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심 인물
애국지사 김붕준(金朋濬, 1888.8.22.~1950 납북),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 관련 인물
배우자 애국지사 노영재(盧英哉, 1895. 7.10 ~ 1991.11.10),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아들 애국지사 김덕목(金德穆, 1913. 5.10 ~ 1977. 7. 2),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딸 애국지사 김효숙(金孝淑, 1915. 2.11 ~ 2003. 3.25),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딸 애국지사 김정숙(金貞淑, 1916. 1.25 ~ 2012. 7. 4),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사위 애국지사 송면수(宋冕秀, 1910. 3.14 ~ 1950. 8.10, 김효숙의 남편),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6.25참전
사위 애국지사 고시복(高時福, 1911. 4.18 ~ 1953. 5. 7, 김정숙의 남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6.25참전
외손자 참전유공자 송태위(1935.10. 3.~ ) 부친 송면수와 함께 육군 하사로 6.25전쟁에 참전
◈ 독립운동 공적
김붕준 애국지사는 평남 용강(龍岡) 출신으로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처(盧英哉)와 아들(金德穆), 딸(金孝淑, 金貞淑) 등 가족전원이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군무부장(軍務部長)·의정원의원(議政院議員)·임시국무원비서장(臨時國務院秘書長)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에는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며 교민단 의사원(僑民團議事員)에 선출되었다. 1928년에는 중국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으로 구성된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의 5대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30년에 상해의 한인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제3대 교장에 피선되어 혁명청소년을 육성하였고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193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광동단장(駐廣東團長) 및 중화민국(中華民國) 국민혁명군학교(國民革命軍學校)의 참의(參議)로 피임되어 한·중합작으로 항일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의 진공으로 중경(重慶)으로 이동하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40년에는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 3당을 통합한 뒤 한국독립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하여 집행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약을 하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아 김 구·김규식·이시영 등과 함께 환국하였으며, 건국에 전념하다가 1950년 납북되었다.
노영재 애국지사는 김붕준 지사의 처로서 평남 용강(龍岡) 출신으로 1921년 6월 중국 상해에서 밀파된 안내원을 따라 전 가족이 인천항에서 어선을 타고 상해로 망명할 때 당시 애국부인회) 회장인 김마리아가 일경에 피체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 상태인 것을 동반하여 상해까지 수행하였다. 이후 8·15광복에 이르기 까지 25년간을 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등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에 힘썼다. 또한 1941년 6월 한국혁명여성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1944년 3월에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덕목 애국지사는 평남 용강(龍岡) 출신으로 일찍이 부친 김붕준을 따라 상해로 건너 가 인성(仁成)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흥사단에 가입하여 한중 우호 증진 및 항일의식 고취를 위하여 활동하던 중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로 독립운동자 일제 검거에 나선 일경에 의하여 1932년 4월에 체포되었다가 동년 5월 14일 혐의를 찾지 못하자 가출옥하였다. 그후 중산(中山)대학에 재학하다가 1939년 3월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군에 배속되어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40년 2월 중국 군사위원회 군령부 첩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상위(上尉)로 적정 수집에 전념하는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김효숙 애국지사는 첫째딸로서 평남 용강(龍岡) 출신으로 1936년 광동의 중산(中山)대학을 졸업하고 동생 김정숙 등과 함께 중산대학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선전공작에 참가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이 일어나자 남경으로 옮겨가 남기가(藍棋街)에서 한글교사로 근무하였다. 1938년에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가입하여 대일선무공작(對日宣撫工作)에 참가하였으며, 1939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장사, 사천, 중경 등지에서 교포아동교육을 담당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 부회장에, 그리고 1941년 10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1944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광복군 제2지대에 종군하여 대일 심리전 활동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2003.3.25.미국에서 작고하였다.
김정숙 애국지사는 둘때딸로서 평남 용강(龍岡) 출신으로 1919년 부친 김붕준을 찾아 모친 노영재와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7년 7월 광동 중산(中山)대학 재학 중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8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으며, 1940년 6월 17일에는 중경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상임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17일 광복군이 창립되자 여군으로 입대하여 대적심리공작을 수행하였다. 1942년 4월 임시정부 교통부 비서, 1943년에는 의정원 비서, 1944년 6월에는 법무부 비서 겸 총무과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에 심리작전 부문을 중요시하게 된 광복군 총사령부가 작전처내에 심리작전 연구실을 신설하게 되자 여기에 파견되어 보좌관으로서 한국어를 전담하여 전단작성, 전략방송, 원고작성 등 각종 심리작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11월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주화대표단 비서처 비서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고시복 애국지사는 김정숙 지사의 남편이며 황해도 안악(安岳) 사람이다. 1931년 일본에서 중경(中京)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1936년 6월 16일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기를 졸업하고 중국군 9사단에서 복무하면서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1937년 10월 20일에는 중일전(中日戰)에 참전하여 남구잔(南口棧)에서 일군을 섬멸한 공로로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에서 활약하였으며, 1940년 9월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부관에 임명되어 창군업무에 기여하였다. 동년 11월 총사령부가 중경(重慶)에서 서안(西安)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그는 광복군 제2지대 간부로 전입되어 수원성 포두(綏遠省 包頭)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2년 12월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원을 겸직하였으며, 1943년 3월 20일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고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44년 6월 13일 민정과장(民政科長)으로 전보되어 1945년 2월 19일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 정령(正領)으로 총사령부에 심리작전연구실이 설치되자 그 주임을 맡아 대적 심리전 공작을 수행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육군 준장으로 1953.5.7. 원주지구 전투에서 순직하였다.
송면수 애국지사는 강원도 회양(淮陽) 사람이다. 송면수 지사의 남편이며 1930년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1937년 7월 1일 중국 광동에 있는 국립중산대학(國立中山大學) 법학원(法學院)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 나월환(羅月煥)·안춘생(安椿生) 등 200여명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 광복군 제2지대 전신)를 조편하여 한구(漢口)·무창(武昌)·대전·장사(長沙)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하자 후방공작을 담당하면서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장사 마원령에서 40여명의 한국 청년들과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국경의 밤'·'상병의 벗'·'전야' 등 항일극을 야전병원과 군부대에서 공연하여 사기를 붇독우는 문화선전 활동을 주도하였다. 1942년 4월 1일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개편시 정훈조장(政訓組長)으로 활동하다가 동년 10월 27일 안 훈(安勳)이 정훈조장이 되고 그와 함께 조원으로 활동하였다. 항일전이 장기화되자 정규 군사교육을 이수하여야 되겠다는 절실한 필요에 따라 1940년 성도(成都)의 중국육군군관학교 제18기생으로 입교하여 1943년 1월 제1총대 통신병과(通信兵科)를 졸업하고 장교로서 군사전문지식을 갖추었다. 1943년 8월에는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 주임(宣傳部主任)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4년 6월 19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구 확대강화에 따라 문화부 편집위원과 선전부 편집위원으로 동년 8월 21일까지 활동하였다. 그후 1944년 이범석(李範奭)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정훈조장으로 활약하면서 미국정보처(O.S.S) 두곡지대(杜曲支隊)에서 교육훈련을 받았으며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황해도(黃海道) 지방반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진공을 준비하고 있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에 의하여 광복군을 인솔하고 귀국하였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1950.8.10.전사하였다.
◈ 묘소 위치
노영재 :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1묘역 337호(1991.11.12.안장)
김덕목 :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1묘역 240호(1990.11.23. 이장)
김효숙 :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1060호(2003. 4. 3. 배우자 송면수와 합장)
송면수 : " (2003. 4. 3.이장하여 배우자 김효숙과 합장)
김정숙 :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4묘역 545호(2012. 7. 8.안장)
고시복 : 서욱국립묘지 1장군 묘역 20호(1967. 4.14.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