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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를 공부할 때에 주자(朱子)의 무이도가를 공부하였는데, 평소 중국여행을 좋아하고 있으니 기회가 되면 무이산에 가보리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같이 서예를 공부하는 윤우근 씨가 낡은 병풍 사진을 가져와서 해석해 보라고 하였는데, 조금 낯이 익어서 살펴보니 무이도가의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둘이 때가 되면 같이 무이산에 가자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2016년 전주서예연구회에서 한중일 국제 서예전시회를 중국의 진강(鎭江)시에서 개최한다는 연락이 왔다. 마침 연구회에 초대작가로 되어있어 작품도 출품하고 중국어도 할 수 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시간의 전시회를 위하여 3박 4일에 백만원 가까운 비용을 쓰기가 아까워서 가는 길에 무이산에 들러 오자고 제안하였다. 서로 합의가 되어 무이산 가는 방법과 현지 여행 방법 등을 두루두루 연구하고 협의하였다. 그런데, 부득이한 사연이 생겨서 진강행은 무산되었다. 지금까지 연구해 둔 것이 아까워 서실의 이석훈 고문님, 고교 선배 김봉수 형, 그 친구인 류혁환 씨와 함께 4명이 무이산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를 통하여 검색해 보니 무이산 여행은 주로 복건성(福建省) 하문(厦門)에서 출발하는 것이 많았는데, 고속열차로 상해에서 3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달간 유학한 적이 있는 상해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워 비행기표 예약, 기차표 예약, 현지 중국 여행사 예약, 호텔 예약등를 계획하여 착착 진행하고 드디어 6월 9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였다. 여행사 없이 출발하는 여행이라서 불안감도 있고 설레임도 있었다.
드디어 상해 홍교 공항에 도착하였다. 미로와 같은 길을 지나서 상해 10호선 지하철을 타고 홍교기차역에 도착하였다. 미리 예매한 번호로 기차표를 바꾸고 나니 출발시간에 3시간이나 남은 것이었다. 공항 도착 후 2시간, 4시간 후의 열차가 있었는데, 혹시 비행기가 연착이라도 할까 걱정하여 여유 있게 4시간 후의 기차표를 예약하였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넓은 대합실인데도 설 자리는 있어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매점이 있는 윗 층에 올라가 얼마를 기다리다가 겨우 자리가 생겨서 음료수 한잔 마시면서 열차를 기다릴 수 있었다.
1,000km가 넘는 거리인데도 우리를 태운 고속열차는 3시간 반 정도를 달려서 무이산북역에 도착하였다. 무이산북역에 마중 나온 가이드 요지화(饒志華)를 만나서 무이산 풍경구의 월광대반점으로 이동하였다.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갔더니 메뉴도 너무 부족한데다, 카운터에서 삶은 달걀도 하나씩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중국여행을 할 때 보통 아침 식사는 호텔 뷔페로 하게 되는데, 대체로 쌀밥도 없고 메뉴가 한국인들 입맛과 달라서 달걀을 많이 먹게 되고, 또 여행 중에 먹으려고 삶은 달걀 두어 개를 챙겨가는 습관이 있다. 산서성 면산 여행 중에 조선족 가이드가 이를 빗대어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은 달걀을 껍집까지 먹느냐?”라고 묻는다는 것이었다. 달걀은 없어졌는데 껍질은 남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겨우 시장기를 채울 정도의 메뉴가 부실한 아침식사를 하고 드디어 무이산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일정이 일선천(一線天) 풍경구였다. 이곳은 큰 바위를 도끼로 자른 듯하며 높이가 50m, 길이가 178m, 넓이가 1m정도이고 가장 좁은 곳은 30cm라고 하여 뚱뚱한 사람은 지날 수 없다고 설명되어 있는 곳이었다. 80kg 정도인 필자가 못 지나갈까 걱정되어 문을 30cm만 열어 놓고 통과하는 연습도 해 본 곳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측은 통행금지이고 좌측만 통행이 허가되어 아무런 스릴도 없이 정말 재미없이 첫 코스를 마치게 되었다.
둘째 코스는 호랑이가 울부짖는 바위라는 뜻인 호소암(虎嘯岩)이다. 풍경구내 셔틀버스를 타고 호소암 입구에 내려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데, 가이드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열심히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드문드문 맞추어 보면 예전에 이곳에 산적들이 웅거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가이드가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웃으면서 그럼 너의 할아버지가 산적이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펄쩍 뛰는 것이었다.
푸른 숲에 둘러 싸여 있는 산 중앙부에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있는데, 가이드가 그 곳을 가리키며 호랑이가 울부짖는 형상이라고 손가락으로 그려 주는데, 미술에 소질이 없는 나는 호랑이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중국인들이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가 보다. 지금까지의 경치라면 비행기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점심을 먹고 천유봉 가는 길에 있는 주자(朱子)께서 공부하시고 제자를 가르치셨다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관람하였다. 무이산은 주자를 제외하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영향이 지대하였다. 평소 유학을 공부하는 필자는 주자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경건하게 참배하고 유훈들을 살펴 보았다.
무이정사 관람을 마치고 천유봉(天遊峰)을 가게 되었다. 천유봉은 해발 409m, 계단수가 848개인데, 미리 사진에서 보면 산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는 것 같으며 그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옆에 엄청난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햇볕이 쨍쨍 내려 쬐고 그늘도 없는 바위 능선을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에 오르는데, 너무 힘들었다. 폭포수가 흐르기는 하였지만 물이 부족하여 물줄기가 아주 약했다. 그러나 발아래로 펼쳐지는 구곡계(九曲溪)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천유봉 코스는 일방통행길이어서 중간에 내려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일행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 쉬다가 산행을 마친 사람과 다시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 오르막길은 험하고 그늘도 없었지만 내려오는 길은 숲길에 비교적 평탄한 길이었다. 정상부근 내려오는 길에 공산당에 밀려서 대만으로 갔던 장개석 기념비가 있었다. 문화혁명 기간에 파손된 것을 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천유봉 아래의 공원과 천유봉 능선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벽처럼 완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 준비를 마치고 출발 3일 전에 중국 일기예보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무이산 여행 기간 중의 기후가 ‘큰비 다음에 중간비로 바뀐다’고 되어있었다. 약간은 실망하고 같이 가는 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를 ‘제가 택일을 잘못하여 비가 온다고 하네요. 준비하실 때 참고하시고, 그래도 중국산 일기예보이니 틀려서 좋은 날씨가 되기를 기도 할게요’라고 보냈는데, 정말로 틀려서 여행하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는 것이 너무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은 무이산 여행은 핵심인 구곡 뗏목 유람이었다. 그런데 가이드가 무능했던지 12시 20분에 출발하는 것으로 예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 시간에 무이궁에 가게 되었다. 원래 인터넷에 나와 있는 일정에 의하면 둘째 날 오후에 해산하고 무이궁은 관광객 스스로 하도록 안배되어 있었으나 뗏목 일정이 늦게 잡혀 가이드가 안내하고 무이궁을 가게 되었다. 무이궁은 당나라 때 처음 건설하였고 송나라 이후에 별궁으로 사용하였던 모양이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어화원(御花園)이 있어서 기기묘묘한 분재가 전시되어 있으며 천년이 되었다는 소철 분재가 남아 있었다.
무이궁터를 지나 지정암(止正菴)이라는 도관을 보게 되었다. 가이드도 도교를 믿고 수련하는 사람이라서 많은 안내를 하였으나 도교 용어 자체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니 설명을 못 알아 듣는 것도 큰 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전후좌우의 산세가 너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하늘에 사는 신선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신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에 나라의 공권력만 미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함께 한 동료를 모두가 무이궁에 오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하였을 것이라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상해에서 무이산에 오는 기차 속에서 만난 남창의 아가씨가 무이산에 가면 무이산 특색 식품인 성촌광병(星村光餠)을 맛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사 오도록 했는데, 겨우 4개를 구하여 한 개씩 맛볼 수 있었다. 중국 음식답지 않게 맛과 향이 담백하여 먹을 만 하였다.
점심을 먹고 드디어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구곡계 뗏목 표류를 하게 되었다. 이곳을 오기 위하여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시와 설명문을 번역하여 일행에게 나누어 주고, 나도 뗏목을 타고 내려 오면서 주자가 보았던 풍경을 같이 느끼고 공부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러나 뗏목이 흔들리고 물결치니 프린트를 보기도 어렵고, 또 무이도가는 일곡부터 구곡의 차례로 나와 있는데, 뗏목은 시의 순서와는 반대로 구곡에서 일곡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자께서 느끼고 보았던 기분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사실은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준비한 프린트물을 볼 정신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천상의 화가가 파노라마처럼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약 100분간의 꿈같은 시간이 흐르다 보니 벌써 내려야 할 장소에 이르렀다.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 구곡이여...
보통 중국은 황사와 미세 먼지 등으로 하늘이 맑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이산은 산악지대에 남방이라서 공기도 맑고 물도 깨끗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는데, 호소암이나 무이구곡에서 산에 새소리가 들리지 않고 두어 마리 정도의 매미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뗏목을 조종하는 사공에게 물어보니 새가 있기는 하지만 찾기는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하겠다.
무이산 여행 첫째 날 저녁은 6시간 이상 산행한 다리의 피로를 풀고자 일행 3명이 맹인들이 일을 하는 안마원에서 추나 안마를 받았다. 지난 1년간 구당 침구를 공부하면서 좋아하는 중국 여행도 하지 못했는데, 맹인 안마사들이 하는 것을 음미해보니 경혈 공부를 제대로 하였다는 느낌이다. 물론 아프기는 하였지만 피로는 많이 풀 수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하다가 사브사브(중국에서는 훠꿔, 火鍋)를 먹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천식 요리로 너무 매워서 땀을 많이 흘렸고 매운 음식에 익숙하고 좋아하던 일행 한 분도 혀를 내두르를 정도였다.
다음날 무이산을 뒤로하고 상해로 향하는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상해에서 가장 중심가로 알려진 인민광장 옆의 남경동로 보행자 거리 옆에 있는 금강지성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무이산에 있는 호텔의 3배가 넘는 가격이었지만 방은 훨씬 작았다. 상해에서 한국식 불고기 요리를 하는 한사(韓舍)라는 식당에서 오랜만에 삼겹살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상해 과기관 부근에 있는 지하상가에 가서 쇼핑을 하였다. 아무리 흥정을 잘했어도 순진한 한국인이 상해 장사꾼의 술수를 당할 수 있겠는가? 물론 바가지는 썼겠지만 그래도 물건 값을 깍는 기분을 만끽하였다.
다음에는 황포강가에 있는 중국이 자랑하는 동방명주(東方明珠)에 오르게 되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지만 안개는 없어서 올라가면 볼 줄 알았는데, 표를 파는 아가씨가 밖의 경치가 잘 안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표를 사서 263m 층에 올라가니 처음에는 어느 정도 보였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니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보았다고 위안을 삼았는데, 100m정도의 아래 층에 내려오니 밖이 다시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263m지점에는 구름이 끼었고 아래 층에는 맑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황포강의 야경 풍경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호텔 뒤의 골목에서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베트남 쌀국수도 먹고, 상해의 특산 요리인 샤오롱바오(小龍包)도 먹어 보았다. 다음 날 오전에 우리나라의 인사동 거리와 비슷한 복주로(福州路)에서 서예에 관련된 책 몇 권과 붓을 사고 귀국길에 올랐다.
사서삼경을 공부하면서 주자의 해박한 주석에 감탄하고 존경하게 되었고, 무이구곡을 관람하면서 주자를 흉내 내고자 한 희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한 여행이었다. 일행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순조로운 일정이 이루어졌고, 적당한 기후 조건 등을 하늘이 도운 좋은 여행이었다. 여행할 때마다 기행문을 쓰고 있지만 문장력이 빈약해 항상 불만이 있다. 귀국한 다음날 7언 율시 한 수를 지었기에 허접하지만 마지막에 실어둔다.
武夷山遊歌
晦庵從跡武夷行 주자의 자취 찾아 무이산으로 행하니
同伴佳朋共喜情 같이하는 좋은 벗들 기쁜 정 같이하네
虎嘯孤蟬靑樹擁 호소암 외로운 매미 푸른 숲이 껴안고
天遊山客白雲迎 천유봉의 등산객은 흰구름이 맞이하네
淸溪俯首晶如澹 맑은 내를 굽어 보니 수정처럼 맑은데
九曲仰頭畵似嫈 구곡을 올려다보니 그림처럼 예쁘구나
除是仙居何處索 이곳을 빼고 신선세계 어디서 찾을까?
自然同化道心盈 자연과 하나가 되니 도심이 가득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