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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
명종 | 16 | 1561 | 신유 | 嘉靖 | 40 | 1 | 6월 21일, 永陽 道川里에서 태어나다. |
선조 | 6 | 1573 | 계유 | 萬曆 | 1 | 13 | 칠언절구 〈戴勝吟〉을 짓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32 | 왜란이 일어나자 鄭世雅의 別侍衛로 종군하여 왜적을 참획한 것이 많았으나 공을 탐내지 않아 원종말록에 참여하다. |
선조 | 31 | 1598 | 무술 | 萬曆 | 26 | 38 | 수군절도사 成允文의 佐幕이 되다. ○ 겨울, 왜적이 물러가자 〈太平詞〉를 지어 사졸을 위로하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39 | 무과에 급제하다. 守門將에 제수되었다가 곧 宣傳官이 되다. ○ 助羅浦 萬戶가 되다. 사졸들이 遺愛碑를 세워 덕을 기리다. |
~ | ~ | ~ | ~ | ~ | ~ | ~ | 倭亂이 끝난 후 벼슬에 뜻이 없어 초야에 종적을 감추고 經典을 연구하다. 처음에 蘆洲에 살다가 곧 道川의 옛집에 살며 鄭湛과 道義의 교분을 맺다. |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41 | 漢陰 李德馨을 만나 시조 〈早紅杮歌〉를 짓다. |
선조 | 38 | 1605 | 을사 | 萬曆 | 33 | 45 | 統舟師가 되어 釜山에 부임해서 〈船上歎〉을 짓다. |
광해군 | 3 | 1611 | 신해 | 萬曆 | 39 | 51 |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다. ○ 〈莎堤曲〉, 〈陋巷詞〉를 짓다. |
광해군 | 4 | 1612 | 임자 | 萬曆 | 40 | 52 | 安東 陶山書院을 참례하다. |
광해군 | 11 | 1619 | 기미 | 萬曆 | 47 | 59 | 鄭逑를 만나 시조 〈浴于蔚山椒井歌〉를 짓다. ○ 경주 玉山의 獨樂堂을 찾아가 李彥迪을 흠모하는 뜻에서 가사 〈獨樂堂〉을 짓다. |
인조 | 7 | 1629 | 기사 | 崇禎 | 2 | 69 | 張顯光을 立巖으로 찾아가 〈立巖二十九曲〉을 짓다. |
인조 | 8 | 1630 | 경오 | 崇禎 | 3 | 70 | 용양위 부호군이 되다. |
인조 | 13 | 1635 | 을해 | 崇禎 | 8 | 75 | 가사 〈嶺南歌〉를 짓다. |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76 | 가사 〈蘆溪歌〉를 짓다. |
~ | ~ | ~ | ~ | ~ | ~ | ~ | 李溟이 영남을 按察하고 선생을 獨行特立之士로 아뢰자 仁祖가 復戶하도록 명하고 자손에게는 蔭職을 내리고 특별히 米肉을 하사하다. |
인조 | 20 | 1642 | 임오 | 崇禎 | 15 | 82 | 12월 6일, 졸하다. ○ 永川 남쪽 大朗山에 장사 지내다. |
숙종 | 30 | 1704 | 갑신 | 康熙 | 43 | - | 鄭葵陽이 행장을 짓다. |
숙종 | 33 | 1707 | 정해 | 康熙 | 46 | - | 道溪祠를 세워 향사하다. |
순조 | 31 | 1831 | 신묘 | 道光 | 11 | - | 문집이 간행되다. (金裕憲의 序, 鄭夏源ㆍ崔의 跋) |
- | - | 1964 | 갑진 | - | - | - | 문집이 간행되다. (權相圭의 跋) |
노계 박선생 묘
노계 박인로 묘갈명 및 서문
사진8 노계 묘갈
墓碣銘 幷序 [李鼎秉]
公諱仁老。字德翁。蘆溪其號也。又曰無何翁。新羅儒理王後也。中世有諱中美。仕麗至領相。以輔理功封密城府院君。始爲密陽人。是生諱晐。入我朝官大司憲。後三世諱英孫。掌樂院正。於公爲高祖。曾祖諱珽。集慶殿參奉。祖諱允淸。承仕郞。
공의 휘는 인로이고 자는 덕옹이며 노계는 그 호인데 무하옹이라고도 한다. 신라 유리왕의 후예인데, 중시조는 휘가 중미이다. 고려왕조에 벼슬을 하여 영상에 이르렀으며 보리공신으로 밀성부원군에 책봉되어 처음으로 밀양인이 되었다. 이 분이 휘 해를 낳았는데 조선왕조에 들어 관직이 대사헌이 되었다. 그 3세 후손이 휘 영손인데 장악원정이셨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되시며 증조는 휘가 정인데 집경전 참봉을 지내고 조 휘 윤청은 승사랑을 지냈다.
考諱碩。承議副尉。妣端人朱氏。參奉舜臣女。以嘉靖辛酉六月二十一日。生公于永川道川里第。公幼而明睿。人誦書史。一聽輒記。長善屬文。龍蛇之難。慷慨投筆。以殉國自誓。參原從錄。아버지의 휘는 석이고 승의부위 관직을 가졌다. 어머니 단인 주씨는 참봉 순신의 따님이다. 가정 신유 6월 21일 영천 도천리 집에서 태어나셨다. 공은 어려서 명석하여 남이 외는 책과 역사를 한 번 듣고 곧바로 기억하고 문장에 뛰어났다. 임진왜란에 강개하여 붓을 던지고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것을 맹서하였는데 원종공신록에 올랐다.
戊戌。佐江左節度使成允文。每論戎務。成擊節稱善。登己亥武科。除守門將。旋授宣傳官。出爲助羅浦萬戶。土卒立碑頌德。무술년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성윤문의 막료로 발탁되어 작전을 의론할 때마다 적을 물리칠 수 있어서 칭찬을 들었다. 기해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 관직을 제수받고 이어서 선전관을 제수받았으며 외직으로 거제도 조라포만호가 되었는데 사졸들이 비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公負材宏遠。世無知者。惟李漢陰相公氣味暗符。遇之以國士。將推薦大用。不果。時事又大變矣。공은 굉원한 능력을 타고 났지만 세상에 아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한음 이덕형 상공과 그 뜻이 가만히 부합하여 공을 국사로 대우하여 크게 기용되도록 추천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시 상황이 또한 큰 변란이 있었던 것이다.
自是斂迹田野。無意進取。忽自奮曰。聖人云。朝楣夕死可矣。豈可以年老自畫。日取聖賢書。潛心翫索。嘗夢見元聖。元聖授以誠敬忠孝四字。因手圖揭壁。又爲入德門,人鬼關圖以自省。
이후 자취를 거두어 시골에 사시며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홀연히 스스로 떨쳐 말씀하시길, 성인 공자님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는데 어찌 늙었다고 자부하겠는가. 날로 성현의 책을 읽는데 몰두하고 그 의미를 음미하였다. 일찍이 꿈에서 원성인 주공을 만났는데 주공이 성경충효 네 글자를 주어, 그림으로 그려서 벽에 걸어두었으며, 또한 입덕문을 만들었는데 인귀관도로(소학충효도, 대학경도, 중용성도) 스스로를 성찰하였다.
性至孝。家甚貧乏。而事母夫人極其誠養。及喪。哀毀踰節。與弟仁叟,仁耆友愛隆篤。白首同衾。入鄕里必下馬步行曰。張湛。我師也。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집이 매우 가난하여도 어머니를 섬김이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상을 당하자 슬퍼함이 절도를 넘었다. 아우 인수, 인기와 우애가 극진하여 늙어서도 이불을 함께 덮고 잤다. 향리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서 다녔는데 ‘한나라 장담이 나의 스승이다’고 하였다.
口不言人過失。聞小善。輒稱道。然當是非義理處。凜然有不可奪者。尊賢樂道之誠。老愈不倦。
입으로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고 작은 착한 일이라도 들으면 곧 칭찬하여 말했다. 그러나 시비와 의리에 걸린 일에서는 늠연하여 뺏을 수가 없음이 있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도를 즐거워하는 정성은 늙어서도 싫어하지 않으셨다.
嘗入紫玉山。訪晦老遺躅。作獨樂堂歌累百言。拜寒岡鄭先生於泗上。先生亟稱。時張旅軒,曺芝山兩賢。林居講道。公往請敎。張先生以爲東方未有之人豪也。
일찍이 자옥산에 가서 회재 이언적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독락당가를 지었는데 수백 구가 되었다. 한강 정구 선생을 성주에서 찾아뵈었는데 선생이 공을 칭찬하시었다. 당시에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 두 어진 선비가 시골에서 도를 강론하셨는데, 공이 두 분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동방에 없었던 호걸이라 여겼다.
善歌什。雖尋常永言之間。其思親憂國之意。藹然洋溢。初愛蘆溪水石之勝。築室寓居。晩尋道川舊隱。蕭散自適。
노래를 잘 지었는데 비록 보통의 노래에도 어버이를 사모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애 끓어 넘쳤다. 처음 노계의 물과 바위의 빼어난 경치를 아껴서 집을 짓고 사시다가 노년에 도천의 옛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庚午。超授龍驤衛副護軍。優老典也。李按使溟啓耳行特立之士。仁廟嘉之。令郡官復其戶官其子。
경오년에 조정에서 용양위부호군이라는 관작을 등급을 넘어 주었는데 원로를 우대하는 은전이었다. 관찰사 이명이 공을 ‘독행특립지사(행실이 우뚝하게 모범이 되는 선비)’로 보고를 올렸고 인조 임금이 아름다이 여겨 영천 군수에게 명령하여 그 자손들에게 호구세를 면제하고 그 자식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였다.
崇禎壬午十二月初六日卒。享年八十有二。葬于郡南大朗山乙坐原先考墓下。
숭정 임오년 12월 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2세였고, 영천군의 남쪽 대랑산 을좌 언덕 선친 묘 아래에 장례하였다.
配淑夫人德水李氏。子男長興立。次敬立。昌陵參奉。爲親廬墓。爲仁廟方喪三年。世謂忠孝有傳。次孝立。後室育也。孫曾以下不盡錄。
부인은 덕수 이씨(정규향이 지은 행장에는 이순신이라고 하였다. 덕수이씨의 이순신은 충무공이다. 충무공에게 정실부인(처) 상주방씨 외에 측실부인(첩)이 2명이 있었고 서자 2명과 서녀 2명이 있었다. 이순신의 서녀 1명이 박인로와 결혼했다. 박인로는 태평사, 선상탄을 지었고, 조라포 만호, 통주사(경상좌수사)이었다. 경상좌병사 성윤문의 막료로 부산에서 10일 간 머물다가 성윤문의 지시로 태평사를 지었다. 수군과의 이러한 인연으로 수군이었던 이순신의 서녀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성윤문이 충무공과 교분이 있 중매를 섰던 것으로 보인다. 박인로는 이순신의 사위이다) 이고 아들은 장남이 흥립이고, 차남 경립은 창릉 참봉으로 부친을 위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는데(역주: 마을 이름 孝洞, 6년 여묘), 인조를 위하여 방상(方喪) 3년 상을 입자 세상에서 충효가 전해지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차남 효립은 후실의 자식이다. 손자 증손자 밑으로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肅廟丁亥。立道溪祠以尸祝之。
숙종 정해년 도계사당을 세우고 시동을 두고 제사를 지낸다.
嗚呼。公之才全德備。已發揮於諸名勝推許筆舌。則顧茲謏劣淺識。烏能記公之萬一。諸孫將豎碣表阡。公之七世孫慶濩請銘於不佞岳。余匪其人。惟以托名是碣爲幸。遂爲之銘曰。
아! 공의 재능은 온전하고 덕은 갖추어졌으니 여러 명승을 필설로 묘사하며 발휘하였으니 이 보잘 것 없고 얕은 식견을 돌이켜보건대 어찌 공의 행적을 만에 하나라도 기록할 수 있겠는가. 여러 후손들이 묘갈을 세워 들 가운데에 드러내려 하니 공의 7세손 경호가 비명을 망령됨이 심한 사람에게 부탁하니 나는 비명을 지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 비갈에 내 이름을 올리니 다행일 뿐이다. 마침내 비갈을 위한 비명은 이러하다.
元聖密符 주공이 비밀스럽게 주신 부절은
四字單傳 성, 경, 충, 효 넉 자로 단순하였다.
將大厥施。 장차 크게 그를 베푼 것인데
世莫知乎其然。 세상 사람들은 그런 줄을 몰랐네.
流名簡帛。 역사에 그 이름 전하여
歿不朽者存焉。 죽어서도 불후의 명성은 존재한다.
歲己丑冬至後二日。기축년 동지 뒤 이튿날
通政大夫前行司諫院大司諫驪江李鼎秉。謹撰。
통정대부 전 행 사간원 대사간 여강 이정병 삼가 지음
-蘆溪先生文集 권2
*방상(方喪) : 임금의 상을 당했을 때 부모상을 당한 경우에 견주어 참최 삼년(斬衰三年)으로 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
聘李舜臣女。生二男一女。男長曰興立。次曰敬立。昌陵參奉。女適金世溫。敬立賢有行。爲親廬墓。爲仁廟方喪三年。人以謂忠孝有傳也。後室亦有一男。曰孝立。內外曾玄孫今五十餘人。公性至孝。母朱氏臨年在堂 *李忠武公全書卷之九 원문이미지 |
* 配尙州方氏。封貞敬夫人。寶城郡守震之女。永同縣監中䂓之孫。平昌郡守弘之曾孫。將仕郞洪胤弼之外孫也。生三男一女。男長曰薈。縣監。次曰䓲。正郞。季曰葂。已死。女嫁洪棐。儒業。妾子二人。曰薰。曰藎。女二人。孫男二人。曰之白。曰之晳。女一人。嫁尹獻徵。外孫四人。曰洪宇泰。曰洪宇紀。曰洪宇逈。曰洪振夏。女一人。 *이정병(李鼎秉, 1759(영조 35)∼1834(순조 34)) 본관은 여주(驢州). 자는 이집(彛執). 호는 금파(琴坡). 경주 양좌동(良佐洞) 출생.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헌백(李憲百)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통덕랑(通德郎) 신집(申潗)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에게 수학했다. 1783년(정조 7)에 동당회시(東堂會試)에 합격했고, 1786년(정조 10)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그 뒤 휘릉별검(徽陵別檢)·원릉별검(元陵別檢)에 임용됐으며 1790년(정조 14)에 의령고주부·병조좌랑이 됐다. 1794년(정조 18)에는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이듬해에 사간원정언을 지냈는데, 이때 수궁대장이 근무에 태만하자 그 죄를 물어 처벌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1796년(정조 20)에 병조정랑, 이듬해에 홍문관수찬 겸 경연검토관이 되어 이언적(李彦迪)이 지은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왕에게 바쳤고, 다시 현풍현감으로 나갔다. 1807년(순조 7)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군심을 바르게 할 것을 상소했고 이듬해에 능·종묘의 축문과 숭인전(崇仁殿)의 제문·기우문 등을 지어 바쳤다. 1812년(순조 12)에는 통례원상례가 되어 동궁의 입학을 주관했다. 1814년(순조 14)에 사헌부집의·성균관사성이 됐고, 1816년(순조 16)에 병조참지·동부승지·우승지, 그리고 이듬해에 풍천부사가 되어 환곡 만석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뒤 1825년(순조 25)에 돈녕부도정이 되었고, 1833년(순조 33)에는 형조참판·한성좌윤·동지돈녕부사에 임용됐으며, 이듬해에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올랐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교육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금파문집(琴坡文集)』 6권 3책이 있다. 참고문헌 『금파문집(琴坡文集)』 [네이버 지식백과] 이정병 [李鼎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④노계박공묘 수갈시 차 정하원운 신묘 시 교감공유집 蘆溪朴公墓 竪碣時 次鄭夏源韻 辛卯 時 校勘公遺集 노계 박인로 선생의 묘에 묘갈을 세울 때 정하원의 운에 맞추어 지음 신묘년 때마침 공의 유집을 교정함
冠履收藏地 갓과 신을 갈무리한 곳 雲孫永慕誠 후손이 길이 추모하는 정성 編摩楊子草 버들강아지 엮은 자리 펴고서 展拜喬公塋 높은 공의 무덤에 절을 올리네. 片石眞堪語 빗돌은 참으로 말할 수 있어서 千秋若有靈 천추에 혼령이 있을 것이네. 東風雨露節 봄바람, 비와 이슬 내리는 계절 蕉荔尊深情 초려로 제사지내어 깊은 정을 올리리라. -최옥, 최동희 역주, <<근암집(近庵集)>>
*초려(蕉荔)로 제사 지내며 : 초려는 파초(芭蕉 바나나)와 여지(荔枝)를 합칭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 “여지는 빨갛고 파초는 노란데, 고기와 채소를 곁들여 자사(刺史)의 사당에 올리네.〔荔子丹兮蕉黃 雜肴蔬兮進侯堂〕”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파초와 여지는 곧 남부 지방의 제수(祭需)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주의 나지묘는 유종원(柳宗元)을 제사하는 사당이다. 《韓昌黎集 卷7 碑誌》
*최옥(1762-1840), 근암집 최옥의 자는 자성(子成), 호는 근암(近庵), 본관은 월성(月城), 아버지는 종하(宗夏)이다. 최옥은 8차례나 향해(鄕解)에 합격했으나 본시(本試)에 불리한 후로는 벼슬길에 뜻을 끊고 와룡담(臥龍潭) 위에 은거하여 낙민서(洛閩書)와 동국유현(東國儒賢)의 문집을 탐독하였다. 산수를 특히 좋아하여 강좌우(江左右)의 명승지를 거의 답파(踏破)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유람한 사람이 있으면 그 시와 유록을 열람하였다. 천성이 화평하고 담소하기를 즐겨하여 누구나 친압(親狎)할 것 같으나 내심은 곧고 절조가 있었다. 『근암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최옥의 시문집이다. 근암집은 1927년 그의 증손 한수(翰壽)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문집의 권말에 최현필(崔鉉弼)의 발문과 한수·서익수(徐翼洙) 등의 후지(後識)가 있다. 글 가운데 「와룡담부(臥龍潭賦)」는 주자(朱子)가 지은 「백록동부(白鹿洞賦)」의 운자(韻子)를 써서, 수석(水石)과 국죽(菊竹)을 벗삼아 사물을 대함에 일어나는 심회를 피력한 작품이다. 대부분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비교적 차운과 서정시가 많다. 특히 「봉독천명도설감음(奉讀天命圖說感吟)」은 천명·오행·이기·인심·도심·성정·선악·기질 등의 제목을 붙여 읊은 것으로 도학자적인 자취가 담긴 작품이다. 그리고 스승인 이상원(李象遠)·정종로(鄭宗魯)와 권이복(權以復) 등 당시 명현들에 대한 만사도 있다. 「어부사발(漁父辭跋)」은 이황(李滉)이 지은 「어부사」에 대한 발문으로 「어부사」를 기생에게 노래로 부르게 하고, 황창랑(黃倡郞)·처용(處容)의 춤을 추게 하면서 이 소리를 들으면 마치 신선의 음악을 듣는 듯 귀가 번쩍 트일 것이라고 극구 찬양을 하고 있다. 또 「퇴계언행록발(退溪言行錄跋)」은 권두경(權斗經)이 엮은 이황의 『언행록』에 대하여 쓴 발문이다. 이황의 일거일동 언행을 연구하려면 이 책을 보아야 한다면서, 이 언행록은 『노논어(魯論語)』의 「향당편 鄕黨篇」과 같다고 강조하였다.
노계시비 ⑧주어진 현실에 편안해 하는 노래 安分吟
道川川上無何翁。破屋數間而已矣。 도천 시냇가 무하옹, 찌그러진 몇 칸 집일 뿐. 白髮蕭蕭被兩鬢。但自悲歎而已矣。 백발이 쓸쓸하고 수염 덥수룩하여, 스스로 비탄만 할 뿐. 一奴長鬚走不還。一婢赤脚而已矣。 한 남종 긴 수염에 도망가고 돌아오지 않고, 한 여종은 맨발일 뿐. 凄涼虛室寂無人。乳燕雙飛而已矣。 처량한 빈 방 적적하여 사람 없고, 어린 제비 한 쌍만 있을 뿐. 一身裘褐知何許。百結懸鶉而已矣。 한 몸이 가죽옷 가죽신을 알지만, 쪼가리 기운 누더기일 뿐. 雖然弊衣何足憂。但願長醉而已矣。 비록 헤진 옷이지만 어찌 근심하며, 다만 길게 술 취하기를 바랄 뿐. 丈夫寧謀衣與食。任其所有而已矣。 장부가 어찌 옷과 밥을 도모 하리오, 그 소유에 맡길 뿐. 一簞一瓢猶屢空。不改其樂而已矣。 초배기 밥 한 그릇 쪽박 물 한 모금도 오히려 자주 비었지만,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을 뿐. 縱使狐貉比肩立。泰然不恥而已矣。 여우 담비 가죽옷을 걸친 사람과 나란히 서도, 태연하여 부끄럽지 않네. 所以聖門稱其賢。顏子,子路而已矣。 공자님 문하에 어질다고 칭하는 것은 안자와 자로일 뿐. 顧余愚庸何敢及。只願安貧而已矣。 나의 어리석음과 용렬함을 돌아보니 어찌 감히 그에 이를 것이며, 다만 안빈낙도할 뿐. 世傳餘業有何物。竹梅松菊而已矣。 세세로 전하는 취미 삼을 것은 무엇인가, 대나무, 매화, 솔, 국화일 뿐. 西湖無主栗里空。今我獨愛而已矣。 서호(소동파)에 주인 없고 율리(도연명)는 비었으니, 지금 나 홀로 아낄 뿐. 這裏生涯淡如許。布被藜羹而已矣。 이 속의 삶이 담박하여, 삼베옷 입고 명아주 국 먹을 뿐. 食無求飽聖所云。僅免飢渴而已矣。 밥은 배부름을 구함이 없다고 공자님 말씀하셨으니, 겨우 굶주림과 목마름만 면할 뿐. 窮巷蕭條甘守拙。不易其介而已矣。 궁벽한 마을이 쓸쓸하고 졸박함을 달게 지키니, 그 개결함을 바꾸지 않을 뿐. 雨後春田何所事。數畝耕耘而已矣。 비 온 뒤 봄 밭에 할 일이 무엇인가, 몇 묘의 밭을 갈 뿐. 秋風江上何所樂。獨釣閑吟而已矣。 가을바람 강가에 불어오니 즐거움이 무엇인가, 홀로 낚시하며 한가로이 시를 읊을 뿐. 少日居官有何效。氷淸玉潔而已矣。 젊은 날 관직에 있으며 무엇을 본받았던가,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할 뿐. 生於斯世有何名。孝友淸白而已矣。 이 세상에 태어나 무슨 이름이 있는가, 효도와 우애, 청백리일 뿐. 不虞之譽過情聞。心獨恥之而已矣。 뜻밖의 칭찬이 지나치게 소문나니, 마음으로 단지 부끄러워할 뿐. 此翁胸中何所蓄。忠孝二字而已矣。 이 늙은이 가슴 속 쌓은 것이 무엇인가, 충과 효 두 글자일 뿐. 心長才短一未售。虛老江村而已矣。 마음은 길고 재능은 짧아 한 번도 쓰이지 않아, 강촌에서 헛되이 늙을 뿐. 報國初心竟歸空。西望涕淚而已矣。 나라에 은혜 갚겠다는 첫 마음은 끝내 헛되어 버렸고, 서쪽을 바라보며 눈물 흘릴 뿐. 烏鳥深情亦未報。終身孺慕而已矣。 반포(反哺)의 깊은 정도 갚지 못하고, 종신토록 아이가 되어 사모할 뿐. 獨也天末孤輪月。照我丹衷而已矣。 하늘의 외론 달만이 홀로, 나의 붉은 속마음을 비출 뿐. 每遇山水殊勝處。任意逍遙而已矣。 산수가 빼어난 곳을 만날 때마다, 마음 가는대로 노닐 뿐. 步出林亭何所聞。鶴唳猿嘯而已矣。 걸어서 숲 속으로 가면 들리는 것이 무엇인가, 학 울음, 원숭이 휘파람일 뿐. 徙倚巖畔何所見。往來閑雲而已矣。 시냇가 바위에 옮겨 살며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한가로운 구름만 오갈 뿐. 門前冷落狗不吠。晝掩柴扉而已矣。 바깥에 날이 차고 잎이 져도 개는 짓지 않고, 낮에도 사립문을 닫아 둘 뿐. 堪嗟世人莫我知。獨樂安分而已矣。 아! 세상 사람들 나를 알려 마소, 홀로 사니 즐겁고 분수에 편안할 뿐. 況又禍福自有數。樂夫天命而已矣。 하물며 또한 복과 화에는 절로 운수가 있으니, 천명을 즐거워할 뿐. 由來窮達莫非命。順受其正而已矣。 궁핍과 현달에 명운이 아님이 없으니, 그 바름을 순조로이 받아들일 뿐. 淸風高臥北牕下。從吾所好而已矣。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에 베게 높이하고 누우니, 내 좋아하는 것을 따를 뿐. 如今老境抑何求。養性怡神而已矣。 지금 같은 늘그막은 어디서 달리 구할 것이며, 성품을 기르고 정신을 즐겁게 할 뿐. 閑中天地自有樂。不忮不求而已矣。 한가한 천지에 절로 낙이 있으니, 원망하지 않고 구하지 않을 뿐. 野老身世此亦足。富貴如雲而已矣。 들에서 사는 늙은이의 삶에 또한 만족하니, 부귀는 뜬구름 같을 뿐. 第此心中有一願。俯仰無愧而已矣。 다만 이 마음에 한 가지 바람이 있으니,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 부끄러움이 없을 뿐. (김희준 옮김) 도계서원 1970년대 ⑥문족부 捫足賦 噫父母之天性。아! 부모의 천성은 通萬古而無間。만고에 차이가 없으시네. 旣勤斯而鞠斯。이 몸을 부지런히 키우시고 기르시니 惟疾病之是患。병이 날까 걱정하시네. 何彼寇之有母。어찌하여 저 구준의 어머니는 獨擲槌而傷趾。매를 쳐서 다리에 상처를 내었는가. 豈愛薄而乃爾。어찌 사랑이 옅어서 그랬겠는가. 實鍾愛之所致。사실은 나를 사랑하여서네. 苟逸居而無敎。진실로 편안히 지내며 가르침 없으면서 縱曰愛而非愛。함부로 사랑이라 하나 사랑이 아니네. 不爾而愛子。도로써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愛何異於禽犢。사랑이 어찌 새와 송아지와 다르랴. 恐爲遊田之蕩子。논밭을 놀리고 방탕한 자식 될까 두렵네. 赫庭怒於今日。오늘은 마당에서 불같이 화를 내시네. 念旣切於警爾。너를 깨우칠 생각이 간절했으나 奚暇及乎捶撻。어느 겨를에야 회초리를 댈 것인가. 曰汝孤之三尺。가로되 너는 삼척동자이지만 年已至於成人。벌써 어른이 되었구나. 或朝出而晩來。아침에 나가 늦게서야 돌아오고 或暮往而不還 저녁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기도 하였지. 倚門閭之斜陽。문에 기대어 해가 빠지도록 서서 望幾斷於眼寒。눈이 시리도록 바라보기 몇 번이더냐? 豈意爾之不肖。어찌 너가 불초하여 貽老母之悁悁。늙으신 어머니에게 걱정 끼칠 지를 의도하였겠는가? 以男子而多懼。남자라면 부모 걱정 많아야 하니 在聖人而猶然。성인에게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況如我之薄命。하물며 박복한 나에게서야 敎詎弛於命面。어찌 면전의 절실한 가르침을 소홀히 하랴! 嗟有子而不敎。아 자식이 있는데 가르치지 않으니 顧安用乎愚蠢。어리석고 굼뜬 아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愧未能於胎敎。태교를 잘하지 못하여 부끄럽고 恨未效於三遷。맹모 삼천지교를 본받지 못해 한스럽다. 縱誨汝之已晩。비록 너를 가르치는 것이 늦어버렸지만 盍迨今而丁寧。어찌 지금에라도 간절히 깨우치지 않으랴? 豈爲道而求遠。어찌 도를 멀리서 구하랴? 在日用而當行。도는 생활에서 마땅히 행함에 있다. 入則孝兮出則悌。들어온즉 효도하고 나간즉 공손하여라. 有餘力則學文。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觀世間之無學。세상의 배우지 못한 사람을 살피니 無萬物之比倫。만물에 거의 짝할 것이 없네. 嗟余子兮(二字缺)。슬프다! 내 아들아... 胡佚遊之是習。어찌 방탕한데 젖어버렸느냐? 忽子心之惕若。문득 아들의 마음이 슬퍼지니 感昊天之罔極。호천망극한 어머니 은혜에 감동하네. 豈母心之有他。어찌 어머니 마음이 다른 것이 있으랴 痛子道之靡克。자식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슬프네. 發於誠而深責。진심에서 깊이 꾸짖으니 雖血流而何怨。비록 피가 흐르지만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欲自撾而甘心。스스로 채찍질 하며 달게 여기어 敢不承其庭訓。감히 어버이 가르침을 받들지 않으랴? 奉當日之一言。그날에 하신 말씀을 받들어서 擬無恤之懷簡。무휼이 아버지 조간자를 생각하듯 하네. 革舊染之汚穢。예전에 물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冀日新而又新。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지기를 바라니 行旣篤於誠敬。행실은 성의와 공경함을 독실히 하니 其敢忘乎造次。어찌 한 순간에라도 그를 감히 잊으리오. 思戰兢而自持。전전긍긍 자기를 지키고 亦有事乎經史。또한 경전과 역사를 일삼아 배우리라. 日孜孜而勉強。날로 힘쓰고 힘쓰며 부지런히 공부하여 竟弘濟於當時。마침내 한 시대에 세상을 널리 구하네 旣其母之若茲。그 어머니가 이와 같으니 宜有子之賢哲。마땅히 자식이 어질고 밝은 사람이 되리라 偉寇母之志行。위대하여라 구씨 어머니의 뜻과 행실이여 乃百世之柯則。백세토록 모범이로다. 卓今古而景仰。고금에 탁월하여 우러르니 痛後人之無及。후세인이 미치지 못함을 통탄하네. (김희준 옮김)
*조간자趙簡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백로(伯魯)이고, 차남이 무휼(無恤)이었다. 어느 날 간자가 훈계의 말을 쪽지에 적어 각각 두 아들에게 주고서 잘 기억해 두라고 명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물어보니, 형 백로는 훈계의 말을 잊어버려 대답을 못 하였고 쪽지도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아우 무휼은 그 말을 암송하여 잘 알고 있었고 쪽지를 꺼내라고 하자 즉시 품속에서 꺼내어 아버지에게 올렸다. 《十八史略 春秋戰國 趙》
*구준寇准은 북송의 중신이고 저명한 정치가이다. 관직에 나아가 오래지 않아 여러 차례의 직간으로 송 태종 조광윤의 칭찬을 받고 중용되어 경덕 원년1004년에 재상이 되었다. 그는 태종 진종 인종 3조정의 원로로서 그 청렴결백한 관직 생활로 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천하를 얻으려거든, 원로 구회를 초빙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는 민요가 변경卞京에 생기고 그의 뛰어난 성품과 덕성은 모두 그의 어머니의 교육에서 얻어진 것이다. 구준은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이고 그 선조 蘇분은 일찍이 서주 무왕 때 태어나서 사구司寇 벼슬을 하고 누차 큰 공을 세워 관직으로 된 성을 하사받았다. 구준의 아버지 소상은 동진 개운 년간에 진사시헙 갑과에 합격하였고, 뒤에 위왕의 부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중국 검색 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
*가칙柯則은 《시경》 〈벌가(伐柯)〉에 “도끼 자루를 벰이여 도끼 자루를 벰이여, 그 법칙이 멀지 않네.〔伐柯伐柯 其則不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즉 자기가 잡고 있는 도끼 자루를 보면 도끼 자루의 길이나 굵기를 알 수 있듯이 사람도 수신(修身)의 도리를 자기 자신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⑦月城古池。次李提督 三省 韻。 월성의 옛 연못(역주: 동궁과 월지, 안압지). 제독 이삼성의 시에 차운함 羅代興亡問幾年。신라왕조가 흥하고 망한 것이 몇 년인가? 方塘物色尙依然。연못의 경치는 오히려 옛 그대로이네. 臺沼如今民共樂。지금의 누대와 연못은 백성이 함께 즐기고, 更看於牣躍于淵。연못에서 살찐 물고기 뛰어오르는 것을 다시 보네.
*이삼성[1564~1624]은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향시에 수차례 합격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물고기를 잡아 모친을 봉양하였으며, 충의위(忠義衛)를 거쳐 찰방으로 향촌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36세가 되던 1599년(선조 32) 기해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였으며, 1600년 선조가 대신들과 명나라 군의 주둔을 요청하는 데 따른 제반 문제와 일본과의 강화 문제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로 참여하였다. 승정원주서, 함경북도수상도찰, 형조좌랑을 거쳐 1604년(선조 37) 울산판관(蔚山判官)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간원에서 명망이 없으니 영문(營門)에서 위엄으로 다스리는 직임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하여 체직되었다. 1606년(선조 39) 강진현감이 되었으나 용렬하다는 이유로 의천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간원들은 이삼성이 인품이 혼미하고 망령스러운 데다 도임한 이후로 하리(下吏)들에게 정사를 맡겼을 뿐만 아니라 근신하지 아니한 일이 많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파직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삼성의 인품을 인정하고 영천군수와 병조정랑을 내렸으나 끝내 고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후학 교육과 육영 사업에 전념하였고,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선비의 실천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구암재를 짓고 당대 문장가들과 교유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삼성 [李三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도계서원 3-2. 노계집 간행 및 구성
저자의 시문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은 李德馨의 曾孫인 李允文에 의해서이다. 1690년(숙종 16) 李允文이 永川 郡守로 부임하자 저자의 후손인 朴進善을 만나 〈莎堤曲〉을 듣고는 〈陋巷歌〉와 〈早紅杮歌〉 등 선조와 관련된 몇 작품만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는데 그 판본이 永川에 남아 있었으나 본집의 간행 당시는 잃어버렸다고 한다. 歌辭의 간행에 대해서는 鄭葵陽이 撰한 行狀에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1704년 후손 朴聖規가 유문을 모아 와서 편차와 교정을 의뢰할 때에 樂府의 간행 사실을 말하면서 행장을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1704년경 篪叟 鄭葵陽에 의해 蘆溪集의 첫 교정본이 이루어졌던 듯하다. 이후 1829년 묘갈명을 짓고 묘비를 세우면서 문집의 간행을 도모하여 후손 朴慶濩가 金裕憲에게 서문을 받고, 1831년 후손 朴天柱와 朴希柱가 鄭葵陽이 교정했던 초교본을 다시 崔옥과 鄭夏源에게 맡겨 讎校와 편차를 마쳤다. 이에 원집과 부록 상하권으로 나누고 歌辭 1권을 별록으로 편차한 뒤 1831년경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초간본은 규장각(奎15516),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2492) 등처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1904년 〈陶山歌〉를 追刻하여 후쇄하는 과정에서 刓缺된 몇 글자를 보각하였는데 이때 초간본의 간행 시기를 잘못 추정하여 ‘正宗庚申(1800)刊 光武甲辰(1904)印’이란 刊記를 속표지에 추각함으로써 蘆溪集의 간행 연도에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초간본의 간행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몰연대나 본집의 내용, 그리고 刊記가 표시된 본이 光武年 후쇄본에 한정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는 후대의 착오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무년 후쇄본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194),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964년 후손 朴洙文이 원판목 중 훼손된 것을 改刻하고 또 새로이 발견된 〈立巖二十九曲〉 중 7수와 「大東風雅」 중 저자의 작품으로 밝혀진 것을 추가하여 權相圭의 後敍를 실어서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25-19)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31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金裕憲 撰), 跋(鄭夏源, 崔옥 撰) 및 蘆溪集의 形成(국어국문학 8호 1973. 姜銓燮) 등에 의함
노계집 구성과 내용 본집은 3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두에 金裕憲의 서문과 총목록이 있다. 권1은 世系圖, 네 개의 圖와 詩, 傳, 記가 실려 있다. 圖는 〈中庸誠圖〉, 〈大學敬圖〉, 〈小學忠孝圖〉, 〈自警目〉으로 朱子의 성리학적 개념을 도식으로 구성하여 직관적인 이해와 수양에 도움을 주도록 한 것이다. 시는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율시 등 시체별로 나뉘어 약 100수 가량 실려 있는데 칠언절구가 73수로 가장 많다. 賦로서 유일한 〈捫足賦〉는 慈母의 엄한 교육이 자식을 현철하게 만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贈崔上舍起南〉은 1618년 작으로 저자의 田地를 侵耕하는 자에게 오히려 모두 양보해 주고 이 시를 지어 이욕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또 13세에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戴勝吟〉이 있으며, 〈耕田歌〉, 〈四時吟〉, 〈安分吟〉 등은 자연에 은거해 지내며 농경을 일삼는 저자의 청빈한 생활태도를 반영한 시이다. 이 밖에 자전적인 글인 〈無何翁傳〉과 〈夢見周公記〉가 있다. 권2는 附錄이다. 저자의 〈無何翁傳〉을 읽고 張顯光이 쓴 〈無何翁傳九仞山記跋〉과 鄭好信이 지어 준 시 등 저자와 교유한 인물의 글이 실려 있다. 행장은 1704년 鄭葵陽이 쓴 것이며, 1829년 李鼎秉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또 저자의 운에 차운하여 지은 鄭好義, 鄭夏源의 시를 續附로 기재하였다. 권말에는 본집을 교정 편차한 鄭夏源과 崔옥이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권3은 국한문혼용가사로 歌詞 7편과 短歌 60수가 실려 있다. 〈太平詞〉는 1598년 전란시의 작품으로 아군의 활약과 태평성대의 기원을 노래한 것이고, 〈莎堤曲〉, 〈陋巷詞〉는 李德馨과 교유하면서 지은 것으로 忠孝와 安貧樂道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船上歎〉은 1605년 統舟師로 있을 때 지은 것이며, 〈獨樂堂〉은 저자가 李彥迪의 거처였던 獨樂堂의 유적을 돌아보면서 사모하는 심정을 읊은 것인데 저자의 작품 중 가장 장편으로 255句나 된다. 그 외에 시조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早紅杮歌〉 4수, 五倫을 시조로 읊은 〈五倫歌〉 25수, 立巖에 살았던 張顯光을 대신해 지었다는 〈立巖歌〉 22수가 실려 있다. 저자가 鄭澈, 尹善道와 함께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고 있는 만큼 저자의 작품도 국문학상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필자 : 金圻彬)
대승음 후투티 울음 후투티 울음 戴勝吟 十三歲作 13세에 지음 사진9 후투티
午睡頻驚戴勝吟。후투티야, 너의 울음소리에 낮잠을 자주 깨네, 如何偏促野人心。너는 어찌하여 농부의 마음을 재촉하니. 啼彼洛陽華屋角。저 한양의 세도가 집 모퉁이에서 울어서, 令人知有勸耕禽。밭 갈기를 권하는 새가 있음을 알게 하여라.
*대승조(戴勝鳥) : 봄, 여름 철새인 후투티, 오디새를 말한다. 일명 호발발(胡哱哱)ㆍ화포선(花蒲扇)ㆍ산화상(山和尙)ㆍ호효형(呼哮哼)ㆍ고고시(咕咕翅)ㆍ계관조(鷄冠鳥) 등의 이름이 있다. *<<노계집>>을 국역한 김문기는 아래와 같은 근거로 ‘대승’을 ‘뻐꾸기’로 생각했다. 원문에 대승으로 되어 있어 오디새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①영천 지방에 확인한 결과 오디새는 없고 ②시의 내용으로 보아 뻐꾸기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③뻐꾸기는 한자로 포곡(布穀)이라 쓰고 흔히 농사를 권장하는 새로 알려져 있다. ④ ‘늦봄에 대승이 뽕나무에 내린다(季春之月 戴勝降于桑-禮記)’.
편집자는 아래와 같은 근거로 ‘대승’은 ‘후투티(오디새)’라고 생각한다. ①2016년 3월 27일 영천시 북안면 명주리 민가부근 논에서 후투티 한 쌍을 목격함. 2016년 4월 19일 경주시 보문리 논에서 후투티 한 쌍을 목격함. ②후투티는 고목이나 한옥의 용마루 구멍에 주로 둥지를 틀므로 시의 내용과 부합한다. ③후투티의 한자 대승은 ‘화려한 깃을 이고 있다.’는 의미임. ④‘늦봄에 대승이 뽕나무에 내린다(季春之月 戴勝降于桑-禮記)’고 한 것처럼 뽕나무밭 주변에 서식하여 오디새라고 하며, 논밭을 갈아엎고 농사가 시작되는 봄철에 오는 철새로 암수가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다. 이것은 봄철에 농경을 장려하는 새의 이미지가 부여될 만하다. 5)박인로의 영남가에 포곡(布穀-뻐꾸기)이 등장한다. 6)뻐꾸기는 둥지를 만들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다른 새가 뻐꾸기 알을 부화한다.
운양집(雲養集) 제2권 시(詩)○북산집(北山集) 계유년(1873, 고종10)에서 정해년(1887, 고종24)까지이다. 반반전가락 10수 병소서〔反反田家樂 十首 竝小序〕
대승조가 올 때면 봄날 저물어 / 戴勝來時春日闌 누에치는 갈대발 계절풍에 마르네 / 飼蠶葦箔候風乾 뽕잎 따려면 농사일 한가로울 때 해야 하건만 / 採桑端合閒經濟 방공만은 편히 있으려 하지 않네 / 秪是龐公不肯安
[주D-009]대승조(戴勝鳥) : 새 이름이다. 여름 철새인 후티티를 말한다. 일명 호발발(胡哱哱)ㆍ화포선(花蒲扇)ㆍ산화상(山和尙)ㆍ호효형(呼哮哼)ㆍ고고시(咕咕翅)ㆍ계관조(鷄冠鳥) 등의 이름이 있다. *후투티: 학명은 우푸파 에퐆스(Upupa epops)이다.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에 주로 서식하는 여름철새로 뽕나무밭 주변에 주로 서식하기 때문에 오디새라고도 불린다. 후투티는 머리와 깃털이 인디언의 장식처럼 펼쳐져 있어서 인디안 추장처럼 보이는 새다. 머리꼭대기의 장식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데, 몸길이는 28㎝ 정도, 등은 옅은 분홍색이고 날개는 검고 흰줄 무늬의 깃으로 되어 있다. 보통 인가 부근의 논이나 밭, 과수원 등에서 서식한다. 산란기는 4∼6월이며, 한 번에 5∼8개의 알을 낳는다. 보통 암컷 혼자 알을 품고 보살핀다. 다른 새들과는 달리 후투티는 스스로 힘들여서 둥지를 틀지 않는다. 주로 고목이나 한옥의 용마루 구멍을 둥지로 이용하는데 딱따구리가 이용했던 나무구멍도 둥지로 이용하여 번식을 한다. 후투티가 이용하는 둥지의 입구는 매우 작아서 알은 낳거나 새끼를 보살피는 것을 관찰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둥지를 수년 동안 계속해서 이용하기도 한다. 후투티는 지상 3m 정도의 높이로 날고, 나는 속도가 느린 편이다. 먹이로는 주로 곤충류의 유충을 즐겨 먹으며, 그밖에 거미·지렁이 등을 먹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후투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양각 박인로 시판 조양각은 영천읍성 안에 있다. 노계는 영천읍성 수복 의병 항전에 의병장 정세아의 별시위로 발탁되어 참가하였다. 朝陽閣 조양각 사진10 조양각 박인로 시판
天作奇巖上。하늘이 지은 기이한 바위 위에, 人開第一樓。인간이 제일 가는 누각을 열었다. 明牕黃鶴月。밝은 창에 황학과 달이 있고, 丹檻岳陽秋。붉은 기둥에 악양의 가을이네. 地接三山遠。땅은 삼 산을 멀리 접해 있고, 江連二水流。강은 이수의 흐름과 이어졌네. 秦童如見此。진시황이 보낸 동자들 여기를 보았다면, 何必訪瀛洲。하필이면 신선이 사는 영주를 찾아갔으리.
노계 생가터 ⑤관찰사 표창 상신 보고서 相請褒啓狀 당시 이공 명은 본도의 관찰사이었다. 時。李公溟。爲本道巡使。
박인로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돈후하고 성품이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편모를 봉양함에 그 음식을 지극히 하고 그 뜻을 잘 받들었는데 모든 것을 알맞게 하였습니다. 여름에는 부채로 모친의 잠자리를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옷과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평생 어머니에게 화를 내어 말하거나 낯빛을 성내지 않았습니다다. 새벽에 사당을 배알하기를 비바람이 불어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형제 사이의 우애가 도타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재물을 나누지 않았고 인정을 다하여 형제들을 돌보았습니다. 집안사람들이 효도와 우애로 칭찬하고 마을 사람들이 충성됨과 신의를 아름다이 여겼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는 향리를 바라보며 말에서 내려 걸었습니다. 남들이 그 지나친 공손을 헐뜯자, “공자님도 향리에서 공손하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이 하셨다. 부모의 고을에서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야 한다. 한나라 장담張湛은 진정으로 우리의 스승이다. 하물며 선조의 사당이 있는데 불손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모두 진심으로 수긍하였다. 착한 일을 들으면 그것을 칭찬하고 나쁜 일을 들으면 가리고 숨겼습니다. 조라포 만호가 되었을 때 털끝만큼도 잘못하지 않고 병졸들을 자식처럼 돌보니 사람들이 모두가 얼음과 옥처럼 맑고 깨끗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임기가 끝나고 본진으로 돌아올 때 군졸들이 그 청렴한 덕을 기리는 선정비를 세웠습니다. 고을에서는 또한 청백리와 효자와 우애로 착한 행실을 한 사람의 기록에 올렸는데 원근에서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한 끼 밥을 먹는 동안에도 임금과 부모를 잊지 않았습니다. 지은 시와 산문과 노랫말은 글자마다 구절마다 모두가 부모를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왔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시간이 나자 경서를 공경스럽게 마주하고 몰입하여 그 맛을 음미하였습니다. 박인로는 비루한 풍속 속에서도 맑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라도 널리 아꼈으니 화합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형제들과 한 초배기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과 누추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도 편안하게 여기며 조금도 원망하고 슬퍼하지 않았으니 행실이 우뚝한 선비라 할 만 합니다. 청컨대 각별하게 ‘독립특행지사’로 선발하여 퇴락한 풍속이 바라서도록 격려하고, 한 도의 선비와 백성의 바람을 달래어 주십시오. 朴仁老自幼稚之時。天賦惇厚。性行純至。家無甔石之資。而侍養偏母。極其滋味。色養養志。咸得其宜。夏則扇枕席。冬則以身溫被。平生無疾言遽色。晨謁家廟。風雨不廢。其在兄弟。友愛彌篤。先世財貨。不爲分貳。盡情護恤。門族稱其孝友。鄕閭嘉其忠信。每出外而還。望其鄕里。而下馬步行。人譏其過恭。則答曰。孔聖於鄕黨恂恂如也。似不能言者。父母之邦。所宜盡心。漢之張湛。眞吾師也。況先世祠廟所在。其可不敬乎。聞者皆心服。聞人之善。則褒揚之。聞人之惡。則掩匿之。助羅浦萬戶時。秋毫無犯。撫卒如子。人皆以氷淸玉潔稱之。遞來本浦。軍卒立淸德善政碑。鄕中又以淸白孝友書于善籍。遠近莫不稱讚。一飯之頃。不忘君父。所著詩文歌詞字字句句。皆出於思親憂國之誠。暇日敬對經傳。潛心翫味。鄙流俗。可謂淸矣。而不苟異。汎愛衆。可謂和矣。而不苟同。簞瓢屢空而晏如也。少無怨戚之態。可謂獨行特立之士矣。請各別甄拔。以爲激厲頹俗之地。以慰一道士民之望。 -蘆溪先生文集 권2
*장담張湛: 자 자효子孝이고 부풍 평릉扶风平陵 사람이다. 단정하고 엄숙하여 예절을 숭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예절이 있었고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단정하고 예절바르게 하였는데, 부인이나 자식을 상대할 때도 엄숙하게 하였다. 마을 어른에게도 말을 삼가고 얼굴 표정을 장중하게 하여 삼보三辅 일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이 장담이 허위로 그렇게 한다고 하자, 장담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확실히 가식으로 그렇게 하였지만 남들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다. 내가 선을 행하는데 누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느냐?” 한나라 성제汉成帝와 애제汉哀帝시대에 장담은 봉록 2천석을 받는 관직을 담당하였고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태수太守와 도위都尉를 역임하였다. 건무建武 초년에는 좌풍익左冯翊을 맡았고 고을의 태수 시절에는 예의와 교육을 진흥시켜 정치교화가 널리 펴지게 했다. 뒤에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왔을 때 현의 문 앞에서 말에서 내려 걷자 주부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지위가 존귀하고 덕망이 높고 무거운데 가볍게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고 하였다. 장담이 “예기禮記에서는 공의 문에서 내려서 절하고 공자께서도 고을 어른들 면전에서 공경하고 화순하게 하였습니다. 고향에서는 마땅히 예절을 다하여야지 어떻게 가볍게 말을 하느냐?”고 답했다. 건무5년(29)에 광록훈光祿勛에 임명되고 광무제 유수光武帝刘秀가 재위할 때, 얼굴을 맞대고서 늘 광무제의 과실을 지적하였다. 장담은 늘 백마를 탔다. 광무제가 장담을 볼 때마다 “백마가 살아 있어야 또한 간언을 한다.”고 하였다. 건무7년(31)에 장담이 병으로 휴가를 청하였고 광록대부光禄大夫 품계를 받았고 왕단王丹을 대신하여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건무 17년(41), 광무제가 황후 곽성통郭聖通을 폐출하자 장담은 병이 심하여 조정에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자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제수 받았다. 중동문 관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중동문군中东门君이라고 불렀다. 광무제가 여러 번 그를 문병하고 상을 내렸다. 뒤에 대사도大司徒 대섭戴涉이 피살되고 광무제가 강제로 장담을 대섭을 대신하여 기용하였다. 장담이 조정에 와서 소변을 싸며 자신의 병이 심하여 조정의 정무를 담당할 수가 없다고 하자, 광무제가 그를 파면하였다. 그 뒤 몇 해가 지나서 장담은 집에서 죽었다. -후한서 권27, 선장이왕두곽오승정월열전宣张二王杜郭吴承郑赵列传第 제17 조홍시가 조홍시가 早紅柹歌 辛丑九月初。漢陰相公饋公早紅柹。公因時物有感而作。 사진12․13 노계시비 조홍시가
盤中 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다 柚子 안이라도 품엄 즉도 다마 품어가 반기리 업슬 글노 설워 이다 王祥의 鯉魚잡고 孟宗의 竹筍거 검던 멀리 희도록 老萊子의 오 입고 一生애 養志誠孝를曾子 치 리이다 萬勻을 늘려내야 길게길게 노흘 아 九萬里 長天에 가 를 자바야 北堂의 鶴髮雙親을 더듸 늘게 리이다 群鳳 모다신듸 외 가마기 드러오니 白玉 사힌곳애 돌아 갓다마 두어라 鳳凰도 飛鳥와 類시니 뫼셔 논 엇더리
附[莎堤曲陋巷詞早紅柹 歌跋] ○莎堤曲。何爲而作也。昔在辛亥春。曾祖考漢陰相公退老。與朴蘆溪仁老述懷之曲也。世代旣遠。此曲無傳。恐其泯沒於後。竊嘗慨然於心者稔矣。不肖孫允文。是歲庚午春。除永川郡守。公卽茲土人也。其曲尙今流傳。其孫亦且生存。公餘月夕。以其孫進善命歌而聽之。怳若後生叨陪杖屨於龍津山水之間。愴懷益激。感淚自零。幷與陋巷及短歌四章而付諸剞劂氏。以圖廣傳焉。時是年三月三日也。板在本郡。而今失。
*육적회귤(陸績懷橘) 육적(陸績)이 귤을 품었다는 뜻으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이르는 말. [출전]《三國志》 [내용] 이 성어는 그 유명한 삼국지의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가 조조(曹操)군에 쫓겨 강하(江夏)에 있으면서 오(吳)나라에 가서 손권(孫權)의 참모들과 논쟁을 벌일 때, 제갈량이 육적을 지적하며 말했다. 그 장면을 황석영의 삼국지에서 보자. 그때 좌중에서 또 한 사람이 묻는다. “조조가 비록 황제를 내세워 제후들을 호령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漢) 나라의 재상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예요, 유비는 비록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아무 증거도 없고, 우리가 알기로는 그저 돗자리나 짜고 짚신이나 삼던 사람이거늘, 어찌 조조에 맞서 싸울 수 있겠소이까?” 이번에는 육적(陸績)이 었다. 제갈량이 웃으며 대답한다. “공은 원술 면전에서 귤을 품에 넣던 육랑이 아닌가? 그대는 편히 앉아서 내 말을 잘 들어 보시오. 조조가 조상국의 자손이라면 한나라 신하가 분명한데, 지금 함부로 권세를 희롱하여 황제를 업신여기니, 이는 황제를 업신여길 뿐 아니라 제 할아버지마저 욕보이는 것이며, 한나라 황실의 난신(亂臣)일 뿐만 아니라 조씨의 적자(賊子)요. 그러나 유예주께서는 당당한 황제의 자손으로 지금 황제께서 족보를 살펴보고 벼슬을 내리셨거늘, 어찌하여 증거가 없다고 하시오? 또한 한고조(유방)께서는 정장(亭長= 지금의 동장)의 신분으로 마침내 몸을 일으켜 천하를 얻으셨으니, 돗자리 짜고 짚신을 삼은 게 욕될 게 뭐가 있겠소? 육공은 소견이 어린아이 같으니 족히 높은 선비와 더불어 한자리에서 논할 위인이 못 되오.”(三國演義/第43回) 여기서 나온 육적회귤(陸績懷橘)은‘정사삼국지. 오지(吳志) 육적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육적이 여섯 살 때 구강(九江)에서 원술을 만났는데, 원술이 귤을 주자 그중 3개를 품에 넣고, 작별 인사를 하며 귤을 떨어뜨린다. 이에 원술이“육랑은 손님인데 왜 귤을 품에 넣었는가?”라고 물었다. 육적은 무릎을 꿇고“돌아가 모친께 드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원술은 그 효성(孝誠)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績年六歲,於九江見袁術。術出橘,績懷三枚,去,拜辭墮地,術謂曰:"陸郎作賓客而懷橘乎?"績跪答曰:"欲歸遺母。"術大奇之。 이 고사는 원나라 때에 곽거경(郭居敬)이 저술한 24명의 효행을 적은 《이십사효(二十四孝)》에도 나온다. [출처] 육적회귤(陸績懷橘)|작성자 몽촌
* 노계집 편집자 소서(小序)에는 조홍시가를 한음 이덕형에게 홍시를 대접받고 지었다고 하지만, 실제는 여헌 장현광에게 성리학을 배우러 갔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심경호,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가서, 2011). 노계가 노주에서 숨어살며 蘆洲幽居 蘿月穿茅屋。송라와 달 띠집을 뚫고, 疏篁掃石壇。성근 솔바람 소리 석단을 쓴다. 巷深人不到。마을이 깊은 산중에 있어 사람 발길 이르지 않고, 山鳥去來閑 산새만이 한가로이 오고 간다. 重疊靑山下。첩첩 청산 아래, 臨溪卜數間。시냇가에 몇 칸 집을 지었네. 風淸經夏易。시원한 바람은 여름을 쉬이 지내고, 松碧送春難。푸른 솔은 봄을 보내기 어렵다. 최진사 기남에게 드림 贈崔上舍起南 公嘗愛蘆洲水石之勝。誅茅闢荒以居之戊午年間人有侵耕其田者。公不一辨。擧而讓之。作此詩以見志。人謂朴某心事氷淸玉潔。 공이 일찍이 노주 수석의 빼어남을 아껴서 띠풀을 베고 개척하여 거주하였는데 무오 년간에 그 밭을 침해하여 가는 사람이 있었다. 공이 한 번도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통째로 양보하고서 이 시를 지어 뜻을 보이니 사람들이 박 아무개는 마음이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다고 하였다. 不貴人所貴。남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不貪人所貪。남이 탐하는 것을 탐하지 아니한다. 江山風與月。강산의 바람과 달만이, 是我百年貪。내가 백 년 탐하노라. 蘆溪歌 사진14 도계서원 노계가비
白首에 訪水尋山 太晩줄 알전마 平生素志를 벱고야 말랴너겨 赤鼠三春(병자년 봄, 1636년, 박인로 76세 노년)에 春服을 새로 닙고 竹杖芒鞋로 蘆溪 깁흔 골 혀 마참 차오니 第一江山이 님업시 려다 古往今來예 幽人處士들이 만히도 잇것마 天慳地秘야 를 주랴 남겨 다 躕躇良久타가 夕陽이 거읜 적의 陟彼高岡야 四隅로 도라보니 玄武朱雀과 左右龍虎도 그린시 잣고야 山脈 친 아 藏風向陽 靑蘿 허혀드러 數椽蝸室을 背山臨流야 五柳邊에 디어두고 斷岸千尺이 가던 龍이 머무 江頭에 둘렷거늘 草草亭 두 間을 구름 긴 솔 아 바휘디켜 여러니 千態萬狀이 아마도 奇異코야 峯巒은 秀麗야 富春山이 되야 잇고 流水 盤回야 七里灘이 되야거든 十里明沙 三月 눈이 되엿다 이 湖山形勝은 견졸 뇌야 업 巢許도 아닌 몸애 어 節義 알리마 偶然 時來예 이 名區 임되여 靑山流水와 明月淸風도 말 업시 절로절로 어즈러온 鷗鷺와 數업 麋鹿도 갑업시 절로절로 沮溺가던 묵은 밧과 嚴子陵의 釣臺도 갑업시 절로절로 山中百物이 다 절로 己物되니 子陵이 둘이오 沮溺이 서히로다 어즈버 이 몸이 아마도 怪異코야 入山當年에 隱君子 되얏가 千古芳名을 이 몸애 傳토고야 人間의 이 일홈이 人力으로 일윌소냐 山川이 靈異야도 아가 너기로라 中心이 瑩然야 世慮 절로 그처디니 光風霽月이 腔子裏예 품엇 浩然眞趣 날로 새롭노왜라 飛禽走獸 六畜이 되얏거 달 알 괴기 낙고 구 속의 밧흘 가라 먹고 못나마도 그칠 적은 업노왜라 無盡 江山과 許多 閑田은 分給子孫려이와 明月淸風은 논듀기어려올 才與不才예 養志 아아 太白淵明證筆에 永永別給 렷로라 내의 이 말이 迂闊 것마 爲子孫計 다만인가 너기로라 어린 이 몸은 仁者도 아니오 智者도 아니로 山水에 癖이 이러 늘글록 더욱 니 져 貴 三公과 이 江山을 밧골소냐 어리미친이 말을 우으리도 하렷마 아므리 우어도 나 됴히 너기노라 믈며 明時예 린 몸이 올 닐이 아조 업서 世間名利란 구 본덧고 無思無慮야 物外心만 품고 이셔 이 生涯을 山水間의 부텨두고 春日이 채 긴제 낙를 비기쥐고 葛巾布衣로 釣臺예 건너오니 山雨 잠 개고 大陽이 오 근 바람 더 오니 鏡面이 더옥 발다 김흔 돌이 다보이니 괴기 數를 알리로다 괴기도 나치 이거놀 줄 모거든 차마 엇디 낙글넌고 罷釣徘徊며 波心을 구어 보니 雲影天光은 얼희여 겨 魚躍于淵을 구 우 보아고야 하 문득 驚怪야 俯察仰觀니 上下 天이 宛然다 一陣東風에 긔엇진 漁笛이 놉히 부러 보던고 江天이 寥寂 반가와도 들리다 臨風倚杖야 左右로 도라 보니 臺中淸景이 아마도 蕭灑코야 물도 하갓고 하도 물갓니 碧水長天은 빗티 되얏거든 물가애 白 오 가 긋칠 줄을 모다 巖畔山花 錦繡屛이 되야 잇고 澗邊垂楊은 草綠帳이 되야거든 良辰佳景을 내 혼자 거리고 正値花時를 虛度치 밀냐너겨 아희 불너 하 말이 深山窮谷애 海錯이야 보로소냐 살진 고사리 香氣 當歸草를 猪脯鹿脯相間야 크나큰 細柳笥애 洽足히 다마 두고 鮒魚膾 初味예 訥魚生雉 서거 구어 빗빗치 드리거든 瓦樽에 白酒를 박잔의 가득 부어 잔 잔 醉토록 먹은 後에 桃花 紅雨되야 醉面에 리 苔磯 너븐 돌애 놉히 베고 누어시니 無懷氏적 사인가 葛天氏 百姓인가 羲皇盛時를 다시 본가 너기로라이 힘이 뉘 힘고 聖恩이 아니신가 江湖애 물너신들 憂君一念이야 어 刻애 이고 時時로 머리 드러 北辰을 라보고 모 눈물을 天一方 의디이다 一生애 품은 을 비옵다 하님아 山平海渴토록 우리 聖主萬歲소셔 煕皥世界예 三代日月 빗취소셔 於千萬年에 兵革을 쉬우소셔 耕田鑿井에 擊壤歌를 불리소셔 이 몸은 이 江山風月에 늘글 주를 모로라
선사공자행교상(행단소영도 杏壇小影圖), 당 오도자 그림, 석각 탁본, 2014년 1월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중국 중원 답사여행 중 취푸 대성전에서 봉안해옴 덕모천지 덕은 천지와 나란하고 도관고금 도는 고금에 으뜸이시네 산술육경 육경을 정리하시어 수헌만세 만세에 법도를 드리우셨네 ⑨주공을 만난 꿈
사진11 행단소영도(행단소영도), 당 오도자, 석각 탁본
무하옹(無何翁)이 독서를 좋아하고 천고의 성현 말씀을 숭상하고 벗하였다. 일찍이 <<논어>> 한 책을 등잔불을 켜고 읽다가, 공자님이 ‘요새는 주공을 꿈에서 뵙지 못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책을 덮고서 탄식하며, ‘내가 공자님의 하나로 꿰어지는 가르침, ‘인’을 비록 얻어 들을 수는 없지만, 공자님이 꿈에서 주공(周公)을 만난 일은, 살펴보면 내가 성심으로 꿈에 주공을 뵙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한 끝에, 칠언 율시 한 수를 적었다.
生平景仰周元聖 평생을 주공을 우러렀는데, 只願承顏一夢間 단지 한 꿈속에라도 뵙기를 바란다. 默誦潛思應有感 가만히 읊조리고 생각에 잠기니 응당 감응이 있을지니, 雖非眞境幸相看 비록 현실이 아니라도 요행히 만나 뵐 수 있으면.
이윽고 창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었는데, 잠시간에 한 곳에 이르렀다. 궁전이 장엄하고 깊숙한데 어떤 사람이 곤룡포를 입고서 숙연하고 단정히 앉아 있는데 곧 주공께서 사시는 곳인 줄을 알았다. 무하옹이 문지기에게 주공을 알현하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는데, 주공이 마침 창고의 수입과 지출을 점검하다가 시자로 하여금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무하옹이 옷자락을 여미고 계단을 올라 들어갔다. 뜰아래에서 절을 하고, 성과 이름, 사는 곳을 갖추어 말씀드렸다. 주공께서 반갑게 맞이하며 무하옹에게 물어 가로되,
“동국은 평소에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는데, 은나라의 태사 기자(箕子)의 유풍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는가?”
라고 하시었다. 그리고서 천지인 3재와 인의예지신 5상의 도를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덕한 자로서 하늘의 신령스러움에 기대어 왕조와 제후의 왕업을 도와 이루어서 나라가 8백 년 동안 왕업을 누렸다. 또 더불어서 한둘의 신료를 도와서 예법을 만들고 음악을 지어서 한 시대의 전장(典章)으로 삼았다. 또한 <<주역>> 삼백팔십사 효사에 해석을 달아 정결하고 고요하고 정미로운 이치를 거칠지만 드러내었다. 또한 대아, 소아를 지어 조회와 연향의 악곡으로 정하였는데, 어찌 문왕과 무왕이 창안하여 이은 공이 아님이 없겠는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릇되게도 내가 만세의 태평을 열기 위하여 하였다고 하니 나는 정말로 부끄럽구나.”
라고 하셨다. 또 물어보시기를,
“중니가 주역 십익을 짓고 천지의 깊은 이치를 드러내어 밝혔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성인이다. 꿈에 늘 나를 찾아왔건만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한다. 어찌 된 것이냐?”
라고 하셨다. 무하옹이 일어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중니씨는 주 영왕 21년 경술년에 태어나 경왕 41년 임술년에 삶을 마쳤습니다. 대개 일찍이 듣기로 중니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 주공을 다시 뵙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주공께서 또 그런 일을 말씀하시니 비로소 성인의 마음이 융합하고 정신이 만나서 서로 감응하는 바가 깊이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주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천 년 동안 나를 아는 자가 오직 중니뿐이었다. 중니는 매번 도를 행할 마음이 있어서 꿈에서 서로 만난 지가 오래 되었다.”
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셨다.
“그대가 나를 방문하니 또한 부지런하구나. 내가 무엇을 선물할까?”
라고 하시더니, 붓을 찾아 들고서 ‘성(誠), 경(敬), 충(忠), 효(孝)’ 네 큰 글자를 쓰서 주면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도를 구하려면 성, 경, 충, 효, 여기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무하옹이 글을 받들고 두 번 절을 하고 사례하며 말하기를,
“평생을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원하여도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가르침의 요체를 들었으니, 소자에게는 진실로 깊이 감사하고 다행입니다. 제가 심히 불민하지만 성, 경, 충, 효 이 말씀을 청컨대 섬기겠습니다.”
고 하였다. 주공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주역은 곧 성명(性命)의 뿌리로 복희씨가 선천(先天)의 오묘한 이치를 열어 보인 것이며, 문왕께서는 후천의 요지를 지으셨는데, 천지를 범위로 하며 일만 가지 이치를 갖추었으니, 그것을 배우는 자는 길흉소장(吉凶消長)의 이치와 진퇴존망(進退存亡)의 도에 밝을 것이므로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 지금 그대가 대개 머물 때는 천지의 모습을 살피고 효사를 음미하고, 움직일 때는 변화를 관찰하고 점괘의 의미를 되씹어 보면서 몸에 체득하여야 할 것이라!”
라고 하셨다. 무하옹이 말씀드리기를,
“이미 성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감히 분부를 따를 수가 없겠습니다. 다만, <<주역>>을 읽고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니의 성스러움으로도 오히려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하는데, 하물며 이 어리석고 벌레 같은 제가 어찌 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뒷날을 기다려 다시 와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두 번 절을 하고서 물러나며 홀연히 잠을 깼는데, 한 꿈이었다. (김희준 옮김)
夢見周公記 翁好讀書。尙友千古。嘗取論語一部。秉燭而讀。至夫子吾不復夢見周公。忽廢書而歎曰。吾夫子一貫之旨。雖不可得聞。若其夢周公之夢。則顧不在誠心願見耶。遂題一律曰。生平景仰周元聖。只願承顏一夢間。默誦潛思應有感。雖非眞境幸相看。而已。倚牕假眠。俄到一處。宮殿嚴邃。衮衣繡裳。儼然端坐。乃知其周公所居也。翁叩閽請謁。周公方倉吐哺。令侍者出迎。翁摳衣涉級而入。拜於庭下。具道姓名居地。公欣然問之曰。東國素稱禮義之邦。殷太師遺風餘韻。至今尙存乎。因論說三才五常之道亹亹不已。又曰。予以不德。賴天之靈。輔成王朝諸侯。享國 八百餘歲。又與一二僚佐制禮作樂。以爲一代典章。又繫周易三百八十四爻辭。粗發潔靜精微之理。又作大小雅。以定朝會宴饗之樂。何莫非文武創繼之功。而世人謬以我爲爲萬世開太平。予實愧焉。又問曰。仲尼撰周易十翼。闡發天地之蘊奧。眞天縱之聖也。夢寐常來尋我。今不復見。何也。 翁起對曰。仲尼氏生於周靈王二十一年庚戌。至敬王四十一年壬戌而卒矣。蓋嘗聞仲尼曰。吾不復夢見周公。今公亦言之。始知聖人心融神會。有所相感者深矣。公曰。千載之下。知我者惟仲尼也。仲尼每有行道之心。夢寐相見。良有以也。又曰。子之訪我亦勤矣。吾何以爲贈。遂索筆書誠敬忠孝四大字以授之曰。子欲求道。盍於此留意焉。翁奉書再拜而謝曰。生平願承聖訓而不可得。今聞旨訣。在小子實深感幸。雖甚不敏。請事斯語矣。公又曰。周易。乃性命之根抵。伏羲開先天之妙。文考述後天之旨。範圍天地。萬理具載。學之者明乎吉凶消長之理進退存亡之道。故可以無大過。今子盍若居則觀象翫辭。動則觀變翫占。以體之於身乎。翁曰。旣承盛敎。敢不從命。但讀易工程。雖以仲尼之聖。尙亦韋編三絶。矧此愚蠢。豈可易言哉。請待後日更來受業。遂再拜而退。蘧然而覺。乃一夢也。 -<<蘆溪先生文集>> 권1 부산 수영구 민락동(경상좌수영터) 노계 박인로 가사비 박인로가 38세(1598) 경상좌병사 성윤문의 막료로 철수하는 왜군을 경계하기 위하여 10일 동안 이곳 경상좌수영에서 머물다 본영(경상좌병영)으로 돌아와 성윤문의 명으로 가사 태평사를 지었다. 1599년 39세에 무과 합격 뒤 조라포(거제도 구조라포) 만호로 와서 선정을 베풀어 군종들이 선정비를 세워주었다. 45세에 경상좌수사(통주사)로 와서 선상탄을 지었다. 태평사 太平詞 戊戌季冬。釜山屯賊。乘夜奔潰。時公佐左兵使成允文幕。兵使聞卽率軍馳到釜山。留十餘日後還到本營。明日。使之作此歌
사진15 노계가사비 부산 민락동
나라히 偏小야 海東애 려셔도 箕子遺風이 古今업시 淳厚야 二百年來예 禮義을 崇尙니 衣冠文物이 漢唐宋이 되야니 島夷百萬이 一朝애 衝突야 億兆驚魂이 칼빗조차 나니 平原에 사힌 뫼두곤 노파잇고 雄都巨邑은 豺狐窟이 되얏거 凄涼玉輦이 蜀中으로 뵈와드니 煙塵이 아득야 日色이 열워니 聖天子神武샤 一怒를 크게내야 平壤群兇을 一劍下의 다 버히고 風驅南下야 海口에 더져두고 窮寇을 勿迫야 몃몃 를 디내연고 江左一帶예 孤雲갓 우리 물이 偶然時來예 武侯龍을 幸혀 만나 五德이 근아래 獵狗 몸이되야가 英雄仁勇을 喉舌에 섯겨시니 炎方이 稍安고 士馬精強야니 皇朝一夕에 大風이 다시 이니 龍 將帥와 구름 勇士들이 旌旗蔽空야 萬里예 이어시니 兵聲이 大振야 山岳을 엿 兵房御營大將은 先鋒을 引導야 賊陣에 突擊니 疾風大雨에 霹靂이 즈 淸正小豎頭도 掌中에 잇것마 天雨爲祟야 士卒이 疲困커 져근 解圍야 士氣을 쉬우더가 賊徒ㅣ 犇潰니 못다잡아 말년졔고 窟穴을 구어보니 구든 덧도 다마 有敗灰燼니 不在險을 알니로다 上帝聖德과 吾王沛澤이 遠近업시 미쳐시니 天誅猾賊야 仁義를 돕다 海不揚波이졘가 너기로라 無狀 우리 물도 臣子되야 이셔더가 君恩을 못 갑흘가 敢死心을 가져이셔 七載를 奔走터가 太平 오 보완디고 投兵息戈고 細柳營 도라들제 太平簫 노픈 솔의예 鼓角이 섯겨시니 水宮 깁흔 곳의 魚龍이 다 우 龍旗偃蹇야 西風에 빗겨시니 五色祥雲 一片이 半空애 러딘 太平模樣이 더옥나 반가올사 揚弓擧矢고 凱歌를 아뤼오니 爭唱歡聲이 碧空애 얼다 三尺霜刃을 興氣계워 둘러메고 仰面長嘯야 춤을 추려 이러셔니 天寶龍光이 斗牛間의 소이다 手之舞之足之蹈之 절노절노 즐거오니 歌七德舞七德을 그칠줄 모로다 人間樂事ㅣ 이니 인가 華山이 어오 이 말을 보내고져 天山이 어오 이 활을 노피 거쟈 이제야 올 일이 忠孝一事 이로다 營中에 일이 업셔 긴 드러누어시니 뭇노라 이 날이 어적고 羲皇盛時를 다시 본가 너기로랴 天無淫雨니 白日이 더욱 다 白日이 그니 萬方애 비최노다 處處溝壑애 흐터잇던 老羸드리 東風新燕가치 舊巢을 자오니 首邱初心에 뉘 아니 반겨리 爰居爰處에 즐거옴이 엇더뇨 孑遺生靈들아 聖恩인줄 아다 聖恩이 기픈 아 五倫을 발켜라 敎訓生聚ㅣ라 졀로 아니닐어가랴 天運循環을 아옵게다 하님아 佑我邦國샤 萬世無疆 눌리소셔 唐虞天地예 三代日月 비최소셔 於萬斯年에 兵革을 그치소셔 耕田鑿井에 擊壤歌을 불니소셔 우리도 聖主을 뫼고 同樂太平 오리라
⑫-3선상탄 船上歎 時。國家尙憂南陲。選公統舟師。赴防釜山。公臨船作此曲。 늘고 病든 몸을 舟師로 보실 乙巳 三夏애 鎭東營 려오니 關防 重地예 病이 깁다 안자실랴 一長劍비기고 兵船에 구테올나 勵氣瞋目야 對馬島을 구어보니 람조친 黃雲은 遠近에 사혀잇고 아득 滄波 긴 하과 빗칠쇠 船上에 徘徊며 古今을 思憶고 어리미친 懷抱애 軒轅氏를 애노라 大洋이 茫茫야 天地예 둘려시니 진실로 아니면 風波萬里 밧긔 어 四夷 엿볼넌고 무 일 려야 못기를 비롯고 萬世千秋에 업 큰 弊되야 普天之下애 萬民怨 길우다 어즈버 라니 秦始皇의 타시로다 비록 잇다나 倭를 아니 삼기던들 日本 對馬島로 뷘 졀로 나올넌가 뉘 말을 미더듯고 童男童女를 그도록 드려다가 海中 모든 셤에 難當賊을 기쳐 두고 痛憤 羞辱이 華夏애 다 밋나다 長生不死藥을 얼나 어더여 萬里長城 놉히사고 몃 萬年을 사도고 로 죽어가니 有益줄 모로다 어즈버 각니 徐巿 等이 已甚다 人臣이 되야셔 亡命도 것가 神仙을 못보거든 수이나 도라오면 舟師이 시럼은 견혀 업게 삼길럿다 두어라 旣往不咎라 일너 무엇로소니 쇽졀업 是非를 후리쳐 더뎌두쟈 潛思覺寤니 내 도 固執고야 黃帝 作舟車 왼줄도 모로다 張翰江東애 秋風을 만나신들 扁舟 곳 아니타면 天淸海闊다 어 興이 졀로 나며 三公도 아니밧골 第一江山애 浮萍 漁父生涯을 一葉舟 아니면 어 부쳐힐고 일언닐 보건 삼긴 制度야 至妙덧다마 엇디 우리 물은 板屋船을 晝夜의 빗기 고 臨風咏月호 興이 젼혀 업게오 昔日 舟中에 杯盤이 狼籍터니 今日 舟中에 大劍長鎗이로다 가지 언마 가진 다라니 其間 憂樂이 서로 지 못도다 時時로 멀이드러 北辰울 라보며 傷時老淚 天一方의 디이다 吾東方文物이 漢唐宋애 디랴마 國運이 不幸야 海醜兇謀애 萬古羞을 안고이셔 百分애 가지도 못시셔려거든 이 몸이 無狀 臣子ㅣ 되야이셔다가 窮達이 길이 달라 몬뫼고 늘거신 憂國丹心이야 어 刻애 이즐넌고 慷慨계운 壯氣 老當益壯다마 됴고마 이 몸이 病中에 드러시니 雪憤伸冤이 어려올 건마 그러나 死諸葛도 生仲達을 멀리 좃고 발업 孫臏도 龐涓을 잡아거든 믈며 이 몸은 手足이 자잇고 命脈이 이어시니 鼠竊狗偸을 저그나 저흘소냐 飛船에 려드러 先鋒을 거치면 九十月霜風에 落葉가치 헤치리라 七縱七禽을 우린 못것가 蠢彼島夷들아 수이 乞降야라 降者不殺이니 너를 구 殲滅랴 吾王聖德이 欲幷生시니라 太平天下애 堯舜君民되야이셔 日月光華 朝復朝얏거든 戰船던 우리 몸도 漁舟에 唱晩고 秋月春風에 놉히 베고 누어이셔 聖代 海不揚波 다시 보려노라
노계가사문학관 조감도 현재 공정율 약 50% 2016년 11월 준공 예정 박재열 경북대학교 명예교수가 영상을 통해 노계의 작품에서부터 노계가사문학관 건립에 이르는 현황을 설명했다. 박진규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작년 3월 350명 전국의 회원으로 창립총회를 가지고 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아 등기까지 마쳤다고 했다. 고문 자문위원 이사진과 분과위원을 밝히고 정관도 제시했다. 학술세미나 사회는 박재열 교수가 맡고 주제 발표는 노계연구 경력이 60년에 이르는 김창규 전 대구교육대학 교수가 맡고 토론은 노계연구 40년으로 영천신문 창간부터 9년간 노계 자료를 발표했던 조진호 전 산동중고교 교장이 맡았다.
주제 발표자인 김창규 교수의 노계 시문학논고, 노계시문학 원전 자료집성, 노계시평석, 노계시 재조명, 노계 시문학논고, 노계시의 대비 등 여러 저서와 논문을 소개했다. 입암(영천군전도 1872) 입암과 입암정사 수어연 제자 선산부사 학사 김응조가 화공을 보내어 그리게 한 여헌 장현광 영정 ⑩무하옹전 無何翁傳 翁不知何許人。窮居落魄。不知老之將至。傍人譏其闊於世情。謂之無何翁。 무하옹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궁하게 살고 혼이 나갔으며 늙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주변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헐뜯으며 ‘쓸데없는 늙은이(무하옹)’라고 하였다. 翁聞智異山下有稱烏叟者博學多聞。往訪之。 무하옹이 지리산 아래에 오수라고 하는 박학다식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그를 방문하였다. 叟曰。九仞山中一靈藥。萬古猶香。世人旣不識此山。又安知有此藥也。採藥之道。凡有八條焉。苟不以其道採之。其可得乎。彼四皓。隱者也。但能採芝商山。而未得採藥之道。必須誠意正心。然後始可採之。故禹湯文武孔孟相繼採之。其後累百世。採者蓋寥寥矣。 오수가 가로되, 구인산 속에 한 신령스러운 약이 만고에도 오히려 향기롭지만, 세상사람이 이 산을 알아보지 못하니 또한 이런 약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인가. 약을 캐는 도는 모두 8가지가 있다. 진실로 그 도로서 그 약을 캐지 않는다면 얻을 수가 있겠는가. 옛날의 상산에 살았던 4호는 은자들이었다. 상산의 영지만을 잘 캤지만 영약을 캐는 도는 얻지 못하였다. 약을 캐는데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성의정심은 필수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영약을 캘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임금, 탕임금, 문왕, 무왕, 공자, 맹자가 그 도를 서로 이어와서 영약을 캤는데 그 뒤로 몇 백 세대가 지나서 영약을 캐는 자가 종적을 감추었다. 遂贈一律曰。 드디어 시 한수를 주어 가로되
萬壑春將暮。일만 골에 봄이 저무는데, 鳥啼花亂飛。새는 지저귀고 꽃잎은 흩날린다. 九仞山何處。구인산은 어디인가? 千峯近却非。일천 봉우리가 비슷하나 아니네.
翁再拜而進曰。大君子至論。小子何敢窺及。但入德門誠意關。願更聞之。 무하옹이 절하고 나아가 가로되, 큰 군자의 지론(至論)을 소자가 어찌 감히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입덕문, 성의관으로 들어가서 바라건대 다시 그 지론을 듣기를 바라옵니다. 叟曰。入德門通于誠意關爲一安宅。而居之者。神明主人也。宅前大路。其直如矢。有目者孰不可見。有足者孰不可踐。苟能知之明而造之深。則皆可知所止而止。得所安而安。勿謂高遠。只在脚下一步地耳。 무하옹이 입덕문을 지나고 성의관에서 한 편안한 집을 삼아서 사는 것이 신명의 주인입니다. 이 집 앞의 큰 길이 곧기가 화살 같으니 눈 있는 사람은 누군들 보지 못하고 발 있는 사람은 누군들 실천하지 못하겠습니까. 진실로 그 지론을 밝게 알고 그 실천을 깊이 한다면 모두가 그칠 바를 알아서 그치고, 안락할 바를 알아서 안락할 것이다. 높고 멀다고 하지 말라 다만 발아래 한 걸음에 있는 땅이다. 翁起謝曰。粗習弓馬。不事詩書。十載窮廬。徒切已矣之歎。何幸今夕獲承盛敎。今雖苦晩。請事斯語矣。 무하옹이 일어나며 감사하며 가로되, 활과 말을 어설프게 익히고 시서예악을 일삼지 않고서 10년을 초가에서 궁하게 살며 한갓 어쩔 수 없다는 한탄만 하였습니다. 얼마나 다행하게도 오늘 저녁에 성대한 가르침을 얻어 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괴로운 늘그막이지만 청컨대 이 말씀을 섬기렵니다. 因呈短韻曰。 그리고서 짧은 시를 지어 올렸으니,
九仞爲山是底山。아홉 발 높이의 산이니 낮지만, 含輝隱耀冠千山。광휘를 갈무리하니 일천 산들의 으뜸이네. 許多奔走尋山者。허다한 사람들 이 산을 찾아 분주하지만, 不識人間有此山。인간사회에 이 산이 있음을 알지 못하네.
叟和曰。 오수가 화답하는 시를 지으니,
人去猶存萬古山。사람은 갔으나 만고의 산은 오히려 있으니, 光風霽月滿空山。광풍제월이 빈산에 가득하다. 樂山眞趣無文武。산의 참된 맛을 즐김에 문무가 따로 없으니, 願與吾君共此山。나와 그대 어울려 이 산을 함께 하기를 바라네.
傍有一童子隅坐而吟曰。 곁에 한 동자가 구석에 앉아 있다가 읊기를,
琢玉如磨九仞山。옥을 쪼고 갈아서 구인산이 되었으니, 浮空積翠照千山。하늘에 푸른 빛 쌓여 일천 산을 비추네. 何時滌盡泥沙汚。어느 때 세상 티끌 모두 씻을까, 努力躋攀陟彼山。한 걸음씩 걸어서 저 산을 오르도록 힘쓰네.
俄而翁告歸。更吟一絶曰。 잠시 뒤에 무하옹이 돌아간다고 고하며 다시 한 절의 시를 읊으니,
柳碧離愁暗。버들은 푸르러 근심을 여의고, 花紅淚濕襟。꽃은 붉어서 소매에 눈물 적신다. 秋期難可必。가을을 반드시 기약하기 어려우니, 千里夢相尋。천리를 꿈에서나 서로 찾으세.
叟和曰。 오수가 화답하기를,
愀然無一語。근심스러워 한 마디 말이 없고, 誰與敍幽襟。누구와 더불어 흉금을 풀 것인가. 智異丹楓下。지리산 단풍 아래서, 扶筇願更尋。지팡이 짚고 다시 찾아오시기를 바라네.
童子又吟曰。 동자가 또 읊기를,
今日傷心地。오늘은 상심하는 처지이지만, 何殊老少襟。어찌 노소의 흉금이 다르겠습니까. 秋來如訪我。가을에 저를 찾아오시면, 吾亦爲公尋。저 또한 공을 찾겠습니다.
詩罷乃還。 시회가 파하고서 돌아왔다. (김희준 옮김)
박인로(朴仁老)의 무하옹 구인산기(無何翁九仞山記) 뒤에 쓰다. 산은 참으로 높고 높다. 층층의 봉우리로 아홉 길[仞]이나 되는 산들이 깎아지른 듯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데, 높고 견고하고 정(精)하고 엄함은 마치 배우는 자들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것과 유사함이 있다. 용이 서린 듯,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듯한 것은 의연(依然)한 군자의 근엄함이며, 후중하여 변동하지 않음은 인자(仁者)의 기상(氣像)과 방불하며, 그윽하고 깊고 기이하고 빼어남은 신명(神明)이 붙잡아 주는 듯하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견고하니 선비의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먼 것과 유사하고, 바라봄에 등급이 있고 절도가 있으니 또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워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것과 같다. 옛글에 이르기를 “아홉 길 되는 산을 만드는 데에 공이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였으니, 어찌 오직 산만이 그러할 뿐이겠는가. 사람이 도(道)를 행함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도는 참으로 너르고 너르다.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오고 사람에게 붙여 있어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탁연(卓然)히 중립한다. 그리하여 비(費)와 은(隱)을 포괄하고 소(小)와 대(大)를 겸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가운데 숨어 있고 일상 생활하는 동정(動靜)의 즈음에 드러나 인도(人道)의 표준이 되고 온갖 교화의 관건이 된다. 도를 보존하는 것은 누구인가? 삼재(三才)에 참여하여 우뚝이 서고 한 대(臺)를 세워 높이 건축하니, 그 대는 바로 영대(靈臺: 마음)이고 그 주인은 바로 성성옹(惺惺翁:알아차림)이다. 영대 아래에는 누각이 있으니 이른바 성의관(誠意關)인데, 성성옹이 영대에 즉위하여 이 성의관에서 호령을 하는 바, 이것을 천군(天君)이라 한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여 온갖 몸이 명령을 따라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가 반드시 이 관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왕왕 해마(害馬)에게 유혹당하여 이리저리 치달리고 제멋대로 날아가서 그칠 바를 알지 못하면, 이 영대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이 관문이 황폐해져서 진흙과 모래가 뒤섞인 가운데 버려두고 찾을 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옛날 성인(聖人)과 신인(神人)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교훈을 남겨 가르쳤으니, 사람으로서 이 도를 구하고 이 도를 밝히려는 자가 만약 격물(格物)ㆍ치지(致知)에 마음을 두고 성의(誠意)ㆍ공경(恭敬)에 대한 공부를 하여 아홉 길을 표준으로 삼아 나아가고 나아가 그치지 않으며,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여 한 치를 얻으면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한 자를 지켜 참됨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하면 좌우에서 근원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래로 인간의 도리를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효험과 위를 통하고 아래를 통하는 공부가 이에 극진할 것이니, 어찌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하겠는가. 공자(孔子)는 말씀하기를 “열 가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우리 이웃에 무하옹(無何翁)으로 성(姓)이 박씨(朴氏)이고 이름이 인로(仁老)라는 분이 있으니, 그는 참으로 인의(仁義)의 사람이다. 항상 부자(夫子)의 말씀을 외며 자신을 책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이제 비록 늙고 또 병들었으나 어찌 그날그날 세월을 보내어 초목과 함께 썩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 새로운 각오로 대인(大人)의 도에 뜻을 두고는 구인산(九仞山)을 찾아 들어가 산의 아름다움을 두루 구경한 다음 분발하여 밥 먹는 것도 잊고 공부하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모르니, 내가 보기에는 마땅히 우리 동방(東方)의 호걸스러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무하옹은 일찍이 활쏘기와 말 타는 재주로 변방 고을에서 병부(兵符)를 차고 병졸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하였는데(조라포 만호), 의롭지 않으면 취하지 아니하여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었다. 이 때문에 행정을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하였고 병사와 백성들이 사랑하며 떠받들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나 체직(遞職)되어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의 행장(行裝)은 오직 몸을 지키는 장검(長劍) 한 자루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송덕비(頌德碑:조라포만호)가 세워지니,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우러러 사모한다. 무하옹은 지려(志慮)가 높고 원대하며 판국(辦局 사무를 처리하는 도량)이 크고 깊으며 언행(言行)을 삼가고 독실히 하여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으니, 비단 시골과 이웃에서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의 대인 선생(大人先生:한강 정구, 복재 정담, 한음 이덕형, 지산 조호익)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 나는 병든 가운데 일찍이 노인이 ‘무하옹전(無何翁傳)’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는 적이 나아가 보아 나의 근심을 잊고자 하였으나 고질병이 깊어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루는 노인이 고맙게도 찾아와서 한동안 함께 회포를 나누었다. 내가 무하옹전을 보여줄 것을 청하자, 노인이 원고를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문기(文氣)가 호방하면서도 일을 서술함이 자세하고 치밀하였다. 문장이 기이하고 준걸스러워 보통보다 만만번 뛰어났는데, 그 가운데에 구인산과 성의관 및 문답한 내용이 더욱 도리에 가까우니, 이 무하옹전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아, 나처럼 불초한데다 질병까지 겸한 자는 비록 노인의 전(傳)에 대하여 감히 이러쿵저러쿵 의논할 수 없으나, 덕을 좋아하는 병이(秉彛)의 마음은 꺼져 없어질 수 없으므로 이것을 자리 오른쪽에 놓아두고 하루에 세 번씩 펴보니(좌우명),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하여 병든 회포에 매우 시원하였다. 또 이 산은 오직 인인(仁人)과 군자(君子)만이 찾을 수 있으니, 나와 같이 용렬하고 누추한 자가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다행히 노인의 이 전에서 산의 한두 가지의 대략을 거의 얻어 볼 수 있었다. 이에 용렬하고 누추함을 잊고 애오라지 뒤에 발문(跋文)을 쓰는 바이다.
박공의 무하옹전에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옹(翁)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며, 사람들이 세상의 실정에 너무 어둡다고 기롱하여 무하옹(無何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옹이 지리산(智異山) 아래에 오수(烏叟)라는 도인(道人)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가니, 오수가 말하기를 ‘구인산 가운데 한 영약(靈藥)이 있어 만고에도 오히려 향기로운데, 사람들이 이미 이 산을 모르니 또 어찌 이 영약이 있음을 알겠는가. 약을 캐는 방도는 반드시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 뒤에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왕(禹王)ㆍ탕왕(湯王)과 문왕(文王)ㆍ무왕(武王)과 공자(孔子)ㆍ맹자(孟子)가 서로 뒤이어 캤었는데, 그 뒤에는 이 약을 캐는 자가 아무도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 율시(律詩)를 주기를 ‘온 골짝에 봄이 장차 저무는데, 새 울고 꽃이 어지럽게 나는구나. 구인산은 어느 곳인가, 천 개의 봉우리 가까우면서도 아니네.[萬壑春將暮 鳥啼花亂飛 九仞山何處 千峯近卻非]’라고 하였다. 옹이 나아가 말하기를 ‘군자의 지극한 의논을 소인이 어찌 감히 엿볼 수 있겠습니까. 입덕문(入德門)과 성의관(誠意關)을 다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오수는 말하기를 ‘입덕문은 성의관과 통하여 하나의 편안한 집이 되는바, 이 집에 사는 자는 신명(神明)한 주인이다. 집 앞에 큰 길이 화살처럼 곧으니, 눈이 있는 자가 어찌 보지 못하며 발이 있는 자가 어찌 밟지 못하겠는가. 만약 알기를 분명히 하고 나아가기를 깊이 한다면 모두 그칠 곳을 알아 그치고 편안한 곳을 얻어 편안할 것이다. 높고 멀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만 걸어 한 보 되는 땅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옹은 사례하기를 ‘저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대강 익혔을 뿐, 시(詩)ㆍ서(書)를 배우지 아니하여 10년 동안 오두막집에서 한갓 어쩔 수 없다는 한탄을 했었는데, 다행히 오늘밤 훌륭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록 늦었으나 이 말씀에 종사하겠습니다.’ 하였다.”
[주D-001]그 대는 바로……성성옹(惺惺翁)이다 : 영대(靈臺)는 ‘신령스러운 대’란 뜻으로 마음을 가리키며, 성성옹 역시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 깨끗한 마음은 어둡지 않고 항상 깨어 있다 하여 의인화(擬人化)한 것이다. [주D-002]영대 아래에는……천군(天君)이라 한다 : 성의관(誠意關)은 뜻을 성실히 하는 공부를 관문에 비유한 것으로, 주자(朱子)는 《대학(大學)》을 설명하면서 성의의 관문이 가장 통과하기 어렵다 하고, 이 관문을 통과하면 다시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여 선(善)ㆍ악(惡)이 판별되는 관문이라 하였다. 천군 역시 마음이 올바르면 사람의 몸을 자유롭게 검속(檢束)할 수 있다 하여 마음을 높여 부른 명칭이다. [주D-003]해마(害馬) : 말을 해치는 짐승 따위를 이르는데, 후대에는 사람의 본성을 해롭게 하는 물욕을 가리키게 되었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또한 어찌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르겠는가. 말을 기르는 자는 말을 해치는 것[害馬]을 제거할 뿐이다.” 하였다. 書朴仁老 無何翁九仞山記後 巍巍乎山也。層巒九仞。壁立有序。而高堅精厲。有若切磋而琢磨。龍盤虎踞。依然君子之儼若。厚重不遷。髣彿仁者之氣象。幽邃奇挺。有若神明扶持焉。仰之而彌堅。有似任重而道遠。瞻之而有等有節。亦如下學而上達。傳曰。爲山九仞。功虧一簣。何獨山也。人之於道亦然。浩浩乎道也。道之大原。出於天而寓於人。不偏不倚。卓然中立。包費隱兼小大。隱於無聲無臭之中。而見於日用動靜之際。爲人道之標的。爲萬化之機軸。存道者誰。參三才而特立。建一臺而高構。其臺則靈臺也。其主則惺惺翁也。臺之下有閣。所謂誠意關也。惺惺翁卽位於靈臺。號令於是關。是爲天君。好善惡惡。百體從令。修己治人之道。必自是關而始焉。然而往往爲害馬所誘。馳騖飛揚。不知所止。則茅塞乎此臺。蓁蕪乎是關。置於泥沙混蕩之中。而不知求焉者多矣。故古之聖神。於此懼焉。垂訓而敎詔之。人之求此道而明此道者。苟能潛心於格致。做工於誠敬。以九仞爲準的。進進不已。日新又新。得寸守寸。得尺守尺。眞積力久。左右逢源。則下學上達之效。徹上徹下之功。於斯盡矣。何患不至聖賢地位也。孔子曰。十室之邑。必有忠信。吾隣有稱無何翁姓朴名仁老。其爲人也。仁義人也。常誦夫子之言而責於己曰。朝楣。夕死可矣。今雖老且病矣。豈可悠悠度日。與草木同枯。一朝奮然有志於大人之道。尋入九仞山。遍觀斯山之美。發憤忘食。不知老之將至。自我觀之。宜其爲東方之人豪也。曾以弓馬之才。佩銅符於邊陲。與士卒同甘苦。非義不取。秋毫無犯。政聲藹然。軍民愛戴。閱二載遞任而歸。歸去行裝。惟有防身一長劍。而頌德豎碑。聞者景仰。翁智慮高遠。辦局宏深。言行謹篤。見信於人。非但鄕隣愛之。亦見重於當世。大人先生。余病裏。曾聞翁作無何翁傳。竊欲造觀。以忘吾憂。深痼斯疾。願莫之遂。一日。翁惠然來斯。晤懷移時。余請觀其傳。翁出藁示之。則詞氣奔放。而敍事詳密。奇偉俊特。出尋常萬萬。而其中九仞山誠意關及問答之語。尤爲親切。玆傳也夫豈偶然哉。噫。如吾無似。加以病發。雖於翁之傳。不敢擬議。然秉彝好德之心。不能熄滅。置於座右。日三披閱。如癢得搔。甚快病懷。且於斯山也。惟仁人君子可以尋。則如吾庸陋。何鎰見。幸於翁之傳。山之一二大槪。庶可得見。忘其庸陋。聊以跋後。 朴公無何翁傳略云。翁不知何許人。人譏其闊於世情。謂之無何翁。翁聞智異山下有烏叟。往訪之。叟曰。九仞山中一靈藥。萬古猶香。人旣不識此山。又安知有此藥。採藥之道。必須誠意正心。然後可採。故禹湯文武孔孟相繼採之。其後採者寥寥矣。遂贈一律曰。萬壑春將暮。鳥啼花亂飛。九仞山何處。千峯近卻非。翁進曰。君子至論。小子何敢窺入德門。誠意關。願更問之。叟曰。入德門通于誠意關。爲一安宅而居之者。神明主人也。宅前大路。其直如矢。有目孰不可見。有足孰不可踐。苟能知之明造之深。皆可知所止而止。得所安而安。勿謂高遠。只在脚下一步地耳。翁謝曰。粗習弓馬。不事詩書。十載窮廬。徒切己矣之歎。何幸今夕獲承盛敎。今雖苦晚。請事斯語矣。 -장현광, 여헌선생속집(旅軒先生續集) 제4권 노계 박인로 시비 입암가 立巖歌 二十二章 時旅軒張先生寓居本郡北立巖。公嘗從遊。代旅軒作此歌。
사진16 영천군전도 입암 사진17 입암 사진18 여헌 장현광 영정 사진19 노계 박인로 시비
立巖 無情히 서 바회 有情야 보이다 最靈 吾人도 直立不倚 어렵거 萬古애 곳게선 저 얼구리 고칠 적이 업다 江頭에 屹立니 仰之예 더옥 놉다 風霜애 不變니 鑽之예 더옥 긋다 사람도 이 바회 면 大丈夫가 노라 卓然直立니 法바담즉 다마 구깁흔 峽中에 알리잇사 자오랴 努力躋攀면 奇觀이야만 니라
(立巖)精舍 草屋 두세 間을 巖穴에 부쳐두고 松竹 두 빗치 病目애 익어시니 이 中에 春去秋來를 아므젠줄 모로다
起予巖 夫子의 起予者 商也라 드러더니 오 起予者 말 업 바회로다 어리고 鄙塞던 미편암이절로 새롭다
戒懼臺 戒懼臺 올라오니 믄득 졀로 戰兢다 臺上애 살펴보며 이 치 저홉거든 못보고 못듯 히야 아니 삼가 엇지리
吐月峯 峯頭에 소슨 이 이 山中의 비취노다 九萬里長天이 멀고도 놉건마 高山이 揷天니 돌우흐로 나덧다
九仞峯 巍巍 九仞峯이 衆山 中에 秀異코야 下學工程이 이 山하기 갓건마 엇디라 이제 爲山은 功虧一簣 게오
小魯岑 南魯岑 이 일홈을 뉘라서 지은게오 夫子登臨도 이 東山 아니런가 萬古靑山이 只麽히 놉하시니 아모 줄 모로다
避世臺 名利예 지 업서 오 막집고 訪水尋山야 避世臺예 드러오니 어즈버 武陵桃源도 여긔런가 로라
合流臺 合流臺 린 물이 보기예 有術다 彼此업시 흘러가고 左右에 逢源니 分時異合處 同을 이臺下애 아라고야
尋眞洞 尋眞洞 린 물이 巖下애 구븨 지어 不舍晝夜야 亭子 압 드러오니 어즈버 洛水伊川을 다시 본 여라
採藥洞 솔알 아들아 네 얼운 어가뇨 藥러 가시니 마 도라오렷마 山中에 구룸이 겁후니 간 곳 몰라 노라
浴鶴潭 浴鶴潭 근 물에 鶴을 조차 沐浴고 訪花隨柳야 興을 고 도라오니 아무려 風乎舞雩詠而歸들 블을 일이 이시랴
數魚淵 淵泉이 하 말그니 가 고기 다 보닌다 一二三四를 낫낫치 혜리로다 童子야 새 물에 고기를다시 헤여 보아라
響玉橋 磯頭에 누엇다가 라니 이 다 靑藜杖 빗기 집고 玉橋를 건너오니 玉橋애 근 소를 자 새만 아놋다
釣月灘 낙대를 빗기 쥐고 釣月灘 라려 불근 역귀 헤혀고 알 안시니 아모려 桐江興味 불을 주리 이시랴
耕雲野 沮溺의 가던 밧치 千年을 묵어거 구을 허혀드러 두세 이렁 가라두고 生涯를 足다사가마 부거 업노왜라
停雲嶺 停雲嶺 라보니 天中에 두렷괴야 陟彼崔嵬면 五雲蓬萊 보련마 病目애 눈물이 얼니 바보기 아득다
産芝嶺 産芝嶺 올나오니 一身이 香氣롭다 四皓商山도 이 芝嶺 아니런가 山路애 구룸이 깁흐니 아모 줄 모로다
隔塵嶺 隔塵嶺 하 놉흐니 紅塵이 머러간다 득이 먹은 귀싯 슬록 먹어가니 山밧긔 是是非非를 듯도 보도 못로다
畫裏臺 江上山 린 긋 솔 아 너분 돌해 翠嵐丹霞ㅣ 疊疊이 둘러시니 어즈버 雲母屛風을 그린 여라 [편-001]미 : 마 -蘆溪先生文集 권3 노계 필적 ⑮영천 도계서원·포항 입암서원 사진20 도계서원 사진21 노계 필적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노계를 제향하는 도계서원 앞 들녘을 가로질러 흐르는 도천개울(노계)을 건너노라면 절로 ‘노계가’가 흥얼거려진다. 백발이 되도록 친구를 따라온 산천을 유람하고 노닐다가 만년에야 돌아온 노계가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가사가 노계가다. 영천에서 남쪽 방향으로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높지 않은 산지군들, 주사산과 사룡산 그리고 구룡산이 경주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산성 같은 형국을 이룬다. 해발 729m의 주사산에는 사적 제25호로 지정된 부산성이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사룡산과 구룡산이 연접된다. 주사산이 경주 땅이라면 사룡산과 구룡산은 영천을 감싸 안는다. 샘 깊은 구룡산 무지터에서 발원한 물길은 산곡을 타고 흘러 흘러 상동에서 명주로, 다시 갈대숲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노계(蘆溪)를 (필자의 오류이다. 노계는 산내면 대현리에 있다-편집자)돌아 마침내 북안 땅을 흠뻑 적셔내는 북안천이 된다. 노계는 품이 넓은 사룡산 자락의 도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구룡산의 물길이 이어내리는 노계를 젖줄로 삼았고 주사산정을 바라보면서 시심을 성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 조홍시가로 맺은 한음 이덕형과 우정 32세의 노계 박인노는 고향 친구 복재 정담과 함께 임란의병에 가담하고 영천성 탈환전투를 치른다. 승전 용사가 된 노계는 스스로 무인이 되고자 지금은 나라가 어지러운 때이니 먼저 나라를 구하리라 하고 굳게 결심한다. 전란이 수그러드는가 했지만 다시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노계는 강좌절도사 성윤문을 따라 수군(성윤문이 경상좌병마사이고, 노계는 그의 보좌 군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므로 수군이 아니다.)에 종군하면서 절도사의 지도력을 칭송하고 전쟁 피로를 달래주는 ‘태평사’를 짓는다. 칼과 더불어 붓을 지니고 다녔던 노계는 전장의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선조 32년인 1599년에 지루하던 전쟁이 끝나면서 노계는 무과를 거쳐 수문장, 선전관 그리고 거제도의 조라포 만호로 나아간다. 무인으로 출발하여 조그마한 변방을 감당하는 하급관리가 된 것이다. 그즈음 노계가 잠깐 고향을 다녀가는 길에 때마침 한음 이덕형이 노계의 고향 북안을 찾게 된다. 1601년, 4도도체찰사로서 경상도 지역의 전쟁피해를 살피고 민심을 달래던 한음이 영천시 북안면 도유동, 구룡산 서북 자락에 있는 자신의 시조묘역을 참배하러 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노계는 당시 사회의 출중한 지도자요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임란 뒤를 수습하는 한음을 만나 통성명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동갑인데다 시(詩)로써 우정을 다져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반중 조홍 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 안이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기리 업슬새 글노 설워하나이다(노계집 권3)
문밖에는 늦은 봄 햇살에 나부끼는 연둣빛 감잎들이 더없이 아름답다. 음식상을 앞에 놓고 한음과 마주 앉은 노계는 마침 상 위에 오른 홍시를 보자 시적 감흥을 물리칠 수가 없어 조홍시가를 읊조린 것이다. 한음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누구 못지않게 효자이던 그는 일순의 감동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서로의 시심을 알아본 두 사람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백 년 지기의 우정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덕형의 시조는 당(唐)이다. 고려말(1368년·공민왕 17년) 신돈의 비행을 비판한 아들 둔촌을 따라 영천으로 피신하여 살다 생을 마쳤다. 그가 묻힌 묘소는 남쪽으로 멀리 병풍을 두른 듯한 사룡산을 바라 불 수 있고, 여명과 일몰이 빛으로 출렁거리는 도유지를 품고 있다. 청 푸른 도래솔로 둘러싸인 널찍한 묘소 바로 위에는 둔촌의 친구 천곡(최원도)의 어머니 묘가 자리한다. 지역사람들은 그곳(廣州李氏始祖墓)을 두고 광릉이라 부른다. 둔촌과 천곡의 우정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읽혀질 만큼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1611년(광해군 3년), 한음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사제(莎堤;한강 상류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맞닿는 용진강 일원)에서 쉬고 있을 때 노계도 뒤따라가 사제곡(莎堤曲)과 누항사(陋巷詞)를 부르면서 외로움과 회한을 달래곤 했다.
늘고 병이 드러 해골을 빌리실새 한수동 따흐로 방수심산하야 용진강 디내올나 사제 안 드라드니 제일강산이 임자 업시 버려느나 펑생 몽상이 오라하야 그러턴지 수광산색이 녯 낫츨 다시 본 듯 무정한 산수도 유정하야 보이나다. (사제곡 2절)
◆ 여헌과 함께 부른 입암이십구곡 학덕이 높고 고향 친구인 복재 정담은 누구보다도 노계를 가까이 이해하였다. 정담은 노계에게 성주 출신의 한강 정구를 만나게 해준다. 영남의 거유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고루 아우른 정구는 당대의 석학이었다. 1619년(광해 12년), 59세에 든 노계는 한강을 만나 울산 초정과 동래에서 온천욕을 즐기면서 그해 여름과 가을을 유감없이 즐긴다.
신농씨 모른 약을 이 초정의 숨겨던가 추양이 쬐오는데 물 속의 잠겨시니 증점의 욕기기상을 오늘 다시 본덧하다(욕우울산초정가,노계집 권3)
노계의 지적 호기심과 탐미적인 유랑성은 나이와 무관하였다. 동래에서 돌아온 노계는 고향에 오래 머물 겨를도 없이 지필묵을 챙기고 말 먹이를 살핀다. 입암(立巖)으로 나설 요량이다. 영천시 동북의 영천댐에서 청송 방면으로 10㎞ 거리에 있는 구암산과 민봉산 등 가파른 산지군들로 둘러싸인 입암(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은 해발 500m의 지역에 위치해 있다. 물이 좋고 바위와 계곡이 아름다운 그곳에는 여헌 장현광이 임진왜란을 피하려 왔다가 산수에 매료되어 눌러 산다는 풍문을 들어온 터였다. 한강이나 복재로부터 자주 여헌의 인물됨과 학덕을 들어왔던 노계는 여헌과의 만남을 그리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 노계는 여름날의 긴 하루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몰려들 무렵 입암에 도착하였다. 이미 일흔여섯의 나이, 온몸에 밀려오는 피로감을 물리칠 수 없었다. 선잠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만활당(萬活堂 : 입암서원(立巖書院) 부속건물)의 여헌을 만났다. 한음을 만나던 청년 시절이나 한강과 유람하고 다니던 중년과는 달랐다. 또한 예닐곱 살 웃도는 여헌이지만 그리 편한 인물이 아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걸림 없는 노계는 상대를 또한 자유롭게 이끌어내는 재간이 있었던 것일까. 노계는 아무런 작위를 하지 않고 마치 마음을 비우듯이 내려놓는다. 무하옹(無何翁)이라 불리는 그의 호(號)가 말해주듯이 어떻게 하지 않음에서 함(作爲)을 얻어낸다고 할까. 마침내 노계는 여헌과 함께 입암의 아름다운 산수를 찬미하는 스물아홉 수의 시조(立巖二十九曲)을 짓는다.
무정히 서는 바회 유정하야 보이나다 최령한 오인도 직립불의 어렵거늘 만고에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 적이 업나다. (입암, 노계집 권3)
자그마한 맞배집인 만활당과 개울가의 선바위(立巖)에 기댄 일제당 마루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맑은 훈기가 감돌았다. 여헌을 중심으로 동봉 권극립 등 몇몇 지우들이 절차탁마하면서 학문을 정진하고 다른 한편 생업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특히 동봉은 여헌이 자유롭게 강학해 나갈 수 있도록 숙식을 비롯한 경제적인 여건을 마련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계도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창작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앞에 있는 노목의 은행나무와 동봉선생기념비, 그리고 노계선생시비가 400여 년 전, 마치 무릉도원과 같은 입암곡에서 의기투합하여 생활하던 사나이들의 훈훈한 우정을 엿보게 해 준다.
◆ 귀향, 노계가(蘆溪歌)를 부르다
“하얗게 센 백발을 날리면서 자연산수를 찾는 일이 너무 늦은 줄 알지마는 일생 품은 뜻을 풀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병자년 봄날에 새 옷과 대지팡이와 짚신을 갈아 신고 마침내 노계마을(蘆溪谷)을 찾아드니 다행스럽게도 제일 아름다운 강산이 주인도 없는 채 버려져 있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사람과 벼슬을 거절한 사람들이 많고 많건만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두었다가 나에게 내주려고 남겼는가 보다. ”(노계가 1절)
82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노계는 좋은 사우(師友)를 찾아다니면서 시담을 즐겼다. 사람과 일상을 시와 가사로 빚어 담았고 발길 닿는 곳의 자연을 찬미하였다. 생각의 걸림이 없는 그는 대자유인이었다.
머물러 있지 않은 바람과 같았다. 그의 전반생이 무인이었다면 후반생은 독서와 유람과 창작에 몰두한 문인 가객이었다. 노계는 가사 9편과 시조 68수를 남긴다. 이 작품을 수록한 ‘노계집’은 3권2책으로 이루어지며 판목수량은 99장이다. 1974년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이 판목은 1904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도계서원(도계 祠) 은 노계가 돌아가신 60여년이 지난 후, 1707년(숙종 33)에 지방의 선비들이 노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웠다. 대랑산(大朗山)에 있는 노계묘소 건너편 언덕에 소박한 건축물을 상양하고 춘추제향을 올리고 있다. 서원 경내에는 심재완, 서원섭 등의 노계의 시가연구자들이 세운 시비가 두 개나 있다. 세월이 더할수록 그의 가사문학과 시문학이 빛을 더해 나간다. 무소유의 질박한 그의 삶에서 오히려 향기가 배어나고 따스한 훈기가 전해진다. 그런데도 노계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싸해진다. 그가 남긴 감동과 서정 어린 문학작품에 비하여 서원이나 종택 혹은 그를 평가하는 가시적인 것과 체감되는 것들이 너무 미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2012.12.05 대구일보 김정식 징사 복재 정선생 기적비, 도봉서원터 정담[鄭湛, 1552-1634] 본관은 영일. 자는 청윤(淸允), 호는 복재(復齋)이며, 1552년(명종 7) 2월 24일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나 1634년(인조 12)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려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며,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를 지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고조는 좌랑(佐郞) 정치소(鄭致韶), 증조는 생원(生員) 정이상(鄭以常)이며, 조부는 훈도(訓導) 정굉(鄭硡)이다. 아버지는 감찰(監察) 정인개(鄭仁槩)이며,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훈도(訓導) 이희(李熙)의 딸이다. 부인은 영양 최씨(永陽崔氏)로 생원(生員) 최기남(崔起南)의 딸이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니 아들은 정사도(鄭師道)와 정회도(鄭恢道)이며, 사위는 최여곤(崔汝崑)과 주부(主簿) 손종하(孫宗賀), 찰방(察訪) 성이직(成以直)이다. 정담은 어려서부터 용모와 인품이 뛰어났으며,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에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효우역학(孝友力學)으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진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솔선수범으로 창의(倡義)하여 영천성 회복에 큰 공훈을 세웠는데, 「영천복성기(永川復城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공훈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승훈랑 내사직(承訓郞內司直)과 후에 의금부 도사(義禁莩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전후 수습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01년(선조 34)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영천향교 대성전(大成殿)을 중건하고, 이듬해 임고서원(臨皐書院) 이건에도 힘썼다. 1614년(광해군 6)에는 ‘영천향서당입규(永川鄕序堂立規)[영천향사당입규(永川鄕射堂立規)]’를 제정하여 전후 사회 질서 확립에 헌신하였으며,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이 타계하자 지봉서원(芝峯書院)[도잠서원(道岑書院)]을 세웠다. 석판본인 2권 1책의 『복재실기(復齋實記)』가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원당곡(元堂谷)에 묘좌(卯坐) 향으로 있으며, 완산(完山) 이후(李垕)의 갈문(碣文)이 있다. 후대에 사림들이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세워 제향되었으나 훼철되고 현재 유허비만 남아 있다. 『국역 복재선생실기(復齋先生實記)』(2011)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담 [鄭湛]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복재실기』정구(鄭逑)를 사사하여 학문을 탐구하고 또 지산(芝山, 曺好益)에게도 배웠다. 1585년(선조 18)에 식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일생을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조정에 천거되어 주부의 제수가 내렸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진에 나아가서 권응수(權應銖)와 족형인 세아(世雅) 등과 더불어 군성을 복성하여 그 공로로 승훈랑에 올라서 내사직의 직첩과 의금부도사의 제수가 내렸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②영천성 수복기 사진23 영천군전도(1872) 영천읍성
이 기록은 서기1592년 7월에 있었던 영천성 수복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참여한 사람과 그 후손들에 의하여 다수의 실기란 이름으로 책이 만들어졌지만, 놀랍게도 각 문중마다 기록의 차이가 지나치리 만큼 현격하다. 이에 지난해 화산군 권응수의 실기에 실린 영천성 수복 기록문에 이어 이번에는 직접 그 기록을 작성한 복재 정담과 창대 정대임의 실기에서 발췌한 영천성 수복 기록문이다.
***** 임진년 4월에 왜적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첨사 정발과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에서 세 길로 갈라서 진격했다. 첫 길은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을 경유하여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패하고 조령을 넘어 충주를 지나 서울로 향했으며, 둘째 길은 김해를 경유해서 성주 무계현으로 가서 강을 건너 지례, 금산을 지나 충청도 영동을 나와 청주를 함락하고 서울로 향하고, 셋째 길은 좌도 장기, 기장을 경유하여 좌병영 울산, 경주, 영천, 신녕, 의흥, 군위, 비안을 함락하고 용궁 하풍진을 건너 문경을 나와 둘째 길의 군사와 합세하여 조령을 넘어 충주에 들어가서 서울로 향하였다. 적의 깃발과 칼, 창이 천리에 서로 이어지고 대포 소리가 혹은 십리 혹은 육십리 거리에 서로 들리고 위험한 지대마다 진영을 설치하고 수비하여 밤이면 횃불로서 연락했다. 영좌 일로의 적들은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영천에 수만 병력을 주둔시키고 사방을 노략질 했으며, 영남일대의 백성들이 피해가 가장 심했다. 이때 영천 유학 정대임이 충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제종제 정대인과 먼저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키니 향중 의사 조희익, 조성, 신준, 정천리, 정석남, 최인제, 김대해, 김연, 이득용, 이번, 이영근 등 60여인이 호응하므로 나도 역시 적개심이 분발하여 즉시 족제 대임의 진중에 가서 서로 더불어 의병 수백 명을 모집했다. 5월초 대동에서 적을 격파하고 정천리를 시켜 병사 박진에게 보고했다. 진은 크게 칭찬하고 감탄하며, 즉시 복병장에 임명했다. 휘하 선비 신준용은 대로하여 말하기를 “군관의 소임이 어찌 서생인 정대임에게 합당한가?” 이로부터 의병대장이다. 또 “어찌 복병장의 칭호를 쓰리요.”하니 대임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토적하는데 남에게 굴종하는 것이 어찌 욕이 되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정천리, 이번 등을 시켜 피난민을 수색하여 나라가 위급할 때에 적을 토벌하는데 목숨 바칠 것을 권유하니 감격하여 눈물을 닦고 인심을 움직여 10여 일 동안에 900명이 모였다. 병사 박진이 의병수가 많은 것을 시기하고 억제하기에 의병들이 마음대로 못하고 지사들이 모두 실망했다. 이에 정대임, 정담은 족형 정세아, 조희익, 곽회근 등과 더불어 초유진영에 상황을 상서하고 “초유사의 령을 받들겠습니다.”하니 초유사 김성일은 크게 칭찬하고 제의장에게 명하기를 “각각 자기 군사를 통솔하여 그 절제를 엄숙히 하라.”고 하였다.
6월에 대임은 정천리로 하여금 성황산에 잠복시키고 이번은 봉천원에 잠복케 하여 왜적의 동정을 몰래 정탐하도록 하였다. 조금 후 정천리가 뛰어와 말하기를 “적이 많이 온다.”고 하였다. 즉시 이번과 조덕기 등에 명하여 군의 북쪽 길목에 잠복하여 대기토록 하였는데 운무가 가득차서 잘 보지 못하였다.
7월초에 왜적300여명이 신령길목에 나타나 날이 저물자 적들은 북습과 와촌 등지에서 방화하고 노략질을 했다. 정대임은 돌아올 길을 예측하고 당지산에 잠복해서 기다렸더니 이날 저녁 과연 적이 이르렀다. 아군은 적 20명을 사살하고 40명을 참수했다. 또 질림원에 왕래지 적을 철거하자 마침 어사라고 호칭한 왜적이 군위에서 말을 달려 신녕을 지나갔다.
7월 14일 박연에 진격하였다. 당시 신령의병장 권응수, 의흥복병장 홍천뢰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역시 왔다. 마침내 권응수와 합세하여 적을 대파했다. 적 40여명의 목을 베고 창검과 우마의 부속품을 탈취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나머지 적들은 도주함에 일부는 의흥 방면으로 다른 일부는 하양방면으로 도망쳤다. 권응수와 홍천뢰 등은 의흥 방면으로 추격하여 소계까지 가서 격멸했고, 정대임과 정담 등은 하양방면으로 추격하여 와촌까지 가서 격멸했다. 이로 인하여 아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고 전세는 크게 꺾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떨치게 되어 적을 치려는 사람이 매우 많아졌다. 적도들은 감히 마음대로 나와서 노략질을 하지 못했다. 정대임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해서 말하기를 “적이 연속적으로 패전하여 겁을 먹고 첩보활동을 하지 못하고 또 뒤에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회에 영천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급히 공격하여 다 없애고 성을 회복하자.”고 하고 ‘어느날 공격할 뜻’을 직속부하를 여러 군에 보내어 통고하고, 여러 의병 진영에 원군을 보내줄 것을 청원했다.
23일 군남 추평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화공 준비로 군졸들을 시켜 땔나무를 모아 서문과 북문에 쌓았다. 목책으로 길 다란 사다리를 엮어 성을 넘어 들어가는 도구를 준비하고 용감하고 강건한 사람을 뽑아 서쪽 산봉오리에 올라 적군의 다소를 살피게 하였다. 적병이 성밖에서 진을 벌려놓고 말을 달리며 혹은 곳곳에서 개미와 벌떼처럼 무리지은 것이 많아서 그 수를 알 수가 없었다. 이때에 권응수와 신녕 현감 한척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홍천뢰 역시 군사를 인솔하여 와서 모이게 되었다.
24일에는 하양의병장 신해와 하양현감 조윤신, 자인의병장 최문병, 경산의병장 최대기, 경주판관 박의장 등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게 되니 총 군사가 3,560여명이었다. 이때에 의성 감사졸(결사대) 500명이 왔다. 이를 세부대로 나누어 문무용사 수백명이 권응수를 별장으로, 신해를 좌총으로, 최문병을 우총으로, 정대임을 중총으로, 군수 김윤국을 별장으로, 진사 정세아, 정담을 찬획종사로 추대하여 각부서의 책임자로 삼았다. 기에 창의정용군이라고 쓰고 진 가운데 세우니 진세가 엄숙하였다. 따라서 기와 북을 준비하여 정대임이 제장사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나와서 인사하게 하고 이어서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전쟁의 와중에 임금님의 행차가 멀리 서쪽 변방에 계셔서 정령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군중의 율령이 엄밀 정숙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적을 토벌하는 날 비록 혹 명령을 어기고 절도를 잃은 자가 있어도 일이 시작되는 초창기여서 짐짓 그 허물을 용서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을 점령한 적병의 수가 매우 많고 뿌리가 이미 깊으니, 우리의 외로운 군대로써 만약 전례를 답습한다면 큰일을 성취하지 못할까 걱정된다. 오직 우리 장수들과 군사들은 다 같이 약속하고 맹세하자.”하고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① 황급난언자(어지러운 말을 내는 자)를 참하고 ② 적을 보고 5보 후퇴하는 자를 베고 ③ 자기마음대로 행동하고 장수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를 베고 ④ 전쟁에 임하여 대오를 잃은 자를 벤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응하여 군중에서 장군의 명령을 듣고 “감히 어김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모든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병사는 정예함에 힘쓸 것이지 수가 많기에 힘쓸 것이 아니다. 우리 무리가 비록 적으나 적과 싸워 죽을 마음이 있고 적의 병사가 비록 많으나 뜻이 매우 교만하니 나는 적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패배할 것을 안다. 다만 적들이 점거한 성지가 뒤에는 큰 언덕을 등지고 앞에는 강과 들에 임하고 있으므로 예전대로 굳게 수비하지 말고 유격전을 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여러 날 동안 적정의 태만함을 보고 바람 따라 화공을 펼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5일 군의 앞들에 진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자 적군 수백 명이 말을 목욕시키다가 아군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중의 적들은 성첩에 올라가서 진앞에 세운 아군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활과 화살을 쥐게하여 진전군인들 사이에 벌려 세웠다. 권응수, 홍천뢰는 기사 500명을 거느리고 적이 망보는 곳에 돌진하게 하고 또 정천리를 시켜 높은 봉오리에 올라 적의 원병이 오는 것을 망보게 하고 또 장사 400여명을 뽑아서 천변 숲속에 잠복시켜 급수하러 오는 적을 추격했다. 적은 이로써 식수를 얻을 수 없어서 마른식량을 먹고 여러 날 동안 곤란을 당했다.
26일 천변까지 진군하여 성에서 수 백보쯤의 거리에서 말을 달리고 병기를 번쩍이니, 적이 북을 울리고 뿔피리를 불었다. 왜장 두 사람이 금관을 쓰고 흑단 옷을 입고서 명원루 위에 나와 부채를 부치며 앉아 포로로 잡힌 여인들이 좌우로 벌려서 모였다. 조금 후 적병 천여 명이 성 머리에 늘어서서 일제히 총을 발사하니 우레와 나는 번개와 같았고 성안에 많은 적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니 소리가 산하를 울렸다. 또 우리나라 말로써 크게 공갈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여러 날 동안 해산도 하지 않고 전투도 하지 않느냐? 서울도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무너졌다. 너희들 어린 약간의 군사로서 감히 우리를 당할 수 있겠는가? 항복하여 너희들 신명을 보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장수의 목을 베어 우리 깃발 아래에 가지고 오너라.”고 하였다. 홍천뢰는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도전하려고 하니, 정대임이 말하기를 “병법에는 경솔이 발동함을 금기하니 삼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다. 곧 군대에 명하여 진을 한 줄로 정돈하고 전혀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북을 울리고 피리를 불어 한가로운 기상을 보이자 적이 바라보고 더욱더 태만해졌다. 이에 권응수가 말을 달려 흑단 옷을 입은 왜장을 사살하니 성상에 있던 적들은 곧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오후 5시경에 적의 무리가 아군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니 날아오는 실탄이 빗발 같았다. 아군이 총 맞고 죽은 자가 3명이었다. 날이 저문 후에 적들이 횃불을 들고 왕래하며 서로 모의하는 형상이었다. 한 명의 중이 줄을 타고 내려왔는데, 그는 곧 불국사의 중으로써 포로로 잡힌 자였다. 정담이 그를 데려다가 적의 정세를 물어보니 곧 말하기를 “적이 내일 곧 힘을 합하여 아군을 공격하고자 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왔습니다.”고 했다. 대임이 듣고 이날 밤 2경에 군사들에게 명하여 성을 넘어 긴사다리를 동서 문밖에 비치하도록 하였다. 또 명령하기를 “북을 3번 울리고 호각을 3번 불면 모두 장사들은 신호에 따라 성중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또 정천리에 명하여 감사병 500명을 인솔하여 마현산에 잠복하였다가 내일은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시키고, 드디어 권응수와 약속하여 말하기를 “적이 너의 문에 침범하면 내가 너의 목을 베고 적이 내문에 침범하면 네가 나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권응수, 신해, 홍천뢰, 박의장, 한척, 조윤신등은 군사를 인솔하여 서북 문을 포위하고 정대임, 정담, 정세아, 김윤국, 최문병, 최대기, 조희익, 신준용, 이번, 조덕기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남문을 포위하였다.
27일 날이 밝자 북을 울리면서 성 밑에 다다라 남문을 먼저 공격하니 적병이 헤쳐저서 성상에서 총을 쏘면서 소리쳤다. 아군이 사다리를 갖고 방패를 지고 성을 넘을 형상을 보이니, 왜장 수명이 은 투구와 금 가면을 쓰고 비단 은포를 입고서 성문루상에 앉아 부채를 부치면서 군중에 독려하여 문을 열고 다 출병하여 역습하도록 하니, 대개 우리병사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단번에 짓밟고자 함이었다. 우리 장사 수백 명이 달려 나가 적의 중견을 치니 칼에 다친 적의 부상자가 또한 많았다. 조금 후에 왜적의 기마병 수천 명이 또 성안으로부터 일제히 총을 쏘니 아군은 적이 두려워서 나아가지 못했다. 대임이 분발해서 생명을 돌보지 않고 제 장수에게 독촉하고 친히 스스로 칼을 휘두르며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들어가 좌충우돌하니 칼 빛이 번개와 같았고 적병의 사상자가 추풍낙엽과 같았다. 적병들을 크게 문란하여 대오를 잃고 갈 곳을 몰라 서로 밟혀 죽은 시체가 삼대 같았다.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진격하니 감히 그 예봉을 당할 자가 없었다. 적병이 패하여 성중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그 군사가 패한 것을 보고 스스로 성 아래로 몸을 던졌다. 대임이 달려가서 목을 베니 곧 적의 명장 법화였다. 모든 장수 사졸이 더욱 용기가 나서 남문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성중으로 돌진하니 적진은 더욱 크게 문란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권응수는 홍천뢰, 신해 등과 함께 서북 문을 지키던 군사 500명을 나누어 각자로 하여금 창검을 가지고 성 밖을 지키다가 성을 넘어오는 적을 베도록 하고 제군을 독촉하여 성을 넘어가도록 하니 아직 적세가 막강하여 성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이롭지 않았다. 권응전 역시 경솔하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간청하였다. 응수가 대노하여 전열에 있으면서 나아가지 않는 자 몇 사람을 끌어내어 곧 베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돌리니, 사람마다 위엄을 두려워하여 용기를 내어서 다투어 들어가 서북 문을 공파했다. 먼저 성첩을 지키던 파수병 10여명의 목을 베었다. 적 기마병 천여 명이 성중에서 역시 나와 일제히 조총을 쏘았다. 아군은 조금 물러났다. 권응수가 몸을 떨쳐 크게 소리를 지르며 친히 기를 흔들고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하면서 종횡으로 활을 발사하니 백발백중 사살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또 용사를 시켜 적의 시체를 취하여 배를 갈라서 창자를 내고 혹은 목을 베어 얼굴을 쪼개어 적중에 모두 던지니 적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크게 혼란하여 겁을 먹고 나오지 못하고 성안으로 되돌아갔고 아군은 승승 진격했다. 이때에 정대임이 명령하여 북을 울리고 남북이 상응하여 공격 준비를 하도록 하고 또 명하기를 “3차 북을 울리고 각을 불면 동서 제장들은 좌우로 공격하라.”고 하니 수천 장졸이 일시에 성문을 파괴하고 들어가며, 사다리로 성을 넘고 들어가서 일시에 사방에서 북을 울리고 소리 높이 떠들면서 들어가니 천지가 진동하고 나는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 아군의 병사들의 위세가 더욱 용맹하여 그 형세가 달리는 고래, 성난 호랑이와 같았다. 승승장구하여 들어가니 잠복했던 적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적과 골목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서북풍이 크게 불어왔다. 정천리는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마현산으로부터 재와 모래가 날려, 진중과 성중이 혼미하고 화약이 바람에 날려 적이 능히 총을 쏠 수가 없어 총대로 치고 박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아군이 돌격하여 이미 300여명의 적을 베니 적이 대패하여 총기를 버리고 달아나 관사나 관헌 창고에 숨었다. 이때에 정천리가 큰 소리로 호령하여 “포로들아, 빨리 나오너라! 우리가 곧 화공을 행하려 한다.”고 했다. 이에 포로로 잡힌 남녀가 앞을 다투어 나오니 이미 적의 위세가 꺾인 때라 막을 수가 없었다. 정천리와 결사대 500사졸은 사다리로 성을 넘고 바람을 따라 성 밖에 쌓은 나무에 불을 지르니 화염은 맹렬하고 바람은 거세어 성 밖에 쌓은 나무에 붙은 불이 또 성안으로 옮겨 붙어 순식간에 불꽃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적도들은 마음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난 숲의 새와 같이 허둥지둥 거렸다. 동남 문으로 앞 다투어 나오다가 밟혀죽고, 나오는 자는 대임과 정담이 군사를 거느리고 문밖에 지키다가 나오는 대로 600여명을 처참하니 흘러 피가 시내를 이루었다. 나머지 적들은 도주하지 못하고 명원루에 올라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서북의 적들은 성을 넘어 달아나려고 했으나 응수와 신해가 서로 앞 다투어 격살하니 적들은 곤궁하고 어려워서 갈 곳을 몰라 서로 짓 밟혀 죽은 자와 불에 타죽은 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고 아군 사상자도 역시 많았다. 남은 적 수십 명이 깊은 물속에 뛰어 들었고, 아군은 반드시 죽은 줄 알고 두었는데 조금 뒤에 물속에서 헤엄쳐 나와 건너편 언덕에 올라 도주했다. 권응평이 칼을 빼들고 추격하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살아남은 적 수십 명이 경주로 도망치니 마침내 대첩했다. 화염은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고 피비린내가 수 십리에 풍겼으며, 불에 탄 해골이 곳곳에 종횡으로 뒹굴며 구덩이에 가득 찼다.
28일 아침에 군사들에게 승리의 잔치를 베풀고 악기를 울렸다. 검열하니 아군의 전사자가 80여명, 부상자가 230여명, 전리품은 말 200여필, 총통, 창, 검 합계 900여 자루, 보안 채단이 또한 많았다. 또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우리에게 돌아온 사람을 헤아려 보니 남녀 모두 1,090여명이었는데 성명과 거주지를 묻고서 배고픈 자에 밥을 먹이고, 부상한 사람에게는 약을 주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갈 때 모두 늘어서서 절하며 사례하기를 “오늘 이렇게 죽은 목숨을 살려준 골육의 은혜가 있을 줄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를 낳은 분의 부모요, 우리를 살려준 분은 장군이시니, 장군의 은혜가 호천망극입니다.”고 하였다. 이날 각 진에서 벤 왼쪽 귀 수량과 전투에서 획득한 여러 가지 물건을 기록한 도록을 본군 군수 김윤국에게 훌륭함을 구경시켰더니, 윤국이 의병진에서 획득한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밤사이에 좌병사 박진에게 보고했다. 이때 박진은 군졸을 거느리고 안동에서 머물면서 관망하다가 영천대첩의 보고를 이미 받고 자기 공으로 하고자 자기가 지휘한 것처럼 영천대첩의 공을 조정에 보고했다. 병사 박진은 이로 인하여 사기를 얻어서 말을 달려 영천에 이르러 진처에 토적방략을 돌아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비록 옛날의 명장인 한나라 한신, 팽월과 촉나라 제갈공명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하고 감탄해 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8월 초 박진이 권응수를 돌격장으로 삼아 직접 인솔하여 경주에 주둔한 적을 토벌하고 정대임과 나는 용감하고 날쌘 기마병 천여 명을 선발하여 비안과 용궁에 주둔한 적을 다 격멸했다.
15일 회군하여 하양 자인의 남은 적을 격파하고 진군하여 경주에 도착했다. 병사 박진은 도내 병사를 거느리고 과감하게 공격 못하고 미루어오다가 안강에 머물면서 공격할 기회를 관망하고 있다가 마침 우리와 합세하였다.
8월21일 경주성을 포위하고 서문을 격파하니 적군은 동남 문으로 도망쳤다. 아군은 북을 울리며 성중에 들어갔고, 조금 후 오시 경에 적병이 크게 동문에 이르니 성중은 진동하고 아군은 공포에 떨었다. 박진 군이 먼저 붕괴되어 서문으로 앞 다투어 탈출했다. 정대임이 참전용사들에게 말하기를 “동남문으로 달아나라! 서북은 방비하고 있다. 이것이 살아날 수 있는 옛날 주아부의 전술이다. 지금 군중의 정세가 무너져 비록 능히 막지 못할지라도 만약 서문으로 탈출하면 반드시 패망 한다.”고 하였다. 즉시 나와 더불어 정예병 수백 명을 인솔하여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동문으로 탈출하여 분황사 소로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적병이 서천 숲속에 잠복했다가 아군을 포위했다. 박진의 병력이 먼저 무너져 패배함에 영천 의사 최인제, 정석남, 김대해, 김연, 정의번, 이일장, 손현 등 수십 인이 다 순절했다. 박진은 권응수, 박의장 등을 시켜 군졸을 점검하고 안강에 돌아왔다. 이날 정대임과 정담은 박의장과 더불어 궁사를 연합하여 밤에 성 밑에 잠복했다가 진천뢰를 발사하여 성중 적진에 떨어뜨리니 적이 무엇인지 몰라 주워 모아 보다가 조금 뒤에 폭발하니 천지가 진동했다. 파편을 맞아 넘어져 죽은 자가 30여명, 파편을 맞지 않은 자는 역시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조금 뒤에 일어나 놀라서 검을 먹고 이것이 다 신력이라고 하였다. 이날 밤 적은 모든 군중을 데리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주하였다. 박진은 경주성에 나아가 남은 곡식 만석을 획득하고 마침내 복성했다. 이후부터 좌도 각 읍이 차차 수복되고 좌도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 영천복성의 공로라고 믿어진다. 영천 복성의 날 김윤국과 박진은 다 자기들의 공로라고 속이고 조정에 보고하여 관군만 상직을 받았고 의병의 공로를 몰라서 의병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것이 다 후세에 징비할 일이다. [출처] 영천성 수복에 관한 기록(永川復城記)-복재 정담 창대 정대임편|작성자 영천선비
永川復城記 壬辰四月 倭寇陷東萊 僉使鄭撥府使宋象賢(僉使鄭撥)死之 賊自東萊分三路以進 一路由梁山密陽淸道大丘仁同至尙州 敗李鎰軍 一路由金海從星州茂溪縣渡江歷知禮金山出忠淸道永同進 陷淸州向京畿 一路由左道長鬐機張 陷左兵營蔚山慶州永川新寧義興軍威比安 渡龍宮河豊津 出聞慶與中路兵合踰鳥嶺 入忠州向京城 旌旗劍戟千里相連 砲聲相聞 所過或十里或五十里皆據險設營柵 留兵以守 夜則擧火相應 嶺左一路之賊 永川以爲要路屯據數萬 兵四出抄掠嶺下一境之民 莫不被其毒 於是永川儒學鄭大任忠憤慷慨不已 與再從弟大仁首先倡起義兵 鄕中義士曺希益曺珹辛俊龍鄭千里鄭碩男崔仁濟金大海金演李得龍李蕃李榮根等六十餘人響應 吾亦奮然有敵愾之意 卽赴族弟大任義陣 遂相與檄召義旅 又得精兵數百人 五月初破賊于大洞 使鄭千里馳報于左兵使朴晉 大加稱歎 卽付伏兵將帖麾下士辛俊龍怒曰 軍官之任豈合於書生鄭大任 自是義兵大將又安用伏兵將之號耶 大任曰 爲國討賊屈人何辱 遂使李蕃鄭千里等搜索逃亂之民 諭以捐生滅賊之義 感激雪涕 聳動人心 旬月之間衆至九百餘人 時兵使朴晉意忌義兵頗多沮 抑之諸義兵皆不得任 行其志士皆失望 鄭大任鄭湛與族兄世雅曺希益郭懷瑾等上書于招諭營極陣 其狀願奉節制招諭使金誠一稱賞不已 遂令諸義將各統其衆 嚴其節制 六月大任使鄭千里伏城隍山上李蕃伏蓬川院密探倭人形止俄 而鄭千里奔入曰 賊大至卽令李蕃曺德騏等郡北面要路處設伏以待之 是日雲霧漲塞看望不得 七月初日倭人三百餘名出見於新寧要路上 日晩賊焚湯於北習瓦村 大任度其歸由唐旨山設伏以待 是夕賊果到我軍射殺二十名斬首四十名 又設伏迲林院以綴往來之賊 適有御使稱號之倭自軍威馳過新寧 七月十四日進擊於朴淵 時新寧義兵將權應銖義興伏兵將洪天賚率兵亦來 遂與應銖等合勢追擊大破之 斬首四十餘級奪其槍劍牛馬之屬無算 餘賊各分逃去 一部向義興一部向河陽 權應銖洪天賚等追賊向義興至召溪破之 鄭大任及鄭湛等追賊向河陽至瓦村破之 自是軍聲大振賊勢頓挫 人意差强擊賊者甚多 賊徒不敢恣其游掠也 鄭大任遂與諸將議曰 賊怯於連敗不設邏候且無後繼 因此永川據城之賊可以急擊拔之 乃遣幕下兵 某日圍城之意通于列郡請援 於諸義陣 二十三日列陣于郡南楸坪設火攻之備 使軍卒預求柴草潛積於西北門外 以木柵編長梯爲踰城之具 又抄選勇健人登郡之西峰 候望賊衆多少賊馳馬于城外 或處處蜂屯蟻聚 不知其數 時權應銖及新寧縣監韓倜自新寧率兵來 會洪天賚亦率兵來會 二十四日河陽義兵將申海及河陽倅曺胤申慈仁義兵將崔文炳慶山義兵將崔大期慶州判官朴毅長等 各率其衆亦皆來 會摠三千五百六十餘 時義城敢死卒五百來附 仍爲分部文武鷙悍凡數百人 拱推以權應銖爲別將 申海爲左總 崔文炳爲右總 鄭大任爲中總洪天賚爲先鋒將 本郡守金潤國爲別將 進士鄭世雅鄭湛爲贊劃從事 書旗曰倡義精勇軍 立於陣中陣勢嚴肅也 遂以設旗鼓鄭大任命諸將士以次進謁因下令曰 今行朝邈在西陲政令不通當此之時軍中律令不可不嚴密整肅 往者討賊之日雖或有違令失度者 事在創始姑恕其過 今此據城之賊其數甚夥 根柢已深 以我孤軍若循前例吾恐大事不成 惟我將卒同約以誓 乃下令曰 惶㥘亂言者斬 見賊退五步者斬 任自擅斷不用將命者斬 臨戰失伍者斬 將士皆應曰 軍中聞將軍令其敢有違當如約如約 又謂諸將曰 兵務精不務多吾衆雖少有死之心 賊兵雖多意甚驕吾知其必敗 但所據城池後背丘陵前臨川野不可膠守 古制不如游兵 累日以觀賊情之怠慢 因風火攻可也 二十五日進軍列陣于郡之前野 賊數百浴馬南川見我軍之來走入城 城中之倭登堞而望我軍之建旗陣前取蒭作偶人持弓矢列立于陣前軍人間耳 權應銖洪天賚率騎士五百人馳突於賊所望見之地 又令鄭千里登高峰候望他賊援兵之至 又選壯士四百餘人潛伏川邊林藪中常逐汲水倭人賊 由是不得飮水只茹乾糧日益困疲 二十六日進至川邊距城數百步許馳突耀兵賊鳴鼓吹角 將倭二人著金冠黑段衣出明遠樓上揮扇而坐被虜女人列侍左右 俄而賊兵千餘列立城頭齊放鐵丸有如轟雷飛電 城中衆賊一時大呼聲動山河 又以我國語大爲恐喝曰 爾是何人累日不散不戰也 京城已陷八路崩潰爾等 乃以么麽若干軍卒其敢當我乎 莫若來降全爾軀命 不然明朝爾將之頭可致麾下 洪天賚盛氣者也 不勝憤怒願與挑戰 鄭大任曰兵忌輕發愼勿妄動 乃勅軍一字整陣全不搖動 鳴笳吹角以示閑暇 賊望見大笑愈益怠慢 於是權應銖躍馬而出射倒黑段衣將倭登城之賊 卽爲走入日晡 時賊向我軍發大砲丸如沙椀 我軍中死者三人 昏後賊列炬往來有相與謀議之狀 有一僧縋城而來 乃慶州佛國寺僧被虜者也 公湛引問賊情 則曰賊明日將欲幷力攻滅我軍 故冒死逃來云 鄭大任聞之 是夜二更令軍卒長梯踰城之機備於東西門外 又下令曰三次鳴鼓吹角諸將士應鼓 而一時入城 又使鄭千里率敢死卒五百潛伏於馬峴山 明日如此 如此遂與權應銖約束曰 賊犯汝門則我斬汝犯我門 則汝斬我及權應銖申海洪天賚朴毅長韓倜曺胤申等領兵圍西北門 鄭大任及鄭湛鄭世雅金潤國崔文炳崔大期曺希益辛俊龍李蕃曺德騏等圍東南門 二十七日平明鼓行直抵城下先薄南門賊兵 擺列城上放丸呌噪 我軍各持長梯負防牌薄城以示 踰入之狀 將倭數人著銀盔金假面錦袍登城坐門樓上揮扇督衆 開門悉出兵以逆之 蓋見我兵少欲爲蹙踏蹂躪也 我將士數百人奔之衝其中 堅劍而進賊之 觸傷者亦多 俄而騎倭數千名 又自城中齊聲放丸我軍畏賊不進 大任奮不顧身督責諸將 親自揮劍策馬先入賊陣馳突縱橫劍光如電 賊兵死傷如秋風落葉 賊大亂失度不知所向 自相踐蹂僵屍如麻 我軍乘勝進擊無敢當其鋒者 賊走入城中 將倭見其兵敗自投城下 大任進斬之卽賊之名將法化也 諸將士卒益得生氣 攻破南門突入城中 賊尤爲大亂 於是權應銖與洪天賚申海等守西北門分兵五百人使各持楞杖槍劍分守城外以截踰城之賊 督諸軍使之踰城賊 尙强莫利先入城權應銖亦諫止其輕進 應銖怒摘其在前不進者數人卽斬 以徇人人畏威奮勇 而爭入攻破西北門先斬守堞賊十餘級 賊騎兵千餘自城中亦出齊放鳥銃 我軍少却權應銖奮身大呼親自揮旗策馬馳突縱橫發矢無一不中 所射殺幾至數十倭人 應弦而倒且令勇健之士取賊屍破腹出腸 或斬斫顔投諸賊中 賊見之驚駭大亂 失措不敢進前回入城中 我軍乘勝進擊 是時鄭大任下令 鳴鼓南北相應首尾整齋 又令三次鳴鼓吹角東西諸將 應鼓而起左右挾攻數千將卒 或攻破城門 而入或以長梯踰城而入一時四面鼓譟而進聲振天地 矢石如雨我軍兵威益强勢如奔 鯨怒虎長驅而入賊兵之伏者四起與賊巷擊 是時西北風大起 鄭千里率敢死卒五百 自馬峴山突出因風散灰沙 賊陣中城中迷暗 賊不能放丸 只以銃筒相搏而已 我軍進斬倭三百餘級 賊大敗棄其兵器 走匿官舍衙軒倉庫 時鄭千里大聲呼之曰 被虜人等速出來我今將火攻被虜男女爭先出來 時賊勢頓挫不得禁束也 鄭千里及敢死軍五百人以長梯踰城而隨風縱火 火烈風猛城外積薪之火 又延爇於城內瞬息間烟焰漲天 賊徒遑遑如焚林之鳥 自東南門爭相躪籍而出 大任及湛揮兵伺門外 隨出隨斬六百餘級 血流成川 其餘賊不敢逃出 或從明遠樓投水死 西北之賊超越欲走 權應銖及申海爭相提擊賊 窮蹙不知所向 自相蹈籍死者 火中燒死者 不可勝數我軍死傷者亦多矣 餘賊數十超入深水處 我軍以爲必死 而置之潛爲膝行於水中良久 乃出於越邊登岸而走 應平拔劍追之不及而還 得脫而生者僅是數三人 火焰達夜不絶腥臭聞于十餘里 燒骨處處 縱橫盈坑 二十八日朝 饗軍鼓樂點閱 我軍之死者八十餘 傷者二百三十餘人 所得賊物健馬二百匹銃筒槍劍幷九百餘柄寶鞍彩段亦多焉 又閱被虜人之歸我者男女凡一千九十餘人 問其姓名居住 飢者食之 傷者藥之 各還其故土 及其去時 皆羅拜謝曰 不圖今日有此生死 骨肉之恩 生我者父母 活我者將軍 將軍之德同我父母 欲報之恩 昊天罔極 是日各陣斬馘及雜物都錄委管於本守金潤國 潤國以義陣所獲自爲己功 而一夜之間 潛報於左兵使朴晉 時晉擁兵在安東退遛觀望旣得捷報亦欲爲己功有若自爲指揮者 而永川全城大捷之功馳啓行朝 晉因此得氣而馳到永川循視陣處及討賊方略大奇之 自嘆曰 雖古之韓彭諸葛何以加此 隱有慚色 八月初 朴晉以權應銖以爲突擊將直率進討慶州留屯之賊 鄭大任及余選率精銳千餘騎進擊比安龍宮屯據之賊 皆破之 十五日回軍擊破河陽慈仁流散之賊 進軍到慶州兵使朴晉率道內兵 持難未決退在安康 逗遛觀望遂與合勢 八月二十一日 進圍慶州城攻破西門 賊逃出東南門 我軍雷鼓入城俄而日午賊兵復大至東南門 城中震怖 朴晉軍先潰競從西門出 鄭大任謂同征士曰 奔東南而備西北者昔亞父之所以獲全也 今衆情瓦解 雖不能止 若從西門出必敗賊 手卽與余率精兵數百餘人 揮劍躍馬跳出東門 至焚篁寺 小路顧見 則賊兵伏於西川林藪中抱圍我軍 朴晉失律先潰及敗 永川義士崔仁濟鄭碩男金大海金演鄭宜藩李日將孫晛等數十人皆死之 朴晉使權應銖朴毅長等檢兵奔還安康 是日鄭大任及湛與朴毅長合軍夜潛伏城下發震天雷入城中墜於賊陣 賊不曉其制爭聚觀之 俄而炮自中而發聲震天地鐵片星碎中仆 旣死者三十餘人 未中者亦顚仆良久 而起莫不驚懼是皆以爲神 是夜賊遂擧衆棄城遁歸西生浦 晉遂慶州城得餘穀萬石 遂復城自玆以後左道列邑往往遂復江左生靈賴而安業 是皆永川克復之功也 永川復城之日 金潤國朴晉皆竊以爲己功 而馳啓朝廷不知義兵之謀官軍償職有次 而義兵不與焉 皆後世懲毖之事也 -復齋 鄭湛 壬辰亂中日記 영천읍성(영천군전도, 1872), 영천성수복기, 호연정, 양무당, 남문, 조양각, 청량당, 객사 향교, 아사, 읍창 서문, 북문, 동문, 사직단, 임고서원터, 청통역, 서천, 남천, 장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양배거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병마사 양배 위친거려 3년 정려 효자 청주 양공 정려비 훈수 정만양 찬 노우 정충필 서 훈-흙나팔, 지와 화음을 이룬다. 훈과 지의 화음은 형제 우애를 비유 훈수 정만양 지수 정규양 훈지양선생어록-용와 이홍리
公諱忠弼。字伯敬。初諱興弼。字昌伯。姓鄭氏。高麗時有樞密院知奏事諱襲明。事仁宗。死直節。是爲始祖。其後世躋崇班。爲迎日著姓。中移于永川。有圃隱先生夢周出。而爲東方理學之祖。圃隱之叔祖有諱光厚。爲我朝工曹判書。至諱克後。始徙于慶之霞谷里。早遊寒旅兩先生之門。官大君師傅。號雙峯。是爲公六世祖。五世祖諱。以行誼薦授獻陵參奉。高祖諱時錫。隱不仕。曾祖諱沇。善草隷。官止咸安郡守。祖諱相文通德郞。考諱煜號梅軒。妣永陽李氏。處士諱秀春之女。參判民寏之玄孫也。以英廟乙巳八月十一日生公。公幼而明敏。六歲。字畫若天成。庚戌妣李氏下世。憂慽至羸悴。壬子。能作諺書於繼母孫氏。先府君敎導有法。及知讀書。非義理之書不授。與族叔生員熺。年上下數歲。自幼同學。雖游嬉。不離翰墨。從兄宗弼,衡弼性孝謹。又襲庭訓。凡事親賓祭。人稱至行。公得以擩染。不出軌範。壬戌。授室于完山李氏處士齊松之女。甁窩先生衡祥之曾孫也。少有虛羸之疾。先府君不督課業。而手未嘗釋卷。性喜窮玩。凡性命理氣之原。圖畫象數之妙。無不探賾。周易啓蒙,近思錄等書。手自謄寫。不離几案。左圖右書。俯讀仰思。弱冠時。已以善書名。屛額所須。隨卽應副。人或以不慳名爲言。輒笑曰。取舍在彼。吾豈欲一藝成名乎。居常游戲。無非六藝之習也。丁卯。陪先府君避痘立巖。立巖乃旅軒先生遺馥之地。有雜詠及日躋堂序。蚤聞百弗庵崔先生之風。時往從之。多有所觀感而興起焉。仍與百弗先生胤子周鎭及西厓先生後孫柳友善。以資其講劘。嘗習爲擧業而業亦精。淸新條暢。大爲儕流之所推。樸巖李公晩松奇愛之曰。若置之京洛。科第當不讓於人。李二香範中。美其釋經之文曰。可登於註解中。自戊寅屢占鄕解。輒拘西疾。未赴省試。戊子。行過數百里。聞前路有梗而旋返。先府君以知內外輕重深喜之。先府君自丁亥寢疾。累年惉懘。藥餌之進。甘旨之奉。盡力殫誠。庚寅。奄至大故。自喪而葬而祭。哀禮備至。不脫絰帶。不入中門。旣返魂。結廬墓下。兄弟迭守之。朞練之前。餻麵瓜果之屬。不入於口。祥禫之前。肉味酒醇之助。不近於口。祭奠之暇。將家禮一帙講讀之。仍手自謄出。以儀禮本文及後儒之論有補其疎略者。博採而條附之。使四禮疑文。不待他書而皆有所考據。以爲一家之用。旣免喪。晨興拜廟訖。問寢北堂。愉愛忠養。退坐書室。長對黃卷。癸巳。以伯父護軍公命。同舍弟東弼。一赴省試。乙未。護軍公下世。哀戚踰節。自初終至虞祔。不離殯側。躬執祭奠。丙申。以大夫人命赴漢城別試。主試以春王正月出論題。擧場莫曉其義。公獨明白論列。遂中其選。葢是時考官入侍筵中。自上擧問。而廷臣無有能對之者。故出而試士也。人期其大闡。竟下第。自是絶意進取。遂篤志求道。一裡書講究爲事。而於朱子書。尤篤信之。以爲爲學之模範具在於此。得之於書者。必體之於身。悟之於心者。必行之於事。常以程夫子涵養須用敬。進學在致知一句語。爲問學之元符。及到憤悱之發。每以傍無強輔爲歎。惟以親有道爲可樂。百弗翁所居。爲百餘里之遙。而頻頻往遊。以冀其策勵。百弗翁亦相期不輕。眷愛甚厚。常歎曰。天旣生君之才。豈合終窮而不用耶。時又往來於大山李先生。大山翁深加奬詡。以友禮待之。貽書勉之曰。吾儕之望於座下者不淺。更進竿步。以扶持此箇氣脈云云。性好山水。聞有佳絶處。雖遠亦命駕。如淸凉,周王,八公,內延等山。無不游覽。夙有俗離之願。庚子。以匹馬單僮。孤往而遍觀之。有游錄諸作。癸卯。謁檜淵書院。仍入武屹。尋寒岡先生藏書講道之遺躅。有紀行詩。所居上游。有先祖雙峯先生遺亭。每遇佳辰。輒援琴攜壺。徜徉於水石間。時或講讀於是。嘗讀理學通錄。喟然嘆曰。朱子敎人。各隨其氣質偏處而救藥之。其中病處。豈無與我相類者。以此書爲嚴師。以答問爲親承。則無非頂門上一針。又謄出點標。須臾不舍。乃拈出苟提省得緊。雖半月見驗十字。書之壁上曰。古人之敎人持敬。如此其丁寧。此言豈欺我哉。遂閉戶危坐。孜孜矻矻。信之如蓍龜。悅之如芻豢。及至意會處。必怡然自得。或形之言語而說與人。或綴成詩句而備遺忘。自朝至暮。斂衽端坐。時或神疲氣困則霎時閉目。晝未嘗偃卧。坐未嘗少倚。雖於得肆之地。呻楚之時。不敢少懈。夏或患痁。亦危坐終日。傍人請其暫休則輒曰。志之所向。氣必隨之。嘗曰。人子之全歸。莫大於復全天性。吾旣半生乾沒於名利中。屬此晩暮。苟不有百倍之功。何以能復得吾性之萬一也。又曰。從古聖賢。莫不從極辛苦中做工夫。乃到快活境界。未有不苦而能樂者也。常以朝聞夕死。死而後已自誓。其向學之誠。信道之篤。可謂質之神明而無愧也。壬寅年間。自玉山書院。重刊太極問辨。葢是書彙輯。雖出寒岡先生所命。而未經手校。多有訛誤可疑處。旅軒先生嘗著是跋。詳記當時事實。而主刊事者。必欲不刊跋文。公以爲紕繆之書。不可歸之於手編。羽翼之文。不可不附於元書。力主刊跋之論。道內有識之士。咸服公知見之正。議論之明。畢竟移刊於檜淵書院。而其所釐正。一遵公所言。公惟閉戶守口。益自修省。至其晩年。宿患沈痼。夜則奄奄難支。而日必衣冠靜坐。乃於己酉五月。忽致添㞃。自初三日委頓牀席。初六日有先忌。是時病已革矣。而將事之時。兀然起坐。其當旋便。必出外溷。葢以室中有藏書之架故也。初七之夕。氣益微。語益澁。而猶將出外。傍人以衾障架然後乃便。仍悠然而乘化。嗚呼痛哉。此其君子之終也歟。享年六十五。以越三月某日時。葬于府北士樸洞巳坐之原。公天資穎悟。神彩明秀。廉介其操也。剛果其志也。早承過庭之訓。知有向上之學。雖屈意場屋。從事擧業。而所讀者性理之書也。所講者聖賢之學也。其自守也。常以與世俗同流合汙爲戒。以爲士子持身。當如閨中處女。不可一點受汙於人。交游之間。不以狎戲相加。接待之際。常以恭遜爲主。不與衆追逐。不與人苟合。毅然若不可犯。而子諒之心。溫如璠璵。癯然若不勝衣。而爲善之志。堅如金石。常曰。日用應接之際。心之所發。有善有惡。精察乎二者之間。而必從善一邊做將去。則是可以優於天下。况於一身乎。凡於事爲之間。若見得善之當爲則勇往直前。無顧瞻徊徨之意。又曰。性善之理。人所同得。而天下之公物也。吾雖做得至善。非人所不能而已所獨能也。何足以是而自多乎。其窮理也。以爲天地間許多物事。孰非吾所當窮也。近自一心一身。遠至萬事萬物。存此心而窮此理。推所知而見之行。則爲學之道。如斯而已。其於禮也。雖疑文變節。必窮其本而盡其變。會於心而致其用。甁窩翁嘗著家禮便考。博採羣書。詳辨聚訟。護軍公與甁窩翁子若孫。易藁而讎校之。尙患編帙旣多。梳洗未易。公乃刪繁釐誤。極費精力。人有以疑來問者。不以己見斷之。拈示其證據。知所决擇。嘗曰。古者樂以敎人。後世無傳焉。若夫養其和氣。禁其邪心。惟琴是已。於是傳得古譜數章。月夕花朝。輒理韻以自娛。其於書也。必得之古法而透其神妙。嚴正者自然嚴正。奇健者自然奇健。而要之一出於心畫。其於數也。參以九法而推類以盡。凡係上運於天。下載於地。而難見而難測者。無不推之於縱橫布置之間。時又仰觀天象。以識其星宿之躔次。遂有詩曰。邇來解把星河玩。萬里長空勝十洲。嘗細究書註。手造璣衡。而日月之行。分至之候。毫髮不差。以爲地理者。朱子之所不遺。而亦窮理之一事也。又嘗講究其說。手成輪圖。至於揲蓍之妙。爻卦之變。亦有人未及知而獨覺其理者。苟非天才之超凡而窮理之至密。其何能如是哉。其讀書也。先以小學立其基本。四子及濂洛諸書。循環溫習。以尋其路脈。若易繫上下傳。則以爲孔氏寓道之文無過於此。夜必一誦。以至千遍。至於諸子之書。文章之家。亦無不誦讀。其發爲文詞也。簡潔疎暢。自成一家之體。南參奉龍萬嘗曰。某之筆法。吾未知其必及古人。其文章則可軼於古人。樊巖蔡相濟恭以文華國。而嘗得公爲先世乞銘之書。圭復而歎曰。此書不可容易爲答文。非公所自任。而人之許之也如此。其事親也。以爲爲孝者。又有私意與天理之分。苟不精察乎此。雖割股廬墓。亦爲人而已。於其奉養也。必究其如何而得其理。如何而得其宜。雖家素貧窶。菽水難繼。而誠愛兩至。愉悅是務。其自奉也。食取充腹。衣取蔽軆。麁蔬糲飯。人所不堪。而處之裕如。居家不營產業。而至於課耕勸織則恒不失其時。撙節財用。而至於周急恤匱則如恐有不及。祭祀之需。租稅之貢。必前期措備。無或有臨窘之弊。世間浮靡之事。無一經心。向人求覓之言。不一出口。嘗曰。萬鍾之辭。一死之辦。吾可自任。此非見道分明。是亦吾性偏處也。其爲學也。以爲寧學聖人而不至。不可作汨董好人。人之欲要譽於鄕黨。而無怨無惡而已者。不可與入堯舜之道。遂一意爲己。鞭辟近裏。本之於日用彝倫。驗之於淺近平易。精思而實踐之。未嘗敢以微細而忽之。亦未嘗以高遠而不力。及至晩年。所以存養者。愈嚴愈敬。所以省察者。愈精愈密。專進伯之誠。化伯恭之質。其色也莊而和。其言也厲而遜。淸而有容。介而不矯。雍容端潔。不失爲有道者氣象。而猶且自視如初學。常以日暮道遠爲歎。方其疾病。猶不忘敬祭之心。又不失尊經之道。則於此可驗其所存也。於乎。公之一生用心。葢不離於斯學。而亦未嘗忘世。其不耦而止也。不鎰喪介意。不以毁譽動中。悠然自適於農夫野叟之間。而讀書至可補於時政者。則慨然有獻之吾君之心。然則公之所學。眞可謂六藝之學。而公之所蘊。進可以有用於斯世矣。然而公不求知於世。世亦無知於公。惟其自修者。硬著脊梁。向前擔當。若假之以年。卒究其所學。德器成就。又何可量。而不幸未耄先萎。斯文俱喪。嗚呼唏夫。公嘗自號曰魯宇。平生不喜著書。有遺稿若干卷藏于家。夫人李氏。亦能淑愼其德。事舅姑盡誠。又豈非感化於公者歟。無育。以仲弟邦弼子志一子之。志一先公夭。只有一女。以護軍公命。取從姪履一子來萬爲後。女適廣州李以泰。東弼幼而被養育之勤。長而蒙誘掖之功。朽木之姿。雖無所成。若其熟覸其德行。詳識其志業。宜莫如東弼者。而今欲措辭紀實。茫然如寫眞者之不能寫心。百不一二髣髴。然思以是扳控於當世秉筆之君子。庶幾得一言之惠。伏惟幸哀而垂察焉。 노우 정충필 서법 학파공 정관검 간필서법(제산 김성탁 답풍원군 조현명) 삼강행실도 포은 운명 포은 정몽주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선죽교에서 조영규에게 철퇴를 맞고 순절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선죽교 돌에 대나무가 자라나고 핏자국이 배어서 지금도 색이 붉으며 대나무가 자라서 다리이름을 선죽교로 변경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용비어천가에 정몽주 피살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세종 때 국가가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포은 운명 장면을 그린 이 그림에도 물론 선죽교나 조영규의 철퇴가 등장하지 않는다. 정몽주는 낙마하여 병석에 있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다른 곳에 문상하고 태묘동 자택으로 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이방원의 지시로 태묘동 동구 숲에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던 조영규, 고려 등의 습격을 받아서 칼에 피살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정몽주는 칼을 맞고 낙마하여 쓰러져 있다. 칼을 든 3명에게 쫒겨 달아나는 두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정몽주와 동행한 비서나 말 몰이꾼으로 보인다.
포은 정선생지려 1388년 위화도 회군 뒤에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를 제수받은 정몽주의 효자 정려비를 영천군수 정유가 홍무 기사년(1389) 3월 중순에 세운 정몽주 효자비 정몽주는 19세에 부친상, 29세에 모친상에 각각 주자가례에 따라 여묘살이를 하 30세에 효자정려문이 세워졌다. 이성계 일파의 우왕 폐출 공양왕 옹립에 기여하여 1390년에 정몽주는 익양군 충의군(충의백)으로 공신 책봉됨 태종 때 정몽주는 문충공으로 시호가 내리고 복권되었다. 영천 임고면 우항리 동구의 이 효자비는 논밭에 매몰되었다가 성종 때(1487) 경상도관찰사로 온 손순효가 꿈 속에서 비석의 존재를 알게되고 마을 노인들에게 물어서 되찾아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였다. 태극문변(회재 이언적, 망재 손숙돈, 망기당 조한보) 조선 중기의 학자 정구(鄭逑)가 이언적(李彦迪)·주돈이(周敦頤)·주희(朱熹) 등의 태극에 대한 학설을 모아 그 이론을 정리한 책. 편찬/발간 경위이언적이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曹漢輔)에게 태극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일이 있는데, 그의 손자 이준(李浚)이 이것을 이황(李滉)에게 질정을 구해 이황의 찬탄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뒤 이황의 문인인 정구에게 비평을 청하자, 정구는 이 글이 태극에 대한 학설로는 진수가 된다고 확신하고, 여기에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주희가 육구소(陸九韶)·육구연(陸九淵) 형제와 주고받은 서찰을 첨가해 이 책을 간행한 것이다. 초간본은 화산부(花山府)에서 나오고 중간본은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나왔으나, 약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이 책은 그것을 보충하고 체재를 바꾸어 개간한 것이다. 첫머리에 이정구(李廷龜)의 서문, 권말에 초간자인 김지남(金止男)과 장현광(張顯光)의 발문과 후지, 고정십일칙(考訂十一則)이 있다. 서지적 사항2권 1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권수는 태극문변목록·주자태극도, 권상은 답육자미구소서(答陸子美九韶書) 2편, 여주원회서(與朱元晦書)·답육자정구연서(答陸子靜九淵書) 각 1편, 권하는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답망기당제일서(答忘機堂第一書)·답망기당제이서·답망기당제삼서·답망기당제사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는 주돈이의 학설, 권상은 주희와 육구소 형제간의 왕복 서한, 권하는 이언적·손숙돈·조한보 사이의 왕복 서간을 수록해 태극설에 대한 맥락을 분명히 하였다. 이 논변의 주요 부분은,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육구소·육구연 형제가 유가의 정통이 아니고 노자(老子)의 학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반박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육구소·육구연 형제는 이 글이 『태극도설』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해 이것이 주돈이의 설이 아닌 타인의 설임을 강조하면서, 주희가 주석한 내용을 포함시켜 공격하였다. 조한보와 손숙돈이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견해가 비슷한 것에 대한 이언적의 해명이 돋보인다. 이 책의 간행으로 태극설의 체재가 주돈이―주희―이언적으로 이어져 이 학설이 정통임이 밝혀지고, 반면에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손숙돈·조한보의 학설은 이단으로 폄억(貶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극문변 [太極問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효자 동래진병마사 양배지려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청주 양공 실근지려 양실근 정효각 ①청주 양씨[淸州 楊氏] 양기(楊起)를 시조로 하고 양효지(楊孝智)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성씨. 청주 양씨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시조는 양기이다. 양기는 중국에서 태어나 원나라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위가 삼태(三台)에 이르렀으며, 1351년(충정왕 3)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같이 노빈도령(魯嬪都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체찰사(軆察使) 노국삼명사신(魯國三命使臣)으로 고려로 들어왔다. 양기는 홍무 말년(洪武末年)에 다시 중국에 들어가 계책을 펴서 말하기를 “동국이 궁벽한 바닷가에 있어 읍(邑)들도 극히 적고 백성들이 피폐에 지쳐있어 세공(歲貢)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상달하여 비로소 각종 세공(歲貢)이 감면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가 부하게 되고 백성이 안락하여 마침내 태평함을 얻게 되자 나라에서는 공을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 상당백(上黨伯)에 봉하고 해주(海州)와 송화(松禾)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자 다시 청백리(淸白吏)를 봉하였다. 사후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고 호를 암곡(巖谷)이라 하고 진상(眞像)을 송화(松禾) 묵산(墨山) 수증사(修證寺)에 모셨으며, 묘소는 백천군(白川郡) 유곡면(柳谷面) 영성리(永成里) 지동(池洞)에 있다. 청주 양씨의 영천 입향조는 시조공인 양기의 현손인 양효지(楊孝智)이다. 양효지의 종숙(從叔)되는 양배(楊培)의 묘소와 효자각[양배 효자각]이 영천에 남아 있고 영천에 살았던 것은 확실하나, 그의 아들이 울산으로 가고 또한 후손들이 경주 등에 거주하는 등 영천에 세거를 하지 않기에 입향조로 보기는 어렵다. 양효지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 영천군 화산면 화산리 효지(孝智)[효지미] 마을이다. 그가 도성을 떠나 은거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단종이 손위(遜位)할 때 선왕 즉 세종의 유언을 들어 세종의 빈이었던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옥새(玉璽)를 내놓지 않겠고 버티다 참화를 입자 혜빈과 사촌간이며 더구나 지조 있고 절개가 굳은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통성을 잃은 왕조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처음 은거한 곳은 고향이었으나, 수년 후 영천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효지마을로 은거한 연유는 불확실하다. 다만 그의 종숙(從叔)인 양배(楊培)가 이미 이곳에 터를 잡고 있은 데서 그 연유를 찾고자 했으나 그도 어려웠다. 양배 또한 어떤 연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양배의 처남이 경주 김씨로 처음 영천에 입향한 호연당(浩然堂) 김자양(金自養)이기에 관련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입향 이후 인물을 향지 『영양지(永陽誌)』와 『화산지(花山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두 향지에 실린 청주 양씨는 입향조 양효지를 비롯하여 관찰사(觀察使) 양배, 증(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양자한(楊自漢), 가선대부(嘉善大夫) 양희련(楊希漣),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양사(楊泗), 가선대부(嘉善大夫) 양수(楊洙), 문장이 세상에 드러난 양경사(楊景泗)와 양명화(楊命和), 양대민(楊大民) 등이 있다. 청주 양씨의 집성촌은 경상북도 칠곡군 칠곡읍 일원[현재 대구광역시 북구에 편입됨], 경주시 내남면 일원, 경주시 강동면 일원,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일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일원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영천의 화남면 선천리 및 귀호리, 화북면 자천리도 큰 집성촌 중의 하나이며, 모두 입향조인 정간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입향조를 제향하는 덕강서원(德岡書院) 및 정간공양곡양선생신도비(靖簡公良谷楊先生神道碑) 및 동래진병마사 양배(楊培) 효자각과 양실근 정효각(楊實根旌孝閣) 등이다. 그리고 선대 묘소를 수호하는 묘재로 모산재(慕山齋)·광풍재(光風齋)·양청재(養淸齋)·첨모재(瞻慕齋)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영양지(永陽誌)』(1935), 『화산지(花山誌)』(1935), 『청주양씨족보(淸州楊氏族譜)』(1924), 『골벌』7(영천향토사연구회, 2001) [네이버 지식백과] 청주 양씨 [淸州 楊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②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1617년(광해군 9)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편찬.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 新續三綱行實圖≫를 토대로 하고, ≪여지승람≫ 등의 고전 및 각 지방의 보고자료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1,000여 사람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만든 뒤에 선대의 예에 따라서 각 한 사람마다 1장의 도화(圖畫)를 붙이고 한문 다음에 국문언해를 붙였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체득한 귀중한 자아의식 및 도의정신의 토대 위에서 출발된 것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 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24․25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효자편>의 귀암(歸庵) 양배(楊培)
양배[楊培, 1400-1489] 청주 양씨(淸州楊氏)의 시조인 양기(楊起)는 공민왕(恭愍王)이 북경에 머무르다가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1351년(고려 충정왕 3)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함께 귀국할 때 노빈도령(魯嬪都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체찰사(軆察使) 노국삼명사신(魯國三命使臣)으로 고려로 들어왔다. 후에 고려에 귀화하니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지고 해주(海州)와 송화(松禾)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자 다시 청백리(淸白吏)에 봉해졌으며, 사후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내렸으니 양배(楊培)의 증조이다. 양배의 조부는 광정대부도첨의찬성사(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의 벼슬을 하고, 서평군(西平君)과 청백리(淸白吏)에 봉해진 양지수(楊之壽)이며, 아버지는 보국대부행호조전서(輔國大夫行戶曹典書)의 벼슬을 하고, 안악군(安岳君)과 청백리(淸白吏)에 봉해지고 시호 경안(景安)을 받은 양천진(楊天震)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보성 선씨(寶城宣氏)로 밀직부사(密直府使) 천주(天柱)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로 이조판서 김을초(金乙軺)의 딸로 바로 경주 김씨 영천 입향조인 김자양(金自養)의 누이이며,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병사(兵使) 양계원(楊繼元)과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양계동(楊繼童), 대제학(大提學) 양계종(楊繼宗), 생원(生員) 양계남(楊繼男)이며, 사위는 김명도(金明道)·정문비(鄭文備)·이숭례(李崇禮: 회재 이언적 선생의 증조모)·이효손(李孝孫)·이기(李基)이다. 공의 후손들은 경주 일대에 세거해 살고 있다. 양배(楊培)는 태종 때 만호(萬戶)를 제수 받고 통정대부 동래진병마사(東萊鎭兵馬使) 및 경상·강원관찰사를 지냈고 호조판서를 증직 받았으며, 단종이 손위(遜位)할 때 종질녀인 혜빈(惠嬪)이 선왕(세종)의 유언을 들어 옥새(玉璽)를 내놓치 않음으로 해서 세 모자가 동시에 화를 입었다. 공도 3년간 연일(延日)로 귀양 갔다가 돌아올 때 더 이상 부귀에 뜻이 없다고 하면서 소식과 교제를 끊고 영천으로 돌아오니 그의 호를 귀암(歸庵)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배는 어릴 때부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이 나면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옆에서 돌보면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아침저녁으로 정해진 시간에 더욱더 돈독하게 살피었다. 집에서 나가고 들어올 때 반드시 고하고, 음식을 드릴 때는 반드시 직접 맛을 보고 드렸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모친이 병에 들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했으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수년간 생명을 연장시켰으며, 돌아가시자 시묘 3년을 마치니 그 효행이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이에 북안면 송포리에 정려각을 세웠는데 묘소와 함께 군사시설에 수용됨으로써 현재는 명주리로 옮겨 세워졌다. 정려비명은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이 지었으며, 공의 묘소 또한 이장되어 효자각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양지(永陽誌)』,『청주양씨족보(淸州楊氏族譜)』, 『골벌』7(영천향토사연구회, 2001) [네이버 지식백과] 양배 [楊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③선조고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이 부군 묘비명 先祖考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李府君墓碑銘 공의 휘는 수회(壽會)이고 본관은 여주(驪州)이니, 향공 진사(鄕貢進士) 세정(世貞)의 후손이다. 조부는 휘가 권(權)으로 용양위사중령 부사직(龍驤衛司中領副司直)을 지냈다. 고(考)는 휘가 숭례(崇禮)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追贈)되었다. 참판 공이 현감 양배(楊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명나라 선덕(宣德) 신해년(1431, 세종13) 3월 정묘일에 영일(迎日)에서 공을 낳았다.(중략) 공의 배필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생원 점(點)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선공(先公)이신 휘 번(蕃)으로, 성균관 생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차남은 필(苾)로, 별시위(別侍衛)이다. 딸은 충순위(忠順衛) 권희안(權希顔)에게 시집갔다. 선공은 2남 1녀를 낳았다. 언적(彦迪)이 장남이고, 차남 언괄(彦适)은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을 지냈다. 딸은 찰방(察訪) 이사익(李師益)에게 시집갔다. 필은 4남 3녀를 낳았다. 통(通)은 훈련원 판관이고, 도(道)는 충순위이며, 우(遇)는 만호(萬戶)이고, 운(運)은 아직 어리다. 큰딸은 최덕숭(崔德崇)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권희범(權希範)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과 증손은 남녀 32명이다. 가정(嘉靖)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12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회재집 제6권
[주D-001]향공 진사(鄕貢進士) : 고려 때 지방의 각 고을에서 유생들을 뽑아 중앙에 올려 보내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게 했는데, 이들을 향공(鄕貢) 또는 공사(貢士)라고 하였고, 이들 중에서 국자감시에 합격한 사람을 향공 진사라고 하였다. [주D-002]하늘에서 …… 빛내었도다 : 손자 이언적이 현달(顯達)함으로 인해 이수회가 이조 판서에 추증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가계: 李崇禮(현감 양배의 따님과 결혼)-수회壽會-번蕃(先公)-언적彦迪‧언괄彦适 //수회-필苾-권덕린權德麟 (권덕린: 필의 사위, 회재의 문인, 옥산서원 창건 주도, 운곡서원 배향)
*권덕린[ 權德麟 1529년(중종 24) ~ 1573년(선조 6)] 좌랑, 합천군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서(君瑞), 호는 구봉(龜峰). 효충(孝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명추(命錘)이고, 아버지는 첨정 계중(繼中)이다. 이언적(李彦迪)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성균관전적을 거쳐 병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된 이언적이 1553년 그곳에서 죽었는데, 그는 스승의 영구(靈柩)를 중로에서 맞이하여 돌아왔다. 누구도 감히 이언적의 전사(奠祀 :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냄)를 주장하지 못하였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창의(倡議)하여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다. 그 관직이 합천군수에 이르렀다. 경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봉유집』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네이버 지식백과] 권덕린 [權德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④<<신증동국여지승람>> 효자 양배 【효자】 양배(楊培) 벼슬이 동래 병마사(東萊兵馬使)에 이르고, 부모를 위하여 3년 동안 여막에서 살아서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⑤효자청주양공정려비孝子淸州楊公旌閭碑
사진26 효자 동래진병마사 정려각 편액 사진27 효자청주양공정려비
楊東萊孝碣銘 양동래효갈명 嗚呼此故孝子楊公之閭也 謹按鄭守菴四震遺錄曰 公自兒時 性至孝 父母有疾則 侍側不暫離 及長晨昏定省有勤 出告反面亦不踰期 至於甘旨之供必親必嘗 母夫人嘗得疾危劇公斷指以進病卽愈後二年而歿爲之廬墓以終喪 朝家聞而旌之 輿地誌亦記其事 오호라! 여기는 옛적 효자 양공의 정려이다. 삼가 정수암(鄭守菴) 사진(四震)의 유록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공은 아이 때부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이 나면 곁에서 시중들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자라서는 부모님이 저녁에 잠자리가 따스한가를 살피고 새벽에 잘 주무셨는가를 여쭈었다. 외출 때는 아뢰고 돌아와서는 얼굴을 부모님께 보였다. 밥상을 올릴 때는 반드시 몸소 음식 맛을 보았다. 어머니가 일찍이 병이 위독하자 공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하여 병이 낫고 2년 뒤에 돌아가시자 여묘살이를 하며 상례를 마쳤다. 나라에서 이 일을 듣고 그 효성을 표창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또한 이 일을 기록하고 있다. 盖公 世宗時人也 地誌及鄭公錄皆云東萊兵馬使 及得淸州楊氏譜者 而讀之則云參判未知何說爲長 而嘗顯於朝蔚然爲賢大夫矣 公之世逷爾孝碣泐且踣矣 幸而不泯者 秖此紙上數語 而永之篤論之士 愈久而愈不忘 往往傳誦如昨日事 何也 대개 공은 세종대왕 때 사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수암 정사진의 기록에 모두 경상좌도 동래진 병마절도사(東萊兵馬使)를 지냈고 청주 양씨 족보를 읽으니 참판을 역임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말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나라에 알려진 어진 대부가 되었다. 공이 살던 시대는 멀어지고 이 효자비는 깨지고 넘어져 있다. 다행히도 인멸되지 않은 것은 마침 이 책에 적은 몇 마디 말과 의론을 도타이 하는 영천의 선비들이 있어서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않게 되고 때때로 어제 일처럼 전하여 외는 까닭이다. 噫公之孝至矣 割指之事 先儒有辨之者 而父母病臥於牀百藥無所施 惟服人之血可以已疾而或延頃刻之命 則孝子迫切之心直欲磨頂粉骨 而幸其萬一 何暇問其事之 當否禮之有無也哉 然寥寥十載 能有幾人爲其親毁其體 而公能之 是其視千金之軀不若毫亡 而特父母爲重耳 天感之鬼神愍之 使其將死之親得以 再甦其事固已奇矣 及其歿而葬也 非不知反哭而虞禮也 而奪情而葬返則亡焉 아! 공의 효는 지극하였다. 손가락을 벤 일은 앞 시대의 선비들이 증명한 바가 있다. 부모가 병들어 침상에 누워계셔서 백 가지 약이 모두 효험이 없고 오직 사람의 피만이 질병을 낫게 하여 혹 경각에 달린 목숨을 연장시켰다. 효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머리를 갈고 뼈를 가루 내어 만에 하나라도 부모를 살게 하려는 것이다. 어느 겨를에 그런 일이 있겠는가하고 물으니 마땅히 예가 있고 없고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지난 적막한 10년에 능히 몇 사람은 부모를 위하여 그 몸을 헐었으니 공이 능히 그렇게 하였다. 이것은 천금의 몸을 터럭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게 여긴 것으로 특히 부모님이 위중하심에야. 하늘이 그 일에 감동하고 귀신이 그 일을 가엾게 여겨서 그 돌아가실 모친을 소생하시게 하였으니 이 일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 모친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하게 되어 반곡하고 삼우제의 예절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을 빼앗기고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모친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不知吾父母在此乎在彼乎 求之於堂而無所見 求之於飮食寢處之所 而無所聞則無乃不及其返 而彷徨躑躅於原野丘墓之間者乎 於是結廬墳側昕夕省守跪而奠之 僾然若有見乎其容色 攀而號之 慨然 若有聞乎 其歎息之聲 以致其髣髴 響像之 思其所處 又非所謂加人一等者歟 우리 어머니가 여기에 계신가 저기에 계신가를 모르겠고 어머니를 대청에서 찾아도 볼 수가 없고 음식을 자시고 주무시던 곳에서 찾아도 그 음성이 들리지 않으니 어머니가 돌아올 수가 없다. 언덕 무덤 사이를 방황하고 배회하여 본다. 이에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를 살피고 지키며 끓어 앉아 음식을 올리니 어머니의 모습을 뵙는 듯이 하였다. 무덤에 가니 어머니를 부르고 슬퍼하는 모습이 들리는 듯하고, 그 탄식하는 음성이 실재하는 듯 하였으며, 모친이 계시는 곳을 그리워함이 어머니의 음성과 모습이 있는 듯이 여기시었다. 이러한 일은 또한 이른바 사람 중에 한 등급을 더한 것이 아니겠는가. 東方僻處海外高麗氏專尙禪敎不識喪祭之節 故圃隱鄭先生亦嘗廬於墓倡孝來世 生乎鄭先生之里舊乎鄭先生之風者 非公乎 宜聖祖之嘉尙而旌美之也 孔子曰父母之喪吾從其至者 孟子曰親喪固所自盡 夫父子天性也 生死養送之際 必須直窮到底 而世之人常患於不能盡分 若公可以少咀 夫中人以下也 夫亦可以使之興孝悌之心 而知所勉也 중국의 동방 궁벽한 바다 밖 고려왕조는 오로지 선과 교(禪敎), 불교를 숭상하여 상제(喪祭)의 예절을 알지 못하였는데, 옛날 포은 정 선생이 또한 일찍이 여묘살이를 실천하여 후세에 효도를 주창하였다. 포은 선생의 마을(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우항리에 정몽주의 생전인 1389년 3월에 영천군수 정유가 세운 정몽주의 효자비가 현전함.)에 태어나 포은 선생의 풍화를 입은 분이 공이 아니던가. 마땅히 우리 조선왕조의 아름다운 일이니 그를 표창한 것이다. 공자님이 ‘부모의 상에 나는 그 지극함을 따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맹자님이 ‘부모님의 상례는 진실로 스스로 지극하게 하는 것은 무릇 부모자식은 천성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을 봉양하고 장상례(葬喪禮)를 치를 때 반드시 모름지기 예절을 철저히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 분수를 다할 수가 없음을 늘 걱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을 낮게 평한다면 그 사람은 중간 이하의 사람일 것이다. 무릇 또한 효제(孝悌)의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다면 힘써야 할 바를 알아야 할 것이다. 夫公諱培表德史失之 以金紫光祿大夫諱善才爲五世祖 卽 中華關西人也 是生諱幹尙書曾祖諱起來我 國封上黨伯楊之貫於淸始此 祖諱之壽贊成考諱震戶曹判書妣之族不傳五弟皆顯厖村黃丞相喜亦其妹壻云 무릇 공의 휘는 배인데 그 덕화가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고 휘가 선재(善才)인 분이 공의 5세조이니 곧 중화(中華) 관서(關西) 사람이다. 이 분이 휘 간(幹)이고 상서(尙書) 관직을 한 분을 낳았다. 공의 증조는 휘가 기(起)인데 우리나라에 와서 상당백(上黨伯)으로 봉해졌으니 이것이 양씨가 청주를 처음으로 관향으로 삼게 된 까닭이다. 조부는 휘가 지수(之壽)이니 찬성 관직을 했고 부친은 휘가 진(震)인데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모친은 친족은 전하지 않으며 공의 다섯 동생들이 모두 현달하였다. 방촌(厖村) 황 정승 희도 또한 공의 매부이다. 李君熽從我於尼南山下 一日作而致其里父老之命曰 吾所居寔楊公故社也 而棹楔今亡矣 卽後生何勸方且諗于衆 爲楊公左袒 請一言之相之也 余樂其有成 而不敢辭仍 又慫慂之 於是設小閣表其遺墟 公之遺孫 亦捐貲伐石以樹焉 社中諸賢可謂慕古義者 而楊氏一門 亦不負孝子家風矣 俱可書也 이군(李君) 소(熽)는 니남산(尼南山) 아래에서 나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하루는 작심하고 그 마을에 갔는데 노인들의 명을 전하여 가로되 ‘우리가 사는 이곳은 양공이 살던 옛 마을이다. 정려가 지금은 없어졌다. 그러면 후생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권하고 알리어야 합니까. 양공이 남긴 교화를 위하여 청컨대 한 말씀으로 교화에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효를 이룸이 있음을 즐거워하여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는데 또다시 비문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작은 비각을 짓고 효자가 살았던 터를 나타내고, 공의 후손이 또한 재물을 내어 돌을 다듬어서 세웠다. 고을의 모든 어진이가 옛 의리를 추모한다고 할 만하다. 양씨 문중 또한 효도의 가풍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일을 갖추어 쓴다.
銘曰 비명 왈 行人之所不能行 사람이 잘 행하지 못할 일을 하셨고, 守人之所不能守 사람이 잘 지키지 못할 일을 하셨네. 上帝感動 하느님이 감동하시고 先王是懋 선왕들이 아름다이 여기시네. 翼翼其門 번창한 그 집안 有崇斯石 이 빗돌을 숭상하네. 凡百有父有母之人 무릇 백성 중에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사람들이여, 請觀此大字之刻 청하건대 이 큰 글자로 새긴 빗돌을 살펴보게나. -훈지문집(壎篪文集) 권26
烏川 鄭萬陽 撰 오천 정만양(1664-1730) 지었고 外裔 鄭忠弼 書 외손 정충필(1725-1789) 씀
崇禎後三戊申 五月 日立 숭정 기원 후 3번째 무진(1788)년 5월 며칠에 세움
사진28 삼강행실도 정몽주 사진29 정몽주 효자비 편액 사진30 정몽주 효자비 영천 우항리
*정사진[ 鄭四震 미상 ~ 1616년(광해군 8)]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군섭(君燮), 호는 수암(守菴). 영천 출신. 장현광(張顯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과거를 포기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자양동에 들어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일찍이 여러 동지들과 자양동에 들어가 과거공부를 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덕이 높은 사람들과 교유하여 그의 학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1606년(선조 39) 왕자의 사부(師傅)를 제수 받았고, 1611년(광해군 3) 세마(洗馬)·시직(侍直)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은 끊이지 않았다. 인의왕후(仁懿王后)와 선조의 상 때에는 모두 기제(朞制)를 입었으며, 친부모상을 당한 것과 다름이 없이 행하였다. 나라에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채식을 하였다. 몸가짐이 독실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하였다.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네이버 지식백과] 정사진 [鄭四震]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정사진 [鄭四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만양[鄭萬陽, 1664년(현종 5)∼1730년(영조 6) ] 영천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기암(企菴)·정재(定齋).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동생 규양(葵陽, 1667(현종 8)∼1732(영조 8)과 함께 수학하였다. 1724년(경종 4)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동생 규양을 의병장으로 삼고 규율을 모두 갖추었으나,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이후 이남산(尼南山) 밑에 옥간정(玉磵亭)·육유재(六有齋)·태고와(太古窩: 후에 모고헌(慕古軒)으로 개칭)·진수재(進修齋) 등을 지어 향단(香壇)과 청죽(靑竹)을 심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또한 향음주례(鄕飮酒禮: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와 투호(投壺: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유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동생 규양과 함께 경사(經史)에서부터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에 관한 토론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이는 허무공적(虛無空寂)이 아닌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요, 기는 칠정(七情)에서 나뉘어 용(用)이 수반되는 기질성(氣質性)으로 분리하니, 이는 곧 주(主)요, 기는 곧 자(資)라 정의하였다. 동생 규양과 함께 「곤지록(困知錄)」·「이기집설(理氣輯說)」·「가례차의(家禮箚疑))·「개장비요(改葬備要)」·「의례통고(疑禮通攷)」·「상지록(尙知錄)」·「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계몽해의(啓蒙解疑)」·「외국지(外國誌)」·「산거일기(山居日記)」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훈(塤)과 지(篪)는 피리에 속하는 악기 이름으로, 형은 훈을 불고 아우는 지를 불어 서로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에서 동생 규양과 함께 「훈지악보(塤篪樂譜)」를 지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순수하며 진실하였고, 글씨에도 능해 전서(篆書)를 잘 썼다. 저서로는 『훈지문집』이 있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훈지문집(塤篪文集)』『묵헌집(默軒集)』『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정만양 [鄭萬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충필[鄭忠弼, 1725년(영조 1) ~ 1789년(정조 13) ] 자 창백(昌伯),백경(伯敬), 호 노우(魯宇). 본관은 영일(迎日). 처음 이름은 흥필(興弼), 자는 창백(昌伯), 후에 자를 백경(伯敬)으로 고쳤다. 호는 노우(魯宇). 아버지는 욱(煜), 어머니는 영양이씨(永陽李氏) 수춘(秀春)의 딸이다. 1747년(영조 23)에 두역(痘疫)이 창궐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주(慶州)에서 영양(英陽: 영천)입암(立巖)으로 옮긴 후, 그 곳에서 최흥벽(崔興壁)과 이상정(李象靖)에게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 도서(圖書), 상수(象數), 율려(律呂), 산법(算法), 지리(地理) 등 두루 섭렵, 깊이 연구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전초(篆草)에도 뛰어나 원근에 널리 알려졌다. 1782년(정조 5)에 경주(慶州)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정구(鄭逑)의 『태극문변(太極問辨)』을 중간(重刊)할 때, 이 책이 직접 정구(鄭逑)의 수교(手校)를 거치지 못해 와오(訛誤)가 더러 있음을 밝힌 장현광(張顯光)의 발문(跋文)을 꼭 부간(附刊)해야 한다고 발의하였다. 결국 이 발문(跋文)으로 인해 옥산서원(玉山書院)과 회연서원(檜淵書院)간에 논쟁이 일기 시작해 마침내 도내(道內) 모든 식자들이 그의 의견에 찬성하게 되었다. 그는 특히 역상(曆象)에 밝아 ‘일행도수(日行度數)’와 ‘월행도수(月行度數)’를 계산해 일월(日月)이 상회(相會)하는 수(數)를 구해 19년에 일곱 번 윤달을 두는 ‘치윤법(置潤法)’을 계산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역도(易圖)에 있어서 이제껏 후천도(後天圖)에 중괘원도(重卦圓圖)가 없던 것을 새로이 계발(啓發)해 마침내 이를 완성하였다. 저서로는 『노우문집』6권이 있다. 참고문헌 『노우문집(魯宇文集)』『임여재문집(臨汝齋文集)』 [네이버 지식백과] 정충필 [鄭忠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⑥정사부鄭師傅 가문의 명필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는 흥해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안강 하곡에 들어왔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인조 때 유학자로 학덕이 높아서 유림의 추천으로 1643년에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만년에 안강 하곡霞谷 수재정水哉亭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문묘향사지文廟享祀志, 제왕역년통고帝王歷年通攷, 서악지西岳誌 등의 저술과 문집 쌍봉집이 전한다. 쌍봉의 후손에 뛰어난 문사와 글씨를 잘 쓴 사람이 많다. 손자 사하당四何堂 정연鄭沇1654-1697은 초서를 잘 썼다. 그의 글씨는 순풍에 쪽배가 흘러가듯 거슬림이 없다. ‘후적벽부’는 젊었을 때 쓴 것으로 필력이 있고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5세손 손익孫釴의 사위 정연이 17세에 안강 하곡에서 처가 서백당에 갔을 때 글씨를 쓰기 위한 빈 병풍이 있었다. 혈기 왕성한 정연은 아내에게 먹을 갈게 하여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썼다. 물이 흘러가듯 구름이 일어나듯 하며 연초로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그의 글씨는 용사비등이었다. 땀을 훔치고 쓰기를 마친 그는 장인어른의 꾸중이 두려워 밤중에 하곡으로 줄행랑을 쳤다. 이튿날 글씨 써 줄 사람이 와서 보고 크게 칭찬하며 자신의 경지가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고 하며 돌아갔다. 정연이 쓴 이 병풍은 서백당의 가보로 전승되었다(<양동마을 서백당의 현액><<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 쌍봉의 증손자 매헌梅軒 정욱鄭煜은 문명이 높았고, 쌍봉의 고손자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도 문장과 명필로 유명하였다. 노우는 1773년 아우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과 초시회시를 보러 갔을 때 백부의 부고를 듣고 귀향하고 아우는 응시하여 사마시(생원 진사 선발 소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노우는 청량산, 내연산, 주왕산, 팔공산 등의 이름난 산수를 유람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과묵하고 굳센 성풍의 노우는 사리에 명석하여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옥산서원에서 1782에 태극문변을 중간할 때 장현광 발문 부간 의견을 내어 영남유림이 들고 일어났고, 옥산서원에서 태극문변 이외에 변무록을 편찬하기까지 하였다. 노우는 특히 글씨를 잘 썼다. 그의 글씨는 예각이 분명하고, 선과 점이 뚜렸했다. 운필이 명확하고 그 움직임 속에는 경골(勁骨)이 드러나 있다. 그의 대표 글씨는 쌍봉의 묘비이다. 왕희지의 행서체로 쓴 비문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어서 비체의 전형으로 꼽힌다. 노우는 양동마을의 ‘정충각旌忠閣’의 편액, 비액, 비문, 여강 이씨 서당인 ‘양좌서당良佐書堂’의 글씨를 모두 썼다. 수재정 아래 암반의 ‘천광운영天光雲影’도 노우의 글씨로 추정된다. 매헌 정욱의 현손 학파鶴坡 정관검鄭觀儉1813-1883은 글씨 연찬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왕희지, 조맹부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명필의 필의를 모두 익혀 그 정수를 터득했다. 학파집에 <효미수서첩후지效眉叟書帖後識-미수 허목의 서첩을 보고 임서한 후에 남긴 글>이 있다. 내가 미수의 글씨를 오래전부터 무척 좋아했다. 마침 종가 옛 장서 속에서 약간의 서첩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 미수가 초본草本으로 쓴 것이 있었다. 이 글씨는 모두 붓이 흘러가는 대로 썼으며, 애써 잘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삼엄하고 정대한 시상은 워낙 자연스러워 쉽게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늠연하였다. 향을 태우고 삼가 완미해 보니, 전격은 본연의 모습이고, 결구는 뚜렷이 자획과 어우러졌다. 대현의 심획心畫이 천고에 훤히 비추는 듯했다. 천지에 내달리지만 귀신이 호위해 주고, 산천에 숨었지만 기괴한 요정이 두려워했다. 지사가 이를 보면 생기가 갑절이나 돋고, 나부가 부딪치면 머리털이 저절로 돈두선다. 용과 뱀도 감히 싸우지 못하고, 이리 떼도 감히 엿보지 못한다. 아! 필법이 능히 기수氣數와 유관하고 조화옹을 부리고 시킨 것이 이 경지에 이르렀는가?
제액題額이나 금석의 글씨가 필요한 사람이 찾아와서 정관검의 집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학파의 손자 정석법鄭錫範1859-1906도 글씨를 잘 썼다. 조부에게 배운 그는 세필에 능했다. 종이와 붓, 명필의 필첩이 있어야 하므로 조선시대에 명필은 부자 집안에서 나왔다. 쌍봉의 종가와 성산서사에 많은 필첩이 소장되어 있었다. 왕희지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인각사 일연선사 탑비 탁본과 역대 명필의 서첩, 노우가 쓴 선조 쌍봉 묘비를 탁본해 두고 글씨를 익혔다.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서생들은 수재정 아래의 청석 암반에 글씨를 썼다고 한다. 쌍봉 후손들은 글씨가 가업이자 가풍이었다. 서울대 법대 정종섭 교수도 글씨를 잘 쓰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경주의 명필로 도와陶窩 최남복崔南復과 사류재四留齋 이규일李圭日 등이 있다. -조철제, <정사부 가문의 명필>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 선, 2014.
*태극문변 사진31 태극문변
조선 중기의 학자 정구(鄭逑)가 이언적(李彦迪)·주돈이(周敦頤)·주희(朱熹) 등의 태극에 대한 학설을 모아 그 이론을 정리한 책. 이언적이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曹漢輔)에게 태극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일이 있는데, 그의 손자 이준(李浚)이 이것을 이황(李滉)에게 질정을 구해 이황의 찬탄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뒤 이황의 문인인 정구에게 비평을 청하자, 정구는 이 글이 태극에 대한 학설로는 진수가 된다고 확신하고, 여기에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주희가 육구소(陸九韶)·육구연(陸九淵) 형제와 주고받은 서찰을 첨가해 이 책을 간행한 것이다. 초간본은 화산부(花山府-안동부)에서 나오고 중간본은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나왔으나, 약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이 책은 그것을 보충하고 체재를 바꾸어 개간한 것이다. 첫머리에 이정구(李廷龜)의 서문, 권말에 초간자인 김지남(金止男)과 장현광(張顯光)의 발문과 후지, 고정십일칙(考訂十一則)이 있다. 권수는 태극문변목록·주자태극도, 권상은 답육자미구소서(答陸子美九韶書) 2편, 여주원회서(與朱元晦書)·답육자정구연서(答陸子靜九淵書) 각 1편, 권하는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답망기당제일서(答忘機堂第一書)·답망기당제이서·답망기당제삼서·답망기당제사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는 주돈이의 학설, 권상은 주희와 육구소 형제간의 왕복 서한, 권하는 이언적·손숙돈·조한보 사이의 왕복 서간을 수록해 태극설에 대한 맥락을 분명히 하였다. 이 논변의 주요 부분은,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육구소·육구연 형제가 유가의 정통이 아니고 노자(老子)의 학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반박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육구소·육구연 형제는 이 글이 『태극도설』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해 이것이 주돈이의 설이 아닌 타인의 설임을 강조하면서, 주희가 주석한 내용을 포함시켜 공격하였다. 조한보와 손숙돈이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견해가 비슷한 것에 대한 이언적의 해명이 돋보인다. 이 책의 간행으로 태극설의 체재가 주돈이―주희―이언적으로 이어져 이 학설이 정통임이 밝혀지고, 반면에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손숙돈·조한보의 학설은 이단으로 폄억(貶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극문변 [太極問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⑦효자 양실근[楊實根, 1807-1844] 사진32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청주양공지려 사진33 효자 양실근 정효각
양실근(楊實根)의 본관은 청주. 고조는 양영상(楊永尙)이며, 증조는 양귀천(楊貴天), 조부는 양손업(楊遜業)이다. 아버지는 양우덕(楊遇德)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부인은 영인(令人)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이규일(李圭一)의 딸이며, 후사(後嗣)가 없어 족제(族弟) 양문주(楊文柱)의 아들 양원국(楊元國)으로 뒤를 이었다. 양실근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가난을 이겨 가며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9세의 어린 나이로 5리가 넘는 곳에서 머슴을 살면서 자신의 밥을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또한 병을 구완하고자 약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보람도 없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드리워서 어머니가 소생하여 수십 일을 더 사셨다(䂨指試血絶而復蘇生數十日). 시묘 3년을 살아서 그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조정에서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을 내렸기에 정효각(旌孝閣)을 세워 기리고 있다. 양실근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명주리 창기산에 자좌(子坐) 향으로 있다. 묘소 아래 1939년에 세운 정효각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영천의 충효 이야기』(포은선생숭모사업회, 2009), 『청주양씨대동보(淸州楊氏大同譜)』 -양실근묘비 -[네이버 지식백과] 양실근 [楊實根]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곡면 명주동장, 사창(영천군전도, 1872) 사창[社倉]
시행일시 1451년(문종 1) 정의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 내용 향촌 자체의 민간 빈민 구호기관의 성격을 지녔다. 기 원 사창의 유래는 중국 한나라 선제(宣帝) 때 대사농(大司農) 경수창(耿壽昌)이 변방 고을에 창고를 짓고 곡식을 저장해 곡가를 조절한 상평창(常平倉)을 비롯해, 수나라 문제(文帝) 때의 장손평(張孫平)이 각 지방의 사(社)에 사창을 세워 기근에 대비한 의창과 남송의 주희(朱熹)가 실시한 사창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들을 본받아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 고려시대의 의창·상평창 제도가 실시되고, 조선시대는 이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 사창제도이다. 사창은 태조 때 설치된 의창, 세조 때 설치된 상평창과 함께 조선시대 진휼책의 한 종류로서 의창 경영의 폐단에 따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설치 배경] 사창 설치의 배경은 의창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자곡의 감소를 막자는 데 있었다. 농민에게 환곡 정책의 일환으로 대여했던 의창곡은 이식을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의창은 크게 진대(賑貸, 賑恤이라고도 함.)와 진제(賑濟)로 구분된다. 진대는 궁민에게 곡식을 대여한 뒤 추수 때 원곡만을 거두는 것이고, 진제는 흉년에 기민에게 무료로 식량을 지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민에 대화 지속적인 곡식의 무상 분배는 의창곡의 감소를 가져와 운영의 차질을 가져왔다. 또한 기민이 빌려간 곡식도 당사자가 곤궁한 처지에 이르면 강제로 징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의창곡은 부실을 면할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의창 원곡을 보충하기 위해 연호수미법(煙戶收米法 : 경향을 막론하고 토지와 호구에 따라 일정량의 쌀을 거두어들이는 법)을 실시하거나 군자곡으로 보충하기도 했다. 그 결과 군자곡 마저도 환곡의 성격으로 변질되고, 의창도 진휼 기관이 아니라 식리를 취하는 대여 기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대응책에도 불구하고 원곡은 계속 부족한 반면 진휼 대상자는 오히려 증가되는 등의 모순으로 인해 의창제는 1410년(태종 10)에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사창 설치에 대한 논의는 1418년(세종 10) 정월 호조에서 사창 설치 여부를 논의한 데서부터이다. 즉 호조에서 사창을 촌락에 설치하여 정부에서 원곡을 대부할 것을 거론한 것을 시발로, 충청감사 정인지(鄭麟趾)가 사창을 설치해 의창의 폐단을 극복하자고 했다. 1439년 공조참판 이진(李蓁)이 한·당 및 송·원의 제도를 모방해 의창을 향촌에 설치, 추수기에 25가(家)를 단위로 곡식을 내도록 해 흉년에 대비하자고 한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식자들이 사창의 이식(利殖 : 대여한 뒤 이자를 거두어 들이는 일)을 농민 스스로를 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식을 통해 의창 원곡과 군자곡의 감소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1444년 의정부가 사창법을 건의해 집현전에서 연구하게 했다. 또한, 세종도 직접 집현전직제학 이계전(李季甸)을 시켜 사창설치에 대한 문제를 계속 검토하게 하였다. 이에 이계전은 옛 제도에 의거해 6개항의 <사창사목>을 진언했으나 결국 실시되지는 못했다.
[실 시] 이렇듯 사창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자 1448년 세종은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에게 대구 지방에 사창을 설치, 시험하도록 명했다. 이보흠은 어명에 따라 정부에서 보내준 집현전의 각종 의견을 참고해 대구의 한 읍을 대상으로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시초로 여러 차례 사창의 확대 설치 논의가 있었지만 반론에 부닥쳐 확대 시행되지는 못했다. 당시 논의는 찬반으로 대립했는데, 찬성 측은 사창곡을 민간에서 스스로 저축한 곡물을 이용하므로 애착을 느끼게 되며 무절제하게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 측에서는 의창이 설치되어 있는데 다시 사창을 설치하는 것은 역할의 중복과 번거로움 뿐만 아니라 의창은 관속인 수령이 직접 감독하는 데도 폐단이 발생하는데 사창은 민간인으로 사장(사장)이 청렴한 자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높은 이자를 거두어 들여 민폐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 끝에 1451년(문종 1)에 가서야 경상도 각 고을의 사창 설치 규정이 마련됨에 따라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1461년(세조 7)에 드디어 사창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창의 설치는 한정된 관곡(의창곡)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궁핍한 백성에 대한 진휼을 계속하려는 국가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혁 파] 이렇게 실시된 사창은 원곡을 대여해 이식을 취함으로써 처음은 어느 정도 원곡의 감소를 막을 수 있었으나, 취식에 중점을 둠으로써 점차 진휼 기관이 아닌 국가적 고리대 기관으로 성격이 전락되고 있었다. 또한 사창 원곡이 관리 소홀로 감소되자 사창 반대론이 다시금 재기되었다. 그 결과 1470년(성종 1) 사창은 시행된 지 20여 년 만에 호조의 제의로 혁파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의 사창은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제안한 사창법을 참고하였다. 그의 사창법은 관이 아닌 민간이 주도된 것으로 의창에서 대부분 곡식을 그대로 원곡만을 받는 것과는 달리 가을에 곡식 1석당 이자 2두를 가산해 환납하게 했다. 그리고 이자가 증식되어 원곡의 10배에 이르면 관에서 대부받았던 원곡을 반납하고 이자만으로 운영하게 하는 것이다. 1451년 경상도 지역에 사창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의 사창 운영법은 의창곡을 원곡으로 삼아 지방 수령의 감독 하에 시장을 두고 사창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서리의 직폐를 방지하게 했다. 사장은 병조에서 주관해 구품 산관에 제수했다, 사장의 근무 태도는 수령이 고찰해 감사에 보고한 뒤 서용에 참작하도록 했다. 또한 대출한 곡식에 대한 장부는 사창과 관에 각각 1부씩 두어 서리의 농간을 방지하였다. 사창곡의 이식은 20%를 원칙으로 했고, 풍흉에 따라 10%, 대 기근시에는 면제했으며, 복리로 식리할 수 없었다. 당시 식리가 50%였던 것을 감안하면 사창의 식리는 매우 낮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리를 일삼던 지방의 부호들은 사창이 설치되어 피해를 보게 되었으므로 지방 수령에게 압력을 넣어 사창이 설치되지 못하게 했다.
[부활 논의] 사창제가 폐지된 이후에 사창에 대응할만한 대민 구휼 기관이 없어 16세기 이후 사창제의 부활 논의가 다시금 제기되었다. 즉, 16세기 이후 토지 겸병에 따른 농민의 토지 이탈과 기아 현상의 심화로 농민에 대한 진휼 정책이 다시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환곡에 있어서도 관리 소홀로 인한 원곡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취모십일법(取耗什一法)을 시행함에 따라 의창은 환곡 기능마저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아래 사창제의 부활 논의는 1510년(중종 5) 함경도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구황방략(救荒方略)을 제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창이 혁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지방의 사족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향약이 실시된 16세기 이후에는 향약의 4덕목 가운데 특히 환난상휼을 강조하면서 향촌에서 소농민에 대한 부호들의 불법적인 침탈을 억압하고 사창을 통해 구휼책을 실시하려고 했다. 이것은 사창을 향약과 연결시켜 향촌 통제의 방편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일종의 자치적 향촌 진대제로서 향민의 기근을 막아 향촌 공동체를 안정시키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뒤 1660년(현종 1)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수·당의 제도를 본받아 기민을 구제할 것 등을 제시했으며, 이어 부호군 이유태(李惟泰), 공조좌랑 이상(李翔)도 풍속을 교정하고 저축을 늘릴 방법으로 사창 실시를 역설했다. 이러한 사창제 재실시에 대한 의견이 계속 논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창제는 실시되지 못했다. 그리고 영·정조 이후 환곡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이정책(釐整策)을 제시하였는데, 평적제(平糴制)와 사창제가 그것이다. 전자는 환곡제를 폐지해 상평창 제도로 개편하되 환모수입(還耗收入 : 환곡의 대여 곡식을 거둬들일 때 운반시 유출되는 양과 돌물의 해에 의한 소모량을 계산해 더 거둬들이는 수입)에 대한 급대 방안으로 구전(口錢)이나 호포 등 별도의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다. 후자는 환곡제를 혁파해 사창제로 개편한 뒤 급대 방안으로 정부에서 출자해 아문둔전(衙門屯田)이나 영문둔전(營門屯田) 등을 설치함으로써 세의 수입으로 환모 수입을 대신하자는 방안이다. 이것은 환곡을 구휼·진대 기능과 영리·부세 기능으로 분리시켜 소농민 경제의 안정 도모를 위한 방편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뒤 순조 때도 환곡의 이정책 문제는 계속 논의되었으며, 정부의 대책도 두 가지로 제시되었다. 즉, 사창제를 재실시할 것과 환곡제를 보완하자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1804년(순조 4)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제안한 것으로 주자의 사창법과 우리 나라의 환곡제를 병행해 취모하자는 것이고, 후자는 이듬해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환곡의 불균형과 운영의 불합리를 보완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듯 사창제의 부활 논의가 끊임없이 계속 거론되었는데도 시행을 보지 못한 것은 지방 관리들과 토착 서리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앙 관료들은 다수가 사창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지방 관아에서는 감영·군현을 막론하고 그 재정의 대부분을 환곡에 의존했다. 또 환모 수입을 빙자한 수탈로 부를 누리는 지방 이서들도 사창이 실행되면 그만큼 수입이 감소될 뿐 아니라, 생활 기반마저 박탈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극력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환곡제에 대한 문제가 심화되어 철종 때에 이르러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 항쟁이 유발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해, 환곡제의 대변통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즉, 환곡제를 폐지해 모(耗)를 징수하는 새로운 상평·사창제를 실시하자는 것과 환곡제를 폐지하는 대신 호(戶)·결(結)·이(里) 단위로 새로운 세를 만들자는 두 대안이 제시되었다. 좌의정 조두순(趙斗淳)은 사창제 실시보다는 전결에 세를 부과하는 파환귀결법(罷還歸結法)을 제안했다. 이것은 환곡제의 모곡 수입만큼을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時起田]에다 일정액의 세를 부과하자는 것으로서 삼정이정책의 하나로 반포되기에 이르렀다. 이 정책은 정부와 농민의 입장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으며, 환곡 분급의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지방 이서들의 반대와 지역·계층간의 불균형문제로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대원군 집권기에도 계속되었고, 환곡의 이정책과 정부 재정의 확보 방법과 함께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등장했다. 뒤이어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은 환곡 복구를 지시해 다음해는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사창제로 운영되었다. 뒤이어 1866년에는 조두순이 마련한 <사창절목>을 정부안으로 경기·삼남·해서 등 5도에 실시했는데, 이를 사환제(社還制)라 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갑오경장 때는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이 탁지부령 제3호로 <사환조례>를 제정해 종래 환곡에서의 취모보용(取耗補用) 기능을 없애고 진대 기능만으로 돌려 운영을 향촌민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창제 실시와 <사환조례>는 그 뒤 근대적 면제(面制)와 금융조합제를 실시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창 [社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70년대 명주동장 광주 이씨 시조 이당 묘 증 둔촌(최원도) ④용재총화 이집 기사 慵齋叢話(성현成俔, 1525) 사진39 최원도 시비
둔촌선생(遁村先生 이집(李集))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 영웅호걸이었다. 세상일을 비방하다가 말이 신돈(辛旽)에게 미쳤다. 신돈이 몰래 해치려고 하자, 선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갔다. 동년(同年) 최원도(崔元道)가 영천(永川)에 산단 말을 듣고 드디어 그를 찾아가니, 최원도가 매우 두텁게 접대하고 3년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 선생의 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최원도는 빈렴(殯斂)의 모든 일을 자기 아비와 똑같이 하여 그 어머니 무덤 옆에 장례를 지내게 하고 시를 지어주면서 말하기를,
세상의 어지러움을 슬퍼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구나 / 慷慨傷時淚滿襟 나그네의 효도와 정성은 저 세상에까지 이르도다 / 流離孝懇達幽陰 한산은 아득히 멀어 구름과 연기로 가로막히고 / 漢山迢遞雲煙阻 나현은 돌고 돌아 풀과 나무가 무성하도다 / 蘿峴盤回草樹深 하늘이 쌍마의 갈기의 선후를 점침과 같으니 / 天占後先雙馬鬛 누가 군과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리오 / 誰知君我兩人心 원하건대 세세에 길이 이와 같이 하여 / 願焉世世長如此 모름지기 우리 우정 굳게 굳게 하리라 / 須使交情利斷金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모두 그 신의를 칭송하고 있다. 나현은 어머니를 장례지낸 곳이데, 지세가 도내에서 으뜸이었다. 그뒤에 최씨는 쇠(衰)하고 이씨는 귀성(貴盛)해지자 사람들은, “객이 주기(主氣)를 빼앗았다.” 하였다. -용재총화(성현)/시화총림(홍만종)에 다시 실림
當今門閥之盛。廣州李氏爲最。其次莫如我成氏。廣李自遁村以後漸大。遁村之子 參議之直。參議之子三。曰長孫舍人。曰仁孫右議政。曰禮孫觀察使。舍人之子克圭今爲判決事。議政有五子。曰克培領議政廣陵府院君。曰克堪刑曹判書廣城君。曰克增廣川君。曰克墩吏曹判書廣原君。曰克均知中樞。皆階一品。四人以功封君。廣城雖早卒。其子世佐今廣陽君。文子文孫。羅列崇班。相繼不絶 -용재총화 권2 둔촌에게 줌 贈遁村
최원도崔元道
慷慨當年(傷時)淚滿襟。신돈의 횡포를 비분강개하여 소매 가득 눈물 적셨고, 流離孝懇達幽陰。부친 업고 떠돌던 간절한 효심이 무덤에 까지 이르렀네. 漢山迢遞岡巒(雲煙)阻。한산(광주)은 멀고멀어 첩첩 산이 길을 막고, 羅峴盤回草樹深。나현이 굽이굽이 서리 쳐 초목이 우거졌네. 天占後先雙馬鬣。하늘이 앞뒤의 쌍무덤을 점지하였고, 誰知君我兩人心。누가 그대와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리오. 願言世世長如此。바라건대 대대로 길이 이와 같아서, 須使交情利斷金。사귐의 인정이 쇠를 끊을 만치 무디지 않도록 하세.
*二人同心 利斷金(주역 계사전 상)
최공은 영천 사람인데 선생과 과거시험 동기이다. 선생이 역적 신돈의 비위를 거슬러 화가 미칠지 모르게 되자 가족이 도망을 하여 최공의 집에 숨었는데 이듬해 선생의 아버지가 죽자 공이 그 부모와 같이 염하고 또 선영 곁에 장사지내게 하고 이 시를 지어서 선생에게 주었다. 뒤에 최씨 집안에서 그 무덤을 파내자고 의논하자 공이 “나와 이 아무개는 형제의 의리가 있다. 우정이 골육에 깊으니 그 장례를 이미 허락하고서 무덤을 파내려고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여 이장 논의가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이씨 후손이 대대로 번영하고 현달하여 영남에서 명당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崔公永川人。與先生同年。先生忤逆旽。禍將不測。擧室逃遁。匿崔公家。翌年先生父卒。公備殯斂事一如其親。又令葬其先塋傍。作此詩以贈之。後崔之諸宗人議掘其墳。公曰。我與李某。義有兄弟。情深骨肉。旣許其葬。又圖其掘。吾不忍爲。其議遂止。李後世世榮顯。因爲南中名墓焉。 -遁村雜詠附錄 연아총 둔굴 당금문벌지성 광주이씨위최 성현, 용재총화 야자 형국(也字形局) 이당 묘 무인석 영천이씨묘 ①둔촌 이집 연보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충숙왕 14 1327 정묘 泰定4 1 태어나다. 충목왕 3 1347 정해 至正7 21 진사시에 합격하다. 공민왕 4 1355 을미 至正15 29 金九容ㆍ崔元道ㆍ崔散騎ㆍ任深父 등과 함께 문과 병과에 합격하다. ~ ~ ~ ~ ~ ~ ~ 寧州(天安)의 원이 되다. 詩 〈寄寧州琴李兩先生〉을 짓다. 공민왕 12 1363 계묘 至正23 37 개성의 圃隱 집을 방문하고 시를 짓다. 공민왕 17 1368 무신 洪武1 42 가을, 辛旽을 논죄한 일로 화를 입게 되자, 부친을 업고 경상도 永川에 피신하여 崔元道 집에 우거하다. ○ 부친상을 당하다. 영천 남쪽 蘿峴에 장사 지내다. 공민왕 20 1371 신해 洪武4 45 겨울, 신돈이 축출되자 개성으로 돌아와 龍首山 아래에 기거하다. 이름을 ‘集’으로 고치고 자를 浩然, 호를 遁村으로 삼다. 공민왕 23 1374 갑인 洪武7 48 여름, 경상도 안렴사 田祿生을 따라 合浦에 출진하다. 詩 〈固城感懷〉 2수를 짓다. ~ ~ ~ ~ ~ ~ ~ 判典校寺事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다. 우왕 6 1380 계축 洪武13 54 驪州 川寧에 기거하다. 포은과 편지를 주고받다. 우왕 12 1386 병인 洪武19 60 廣州에 기거하다. 詩 〈贈鄭三峯〉을 짓다. ○ 개성에 가다. 詩 〈冬日卽事〉를 짓다. ○ 川寧에 돌아가다. 우왕 13 1387 정묘 洪武20 61 卒하다. 조선조 ~ ~ ~ ~ ~ -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다. 태종 10 1410 경인 永樂8 - 아들 李之直이 문집을 간행하다.(河崙의 序) 문종 1 1451 신미 景泰2 - 손자 李仁孫이 문집을 개간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5 - 후손 李如圭가 문집을 개간하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8 - 廣州 龜巖書院에 享祀되다.(1697년 賜額) 숙종 12 1686 병인 康熙25 - 10대손 李厚遠이 문집을 개간하다. 헌종 12 1846 병오 道光26 - 후손 李鎭翰이 문집을 개간하다. - - 1916 병진 - - - 후손 李泰會와 李秉爀이 각각 문집을 개간하다.
②최원도(崔元道) 사진37 둔촌선생유적비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유학자로 자는 사상(四常)이고, 호는 천곡(泉谷)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경상북도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부는 정헌대부(正憲大夫) 판전의시사(判典醫侍事)를 지낸 최유진(崔有珍)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관직은 공민왕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평소 문장으로 이름난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837)과 교분이 두터웠다. 1368년(공민왕 17)에 이집은 개성(開城) 용수산(龍首山) 밑에 살고 있었는데, 승려 신돈(辛旽)의 행패에 대하여 비판한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자 병든 부 이당(李唐)을 모시고 피신하여 영천의 최원도에게 갔다. 최원도는 이집과 그의 부를 집안에 몰래 숨겨주었다. 그는 가족에게도 이들을 숨겨준 것을 철저히 비밀로 하였으며, 이듬해인 1369년(공민왕 18)에 이당이 죽자 자신의 장지(葬地)로 예정했던 나현(蘿峴: 지금의 영천 북안면(北安面) 도유동(道有洞))의 모친 산소 인근에 예를 다하여 장사지냈다. 이 때문에 광주이씨(廣州李氏) 둔촌공파(遁村公派)는 이당의 시제(時祭) 때마다 최원도와 그 모친에게도 제사를 드리는 관습을 갖게 되었다. 후에 고려가 망하자 세상에 나가지 않고 구룡산(九龍山) 밑 천곡동(泉谷洞)에 은거하였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음촌 김약시(金若時)·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관가정(觀稼亭) 최청(崔淸)·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등의 동지와 함께 봄가을로 고려 태조와 공민왕에게 제사를 드렸다. 또 우제(迂齋) 이취(李就), 서파(西坡) 이안유(李安柔), 태재(泰齋) 류방선(柳方善) 등의 벗들과 더불어 시가(詩歌)를 읊조렸다. 태조 이성계가 대사간(大司諫)의 벼슬을 내려 수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고려에 신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의 선비들과 견주어질 정도로 칭송되었다. [참고문헌] 담양삼강록, 遁村雜詠, 용재총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e-kyujanggak.snu.ac.kr/)
③이집과 최원도의 우정 사진38 연아총
선비들은 의리(義理)를 중시한다. 오늘은 여기에 고려말기 이집과 최원도의 각별한 우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집과 최원도는 진사시 동년(同年ㆍ동기생)이다. 이집은 광주이씨의 중시조로서 원명은 이원령(李元齡)이었다. 그는 강직한 선비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1368년(공민왕 17)에 그는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권승(權僧) 신돈(辛旽)을 공격하고, 또 한 동리에 사는 신돈의 문객(門客) 채판서(蔡判書) 앞에서 신돈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원령은 아버지를 업고 경상도 영천(永川)에 사는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갔다. 최원도라면 자기를 숨겨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작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원령은 잠깐 행낭채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최원도가 나와 “이 자가 재앙을 싣고 와서 내게 넘기려 한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쫓아내고 행랑채에 불을 질러버렸다. 하는 수 없이 이원령은 그 집에서 5리쯤 떨어진 숲 속에 숨어서 쉬고 있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최원도가 나타나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4년 동안 낮에는 다락에, 밤에는 골방에 숨어서 살게 했다. 그리고 최원도는 미친 척 했다. 한 끼에 밥을 3인분씩이나 먹고, 대소변을 방 안에서 보는 등 이상한 짓을 했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우선 부인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제비(연아 燕娥)라는 계집종을 시켜 엿보게 했다. 그랬더니 수상한 사람들이 다락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최원도는 부인은 설득했지만 제비가 걸렸다. 이를 눈치 챈 제비는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결하고 말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신돈은 영천관아에 관문(關文)을 보내 빨리 범인을 잡아 올리라 했다. 그러나 고을에서는 최원도가 이원령을 쫓아낸 명백한 사실을 고해 무사했다. 최원도는 이원령의 아버지를 친부모처럼 봉양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죽자 친상처럼 장사를 치르고 어머니 묘소가 있는 고을 남쪽 나현(蘿峴)에 제비와 함께 위 아래로 묻어 주었다. 이원령은 1371년(공민왕 20) 6월에 신돈이 복주(伏誅)되자 개경 현화리(玄化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죽었다가 살아왔으니 이름과 자·호를 바꾸고자 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집의(集義)에서 생긴다”(<孟子> 公孫丑章)는 구절을 따 이름을 “集”, 자를 “浩然”으로 바꾸고, 숨어 산 괴로움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를 “遁村(둔촌)”이라 했다.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까지 지냈다. 그러나 현세에 뜻이 없어 여주(驪州) 천령현(川寧縣) 강가에 은거하다가 1387년(우왕 13)에 죽었다. 최원도는 이집과의 우의(友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제비는 주인을 위해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버렸다. 얼마나 갸륵한 의리인가? -<<한국일보>> [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⑤정몽주 간찰 答遁村書 圃隱 七月二十一日。忽奉佳章。讀之再三。乃知超然於物外者。其出語亦能灑然非俗人之所可及也。驪江。吾所樂也。亦先生之所知。不圖先生之先吾着鞭也。南望不覺爲之悵然。況世間新事。歲異而月不同矣。近聞若齋廬墓。幸今官閑。欲與陶隱匹馬往弔。果得如願。川寧當作一夜話也。歲受新尖之惠。敢不銘感。僕自六月。患痢疾將三十日矣。比來少愈。幸亦照及。餘齎歸時。秋涼。千萬珍重。只此。鄭夢周頓首。 7월 21일 홀연 그대의 아름다운 글월을 받들고 읽기를 거듭하고서는 마침내, 외물을 초월하여 있는 사람은 말을 하는 것도 쇄락하여 속인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강(여주)은 제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그 사실은 선생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이 저보다 먼저 말에 채찍을 대셧 떠나시다니요. 남쪽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서글퍼집니다. 하물며 세간에 벌어지는 일들이 해에 따라 다르고 달에 따라 같지 않음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최근에 듣자니 약재(김구용)가 여묘살이를 한다는군요. 다행히 지금은 관직의 직무가 한가하니, 도은(이숭인)과 함께 필마로 가서 조문하고 싶습니다만, 과연 소원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천녕에서 마땅히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겠습니다. 해마다 참신한 시를 내려주시는 은혜를 입고 있으니, 어찌 가슴에 새겨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6월부터 이질을 앓아 30일이 되어갑니다만, 요즈음 조금 나았습니다. 부디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귀거래 길에 오른 다음에 말씀 올리겠습니다. 가을 기운이 서늘합니다. 부디 진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적습니다. 정몽주는 머리를 조아립니다. -둔촌잡영 부록/번역(심경호, <<간찰>>)
⑥둔촌기(遁村記) 사진40 서울 둔촌동 둔굴
광주(廣州)의 이씨(李氏)가 《맹자(孟子)》에 나오는 ‘집의(集義)’의 집(集) 자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고,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호연(浩然)을 취하여 자(字)로 삼았다. 이에 성산(星山 성주(星州)의 옛 이름)의 이자안(李子安 이숭인(李崇仁))이 그 뜻을 해설하는 글을 짓고, 내가 또 그 뒤에다 한마디 말을 붙여서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호연이 또 말하기를, “나의 이름과 자에 대해서는 이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친 들판으로 도망쳐 숨어서 취성(鷲城)의 패거리가 꾸며 낸 화(禍)를 피하였는데, 그때 온갖 고생을 겪은 정상으로 말하면, 아무리 흉악하고 잔인한 자라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서는 안색이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나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때 도망쳐 숨은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숙손(叔孫)은 적군을 이기고 나서 적장(敵將)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이것은 대개 그 기쁨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식은 자기의 분신인데도 오히려 그렇게 이름을 붙여서 자신의 기쁨을 표시했는데, 하물며 나의 이 한 몸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이미 이름과 자를 모두 고쳤고 보면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쳐 숨은 것[遁]이 나에게 덕을 끼쳐 주었으니, 장차 이 몸이 다할 때까지 나로서는 잊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처하는 곳을 둔촌(遁村)이라고 이름 지었으니, 이는 도망쳐 숨은 것을 덕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위험한 상황을 빠져나온 뒤에도 그때의 위험을 잊지 않으려는 뜻을 붙여 스스로 노력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둔(遁)이라는 것이 지언(知言)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내 나름대로는 그 뜻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풀어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직 선생께서는 가엾고 애달프게 여기시어, 내가 자꾸만 귀찮게 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추(鄒)나라의 글에 대해서 그토록 음미하며 즐기고 있으니, 성인의 도를 구해 본다고 하는 측면에서 볼 때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나 역시 다른 글에서 찾을 것 없이 《맹자》의 글을 통해서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볼까 한다. 어떤 이가 “순(舜)이 천자이고 고요(皐陶)가 법관일 때, 고수(瞽瞍 순(舜)의 부친)가 살인을 했다면, 순이 어떻게 했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맹자가 대답하기를 “몰래 업고 도망쳐 바닷가에 살면서 흔쾌히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가정하여 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때의 처신은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가 화를 당한 것은 비록 그대 자신이 초래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늙으신 어버이를 등에 업고 어린 자식의 손을 잡아끌면서 낮에는 무성한 풀숲에 몸을 숨기고 밤에는 비와 이슬을 무릅쓰고서 험한 산골짜기를 헤맸을 것이며, 그런 와중에서도 추격하는 자가 혹시 뒤를 밟아 오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숨을 죽이고 몸을 움츠리면서 처자들이 감히 숨소리조차도 내지 못하도록 경계시켰을 것이니, 도망쳐 숨은 그 정상이 또한 참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마치 무서운 꿈을 꾸고 나서 계속 겁에 질려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마땅할 것인데도, 바야흐로 의기양양해하면서 안으로는 자기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는 듯하고 밖으로는 남에게 자랑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그대야말로 결코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는 필시 자신의 내부에 확고한 주관이 서 있어서 가능한 것일 테니, 그대의 명성은 참으로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맹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 그의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게 하여, 그동안 잘 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잘 하게끔 만들어 준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대야말로 육신이 굶주림에 시달렸음은 물론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질 않았으니,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 그대에게 큰 사명을 내려 주어 반드시 이룰 수 있게 해 주리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그대가 둔촌에서 계속 살다가 몸을 마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밖에 강산(江山)과 풍물(風物)의 아름다움이나 주경야독하는 즐거움 같은 것은 그대 자신이 실컷 누리고 있을 터이니,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겠다. 창룡(蒼龍) 정사년(1377, 우왕3) 9월에 짓다. -목은문고 권1
[주D-001]광주(廣州)의 …… 삼았다 : 그의 본명은 원령(元齡)이었는데, 공민왕(恭愍王) 17년(1368)에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천(永川)으로 도망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뒤에,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다시 돌아와서 새 이름과 자를 지은 것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중에 “그 기운은 의리가 안에 축적된 결과 나오는 것이다.[是集義所生者]”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취성(鷲城) : 신돈(辛旽)을 가리킨다. 경남 창녕군(昌寧郡) 영산(靈山)의 옛 이름이 취성인데, 신돈이 영산 신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3]숙손(叔孫)은 …… 것이었습니다 : 노(魯)나라 숙손득신(叔孫得臣)이 장적(長狄)의 군주인 교여(僑如)를 사로잡아 죽여 그 머리를 자구문(子駒門) 가에 묻고는 자기 아들 선백(宣伯)을 교여(僑如)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11년 조에 나오는데, 그 주(註)에 “이는 자신의 공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以旌其功]”고 하였다. [주D-004]둔(遁)이라는 …… 합니다만 : 둔(遁)이라는 글자가 원래 《맹자》에 의하면 부정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맹자의 제자 공손추(公孫丑)가 “남이 하는 말을 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何謂知言]” 하고 묻자, 맹자가 편파적인 말[詖辭]과 방탕한 말[淫辭]과 삿된 말[邪辭]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에, “도망쳐 숨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떤 궁지에 몰려 있는지를 알 수 있다.[遁辭知其所窮]”고 대답한 말이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주D-005]추(鄒)나라의 글 : 추나라가 맹자의 고향이기 때문에 《맹자》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6]성인의 도를 구해 본다 :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송왕훈서(送王塤序)〉 끝 부분에 “성인의 도를 구해 보려면, 반드시 《맹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求觀聖人之道 必自孟子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어떤 이가 …… 하였다 : 어떤 이는 맹자의 제자 도응(桃應)인데, 이에 대한 내용이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온다. 이집(李集)이 신돈(辛旽)의 화를 피해 광주목(廣州牧)의 향리(鄕吏)로 있던 부친 이당(李唐)을 등에 업고서 영천(永川)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도망쳐 숨었으므로, 목은이 고수(瞽瞍)의 이야기를 꺼내어 말한 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6 廣州牧 辨誤》 [주D-008]하늘이 …… 준다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9]창룡(蒼龍) : 태세(太歲) 즉 간지(干支)를 뜻하는 말인데, 이때는 원(元)나라가 이미 망한 뒤로,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굳이 피한 것이 주목된다.
*둔굴[遁窟] 위치: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강동구 둔촌동에 있던 마을로서, 둔촌동 뒤 일자산(一字山) 서남쪽에 있는 바위로 된 굴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고려 말 이집(李集)이 신돈(辛旽)의 박해를 피하여 이곳(*둔굴이 아니라 영천 최원도의 집)에 은거하며 호를 둔촌(遁村)이라 하였으므로 둔굴로 불리었다. → 둔촌동 [마을] 출처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둔굴 [遁窟]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⑦이호연이 합포의 막료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한 서문 〔送李浩然赴合浦幕序〕 이 문충공(李文忠公, 益齋 李齊賢 1287년(충렬왕 14) ~ 1367년(공민왕 16))과 안 문경공(安文景公, 安輔: 1302년(충렬왕 28)∼1357년(공민왕 6). )은 도덕과 문장으로 한 세상의 사표(師表)가 된 분들이다. 그리고 사람을 밝게 알아보는 면이나 인재를 급급하게 구하는 면에 있어서는 비록 옛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따라가지 못할 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걸스러운 준재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는데, 두 분 공이 특히 애지중지한 제자는 광주(廣州)의 이군(李君)이었다. 내가 이군의 명성을 들은 지가 꽤나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서로 만나서 정답게 이야기해 볼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서사(筮仕)하러 경도(京都)에 와서 목은(牧隱) 선생의 문하에서 노닐 적에, 하루는 어떤 객이 선생을 뵈러 찾아왔기에, 그의 용모를 보니 풀 죽은 기색이 전혀 없이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말하는 것을 들어보아도 사람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점이 있었는데, 선생이 그를 보고는 예모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기이하게 여겨서 좌우에 물어보았더니, 그가 바로 광주의 이군이었다. 이로부터 우리 두 사람이 거의 떨어지는 때가 없이 날마다 강습과 토론을 일삼곤 하였는데, 간혹 인물의 가부(可否)를 논하다가 드높은 기개로 세상을 초월한 선비를 만나기라도 하면 손을 이마에 얹고서 찬탄하였으며, 용렬하고 진부한 자에 대해서는 침을 뱉으며 매도하여 마지않았으니, 이는 대개 우리들이 서로 고고하게 절의(節義)로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무신년(1368, 공민왕17) 가을에 이군이 역적 신돈(辛旽)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자, 신돈의 문객 중에 위세를 부리는 자가 이군을 예측할 수 없는 화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이에 이군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노친을 등에 업고 처자를 이끌고서 남쪽 경상도로 도주하여 궁벽하고 험준한 숲 속의 계곡 사이에 숨어 살면서 사슴과 한 무리가 되어 거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세 부리던 자가 죽었고, 또 그로부터 4년 뒤인 신해년(1371)에 신돈도 복주(伏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이군이 경상도에서 돌아와서 현화리(玄化里)의 집으로 나를 찾아왔기에, 내가 그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묻기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어찌 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사람이 하루를 보내기도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4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군의 용모나 말투를 보면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니, 이는 어찌 된 일인가.”라고 하였더니, 그는 단지 한번 웃고는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날 경도에 들어와서 벗들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흡사 꿈속에 있다가 깨어난 것과 같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으니, 이는 실로 나의 몸이 다시 태어났다고 말할 만하다. 몸은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인데, 내 몸이 지금 다시 태어났으니, 이름만 예전대로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나의 이름이 원령(元齡)이었는데, 지금 고쳐서 집(集)이라 하고 자(字)는 호연(浩然)이라고 하려 한다. 그대가 나의 이름과 자에 대한 글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 청을 수락하였으나, 바로 짓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군이 금년 여름에 재상 전 선생(田先生: 전녹생)의 부름을 받고 합포(合浦)로 가려 할 즈음에 나를 보고는 말하기를 “지금 지어 주면 좋겠다.”라고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이 이름과 자를 지을 때에는 성현(聖賢)의 격언을 뽑아서 쓰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데, 객관적으로 그 실상을 고찰해 보면 꼭 거기에 해당된다고는 할 수가 없다. 맹자(孟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논하면서 “그 기운은 의리(義理)가 안에 축적된 결과 나오는 것이다.〔是集義所生者〕”라고 하였다. 그런데 군의 경우는 이 기운을 평소 무사(無事)한 때에 길러 두었다가 변고를 당하여 어렵고 힘든 날에 실제로 그것을 징험하였다. 또 일찍이 문충공(文忠公:이제현)과 문경공(文景公: 안보)의 강론을 듣고 그 기운을 기르는 면에서 깊이 터득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시험 삼아 군을 위해 내가 들은 바를 읊어보겠다. 대저 천지의 변화가 유행(流行)하면서 음양의 정기가 엉기고 합쳐서 사람이 태어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천지의 기운이다. 그러므로 그 기운의 속성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다.〔其爲氣也 至大至剛〕 지극히 큰 까닭에 천지간의 어디에 이르더라도 모두 준칙(準則)이 되는 것이요〔放諸天地而準〕, 지극히 강한 까닭에 금석(金石)에 부딪쳐도 그것을 관통하는 것이다. 그 체성(體性)은 본래 자체적으로 호연(浩然)한데, 다만 사람이 얼마나 잘 기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 기운을 기르는 것을 법도에 맞게 하면 나의 기운은 곧 천지의 그것이 된다. 그 기운이 홀쭉해져서 충만하지 못한 것은 기르는 것을 법도에 맞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법도에 맞게 한다는 것은 의리를 안에 축적하는 것을 말하는데, 의리를 안에 축적한다는 것은 일마다 모두 의리에 합치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리는 내 안에 원래 들어 있는 것으로서 잠시라도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행위가 이것과 반대가 된다면 내가 어떻게 만족할 수가 있겠는가.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속에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운이 풀 죽은 것이다. 비록 동정어묵(動靜語默)을 한 번 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운 생각이 조금도 없이 심광체반(心廣體胖)해진다면, 이른바 호연하다고 하는 그 기운이 가득 차 흘러넘쳐서 어디에 있든 간에 모두 발현되어 이루 다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맹자가 호연지기는 ‘의리가 안에 축적된 결과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용모를 보면 분명히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대절(大節)과 관련된 일을 당했을 때에는 뜻이 확고하여 동요시킬 수 없어서, 도거(刀鉅)와 정확(鼎鑊)도 그 위(威)를 잃고, 헌면(軒冕)과 규조(珪組)도 그 귀(貴)를 잃고, 천사(千駟)와 만종(萬鍾)도 그 부(富)를 잃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내 안에 있는 의리 정신이 저들에게 있는 것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아, 사람이 이런 경지에 이른다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군의 평일의 행동은 우선 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난리를 겪은 4년의 그 세월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군은 아무 어려움 없이 처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이 호연지기를 길러서 그렇게 된 것이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설이 과연 성현의 취지에 어긋나는 점이 없을는지 어떨는지. 내가 두 분 공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기만 하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군이 이번에 가서 전 선생을 뵈올 것이니, 한가할 때에 나의 설을 가지고 선생에게 한마디 말씀을 청하여 나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실로 호연에게 바라는 나의 간절한 심정이다. 그리고 유악(帷幄) 안에서 참모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발한 작전 계획을 세워 승리를 거두게 하는 것이야 호연이 워낙 잘하는 일에 속하는데, 더군다나 전 선생이 주장(主將)으로 계시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호연이여, 잘 다녀오시라.” -이숭인, 도은집 제4권
[주D-001]서사(筮仕) : 처음으로 관직을 얻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필만(畢萬)이 시초점(蓍草占)을 쳐서 진(晉)나라에 출사(出仕)하는 데 따른 길흉을 알아 본 결과, 둔괘(屯卦)가 비괘(比卦)로 변한다는 둔지비(屯之比)의 점사(占辭)를 얻었는데, 신료(申廖)가 이를 풀이해 보고는 길(吉)하다고 판정을 내린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閔公元年》 [주D-002]무신년 …… 복주(伏誅)되었다 : 이집(李集)이 신돈(辛旽)을 논죄한 일로 화를 입게 되자 광주목(廣州牧)의 향리(鄕吏)로 있던 부친 이당(李唐)을 등에 업고서 영천(永川)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도망쳐 숨었다가, 부친상을 당하자 영천 남쪽 나현(蘿峴)에 장사 지냈으며, 신돈이 패망한 그해 겨울에 개경으로 돌아와서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기거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輯 遁村雜詠》 《新增東國輿地勝覽 卷6 廣州牧 辨誤》 [주D-003]금년 …… 받고 : 1374년(공민왕23) 여름에 전녹생(田祿生)이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부임하면서 이집을 종사관(從事官)에 임명한 것을 말한다. [주D-004]그 …… 것이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주D-005]그 …… 것이다 : 《맹자》 〈공손추 상〉의 “그 기운은 의리가 안에 축적된 결과 나오는 것이다.〔是集義所生者〕” 앞에 “이 기운의 속성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니, 정직한 도의(道義)로 길러 가면서 해치는 일이 없게 하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는 것이다. 이 기운은 의와 도에 배합이 되는 것이니, 이 기운이 없으면 기가 죽어서 도의를 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라는 말이 있다. [주D-006]천지간의 …… 것이요 : 《예기》 〈제의(祭義)〉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을 요약한 것이다. [주D-007]심광체반(心廣體胖) : 마음속이 널찍하게 관대해지고 신체가 여유 있게 펴진다는 뜻으로,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군자의 모습을 표현한 말인데,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6장에 나온다.
⑧광릉이씨세계 廣陵李氏世系 사진41 명주초등학교 소풍 광릉(1974)
唐-集-之直-仁孫-克堪-世佑-滋-若氷-洪男 成慵齋著叢話。有曰東方族氏之盛。莫如廣陵李氏。朴訥齋撰碣銘。畧曰三槐讓尊。萬石羞稱。眞宲語也。 八世祖諱唐。司馬。後贈吏曹判書。夫人仁華李氏。 七世祖諱集。初名元齡。元泰定丁卯生。至正七年高麗忠穆王三秊丁亥。登科。倜儻慷慨。以文章志節鳴于世。游李文忠,安文景二公門下。與圃隱,牧隱,陶隱友善。恭愍王戊申。忤辛旽門客。將不測。負父逃難。寓永川同年崔元道家。旽誅乃出。改名集。字浩然。號遁村。牧隱有遁村記。陶隱著浩然字說。皇明洪武丁卯卒。享年六十一。官至奉順大夫判典校寺事。後贈左贊成。有詩稿行于世。夫人貞和宅主郢州黃氏。碩範之女。有子三人。俱文科。長之直。次之剛。左參贊。次之柔。牧使。 -汲古遺稿世系 ⑨시조묘갈개수음기 始祖墓碣改豎陰記 사진42 ‘당금문벌지성 광주이씨위최’ 용재총화 사진43 이당 묘 지형도 사진44 광주 이씨 시조묘소 묘각 연혁
國朝人物之盛。廣李爲最。公其始祖也。公諱唐。在高麗。起州吏爲生員。娶仁華李氏。生五子皆登科。曰逢。曰集是爲遁村先生。曰希齡,自齡。曰省。遁村爾德文章。鳴于麗季。忤賊僧辛旽。恭愍戊申。負公逃避于永川同年崔元道家。明年己酉公歿。元道莅喪。一如其親。葬于其母墓下。卽郡南蘿峴子坐之原。遁村之後益昌大。三子之直參議。有淸名直節。之剛左參贊。之柔牧使。參議三子。長孫舍人。仁孫右議政。禮孫參判。議政五子又登科。克培領議政。克堪判書。克增判中樞。克墩左贊成。克均左議政。七世孫浚慶。九世孫德馨。皆爲領相。有周召之望。參議克圭。參判克基。大司憲世弼。判中樞世佐。判書潤慶。都承旨世匡。觀察使世佑,世貞。僉樞世傑。參判英賢,重慶。判决事時茂。承旨德悅。參判廷立。參議潤雨。中樞必榮。觀察使如璜。幷以文學顯。其餘擢科名躋膴仕者。殆不可勝載。判書斗信亦自齡之曾孫也。七世孫宜慶守淸道。爲之立石。實隆慶庚午歲也。年久踣折。方謀改爲。會外後孫沈梓觀察是道。命工立碣。蓋灘叟先生延慶。卽公七世孫。而觀察公卽灘叟之五世孫也。嗚呼。公之歿于今五周己酉。爲三百年。而墓表重新。豈亦有數耶。夫人墓在廣州而失其所。英宗甲戌。後孫昌夏龍翰。尋得於廣州鷲洞丑坐之原。 -歸巖先生文集卷之八 |
첫댓글 영천 북안에 이렇게 유서 깊은 곳이 있었군요. 고인돌도 완벽하고. 전 답사 사진 잘 보았습니다.
안녕하시지요? 유선생님 답사 때 뵙겠습니다. ^^
오는 9월 답사가 기대됩니다.
안녕하세요 이선생님, 좋은 연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월성님!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답사 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선생님, 답사여행 때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