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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남북정상회담과 이후 통일운동의 과제
민경우 통일뉴스 전문기자
10월 2~4일 남북정상회담이 마무리되고 10.4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비슷한 시기 6자회담 결과도 발표되었다.(9.30 합의문이 10.3 발표)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시기 발표된 6자회담 결과는 한반도 정세의 대지각변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징표이다. 이에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살펴보고 이후 통일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대체로 내년 상반기까지를 중심에 두고 논해 보겠다.
1. 남북정상회담을 둘러 싼 내외 조건
1) 북미 관계의 발전 정도
남북정상회담은 북미 공방과 연동되어 있다. 정상회담 자체가 북미 공방의 일정한 진전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과 10.4 공동선언을 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비슷한 시기 발표된 9.30 6자회담 합의문에 대한 분석이다.
9월 27~30일 진행된 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 결과는 9.30 합의되어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사이인 10.3 발표되었다. 이는 단순히 우연히 같은 시기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양자가 밀접히 연관된 하나의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9.30 합의문에서는 12.31까지 <핵 불능화-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교역법 종료>를 맞교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첫째. 북-시리아 핵 연계설, 부시 대통령의 북에 대한 야만정권 발언 등 다양한 장애물이 터진 조건에서도 큰 논란없이 처리된 점 둘째. <핵 불능화-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교역법 종료>라는 높은 수준의 합의가 이뤄져 북미 사이에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고 있는 점이다. 테러지원국 해제 시점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6자회담 합의문에 명시된 핵 불능화와 병행하여(in parallel with)를 고려하면 시한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해석 자체가 억지에 가깝다.
이러한 양상은 2006년 10.9 핵 실험 이후 북의 정치적 입지가 커진 점,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든 정치적 성과를 얻으려는 부시행정부의 정치적 의지,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중동 정세 등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91년 이후 16년간 진행되어 왔던 북미 공방을 고려하면 9.30과 같은 높은 수준의 합의가 별 문제없이 타결되는 것은 그 만큼 정세가 호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아베신조의 실각과 후쿠다 내각의 등장
한반도 정세를 고려함에 있어 특기할만한 사태는 아베신조의 실각이다. 2002년 9월 17일 북일정상회담 이후 아베 신조는 ‘납치의 아베’라 불릴 정도로 납치 문제를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해 왔다. 미 의회에서 ‘북한 인권법’이 기승을 부린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북미 공방이 급진전함과 함께 아베신조의 대북강경노선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미 의회의 위안부 결의안과 <납치-6자회담 연계> 시도이다.
명료한 증거를 대기는 어렵지만 미 의회가 북한 인권법 대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 정세의 변화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인권 문제를 순수 인권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미 의회에서 북한 인권법 대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쟁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아베신조류의 대북강경노선, 미일동맹 중심의 대북.대중 강경파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납치-6자회담 연계>를 미국이 거부한 점이다. 4월 미일정상회담에서 납치문제와 6자회담을 연계해 달라는 아베신조의 요청을 라이스 국무장관이 거부한 것은 2002년 이후 납치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적 입지를 넓혀 온 대북강경세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미국의 태도 변화는 ‘제2의 닉슨쇼크’라 부를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 만큼 미국 자신도 여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펴낸 주요국제문제분석 중 「동아시아 역사논쟁과 미일관계: 미 하원의 위안부 문제 논의를 중심으로」참조)
3) 이명박 후보의 독주
미국과 일본에서 대북강경기조와 세력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역으로 보수강경세력의 입지가 강화되고 있다.
서민경제의 악화에 따라 중도개혁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확산되는 가운데 성장.개발 담론을 앞세운 이명박 후보가 상황을 압도하고 있다. 범여권은 마땅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고 있고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담론을 제출하고 있으나 국민대중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2000년 정상회담 이후 통일정세의 완만한 발전이 국민대중에게 다가서지 못한 반면 성장.개발 중심의 경제담론이 국민대중의 정서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문제에서도 이명박류의 경제담론과 결합되어 ‘퍼주기’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는 6.15 선언 이후의 통일운동이 국민대중과 결합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둘째. 국제정세의 역동적인 변화, 통일정세의 급발전과 한국 내부의 정치지형이 괴리되어 있다. 즉 국제, 통일정세는 평화통일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의 집권을 요구하고 있으나 한국의 정치지형은 이와 달리 보수세력의 입지가 커져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괴리는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통일정세가 불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2. 정상회담의 배경과 결과, 전망
1) 정상회담의 배경
먼저 남측의 입장에서 정상회담의 추진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0년 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의 강한 집념에 의해 내외 조건이 유리하지 않는 조건에서 강행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정착, 냉전종식’이라는 당초의 구도와 차이가 나는 6.15 선언에 합의하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상회담과 퇴임 이후에도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의 동시 발전이라는 관점에 충실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친미보수 정치인으로써는 특출한 업적을 보여주었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에 비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출범했다. 김대중 정부가 DJP 연합이라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여전히 보수반공 질서가 강하게 온존된 채 대통령이 되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힘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고 6.15 공동선언이라는 강력한 자산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친미보수적인 행보로 상황을 그르쳤다. 초기에는 대북송금특별법, 이라크 파병 등을 통해 지지기반을 흔들었고 2005년 이후 핵문제가 본격화되는 국면에서는 미사일을 쏘았다는 이유(2006.7.5)로 쌀.비료 지원을 중단하고 BDA 문제 해결이 지체된다는 이유로 쌀.비료 지원을 유예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를 계속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에는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애초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동기 자체도 북핵 문제 해결에 방점이 가 있었다.
2007년 7월 하순 북의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한 것은 BDA 문제로 심화되었던 북핵 문제가 일정하게 해결기미를 보이고 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까지는 남북대화가 진행되어서는 안된다거나 남북정상회담의 주의제가 북핵 해결이라는 보수적인 입장과는 차이가 있지만 평화와 경제협력이라는 제한된 테두리를 넘지 않으려는 행보에서 나타나듯 상황을 적극적으로 돌파하려는 측면보다는 어떤 선을 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측면이 반영되어 있었다.
반면 북은 북미관계 발전에 상응하여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주목할만한 것은 남측 대선에 대한 판단인데 남측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낙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이보다는 북미관계 발전에 상응하는 남북관계의 발전에 의해 한반도의 평화통일정세가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후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 같다.
(정창현 교수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대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신한반도 구상’을 다음의 네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북미관계를 빠른 시일 내에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진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남북관계에서 상당한 양보를 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병행 발전시킨다는 원칙하에 남북협력을 전면적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셋째. 이를 통해 경제재건과 주민생활 향상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넷째. 이를 위해 북한 내부에서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한다는 것이다”)
2) 남북정상회담 결과
남북정상회담 결과는 남북이 정상회담에서 목표로 했던 바가 대체로 그대로 수용되어 큰 무리 없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0년 1차 정상회담에서 의제조차 합의하지 않고 양 정상이 마주 앉아 파격적인 논란과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도출해 낸 것과는 다소 다른 양상이다.
노무현 정부는 첫째.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진전시키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 과정에서 했던 발언들에는 과도할 정도로 통일문제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둘째는 평화와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점진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남북대화에 임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남의 이러한 제안을 북이 대부분 수용하면서 10.4 합의문은 마치 장관급 합의처럼 세세하고 시시콜콜한 합의가 다소 장황하게 언급되고 있다.
셋째. 내용적인 소극성에 비해 행동적인 측면에서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 주었다. 군사분계선의 도보 통과, 아리랑 참관, 3대헌장 기념탑 환송식 등 몇 가지 측면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북의 경우 첫째. 2000년에 버금가는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의 직접 영접 등 노무현 대통령을 맞는 북의 태도는 김대중 대통령 때와 거의 차이가 없다.
둘째. 북미 관계에 조응하여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남측의 요구를 대부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단, 남의 요구를 수용하되 ‘개혁개방’과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제어하려 노력했다.
2000년 정상회담이 통일방안과 같은 가장 민감한 의제를 중심으로 논란이 진행되었다면 2007년 정상회담은 남북경협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낮은 차원의 주제가 논란이 되었던 것은 두 회담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셋째. 노무현 정부와 통일문제에 대해 협상을 하려는 의도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북의 입장에서는 노무현 정부와 이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에 기초하여 남북정상회담을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제정세, 한반도 통일정세의 급진전에 비하면 이를 추동하고 발전시키는 회담이 아니라 이를 수동적으로 추인하는 실무적인 성격의 회담이 되었다.
둘째. 남측 정치지형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내용적으로 보면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후보가 딱히 책잡을만한 합의가 별로 없다. 현재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남측의 정치지형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이 남측 대선에 미칠 영향은 시대착오적인 남측 정치지형을 부분적으로 교정하는 수준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남측의 중도세력은 남북정상회담을 정략적인 수준에서라도 활용하려는 정치적 결단을 보여주지 못했다.
3) 전망
향후 전망은 주로 북미 공방에 달려 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연내에 <핵 불능화-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교역법 종료>가 진행되고 2007년 하반기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6자 외무장관 회담, 북미 고위급 또는 최고위급 방문과 대화, 3자 또는 4자 차원의 종전 선언 등 역사적인 사건이 줄을 이을 것이다.
일련의 우여곡절이 있을 수는 있어도 2008년 상반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첫째. 북이 갖고 있는 협상력(핵)이 워낙 크고 적극적인 협상 의지를 갖고 있는 점 둘째. 미국이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있고 중동 등의 상황이 여의치 않은 점 때문이다. 북미가 놓인 이러한 입지가 BDA, 북-시리아 핵 연계설과 같은 난제를 돌파하고 상황을 협상으로 밀어 부치는 배경이다. 그리고 북미 사이에 최종적인 대결지점은 <현존하는 북의 핵 폐기-주한미군의 존립> 사이에서 결정될 것이다.
남북관계 또한 이에 상응해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이를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대북정책을 조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다른 입장을 취할 여지가 크지 않고 남북관계 또한 한나라당이 어쩌기 힘든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나라당의 정치적 반발이 적지 않겠지만 경향적으로 국제정세, 한반도 통일정세 진전에 순응하는 방향에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반면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을 경우 이른바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진보진영을 강하게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이전 시기 보수 세력의 기치는 자유민주주의였는데 최근에는 이를 (공동체) 자유주의로 대체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굳이 민주주의를 빼고자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담고 있는 대중정치, 공공성 강화라는 요소를 삭감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자유주의 정치의 본질은 엘리트정치로 엘리트 정치인들 사이에서 결정된 합의와 ‘법’에 대한 절대 존중, 대중거리 정치에 대한 혐오를 담고 있다. 자유주의 정치의 이러한 보수적인 측면은 진보진영이 함축해 온 민주주의 정신과 상당한 수준에서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3. 통일운동의 평가와 향후 과제
1) 2000~2007년 정세와 통일운동의 평가
먼저 2000~2007년 사이 조성된 정세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고 이에 기초하여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해 큰 방향에서 언급해 보겠다.
①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하면서 90년대 후반까지는 미국 주도의 일극질서가 형성되었다. 90년대 후반 유로화의 출범, 중러의 연대 강화, 중남미에서 탈미 조류 등 미국 주도의 일극질서의 부분적인 이완현상이 발생하였다. 2001년 집권한 부시행정부는 9.11 테러를 악용하여 2003년 이라크 침략을 강행하였고 이는 성장하고 있던 다극화 기류와 부시 행정부의 조악한 일방주의 사이의 충돌을 심화시켰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다극화 경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 국제정세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미국-영국-일본-호주-(인도) 등이 친미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고 이라크 침략에 강력히 저항했던 유럽대륙에서는 독일, 프랑스에서 우파 정치인(메르켈과 사르코지)이 당선되고 중러가 부상하면서 미국과 유대를 복원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중러의 경우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에서 미국의 패권을 의미있게 잠식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주도의 일방주의가 약화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의 결정적인 후과(?)는 북과 이란의 핵공세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벽에 부딪히면서 2005년을 계기로(2.10 북의 핵보유선언, 6월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당선) 북과 이란이 핵을 고리로 미국에 대한 강력한 역공세를 취하면서 미국의 일방주의는 심각한 공격에 직면해 있다.
98~2007년의 국제정세를 이렇게 정리한다면 한반도 통일정세는 첫째. 98~2000년 고조기 둘째. 2001~2004년 완만한 대치기 셋째. 2005년 이후 조국통일의 대대적인 앙양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통일운동의 입장에서는 2000년 6.15 선언을 통해 통일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맞았다면 2001~2004년 완만한 대치기에서는 조국통일운동도 느슨한 성장 또는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2005년 이후에는 조국통일의 앙양기로 통일운동에 대단히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운동을 전체적으로 평가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93~98년 조국통일운동의 분열은 99년 8.15 대회를 계기로 해소되었다. 그러나 99년 시점에서도 조국통일운동 진영의 뿌리깊은 분열과 소그룹주의가 채 해소되지 않은 채 잠재되어 있었다. 6.15 공동선언은 남의 조국통일운동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합의였기 때문에 99년 시점에서 통일운동이 6.15 공동선언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는 객관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나온 조건에서 이에 걸맞는 차원에서 운동대오를 대담하고 혁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취약하여 이후 조국통일운동에 족쇄가 되었다.
위의 한계가 2000~2004년 완만한 대치기에 국민대중을 조국통일대오로 결속하는데 장애로 작용했다. 후술하겠지만 이 시기는 2001~2년을 경계로 내수가 무너지고(2003년, 04년의 내수는 마이너스로 추락한다)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되면서 국민대중 사이에 성장.개발 담론이 급속히 확대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통일운동 진영이 대중과 결합하여 얼마나 조국통일역량을 정비.확대하느냐는 이후 통일정세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조국통일정세가 완만하게 발전했지만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개발 담론이 국민대중을 장악하면서 6.15 공동선언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이후 정세는 급속한 고양기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2.10 핵보유 선언 - 9.19 공동성명 - 2006년 7.5 미사일과 10.9 핵 실험 - 2007년 2.13 합의 등> 시대를 구획할만한 획기적인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는 국제정세도 마찬가지인데 이라크 전황의 악화와 중동 정치지형의 반미화와 군사적 충돌, 중러 연대의 강화, 중남미 정세의 급진화 등 시대의 변화를 예견케 하는 중대한 정세들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통일운동 진영은 이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정세에 개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2006년 10월 핵실험 이후 민주노동당내에서 벌어진 논쟁인데 민주노동당은 시대와 유리된 논쟁으로 조국통일정세의 급속한 고양기를 대중적 지지로 전화하는데 실패했다.
② 사회경제, 정치적인 측면에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미국의 패권의 약화는 보다 극적이다. 2001년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저금리, 감세, 전쟁 정책으로 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켰다. 저금리 정책은 무역수지 적자로, 감세와 전쟁 정책은 재정수지로 악화로 나타났다. 2005년을 경계로 국제적인 과잉유동성 국면이 끝나고 조정국면이 시작되었다.(2001년 6%였던 미국의 금리는 2004년 6월까지 1%로 떨어졌다가 최근까지 5.25%로 상승한다. 2007년 8.18 현재는 4.75%이다.) 현재는 과잉유동성 국면이 조정되는 상황인지 아니면 미국의 경제 패권이 전반적으로 퇴조하는 국면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세계경제는 심각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경제는 몇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98~2001, 외자가 주도하되 내수가 살아 있던 조건 둘째. 2002년 이후 내수 침체, 극단적인 수출 중심의 구조, 부동산. 주가. 사교육비 등 사회적 갈등의 모순의 격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98년 이후 자본시장이 개방되면서 외자가 정세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외자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98~2001년까지 한국경제는 국제적인 과잉유동성을 배경으로 엄청난 자산거품 국면을 이는 결국 금융을 장악한 외자가 한국경제를 유리하는 과정이었는데 이 시기 대부분의 서민대중이 주식시장, 카드대란 등을 통해 경제력을 상실했다.
98~2001년 외자와 대기업, 일부 자산계층과 나머지 국민대중의 우열이 명확하게 엇갈리면서 빈부격차가 눈에 띠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를 배경으로 국민대중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연성 친미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전통적인 강경 친미세력에 대한 지지로 회귀하기 시작했고 사회전반에 우승열패, 강자독식과 같은 잔인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2003년 집권한 노무현 정권과 친노 그룹이 김대중 정권에 비해 통일문제에 대한 인식 정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2005년을 경계로 급속히 친미우경화한 점이 악재로 작용했다.
노무현 정부는 6.15 선언에 대한 몰이해로 통일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운동에 불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심각했던 것은 2005년을 경계로 한나라당과의 대 연정, 한미FTA,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 일련의 친미보수정책으로 화해개혁 세력의 정치적 지반을 스스로 허물어 버린 점이다.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2001~2004년이 완만한 대치기로 통일정세의 영향이 구체적으로 국민대중속으로 다가서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2001년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전면화에 따라 국민대중이 성장. 개발담론에 편승한 한나라당내 이명박류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강한 지지를 보내면서 어려움에 봉착했다.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를 돌파하는 통일운동의 대중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중요했던 점은 통일운동과 별개의 영역에서 강력히 대중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경제적인 현안에 대한 응당한 대안을 내놓지 않고 통일운동 일면의 편향을 보임에 따라 대중을 신자유주의 노선에 무방비상태로 방치한 점이다.
통일운동은 민족적인 문제이지만 사회경제적인 현안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회경제적인 문제, 계급적인 요구에 대한 응당한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통일운동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200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 북미공방이 극적인 양상으로 발전하고 정상회담으로 새로운 경제적인 대안이 현실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민대중은 전통적인 성장.개발 담론에 기대어 이명박 후보에게 강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2) 2000~2007년 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오류
그러면 보다 구체적으로 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오류를 의식화, 조직화, 대중운동의 관점에서 지적해 보겠다.
① 의식화의 견지에서
먼저 성과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 대중의식지형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북미 공방의 현실성, 북의 군사력.외교력 등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상당히 확산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대중의식지형의 변화가 운동진영의 조직적 성과로 축적되지 않은 점이다. 통일운동진영은 7년간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반미와 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주력했지만 2007년 현재에도 조직 역량으로만 보면 99년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99년에는 학생이 주력이었다면 2007년에는 노동자의 비중이 커진 점이다.
남북화해협력의식은 크게 신장되었다. 7년에 걸친 다양한 활동과 노력을 통해 국민대중 전반에 이전과는 달리 남북이 적대하지 않고 화해.교류해야 한다는 의식은 비교적 확고하게 정착된 것처럼 보인다. 반면 보수우익 세력의 집요한 여론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점,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라 퍼주기, 경제적 우월의식, ‘인권론’ 등 변형된 반북감정이 확산되고 있는 점이 문제이다.
운동진영의 경우 지나치게 정치군사적인 측면에 경도되거나 높은 수준의 의식화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경제적인 현안에 대한 대중적 관심, 대중의 의식지형에 맞게 대중의식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일관된 노력이 부족했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맞게 대중 교양사업을 개선하려는 시도에도 취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퍼주기론’에 대해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론’으로 맞서거나 탈민족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조건에서 민족론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 등이 없었다. (운동진영의 통일경제 담론은 주로 ‘유무상통’ 등이었는데 이는 남측 국민대중에게 효과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대중운동을 벌였던 농민운동진영에서 통일담론이 확고히 확산된 점은 중요한 성과이다. 전농은 2007년 2월 대의원대회를 금강산에서 개최할 정도로 농민운동의 대안을 통일농업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는 부문 운동 차원에서 보면 대단한 성과이다. 단 통일농업의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고민은 부족해 보인다.
한계와 오류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화 사업 자체를 경시한 점이다. 이로 인해 통일운동 진영의 의식화 수준이 현격히 낮아지고 있다. 돌아보면 86~88년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성장할 당시, 통일운동의 의식 수준이 제도권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반면 관점에서 탁월한 우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세를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운동진영의 사상이론 수준은 대체로 9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반면 제도권에서 새로운 방향의 연구성과들이 축적되고 언론 매체 등을 통한 대중의 교양 수준도 대단히 높아졌기 때문에 운동진영의 지체 또는 퇴보는 심각한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구체적인 사례와 논리를 가지고 일반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운동의 경우에는 이 괴리 정도가 크고 여타 운동진영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운동진영의 의식화 사업은 대중과 밀착하여 이를 설득하는 논리와 쌍방향의 화법보다는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둘째.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내용을 발전시키려는 관점이 부족했다. 2001년 이후 대중의 관심과 고통은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일운동 진영은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전통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양자 사이의 괴리는 통일운동 진영의 대중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심지어는 조직대중 사이에서도 이러한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
학생운동의 약화는 신자유주의에 강력히 편입된 신세대와 전통적인 통일이론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가들 사이의 괴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여타 운동도 유사한데 노동, 농민, 빈민 등에서 해당 대중의 대중적, 경제적 요구와 통일문제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논리가 개발되지 않으면서 민중진영의 통일운동은 통일위원회 사업이거나 일부 각성된 선진대중의 몫으로 떨어졌다.
② 조직화의 견지에서
조직화의 견지에서 가장 커다란 성과는 민주노동당의 결성과 성장이다. 역사적으로 운동의 주동력을 살펴 보면 87년 이전 학생운동, 95년 이후 민주노총이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운동의 주도권이 민주노동당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발전은 우리 운동의 가장 커다란 조직적 성과이다. 특히 국민적 영향력과 대중적 공신력이 높은 민주노동당 후보가 정치 공간에서 이전에는 소수 통일운동진영이 외치던 주장을 공공연히 주장할 수 있게 된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발전은 이후 통일운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통일연대와 6.15 공동위원회, 진보연대의 경우는 성과와 한계가 공존하고 있다.
통일연대의 경우에는 2000년 이후 활성화된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꾸준한 성과를 남겼고 이러한 성과에 기초하여 6.15 공동위원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반면 통일연대가 남북 교류협력 사업이외의 사업에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남측 민화협과 6.15 공동위원회를 견인하는데 있어 응당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우리 운동 역량의 한계가 문제지만 통일운동진영의 뿌리깊은 소그룹주의에도 원인이 있다.
현 시점에서 보면 통일운동진영의 의견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주요 대중조직들이 통일운동진영과 큰 기조에서 동일한 행보를 취하고 있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통일운동진영이 사분오열되어 있는 점은 노선 차이라기보다는 인맥과 경향성의 차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93~98년 사이에 나타났던 극심한 분열상이 99년을 기점으로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질적인 차원에서 대범하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진보연대의 결성은 통일연대, 민중연대의 성과를 계승한 것인데 결성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계속되고 있다.
조직적 측면에서 가장 커다란 손실은 학생운동의 약화이다. 99년~2000년 학생운동 진영은 8.15대회에 근 1만에 가까운 대중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상반기 대학생대회를 진행해도 3~5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양적인 손실보다 심각한 것은 질적인 수준 저하와 학생사회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점이다. 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학생운동의 수준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비해 3~4년 정도의 수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위험한 점은 학생사회에서의 영향력 정도인데 통일운동을 주 동력으로 하는 학생운동 진영은 자유주의.개인주의, 극심한 경쟁담론, 감성적 민족주의로 무장한 학생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학생역량을 대체한 것이 노동운동이다. 노동운동은 지난 7년간 꾸준히 성장하여 명실공히 통일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아쉬운 점은 통일운동이 통일위원회 사업이 아니라 민주노총 전체가 참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노동자 통일운동이 일부 선진대오를 조직화하는 데서는 성공했지만 노동운동 전체를 통일운동으로 결속시키는 작업은 지체 또는 담보했기 때문이다.
통일운동을 노동운동 전체의 사업으로 발전시킨다고 하는 점은 통일운동 진영이 통일사안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고용 불안, 산업재해와 같은 노동운동의 다른 현안에 대한 지도력을 함께 확보하여 노동대중 전체에 대한 지도력을 갖고 노동대중 전체를 통일운동으로 견인함을 의미한다.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위에서 논했음으로 약한다.
여타 운동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시민운동, 좌파(?) 운동진영에서 교류협력, 평화운동에 결합하기 시작한 점이다. 그리고 정세가 발전함에 따라 반미반일의 관점에서 통일운동 진영과 가까워지고 있다. 아직은 전통적인 통일운동진영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통일운동이 각계각층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③ 대중운동의 견지에서
대중운동의 견지에서 주요한 오류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대중운동 방식을 창출하지 못한 점이다.
전체적으로 운동의 양상이 대중의 정서에 비하면 추상적이거나 높은 사안을 의제로 하여 집회.시위.기자회견 등 전통적인 방식을 활용한 대중운동이 주로 일정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반복되는 양상이다.
통일운동진영에서 제기하는 의제는 대체로 대중의 의식에 비해 높거나 추상적이다. 또한 전달하는 방식이 양방향적이지 않고 일방적이어 시대의 추이와 맞지 않는다. 이에 대중에 대한 설득력, 파급력, 감화력이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집회.시위.기자회견 등의 전통적인 방식은 점차 합법적인 공간, 양방향의 설득을 중시하는 경향에 비하면 너무 빈번하게 진행되고 있다. 덕분에 일반 시민들은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집회.시위 문화 자체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고 이에 따라 대중적 호소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상당히 강화될 소지가 크다. 따라서 운동진영은 대중운동 방식에 대한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
소수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 반복적인 대중행사는 활동가들의 피로도를 높이고 활동가들과 대중사이의 결합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집회에 참가한 대중활동가들조차 집회의 의의에 걸맞는 각오와 열정을 갖지 않고 관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위 시기 대중운동 방식에서 주목할만한 현상은 ‘촛불시위’이다. 2002년 한 네티즌에 의해 시도된 촛불시위라는 독특한 대중운동 방식은 2002년 두 여중생 사망을 계기로 대중운동을 범국민적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제는 촛불시위와 같은 참신한 발상이 운동 진영에 제출되었다기보다는 운동진영의 외부에서 제출되고 운동진영이 이를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3) 향후 통일운동의 과제
① 10.4 합의의 옹호
10.4 합의문을 옹호하고 이를 훼손, 약화시키려는 보수 강경파의 기도와 맞서 싸워야 한다. 현 정치지형의 특징은 국제 정세, 한반도 통일정세가 유리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커지고 있는 반면 남측의 정치지형은 보수정치세력의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점이다. 이에 따라 남북관계 발전이 상당 부분 지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10.4 합의문을 중심으로 이를 옹호, 발전시키는 것은 통일운동진영의 주요 과제이다.
② 통일운동의 대중화, 활성화
통일운동의 대중화는 현 시기 통일운동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통일운동 진영은 입장의 선명성을 앞세우기보다는 대중이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대중의 의식지형을 고려하여 대중적인 통일운동을 창출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양사업에 주력해야 한다.
교양사업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먼저 국제정세, 한반도 통일정세가 급변하고 있음을 고려하여 이에 대한 선전과 준비를 적극화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가까운 시기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3자 또는 4자 정상의 한반도에서의 만남, 북미 정상회담,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남 등 조만간 가시화될 일련의 사건은 조국통일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비상히 높일 것이다. 운동진영은 이에 대비해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대중교양 사업에 착수해야 한다.
유인물 수준의 수공업적인 양상을 시급히 벗어나 대중적인 캠프, 대대적인 출판 사업, 대규모적인 강사진의 육성 등 큰 규모의 의식화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징표’를 선전하는 것이다. 국제정세, 통일정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조직대중은 짙은 패배감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직대중을 거점으로 일반 대중으로 확장되는 활력 있는 의식화 사업이 진행될 수 없다.
현재의 국제, 통일정세는 운동진영에 대단히 유리한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 미국의 일극질서의 파열조짐(중동과 이라크 상황, 중 러의 대미 견제 움직임 등), 달러 패권의 위기,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 아베신조의 몰락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대중에게 변화의 가능성, 승리의 신심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높은 관심은 결국 대중 속에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운동진영은 국가보안법 철폐와 같은 정치적 기조에 대한 선전보다는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승리의 확신을 심어주는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 노선에 대한 구구한 설명보다는 변화에 대한 확신, 세계관의 변화이다.
구체적으로 얼마 전 SBS에서 방영한 ‘맨발의 의사들’을 광범위하게 교양하면 어떨까? 공중파라는 공신력, 감동적인 영상에 더해 쿠바, 베네수엘라의 살아 있는 현실은 대중의 감성에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다음으로 ‘퍼주기론’에 맞서 ‘평화와 경제의 선 순환론’을 적극 설파할 필요가 있다. ‘평화와 경제의 선 순환론’은 자주통일문제에 대한 관점을 결여하고 있는 점에서 주의해야 할 관점이지만 경제 문제에 민감한 국민대중의 정서를 고려할 때 통일운동 진전에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조직과 행사보다는 의제와 교양사업을 중시해야 한다. 압도적인 대중역량으로 세를 과시하고 이를 통해 정세를 돌파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시대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숫자의 많고 적음보다 입장의 타당성과 설득력, 건설적인 대안과 전망의 참신함이 중요한 세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중운동의 위력은 이 기초위에 발양되고 분출되어야 한다.
둘째. 대중이 폭넓게 참여할 수 있는 운동방식을 창출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 10.4 합의문에는 6.15를 기념하는 문제, 북경 올림픽 단일팀 또는 공동응원 등 광범위한 대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합의들이 많이 있다. 이를 적극 활용해 국민 대중이 폭넓게 참여하는 대중운동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가령 올 하반기 총학생회선거에서 내년 5월 판문점에서의 평화축전를 개최하자는 공약을 내걸고 이를 실제 추진하는 것과 같은 창발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국가보안법이나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정치투쟁도 중요한 것은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식과 내용이다. 국가보안법이나 주한미군 따위는 이미 민주노동당과 같은 공당의 후보가 선전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쟁점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를 어떻게 대중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운동을 대중화함에 있어 민주노총, 전농 등 조직화된 대중운동을 동력 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까지는 민중운동과 자주통일운동이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물론 앞으로도 이를 기계적으로 결합하기보다는 양자의 역동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노동자, 농민운동에서 통일운동 영역이 일종의 분과 사업이 아니라 몸통사업으로 발전하고 큰 기조에서 자주통일운동을 중심에 두고 민생 문제를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③ 정치지형 변화
대중운동과 별도로 2007년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에서 최대한 진보민중진영의 후보가 당선되고 보수우익세력의 집권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지형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여부는 대중운동의 발전과 후퇴, 정체와 왜곡을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중운동을 창출하되 정치지형을 통일지향적인 방향으로 돌려세우는데 각별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
④ 소그룹주의, 소수 활동가 중심의 활동방식의 청산
향후 경계해야할 측면을 논쟁적으로 제출해 보겠다.
운동진영의 소그룹 주의, 소수 활동가 중심의 대중운동 방식을 시급히 청산해야 한다. 냉정하게 돌아보라. 2000년 6.15 선언 이후 7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회, 시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 중 많은 수가 구체적인 영향력과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소수 활동가가 이중삼중으로 행사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덕분에 쉴 사이 없이 행사와 행사, 집회와 집회가 이어졌지만 대중운동 역량을 축성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는 응당한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