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주님!”
남수단은 2011년 수단으로부터 독립한, 신생독립국이고 수도 주바에서 우간다까지 연결되는 약 350km의 도로만 유일하게 포장되어 있는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한 나라이다. 북 수단으로부터의 독립 전에는 40년간 내전을 겪었으며, 2011년 독립 후에 벌써 두 번째의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이다. 내가 살던 케레피는 주바에서 남쪽 우간다 방향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디족이 살고 있던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케레피의 성녀 바키타-남수단 출신의 유일한 성인- 미션은 2016년 3월에 시작되었는데 유치원, 초등학교, 여자 기술 고등학교와 남자 고등학교 그리고 진료소 갖추고 가난한 마을 주민들을 위해 교육에 집중하고자 했다. 사실 우리가 이곳 미션을 준비할 때 주민들이 ‘우리가 아이들 교육을 위해 더 이상 우간다로 아이들을 보내지 않도록 질좋은 교육의 장을 만들어 주라’는 간곡한 부탁이 남수단에서의 두 번째 선교지 방향 설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성당과 공소는 매주 주일 미사마다 신자들로 넘쳐났고, 5월 말에 개원한 유치원에는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들의 기도소리가 이곳의 평화로움을 더해주었다.
유치원 어린이들과의 생활을 시작한지 한 달 조금 지난 2016년 7월 10일, 주바에서부터 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전쟁이 발발한 날은 금요일이었고, 다음 월요일 대부분의 아이들이 안전 때문에 유치원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날도 어김없이 유치원에 온 스무 명 가량의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막대 사탕 하나씩 손에 쥐어주고 돌려보낸 게 아이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날 아이들 손을 잡고 아이들과 장난치면서 집 방향으로 데려다 주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모두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이들과 헤어진 그날 밤부터 우리가 살던 동네에 총소리가 나고, 주민들이 유치원으로 피난을 오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간은 간단한 살림살이를 들고 유치원으로 피난 온 주민들에게 우유도 끓여주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주었는데, 계속되는 총소리에 마을 주민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과 유치원에 머물던 사람들이 우간다의 난민 촌으로 떠났을 때, 신부님께서 우리 수녀들에게도 빈 마을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일단 안전한 국경도시 니믈레로 중요한 짐들을 옮기자고 하셨다. 피난민 대열에 합류하면서 케레피에서 니믈레까지 50분 거리를 4~6개의 군인 초소를 지나다니며 약 일주일 간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짐을 옮겨야 했다. 군인 초소를 지날 때마다 ‘내가 다시 이 길을 지나갈 수 있을까?’ 싶었고, 끊임 없이 묵주 기도를 드리면서 도움이신 성모님께 매달렸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과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던 시간들은 우리 남수단 선교의 희망과 열정까지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듯했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오직 하느님께 평화를 갈망하며 드리는 기도였다. ‘우리가 이렇게 힘든데 삶의 자리를 송두리째 빼앗긴 난민들은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과 함께 헤로데의 손길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하셨던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연대이고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와 희생을 바쳐 준 수녀님들과 살레시안 가족들과의 연대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유일한 표징이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제 나자렛으로 돌아가라’ 하신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들의 꿈속에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난민에 대한 경험도, 지식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 가난한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실 거라는 믿음으로 난민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처음 난민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우리의 믿음은 곧 사실이 되었다. 난민 수용소는 그야말로 전쟁 수용소였다. 하루 두 번 받는 배급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음식, 부족한 식수, 맨 땅 위에서 잠을 자야 하는 불편함 그리고 콜레라의 위험까지 있는 곳. 그곳을 처음 방문해서 만난 주민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놀라움 자체였다. ‘수녀님, 기도하고 싶은데 묵주가 없어요. 묵주를 좀 구해주세요.’ 이들은 물질을 청하는 대신 하느님을 청했고, 이들의 말은 그 자체로 임마누엘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면서 같은 난민으로서 공감하는 것이었다. ‘나도 여러분처럼 집을 떠나야 했고, 난민이 되어 이곳으로 왔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맞잡은 손 안에서 이들을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고통받고 있는 난민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셨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교였다. 이러한 믿음이 나로 하여금 난민 촌에 머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난민촌 근처에 집을 얻어 물도, 전기도 가스도 없는 곳에서 정신 없이 3개월을 지내고 났을 때, 함께 있는 류 치프리아나 수녀님과 비로소 ‘지난 3개월이 3년 같았다’는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난 성탄 전에 가스를 구입해 숯불을 피워 밥을 해먹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태양열을 이용해 핸드폰과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게 되었다. 성탄 때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셨으니 얼마나 축복된 시간이던지….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지 않고도 물과 전기와 가스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으니 또한 감사 드리게 된다.
남수단과 우간다 국경 근처에는 아주마니에 약 22만명, 모요(Moyo)에 약 18만명, 그리고 윰베(Yumbe)에 약 25만명의 난민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농부가 부족한’ 난민촌에서 매 주일은 남수단에서 난민 사목을 위해 함께 우간다로 온 네 분 신부님들과 부제와 함께 아주마니 (Adjumani) 지역 근처에 있는 난민 캠프를 돌면서 전례에 참석한다. 빠기리냐 (Pagirinya) 캠프, 마지 (Maaji) 캠프 그리고 아일로 (Ayilo) 캠프에 각 여섯 개의 공소가 있고 그 외에 여러 캠프 안에도 공소들이 있다. 지난 11월에는 몇 몇 은인이 보내준 후원금으로 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 프로그램으로 여러 캠프에서 모인 30여명의 교리교사들과 3박 4일간 워크숍을 가졌다. 각 공소마다 매주 사제들이 함께할 수 없기에 캠프 안에서의 교리교사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장례예절, 유아세례 및 성인 세례 준비는 물론이고 사제가 오지 않는 매주일 전례를 이끌고 말씀 나눔을 준비한다. 일부 다처 가부장제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여성 교리교사들도 말씀 나눔을 하고 공소를 충실히 이끈다. 그 동안 목자 없는 양과 같았던 그들에게 한 달에 한번씩 사제들이 방문하는 날은 공동체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그들은 춤과 노래로 사제를 환영한다.
2016년 12월에는 각 단체 청년 지도자 130명을 대상으로 4박 5일간 청년 워크숍을 가졌다. 이 워크숍을 마친 후 공소 별 청년 워크숍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난민 캠프 안에서 청년 문제는 좀더 심각하다. 캠프에 있는 많은 청년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빈둥거리기도 하고, 또 희망을 잃은 채 알코올에 빠져드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캠프에 있는, 교사 등 자격을 갖춘 이들은 물론이고 단순한 노동자조차 이곳에서는 직업을 구하기 쉽지 않다. 이 나라 정부가 자국 백성을 고용하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12월부터는 약품상자를 들고 다니면서 매주일 미사 후 상처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있다. 각 난민 캠프마다 진료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이 상처 치료를 제때에 못해 상처가 덧나기 일쑤이다. 간호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으니 남수단에 계신 한국인 의사선생님께 치료 방법을 도움 받으면서 포비돈 한 방울만 발라줘도 좋아
하는 아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시기를 청하고 있다. 올 2월부터는 일주일에 세 번, 각 다른 캠프를 돌면서 치료해줄 계획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유치원 교사에서 피난민, 피난민에서 집과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이 되었다가 이제는 본당 수녀가 되기도 하고, 사회복지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간호사가 되기도 하면서 하루 빨리 남수단이 안정 되어 가난한 백성들이 그들의 삶의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다.
저희와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남수단 평화와 난민들을 위해 그리고 저희들을 위해 기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