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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달랑족보의 신세계, 임마누엘>의 줄거리: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우리는 쉽게 이 족보는 예수님에게서 완성되어 끝이 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족보가 다른 형태로 변한 것이지 끝이 난것이 아닙니다. 달랑족보로 변이가 일어난 것이지요. 이 달랑족보가 임마누엘 신세계의 복된 새로운 형태의 족보입니다.
달랑족보의 신세계, 임마누엘
(마1:1-25)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달랑 족보의 신세계, 임마누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달랑족보의 신세계, 임마누엘’
정확히는 2006년 12월입니다만, 2007년부터 치더라도 우리가 어제 말라기서 4장까지 끝나는 데에 거의 5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5년 동안 주중에 다섯 번씩 매일 한 장씩을 짚어오면서 오늘의 번제를 드려왔는데 그 5년 동안 훑어온 것이 오늘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6절까지 정말로 간략하게 42대로 예수님의 족보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는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온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함께 했습니다.
그냥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읽으면 그런 느낌이 덜 할 텐데, 5년 동안 구약을 쭈~욱 관통해오다가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도달하니까 마음이 좀 더 남 다른 감격이 있어요.
신세계가 시작이 됩니다.
"The New World"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되는 세계, 이 신세계를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 포함되어 있는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임마누엘의 신세계를 특징을 잡아서 얘기하자면 오늘 족보가 나왔으니까, ‘달랑족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하는 내용이 달랑 족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끝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함께 구약의 그 장구한 세월, 2천년 동안을 흘러온 역사와 족보, 계보가 예수님에게서 끝난 것으로 압니다마는 사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족보, 돌연변이와 같이 변화된 족보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새로운 변화된 족보의 형태, 이 족보의 형태를 이해하는 것이 임마누엘이라는 신세계를 살아갈 때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고 또 누리게 될 복의 실마리요, 열쇠가 된다는 겁니다.
이 달랑족보의 세계, 달랑족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누리는 복도 우리의 의식 속에 명확하게 그려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임마누엘의 세계는 신세계입니다, 이 신세계는 족보가 계속되어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점으로 달랑 족보로 바뀐다는 거예요, 달랑 족보.
‘달랑족보’라고 하면 뭔가 감이 오는 게 있지 않습니까?
자, 이걸 한번 우리가 살펴봅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
임마누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좀 더 우리에게 살아있는 의미로 전달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오래 전의 일인데, 제가 아는 어떤 은퇴장로님께서 하와이 크루즈를 가신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분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터에 ‘아니 무슨 새삼스럽게 하와이 크루즈를 가십니까? 그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저나 주시지요.’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는가 하면, 그 장로님에 대한 과거지사를 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일류대학을 나오시고 평사원으로 입사하셔서 대기업의 사장님 자리에까지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70년대 여행이 자율화 되지 않았을 때 아닙니까?
박정희 대통령 때였으니까 외국여행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되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못 나갈 때입니다.
그때 그 기업 총수이신 회장님을 모시고 비서역할을 하시면서 전 세계를 다 누비고 다니신 분입니다.
하와이는 그렇게 다니시던 중에 아주 여러 번 자주 갔던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저는 한 번도 못 갔는데 여러 번 가셔놓고 무슨 또 크루즈입니까? 나나 보내주시지, 욕심도 많으셔!’ 하는 그런 농담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분 말씀이, 하와이를 갔어도 간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회장님을 대동하고 다니면 하와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그야말로 몇 천 불씩 하는 포도주도 식탁에 올라오는데 거기 함께 앉아서 식사도 하시고, 하와이에서 좋은 명소를 안내하고 관광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행을 하는 기분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회장님이 명소에 도착하셔서 하와이의 풍경을 바라보며 ‘야 멋지다!’ 하실 때, 같이 옆에서 ‘야 멋있다!’ 라고 못한다는 거예요.
회장님이 멋있다고 하는지, 식당에 들어가면 맛있는 음식을 내가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회장님께서 맛있다고 하는지, 오직 그것만 신경을 쓰면서 회장님과 함께 다니게 됐었다는 겁니다.
초긴장상태를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회장님이 좋다고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고, 회장님이 좋다고 하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지 회장님이 좋다고 하는 그 풍광과 그 음식 맛을 똑같이 좋다고 하며 느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아내이신 권사님과 함께 가셔서 좀 마음껏 내 것으로 즐기고 싶다는 겁니다.
아내와 함께 할 때는 내 것으로 즐길 수 있지요.
회장님과 함께 하는 초년병 비서시절에는 아무것도 즐길 수가 없습니다.
자, 하나님과 함께 하면 아내와 함께 할 때와 같습니까, 회장님과 함께 할 때와 같습니까?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어제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을 이름만 부르고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아무 부담 없이 살아가고 있지요, 실제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한다면 초년병 비서가 회장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갔을 때처럼 -회장님은 영어도 못합니다, 제가 다 나서서 해야 됩니다-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긴장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면 뭔가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께 할 때 일어나는 변화가 뭡니까?
바로 ‘달랑족보’의 변화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달랑족보’라는 게 뭐냐?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 이렇게 쭈~욱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점으로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AD에서 BC로 변하는 것처럼, 모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선민은, 나를 하나님이 낳고, 내 아들도 내가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고, 내 손자도 하나님이 낳고, 내 아버지도 하나님이 낳고, 할아버지도 하나님이 낳고, 할아버지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 손자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 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나 그리고 아들 손자 증손 고손 8대가 모여도 모두가 다 하나님이 낳은 자들만 모이게 되는 이상한 족보로, 나 자신의 족보가 전주이씨, 이성계의 자손으로써 세종대왕의 계파에서 안평대군의 파로 나누어졌다가 누구누구를 거쳐서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 그 모든 이성계로부터 시작하는 전주이씨의 역사와 족보가 다 단칼에 끊어져 나가버리고, 내 족보상에는 달랑 내 위에 하나님 한 분 있게 되는 족보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족보가 없어진 게 아닌데 ‘달랑 족보’로 바뀐 것이에요.
나를 하나님이 낳고 내가 내 아들을 낳는 게 아니라, 신앙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내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내 손자를 낳고…
‘달랑족보’로 바뀌어 살아간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내 족보상에 달랑 하나님 한분만 계신다고 하는 이 ‘달랑 족보’의 의미가 뭘까요?
시간이 과거로부터 흘러서 현재로 미래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수평면 상에 놓여 져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럴 때 족보라는 것은 이 평면상의 족보를 말합니다.
저 옛날에 이성계가 계셨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쭉 전주이씨 중의 어느 계파로 흘러 내려와서 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누적되어진 결과물로서 이런 수평면 상에서의 흐름의 결과로서의 내가 아니라, 이것이 끊어져버리고 수직선상에서 수직적 일회성 족보로 바뀐다는 겁니다, 수직적 일회성 족보.
매 시간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어제까지 있었던 과거의 역사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게 아니라, 위에서부터 유래해서 지금 이 땅 아래로 내가 있는 거라는 거예요, 앞으로도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있게 되는 거라는 거예요.
수직적 일회성 족보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 의미가 확장되어가면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이 됩니까?
달랑 족보가 신세계인 임마누엘의 세계에서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어제까지의 과거의 토대 위에서 오늘을 사는 게 아닙니다.
어제까지의 과거는 잘라져서 날아가 버립니다, 이게 신세계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언제나 신세계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임마누엘의 신세계는 ‘달랑족보’, 내가 유래하게 된 근거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족보에 달랑 기록된 상태에서 이 땅에 내려와서 살고 있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내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부터 흘러들어와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이 삶의 의미로 확장되면 내 인생 안에서의 족보가 있어요.
내 학벌의 족보가 있을 겁니다,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누구는 대학원도 있겠고, 그리고 어느 동네에서 살다가 어디로 이사를 했고, 또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을 했고 20대 후반에는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고, 3, 40대에는 무슨 일을 했으며, 홀어머니 슬하에서 아들로 자라다가 사춘기에 여자 친구를 사귀었고, 대학교 때 결혼상대자를 만나서 결혼했고… 하는 이런 족보가 있어요.
그런데 오늘 태양이 뜰 때 신세계, The New World, 임마누엘의 세계에서는 내 인생에 있어서도 달랑 족보로 사는 것이에요.
나의 과거의 모든 경험과 과거를 통해 지나오면서 내가 습득한 모든 지식과 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위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어제까지 있었던 모든 역사의 누적물의 토대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달랑족보’ 상에서 이루어지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으로만 살아가게 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식,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시를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임마누엘의 세계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삶의 형태라는 것이에요.
‘달랑족보’, 오직 내 위에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 한분뿐인 상태를 임마누엘의 세계의 특징으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달랑족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레나 마리아라고 하는 지금도 활동 중인 복음성가 가수를 아실 것입니다.
1968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났는데, 이분이 태어날 때 두 팔이 없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한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쪽의 무릎까지 밖에 안 됩니다.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상태예요.
그런 상태에서 자라서 교육을 받아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부모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정상인 학교에 보냅니다.
장애인이라고 하고 출발하지를 않는 거예요,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고 정상인들이 받는 것과 똑같은 조건 하에서 교육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이 레나 마리아가 장애인 올림픽에 나가서 수영으로 네 번 메달을 따게 되고, 그리고 십자수와 운전, 모든 걸 다 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힘과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전하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는데, 무대에 설 때마다 첫 번째 부르는 노래가 뭔가 하면 ‘Amazing Grace’입니다.
레나 마리아의 신체의 상태를 가만 들여다보면 Amazing Grace가 아니라 Amazing curse 아닙니까? 아주 놀라운 저주 아니겠어요?
그런데 Amazing Grace를 부르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늘 하는 말이 “돈이 없다는 것이 아무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 아무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형편이 어떻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이유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부모도 그렇고 레나 마리아도 그렇고, 두 팔이 없고 짝발인 신체로부터 삶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딸을 이렇게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레나 마리아의 신체 상태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이 땅에 있는 어느 때, 어떤 곳, 어떤 상태에서도 출발점을 찾지 않는 겁니다.
오직 지금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점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 부모의 마음을 그대로 배워서 레나 마리아가 가는 곳마다 하는 말이,
“당신이 돈이 없습니까? It doesn't matter."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에요.
“당신이 배운 게 없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달려온 교수나 고등학교 졸업한 자나 It doesn't matter.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제까지 쌓아온 어제까지의 나의 족보상의 경력은 칼로 잘라내고 임마누엘의 신세계에서는 ‘달랑족보’ 상의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고 초등학교나 대학교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모든 이 땅의 삶의 이유와 힘과 자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내라는 것이에요.
이렇게 사는 레나 마리아가 Amazing Grace,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며 다닙니다.
이 세상 수평면 상에서 옛날의 족보 형태의 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저주받은 자라고 노래 불러야 될 그 몸을 가지고 Amazing Grace를 부르고 다니는 것이에요.
이게 달랑족보의 세계에요.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이 신세계로 들어갑니까?
어떻게 이 New World, 임마누엘의 세계, 달랑족보의 세계로 들어갑니까?
달랑 내 위에 하나님 한 분 계시고, 대통령도 장관도, 사장님도 부장님도, 아내도 남편도 부모님도 아닌 달랑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유래되어서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회사원도 되고 하는 이러한 임마누엘의 New World의 세상으로 어떻게 진입해 들어가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기가 막힌 이름 넷이 나옵니다.
첫 번째가 다말, 그 다음이 라합, 그리고 룻, 밧세바, 마지막에 나온 여자가 마리아예요.
이 마리아 이전의 네 여인, 기가 막힌 여인들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근친상간이에요, 창녀로 변장을 해서 시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낳은 아이입니다.
인륜상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라합은 기생으로 창녀를 말합니다.
이방인 창녀고, 가나안 문화라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성적으로 극히 문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갖고 있는 곳이고 그곳에서도 창녀였던 여자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고 모압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받은 나라로 도장을 찍힌 곳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은 땅에서 태어나 살던 여자입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성군 다윗이 자기의 신앙의 본분과 선민의 나라의 왕에 대한 본분을 잊어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완전히 안면몰수 해버리고 저지른 간음사건이요, 살인사건의 주인공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태어나는 족보 안에 왜 끼어들어 갔을까요?
여러분, 이 족보가 의미하고, 이 여인들이 족보의 칼라를 결정해버립니다.
완전히 예수님의 족보를 죄악의 색깔로 확 바꿔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세계로의 진입은 내 의식의 전면에 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설 수 없을만한 죄악 된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의 전면에 꺼내서 보고 있지 않으면 이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리로 배운 죄인의식 갖고는 이 세계 안으로 진입해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의식의 전면에 나는 도저히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의식의 전면에 내가 다말과 같은, 그리고 라합과 같은, 그리고 저주받아 마땅한 룻과 같은 이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내 스스로 깊이깊이 인정하지 않으면 신세계로의 관문인 십자가 관문을 통과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시면서 바닥에 기어서 들어갈 수 있는 신세계의 문을 열어놓고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 자마다 임마누엘의 신세계에서 달랑족보, 세상과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내 위에 계신 이 달랑족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상상도 하지 못할 축복의 장을 열어놓으신 것이지요.
마태복음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함께 하는 동안에 모두가 이 달랑족보의 신세계 임마누엘의 세계 속에서 이 ‘오늘의 번제’가 진행됨에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정말 축복된 하나님의 아들딸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족보의 돌연변이와도 같은 달랑족보의 신세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지금을 살아가는 임마누엘의 신세계,
이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악 됨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붙잡음을 통하여 이 신세계로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주장하시고 은혜의 발걸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