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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간일집의 저자 유전(劉荃)일행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의 신라 망명의 역사적 배경
1. 망명동기: 서기 781년 건중지란(建中之亂) 발발
2. 망명동기: 악신(惡臣) 재상(宰相) 노기(盧杞)의 살인만행
최종 고증문
서기 782년도에 신라 구룡포항에 상륙하는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는 이어서 2년후 784년에는 이미 신라 궁궐에서 당나라 조정에서 당나라 제 9대 황제인 덕종(德宗)이 보낸 신라 제 37대 선덕왕의 작호 수여를 위해 파견한 옛 당나라 궁궐의 친구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塤) 사절을 만난다.그리고 이들은 이듬해인 서기 785년 선덕왕의 사망에 이어 집권하는 신라 제 38대 원성왕(元聖王) 14년간을 함께 하면서 신라 하대(新羅下代) 정치문화를 변혁시킨다.
서기 782년 건중팔학사 일행은 구룡포항(九龍浦)(서기 782년 당시 구룡포(九龍浦)는 창주룡포(蒼州龍浦)라 했다
서기 784년 신라 37대 선덕왕 5년 신라 궁궐에서 당나라 사절 호부랑중 개훈(蓋塤)을 만남.(죽간일집에는 관련 二首의 시문)
이들의 한반도 신라 정치문화에 참여는 먼 훗날 한국 사회의 오늘날 찬란한 국가발전의 기초로 작용한 결과가 될 것이다
이 귀중한 사료(史料)가 오날 날 한반도 역사(歷史)에서는 감지되지 못하고 있어서 이 글의 전개는 오직 그 잠자고 있는 역사의 소재(素材)를 수면위로 부상(浮上) 시킴으로써 신라 역사의 새로운 기록이 발굴되어 밝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따라서 신라 원성왕릉의 그 서역인을 닮았다고 하는 유독 신라왕들의 무덤중에서 이 제 38대 원성왕릉 앞에만 서있는 문인상(文人像) 무인상(武人像) , 무장상(武將像)의 그 주인공(主人公) 인물의 파악을 위한 것이다.
건중팔학사(建中八學士)의 망명 동기(動機)
1.건중팔학사의 망명시기
서기 782년 중국 당나라 제 9대 덕종(德宗) 건중(建中) 3년/ 신라 제 37대 선덕왕(宣德王 3년)
2.건중팔학사 명단 직위
유 전 (劉 荃) 한림학사 병부상서(兵部尙書)
임팔급(林八汲) 한림학사 이부상서(吏部尙書)
송 규 (宋 圭) 어사대부(御史大夫)
설인검(薛仁儉) 한림학사(翰林學士)
허 동 (許 董) 한림학사(翰林學士)
최 호 (崔 沍) 시랑(侍郞)
참고:登科후 초임을 랑중(郞中), 만 1년후 尙書郞,3년부터 시랑(侍郞)이라고 부른다.
권지기 (權之奇) 한림학사(翰林學士)
공덕수 (孔德狩) 중랑장(中郞將)
참고:이곳에서 평택임씨 시조(始祖)가 되시는 임팔급공에 관하여는 강릉유씨 문집에 남아 있는 사료,그리고 평택임씨 자체
각종 고증문서에서도 임팔급공의 처음 한자 표기는 임팔급(林八汲)이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현행 평택임씨 문중에서의
임팔급공의 휘(諱)는 임팔급(林八及)으로 통일되어 사용되고 있다.
남양송씨(南陽宋氏) 송규 시조(始祖)께서는 서기 782년 8월 한반도 구룡포항에 상륙 그 당시의 표기는 "宋圭" 였으나
오늘날 전남 고흥군 동강면을 주된 세거지로 분포된 후손들의 현행 기록은 "宋奎"로 변해 있음을 이곳에 표기한다.
3.建中八學士와 여타 한반도로 건너 온 역사상 수많은 팔학사 팀들과의 확연한 구별성(區別性)
대륙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로 한반도에는 역사상 수많은 八學士팀들이 도래한다.이 팔학사팀들은 그 실체가 증명됨이 거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연유로 일반명사화 되어 유명무실한 언어로 취급된다.이에 반하여 여기서 다루는 건중팔학사는 현재 8명의 학사중 강릉,거창유씨 시조가 된 유전(劉荃),평택,나주임씨 시조가 된 임팔급(林八及),전남 고흥군 동강면을 세거지로 사는 남양송씨 시조가 된 송규(宋圭)가 현재 한반도에 실체적 문중집단을 이루어 그 후손들이 번성할 뿐만아니라,이 팔학사의 이름은 함께 서기 782년도에 한반도에 도래하여, 신라 궁중의 신라정치에 참여하며, 그 기록은 유전이 남긴 132수의 죽간일집이라는 시문집에 잘 나타나 있으며,함께 중국 당나라 대명전(大明殿) 궁궐에서 근무하던 동도해 온 동료 팔학사에게는 신라궁궐에 함께 근무하면서, 각기 한 수씩의 시문을 지어 준 기록이 동료 7학사에게 준 시문이 이 죽간일집에 그대로 실려 전해 오고 있는 실체적 인물들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무수히 건너 온 실체가 증명되지 않은 팔학사와는 구별지어 특화(特化) 시켜 줄 필요가 있어 서기 782년 당 덕종의 연호 건중(建中) 즉 건너 온 그 당시의 연호를 따서 "建中八學士"팀으로 부르고져 하는 것은 이 팔학사팀은 신라시대를 신라상대,신라중대,신라하대의 3代로 구분짓게 되는 그 역사연대 구분의 시발점이 바로 이들이 한반도에 도착해서 2년후에 신라궁궐의 제 37대 선덕왕(宣德王) 행사(서기 785년)에 보내 온 중국사절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壎)을 만나는 2首의 신문이 올라 있으므로 인하여 그 확실한 연대와 함께 이들의 신라정치 참여 사실이 확실히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신라정치 참여는 4년후 서기 788년 신라원성왕(元聖王) 4년 신라 궁중에서는 기존의 국학(國學)이라는 궁중교육,과거시험 선발방식에서 이들 팔학사 엘리트팀의 중국 기성 관료 출신들의 경험을 반영해서 새로 도입되는 중국 과거제도를 도입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며,한반도 정치의 새로운 지평이 전개된다.역동적 모텐텀이 작동케 되는 역사적 새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신라 시대의 상대,중대,하대의 삼대 구분이 바로 이들의 신라궁궐 정치에 참여하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宣徳王:재위 780-785)과 제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6-798)의 시대와 이곳에서 말하는 건중팔학사의 한반도 구룡포 상륙 서기 782년도와, 신라 궁궐에 오게 되는 당나라 사절 호부중랑 개훈을 서기 784년 甲子年에 만남과,이 사절이 돌아 가는 모습을 그린 서기 785년의 기록이, 서기 785년 선덕왕 행사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들이, (1)중국의 구당서(舊唐書),(2)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3)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 ,그리고 (4) 강릉유씨 죽간일집 목판본(안동 한국국학진흥원,서울 국립중앙도서관)등의 소장 기록에 공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한반도 역사에 강력한 모멘텀을 작동시킨 엘리트 기성(旣成)관료 출신들로써 한림학사(翰林學士)의 과거시험을 登科한 엘리트 관료 출신들인 것이다.
한적한 신라 궁중에 당나라 조정에서 고위관직을 경험한 팔학사 기성 관료들이 대거 선덕왕때 합류하며,선덕왕 사망 서기 785년 正月 13일 이후, 이어서 제 38대 원성왕이 집권하여, 14년간을 집권후 사망한 것이 서기 798년 12월이며,이로부터 1년 반이 지나면,이 팔학사의 일원인 강릉,거창유씨 시조가 되어 있는 죽간일집(竹諫逸集)의 저자 유전은 서기 800년 10월에 경주에서 멀지 않은 영천(永川) 땅으로 옮겨, 전원(田園) 생활을 하다가 서기 805년 3월에 그곳에 수송대(愁送臺)라는 누각(樓閣)을 짓고 중국에서 온 동료 학사들과 함께 올라, 중국땅을 향하여 망향(望鄕)의 향수(鄕愁)를 지닌채 살다가 그곳 영천 녹전동 현재 묻혀 있는 그 땅에서, 22년을 보낸 후,서기 822년 2월에 72세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혀 있으며,오늘날 그 후손들이 찾아 제례를 올린다.선덕왕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선덕왕 5년(서기 784년) 왕위를 물려줄려고 한다.활발하던 기성 정치인인 선덕왕이 갑자기 왕위를 물려줄려고 하고 군신들의 만류로 그만둔 이유는 무었일까
강릉유씨 죽간일집 목판본( 안동 국학진흥원 장판각에 소장중)의 기록에는 "諸學士浮海出東 갑자춘(甲子春)逢上國星軺故人
贈詩曰爲問 皇朝聖天子平安依舊袞裳垂........."윗 글에서 갑자춘(서기 784년 봄에) 이미 이들 팔학사는 전원 신라 궁궐에서
당나라 덕종이 보낸 절사 戶部郞中 蓋塤을 만나서 옛 중국 궁궐의 덕종황제의 안위를 묻는다.
甲子春 즉 서기 784년이다.782년 8월에 구룡포항에 상륙하여 구룡포 현재 구룡포 초등학교가 소재한 창주리(蒼州里)에서
초옥을 짓고 살다가 어느덧 784년(갑자년) 봄에는 이미 경주 신라 궁궐에서 중국서 온 옛 궁중동료를 마지하는 시를 남긴다
그리고 785년 1월 13일 선덕왕이 사망하고,785년 행화교(杏花橋)에서 이 사절을 석별하며 또 한수의 시문을 죽간일집에
남긴다.그러면 당시 신라 궁전에는 서기 784년 (선덕왕 5년 당시) 여덟명의 중국에서 온 중국인 옛 중국궁중 관료 5명과
작호식에 파견 온 중국 사절 호부랑중 개훈을 포함 9명의 중국인이 이 좁은 신라 궁궐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선덕왕이 서기 784년 4월에 왕위를 물려 줄려고 했던 그 원인을 이 9명의 중국인의 합류로 인한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한
때문으로 생각 할 수있다.특히 호부랑중 개훈은 신라왕 책봉식의 책무를 띠고 온 당시의 중국 사절이다.정신적 압력이 심했을
때일 것이다.그리고 이 사절은 이제 선덕왕이 사망한 후 살구꽃 피는 다리에서 8명의 옛 동료 학사들과 헤어진다.
그리고 이제 원성왕이 785년 집권하며,788년에는 중국의 과거제도를 본 딴 독서삼품과가 설치된다.
그곳 유전의 묘소는 그곳 주민들 사이에서 유릉(劉陵)이라고 불려지고 있었으며,강릉유씨 집안의 문중보(門中譜)에는 능묘사적실기(陵墓事蹟實記)를 통하여 소상히 밝히고 있다.능묘(陵墓)란 왕이나 제상(宰相)의 묘를 가리키는 어휘이며,유전(劉荃)은 신라 궁궐에서 그 직책이 재상에 합당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있다.죽간일집 시문에는 영주자견(永晝自遣)이 있다.이 시문의 내용에는 "군국안위계자신(軍國安危繫此身)/ 국방의 안위가 이 몸에 달렸나니".....이처럼 엄중한 문구가 나타나고 있다. 신라 하대 의 제 37대 원성왕 치세 신라정권에서 국방의 최고 책임자였음을 나타내는 글귀이다.劉陵에 합당한 글귀이다.
당시 중국 당나라 제 9대 황제 덕종(德宗) 건중(建中) 三年 팔학사와 함께 한반도로 올때 당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에 등과(登科)한 신분으로 그 직책은 현재의 우리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兵部尙書)였음을 관련해 상기할 필요가 있다.
4.서기 782년 前後 시대의 "建中八學使"의 한반도 渡來 당시의 중국 정치상황
가.서기 781년 당 덕종 建中 2년 건중의난(建中之亂)의 발발
나.서기 782년 당 덕종 건중(建中) 3년에
서기 781년 당 덕종 建中 2년 "建中之亂" 발발
서기 782년 建中 3년 건중팔학사 구룡포 상륙
서기 784년 갑자년 봄(甲子春) 신라궁궐에서 당나라 사절 만남
서기 755년 당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부터 시작된 안록산(安祿山)의 난은 이제 서기 762년 대종(代宗) 황제 취임 당시까지도 이어진다.그러나 새로 취임한 대종 황제 다음해인 서기 763년 안록산의 난은 일단 멈춘듯 하지만 그후로도 각 번진(蕃鎭)의 할거(割据)는 변함없이 지속된다.서기 780년 당 제 9대 황제로 덕종(德宗)이 집권후 건중(建中)이라는 덕종의 첫 연호(年號)가 시작되고 2년후인 서기 782년 건중 3년도에는 이제 한반도로 건중팔학사가 도래(渡來)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들의 당나라 조정에서의 관직은 공히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등과(登科)한 최 고급 인재들인 것이다.현재의 장차관(長次官) 급인 병부상서 이부상서 어부대사 이부시랑등등의 장차관급 관직에 있던 인물들이다.
이러한 고위관직의 인물들이 대거 여덟명이나 함께 낯설은 당시의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버리고, 가솔을 뒤로 한체 황망히 떠나 올때는 그만한 사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이를 살펴 보기로 한다.
가.당 덕종(德宗) 초기의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성서기 782년 건중 3년 팔학사 동도
가.당 德宗(재위기간 780-794년)이 780년 (건중 1년) 집권하고 나서, 다음해 781년 (건중 2년)에는
건중 2년(781년)에는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보신(李寶臣)이 사망하자,아들 이유악(李惟岳)이 덕종에게 그 자리의 승계 요구를 받고 거절한다.그러자 이 사람은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열(田悅)과 연합하여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이정기(李正己),산남동도 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 양숭의(梁崇義)와 함께 거병하여 모반(謀反)한다.
아울러 이 해 즉 서기 781년 (당 덕종 建中2년에는 중국역사상 최고의 악신 재상 노기(盧杞/卢杞)가 재상이(宰相)이 된다.
그리고 현신(賢臣)들을 무참히 살해(殺害)하고 궁중은 피비린내가 진동하게된다.
나.중국 역사상 최고의 악신(惡臣) 노기(盧杞)가 재상(宰相)이 되다.
(1) 악신(惡臣) 재상(宰相) 노기(盧杞/卢杞)
노기(盧杞/卢杞)는 어떤 인물인가
노기(盧杞/卢杞)는 중국 하남성 활현(滑縣) 사람이며,건중 2년 서기 781년에 재상(宰相)이 되며,서기 782년 한반도로 건너온 유전(劉荃)등 건중팔학사가 한반도로 건너 오기 1년전에 재상이 되어, 당나라 조정을 피로 물들인다.중국 역사상 최고의 악신(惡臣) 이었으며, 용모가 추하고,얼굴은 푸른색을 띄었으며,현명한 신하들을 시기 모함하고,파벌을 조장하기를 즐겼으며,재상이 된후 많은 현신(賢臣)들을 살해한다.양염(楊炎),안진경(顔眞卿),엄영(嚴郢) 장일(張鎰)등 현신들이 이 노기의 손에 차례로 살해된다.군수물자 조달을 위해,가혹한 세금을 신설하여,가혹하게 수색해 징수하자, 온 장안은 바로 교역이 정지하며,그 통한(痛恨)의 소리가 천하를 뒤엎는다.
(2) 경원병변(涇原兵變) 발생/서기 783년 덕종 황제 피신 사건
덕종(德宗)의 봉천(奉天) 피신 사건(涇原兵變)의 발생
덕종(德宗)은 장안성이 반군에 함락되자 서기 783년 덕종은 봉천(奉天:현재 섬서성 건현/乾縣)으로 피신하나,젊은 장수 주차(朱泚)에게 포위당하며,노기조차 덕종을 만남이 차단된다.이 서기 783년 (건중 4년) 당덕종의 섬서성 봉천(奉天) 피신 사건은 역사상 세번 있던 황제피신 사건중 하나로써 큰 사건이다. 노기는 이 해 건중 4년(783년 ) 12월 신주사마(新州司馬)로 좌천당하며,덕종 정원(貞元) 원년(서기 785년 정월에 사면되어 길주장사(吉州長史)로 갔다가,다시 풍주별가(豊州別駕)로 가지만 곧 풍주(豊州)에서 사망한다.경원병변(涇原兵變)은 바로 서기 783년 당덕종 건중 4년 있었던 덕종 황제 피신사건을 말합니다.
4명의 현신들을 차례로 죽이고 못난 신하들을 등용했던 노기의 말년은 이처럼 좌천과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건중팔학사의 한반도 도래 싯점의 당나라 조정은 덕종의 포위와 피신에 이어 악신 노기의 광기가 최고로 발휘되던 조정의 정황가운데 이러한 한반도로의 피신이 이루어진 것이었다.덕종은 경원 (涇原) 군대가 장안 궁궐이 함락되며, 덕종은 봉천(奉天)으로 피신하자, 주차(朱泚进入宣政殿自立为帝,国号大秦,年号“应天”。주차( 朱泚)는 장안성을 침입한후,선정전(宣政殿)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한후,국호를 대진(大秦)이라고 부르며,그 연호를 응천(應天)이라고 했다.당 덕종은 피신간 봉천에서도,주차(朱泚)에게 포위당한다.이 당 덕종 황제의 봉천피신사건을 경원병변(涇原兵變)이라고 부르며,장안성 당나라 궁궐에서 서기 782년 건중팔학사가 한반도로 떠나온 다음해 서기 783년 (건중/建中) 4월의 일이다.안으로는 악신 재상 노기(盧杞)
주자( 朱泚)에게서 포위당하며,이러한 민중은 세금 수탈에 저항하여 온 장안의 교역이 멈추고 이러한 상황에서 건중팔학사가
그 당나라 장안 궁궐을 떠나,멀고먼 이약없는 뱃길을 떠나 온 것이다.심오한 이주 배경이 험악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노기(盧杞/卢杞) (?-785年),의 전횡이 극심
자는 자량(子良)이며,지금은 중국 하남성 활현 사람이다.당나라 재상이며,간신(奸臣)이다.
건중 2년 (서기 781년) 2월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며,경기 관찰사가 된다. 10일 후에 다시 문하시랑(門下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된다.재상에 임명되자,능력있는 현신(賢臣)들을 질투하고,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죽음으로 내어 몬다.그가 모함해서 살해한 賢臣들은 양염(楊炎),안진경(顔眞卿),엄영(嚴郢),장일(張鎰)등을차례로 죽인 후,자기 파벌인 관파(關播),우기(于頎),조찬(趙贊)등의 인물들을 등용한다.군수 조달을 위해서 괄율(括率) 제도를
실시하며,상점에는 가혹한 수탈을 실시,가옥마다에는 가혹한 가옥세를 부과하고,제맥세(除陌稅)를 실시한다.온 장안과 천하는
원망의 소리로 뒤덮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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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盧杞,卢杞(?-785年),字子良,滑州灵昌人(今河南滑县西南),唐朝宰相,奸臣。
建中二年(781年)二月升任御史大夫、京畿观察使。十天后,任门下侍郎、同中书门下平章事。任宰相以后,嫉妒贤能,稍有不顺从自己的人,必定要致他于死地。 [7] 先后陷害杨炎、颜真卿、严郢、张镒等人 [8-10] ,推举同党关播、于颀、赵赞等人 [11-12] 。为了筹集军饷,又实行括率、增收房屋间架税、设立除陌税。长安为此停止交易,痛怨之声,喧嚣遍及天下。 [13-14] 德宗在奉天被朱泚围攻,李怀光自魏县赶赴国难。卢杞从中阻挠不让其晋见皇上,李怀光大怒,于是心怀异志。 [15]
建中四年(783年)十二月被贬为新州司马。 [16] 贞元元年(785年)正月,遇到大赦令,卢杞调任吉州长史。 [17] 后改授澧州别驾。 [18] 不久死于澧州<중국 인터넷 노기에 대한 원문>
<번역문>
노기/盧杞,卢杞 (?-785年),
자는 자량(子良)이며,지금은 중국 하남성 활현 사람이다.당나라 재상이며,간신(奸臣)이다.
건중 2년 (서기 781년) 2월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며,경기 관찰사가 된다. 10일 후에 다시 문하시랑(門下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된다.재상에 임명되자,능력있는 현신(賢臣)들을 질투하고,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죽음으로 내어 몬다.그가 모함해서 살해한 賢臣들은 양염(楊炎),안진경(顔眞卿),엄영(嚴郢),장일(張鎰)등을차례로 죽인 후,자기 파벌인 관파(關播),우기(于頎),조찬(趙贊)등의 인물들을 등용한다.군수 조달을 위해서 괄율(括率) 제도를
실시하며,상점에는 가혹한 수탈을 실시,가옥마다에는 가혹한 가옥세를 부과하고,제맥세(除陌稅)를 실시한다.온 장안과 천하는
원망의 소리로 뒤덮인다.덕종은 경원 (涇原) 군대가 장안 궁궐이 함락되며, 덕종은 봉천(奉天)으로 피신하자,
주자(朱泚进入宣政殿自立为帝,国号大秦,年号“应天”。주자( 朱泚)는 장안성을 침입한후,선정전(宣政殿)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한후,국호를 ,대진(大秦)이라고 부르며,그 연호를 응천(應天)이라고 했다.당 덕종은 피신간 봉천에서도,주자(朱泚)에게 포위당한다.
노기는 이 와중에 건중 4년(783년) 12월 신주사마(新州司馬)로 좌천당한다.785년 정월에 대 사면에 포함되어 사면된 후 다시
길주장사(吉州長史)로 가게 되지만,다시 풍주별가(豊州別駕)로 옮기지만,곧 오래지 않아 풍주(豊州)에서 사망한다.7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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