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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초원 위에’와 ‘죄와 벌’
(암1:1~15)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5.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저 푸른 초원 위에’와 ‘죄와 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여러분, 다들 아시지요? 유명한 대중가수 남진 씨의 히트곡입니다.
요즘도 TV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서 계속 리바이벌 되어서 회자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 이 가사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
뭐 좀 유치할까요? 그러나 유치하면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소원 아닙니까?
누구나 가져도 되는 소원이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다는 이 소원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 이런 소원이 있어요.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대상과의 관계에서 소원이 생겨난다.
모든 인간에게 아주아주 기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마음의 어떤 원칙을 이 노래가 담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생깁니다.
그러면 그 관계는 반드시 소원을 갖게 해줍니다.
소원을 갖게 되면 사람은 그 소원을 따라서 어찌 보면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 욕망을 따라서 생각하게 되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계획하게 되고 그리고 계획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추진하게 됩니다.
이게 사람 사는 거예요.
사랑하는 게 있고 그 사랑하는 관계에서 소원이 생기고 그 소원을 따라 움직여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 남진 씨의 노래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한 늘 염두에 두고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원칙을 제공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와 비슷하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이 소설이 남진 씨의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노래와 연관성을 갖게 되고, 오늘 아모스 1장과 연관성을 갖게 되는 내용은 또 우리가 부분적으로 주목을 합니다.
‘죄와 벌’이라고 하는 책이 아주 장편소설 아닙니까?
거기에 주인공이 라스콜리니코프라고 하는 대학생이고, 생 페테르부르크라고 하는 유명한 도시의 뒷골목이 배경이 되는데, 가난함에 시달리고 있는 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예리한 지성이 독특한 그러나 아주 꼬랑한 냄새가 나는 병적인 사색을 하게 됩니다.
그 예리한 지성으로 사색을 한 결과, 초인사상이 형성이 됩니다.
초인사상이 뭔가 하면,
‘나폴레옹과 같은 강자는 인류의 발전을 위하여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자질구레한 도덕적 원칙이나 관습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법이 되어서 자기의 이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인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기존의 도덕률을 넘어서서 행동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초인(超人)이다, 강자(强者)다.’
이렇게 얘기하고 이러한 강자와 대별되어서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는데, 다른 쪽은 이런 자질구레한 인습과 도덕률에 매여서 살 수밖에 없는 약자로서의 사람들인데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벌레인 이로 비유를 합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부류가 있고 이(蝨)와 같은 부류가 있다.
그래서 자기는 나폴레옹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나는 인류를 위하여 내가 내 스스로에 대해서 법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동네에 있는 전당포 노파를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전당포 노파를 가만히 보니 백해무익한 유익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노파고,
오직 돈만 밝히면서 가난해서 돈이 급한 사람들에게서 고리를 받으며 사람들을 뜯어먹고 착취하는 이런 노파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 인류 공영을 위해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나폴레옹과 같은 강자로서 초인으로서 도끼를 들고 가서 그 노파를 살해합니다.
여기까지…
그 뒤에 그 날카로운 라스콜리니코프의 합리성과 지성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비합리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거기에 성스러운 매춘부 쏘냐가 등장을 하고 그녀의 권고를 받고 갱생의 길을 걸어간다,
이런 거는 오늘 관심을 끊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진술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이 핵심문제일 수 있지만 그 죄책감을 풀어나가기 이전에 만들어 놓은 설정 초인사상 여기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죄책감은 이제는 안 따라와요.
무슨 얘기냐 하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초인(超人)사상을 얘기할 때도 결국 그 출발점은 사랑입니다.
왜 전당포노파를 죽입니까?
자기도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훔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에 돈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돈에 대한 사랑의 관계에서 소원이 생기고 생각이 생기고 계획이 생기고 추진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말하는 초인으로서의 특징이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오는 소원,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할 때, 그것이 다 합리화 되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에요.
내가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그 자식을 사랑하는 관계에서 소원이 생깁니다.
내 자식이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고, 엘리트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가족을 다 버리고 자식들만 데리고 유학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라도 참 너무 자연스러운 가정의 생리에 역행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합리화 될 수 있고, 정당화 될 수 있고, 심지어는 강렬하게 욕망되어지게 됩니다.
‘아, 어떡하든지 자식을 데리고 외국에 유학을 갔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흔히 하는 말 있지 않습니까?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요,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외도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면 사랑이고 로맨스가 됩니다.
왜?
내가 마음에 두고 사랑해서 그 관계에서 소원이 생기고 그 소원을 따라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진하게 되면 합리화 돼 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아모스 선지서가 1장부터 강렬하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해 놓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서 부르짖고 계신다고 말해 놓고 곧바로 3절부터 갑자기 이방에 대한 심판이 나옵니다.
참으로 특이한 거예요, 다른 예언서들은 선지자들이 먼저 선민에 대한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해주고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방인들의 심판이 뒤따라오게 되는데, 이 아모스서는 이상하게 이방인에 대한 심판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선민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아모스는 남 왕국 예루살렘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드고아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던 농부예요. 목자요, 농부입니다. 남 왕국 유다 사람이에요.
그런데 북 왕국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심판을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이방인들에 대해서 심판을 하고 있는데, 아모스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관점이 뭐냐 하면 공의라는 관점입니다.
비교하자면 호세아서는 똑같이 북 왕국 이스라엘, 시대도 비슷해요, 여로보암 2세 때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호세아의 예언의 핵심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고멜을 등장시켜서 하나님 이외에 이 땅에서 돈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음행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오늘 이 아모스 선지는 똑같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똑같은 시대를 조명하고 있는데, 공의라고 하는 관점에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호세와와 아모스를 합치면 완벽하게 이해가 됩니다.
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왜요?
사랑하는 님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사랑하는 자식이 있기 때문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어떤 다른 소원이 생기게 되고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내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호화로운 20층 빌딩을 갖고 그 안에서 재벌로서 기업을 경영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꿈꾸게 됩니다.
이처럼 호세아서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랑, 그 사랑은 반드시 아모스 선지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공의의 차원, 행위의 차원, 행동의 차원으로 연결이 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이 나오는데, 계속해서 다섯 나라의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다메섹은 아람을 말하고, 그 다음 가사가 나오는데 블레셋을 말해요, 블레세의 제일 큰 성읍이니까 블레셋을 말하죠?
그 다음에 두로와 암몬과 모압이 차례대로 이야기 됩니다. 모압은 2장에서 나오게 되는데,
근데 이 다섯 나라에 대한 심판에서 똑같이 나오는 반복되는 어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를 들어 3절을 보시면 ‘다메섹의 서 너 가지 죄로’ 이 서, 너 가지 죄라는 것은 죄를 총체적으로 말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 죄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이 다섯 나라에 공히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서너 가지 죄로’라는 말과 ‘그 벌을 돌이키지 않겠다’는 것도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것이 4절에 보면 ‘불을 보내리니 궁궐들을 사르리라’ 이 말이 또 똑같이 반복됩니다.
죄라는 단어와 벌이라는 단어, 그리고 불을 보낸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 2절에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임재 해 계신 것을 먼저 전제하고 이방인들의 죄를 이야기 하고 벌을 이야기하고, 그 벌의 구체적인 내용인 불이 내려서 궁궐을 사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내용이 뭡니까?
하나님이 폐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이방인들이 살아갈 때에 이 죄의 명목들을 가만히 보면은 이웃들을 침략해서 정복하는 것이고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들을 잡아다가 인신매매를 하고, 그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했다는 이야기예요, 주로 내용들이.
그런데 그 시대로 가만히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이 죄라고 명하시고 벌을 내리실 때에 자기가 왜 벌을 받아야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대신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진하게 되는데, 그렇게 추진한 결과가 이웃을 침략해서 이웃을 정복하게 되고 그 사람들을 팔고 거기서 이득을 취하고 마음에 안 맞으면 그 정복된 나라들의 사람들을 죽이고 하는 이것은 이 당시로서는 하나도 죄가 될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사람을 죽이고도 정당화 합니다.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단절된 상태에서는.
왜냐하면 라스콜리니코프가 합리주의자요, 무신론자였으니까…
하나님이 단절된 상태에서 내 마음이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것 때문에 반드시 소원이 생기는데, 소원을 따라 행동하게 될 때 사람들은 기존의 인습과 관습과 도덕률을 넘어서게 됩니다.
근데 지금 아모스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만들어낸 인간의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공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공의를.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게 벌입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나온 것이에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는 이 점을 명심하면 그 반대 현상을 알 수가 있지요, 여러분.
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공의를 따라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도덕률을 우리가 하나도 어기지 않았어도 이방에게 내린 모든 심판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지 않으면.
공의가 뭡니까?
자, 오늘 2011년 7월 8일이에요. 오늘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건재하시고, 2절에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 상정되고 이야기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쳐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일단 하나님이 정지되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 땅에서 소원을 갖게 됩니다.
누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게 돈이든 내 인생이든 건강이든 자식이든 가정이든 내 사업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단된 상태에서 살짝 이 세상의 다른 무엇을 사랑하게 됩니다.
먼저 사랑하는 것이 생기면 소원이 생기게 돼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게 정당화 되는데,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것도 죄예요. 그런데 그게 정당화 되고 있다는 거예요. 왜?
사랑하는 게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 생긴 소원을 위해 움직일 때 우리는 다 정당화시키는 습성이 생기는데, 하나님을 끊어내고 하나님보다 먼저 사랑하는 것이 있는 다음에 생긴 소원을 갖고 나와 기도하는 것이 바로 공의를 허무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 나와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반역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교회 안에서 그렇게 당연시 여겨지고 그 상태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집을 짓고 싶은 소원을 마음대로 간구하고 강청하라고 가르치는 겁니까?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이 죄악 된 습성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가 움직여 가야 될 삶의 시간 시간들마다 하나님의 뜻으로 다 정해 놓은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 땅 위에서 지키는 도덕률과 윤리와 인습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뜻이 있는데, 그 뜻을 따라 움직여가는 것이 바로 공의라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을 제일 먼저 마음이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 공의는 지켜질 수도 없고 알려지지 조차 않아요.
하나님을 제일 먼저 사랑할 때라야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어떻게 움직이기를 원하시는가를 내 마음이 알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새 언약을 얘기할 때에 마음에다가 법을 기록하겠다고 얘기합니다.
자,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신 것이 내 마음에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면 그 율법들이 다 의미가 있고 하나님이 사랑해서 주신 것이라고 느껴지는데, 내가 마음에 돈을 먼저 사랑한다든지 가정을 먼저 사랑한다든지 하나님보다 나라를 먼저 사랑한다든지 내 인생을 먼저 사랑하게 될 경우에는 내가 움직여야 될 법칙이 그 사랑의 관계에서 샘솟기 때문에 율법이 나에게 해당되는 말로 와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은 소원이 왜 생깁니까?
사랑하는 님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님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님이 있게 되면 사람은 어떤 습성이 나타납니까?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자기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 하는 변태적인 인간의 죄적 습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가 외치는 공의의 입장에서 보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는 소원도 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 먼저 사랑하는 님과의 관계에서 생긴 소원을 따라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공의가 깨지는 것입니다.
이 땅의 윤리와 도덕률을 깨는 것 이상으로 나 개인에게는, 하루하루 십계명이라든지 유교의 도덕이라든지 성인들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 패턴과 행동의 양식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 이 순간에 어느 사람 앞에서 거래처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는데, 그게 하늘에서 정해진 것이 공의입니다.
우리가 그 공의를 따라 움직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아버지께서 말하신 것을 듣지 않고 말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행하지 아니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같은 분조차도 그렇게 사셨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이미 사랑하는 게 다 있습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행동을 먼저 하려 하지 마세요.
요엘서가 말하는 마음을 찢고, 마음을 찢는다는 게 뭐예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한 사랑하는 님, 그걸 마음에서 찢어내야 돼요, 그걸 찢어내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고, 하나님을 제일 먼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다 찢고 하나님께로 가야 하나님이 원하시고 정하신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공의의 실현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에요.
호세아서가 사랑 자체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면, 아모스는 그 사랑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모든 소원 모든 행동을 정당화 하려는 습성이 생기는데, 이 모든 습성과 행동은 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공의와 정면으로 충돌되는 죄악이고 벌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고 거기서 소원이 생겨서 행동하게 되는 것들은 자꾸자꾸 그것을 정당화 하려는 습성에 끌려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칼로 두부를 끊어내듯이 끊어내기 위해서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붙잡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어 하는 내 소원이 무엇인가를 보면서 그 소원을 갖게 한 사랑의 대상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로 그 사랑의 대상을 찢어내고 마음을 요엘이 말한 대로 성령을 타고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동안에 내 몸은 이 땅에서 하늘에서 정하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여져 가게 될 것입니다.
이 공의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앞으로 아모스서를 한 장 한 장 해 나가게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하나님!
내게 지금 무슨 소원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소원과 바람은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아무리 세상의 도덕률을 어기지 않아도 우리는 오늘도 끊임없이 나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어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돼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죄악 된 습성이 오늘 하루 내내 중단되고 단절된 채로 하나님의 공의가 내 사지를 통하여 열매 맺혀지는 복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