙동장님과 서방님인 기권일팀장님, 김명식팀장님과 장인어른,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라탄 그녀와 나, 모두 여섯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자 모두 내렸는데 지하층이었다. 옆 엘리베이터에 탔던 한재석동장님 일행도 내렸다가 분위가 이상해서 다시 엘리베이터에 타고 올라가 버리고 우리도 다시 타고 올라가려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서더니 비상벨을 포함한 조작버튼의 전원이 모두 꺼져버리고 말았다.
“내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오!~~주님!”, 엘리베이터 타기 전에 “오~! 주님! 굽어 살피소서!”를 외쳤어야 했다. 그 좁은 엘리베이터에 여섯 사람이 짐과 더불어 엉켜있었기에 움직이기조차 힘이 들었다. 정연숙동장님이 스마트폰으로 가이드와 총무님과의 통화시도를 하였으나 연결이 안 되자 문자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상황을 알린 후, 얼마간의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나 밖에서 문을 열려고 시도는 하였으나 문은 쉽게 열리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기다리라는 희미한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 또다시 기다림의 공포가 시작되었다. 체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 부채를 쥐고 있던 정연숙동장님이 쉬지 않고 부채질을 해주었기 망정이지 열사병으로 더 이상의 여행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앞에 서서 땀을 흘리는 기서방님에게 정말 미안했다. 이거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 다행이 조명등은 살아있었기에 공포감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조작버튼 옆에 붙어있는 이용규칙을 자세히 보니, 정원은 14 PERSON, 중량은 1,050Kg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의 몸무게와 짐무게를 다 합쳐도 계산상 500Kg이 넘지를 않았다.
무엇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김명식 팀장의 장인어른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기다림 밖에는 우리가 취해야 할 매뉴얼이 없었다.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어느덧 공포의 시간이 지나고 문이 열리는 순간 “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가슴속으로 외쳤다. 갇혀있던 시간은 무려 35분간... 호텔이름 만큼이나 길고 긴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우리를 보고 호텔관계자 두 놈이 하는 말... 알아듣지는 못하겠고 표정과 손짓으로 봐서 왜? 인원을 초과해서 탔느냐고 오히려 우리에게 따지고 나무라고 있었다. 순간 아드레날린이 뇌 속에서 솟구쳤다.
“이~ 쓰헐~ 쉐~익기 봐라! 이거! 뒈~질려고 환장했나? 지그들이 아엠 쏘리해도 열이 식을까 말까인데 뭐시라~꼬! 이~ 쉐익기~가!!!”
“니그~ 들! 눈○ 있으면 엘리베이터 용량 좀 읽어봐라 이 쉐~익~기야!”
“니그~ 들! 지배인 좀 오라고해!”우리 국장님 핏대를 올려가며 영어로 따졌지만 이 쉐~익기들 영어를 모르는지, 가이드가 이탈리아말로 통역하자 그제서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키며 지배인은 퇴근했다고 발뺌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들의 분노에 찬 모습을 보고 카운터에 있었던 여직원마저 놀라 달아났다는 말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한숨 죽이고 수습을 하였다. 엄가이드의 손 빠른 대처능력은 0점 수준이었다. 너무나 당황했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사건의 원인이 호텔을 변경한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준공검사가 끝 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건물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룸키에 써있는 421을 해석하면 4층에 있는 21호실이 아니라 4자가 의미하는 것은 본관이 아닌 2층으로 지어진 별관건물을 표시하는 것이고, 21은 2층1호실이라는 표시였기에,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탈 이유가 없었다. 순전히 가이드가 사전에 그 내용을 인지를 못한 것이 단초가 되었던 것이었다.
별관의 호텔방은 우리같이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여행객들에게는 불편한 시설이었다. 1층이야 상관이 없겠지만 2층은 문제가 있었다. 내방의 경우는 2층이었는데 어깨수술을 한 나로서는 무거운 가방을 들어 올릴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이드가 도와주는 수고를 하였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붉은색 조명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야릇한 방이었다. 우리나라 모텔 중에서도 유흥가 주변에 몰려있는 분위기의 그런 방, 그녀가 어둠침침하다고 제일 싫어하는 방, 그러나 최근에 신축한 건물이라 그런지 시설은 좋았다. 아마도 동양인 관광객들의 취향에 맞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킹사이즈의 더블베드와 벽면 전체에 설치된 거울이었다. 베드가 킹사이즈인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이해가 갔지만 거울에 대해서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여러 면에서 그 호텔이 내게 시사하는 바는 엄청 컸다. 엘리베이터 사건으로 몸과 맘이 따로 노는 것 같은 피곤함에도 무릅쓰고 일단 포트에 라면을 끓여 그녀와 요기를 하고 나서야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평생 당해보지 않은, 멈춰선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공포체험, 이것도 여행 옵션에 들어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스위스 인터라켄에 도착해서 융프라우行 기차를 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가이드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 취침에 들어갔다.
관광객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이 왜? 이리 불친절하고 시설도 엉망이냐고 항의하면 “누가 우리나라 오라고 했느냐? 아니꼬우면 오지 마!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에 따르면 돼!”라며 튕긴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조상들이 물려준 문화재를 보유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2012. 5. 9(수) 일곱째 날
운전기사에게 아침 인사하는 것도 바꾸었다. 영국에서는 “굿모닝!”, 이탈리아에서는 “본! 죠~오르노!”, 그리고 스위스까지 버스를 몰고 가는 기사는 독일인 이었기에 “굿~텐! 모르겐”이라고 중얼대었다. 왜냐하면 기사한테 애교를 떨어야 사람대접 받을 것 같아서...
스위스 인터라켄에 도착해서 융프라우를 관광하려면 등산용 전차를 타야했기 때문에 그 사연 많은 호텔에서 일찍 출발을 해야 했다. 아침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6시30분경에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정말 멋진 풍경을 자랑하고 있는 호수를 끼고 있는 꼬모라는 도시를 거쳐 내달리는 버스에서 바라보는 알프스 산맥의 牧歌的 풍경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버스유리창을 통해서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졸리기는 했지만 순간순간 스쳐지나가는 특이한 풍경 때문에 졸 틈이 없었다. 버스가 스위스국경인 듯한 산을 넘어가자 그림 같은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헤밍웨이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무기여 잘 있거라”... 바로 그 영화였다.
수많은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미남배우 록 허드슨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서양 여배우이며, 그 영화를 보고 그날 밤 잠 못 이루게 했던 미소 짓는 모습이 너무 해맑고 아름다운 여배우,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그 영화의 종결부분...
이탈리아 전장에서 탈영하여 임신한 그녀와 함께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하기 위해 이탈리아 국경과 접한 마지오레 호수를 보트를 타고 건너는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지며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꼬모를 지나서 17Km길이의 긴 터널을 통과하자 드디어 스위스 국경 검문소에 도착을 하였다. 모두들 하차하여 용변도 보고 커피도 한잔하고 과자도 사먹고 여유를 부리면서 고산준령의 맑은 공기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셔 보았다. 상쾌함의 정도가 차별화되는 순간을 만끽하면서...
알프스산맥의 구불구불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나타나는 달력의 그림에서나 봐왔던 파란 호수와 주변의 산뜻한 가옥들, 이탈리아 쪽의 가옥과는 색상과 지붕의 句配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젖소와 양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들이 그림처럼 지나가며 가슴을 설레게 할 즈음, 엄가이드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훔쳤는지는 몰라도 센스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지나가는 풍경에 걸맞은 음악, 요들송을 틀어주며 불편했던 우리들의 심기를 달래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김홍철과 제자들이 불러주는 아름다운 스위스아가씨, 베르네 산골 등... 머릿속이 상큼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엔돌핀보다 더 좋은 세로토닌이 그냥 솟구치고 있었다.
산봉우리의 설경과 어우러진 초록 빛 잔디와 민들레 들판, 호숫가에 지어진 예쁜 집들과 요트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져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정상대로 버스가 주행하였다면 여유롭게 일정이 진행되었을 텐데 겨우내 손상을 입은 도로보수공사로 인해 구도로로 우회하여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하여간 이번 여행은 사건이 많은 여행으로 남을 것이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여 늦게 인터라켄에 도착하였다.
인터라켄은 스위스의 주요관광도시로 수도인 베른 남동쪽 26km 지점인 툰호수와 브리엔츠호수 사이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지명은 “호수의 사이”라는 뜻 이라고 한다. 베른알프스산맥의 연봉(連峰)을 바라보는 경승지로 1,128년경 건설된 이래 세계적 피서지이며 등산기지를 이루고 섬유, 고무, 시계, 리큐어(달콤한 알코올 음료수로 과일, 향신료, 씨앗, 꽃, 양념 등을 위스키, 브랜디, 럼에 섞어서 만든 술)공업이 활발하다 한다.
베른알프스의 융프라우산괴의 북쪽기슭인 白류트시네江과 黑류트시네江이 아레江과 합류하는 요지에 위치하며 계곡입구에 들어선 취락구조 때문에 핀스터아어호른 산괴에 이르는 등산기지로서 발달하였다 한다.
흑류트시네江 상류의 해발1,000m의 그린델발트에 등산전차가 운행되고 다시 그 곳에서 3,474m의 융프라우요흐에 등산전철이 운행되기 때문에 융프라우요흐 전망대까지 가려면 세 번의 열차를 갈아타야만 했다.
인터라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우리가 머물 City Overland Hotel 로비에 짐을 맡겨놓고 곧바로 점심식사를 위해 스위스 전통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메뉴는 스위스 전통음식중의 하나인 퐁듀의 한 종류인 “비프 퐁듀”였다. 설명을 하자면 큰 접시에 담겨 있는 색깔이 서로 다른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와 마른 빵과 치즈, 그리고 양념소스, 샐러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포크같이 생긴 긴 꼬챙이에 고기를 찍어서 가스불에 얹혀진 기름 냄비에서 튀겨낸 뒤, 나이프 질해서 먹는 유별난 요리였다.
각자의 느낌은 달랐겠지만 내가 느낀 맛은 고기를 기름에 튀겨낸 후 알맞게 썰어서 양념소스에 찍어 먹는 것 자체가 즐겁기도 했고, 목구멍 넘기기에 거슬리지 않는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뱃속에서 소, 돼지, 양이 협연하는 3중주 관현악 협주곡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간만에 뱃속 든든하게 현지특식을 먹어본 것 같았다.
융프라우요흐行 등산전차가 출발하는 인터라겐 오스트驛에 도착해서 그녀와 난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 오리털 재킷으로 갈아입고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융프라우의 설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식구들 모두가 전차 한 칸을 점령해서인지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한 것 같았다. 드디어 오스트역을 출발한 등산전차가 흑류트시네 강변을 따라 올라가자 모두들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창문열고 사진 찍고 왁자지껄 시끌벅적한 모습으로...
융프라우는 “처녀”라는 뜻으로 인터라켄의 아우구스티누스 修女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4,158m의 높이로 베른알프스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우리가 오르고 있는 융프라우 철도는 100년 전인 1912년에 건설된 역사가 깊은 시설이었다.
강이 끝나고 초록색 융단을 펼쳐놓은 듯 초원이 펼쳐지면서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정원에 사람들이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강을 따라 신나게 달리는 전차 양옆 계곡의 울창한 숲에는 겨울철 눈사태로 인해 갈퀴에 긁힌 것처럼 흙바닥이 시커멓게 드러나 있었다. 원인은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는 토양 때문이라고 한다.
계곡을 벗어나자 목초지와 민들레가 집단서식을 하고 있는 평원이 펼쳐지면서, 마치 꽃무늬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런 풍경 때문에 우리식구 중 某某는 엄청나게 찍은 사진 덕분에 내가 기행문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카메라에서 다운도 못 받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만큼 눈으로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담아 오기에는 용량이 너무 큰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발 2,061m 지점에서 갈아타야할 기점역인 클라이네 샤이텍에서 하차하여 들뜨고 감격적인 풍광에 취한 심장박동수를 줄이려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갈아탄 등산전차는 우리나라 중앙선 철도처럼 지그재그로 올라가고 있었다. 경치는 360도의 각도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번갈아가며 연출되고 있었다. 그저 탄성만 연발할 수밖에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한 번 더 우리가 갈아타야 할 열차가 기다리고 있는 해발 2,865m에 위치한 아이거반트驛은 스키장이 소재한 역이었는데, 아직까지 잔설이 남아 봄을 시샘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산허리를 뚫은 터널로 오르는 길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등산전차가 출발하고 해발 3,000m가 넘어서자 한사람씩 가슴과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산지역에서의 산소부족현상에 의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3천미터 정도에서도 이런 현상으로 괴로워하는데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산악인들은 어떨까? 충분히 비교가 되었다.
마침내 전망대에 도착하자 또 인간 전시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인도관광객들 때문에 하마터면 그녀를 잃어버릴 뻔 했다. 그리고 서있기도 벅찰 만큼 붐비고 있었다.
우선 인증샷을 위해 전망대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한쪽 눈이 이상했다. 바닥에 쌓여 있는 눈(雪)색깔이 왼쪽 오른쪽 과 다른 색깔이었다. “아니 우~째! 이런 일이... 산소부족 때문에 뇌가 이상해졌나?” 산소 부족 때문에 뇌신경에 이상이 와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원인은 몇 초 만에 밝혀지고 말았다.
선글라스의 왼쪽 알이 눈밭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거! 이~거! 으! 쓰~ 헐!!!”
전망대안의 온도와 바깥쪽의 엄청난 온도차에 의해 재질이 서로 다른 안경알이 안경테와의 엄청난 수축률 차이 때문에 안경알이 작아져서 안경테에서 탈출해버린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온도차가 커도 그렇지, 안경알을 테에 끼워 보았으나 안경테를 메우지는 못했다. 작았다 안경알이...
“으! 쓰~헐! ○○○안경점 사장! 니~~! 인천가면 죽는 줄 알아라! 쓰~헐! 졸지에 눈뜬장님 되어 부렀네! 이~거!!!”
다행히 배낭에 안경을 넣어왔기에 망정이지 완죤히 실눈 뜨고 융프라우 관광할 뻔했다.
우리식구들 대부분이 추위 때문에 사진만 찍고 전망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음동굴을 대충 살펴보고 전망대 로비로 식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유승모팀장님 사모님은 어지럼증과 구토증상 때문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고 있었다. 마침 한재석동장 사모님께서 주저앉았을 때 어떤 인도할머니가 잽싸게 건네준 박하향이 강한 사탕만한 조각으로 응급조치를 하자 조금은 나아진 듯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건강한(?) 식구들은 탁자에서 컵라면에 끊여온 뜨거운 물을 부어 놓고 라면의 진미를 느끼고 있었다. 물이 모자라 매점에서 구입한 뜨거운 물은 금값이었다. 한 병에 7,000원이었던가?... 봉이 김선달은 鳥足之血이었다.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아마도 세계적 명소인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서 라면 등 음식물을 조리해서 섭취하는 민족은 대한민국 관광객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정말 대단한 민족이 아닌가? 그걸 이용해서 돈버는 인간들은 더 대단한 族屬들이고...
그랬기에 융프라우 관광안내 외국어방송 6개국어중 우리나라말 방송도 선택되는 쾌거를 거두지 않았겠는가? 대단했다. 물론 관광객 수와 우리나라의 위상이 어느 정도 반영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전망대 밖은 가스로 가득 찼기 때문에 만년설로 치장한 정상주변은 자세히 관람할 수가 없었다.
하산을 위해 다시 전차를 타고 내려오는 중에도 올라갈 때의 풍경과 사뭇 다른 분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더욱 아름답게 풍경을 치장해주고 있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트램을 2번 갈아타고 출발했던 오스트역에 도착하여 저녁식사 장소인 한식집으로 걸어가는 도로변 가로화단에는 파스텔 칼라의 예쁜 꽃들이 조화롭게 꾸며져 시가지 전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부러웠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며, 깔끔하고 간결한 상점들의 쇼윈도우 등 거리모습은 스위스 사람들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여지없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쇼핑점으로 모두들 들어갔다. 가죽가방 하나면 족하다던 그녀가 진열대안의 손목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점원이 달려오더니 시계 몇 개를 꺼내놓고 부추기고 있었다. 결혼이후 그녀가 시계를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왜?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금니를 굳세게 악물었다.
“내가 또 언제 스위스에 오겠냐? 여~봉! 하나 골라봐!”
머리를 갸우뚱하며 몇 개를 놓고 저울질하던 그녀가 고른 것은 시계 판이 검정색인 조그만 스틸시계였다. 알아서 중저가로 고른 것 같았다.
내가 할 도리는 다한 것 같아서 마음은 뿌듯했다. 씩씩한 발걸음으로 쇼핑점 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개선장군 같았다. 우리 식구들 다 쳐다보고 있는데도 표정관리가 전혀 안되고 있었다.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치자 산으로 둘러 쌓여있는 인터라켄 시내는 이탈리아와는 달리 어둠이 일찍 찾아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침 일찍 인터라켄에서 파리行 TGV 열차를 타려면 새벽5시에 출발해야 하며, 아침식사는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엄명(?)에 따라 모두들 끽소리 못한 채 취침을 위해 잽싸게 호텔방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호텔시설은 독일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깔끔하고 빈틈이 없었다. 욕실의 水栓金具의 정비상태, 창문과 커튼개패장치 등도 과학적 사고에 의해 조작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지고 설치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창문열고 바라본 인터라켄의 밤하늘은 높은 산에 가로막혀 손바닥만한 크기로 다가왔지만 별들은 유난히 반짝거리며 내 마음을 유혹하고 있었다.
2012. 5.10(목) 여덟째 날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샤워하고 짐 꾸려서 곧바로 호텔로비로 나오자 가이드는 아침식사로 도시락을 배부하고 있었다. 심호흡으로 인터라켄의 맑은 새벽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잠이 달아나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밤 그녀가 잠든 사이 담배한대 피우려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올려다 본 칠흑 같은 하늘에 떠 있었던 선명한 빨간 불빛이 산 정상에 있는 기상관측소의 조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나가는 비행기가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설치한 조명이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 불빛이 인터라켄을 알리는 야간 조명용 랜드마크인 줄 알았다.
짐을 버스에 옮겨 싣고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어디다 버릴까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우며 다가오고 계셨다.
창피한 마음에 얼른 꽁초를 할머니가 쥐고 있는 비닐봉투에 집어넣으며 정중히 고개 숙여 독일어로 “굿~텐! 모르겐” 하며 아침인사를 드렸더니 환한 미소로 “당~케! 굿~텐! 모르겐~”이라며 반갑게 응수를 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운 마을을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지켜내려는 주인의식이 투철한 할머니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3시간여를 달려 스위스 국경을 넘어 파리행 초고속열차인 TGV가 출발하는 뮐루주 빌(Mulhouse Ville)驛에 도착하였다.
09시 42분에 출발하여 12시 37분에 파리 리옹(Paris Gare Ryon)驛에 도착하는 기차였는데 요금은 단체할인해서 48.6유로(73,500원)로 우리나라 고속철에 비하면 훨씬 비쌌다.
낑낑대며 여행가방을 들고 기차에 옮겨 싣고 나니 이마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제, 내 체력도 한물갔구나!” 라는 생각에 서글픔마저 느꼈다.
자리를 잡고 난 뒤 도시락을 식탁에 올려놓고 개봉을 해보니 뻣뻣한 샌드위치와 사과가 들어 있었다. 샌드위치 두 쪽을 다해치우지 못하고 아침식사를 끝냈다. 뒤쪽 좌석에서 김복순 동장님과 귀엽고 발랄하기 그지없는 따님 지연이가 컵라면을 끊여 먹느라고 주변좌석의 식구들과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남은 우동 좀 끊여보려고 코드를 꼽았지만 전원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짐작컨대 우리 때문에 운전실에서 전원을 차단시킨 것 같았다. 결국 소란 떠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차창가로 펼쳐지는 평원은 말 그대로 그림 같았다. 풍요롭고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더 이상의 표현이 어려웠다. 푸른 밀밭과 포도밭,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젖소들과 농가주택들이 끝없는 평원에 펼쳐지고 있었다. 높은 산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약간의 구릉만 있는 평원이었다.
큰 소음 없이 달리는 기차의 안락함과 드넓은 평야의 한가로움 때문인지 슬슬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중간 역에서 간간히 승객들이 승차하자 객실은 빈 좌석이 없었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가지고 승차하신 할머니 한분이 한재석동장님 앞좌석에 앉아서 점심대용으로 마른 빵 한 덩어리를 오물거리며 잡수시고 계셨는데, 그 인상과 옷차림이 언뜻 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소설을 영화화한 “예정된 살인”에서 날카로운 추리로 사건을 풀어 가는 주인공 처녀할머니인 “미스 마플”을 연상케 하면서 머릿속을 맴돌며 어지럽히고 있었다.
우리식구들이 시끌벅적 소란을 피운 것이 내심 미안한 기분이 들었는지 기 서방님이 사탕봉지를 들고 객실 내를 돌아다니며 프랑스 사람들에게 사탕을 권하는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종착역에 거의 다다랐는지 옆 좌석의 프랑스 사람들이 소지품을 챙기며 어수선해지더니 어느덧 기차는 파리 시가지로 접어들며 리옹驛에 도착을 하였다.
리옹역사를 빠져나와 길 건너 도로변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 현지가이드의 안내로 모두 서둘러 버스에 탑승하여 점심식사를 위해 곧바로 파리시내에 있는 프랑스요리전문 레스토랑으로 직행하였다.
파리시내는 차들이 엉켜서 교통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인도 폭에 비해서 도로 폭은 상대적으로 좁았다. 이유인즉슨 주행하는 차량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정책 때문에 인도는 사람들이 보행하기에 쾌적한 공간으로 드넓게 유지되고 있었다.
교통정체로 약간 지체되어 식당에 도착하자 우리가 들어갈 좌석이 없어 10여 분간 길거리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식당입구에는 태극기, 중국인민기, 스페인기, 미국성조기, 프랑스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걸린 국기의 관광객들이 이 식당을 주로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가는 이들의 복색과 코디, 표정 등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우리식구들의 입장차례가 되어 식당으로 들어가자 분위기는 보라색조의 커튼이 드리워지고 조명이 우아한,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라이브로 음악연주를 하는 소규모 극장식레스토랑 처럼 음악연주를 하는 전자악기 등이 안쪽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메뉴는 달팽이요리인 “에스까르고(escargot)”였는데 버터로 만든 소스를 얹은 달팽이를 요상하게 생긴 집게로 쥐고 포크로 끄집어 내먹는 요리였다. 사모님 몇 분은 비위가 안 맞는지 손도대지 않고 마른 빵과 와인만 마시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자기네 전통음식이라 그렇다 치겠지만 도대체 나는 맛을 느끼지 못했다. 느끼한 맛 이외에는... 그럼에도 맛있는 척하며 그녀 몫까지 뺏어 먹었다. 후식으로 요구르트인지 아이스크림인지를 먹었는데 어찌되었던 달팽이 요리에 대한 깊은 인상은 남지를 않았다.
먼저 들어와 식사를 하고 있었던 서양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자리를 비우고 버스에 승차하자마자 지체 없이 베르샤이유宮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런데 에어컨이 고장이 났는지 버스 안은 찜통이었다. 식구들 모두 아우성을 치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인 프랑스에서 까지 준비 가 덜된 관광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날까지 만해도 파리날씨가 서늘해서 모직재킷을 걸쳐야 했는데, 오늘 날씨는 기상이변이라며 현지가이드가 변명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유가 되질 않았다.
정비가 안 된 버스를 배차 받아 다니는 버스기사부터 가이드까지 모두가 프로정신이 빈약한 인간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대체 우리를 어떻게 알고 이것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욕을 목구멍에서 가래 삭히듯 삭히고 있었다.
“으~~!!! 쓰~벌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식구들 모두가 속으로 엄청나게 욕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현지가이드 역시 미술공부 하러 유학 왔다가 10년 전부터 가이드로 눌러 앉았다면서 신세타령을 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로마 현지가이드에 비하면 첫인상은 그런대로
합격점을 주고 싶었지만 에어컨문제로 61점만 주었다.
베르샤유宮 앞 광장에 도착하자 어린학생부터 머리 허연 노인네들까지 북적대고 있었다.
베르샤유궁의 기원은 1631년 루이 13세가 자그마한 수렵용 성을 지은 데서 시작 되었는데, 루이 13세의 뒤를 이은 태양의 왕 루이14세는 일개 대신이었던 포개가 자신의 성보다 화려한 보 르 비콩트城을 지은 것에 분개해, 그 보다 더 나은 성을 짓기로 맘먹고 궁전건축은 르브랑에게 의뢰하고 정원은 르노트르에게 명하여 1668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1685년에 완공되었으나, 이후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궁전은 처참히 파괴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한다.
궁전 내부에는 루이 13세와 14세, 프랑스 혁명 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프랑스 혁명의 주역이며 나중에 자기 스스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의 향취도 맡을 수 있어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묻혀진, 한때 사치의 극에 달했던 권력의 무상함까지 느끼게 하였다.
궁전은 2개의 층으로 되어 있었지만, 제단 위의 조각과 천정화가 볼 만한 왕실예배당(chapelle)과 그 앞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뜨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오페라의 방을 제외하곤 주로 볼거리는 2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루이 14세의 침실,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개최되었던 거울의 방등 모두 15개의 크고 작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궁전 뒤편으로 아름다운 정원에서 음악과 어울려 춤을 추는 수많은 분수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환상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 분수들 중에서도 가장 큰 넵튠의 샘(bassin de neptune)을 비롯해 테라스 앞의 라톤의 샘(bassin de latone)이 있고, 녹색융단이라고 하는 잔디밭을 지나 있는 아폴론의 샘(bassin d'apollon)은 뛰어난 예술품이기도 하였다.
프랑의 조경수 관리는 특이하였다. 모든 조경수가 직각과 평면으로 정리되어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직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정원 멀리보이는 인공호수까지는 가보지 못하고 눈으로만 감상을 하고 말았다.
집합장소인 버스근처로 식구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프리카 출신 집시들이 기념품을 팔려고 달려들고 있었다. 몇 가지 종류의 에펠탑모형을 들고 있던 집시가 내게 다가오더니 작은 것 5개를 10유로에 주겠다며 애원을 하기에 들고 있는 것 중 큰 것 한 개를 10유로에서 반으로 뚝 잘라 5유로에 샀더니 가이드가 잘 샀다고 평가를 내려 주어서 기분은 흐뭇했다.
그런데, 그 집시 놈이 그녀에게 반했는지 서비스라며 열쇠고리용 모형 한 개를 건네주고 있었다. 결론은 내가 비싸게 주고 산 것인지, 아니면 집시가 진정으로 고맙다며 건넨 것인지, 전혀 구분이 안됐다.
그러나 해답은 공항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공항면세점에서 똑같은 재질에 똑같은 모양의 기념품이 케이스만 없었지 20유로에 팔리고 있었다. 4배나 비싼 가격으로... “흐! 흐! 흐!” 기분이 더욱 흐뭇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도 숨넘어갈 듯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싸게 샀다고...
파리에서는 시간은 금이었다. 어느덧 버스는 파리시내로 접어들어 개선문광장에 도착을 하였다. 마침 참전기념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의장대와 나이 지긋한 민병대원들이 사열하는 모습을 구경꾼들이 에워싸고 사진 촬영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식구들도 덩달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로수 길로 유명한 상젤리제 거리와 접해있는 개선문(triumphal arch)은 에펠탑과 함께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소라 할 수 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설계된 건축물이었다.
로마 시대에 개선문 아래로 행진하도록 허락된 자는 영웅뿐이었다. 새로운 땅을 정복한 황제와 그 부하들이 개선문 아래로 개선행진을 하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에서도 4년간의 독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드골 장군이 이 개선문 아래로 당당히 행진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개선문은 높이 약 50m, 너비 약 45m로 외부에는 10개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었고 그 浮彫는 나폴레옹1세의 공적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라 한다.
이어서 샹제리제 거리를 대충 둘러보고 세느江 유람선을 타기 전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한식집으로 이동을 하였다. 복잡한 시내교통 때문에 또 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식당 밖에서 좌석이 날 때까지 도로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거, 우리가 거지ㅅㄲ들도 아니고 때마다 식당 앞에서 밥 동냥이나 하는 듯 어슬렁거려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나가는 파리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에 왠지 모르게 쪽 팔리는 듯한 기분이 밀물처럼 엄습해 왔다. 한 이십여 분쯤 기다리자 좌석이 확보되고 나서 식사를 시작했는데, 추가로 시킨 밥한 공기에 1유로를 부담해야했다. 야박한 인심 때문인지 반찬도 맛이 없어 보였다. 그 식당 반찬은 손도 안대고 우리가 가져온 깻잎과 김만 가지고 식사를 마쳤다.
세느강 유람선 탑승시간 때문에 서둘러 버스에 탑승하여 선착장에 도착하였으나 배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다음 배를 기다리며 선착장 난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노부부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노트북에 붓펜으로 크로키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들여다보니 에펠탑을 배경으로 세느강 주변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부러웠다. 그림도 멋져 부렀고...
“과연 내게도 은퇴 후에 저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순간이 올까?” 여유 있고 자연스러운 행복이 철철 넘치는 모습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유람선이 선착장으로 접안하자 국적이 제각각인 관광객들이 자기나라 말로 떠들어 대며 벌 떼같이 몰려들어 탑승을 완료하자 배는 디젤엔진에서 연소되는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물살을 가르고 시원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강폭은 우리나라 하천정도의 폭이었으나 길이는 776km나 되는 제법 긴 강으로 파리분지인 부르고뉴, 상파뉴, 일드프랑스 지역과 노르망디 등을 거쳐 영국해협으로 흘러드는 프랑스에서 3번째로 긴 강이며, 파리를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라 한다.
“퐁뇌프의 연인들”이란 영화에서 나왔던 퐁뇌프 다리 등 강의 兩岸을 연결하는 수많은 다리들과 멀리 보이는 에펠탑, 노틀담 대성당 등 유명한 건물들과 제각각 아름다움을 뽐내며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강 양쪽에는 벤치나 땅바닥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커플들, 여러 명이 둘러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 석양빛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여 지고 있었다. 낭만의 3요소는 詩와 音樂과 한잔의 와인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언뜻 떠올랐다. 세느강변의 모습이 그랬다.
야경을 보여주는 유람선을 생각했었는데 꿈이 빗나가 못내 아쉬움은 남았지만 나름대로 파리의 중심 세느강에서 추억을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 놈들의 장난질에 도매금으로 넘어간 것 같다. 아마도...
승선하기 전 준비해간 로즈와인 몇 잔에 취홍이 들면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의 여운은 세느강 물결에 씻어버리고 아쉬운 마음을 감싸 안은 채 이번여행의 마지막 숙소인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머문 호텔은 "Hilton Orly Hotel"로 시설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2012. 5. 9(금) 아홉째 날
인천으로 떠날 생각과 그간의 여정을 되새기느라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설잠이 들었는지, 그녀가 뒤척이는 소리에 잠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니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아무래도 일기가 불순할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에 내려가 1착으로 식사를 마치고 호텔방으로 올라올 즈음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마지막 짐을 꾸리면서 여행가방 하나만 덜렁 가져온 실수 때문에 빈 공간 없이 채워 넣다보니 가방의 무게가 바위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일정역시 여지없이 가이드의 칼 같은 지시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고장 난 에어컨을 고쳐온 버스는 밤사이 비 내리고 쌀쌀하게 변해버린 날씨 때문에 위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가이드가 자랑스럽게 에어컨을 고쳐 왔다며 시범적으로 에어컨을 틀자 얼마 못가서 모두들 춥다며 끄라고 난리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의 날씨는 프랑스의 이미지처럼 변덕스러운 것 같았다.
파리 시내를 지나는 버스 안에서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사이로 사람들이 출근을 하느라 분주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비가 내리는데도 우산을 쓴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특이했다. 대부분 옷차림은 무채색의 두꺼운 외투차림이었는데 간혹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중년의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튀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멋이 풍겨져 왔다.
먼저 도착한 루브르 박물관 앞에도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녀가 도착 전까지 계속 묵주기도를 드린 덕분인지 버스에서 내리자 비가 그치고 있었다.
그녀의 기도 발은 나라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무척이나 센 것 같았다. 준비한 우산과 우비가 무색할 정도로...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슈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박물관이다.
1,190년 지어졌을 당시에는 요새에 불과했지만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축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고,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이후 5세기 동안에 유럽을 포함한 다양한 지역에서 수집한 회화, 조각 등 수많은 예술작품이 30만 점 가량에 이른다고 한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리므로 가이드가 이끄는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작품을 관람했는데, 무슨 작품을 어떻게 구경했는지 기억이 희미할 뿐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루브르 정문에 설치된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였다. 1989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에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는 건축 당시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루브르의 상징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으며 유리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면 나폴레옹 홀로 이어지는데, 안내센터, 매표소, 서점, 휴대품 보관소,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티켓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하게 되어있었다.
전시관은 드농(Denon)관, 리슐리외(Richelieu)관, 쉴리(Sully)관으로 나눠져 있는데 각각의 전시관은 지하에서 3층까지로 이뤄져 있었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지하층에는 고대 오리엔트, 이슬람 미술작품과 이탈리아, 스페인, 북유럽의 조각품이 전시돼 있었다. 프랑스 조각품은 지하 1층에 전시돼 있었는데, 유리로 이뤄진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더욱 입체감 있는 작품 감상을 할 수 있었다.
1층에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미술품도 전시돼 있었고 학교 다닐 때 데생의 주요 모델이었던 아름다움의 극치인 “밀로의 비너스”를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어서 감회가 깊었다.
2층은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인지 너무 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전시돼 있었는데 앵그르, 다비드, 들라크루아와 같은 거장의 작품과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2층에 전시돼 있었다.
3층 또한 프랑스 繪畵를 시대별로 전시해놓았는데, 2층과 함께 관람객에게 무척 인기 있는 곳이었는지 관람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렘브란트, 루벤스, 베르메르 등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었다.
소매치기 조심하랴, 구경하랴, 사진 찍으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어떤 중국관광객 아주머니가 그녀 발밑을 가리키며 뭔가 흘렸다고 손짓을 해서 쳐다보니 이탈리아에서 용량이 부족해서 교체했던 메모리카드가 떨어져 있었다. 지갑에 넣어 두었던 것이 기념품인 나폴레옹기마상을 사려고 돈을 꺼내면서 흘린 것 같았다. 순간 아찔했다. 만약 잃어버렸다면 영국과 이탈리아를 다시 방문해야한다. 그녀와 함께...
그 중국인 아주머니에게 진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정겹게 인사를 드렸다. “쉐~! 쉐~이! 다~우 쉐!!!(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짜~이쩬!”이라는 인사와 함께...
“아~흐!~십년감수할 뻔 했네...”
십년감수할 뻔 했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국장님과 사모님이 정신 놓고(?) 사진 찍는 사이에 국장님이 메고 있던 어깨가방이 집시의 검은손에 의해 자크가 열리는 아찔한 순간에 사모님의 예민한 촉각에 의해 소매치기를 모면한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당했다면? 출국하는 날 여권분실 등등...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마도 사모님은 대빗자루로 가슴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사모님! 대단한 멸치 볶음입니당!!!” (Merci beaucoup : 불어로 메에시 보쿠...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미란여사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관광 올 스톱이었을 테니까!!!
인파에 떠밀리고 가이드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출구였다. 인원점검이 곧바로 이어지고 나자 버스로 이동해서 도착한 곳은 노틀담 성당이었다.
명연기자 안소니 퀸이 꼽추로 주연한 영화 “노틀담의 곱추”의 배경이 되었던 바로 그 현장이 아닌가?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안소니퀸의 명복을 빌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빗방울이 비쳐 걱정스러웠는데 우리가 하차하자 비는 당연히 그쳐버렸다. 그녀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노틀담 대성당은 세느강 시테섬에 있는 성당으로 건축공사는 1163년 주교였던 M.쉴리의 지휘아래 건축이 시작되었고, 성왕 루이 치하인 13세기 중엽에 일단 완성되었는데, 그 후에도 부대공사는 계속되어 18세기 초엽 측면 제실(祭室)의 증설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한다.
늑골교차궁륭(肋骨交差穹窿)으로 덮인 길이 약 130m의 장대한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는 오낭식(五廊式)의 웅대한 건축물로 신랑 양측에 일렬로 늘어선 기둥과 높은 창 아래 연이은 또 하나의 층으로 구성된 3층의 특이한 구조였다.
서쪽 정면에는 최하층에 “최후의 심판”이 부조된 중앙 출입문 등 3개의 출입구가 있고 여기에서 “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를 거쳐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로 장식된 지름 9.6m의 찬란한 빛을 연출하는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층과 열주로 구성된 그랜드 갤러리가 잇달리고 그 위에 지상 6.9m 높이의 직사각형 쌍 탑이 얹혀 있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건축물이었다.
그리고 이 대성당에서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열렸고,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1944년 국민예배 등 여러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라 한다.
성물판매대 앞을 지나던 중 특이한 디자인으로 된 은빛 십자가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전 집에 도둑이 들어 잃어버렸던 십자목걸이 생각이 나서 기념으로 구입하고 나니 일행은 출구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올라탄 버스는 투어를 겸해서 소르본느 (Sorbonne) 대학가를 지나고 있었다. 프랑스 최고 지성인 빅토르 위고, 베이컨 등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한 이 대학은 1253년 로베르 드 소르본 신부에 의해 세워졌는데 신학대학으로 출발해 현재는 문학, 법학, 의학, 약학 등을 가르치는 파리 3, 4대학을 총칭한다고 한다.
그렇게 30여분 시내를 빠져나온 버스는 간판에 “金城酒店” 이라고 쓰여 진 중국식당 앞 도로변에 정차하게 되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우리가 점심을 취해야 할 식당으로 알고 식당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현지가이드는 뒷골목 쪽으로 우리를 유도하며 식당을 찾아 걸어가고 있었다.
뒷골목 몇 블럭을 지나쳐서도 식당을 찾지 못했는지 주변 상점에서 그 식당이 어딘지 묻고 나더니 우리보고 기다리라며 그 식당을 찾아 사라져 버렸다.
도로변에 일렬로 늘어선 우리는 또다시 거지ㅅㄲ들처럼 갈 곳 없는 기러기 꼴이 되어버렸다. 날은 개이고 햇살은 머리꼭지 위로 강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으~ 쓰헐!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개념 없는 놈 같으니라구!!! 정말이지 프로정신을 어디다 팔아먹은 놈이야? 현지가이드라는 놈이 식당을 못 찾아 헤매고 있으니 이거야 원! 그러고도 가이드 경력이 10년 이라고???”
핏대를 올리고 있는 와중에서도 갑자기 “젊은 태양”이라는 노래가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콧노래로 흥얼거려 보았다.
“햇볕 쏟는 거리에서 그~대! 그 으~대!”
“고독을 느껴 보았나. 그~대! 그 으~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이~이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아!” 으!!! (중략)
가사 전체가 생각나지 않아서 이 부분만 반복해서 흥얼거리기를 몇 번 되풀이 하자, 그 현지 가이드가 저 멀리 우리가 지나왔던 곳에 서서 되돌아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우리식구들은 또 일렬로 도보행군을 시작했다. 먹기 위해서...
되돌아 와서 도착한 곳은 내가 이곳이라고 들어가려던 바로 그 중국집, 金城酒店이었던 것이었다. “으~! 쓰~~~헐!”
그건 그것이고 맛대가리 없는 중국요리를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만 끄적거 리다 물로 배 채우고 밖으로 나와서 애꿎은 담배만 몇 개비 작살내고 말았다.
출국 전 마지막 오후 여정인 에펠탑을 향해 출발했는데 에펠탑이 수리중이라 전망대 올라가면 시간낭비니까 겉만 구경을 하자는 가이드의 감언이설에 또 속아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과 끼리끼리 사진 찍고 나니 공항으로 이동할 시간이 거의 다되어 가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에펠탑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어찌되었거나 에펠탑 전망대에 올라 파리전역을 한눈에 조망하고 왔어야 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아쉬움을 에펠탑위 허공 속으로 날려 버리고 뒤돌아서고 말았다.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 공학자였던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철탑인데, 에펠은 철교와 뉴욕의 자유 여신상의 내부를 설계하였고 에펠탑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에펠탑은 높이 320m로 탑이 위치한 사방으로 낮은 건물이 있어 먼 곳에서 보면 평면 구조상의 미감을 자랑하고 있어 파리를 상징하는 건물로 등장하고 있다. 구조공학상으로 지금에 와선 감탄을 하게 하지만 처음 탑이 건축될 때 석조건물에 익숙해 왔던 파리지앙들이나 보수주의 건축가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고 한다.
국가 차원에서 도시미의 조화를 제일주의로 강조하고 관리하는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파리시민들은 고딕건물과 철탑은 조화를 깨뜨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에펠탑은 파리 전체와의 균형미는 물론 관광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탑에 오르면 파리시 전체를 볼 수 있으며 세느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내려다보면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유람선(Bate au Mouche)이 지나는 모습도 인상적이라 한다.
철탑 상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두 군데에서 내려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어 휴식도 즐길 수가 있는 명소중의 명소였다.
특별한 날이나 망년회(Réveill on)를 기념하는 연주 등을 이곳에서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2000년1월1일 0시에 에펠탑에서 거행된 불꽃축제는 우리나라 TV를 통해서 인상적으로 시청할 수 있었다.
버스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서비스로 콩코르드 광장주변을 돌며 버스투어를 할 기회를 베풀(?)었다. 콩코드 광장은 가로수 길로 유명한 상젤리제 거리와 튈르리 정원 사이에 위치한 광장인데 북쪽으로 마들렌 성당이 보이고 남쪽으로 세느강에 떠 있는 콩코르드 다리가 자리해 있다.
광장은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있어 파리 시내 주요 볼거리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는데, 면적은 동서 360m, 남북 210m에 이르며 18세기에 조성되었다 한다.
1770년에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프랑스혁명 후 단두대가 놓이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처형을 당한 곳으로, 당시 파리 시민들은 광장 근처에 가려 하지 않아 무척 황량한 느낌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1795년 비로소 공포정치가 끝나고 광장의 명칭은 조화를 뜻하는 ‘콩코르드’로 변경되면서 단두대가 있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생겼고, 그 옆으로는 나폴레옹이 이집트 총독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룩소르 신전 오벨리스크가 자리해 있었다.
이젠 프랑스를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야하는 곳, 某사모님과 某사모님 이 반드시 들려야 했던 곳으로 그곳으로 버스는 이동하고 있었다. 라파예트백화점으로...
프랑스파리 9구역 오스만거리(Boulevard Haussmann)에 위치하고 있는 파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초대형 백화점으로 유명하며, 세계 곳곳에 지점을 가지고 있으며, 1893년 테오필과 그의 사촌 알퐁이 함께 라파예트 거리에다 문을 연 작은 잡화점으로 시작한 것이 1900년경 대규모로 확장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다.
20세기 유럽 전반에서 크게 유행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계단과 장식들 그리고 철제와 유리로 만들어진 화려한 초대형 돔이 깊은 인상으로 남을 것 같아 그녀를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각층별로 다양한 의류 매장을 비롯해서 각종 명품을 구비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명품가방 매장을 점령하고 있어서 그녀와 나는 아이쇼핑을 포기한 채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와 뒷골목 커피 전문점에서 1유로짜리 커피 한잔 시켜 놓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백화점을 나오는 某사모님과 某사모님의 손에는 어김없이 명품가방이 담겨 있는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얼굴표정에는 피곤함이 다 사라지고 미소만 흐르고 있었다. 보기에 아주 좋았다.
30년 남편 뒷바라지에 비하면 鳥足之血이 아닌가? 그랬~다! 우리 남편들은 그녀들에게 이보다 더한 선물을 사드렸어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었다.
금요일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거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여자경찰들이 분주하게 차량과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사연인즉슨 공무원인 경찰들이 파업집회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가이드들도 비상사태임을 감지했는지 서둘러 버스에 승차하여 급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주말 파리를 빠져 나가려고 몰리는 차량들과 공항고속도로 주변의 사고로 버스는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사고처리가 끝났는지 막혔던 도로사정이 좋아지면서 여유롭게 드골공항에 도착을 해서 수속을 밟았다.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으나 위도의 차이로 어둠은 좀처럼 찾아들지 않고 있었다.
탑승하기 전 의자에 앉아있는 식구들의 표정은 지친 모습이었으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설렘으로 상기되어 있는 듯 보였다. 이젠 집안 걱정들을 하는 모양이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나서 또 한번의 우연을 겪었다. 내가 앉은 바로 앞자리에 제정원 베드로 신부님 좌석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순간 머릿속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라.”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8박 10일간의 긴 여정과 타이트한 일정 때문인지 좌석에 머리를 기대자마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기내에서 제공하는 식사시간 외에는 취침으로 일관해서인지, 아니면 떠날 때 보다 비행시간이 짧아서 그런지 지루함은 느끼지 못했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5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8박10일간 같이한 식구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젊은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시느라 고생하신 김명식씨 장인어른, 사진 찍을 때마다 애교스런 표정을 짓던 손이 크고 후덕하신 사모님과 국장님, 식구들 챙기느라 고생한 이승숙 팀장님과 보조역할 충실히 수행한 이상봉 동장님, 아픈 허리를 이끌고 다니느라 고생하신 정연숙 동장님과 풍채 좋은 디카매니아 기권일 서방님, 인상 깊게 부부의 애정을 나타내며 줄기차게 붙어 다니던 유승모 팀장님 부부, 사모님 인상이 姉妹같이 닮아서 늘 구분하기가 힘들었던 박정권 팀장님과 박재균 팀장님 부부, 구찌가방 선물 받고 즐거워하던 사모님과 한재석동장님, 애교만점에 우리식구들에게 산소를 불어넣어준 생기발랄한 사랑하는 딸 황지연과 그 엄마 김복순 동장님 모녀, 우리 모두가 깊은 인연으로 만들었던 잊지 못할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길 바라면서 난생처음 다녀온 서유럽 4개국 유별난 여행에서 겪었던 일들을 틈틈이 짬을 내어 기억해 보았다.
2012. 6. 1
※가끔은 여행을 다녀온 후 사진을 뒤적이지 않으면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우려해서 더 늙기 전에 몇 글자 써서 기록으로 남깁니다.
|
첫댓글 벌써? 부지런하시네요^^ 바람직한 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