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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린 시인, 그의 삶과 문학세계
김명옥(시인)
Ⅰ. 김경린의 삶
김경린은 1918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났다. 5세에서 8세까지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기도 한 그는 서울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 고공토목공학과와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뉴욕 주립대 상하수도 단기과정을 거쳐 서울대환경대학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기하학이 보여주는 물체의 단순성과 한시의 상징성을 바탕으로 한 반서정시 <車窓>, <꽁초>, <화안>을 1939년 4월 17일자 조선일보에 발표한 이 후 ‘맥’ 후기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시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VOU’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꾸준한 작품 활동과 Modernism 시론을 발표하였다. 특히, ‘VOU’를 통해 Ezra Pound, James Joyes, Pablo Picasso, Carlos Williams 등 영미 시단, 프랑스 시단과 직접 교류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1여 년에 걸친 동인활동을 통해 모더니즘의 본질을 파악함과 동시에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활발한 시작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1948년 박인환, 김수영, 양병식 등과 ‘신시론’ 그룹 동인지 『신시론』과 1949년 박인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면서 50년대 후기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로서 모더니즘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줄기차게 에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청록파로 대표되는 전통적 서정시의 세계에 반발하여 1952년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특집과 1957년 ‘DIAL’ 동인들에 의한 사화집 『현대의 온도』 발표를 계기로 도시적 감수성, 현대의식, 전위적 기법추구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전쟁직후의 혼란상을 노래하면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1960년대 말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하여 작품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198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재개한 김경린은 ‘한국적인 전통’에서 ‘세계적인 전통’으로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정열적인 창작활동을 펼쳤다. 이전의 서정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도시 문명 속에서의 인간소외와 내면의식의 성찰을 시화하던 그는 70년대 말부터 모더니즘 선상에서 새로이 일고 있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며, 시소설, 대화시, 산문시 등을 창작하여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는 등 한국시단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한국시인협회 초대 사업 간사(1957년), 한국신시학회 회장(1986년) 등으로 활동한 그는 미국 Modern Poetry Association 회원(1983년)으로 모더니즘 이론을 활발히 전개하여 한국 평론가협회문학상(1986년), 제3회 상화시인상(1988년), 한국예술평론가 협회 ‘94최우수 예술가상(1994년) 등을 수상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 『현대의 온도』(1957년) 등의 사화집과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1985년), 『서울은 야생마처럼』(1987년), 『그 내일에도 당신은 서울의 불새』(1988년),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1994년) 등의 시집이 있다. 그리고 『한국모더니즘시운동 대표동인시선』(1994년), 『알기 쉬운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1994년) 등의 저서가 있다. 김경린은 작품 활동 및 모더니즘 시운동 전개에 있어서 10여 년의 공백기간을 본인 스스로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지만 한국문단으로 본다면 안타까운 일로 남는다.
따라서 김경린이 시 <차창>을 발표한 이래 20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더니즘 운동 하나에 평생을 걸었던 그의 시세계의 변모과정과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모더니즘의 진정한 지향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Ⅱ. 김경린의 문학 세계
김경린은 현대적인 시정신의 발굴과 시세계의 발전을 위하여 끊임없는 시도를 거듭한 시인으로 그의 시세계는 모더니즘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새로운 방향 모색을 위해 문단활동을 중단했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1939년부터 1969년까지 모더니즘 문학운동 시기를 전기로, 작품 활동을 재개한 1979년부터 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운동 시기를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전기 모더니즘 문학 운동과 그의 작품 세계
모더니즘은 특정한 문예사조라기보다는 변모와 변혁에 대한 의지를 담은 정신적 운동이며, 실천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은 기존질서에 대한 강한 도전과 반발로 형성되고, 그것이 또 다시 변모, 발전하는 데서 모더니즘의 본질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모더니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30년대 당시부터 모더니스트들의 주장과 실험은 사상성 결여와 난해성 등의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50년을 먼저 가야 한다. 따라서 살아 있는 동안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다. 개인시집보다는 에콜 운동에만 전념한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김경린은 모더니즘 운동을 펼쳐나갔다.
모더니즘은 상징주의를 부정하면서 출발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의 수정 형태로 나타난 이미지즘, 표현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초적 징후로 보이는 구체시, 투사시 등 다양한 방법론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 김경린은 다다이즘으로부터는 기성관념의 파괴와 새로운 형식 추구를, 초현실주의로부터는 무의식 세계의 개척을, 이미지즘으로부터는 이미지의 조형성을, 표현주의로부터는 표현의 참신성을, 그리고 이들 유파들이 공통적으로 시도해 온 언어의 기능 개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생활한 김경린은 그의 시 속에 현대문명과 기계문명에 대한 예찬과 불안의식을 주로 표현하였다. 특히 공학도인 그가 일본, 미국 등에서 접한 현대문명은 2차대전의 종식과 독립의 기쁨, 사회적인 불안과 혼돈, 자유의 물결과 과학문명 속에서 새로운 시세계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모더니즘에 경도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수족관에 온
한 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차창>의 전문
현대문명과 기계문명의 속도를 최대한 이용한 물체는 기차이다. 화자는 기차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하여 선명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밖의 세계를 지향하는 기차여행에서 화자는 자신을 ‘수족관에 온/ 한 마리의 어족’으로 파악한다. 심해의 어족은 일정한 방향에 따라 무리지어 자유롭게 움직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족관에 갇힌 ‘한 마리의 어족’은 ‘차창’ 속에 갇혀서 복잡하고 거대한 도시 속을 배회하는 힘없는 인텔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화자는 전근대적인 고향을 떠나 근대적 도시인 경성에서 시작한 도시 생활을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처럼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절망감으로 ‘안경’이 차가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현대문명과 기계문명이 주는 속도감은 전근대적 공간인 고향을 상실한 김경린에게 도시문명을 지향하게 하여준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예찬하게 하였다. 또한 기차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한한 도전의식과 환상적인 축제의식에 사로잡히게 한 동시에,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하였다.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랏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과
예절과 그리고
공포만이 거품 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빛발처럼 내려온다
또다시
먼 앞날에
추락하는 애정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氣流를 안고
투명한 아침을 가져오리
-<國際列車는 打字機처럼>의 전문
김경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이 시는 빠르게 변하는 국제사회 속에서 겪는 지식인의 절망과 좌절을 현대문명의 표상인 ‘국제열차’, ‘타자기’ 같은 생경한 시어와 광물성 이미지의 시어를 사용하여 생생한 현장감과 현대문명이 주는 속도감을 잘 살린 작품이다. 특히, 파격적인 사물과 사물의 접촉작용에서 오는 이미지의 조형성은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충격과 놀람을 달리는 열차의 폭음으로 자연스럽게 형상화시켜 속도감에 빠져 드는 현대인의 상황을 배가시키고 있다.
특히, 1음보와 2음보의 규칙적인 반복과 변주에 의해 형성되는 속도감은 현대문명에 대한 경탄과 흥분된 축제의식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화자는 ‘성난 타자기’, ‘질주하는 국제열차’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사회에 동승하지 못하고, ‘조상들이 / 뿌리고 간 설화가 / 아직도 남은’ 전통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생존을 위한 우수와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있다. 그것은 6.25 한국 전쟁의 비극적 체험과 상처로 인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지식인이 겪은 가치 전도와 혼란이며, 도시화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의 심화이며,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혼란을 경험한 지식인의 ‘불안’과 ‘공포’이며, ‘예절’로 대표되는 전통문화가 파괴되는 현실이며 고통이었다. 그러나 화자는 불안과 혼란을 극복하고 언젠가는 세계적 ‘기류’에 편승하여 ‘투명한 아침을 가져올’, ‘앞날’을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인이 지향한 도시는 기계문명과 물질문명의 속도감이 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속도감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새로운 축제의 부활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현대문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한 전쟁체험이었다. 집단과 사회로부터의 소외 경험은 현대인에게 극도의 불안의식과 위기의식에 빠지게 한다.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의 거리는
프라타나스가 하도 푸르러서
나의 심장마저 염색될까 두려운데
외로운 나의 투영을 깔고
질주하는 군용트럭은
과연 나에게 무엇을 가져왔나
비둘기처럼
그물을 헤치며 지나가는
당신은 나의 과거를 아십니까
그리고
나와 나의 친우들의
미래를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
한때
몹시도 나를 괴롭히던
화려한 영상들이
결코 새로울 수 없는
모멘트에 서서
대학교수와의
대담마저
몹시도 권태로워지는 오후
하나의 로직크는
바람처럼
나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鋪道위에
부서지는 얼굴의 파편들이
슬픈 마음을 알아줄 리 없어
손수건처럼
표백된 思考를 날리며
황혼이
전신주처럼 부풀어 오르는
街角을 돌아
프라타나스처럼
푸름을 마시어 본다
-<太陽이 直角으로 떨어지는 서울>의 전문-
일상이 반복되는 도시는 현대인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현대인은 풍경들을 통해 사유한다. 거리를 나서지 않으면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시선은 거리의 모습에 맞춰진다. 화자는 거리에서 현대문명의 부산물인 전쟁에 의해 자신이 설계하고 꿈꾸었던 영상들이 무의미하게 됨을 발견한다. 현대문명의 속도감이 주는 화려함에 은폐된 전쟁에 대한 공포체험은 ‘군용트럭은/ 과연 나에게 무엇을 가져왔나’, ‘당신은 나의 과거를 아십니까’, ‘나의 친우들의/ 미래를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라는 회의와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과학무기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한 전쟁체험은 사회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상실과 소외를 경험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손수건처럼/ 표백된 思考를 날리며/ 황혼이/ 전신주처럼 부풀어오르는/ 街角’처럼 동족상잔의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 위, 몹시도 궁핍했던 시대를 황혼으로 형상화시켜 절망감을 표출하였고, ‘대학교수와의/ 대담마저/ 몹시도 권태로워지는’ 모든 생산행위의 의미마저 상실하게 하였다.
김경린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처럼 기하학적인 물체의 단순성으로 표현하거나, ‘외로운 나의 투영을 깔고/ 질주하는’, ‘바람처럼/ 나의 피부를 스치고’, ‘손수건처럼/ 표백된 사고’, ‘황혼이/ 전신주처럼 부풀어오르는’ 등 외계의 사물을 다른 사물로 유추하여 선명한 시각적, 촉각적 이미지로 형상화시켜 회화적 조형성을 뛰어넘어 사고의 조형성을 꾀하고 있다.
시는 결국 전진하는 사고라는 말대로 김경린은 도시 속에서 얻은 경험을 질서화하고, 그것을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승화시키고 이미지화하여 시세계의 참신성을 시도하였다.
2. 후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운동과 그의 작품 세계
1969년부터 1979년까지 공백기간을 끝내고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한 80년대 그의 작품은 그의 전기의 작품세계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1, 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과학문명은 인류에게 두 가지 커다란 이율배반적인 인과관계를 시사하여 주었다. 과학문명이 인류에게 생활의 편익을 가져다 준 반면 과학무기의 대량생산으로 인간의 생존에 대한 공포와 위기의식도 가져왔다. 더 나아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따른 이윤배분의 불균형,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부조화로 인한 갈등, 도시화에 따른 각종 도시악과 공해문제 등 점차 설자리를 잃은 인간은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 정신적 환경 변화에 따라 김경린의 작품세계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모더니즘은 이미지의 조형성에 기여, 무의식의 세계 개척, 시적 표현의 다양화, 시적 언어의 기능 발굴이라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주지성을 강조하고 휴머니티를 배제함으로써 시를 메마르게 했다는 점, 표현의 다양성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시를 난해하게 했다는 점, 지나친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서 독자를 멀리했다는 점 등의 취약점도 가지고 있다.
이런 취약점을 인식한 김경린은 컴퓨터의 개발에 따른 인간 소외와 인간의 개성 변질, 물질 위주의 사고가 빚어내는 인간성 결여, 환경 오염문제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모더니즘이 배제했던 휴머니티와 서정성을 부분적으로 재수용 하되, 모든 사물을 순수한 시각에서 관찰한 후 이를 시적 이미지로 승화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출하여 현대인의 가슴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새벽 네 시의
서울은
분지의 윤곽만 살아 있을 뿐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해
새워진 표지등과 같이
유난히도 반짝이는 수은등은
거리와 구릉과
골짜기를 불태우는 별이라 해둡시다
어둠 속에 그 많은
재화와 권력과 사랑을 내장한 채
잠자는 건물들은
도시의 거인
아니면 분지에 사는 야생마입니까
아직껏
관능을 다하지 못한 네온이 뿜는
색소의 무늬 아래
취기 어린 그림자마저 사라져간
거리
단지 야간인구를 위해
질주하는 차륜의 폭음만이
관현악처럼
울려퍼지는 하늘
회색 물감이 흘러내리는 하늘에
누른 빛깔이 스며들고
신문배달 소년의 발굽소리와
청소부의 하품소리와
어머니의 도마소리에 깨어나면
힘찬 호흡과
거대한 엔진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는
서울은
야생마처럼 거인처럼
오늘과
미래의 세계도시를 향해
질주하는 마라톤 선수입니까
-<서울은 야생마처럼 거인처럼>의 전문-
김경린은 시집『서울은 야생마처럼』에서 재래의 서정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도시 문명 속에서 인간소외와 내면의식을 성찰하여 시화하고 있다. 화자는 현대문명과 도시화가 자연환경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음을 직시하고 있다. 밤하늘을 밝혀주던 별이 사라진 서울에서 거리와 구릉과 골짜기를 밝혀주는 것은 오직 ‘수은등’ 뿐이다. 윤곽만 남기고 현대문명에 점령당한 서울은 ‘재화와 권력과 사랑’과 ‘관능을 다하지 못한 네온’과 ‘질주하는 차륜의 폭음’만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도시의 일상인은 도시가 ‘거대한 엔진에 불을 지르는’ 것을 신호로 ‘오늘과/ 미래의 세계도시를 향해/ 질주하는 마라톤 선수처럼’ 일제히 질주를 시작한다. 오직 질주만이 선(善)인 현대도시사회에서 멈춤은 악(惡)이다. 질주에서 낙오되어 멈춘 도시의 일상인은 결국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김경린은 거침없이 달리는 서울을 ‘야생마’와 ‘거인’의 중복 비유를 통하여 서울의 생태학적인 기능과 현상학적인 다이너미즘의 이미지를 환기하기 위하여 비유사성 등가에 의한 사물의 비유 표현에 의하여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있다. 또, ‘반짝이는 수은등’, ‘골짜기를 불태우는 별’, ‘잠자는 건물’, ‘질주하는 마라톤 선수’ 등의 시각적 이미지와 ‘차륜의 폭음’, ‘신문배달 소년의 발굽소리’, ‘청소부의 하품소리’, ‘어머니의 도마소리’ 등 청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사용하여 표층의 이미지화와 심층의 스토리화를 꾀하고 있다.
현대문명의 중심에서 김경린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 세계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일관되게 수도 서울에 집중되었다. 그의 시집『그 내일에도 당신은 서울의 불새』에 상재된 작품들은 재래의 관념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배제하고 감각적, 시각적, 청각적인 요소의 발굴과 새로운 의사소통의 통로를 개설하기 위하여 구문상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오늘도
그 내일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활의
분말들이 구름처럼 따라오고
한때
뜨거운 호흡을 길가에 뿌리며
내일을 다짐하던 그 사람마저
지금은
휴식공간을 잠시 흔들어 놓는
영상일 뿐
아직은
다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많기에
국가를 위해
겨레를 위해라는 깃발은 없어도
진정 오늘과 내일을 위해
달려보는 광화문 네거리에
줄기찬 빛깔들의 행진이 살고
때로는
부채의 상환과
약속을 다짐하는 전화 벨소리에
시간과 인생을 소모하다 가도
한잔의 커피에
피로를 달래보는 창밖을 지나가는
고교생들의
싱싱한 율동에 매료도 되어보며
오늘도
그 내일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생활의 광채를 위해
신간서적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라도 마시고 싶은
그러한 당신과
나는 오늘을 사는
서울의 불새
-<그 내일에도 당신은 불새>의 전문-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컴퓨터 산업의 발달로 도시화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인공두뇌의 개발에 따른 인간소외 현상을 경험한 현대인은 인간존재에 대한 확인의식이 점점 고조되면서 모더니즘이 배제하였던 휴머니티와 서정성을 도입하여 지(知) ․ 정(情)의 인간관에 의한 시세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화자는 ‘오늘도/ 그 내일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활’을 영위하는 도시의 일상인이다. 그도 한 때는 ‘국가를 위해’, ‘겨레를 위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산업화사회와 정보화 사회의 주체였다 하지만, 인공두뇌에 대체된 도시에서 ‘뜨거운 호흡을 길가에 뿌리며/ 내일을 다짐하던 그 사람마저/ 지금은 휴식공간을 잠시 흔들어 놓는/ 영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인간소외를 경험한다. 그렇다고 해서 화자는 다원화, 관리화로 발전되어가는 사회 환경에 상실하거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오늘도/ 그 내일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그래서 ‘당신과/ 나는 오늘을 사는/ 서울의 불새’로서의 존재를 재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불새’는 영화나 소설에서 전설의 새로 표현되는 불멸의 새로서 환상적인 존재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불새’는 항상 불타는 정열로서 현실을 가르며 살아가려는 미래지향적인 아름다운 새이다. 따라서 ‘불새’와 같은 ‘당신’은 어느 특정인일 수도 있고, 객관화된 나일 수도 있으며, 불특정의 독자일 수도 있다.
김경린은 ‘생활의/ 분말들이 구름처럼 따라오고’, ‘뜨거운 호흡을 길가에 뿌리며’, ‘줄기찬 빛깔들의 행진이 살고’, ‘신간서적에서 흘러내리는/ 시내’, ‘서울의 불새’ 등을 통해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의 조형성과 언어의 참신성을 살리면서 재래의 문장체를 탈피하고 대화체를 시도하여 스토리화를 꾀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줄기차게 시도하여 왔던 모더니즘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며,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새로운 전통을 창출하려는 실험정신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입한 김경린은 오늘날 현대시가 나아갈 방향으로 현대시의 난해성을 벗어나려는 ‘대화시’, 언어와 언어의 유기적인 배치로 언어의 진폭성을 기하려는 ‘시각시’, 시 속에 소설적인 요소를 흡수한 ‘시소설’ 등을 제시하면서, 시집『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을 통해서 ‘시소설’과 ‘대화시’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고막을 가르는 번개 소리에 하늘마저 두 쪽으로 갈라질 것만 같은 날에도 허리케인처럼 폭풍이 지구를 할퀴며 지각 변동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시각에도 화요일 12시면 어김없이 그 다방 그 문을 열고 들어선 Y.
「아무리 날씨가 나쁘고 어려운 일이 앞을 가로막는다 해서 만나지 않을 사이라면 애인도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게 Y는 시간 개념이 철저했고 우리의 만남에도 뜨거운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화요일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곳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네요.」
그러한 Y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나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이가 광화문에 소라껍질처럼 아담하게 문을 열고 있는 K라는 다방에서였습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참으로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라 직감했습니다.
「누구지?」
「나와 아주 친한 친군데, 잠시 나를 도와주러 나왔을 뿐이야. 절대로 관 심 따위는 갖지 마.」
그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지방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렀던 서울 역전 다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행운이었을지, 또는 악연이었을지.
그날 처음으로 차를 함께 마시면서 자세히 바라본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 습니다. 오뚝 솟은 콧나래, 웃음 지을 때의 꿈꾸는 것과 같은 그 눈매. 산 뜻하게 차려 입은 한복 차림의 그 날씬한 몸매, 고전적인 그 모습들이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로해서 한 달이 지 나서야 그 다방을 찾아간 나에게 그녀는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동안 오시지 않았어요? 몹시 기다렸었는데, 왜 그런지 선생님을 만 나면 마음이 편하고 안정될 것만 같아서요.」
그러한 말들은 그녀의 보이지 않는 원심력을 느끼게 했고 나도 모르게 그 원심력에 흡수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기도 곧 그만둘 것 같아요. 자라 가는 아이들 때문도 있고 귀찮 게 구는 사람도 많고 해서. 책가게를 하든지 옷을 진열해 놓고 파는 DC 의 문을 열든지 할거예요. 연락이 되지 않을지 모르니까 사직동 S다방으 로 화요일 12시면 언제든 갈게요. 차나 사주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15년 동안을 S다방에서 만났고 차도 마시며 많은 이 야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장사가 잘된다면서 양복 상품권을 나에게 주 기도 했었고 물질적으로 바라는 것은 절대로 없으니 그저 만나기만 해주 면 좋다는 그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매우 침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도 다 커서 결혼도 시켰으니 나도 이제 큰딸이 사는 미국으로 가 든지 재혼을 하든지 해야 하겠어요. 선생님만 동의하신다면요.」
그렇게 해서 바람이 부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그 다방으로 갈 필요는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 사직동 길을 지날 때 그 다방마저 도시 계획으로 헐려 버린 것을 알았었고 또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잘 있다는 전갈도 왔었습니다. 아직도 화요일이면 그녀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을 지.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의 전문-
오늘날 현대시는 영상매체와 청각매체의 발달에 따라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김경린은 이런 시의 위기시대를 타파하기 위하여 소설은 시에, 시는 소설에 접근하는 장르의 해체를 시도하였다. 김경린이 ‘시소설’로 분류한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은 그가 시적인 이미지, 시적인 표현, 시적인 언어를 스토리화 하기 위하여 대화의 삽입, 서사 구조 등 소설적인 요소에다 접목을 시도해 본 실험적인 작품이다.
경제성장과 사회 환경의 변화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갈등하는, 그러나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재확인하는 ‘Y’라는 여인과 현대사회의 경제성장 속에서 물질과 정신의 불균형을 경험하는 ‘나’를 등장인물로 하여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인 불확실의 시대, 불확정의 시대의 한 단면을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이라는 감각적이고 다소 파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스토리가 있는 시’로 보여주고 있다.
일주일 중에서 꼭 ‘화요일 12시’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월요일이어도, 수요일이어도, 10시이어도, 18시이어도 좋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왜 뜨거워지는 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 만남 자체가 불확정적이며, 불확실하며, 사소한 사건이며, 도덕적 모호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작품성과 문학적 가치보다는 새로운 시세계의 개척이라는 실험성에 가치를 두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그의 또 다른 실험시인 ‘대화시’ <가을은 갈채와도 같이>를 살펴보자.
꽃들은 사람을
울리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니라면
들국화는 손을 흔들며
당신을 부를 것도 아닌데
하늘은 푸르기만 하고
지층의 혈관처럼
솟아오르는 빌딩의 창가에
흘러내리는 광채와 바람들은
정녕 가을의 숨결과도 같은 것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도
앞으로의 바람마저도 잠시 잊은 채
가을은 지구를 할퀴며
오늘과 내일의 문을 향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벽을 향해
또는 당신과 나의 가슴을 향해
채찍만을 거듭할 뿐
더욱 가을을 채색하고 싶은 나머지
더욱 당신을 불러 보고 싶은 나머지
오늘도 하늘은 더욱 푸르기만 하고.
- <가을은 갈채와도 같이>의 전문-
‘대화시’는 독자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대화체의 구문을 사용하여 알기 쉽고, 낭송하기에 용이한 형태로 쓴 산문화 경향의 시를 말한다. 특히 김경린은 ‘대화시’를 통해 모더니즘이 배제하였던 서정성을 수용하여 일상적인 사물에 의하여 차단되거나 가리어져 깨닫지 못한 사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여 포착하고 있다.
화자는 ‘지층의 혈관처럼/ 솟아오르는 빌딩’, ‘흘러내리는 광채’ 앞에서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도/ 앞으로의 바람마저도 잠시 잊은 채’ 불확실한 오늘과 미래를 향해 ‘채찍만을 거듭’하는 현대사회에서 소외와 불안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화자는 인간소외와 불안감에 대하여 절망적인 태도보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도시화, 정보화 사회에도 ‘가을’이 있고, ‘당신’이 있고, ‘하늘이 푸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더욱 가을을 채색하고 싶은 나머지/ 더욱 당신을 불러 보고 싶은 나머지/ 오늘도 하늘은 더욱 푸르기만’ 하다는 가슴을 적시는 따스한 인간미와 서정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수용하는 한편 쉬우면서도 친밀감 있는 언어로 모더니즘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있다.
김경린은 과학문명과 기계문명이 범람한 현대 산업사회에서 일상인이 경험하는 인간소외와 사회악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과학이 아무리 발달된다 하더라도 과학의 생산도 기계의 조작도 인간이 하는 것이니만큼, 인간이 인간을 파괴할 목적으로 지혜와 노동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진단을 내린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소외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는 나타나지만,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다소 방관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로서 탈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피상적인 현실바라보기의 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Ⅲ. 맺음말
경제와 과학 분야 등이 21세기를 향하는 세계적인 동시성 속에서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려 하였듯이 정신 분야의 첨단을 자처하는 현대시도 과거의 전통과 명성에 안주하려는 자세를 지양하고, 새로운 전통을 창출해야 한다는 말처럼 시는 우리가 처해 있는 전통, 토양, 관습을 바탕으로 환경과 경험이 직접적인 소재가 되고 모티브가 되어야 한다.
김경린의 작품은 거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모더니즘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현대문명과 도시화, 정보화 사회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눈에 비친 서울은 문명예찬과 도시문명지향과, 정보화의 전시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도 서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 속에서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진정한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우리의 현대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언어에 대한 약속의 파기와 표현의 개혁을 요구한 김경린은 이미지의 조형성뿐만 아니라 사고의 조형성에까지 관심을 갖고 인간심리의 이미지화, 스토리화, 산문화 작업을 시도하여 우리의 시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따라서 김경린은 후기 모더니즘에서부터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인간성 회복을 위하여 실험정신과 도전의식으로 새로운 시 세계를 정립한 이 시대의 영원한 아방가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