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관, 그는 누구인가?
수원고교를 갓 졸업하고 아무 것도 모르던 철부지 시절. 대학엔 입학했지만 공부밖에 몰라(1학년 1학기 시절 과학반에서 성적은 1등?) 사회성도 부족하고 외톨이로 통학하던 나.(수원통학생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죠)
반항심도 있어 RNTC 짧은 머리가 두발 불량으로 지적되자, 아예 빡빡머리를 만들어 '불교 학생회원'으로 오해를 받던 동키호테 나.(쓸데 없는 반항심이었죠)
이것이 대학 생활이 아니다싶어 1학년 끝날 무렵, 방송실 보도부에 들어가 방송실원들과 사회성도 익히며 보도부장도 했었던 나.(이철환 방송실장 등 부원들의 도움이 많았었죠)
2학년 때에는 방송반을 주축으로 '연극반'을 조직, 생애 최초로 연극 '꿈꾸는 아이' 주연도 했었던 나.(더불어 사는 삶에 큰 도움이 됐죠)
초임지 용인대지초에서 3년간 근무하며 비약을 꿈꾸던 나.(영어단어도 외우고)
두번째 학교 수원매원초에서 야간대 편입으로 점차 꿈을 행동으로 옮기던 나.(주경야독의 즐거움도 맛보고)
세번째 학교 수원 세류초 모교 근무를 자원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나.(그 당시는 원생들 중 연소자였고요)
전직으로 남양주 금곡중에서 국어과 교사로 중등의 세계를 처음 접했던 나.(숙직실은 제2의 고향)
수원에서의 통근이 어려워 오산여중으로 옮겨 학교신문 '창포'를 월간으로 만들고 35세에 결혼한 나. (국어교사로 기초를 다짐)
수원구운중에서 처음으로 주임교사(학년,환경,연구) 경력을 쌓은 나.(도 단위 활동도 여러 차례 함)
신설교인 수원숙지중에서 개교요원으로 교무와 상담부장을 했던 나.(인간관계의 어려움 또 느낌)
그러나, 전문직 도전의 계속 실패로 농어촌 점수를 따러 용인기흥중에 갔던 나.(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도전은 계속해야 함)
다행히 전문직에 합격하여 99년 9월 안산교육청에 발령받아 5년째 근무하고 있는 나.(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계속 인간 수양 중임)
***다음에 계속....
첫댓글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지금의 카페지기님이 되셨군요. 저는 도전정신이 부족했나봐요. 그냥 선생님 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인줄 알고 우리반 아이들과 알콩달콩 지내다보니 (그것이 최고의 선생님인것으로 알고) 지금도 꼬마들 앞에서 재롱부리며 지낸답니다. 오래만에 뵌 동문님들 정말 홧팅입니다.
선생님 말씀은 제 동생과 연무초에서 같이 근무할 때(?) 많이 들었죠. 사실 어린이로부터 존경 받는 선생님이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봅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 커다란 가르침을 주는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남편님은 화성 보이 스카우트 함께 하고 결혼식 흑백사진까지 찍어 주셨는데 답례가 소홀해서 송구
너무 잘 쓰셨습니다. 작문실력이 뛰어나신것 아닙니까? 성공한 사람은 고생과 비례한다고 하니 성공하셨군요? 고맙습니다 최승화
최승화님의 입지전도 궁금합니다. 항상 겸손하며 예의바르고 그 잔잔한 대화, 존경합니다. 초석회 총무일도 성실히 하시고.... 건승입니다.
이영관씨가 세류 카페에서 홍보를 많이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가입합니다. 난 숙지중학교 옆에 살고 아무튼 반갑습니다. 유익한 정보 부탁 드립니다.
박금자 님 반갑습니다. 좋은 만남, 서로에게, 인생살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