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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1-33) 육아 낭을 거부하는 새끼 캥거루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오늘 읽은 말씀중심으로 <육아 낭을 거부하는 새끼 캥거루>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육아 낭을 거부하는 새끼 캥거루’
캥거루하면 많은 분들이 호주를 연상합니다. 호주의 연방정부와 뉴사우스 웨일즈 주정부에서 합의 해서 캥거루 사냥을 허용하는 지역을 정했습니다. 매년 무려 150,000마리의 캥거루가 허가받은 사냥꾼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 150,000마리 중에 3분의 1정도가 암컷으로 매년 합법적인 사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또 암컷 50,000마리 중에서 절반가량의 캥거루에게는 아기주머니가 있는데 그 아기주머니 안에 새끼 캥거루들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25,000마리의 새끼들이 어미 캥거루의 육아 낭으로부터 빠져나와서 제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채로 어미를 잃은 25,000마리의 캥거루 새끼들이 매년 학살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 애호가 단체들에서 그 문제를 지적하고 합니다마는 동물애호가 단체들이 자기들 스스로도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150,000마리는 많이 죽이는 것 아닙니까? 사냥을 허용한 지역 내에 캥거루 숫자가 백만 마리라는 겁니다. 백만 마리 중에서 15%를 사냥하도록 허가를 한 겁니다. 그렇게 150,000마리를 죽이다 보면 암컷 어미의 아기주머니 안에 있던 새끼들이 홀로 따로 떨어져 나오게 돼서 잔인하게 학살을 당하는데 그 죽임당하는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건의를 하나봅니다. 그렇게 죽이지 말고 새끼들을 뭐 수분이 부족해서 죽게 한다든지 굶어죽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 제가 보기에는 굶겨 죽이는 것도 잔인할 것 같고 목마르게 해서 죽이는 것도 더 잔인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이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재미있는 것은 이 새끼가 왜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을까요? 궁금하지 않아요? 코알라도 그렇답니다. 코알라도 아기주머니를 갖고 있고 이런 아기주머니를 갖고 있는 동물은 포유류와 비슷하지만 포유류 속에서도 구분을 해서 유대류(有袋類)라고 합니다.
왜 아기주머니를 갖고 있을까요? 재미있어요. 이들은 자궁과 골반이 그렇게 튼튼하게 발전하지를 못했답니다. 그래서 어미 캥거루가 새끼를 갖게 될 경우에 거의 핏덩이 같은 것을 자궁이 붙잡고 있을 수가 없으니 그냥 낳는 겁니다. 약한 자궁 때문에 아직 배아기의 초기 단계의 새끼를 낳고(한 달 정도 있으면 나온다는 거예요.) 더 이상은 자궁이 그 아기를 담고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캥거루가 꽤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새끼를 낳으면 여러분 기절할 일이에요. 어미의 자궁에서 나온 새끼의 크기가 2.5cm 그리고 무게가 1-2g 그러니까 기가 막히는 겁니다. 그 작은 것을 자궁이 못 붙들고 있어서 낳아 버리는데 빨간 핏덩이 같은 벌레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 벌레 같이 생긴 것이 자기 스스로 어미의 배로 기어 올라가서 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젖꼭지의 젖을 빨고 거기서 자란다가 무려 9개월을 자라야 비로소 나올 수가 있고 18개월 때까지 나왔다 들어 갔다를 반복하다가 18개월 이후가 되면 이제 독립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재미있지요. 그 큰 캥거루가 2.5cm에 1-2g의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저는 이 소리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인간의 영적인 실존을 떠올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의 전체의 핵심이 되는 표어이자 주제가 나와요. 7절이거든요. 여러분 잘 아시는 구절이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여화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고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라는 이 말이 잠언 전체를 관통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과 육아 낭을 거부하는 새끼 캥거루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 교인이 아닌 교인들,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하면 캥거루 어미의 육아 낭을 거부하는 새끼의 상태입니다. 캥거루 새끼는 어미의 육아 낭을 거부하는 새끼가 있겠습니까? 본능적으로 어미의 아기주머니 안으로 들어가지요.
그런데 사람은 마땅히 어미의 아기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거부하고 나왔다는 겁니다. 거부하고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 대학살을 당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상태를 10절에 보면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라고 합니다. ‘악한 자가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는 말이 뭐냐 하면요? 어머니의 아기주머니를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뛰어나와 독립하겠다고 한 그 새끼 캥거루들이 이렇게 세상의 꾐에 넘어가서 죽임을 당하고, 영적으로 학살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거 비참하잖아요. 어미가 죽어서 호주에 있는 뉴사우스 웨일즈에 있는 캥거루 새끼들은 어미가 죽음으로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실존은 자기 스스로 어머니 주머니를 뛰쳐나간다는 겁니다.
이것과 하나님경외가 어떻게 연관이 될까요? 캥거루 새끼가 새끼는 새끼인데 이상한 새끼라서 나쁜 새끼라서, 어미의 아기주머니를 거부하고 뛰쳐나가 버리는 이런 고약한 새끼의 모습이 이게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캥거루가 어미 뱃속에서 나와서 새빨간 것이 2.5cm밖에 안 된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 얘기를 들으니까 야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 나더라고요. 결국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게 되면, 새끼 캥거루 2.5cm 벌레 같은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는 동안에, 올바른 지식을 얻게 되고 성숙한 캥거루로 자라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참 아들과 참 딸의 모습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좀 더 한번 살펴보지요.
우리가 다 벌레 같은 존재입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들이 하나님의 성숙한 아들과 딸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의 목표인데 그러지 못합니다.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살을 당하는 것이지요. 마귀에게 밥이 돼 버리는 겁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그 사자 같은 마귀들에게 영적으로 다 먹혀 버리고 마는 겁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 그러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이게 경외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두려움이 도대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할까?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내가 환난을 겪게 될 것이 두려워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면 이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날 골프를 치러 가고 싶은데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골프 치러 가다가 사고날까 아니면 골프 치는데 마음이 찝찝하고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경외하는 것이지요. 내가 상하고 내가 다칠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나를 경외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이 두려움 속에는 사랑이 들어있는 두려움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나는데 저의 형님이 딸을 그렇게 예뻐하십니다.
삼형제 모두가 난 아이들 중에 딸은 그 아이 하나입니다. 둘째 형님의 딸. 그저 그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30분이라도 늦으면 안절부절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다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 경외의 내용입니다. 사랑해서 조금이라도 기스가 날까 금이야 옥이야 바람이 불면 날아갈 새라, 손으로 만지면 터질 새라, 소중히 여겨서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요.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뭡니까? 아들아이가 학교에서 놀다가 다칠까 두려운 것이지요. 이 두려움, 이게 바로 하나님경외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 왜 두려워합니까? 내가 잘못하면 내가 잘못 생각하면 잘못 행동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금이 갈까봐 상처가 날까 하나님이 아파하실까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인데, 내가 잘못하면 내게 벌을 주시니까 두려운 것은 하나님경외가 아니라 나를 경외하는 겁니다. 내 생애가 다치고 내 인생에 기스가 나고 그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순간 그 장소에, 언제나 하나님의 눈길이 와 닿고 있고 하나님의 생각이 와 닿고 있고 하나님의 의견이 와 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우리를 주머니 안에 넣고 있는 것이에요. 어떤 일을 당하든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되든지 그 자리에 그 순간에, 하나님의 계획이 감싸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감싸고 있고 하나님의 눈길이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졸고 계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안 보고 계시고 하나님의 생각이 없으신 가운데 우리가 존재하는 장소와 시간은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주머니가 나를 감싸고 있을 때,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계획하는 바들이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하는 바들이 나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의 주머니 하나님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의 주머니를 찢어버리고 할퀴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유명한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노아의 이야기가 나오는 중에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셨다.”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자, 태승철이를 사랑의 눈길로 감싸고 쳐다보고 계시고 사랑의 계획으로 나를 인도하시려고 사랑의 주머니, 캥거루의 아기주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의 주머니로 감쌌습니다. 그런데 태승철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직 악할 뿐이에요.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 제가 무슨 큰 죄를 그렇게 지었겠습니까? 한국은행을 털겠다고 제가 마음을 먹었습니까? 누구에게 거짓말을 해서 등쳐먹겠다고 마음을 먹겠습니까? 어떤 모반을 일으키겠다고 이명박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몰아내겠다는 마음을 먹어본 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셨다고 하십니다.
뭡니까? 하나님마음이 아프신 거예요. 도저히 하나님아버지 주머니 안에 우리를 담아두실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주머니 안에 담아두실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이 어디서부터 일어났어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부터.
아담이 두려워한 게 뭐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했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그 마음이 다칠까 두려워했어야 하는데 뭘 두려워합니까? 자기가 벗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벗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을 뜻한다고요? 내가 장관이라는 타이틀의 옷을 입어야 되는데 내가 장관하지 못하니까 억울하고, 사회에서 버젓이 인정할 수 있는 신분으로 옷을 입어야 되는데 명품으로 휘 감아야 되는데 명품이 하나도 없어서 그게 두려운 겁니다. 창피한 겁니다. 내가 학벌이 대단해야 되는데 그게 없어요. 그게 두려운 겁니다. 이런 생각이 악한 겁니다.
이런 생각이 다 얌전하게 생긴 소녀가 자기가 자기 생애를 계획해도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주머니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주머니 안에 들어있어요. 내가 움직이는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할퀼까 하나님의 마음을 긁어놓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이 마음이 하나님경외입니다.
이 경외가 있을 때에 내가 당한 지금 이 상황, 이 사건, 이 과제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바른 지식이 생겨난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처주지 않으려는 이 하나님경외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다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언젠가 비유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무 분명하고 확연하기 때문에 잘 맞기 때문에 한 번 더 말씀을 드리면, 전철에서 까만 봉지를 든 아주머니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손으로 봉지 끝 손잡이를 들고 한 손으로 비닐봉지를 안고 있어요. 무심코 보다보니 그 봉지 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납니다. 그 안에 조그만 고양이를 담아 갑니다. 그 안에 고양이가 답답하니까 발톱으로 비닐을 끍다 보니 봉지가 찢어집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으로 만드시고 사랑의 아기주머니로 감싸신 하나님에게 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발동시킬 때 하나님의 마음을 이 고양이 발톱으로 비닐봉지가 긁혀 찢어지듯이 긁어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하나님의 생각을 받지 않고 내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생각과 판단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마음을 쫙쫙 찢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쫙쫙 찢으며 살고 있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사건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못 박히시고 채찍으로 맞아 살점이 떨어지시고 배에 창을 받으신 것이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관계없이 발동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찌른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의 살점을 찢어놓은 것이고 떨어뜨려 놓은 것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이 바로 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고백해야 될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을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면, 내 모든 것들이 다 내 소원 계획 바람 생각 판단 모든 게, 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찌르고 찢고 박고하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마음을 찢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겁니다.
어머니 되시는 그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내가 독자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육아 낭속에 들어가 있지를 못해요. 어떻게 해야 그 하나님의 마음의 주머니 안에 편안하게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상할 것을 두려워해야 되지요.
어떻게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나는 한 생각 떠 올리면 아버지의 생각을 받은 것이 아닌 내 속에서 나는 생각과, 내 속에서 나는 불평에 근거된 계획과 내가 속에서 느끼는 부족함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나온, 어떤 발전을 위한 어떤 노력과 수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마음을 긁고 있고 찢고 있고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기억해 낼 때에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의 아기주머니 안에 편안하게 들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랑의 아기주머니 안에 들어 있을 수 있는 마음이 경외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하고 그 경외를 이루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내 생각과 판단과 계획과 소원 모두를 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할 때라야, 하나님의 마음 안에 곱게 곱게 들어가 있고 그렇게 들어가 있을 때, 하나님의 젖꼭지를 통해 젖을 공급하시고 평강과 안락의 삶을 허락하시며, 당신의 발로 뛰시면서 우리 인생의 장소를 옮겨가시고 하루하루 삶에 되어 질 일들을,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아기주머니 안에 담으신 채로 하나님이 직접 행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움직이는 것이야 내가 움직이지만, 영이신 하나님이 나를 감싸시고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시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하나님의 아기주머니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마음을 먹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을 잠언이 구체적으로 다양한 삶의 영역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그 사랑의 아기주머니 안에 들어가 앉아서 사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는 것을 잠언을 통해 함께 살펴보면서, 진짜 어미와 같은 그 하나님의 사랑의 아기주머니 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아기 캥거루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담이 스스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생각에 순응하지 않게 되면서, 어머니의 아기주머니를 뛰쳐나온 캥거루들이 되어서, 사탄에게 학살당하고 먹이가 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아버지의 그 사랑의 마음주머니 안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며 악할 뿐인 나의 모든 자발적인 생각을 다 죽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의 주머니 안에 들어간 아기 캥거루로서, 아버지의 발로 뛰심을 따라 오늘 하루가 진행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아기 캥거루들이 되었습니다. 다른 것이 복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복 중의 복임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는 복된 날이 되게 하시니 찬양을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