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2000년 9월 1일 내가 교감으로 승진되어 현 임지인 양산 천성초등학교로 갔을 때,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써서 '양산교육'이란 책자에 실었던 원문이다. 그 후 6개월이 지나고 2001년 3월 부터 종숙이는 내가 있는 학교로 옮겨와서 함께 지내게 되었음을 밝혀 둔다.-
<<<<< 부임 첫 날 혼자 흘린 눈물>>>>>
천 성 초 등 학 교
교감 김 형 진
내가 교직을 택한 이유는 좀 부끄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순전히 주변의 여건이 주된 것이었었다. 임박한 군 입대 문제와 어려운 농촌의 가정형편이 주된 이유였으니 상당기간 교직에 종사한 오늘에 생각을 해 보면 너무너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교직을 결코 만만히 본 것은 아니며 수행해 오는 동안 여러 경로들을 통해서 교직의 진정한 의미와 책무에 접근하고, 그러는 동안에 나름대로의 교직관이 형성되었었고 차츰 교육 그 자체에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초등교육이란 아이들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니 현장에서 내가 만들어 가는 얘깃거리들 대부분이 아이들과 관련되는 얘기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내 개인의 역사로 자리잡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 것이다. 실제로, 내게는 정녕 기꺼운 일들로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28년이 조금 넘는 교사생활을 마감하고 교감으로의 발령을 받은 2000년 9월 1일 오전,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한 가운데, 정신 수습조차 어려운 시각이 흐르는 가운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종숙' 이라는 아이(?)는 20년 전 사천 서포 초등학교에서 6학년 때 가르쳤던 소위 간접 제자였다. 지금은 애기 엄마일 테지만 내게는 당시의 모습만이 상상되었고, 그래서 지금의 표현도 '아이'일 수밖에 없다. 담임도 하지 않았었기 때문일까? 종숙이는 많이 머뭇거리는 말투로 물어왔다.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천만 다행으로 비교적 소상히 기억을 해 낼 수 있었다. 종숙이가 살던 마을이며, 그가 속했던 학급이며, 심지어 그가 전교 임원이었다는 사실까지……. 작은 체구에 귀엽기 짝이 없었고, 당시의 최대 관심사였던 공부도 퍽 잘 하는, 늘 미소를 띠던 모습들이 생생히, 정말 생생히 떠올랐다. 생각하면 그렇게 다행한 일이 없었다.
솔직히 그간 가르쳐온 제자들을, 기록을 보지 않고(해 두지도 않았지만) 다 기억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종숙이의 전화 질문에,
"글세……"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게 어쩌면 흔히 있을 수 있고 당연한 일이면서도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기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화 통화 중이라 직접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말투만으로도 종숙이가 대단히 감격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든 짧든 세월이 흐른 후 스승이 제자인 자기를 기억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기껍고 감격스런 일이라는 사실은 내 직접 경험으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뜻과 같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승진 발령을 축하한다는 얘기와 좀 있다가 찾아 뵙겠다는 얘기 등을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후 새롭게 전개되는 일들에 다가가는 바람에 종숙이의 일을 잊었고 시간은 흘렀다. '좀 있다가'라는 의미는 종잡을 수 없는 길이의 시간이기에 더욱 그랬다.
몇 몇 학부모 간부들의 방문이 있고 나서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앳된 어느 아가씨로 비쳐지는 부인의 방문을 받았다. 손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꽃바구니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지극히 자연스런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지만 쉽게 기억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저학년의 학부모쯤 되겠거니 생각을 했다. 얼른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서운했을 법도 한데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선생님 저, 종숙입니다.:
그제야 그가 조금 전에 전화했던 종숙이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진한 감동과 함께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종숙이를 비롯한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종숙이가 이렇게 빨리 직접 오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지금의 종숙이는 내가 근무하는 천성 초등의 바로 이웃학교인 평산 초등학교 행정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학교는 우리 학교와 직선거리로 불과 1Km 남짓한 거리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 때 듣고 알 수 있었다.
진주 집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여섯 시에 버스를 타고 400리 머나먼 길 달려와서 부임한 나는 생소한 이 곳에 나를 아는 사람은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종숙이의 출현으로 정녕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가운데 아득한 20년 전의 일들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당시 종숙이가 다녔고, 내가 근무했던 서포 초등학교는 6학년이 네 반이었는데 기억에도 생생하게 동 학년 넷이서 의기투합하여 소위 전 교과 전담을 계획하고 실행했었다. 내가 맡은 과목은 국어와 체육이었는데 종숙이는 내가 담임하지 않은 4반에 속했었고, 매주 아홉 시간씩 함께 공부할 수 있었었다.
× × ×
종숙이는 지금 내가 모시고 있는 교장선생님과도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가슴 찡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김과장(종숙이)은 성실하고, 늘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고, 일의 처리가 야무진 사람입니다."
옛 스승으로서 한 제자의 성장에 관하여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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