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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에베소교회(001.2022.10.19)
계2:1-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변화무쌍한 세상입니다. 마치 하늘의 뭉게구름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듯이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한 순간만이라도 한 눈을 팔면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게 되는 시대의 낙오자 혹은 방황자가 되고 맙니다. 어제 갔던 그 길을 오늘은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하고, 어제 엘리트 말을 듣던 사람이 오늘은 시대에 뒤진 구세대 말을 듣기도 합니다. 정말 정신없이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세상이 두 쪽 나도 우리 신앙만큼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세상과 편승해서 달라진다면 거기에는 아무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차례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7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교회입니다. 지금은 ‘터키’라는 나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로마의 통치를 받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7교회는 그 지역에 있었던 많은 교회들 중에 대표적인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시록에 언급된 7교회는 그 당시 아시아 지역의 전체 교회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현존하는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곱 교회로 보내는 편지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께서 요한을 감동시키신 예언적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의 대부분이 근본적으로는 일곱 교회를 두 가지로 분류해 놓고 있습니다. 즉 ‘칭찬을 듣는 교회’와 ‘책망을 듣는 교회’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분류 때문에 설교는 항상 우리 교회도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교회가 되지 말고 칭찬 듣는 교회가 되자고 역설합니다. 해석은 다양하더라도 그 결론은 늘 동일하게 우리 교회 잘 되고 칭찬 받는 교회가 되자는 윤리적 교훈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꼽고 있는 것은 책망이 하나도 없고 칭찬만 들었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들면서 우리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가 되자고 합니다.
1. 에베소의 도시적 배경입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 당시 소아시아 주의 수도일 뿐 아니라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자치 도시였고, 상업적으로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면서 부터인데 수많은 국제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도시 인구가 30만 명에 육박했으므로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고대 세계의 교통망은 오늘날처럼 용이하지 않아 주로 강 유역을 따라 상업과 무역이 성행하였습니다. 특별히 이곳은 이스테르 강 어귀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 지역에 성행하는 무역을 관장할 뿐 아니라 시리아, 인도, 아라비아, 이집트 등 세계 각국에서 몰려 온 상인들이 식료품, 향료, 고급 옷감에서부터 금, 은, 보석, 도자기 및 노예 매매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을 거래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온 상인들, 은행업자, 창고업자, 운수업자들은 물론 그들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률가, 대서업자, 예술가, 철학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에베소로 몰려왔습니다.
이곳은 기원전 3세기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생겼습니다. 이 시장의 바닥은 대리석으로 포장되고 그 주위에는 기둥들로 둘러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연못도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시장의 개점과 폐점을 알리기 위해 물시계와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는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시민들을 위한 위락 시설로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음악당, 거대한 목욕탕 등이 있었습니다. 지식층들을 위해 도서관과 학교가 있었고, 여행자들을 위해서는 여관이나 유곽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열정적으로 숭배하고 마술이 가득한 타락한 도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특히 아데미 여신 숭배는 당시 로마 제국의 어느 도시 보다 더 심했습니다. 고대의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이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아르테미스, 로마에서는 다이아나로 부름)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입니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매우 광적으로 아데미 여신을 숭배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와 바울의 전도 때문에 신상 장사가 안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 선동한 민중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대극장에 아데미 신상 장사치들이 모두 몰려가 ‘바울과 에베소 교회는 물러가라’를 외쳤던 것입니다(행19:21-41 바울의 3차전도 여행).
에베소는 로마 4대 도시 중의 하나였고, 정치 문화 상업적으로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에베소는 그러한 도시 발전과 함께 영적, 도덕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요즈음 표현을 빌리자면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에게 바쳐진 도시’였습니다. 당시 에데미 신전에는 수천 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평소에는 거리의 창녀였다고 합니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들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지진으로 황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에베소의 오늘날의 지명은 ‘셀추크(Selcuk)’라고 하며, 이 작은 도시에는 에베소 고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에베소 박물관,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성 요한 교회,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 터 등등. 돌아보기도 벅찰 만큼 엄청난 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에베소(에페스,Efes) 도시 유적은 버가모(베르가마,Bergama) 유적과 함께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격찬 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도시 에베소를 택하여 그곳을 사도 바울과 요한과 같은 믿음의 사도들을 머물게 하여 그 도시의 변화를 만들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은 기독교 선교의 3대 도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교회로 ‘에베소 교회’를 향한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에 ‘에베소교회’는 신약 시대에 있던 교회 중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요, 무역항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교류되는 도시였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할 때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AD 54-59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 의해 세워졌습니다(행18:19). 이후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세례를 주고 안수할 때 성령이 강림하여 방언과 예언을 하여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것을 본 마술사들이 가지고 있던 은 오만(요즘 돈으로 약 5억 원)의 가치가 있는 마술 책들을 소각하였습니다(행19:1-20). 이곳에서 바울은 두란노서원을 세워 2년 이상 머물렀습니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머나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해, 그곳에서 계시록을 써서 에베소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 후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피살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다시 돌아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AD6세기 중엽 요한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장소에 세워진 교회인데 오늘날 발굴된 유적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였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그가 어떻게 에베소 교회 목회를 했는지를 간증을 했습니다. 행20:19-20절‘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모든 겸손과 눈물로 목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간계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험을 참고 견디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1절‘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자’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흔히 에베소 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목회자)로 보기도 하고 천사라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계1:1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천사를 통해서 요한에게 계시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사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 자신을 에베소 교회에 드러내실 때에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는 것은 자신의 교회를 늘 살피고 주장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1:20에서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한 말씀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그분의 권능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언제나 교회의 머리이고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를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소위 말하는 교회 기득권층에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주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친히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이 말씀들도 결코 칭찬하고 책망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칭찬하고 책망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교회를 맡기고 그것을 점검하고 평가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주님께 받은 칭찬을 살펴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년 이상을 머물고, 후일 로마 감옥에 갇혀 에베소 교인을 상대로 편지(에베소서)를 써서 그들의 신앙과 믿음을 독려한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또한 요한이 오랫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한 곳인 만큼 교회 역사에서 에베소 교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기독교 선교의 3대 중심지 역할을 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지역적 환경은 영적으로 매우 열악한 곳으로, 세속적이고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몹시도 심한 곳이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아데미 여신에게 바쳐진 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사역과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의 수고와 인내를 통해 에베소교회는 그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칭찬을 받았습니까?
‘사역과 수고와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2절‘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여기 네 행위는 ‘The Works’입니다. 에베소교회를 주님을 위해 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기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감당했습니다. 사랑하기에 핍박과 고난도 인내하고 사랑하기에 힘들어도 견디어 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교회의 사역과 봉사 그리고 인내를 다 알고 계시며 모두를 기록해 두시는 분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10:42절에 주님께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사랑함으로 사역하고 봉사하며 인내하는 행위는 아무리 그것이 작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다 기억하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 묵묵히 섬기고 수고하고 자리를 지키면서 인내를 하신 분들의 수고를 다 아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또 주의 종들이 힘들게 어렵게 일할 때 함께 수고하고 눈물 흘리시며 기도하신 것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갚을 길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영육간의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몸 된 교회를 위한 여러분의 사역과 수고와 인내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칭찬’했습니다. 2절‘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에베소 교회는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는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것과 악한 영이 행하는 것에 대한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무너트리려는 악한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또 에베소 교회 안에는 니골라당이 있었습니다. 6절‘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이들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전하는 이단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무너트리는 정말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것을 알고 경계하고 미워했습니다. 참 대단한 교회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도 이단들을 조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각종이단들이 자기가 진짜라고 외치면서 거짓 복음을 전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천지 이단이고 요즘 ‘어머니 하나님’을 전하는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미혹에 영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강력하게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단들은 우리의 빈틈을 노립니다. 그러기에 깨어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일4:1절‘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라는 말은 원어로는 ‘에클레시아(ecclesia)’라 씁니다. 이 말의 뜻은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고 성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17장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14절 중간‘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강에 떠다니는 배는 물에 있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배가 산에 있으면 배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배속으로 물이 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 성도 안에 들어오면 망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이 교회 속에 들어오면 교회는 침몰하고 맙니다. 그래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별되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전혀 안 들어오게는 못합니다. 그러나 들어온 물을 퍼내면 즉시 퍼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즉각 즉각 회개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갖고 죄를 회개해야 하고 이단들이 교회 속에 들어오는 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양보하고 하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핍박에 대한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3절‘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 당시 에베소 교회는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섬기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의 악한 유혹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잘 견디어 내며 열심히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런 핍박과 고난은 오늘날 교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라는 미명하에 강요되는 각종 우상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고사(告祀)지내는 것과 조상숭배 제사, 그리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동성애 문화와 간통을 용인하는 문화, 이런 것들과 담대히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힘이 듭니다. 어렵습니다. 주변 사람과 갈등이 있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당하는 불이익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야 합니다. 힘들어도 잘 견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수고를 요구하십니다. 왜 인내하고 견디어야 하나요? 약1:4절‘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3. 주님께 받은 책망을 살펴봅니다.
우리 주님은 에베소교회의 훌륭한 점을 들어 먼저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지혜입니다. 먼저 칭찬을 들은 후 책망을 듣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책망을 받아 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가 받은 책망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4절‘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에베소교회가 주님께로부터 책망들을 만한 일이 꼭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믿을 때 가졌던 그 첫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잊어버렸다고 할 수도 있으나 성경은 ‘버렸다’고 합니다. 그 말은 ‘나의 나 된 것은 그분의 은혜’라고 믿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내 노력의 대가인 줄 착각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권태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도 비슷하잖습니까? 신혼 시절에는 문자 그대로 밀월의 생활을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얼마나 간절히 사모합니까? 상대방하고 결혼하지 못하면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결혼 후 얼마 가지 못해서 식어버립니다. 그래서 파탄의 비극을 겪게 됩니다. 왜 그토록 사랑하던 사이가 원수가 되어 헤어집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속았다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속을 들여다보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진리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그러나 주님 사랑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와 주님의 만남은 인격적인 연합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주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병을 고쳐 주어서 따라다녔습니다. 배불리 먹게 해 주어서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어지자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영적 권태기에 처해있지 않는가를 살펴보세요. 왜 교회 가는 것이 힘들까? 왜 목사님 설교가 귀에 잘 안 들어올까? 왜 예배드리는 것에 감격이 없을까? 외적인 요인도 있을 것이나 혹 그것이 영적인 권태기일 수 있습니다. 배부르고 등이 따시니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받은 은혜 몽땅 잊어버리고 사니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진 것입니다. 권태기의 특징은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경우라면 그게 첫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힘이 생기고 짜릿한 기쁨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합니다. 4절‘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은혜 받으면 왜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지, 교회에 오면 교회를 떠나기 싫고, 성경을 보면 성경을 덮기가 싫고, 앉으나 서나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저 어릴 때지만 새벽에도 교회로 달려가서 한 시간 기도하고, 저녁에도 달려가서 한 시간 기도하고, 종일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생각으로 꽉 찼어요. 저는 이 처음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렘2:2에 ‘네 소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이고 했습니다. 나이 먹으면 사랑도 계산적이지만 어릴 때 첫사랑은 얼마나 순수하고 뜨겁습니까? 그런 사랑 한 번씩은 다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말하는 소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조강지처는 버리지 말라고 그럽니다. 조강지처는 아무리 어려워도 남편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도 조강지처여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 말고 세상 다른 것이 내 마음을 차지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존 비비어의 ‘거룩한 열정’에 보면 아시아 어느 공산국가에서 온 여성 사역자를 만났는데 그 나라에서는 핍박이 심해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수없이 체포된다고 합니다. 아마 중국이나 북한을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하여 재소자 다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자가 집회를 마칠 무렵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왜 우십니까’ 그러자 ‘저는 우리가 자유를 얻을까 두렵습니다. 자유가 생기면 교인들이 물질적 세속적으로 서구교회의 일부 교인들처럼 주님을 떠나갈까 두렵습니다’ 하더랍니다. 신앙의 자유가 우리를 세속화시킨 것은 아니지만 평안하고 형통할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잊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8:12-14절‘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경고 했습니다. 은혜 받아 주님을 위해 일생과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었던 그 때의 그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4.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 주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 세 가지로 훈계하신 것을 살펴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하십니다.5절‘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무엇 때문에 그 첫사랑을 잃어버렸는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셨던 그 은혜, 그 구원의 감격, 그 신령한 복을 왜 무엇 때문에 잃어버렸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환경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원인이 자신의 영적 교만과 자만에서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생각하라’는 말은 영어로 말하자면 ‘Think’가 아니고 ‘Remember’ 입니다.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그의 신실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없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베풀고 나누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못된 습성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받은 것은 속히 잊어버리고 남에게 베푼 것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기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잊은 것을 되찾아 감사와 감격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첫사랑만 회복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가 기억되고 받은 사랑이 깨달아지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순수하고 완전했던 그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벧전2:2에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갓난아기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시기가 있습니다. 은혜 받아 즐거워하던 그 때의 믿음입니다. 정말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온전히 아멘으로 수용하고 기쁘고 열린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순종하던 그 믿음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은혜가 떨어지면 마음은 오염되고 행위는 변질되어 그 본래의 모습들을 잃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순수하고 아름답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잃고 세상으로 죄악으로 교만으로 불신으로 타락해가더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사라지고 인간의 마음으로 차더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악인을 보면 성령의 마음이 되어 슬퍼 울며 기도해 주었지만 은혜 떨어지면 단순한 육신적 분노로 변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통탄해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순수했어요. 눈물이 있는 믿음이었어요. 진리를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충성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회복하자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라’하십니다.5절 중간에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하셨습니다. 여러분! 회개(悔改)가 뭡니까? 그 죄를 죄로 느끼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느끼기는 하는데 돌아서지 못하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양심의 가책이 회개가 아닙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뭘 회개해야 하나요? 예배소 교회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첫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깨달아야 회개하고 회개해야 청산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범하고도 죄를 죄로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셔서 죄를 발견케 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때 돌아서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면 회개를 안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이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깨닫고 회개하는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하십니다.5절 마지막을 보세요.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 말씀은 초신자 때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했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했다고 해 놓고 열매가 없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진정 회개를 했다면 열매를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개인이든 교회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에 합당한 삶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주일을 지키십시오. 주님을 사랑합니까? 예배를 잘 드리십시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까? 맡겨진 사명에 목숨을 거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회복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목숨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헌신을 하려는데 뭔가 망설여집니까? 사람 때문에 헌신을 주저합니까? 체면 때문에 신경이 쓰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면 아무리 큰일을 맡아도 무겁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희생을 하여도 그것을 희생이라 생각지도 않고 아깝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중심으로 사랑하는가’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사랑을 시험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물으십니까? 아시면서 왜 물으십니까? 이유는 그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처음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렘6:16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 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옛적 길, 선한 길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될 마땅한 도리를 뜻합니다. 그 옛날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어진 변치 않는 참된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초대교회처럼 성령이 충만하고 사랑이 풍성하고 부흥하는 교인과 교회가 되자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 되어야 할 것은 신학적 진리가 회복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다 된 것이라는 잘못된 사상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났다면 이제는 영적으로 장성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 삼년 반이나 믿음의 훈련을 받고 참된 신앙을 고백했지만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 구원의 시제는 이미와 아직입니다. 우리는 이미에 견고히 서야 하지만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가 바로 되어야 은혜생활이 가능합니다. 교리는 역사 속에서 발전을 거듭했고 더 분명해지고 더 완전해져간 면이 있지만 일부는 본질에서 크게 이탈하고 있습니다. 반면 초대교회의 교리는 비록 단순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삶의 모본을 직접 받은 신앙이었기 때문에 큰 맥락만큼은 너무나도 바르고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활기 있게 신앙생활하고 더욱 예수 이름이 높여지고 성령의 충만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교리가 바로 되면 예배가 바로 되고 예배가 회복 되면 성도의 삶이 회복 되고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바꾸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진리 없이 영적 예배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경고입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가 없어질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보면 에베소교회는 회개하지 않아서 결국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을 받고 승리할 수 있나요?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귀 있는 자’라는 말은 말씀을 들을 영적인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귀는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귀가 없다는 말은 영적으로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위험한 상태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은혜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이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알지만 잃어버렸다면 말씀과 성령이 함께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처음 믿음, 처음 사랑, 처음 진리를 회복하여 주님이 약속하신 온갖 아름다운 것과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로 만족하실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 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이기는 자에게 생명나무 열매가 있다고 합니다. 그 열매가 뭔가요? 영생의 열매입니다. 누가 이기는 자가 됩니까? 그 대답은 요한일서 5장 4~5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외에 방법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왜죠? 우리 주님이 이미 이기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이기는 교회, 이기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6.3.6.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