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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만개의 괄호
(민1:1-54)
오늘 민수기 1장 백성의 계수하는 이야기 <60만개의 괄호>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60만개의 괄호.
괄호하면 이진법 복음이라고 말할 때 그 이진법을 표시하는 괄호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0과 1을 하나로 묶는 괄호 그 괄호가 60만개라는 이야기 함께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백성을 계수하는 것이 때때로 화제가 됩니다.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백성의 계수 일이 벌써 두 번째 아닙니까?
출애굽 후에 백성을 계수하고, 지금은 출애굽 후에 시내산 계약을 맺고 성막을 낙성 봉헌하고 그 다음에 레위기에서 언급되어진 하나님의 율법이 제사법과 정결법을 중심으로 한 율법이 전달된 후에 이제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을 하게 될 때 이제 가나안과 사막에서 만나게 되는 적군들과 싸워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군대를 정비하기 위하여 20세 이상 60세까지 남자들을 계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수를 지명하십니다. 명령하십니다.
근데 다윗시대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수하는 게 가나안 정복 전쟁을 대비하는 일인데, 다윗이 정복 전쟁을 끝내고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를 돈독하게 했을 때 국가의 위치를 견고한 바위 위에 올려놓게 되었을 때 마음 속에 자만감이 생기면서 백성의 수를 계수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7만 명이 죽어나가는 그러한 참사가 벌어지게 됩니다.
백성을 계수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백성을 계수하라고 하나님께서 시키십니다.
이 두 가지의 백성 계수의 사건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통해서 우리가 그 차이를 앎을 통하여 신앙의 또 다른 진면목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다윗의 백성 계수와 지금 민수기 1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백성 계수의 차이점을 잠깐 살펴보면 이런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나라를 부강하고 견고하게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한 업적에 대한 어떠한 성취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하고 있느냐를 확인하려고 계수를 하게 돼요.
신하들이 말렸습니다. “그러지 마시옵소서.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강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80만 명 가량의 군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계수하게 되는데 이때는 다윗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군대장관들을 통해서 백성을 계수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계수합니까?
각 종족과 가문과 집안을 포함하고 있는 지파별로 한 사람씩 하나님이 지명을 하십니다.
모든 회중이 모여 있는 가운데 그 회중 가운데 지파별로 한 사람씩 뽑아내요.
그러니까 밑에서부터 사람을 뽑아냈고, 이 다윗의 계수 때는 군대사령관들로부터 계수가 진행되도록 다윗이 명령을 하게 됩니다.
군대사령관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윗의 계수의 의미는 모든 80만 명이 다 하나의 숫자로 환산이 되어 버립니다.
각 개인의 역사와 개인의 인격과 개인의 집안과 개인의 종족이 아무 의미가 없고 다윗의 수하에 있는 사령관들이 다윗의 수하에 있는 군인들의 숫자를 계수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개인의 히스토리가 완전히 백지로 돌아가면서 한 사람의 그 많은 이야기 한 개인의 많은 역사가 다 하나의 숫자 하나라고 하는 한 개의 숫자 단위로 환원되어버리고 환산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이 민수기에서 사람을 계수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민수기 1:2,3절에도 나와 있습니다마는 18절에 보면 「각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인 남자의 이름을 자기 계통별로 신고하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의 이름을 그 사람이 어떤 집안에 속해 있느냐, 그 집안은 어떤 종족에 속해 있느냐, 그 종족은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느냐, 그 지파는 누구에서부터 나왔느냐, 아브라함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이렇게 한 개인의 역사를 아브라함에게서부터 따져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괄호로 묶였다는 것거예요.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고 떠났다는 것 갈 바에 대해 0. 자기 인생의 행로에 대해서 0된 상태에서 1되시는 하나님과 괄호로 묶여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괄호로 묶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전쟁을 나가서 싸워야 될 사람들을 계수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과 묶여 있는 하나의 괄호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계수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백성 전체 80만 명을 하나의 괄호로 묶습니다.
그리고 80만 명이 포함되어진 하나의 괄호 앞에다가 하나님을 갖다 댑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이 80만 명이라는 백성을 인도한 것으로 봅니다.
그 80만 명은뭡니까? 다윗에게는 나의 수하들입니다. 그 나의 수하들을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전쟁이라고 하는 아주 숫자의 우상화된 사건, 숫자를 우상화시한는 사건 뭡니까?
“야, 이번 전쟁은 결산이 어떻게 되는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예, 우리 아군이 10만 명 죽고 적군을 20만 명을 무찔렀습니다.”
그 10만 명이라고 하는 단위 속에는 한 남자를 생각해도 그 남자의 아내가 있습니다, 그 남자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 남자의 직장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 남자의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그 부모님들의 부모님이 계시고, 아내의 친정이 있고 그 많은 이야기가 얽혀있는 사람이 전쟁 때 하나의 숫자로 환산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에요.
그런 전쟁을 치르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전부 세니까 603,550명이에요. 각 지파별로 20세이상 60세 미만의 남자의 수가 603,550명입니다.
그런데 그 603,550명을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지명해서 조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식으로 계수를 하면 어떤 것입니까?
603550명을 한 괄호 안에 묶어버리고, 하나님 한 분이 이제 이 603,550명이 묶여 있는 괄호를 이끌어 가는데 하나님의 계수 방식은 어떤 것이냐?
60만 명 하나하나가 하나님과 하나씩 하나씩 괄호로 묶이는 겁니다.
60만 명을 한 괄호로 묶어서 하나님이 이끌어가시지 않습니다.
603,550명을 하나님이 1:1 개별적으로 한 괄호 한 괄호로 묶어서 603,550개의 괄호가 이스라엘 안에 있었다는 것이에요.
요즘 여러분 문제지요. 교회가 교인을 대할 때.
큰 교회 목사님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지난 주에 몇 명 왔습니까?”
“예, 3,000명이 왔습니다.”
“아니, 그 지난주에는 3,200명이 왔는데 왜 200명이 빠집니까? 어떻게 하든지 200명을 채우고 아니 200명에서 좀더 나가야 되니까 3.250명을 채우세요.”
그 3,250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와 인격과 그의 이력과 이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모든 교인이 하나의 숫자로 환산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자식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하나님과 하나의 괄호로 묶여 있습니다.
괄호로 묶여서 하나님과 반목하느냐, 괄호로 묶여서 하나님과 함께 화목하게 사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사람이 다 괄호로 묶여 있는 것이에요.
제가 살던 밴쿠버 캐나다는 인구가 2.500만 명일 때가 있습니다. 10년 전쯤에. 그 당시 2,500만 명 인구를 갖고 있는 캐나다에서 인구 4명 당 호수가 하나씩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호수가 600만개 이상이 있었던 것이에요.
자, 그런데 이 600만개의 호수가 있는데 캐나다 땅 위에 달이 뜹니다. 달이 뜨면 어떻게 됩니까? 600만개의 호수마다 달이 비치게 됩니다. 600만개의 달이 비치게 되는 거예요. 모든 호수가 다 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에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이 군중 속에서 버려진 개인으로 군중 속에서 휘말려가는 개인으로 아니면 한강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생각하지를 않으신다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은 1:1로 개인적으로 묶고 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가을로’ 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게 삼풍 사건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런 영화입니다.
삼풍 사건에서 502명이 죽었습니다.
502명이 죽었다고 우리는 치부해버리고 말아요.
그 죽은 사람 중에 나와 연관된 사림이 없으면 우리는 숫자로 기억을 합니다.
이 숫자로 기억되고 있는 망자들에 대한 아쉬움을 영화로 표현한 것이에요.
거기에 한 여자가 삼풍백화점에 들어가서 죽게 됩니다.
젊은 검사인 약혼자와 만나기로 한 날 대법원 앞으로 갔는데 이 약혼남자가 약속이 있어서 조금 늦게 됩니다. 그 늦게 되는 그 시간을 기다리겠다고 하는 걸 남자가 기다리면 내가 부담이 되니까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라고, 우리 바로 서초동 옆에 있는 대법원 아닙니까? 그렇게 억지로 백화점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런데 그 백화점에 들어간 사이에 백화점이 무너져 내립니다. 영화 이야기에요. 그래서 갇혀 있습니다. 영화 장면 속에서 갇혀 있다가 죽게 됩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돌덩이 속에서 시간이 흘러 죽게 됩니다.
나중에 그 여자가 죽은 뒤에 그 여자의 부모로부터 이 검사 약혼자 남자가 수첩을 하나 받는데 그 수첩 속에 자기 약혼녀가 자기와 함께 여행을 하려고 했던 여행 계획서가 쭉 나와 있습니다. 어느 지방에 어디를 방문하고 강원도 어디를 방문하고 쭉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검사 일을 쉬고 자기의 약혼녀의 소망이었던 자기와의 여행지를 그대로 답습하며 걸어갑니다. 그 여행 계획대로 여행을 해나갑니다.
그런데 여행하는 장소에서 마다 낯선 여자를 계속 반복해서 만나게 됩니다.
그 여자가 나중에 누군가 하면 그 약혼녀가 삼풍백화점 붕괴시 콘크리트 조각들에 갇혀 있을 때 바로 옆에 깜깜한데 보이지 않는 곳에 한 여자의 신음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게 누구냐? 삼풍백화점에서 일하던 나이 어린 판매원 아가씨였습니다.
그 아가씨가 정말 극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검사의 약혼녀 민지라고 하는데 이 판매원 여자에게 자기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내 약혼한 남자와 함께 이런 여행을 할 거야 하면서 그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판매원 아가씨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공포를 달래 줍니다.
그리고 이 약혼녀는 죽고 판매원 아가씨는 구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참사의 현장 속에서 그 언니한테 들었던 이야기대로 여행을 합니다.
그래서 이 약혼남자와 함께 여행을 하는데 둘은 서로 모르죠. 나중에 알게 되고 이 판매원 여자가 그 말했던 약혼 남자가 바로 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둘이서 재회하게 되고 또 다시 계속 여행을 하게 되는 아주 의미심장한 그런 영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냥 502명 중에 죽은 한 여자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마음 속에 약혼하면 여행을 하겠다는 약혼한 남자와의 여행계획과 사랑 이야기와 같이 공포에 떨고 있는 그 동생을 위한 배려와 그 동생을 위한 사랑하고 있는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그 사람을 우리는 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봅니다.
태목사.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 봅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 아이를 대학 입시를 봐야하는 하나의 입시생으로 봅니다.
전문대학을 들어가면 공부 못한 많은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그런 하나의 아이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겁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우리 아이 하나하나를 향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1:1로 대면하시고 1:1로 관계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아이에게 접근해 계시고, 내 남편에게 접근해 계시고, 내 아내에게 접근해 계시고, 내 이웃에게 접근해 계시고, 생면부지의 낯선 한 남자에게, 한 여자에게, 길에서 스쳐간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접근해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괄호에 묶여 있습니다.
이 지구위에 인구가 60억이라면 하나님이 1:60억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60억 개의 괄호가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1장이 백성을 계수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이 민수기 계수 사건과 다윗의 계수 사건을 성경 속에 나란히 놓고 계시며 비교하기를 원하시는 의도가 어디에 계십니까?
다윗은 모든 사람을 하나의 숫자로 환산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많은 60만 명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직접 관계하고,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을 너무나 무미건조해 보이는 민수기의 계수 사건을 통해서 극명하게 우리들에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식을 대할 때 가족을 대할 때 절대로 그 아이 개인을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아이 자신이 공부를 한다 안 한다, 그 아이가 어떤 재능을 갖고 있다 안 갖고 있다, 그 아이가 어떤 핸디캡을 갖고 있다 장점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아이는 지금 괄호 안에 묶여 있는 아이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에게서 가장 먼저 풀어야 될 숙제요 과제가 뭡니까?
괄호로 묶여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 아이의 태도가 어떠냐를 부모는 예의주시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라 소리 그만하고 네가 괄호로 묶여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좀 바른 자세를 가져라, 그 하나님을 봐라, 그 하나님을 깨달아라, 그 하나님을 실감하라. 이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괄호로 묶여서 살아갑니다.
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그 개인의 역사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과 괄호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반목하고 살았느냐, 하나님과 화목하고 살았느냐 이 두 개의 역사로 나누어질 뿐입니다.
온갖 행위를 다 합니다.
직장생활을 합니다. 돈을 법니다. 예술 활동을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학교에서 공부합니다. 주부로서 살아갑니다. 모든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반목하면서 돈을 벌고, 하나님과 반목하면서 예술 활동을 했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화목하면서 예술 활동을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면서 돈을 벌고, 하나님과 화목하면서 직장생활 학교생활을 했느냐, 둘 중의 하나에요.
이 두 가지의 역사로 사람이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오늘 하루 종일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 개인을 봐서는 안 돼요. 가게를 하시면 오늘 손님 한 사람 왔다, 두 사람 왔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다 하나님과 묶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묶여 있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괄호 안에 묶여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바로 전도라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시급한 것입니다.
그 괄호 안에가 해결이 안 되는데 무슨 일이 해결이 되겠습니까?
오늘 전쟁을 나가기 전에, 모든 인간이 집단화되고 군중화되어버리고 숫자로 환산되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사건 그러한 이벤트인 전쟁을 치르기 전에 하나님은 종족별로 한 사람씩을 다 정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름 하나하나를 거명하게 만드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을 하나님이 지명해요.
예를 들어, 유다 지파에서 누구를 지명했다. 그럼 그 사람이 뭡니까? 하나님의 집게손가락이에요. 가리키는 손가락. 그 사람을 손가락으로 삼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고 계십니다.
603,550개라는 것은 하나로 묶여서 하나님이 이끌어 가는 거예요. 우리 가족 이런 거 없어요. 우리 가족을 하나님께서 이런 거 없어요.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괄호로 묶여서 가족 수만큼 괄호가 집안에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사람을 보실 때 아, 저 사람도 하나님과 괄호로 묶여 있는데 저 사람은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있을까, 하나님을 붙잡고 있을까? 이 관점에서 모든 사람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가치관과,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삶과 인생관이 다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과 묶여 있는 괄호로 그 사람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지금 화목하고 있을까, 반목하고 있을까 이 관심으로 보다 되면 나도 모르게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게 되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사람이 0이 돼야 1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묶일 텐데 이것이 임마누엘의 복음인데 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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