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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학이란 무엇인가
Ⅰ. 들어가는 말
* 이덕휴
본 논문은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아직 학문적 인지도가 비교적 낮다고 생각되는 법신학(Rechtstheologie)이라는 학문분과를 소개하고, 법학과 신학의 접목이라는 그 문제성을 필요에 따라 연구․발전하는 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서 양자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신학이라는 분야는 우리의 학계에서는 다소 생소한 분야로 취급되지만, 서구 유럽 등지에서는 익히 알려져 있는 학문분과로서 신학계에서보다 오히려 법학계에서 더욱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실정법이 사회통제의 궁극적인 수단이라면 신학적 판단은 사회정의 실현의 안내자일 뿐, 법적 강제력을 동원하는 데는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가치가 존재의 원리로 파악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본질이라고 한다. 가치와 반가치의 극복으로서의 신학은 가치와 현실과의 대립이며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곳에서 출발하여 순간마다 새롭게 출발되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작품으로서의 실정법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가치에 관계된 사실이다. 따라서 법은 부정의로울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신 앞에서’(vor Gott) 본질 없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법신학을 요청하게 된다.
법신학이란 말은 1913년 라파포르트(M.W. Rapaport)가 “종교적 법이론”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하여 “법의 신학” 또는 “법의 신학적 정초”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법학과 신학의 견련성에 대한 논의는 어거스틴이나 스콜라 학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에서도 발견되지만, 법신학이 독립적으로 논구되기는 근대 이후 법학과 신학이 분리되었던 19세기부터이다. 법신학이란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진정한 이웃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신학적인 물음과 법신학의 실천적 과제로서 오늘의 사회적 정의의 실천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있다.
법신학이란 말을 분해하여 고찰하면 그것은 법학과 신학의 복합명사이다. 분명한 것은 법과 신학은 단절되어 있는 것 같지만 연결되어 있다. 법과 신학이 단절되어 있다는 것은 법이 말하려는 정의에서 신학이 말하려는 정의에로 가려면 건너뛰어야 하는 江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신약성서에서도 보여주고 있으며, 현금의 위대한 법학자요 신학자인 쟈끄 엘룰(Jacques Ellul, 1912-1994) 같은 사람이 강조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여 법은 신학과 연결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법의 바탕에는 신학이 깔려 있으며 법적 정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학적 정의다. 둘째, 신학에서 말하는 정의는 법의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법의 정의가 꼭 있어야 신학의 정의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다만 법적 강제를 수단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물리적 제도로서 법의 정의는 신학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봉사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우리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서 논의할 수 있는 바, 신학은 사랑의 정의를 의욕하고 법학은 공정한 게임의 법칙에서 정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야 한다. 따라서 신학의 정의는 일방적인 반면, 법학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정의의 환경을 이루는 바탕이지만, 정의는 사랑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정의가 서지 않으면 법의 정의는 곤란하게 되고 법적 정의가 서지 않으면, 신학의 정의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이하에서 법과 신학의 관계를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악의 체험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방법이다. 법이 지키려는 선, 즉 법익과 신학이 지키려는 선의 방법에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악에 대한 그 체험의 원천이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 정의(justice)와 정당화(justification)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법학이 전자를 수용하는 반면, 신학은 후자의 문제를 다룬다. 오늘날 정의론의 핵심이 되는 정당화의 문제는 사실상 법학이 신학의 방법을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양자의 관계를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풀어보는 입장이다. 신학의 방법은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를 말하는 반면, 법학은 제3자와의 관계, 곧 ‘나와 그’의 관계를 규정한다. 넷째, 최근 법철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해석학(dogmatic)을 가지고 存在(sein)와 當爲(sollen)의 해석학적 순환을 통하여 양자의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법철학적 사고와 밀접히 연관이 있지만, 법철학이 묻고 스스로 해답을 내리지 못했던 자리에 우리의 법신학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본 논문에서 찾고자 한다.
Ⅱ. 법신학의 과제
1. 법학과 신학의 관계
법신학의 과제는 신과 그의 법(νὀμος, Law)에 대하여 인간과 함께 관련되고 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여 신법(divine law)의 내용에 관한 학문으로서 신이 각자의 인간에게 부여한 직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각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에 대한 신학적 연구이며, 인간을 위하여 신에 의하여 창설된 여러 제도(institution)에 관한 연구이다.
그러나 법신학은 기초신학(Grundtheologiewissenschaft)의 한 분야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法學의 한 분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이 유에 해당한다면, 법신학은 그것의 특별한 하나의 종에 불과 한 것은 아니다. 신학이란 항상 그 어떤 형식에서도 신의 현존재의 근본문제가 포괄적인 것으로 이름 붙인 것을 문제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법신학은 신학의 특수한 분야에 속하기 때문에 신학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인 수법에 기해서 반성하고, 논의하고, 여기에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를 答하고자 하는 신학상의 원칙문제이자 근본문제이기 때문에 신학의 다른 문제와 구별될 뿐이다. 다소 무리한 표현을 쓰자면, 법신학은 신학적 안목을 지닌 법학자가 묻고, 법학적 이해를 가진 신학자가 대답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훌륭한 법신학자라면 양 분야에 정통하여야 한다.
법학과 신학의 교류는 비교적 독일에서는 활발한 편이다. 주지하듯 현대의 위대한 형법학자이자 법철학자, 법신학자, 법학사자, 그리고 교회법학자인 볼프(Erik Wolf, 1902-1977)와 역시 현대신학의 거장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교류를 들 수 있다. 에릭 볼프에 의해서 시작된 독일의 에큐메니칼 정신과 사회윤리적․정치적 문제를 들고 나온 '바덴 기독교 사회국민당'(Badisch Christlich Soziale Volkspartei)에서 바르트가 볼프에게 간 것과 아울러 바르트가 서거하기 직전까지(1968. 11. 27) 서신을 나눈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볼프의 일기 메모를 보면, 칼 바르트의 첫 방문은 1945년 7월 2일이었고, 이 해에 두 번이나 더 방문하였다. 볼프는 당시 프라이부르크의 총장이었던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도 교분이 두터웠었다. 바르트는 볼프를 위한 첫 번째 기념 논문집에서도 “요한의 이름으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의 세례로”(Von der Taufe des Jahannes zur Taufe auf den Namen Jesu; Existenz und Ordung. 1962, S. 3-14)라는 논문을 실을 정도였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 법신학에 관심 하는 학자로서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최종고 교수를 비롯하여 연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지승원 목사를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신학계에서 법학적 관심을 가지는 학자는 많지만 특별히 법신학적 성찰의 토대 위에서 학문적 성과를 올리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 이유는 신학에서의 법에 관한 한(神法), 그것은 율법 도그마틱에 그 원인이 선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세속의 법철학(Rechtsphilosopie)은 항상 법에 관한 정당성의 여부를 그 대상으로 하지만, 율법에 관한 연구의 대상은 그것의 정당성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나타나고, 이것을 신앙과 신학적 반성 위에서 성경의 내용과 율법의 가르침을 해석하는가의 분야로 한정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법철학이나 법신학은 각각 법학의 기초법학과 신학의 기초신학의 학문분야라는 원인, 즉 학문으로서 포괄적인 분야가 아니고 아주 특별한 형식객체이기에 그 학문적 운신의 폭이 좁은 데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의 학제상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즉 법학자가 정규 신학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대학의 학부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데 문제가 있다. 법과대학 4년, 대학원(석․박사) 5년 이상을 공부하고, 신학부 4년을 건너뛰더라도 신학의 특별한 과정(M. Div) 3년, 그리고 신학석사 및 박사(Th. M, Th, D) 8년 이상을 수업하여야 학계에서 인정하여 주고 비로소 신학자로 입신하는 우리의 사회․교육 문화풍토가 신학과 법학의 교류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나아가서 국가의 법이 종교의 법에 관여할 자리가 없고 종교는 국가에 기대할 심산이 없다는 것이 독일과 한국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되고 있다. 또한 법신학 과목의 학문적 시장성이 없다는 문제도 법신학의 중요성을 절연시키는 요인이라고 판단된다. 아울러 신학이 세계에로의 개방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신학은 오직 신학적 판단이어야 한다는 것과 방법론적 폐쇄성에서도 학문적 운신의 폭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사회개방성의 문제와 관련된 가장 심각한 폐쇄성의 단면이다. 신학은 오직 신적인 바탕 위에서 운위되는 학문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시듯 신학은 모든 학문을 포용하고 개방하여야 한다. 그리고 신학의 독자성을 타학문과 비교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唯一性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는 우아한 호칭에 걸맞게 서로 교호하는 학문으로서의 개방과 포용이 절실한 것이다.
실제 어느 신학개론서 치고 학문성의 개방이라는 외침을 하지 않는 책은 없다. 그러나 현실의 실천적 상황은 요원하다. 그만큼 기독교 사회의 학문적 폐쇄성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바울 신학을 논의할 때, 율법의 본질적 내용을 얻고자 할 때는 법신학자의 시각을 우선 원용하고, 그 법이 인간을 상대하였을 때 나타나는 법현상을 주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의 객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그 시점부터 그 법을 다루고 운용하는 주체는 우리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법과대학에서도 연구되어야 하지만, 사실상 그 법을 주체적으로 담당하기로는 신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법신학적 시각을 통하여 가능한 한 법학과 신학이 분리되었던 근대 이전의 학문적 풍토에의 회귀를 주장하고자 한다. 그것은 두 학문분과가 하나로 용해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서로 보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대학원과정에서라도 석․박사과정은 신학과 법학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양자 구분 없이 서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학문적 토양을 배양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2. 법과 인간의 변증론적 현상
법이란 무엇인가? 라는 법의 개념과 본질에 대한 물음은 모든 법철학적 고찰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의적인 해답을 얻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만큼 법의 본질에 대한 내용 규정이 다난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법이라는 특성은 시대와 대상에 따라서 항상 내용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법의 본질에 대한 많은 대답이 주어지는 것은 법 자체가 복합적인 현상이어서 그 요소들이 다양한 관점과 관심에 입각하여 검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본래적 기능이 분쟁해결과 사회통제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법의 본질도 결국 인간과의 관련하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요컨대 법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의 요인은 법이 인간의 본성과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고 다시 인간에게 그의 법을 준 것은, 법에 있어서 인간학적 사고의 발단이 원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법과 인간의 이러한 상호 연관성에 착안하여 법현상을 이해하려는 법철학적 방법론이 이른바 ‘법인간학’(Rechtsanthropologie)이다. 법철학적 인식대상으로서의 법인간학이란 인간에 관한, 법에 대해서, 또 법 속에서 그의 삶과 책임을 대상으로 삼는 인간들에 관한 언명의 전체를 말한다. 근대 이후의 법인간학은 신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법과 인간의 일치라는 중세적 전통을 벗어나 세계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법과 인간의 일치에 초점을 둠으로써 중세의 법신학을 대신한다. 이렇게 본다면 법인간학은 법철학을 갱신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근대이후 신학과 법학은 학문일반이 그러하듯이 분리의 길을 걸어왔지만, 양자의 발전의 궤적은 수레의 양 바퀴처럼 굴러가면서 인간의 정신사를 지배하여왔다. 실질적으로 근대신학은 19세기 개신교(Protestant) 신학사에 해당한다. 이 시대는 정신사적으로 계몽주의시대이기도 하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중세 암흑의 천년이 카톨릭에 의한 교황 중심의 신본주의 시대였다면, 근대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우리는 인본주의시대라고 한다. 종교개혁이 마무리되는 18세기 후반의 근대의 기독교(Neo-protestantism)는 그 이전의 18세기 개신교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에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변천되었다. 즉 인간이 이 세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가 인간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 세계의 중심, 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세계의 모든 영역을 주체적으로 개척하고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절실한 문제는 인간일반의 형이상학적 유한성이나 허무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로 된 이 세계를 어떻게 인간화시키느냐의 문제, 즉 이 세계의 인간성의 문제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조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도 달라 질 수밖에 없었다. 고대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예수가 정말 하나님이냐의 문제였든 반면에, 근대에서의 예수는 정말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변천하였다. 고대의 기독교가 예수의 신인동형의 문제였다면, 근대의 기독교는 인간학적 관심에서 출발하여 예수를 가장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 결과 예수의 존재는 상대화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의식 혹은 하나님의 정신의 완전체가 예수라고 할 경우, 예수와 인간은 그들이 가진 의식이나 정신에 있어서 다를 뿐, 어떤 본질적인 차이는 부인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본질의 연관성을 전제한 19세기의 신학이 그리스도론적 시점에서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오류였다.
3. 현대법과 법신학의 해후
현대의 다변화된 사회의 총체적인 모순이 새로운 사상의 등장을 요청할 때마다 신학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거기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해 왔다. 근대법의 현상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관념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려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면, 현대법에서는 이기주의적인 인간상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면 평등은 자연히 해결되리라는 낙관은 사라지고 이기심의 적절한 조정을 통해서만 사회적 평등, 즉 이름하여 ‘사회적 정의’(Social Jusice)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현대법의 변화를 "권리 중심의 추상적 개인으로부터 권리와 동시에 공동체적 의무도 부과하는 책임적 인격으로의 이행”이라고 독일의 뛰어난 법철학자 이면서 형사법학자인 한스 벨첼(Hans Welzel, 1904-1977)은 말한다.
近代法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이념으로서 중세의 신분질서를 타파한 것은 법과 인간의 일치를 위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리고 현대법이 근대법의 인간상이 지닌 추상성과 형식성의 모순을 자각하고 법을 좀더 현실의 인간애로 접근시킨 것은 실질적 정의를 위하여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유의 자유와 한계 그리고 자본주의적 이윤동기를 법률관계로서 규제하는 것도 한계를 노정 시킬 수밖에 없었다. 현대법에 전제되어 있는 인간상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다.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이루기 위해 법이 겨냥하고 있는 인간상은 날카로운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 유형의 인간들이다. 따라서 법적 생활의 실제에 있어서는 공익이든 사익이든 인간사이에 이해관계의 조정이 문제될 뿐이지. 자유와 평등 그 자체가 이기적 인간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학적 차원의 문제는 실정법의 해석․적용에 관한 한 거의 간과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법의 맹점은 법의 개념이나 본질․이념 그리고 목적에 따른 법적 정의의 문제는 뒷전으로 하고, 법제정권자의 자의에 의한 사실적 힘에 의하여 창설되고 운용되는 법률적 불법이 횡행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법률적 불법은 소위 법치주의(Rechtsstaat)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자행되는 법실증주의의 극치이다. 독일에서 유래된 법치국가라는 말은 원래 인간의 불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오직 법으로서 인간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유하였다. 그것은 법의 이념으로서의 정의가 인간의 존엄성을 확고하게 보장한다는 윤리적 법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법실증주의는 실제로 ‘법률은 법률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법률가 계급을 자의적이고도 범죄적인 내용을 가진 법률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법실증주의는 실정법률의 내용에 관계없이 그것을 법적 안정성(Rechtssicherheit)에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무법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적 안정성은 법이 실현해야 할 유일한 가치이거나 결정적인 가치는 아니다. 법적 안정성 외에 오히려 두 가지의 다른 가치, 즉 합목적성(Zweckmäßikeit)과 정의(Gerechtigkeit)가 등장하여야 한다. 이들 가치의 서열에서 우리는 공공복리를 위한 법의 합목적성을 마지막 위치에 놓아야 한다. 결코 법은 국민에게 필요한 것 모두가 아니며, 법적인 것이면서도 법적 안정성을 강조하고, 정의를 향하여 노력하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필요한 것이다. 모든 실정법률에 이미 그 실정성으로 인하여 갖추어져 있는 법적 안정성은 합목적성과 정의사이에 주목할만한 중간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편으로 공공복리에 의하여 요구되고 다른 편으로는 정의에 의하여 요구되기 때문이다. 법이 안전할 것, 오늘 여기서는 이렇고 내일 저기서는 달리 해석되고,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동시에 정의에의 요구이다. 실정법률의 정의에 대한 모순이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른다면, ‘부정의로운 법’으로서의 법률이 정의를 탈퇴시킨다면 예외이지만, 법률적 불법의 경우와 부정당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효력을 가진 법률사이에 예리한 선을 긋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正義가 한 번도 추구되지 않는 곳, 정의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평등이 실정법의 제정에서 의식적으로 거부되는 곳에서는 그 법률은 단지 부정의로운 법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법적 성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 그리고 실정법도 정의에 봉사한다는 의미에 따라 결정되는 질서와 규정이라고 정의(定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법률적 불법은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한다는 정의의 본질적 요구를 간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법적 성격을 전혀 결여함으로써 부정당한 법이 아니라, 도대체 법이 아닌 것이다.
법적 안정성과 정의사이에, 내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법률과 실정적인 법률사이에, 그리고 정당한 법과 법률의 형식으로 주조(鑄造)되지 않은 법 사이에 성립되는 모순은 진실에 있어서는 정의 자신과의 충돌이며, 외관적 정의와 현실적 정의 사이의 충돌이다. 이러한 충돌을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너희 위에 있는 권력을 가진 당국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인간에게 보다 신에게 복종하라”(행 5:29)고 가르치고 있다.
종래의 법철학이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여 법의 본질을 규명하려 했던 방법적 모순을 비판하고, 역사적 실체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속에서 궁극적인 법의 본질 및 진정한 법과 인간의 변증법적 일치를 찾으려하는 것이 법신학의 목적이다. 요컨대, 법이 현실의 인간에로 자신을 일치시키려고만 할 때에는 인간존재의 양면성으로 인해 끝없는 딜레마에서 헤어나올 수 없으며 오히려 그와 반대의 길, 즉 위대한 법의 정신에 인간을 일치시켜 나가는 길을 동시에 열어놓을 때에만 법과 인간의 참된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법신학의 이념이다. 지금까지의 법인간학은 실존적 사정, 즉 법안에 존재하나 법을 가지지 못한 인간의 운명과 인간적이고자 하나 그렇지 못한 법의 현실간의 일치를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4. 이상적인 인간의 법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것은 사사로운 취미나 자유로운 사변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답은 언제나 사회의 내부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교육제도와 법질서에서 이것들은 발견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상(Menschenbilder)들이 직접적으로 실현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인간상에 따라 법이 부여되며 의무가 주어진다. 인간학은 만약 그것이 사회의 법 속에서의 인간상들에 관한 구체적인 명제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추상적으로 되고 말 것이다.
정당한 법과 합법적인 생활에 관한 결정은 언제나 법과 시민이 합의하였고 또 재삼 합의해야 하는 전정한 인간 존재와 정당한 공동생활에 관한 구상에 따라 좌우된다. 정의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합의에 의하여 만인에게 품위 있고 정당한 생활의 의무를 지우는 그때 그때마다 타당한 인간상에 의하여 좌우된다. “하나의 법 시대의 양식에 대하여 그 시대에 방향설정을 하여 주는 인간관만큼 결정적인 것은 없다”라고 독일의 위대한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1878-1949)는 말한다. 따라서 법의 역사에 있어서 새 기원을 이루는 것은 또한 새로운 인간상의 변천을 의미한다.
인간의 공동생활을 규정할 법은 결코 개인적 고유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개인간을 고려할 수가 없다. 법은 부여된 권리의 담당자로서 그리고 부과된 의무의 수여자로서 그것이 전제하는 바 인간유형에 유의하고 또한 그를 고려하여 구상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법질서에서 우리에게 마주치는 것은 한 사회와 한 시대에서의 인간상의 실천이다. 왜냐하면, 개개의 인간은 일정한 사회에서의 신분적․법적 시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각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상과 법질서가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모든 생활상태에 있어서 자유로운 도의적 자기결정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법은 구체적인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그가 그 안에서 살고 괴로워하는 그의 사회적 상황의 전체 속에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라드부르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새로운 인간의 상은 자유주의 시대의 추상적인 자유의 틀과 비교하여 훨씬 더 생활에 밀접한 유형이다. 법안에서의 인간은 금후로는 이미 로빈손 크루소나 아담과 같이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의 인간이다”
시민들의 이상적인 법은, 그것들이 세계의 법과 인간 본성의 법에 상응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골고루 지배하는 이성이나 자연의 법은 신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에 일치하는 법들은 하나님에 상응하는 법이다. 도의적 당위의 질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질서에 상응하고 그와 일치할 때에야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므로 합의에 의해서거나 시민들에 의하여 체결된 것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신적 존재질서에 일치하는 것만이 정당하다. 따라서 법은 정당한 것을 의미하여야 한다.
Ⅲ. 맺음
법과 인간은 변증법적 일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존재에로 배열된 인간과 인간에 따라 배열된 법은 상호간에 실존적인 유기적 관계에 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실존이다. 인간은 공존자(πολἰτης, polites)로서의 존재, 즉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공존 가운데 실존한다. 사회적 공존세계(Mitwelt)의 공존자로서 비로소 인간은 ‘법 가운데서’ 자신의 본래적 삶의 의미를 실현하거나 또는 그르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공존세계에서는 법을 위반한다는 것과 본래성을 그르친다는 것은 ‘같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공존자, 즉 ‘법 가운데서의 인간’인 경우에만 ‘본래적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과의 관계가 아닌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과 법의 일치를 추구할 때는 항상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제기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법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으로서, 법은 좀 더 현실적 인간에게 접근시킴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존재에 관한 규명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한 존재론적 법 고찰도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법 존재론과 인간학의 한계를 느끼고, 여기에서 법신학은 신과 인간상호간의 관계에서 인간과 법의 본질을 찾게 한 것이다. 법신학의 관점은 ‘신의 법으로부터 인간에게로, 그리고 다시 신에게로’ 라는 의미에서 수직적(신법)으로 관계하며, ‘인간의 법으로부터 공생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다시 인간에게로‘ 라는 의미에서 수평적 관계라고 보는데, 이는 인간존재가 신과의 그것은 수직적이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실정법)는 수평적 교호관계가 성립하여 평등한 사회질서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법의 본질과 관련하여 근대이래 신과 단절되어 나온 법 이해에서부터 다시 그리스도지배(Christusherrschaft)라는 신과의 관련하에서 법과 인간의 일치를 논하는 법신학에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세계와의 관련 하에서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법과 인간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의 귀결이기에 단순한 법신학이 아니라 ‘법신인간학’(Rechts- Theoanthropologie)이라 함이 옳다. 신의 요구는 그의 계명에의 부름이며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오직 순종이다. 신과 인간의 이러한 변증법적 합일 속에서 계명과 순종은 법과 인간의 일치의 신인간학적 실존으로 존재한다.
법의 개념과 본질에 관하여는 실정법 이외에 그것을 초월하는 이념적 가치를 고찰하는 것이 법철학의 임무라면, 법신학의 과제는 이념이나 가치조차 뛰어넘어 그것의 궁극원천으로서의 인격적 신과의 관계 하에서 법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은 인격주의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인격적 호칭관계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또한 인간을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기술하고 있으므로 한편을 다른 편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이며, 하나님은 인간에게로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양자는 평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도권(Initiative)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내용적으로 보면,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인간에게 자유로운 복종을 요구한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인격적 호칭관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먼저 주님이라는 것이 인식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가 인식되어져서 사랑을 가지고 이에 응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 2000년 5월 23일 -
* 이 글은 필자가 신학석사학위(M. Div: 그리스도 신학대학원, 2000. 02)를 취득하기 전에 먼저 법학석사(법철학: 인천대학교 대학원, 1996)를 취득하였으며, 신학을 시작한 그 때부터 신학과 법학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보잘 것없는 글이지만,독자 제위의 기탄 없는 질정(叱正)을 기다리며 부끄러운 글 상재(上梓)하오니 많은 분들께서 함께 생각하고 함께 하나님의 정의와 현실의 정의를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보시고 의견 계신 분은 다음의 연락처 하시(何時)를 막론하고 질타(叱咤)하여 주시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