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문답: 내가 사는 이유
1문: 사람의 첫째가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첫째가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1Q: What is the chief and highest end of man?
A: Man’s chief and highest end is to glorify God, and fully to enjoy him for ever.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제외하고서는 인생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하나님 없는 자기중심의 행복은 성경에 반대되는 길입니다. 더불어 사람은 행복을 쫓아가서 쟁취할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바른 질서와 목적에 따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은 인간 내부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이유는 삶의 목적을 자기 내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만드시고 조성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까닭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라야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고, 자신을 지어진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만드신 하나님을 알고서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또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라야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인생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입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즐거워하는 일과 일상이 나뉠 수 없습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종교는 심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밀실로 유폐되는 현상을 봅니다. 사회, 정치, 국가, 일터에서 밀려나 특정한 날에 모여 예배하거나, 개인적인 경건생활과 종교 활동으로 밀려나 있지요. 이는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 인생의 모습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야 말고 진정한 인생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참된 행복은 인생이 지음 받은 목적에 따라 살 때 따라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즐거워하는 일 속에 머물 때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목적에 따라 살기 위해 애써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우리는 지음을 받았습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시편73:24-28절에서 말합니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모든 인생의 재난은 사실 하나님을 떠난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단절된 것이 죽음의 상태요, 저주 상태입니다. 부지런히 살아도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모르는 무지와 어둠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우리로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누려가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요한복음17:21-24절을 봅시다.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신앙생활은 일상과는 분리되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삶은 개인적인 경건이나 교회에서의 종교 활동 정도로 축소되었고, 가정과 일터, 사회와 정치에서는 분리된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일부로 줄어들고, 심리적이거나 도덕과 교양으로 현저하게 뒷마당으로 밀려났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라는 말을 더 이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삶 전부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과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경건과 삶이, 종교와 일상이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칼뱅(J. Calvin)은 “온 세상은 하나님의 무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믿음은 삶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고, 주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주의 법을 따라 살아감으로 일상에서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신앙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빙크(H. Bavinck)는 “은혜는 자연을 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종교적인 삶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자신의 수고를 위한 힘을 얻고, 싸울 수 있는 준비를 갖춘다. 하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비한 삶은 그의 삶 전체가 아니다. 기도실은 그가 내밀하게 거하는 곳이긴 하지만, 그가 살아가고 활동하는 집 전체는 아니다. 영적인 삶은 가족과 사회생활, 사업과 정치, 예술과 학문을 배제하지 않는다. 영적인 삶은 그런 것들과 구별되고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지만, 그런 것들과 철저하게 반대되거나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영적인 삶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의 우리의 소명을 신실하게 수행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게 해주는 힘이다.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행위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먹고 마십니다. 시집가고 장가갑니다. 동일한 직업을 가지고 일터에서 일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도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삶이 나뉘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를 이미 발견한 사람들로 살아갑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곳에서부터 이미 누려가고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머물러 있어도, 성도들은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