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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차례 |
침입기간 |
주요 침입, 전투지 |
주요 지휘자 |
주요 사항 |
제1차 침입 |
1231.8-1232.봄 |
안주, 철주, 귀주, 자주, 廣州, 충주 |
박서, 최춘명, 이원정, 이희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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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침입 |
1232.8-1232.12 |
廣州, 용인, 대구 |
이세화, 김윤후(승) |
강화천도(1232.7), 적장 살례탑 사살 |
제3차 침입(1) |
1235.윤7-1235.12경 |
지평(양평),안주, 안동, 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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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236.6-1237.초 |
황주, 서울, 죽주(안성),아산, 예산, 부안 |
송문주, 현려. 전공렬, 박인걸 |
팔만대장경 조판작업(1236-1251) |
(3) |
1238.8경-1239.4 |
개경, 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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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 소실(1238.12경) |
제4차 침입 |
1247.7-1248.3 |
수안,염주,전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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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 사망, 최항의 정권 계승(1249) |
제5차 침입 |
1253.7-1254.1 |
철원,춘천,원주,충주,양양 |
대금취, 이주, 최수, 박천기, 정지린, 김윤후, |
적장 야굴 소환 |
제6차 침입(1) |
1254.7-1255.2 |
충주, 진천, 상주, 교하(파주), 산청 |
장자방, 임연, 홍지(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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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255.8-1256.10 |
충주, 현풍, 光州, 신안(압해도) |
송군비, 한취, 이천 |
몽고, 연안의 섬 침공 |
(3) |
1257.5-1257.10 |
태천, 개경, 직산, 전라도 |
정인경, 이수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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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258.6-1259.3 |
개경,충주,강원도(금강산) |
안홍민 |
적장 차라대 사망(1259.3경) |
이상과 같은 사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몽고군의 고려 침입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위와 같다.
1259년 고려 태자의 몽고 입조를 계기로 몽고군의 군사적 침입은 종식하였지만, 개경환도는 1270년에야 이루어진다. 개경환도는 무인정권의 붕괴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였으며, 그것은 고려정부의 몽고에 대한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반몽세력은 삼별초를 중심으로 다시 봉기하여 진도 혹은 제주도를 거점으로 1273년까지 몽고에 저항하여 항전하였다.
몽고군이 경상도에 진입한 것은 고종 41년(1254)도의 제 6(1)차 침략과 이듬해 6(2)차 침략 때의 일이다. 그중 고종 41년의 경우는 차라대의 주력이 경상도의 남해안까지 진입해 들어옴으로써 심각한 피해를 야기하였는데 상주산성에서 몽고군을 패퇴시킨 사건도 이때에 이루어지게 된다.
2. 1254년 상주산성 승첩
고종 41년(1254) 7월 압록강을 건넌 차라대의 몽고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 9월에 충주산성을 거쳐 경상도로 진입하였는데 상주산성에서 황령사(黃嶺寺) 승(僧) 홍지(洪之)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사실이 10월 19일자 기록에 등장한다. 상주산성에서 퇴각한 몽고군은 각처에서 보복적인 구략을 일삼는데, 이후 丹溪(경남․산청군)에까지 내려갔다.
몽고군은 경남지역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대구를 경유하였다. 이 사실은 이듬해 몽고군의 철수과정에서 포로로 잡혀가던 대구민(大丘民)이 도망, 강도정부에 당시 몽고군의 상황을 제보한 사건이나, 대구 인근의 거민(居民)들이 팔공산의 공산성(公山城)에 입보 하였던 사실에서1) 확인되어진다. 또한 원종 원년 2월, 원으로부터 환국하는 원종을 따라 고려에 입국한 康和尙(康守衡)에 대하여 그가 진주사람으로 일찍이 포로되어 몽고에 들어갔던 자라고 소개하고 있거니와 몽고군이 진주에 들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고종 41년 차라대군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몽고군의 진로는 상주로부터 대구, 단계(산청군)를 경유, 최씨정권의 경제적 기반지인 경상도 남해안의 진주 지경까지 남하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 몽고군은 대략 동년 말에 경상도에서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 41년(1254)도 차라대의 침략은 고려 각처에 혹심한 피해를 입혔다. 고종 41년 10월, 재신(宰臣)들이 대묘에 기고(祈告)한 글에 의하면 “백성은 세(勢)가 궁하여 죽은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고 산자는 노예가 되어 부자(父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妻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한다.”2) 하였고, 또
이해에 몽병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 6천 8백여 인이요, 사륙된 자는 무려 헤아릴 수 가 없었으며, 지나가는 주부(州部)마다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고려사』24, 고종세가)
는 것이다. 한 해에 포로만 20여 만이라 한 것은 이 전쟁이 얼마나 고려에 많은 피해를 입혔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고종 41년은 대몽전쟁 사상 고려의 피해가 가장 컸던 시기였던 것 같고, 이 기간 몽고군의 주요 작전 지역이 경상도 지방이었던 만큼, 무수한 인명이 살육되고 포로로 잡혀가는 현상은 특별히 경상도 지역에서의 내용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당시 몽고군에게 경상도민의 다수가 포로로 잡혀갔던 것은 앞에 언급한 대구민이나 진주 강화상의 예에서도 입증되고 있는 바이다.
몽고군에 의한 피해는 직접 적군의 칼날에 죽음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는 것 이외에도, 침략군을 피하여 산성 등지에 황급히 입보하여 목숨을 보존하였던 입보민들에게도 심각한 것이었다. 다음은 당시 차라대군을 피하여 대구 팔공산 지역으로 피란하였던 사람들의 경우이다.
제도(諸道) 군현의 산성과 섬에 입보한 자들을 모두 출륙케 할 때 공산성에 입보한 군현으로 양식이 떨어지고 길이 먼 자는 굶어 죽는 자가 심히 많았으며 노약자가 (거꾸러져) 구렁을 메우는 지역이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를 나무에 매어두고 가버리는 자도 있었다. (『고려사』24, 고종세가 42년 3월)
차라대군의 재침은 고종 42년(1255) 8월에 다시 재개되어 해를 넘겨 이듬해 고종 43년으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고종 43년 상반기의 기록에는 당시 몽병(蒙兵)이 전라도와 경상도 양 지역에 동시에 진입하였음을 보여준다. 차라대의 주력은 전라도 방면에 깊이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종 43년도 경상도의 몽고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으리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경상도에 침입한 몽고군은 같은 해 4월, 현풍현(달성군) 인근에 출현하여 정박중인 현풍현인(玄風縣人) 40여 척을 추격, 남녀 재물을 빼앗고 권농사(勸農使) 김종서(金宗敍)를 죽였다.
현풍현민들은 몽고군의 침략에 대하여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 선박으로 피란하였다. 이것은 당시 경상도 여러 지역에서 행하여진 피란의 한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같은 피란은 수령, 혹은 현풍의 경우에서와 같이 중앙에서 파견되어온 관리에 의해 지휘된 집단적인 것이었다. 권농사는 바로 전년인 고종 42년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인데3) 그것은 농업과 관련된 것이라기 보다는 주로 각도 군현민들의 입보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풍현인들은 낙동강 중류에서 40척 선단을 구성하여 인근의 군현에 정박 도중 몽고군의 기습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의 피습현장은 현풍에서 얼마간 떨어진 인근 군현이었다. 건너편 대안(對岸)의 고령군 지역이거나 보다 남쪽에 있는 창녕․합천(경남) 지역이 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고종 43년도의 몽고군은 경상도 북부지역을 종단하여, 아마 경남 지경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종 43년 몽고군의 침입에 당하여 경상도의 여러 지역은 수령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하여 산성 혹은 섬으로의 입보책이 광범히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대장군 송길유(宋吉儒)가 경상도의 수로방호별감(水路防護別監)으로 파견되어와 입보책을 혹심하게 추진하였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고종 43년도 정부의 경상도민에 대한 적극적인 입보조치는 아마 고종 41년도의 전쟁에서 다수의 경상도민이 몽고군에 의해 포로 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가운데 경상도민은 전쟁과 피란의 갈래에서 안팎으로 심각한 고통을 경험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침략군과 직접 맞서 무력항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고종 41년(1253) 차라대군의 경상도 침구시 상주산성에서의 항전이 그것이다. 고종 41년(1253) 10월, 상주산성을 공격했던 차라대 휘하의 몽고군은 경상도 진입 직전, 충주지역에서 먼저 군사활동의 실패를 경험한다.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휘몰아쳤고 충주민이 정예를 뽑아 반격하였던 것이다.
차라대의 몽고군이 충주산성에 대한 공성전을 벌인 기간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전후 상황을 고려할 때 대략 9월 초부터 10여 일동안 전개된 작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충주민들의 강력한 대항으로 이들 몽고군이 공격을 포기하였던 충주산성은 바로 꼭 1년 전 고종 40년 10월부터 12월에 이르는 70여 일간 몽고군 주력부대의 집중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격퇴시켜 철수케 하였던 격전의 현장이다. 차라대의 몽고군이 충주인들의 항전에 쉽게 공격을 중단 남하하였던 것은 바로 그 전년도의 패배와 실패에 교훈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대군의 집중적인 전략지역이 중부지역이 아닌 경상도 지역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9월 중순 충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공성전을 포기하고 경상도 지역으로 남진하였던 차라대군이 뒤이어 집중적으로 공성작전을 벌인 곳이 바로 상주산성이었다. 상주산성에서의 전투는 전투의 규모나 의의에 비할 때, 그 내용을 알리는 기록은 극히 소략하다. 『고려사』고종세가의 41년 10월 19일자의 기록에
차라대가 상주산성을 치거늘 황령사(黃嶺寺)의 승(僧) 홍지(洪之)가 제4관인(第4官人)을 사살하였다. 사졸의 죽은 자도 과반수에 달하여 드디어 (적이) 포위를 풀고 퇴거하였다.
고 한 것이 관계기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차라대의 충주산성 공격 및 남하에 대한 기사가 9월 14일자였던데 비추어 10월 19일자에 기재된 상주산성의 전투기록은 여몽간의 공방전이 대략 20여일 이상의 장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전투상황에 대한 여타의 자료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중에서 위의 기록은 당시 전투가 매우 치열하였고 또 고려의 승리로 귀결되었던 사실만 전하고 있다.
승 홍지가 속해 있었던 황령사는 상주군의 북쪽, 은척면(銀尺面) 황령리(黃嶺里)에 위치하는데,4) 이곳은 경상도의 초입부(初入部)에 해당한다. 몽고군이 충주로부터 대원령(大院嶺)을 넘어 남하하자 상주인근 지역민들은 산성에 입보, 적을 맞아 싸웠던 것이다. 당시 황령사의 스님이었던 홍지는 휘하 승도들을 중심으로 입보한 상주민을 규합, 자체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어 차라대군의 공격에 대항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몽고군은 제4관인이라는 고급 지휘관이 사살 당하였고 사졸의 죽은 자가 과반이라 하여, 전투가 고려의 큰 승리로 종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상주산성과 백화산성
황령사의 승 홍지의 지휘로 차라대의 몽고군에게 타격을 주었던 전투지 상주산성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기록상으로 분명하지 않다. 각종지지(地誌)를 참조할 때 상주의 대표적인 성은 병풍산성(屛風山城)과 백화산성(白華山城)의 둘을 꼽을 수 있는데, 위의 두 성 중 병풍산성은 상주 동쪽 10리 지점, 낙동강변의 병풍산에 위치, 주(州) 관아와의 지리적 근접성 등을 고려할 때 쉽게 입보가 가능한 성곽이다.5) 이에 비해 백화산성은 상주로부터 서쪽으로 50여리 떨어진 속현(屬縣) 중모현(中牟縣)에 소재하는 데 “높고 험하며” 성안에 계곡과 더불어 샘이 다섯, 그리고 군창의 시설이 있었던 것을 보면,6) 방어적 측면에서는 훨씬 유리한 여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백화산성은 소백산맥의 줄거리에 위치하며 계곡이 깊고 또한 험준한 산록이 위치해 있다.
이제 여기에서 고종 41년 10월의 상주산성 전투를 다시 살펴보면 전투의 지휘가 정부의 공식직함을 갖지 않은 지역에 거주하던 승려에게 맡겨진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관리들이 이 성에 입보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 상주의 관리들은 관아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병풍산성에 입보하고 있었고, 황령사의 승려를 비롯한 인근 주민 다수가 백화산성에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백화산성은 물이 풍부하고 지리적 측면에서도 방어요건이 보다 우월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입보한 상주민들이 황령사 승 홍지의 지휘 하에 성을 지키는 한편으로 유격전의 방법을 활용하였음이 분명하다. 항몽 승전지 ‘상주산성’이 백화산성일 것이라는 이러한 추정에 확증을 주는 것은 조선조 상주읍지 『상산지』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충주로부터 상주 백화산성을 공격하므로 황령사의 승 홍지가 화살을 쏘아 (적의) 관인과 사졸의 죽은자가 과반이었으므로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증보)상산지』고적조)
이 기록은 『고려사』 고종 41년 상주산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면서 ‘상주산성’이 실제로는 ‘백화산성’임을 명시한 것이다. 이에 의하여 백화산성에서의 승첩이라는 공간의 문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화산성이 대몽항전 당시 상주민들의 일반적인 입보처로서 활용된 성곽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료도 있다.
고려 때에 상주의 아전(吏) 김조(金祚)에게 만궁(萬宮)이라는 일곱 살 난 딸이 있었는데 부모가 단병(丹兵)을 피하여 백화산성(白華山城)으로 가다가 쫓는 군사가 가까워지자 창황하여 길가에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사흘 뒤에 수풀 밑에서 찾았다. …… 15세가 된 뒤에 호장(戶長) 김일(金謐)에게 출가하여 록(祿)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득배(得培)이다. (『세종실록지리지』상주목 인물조)
공민왕조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상주인 김득배(金得培)(1312~1362)의 선계(先系)와 관련한 위의 기록7)은 고려시대 외적의 침구시 상주민들이 난을 피하여 백화산성에 입보하였던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단병(丹兵)의 침입이라는 것은 대몽항전기의 몽고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단병(丹兵)’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 사건을 고종조 거란족의 침구(1216-1219)와 연결해 볼 수도 있는데, 당시 거란족이 상주에까지 침입한 사실이 없는데다 연대적으로도 들어맞지를 않는다. 즉, 외적의 침입은 김득배의 증조모인 만궁(萬宮)이 7세였을 때의 일인데, 15세에 출가하여 큰 손자 득배가 충선왕 4년(1312)에 출생한 사실을 전제할 때 1백년의 상거가 되어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 인용한 상주민들의 백화산성 입보는 거란족 이후의 사건인 몽고침입기, 즉 고종조 말년의 일로 파악된다.8) 이러한 전제 가운데서 보면 상주의 아전 김조(金祚)가 몽고군을 피하여 백화산성에 입보하였던 이 사건도 고종 41년 9월경, 차라대의 상주 침입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9)
백화산성이 구축된 백화산은 소백산맥의 지맥으로 예로부터 빼어난 산수로 이름이 있는 곳이다.
백화산은 중모현 서쪽에 있는데 상주와의 거리는 77리이다. 소라껍데기 같은 모습의 우뚝솟은 봉우리들이 가로로 펼쳐져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아래로는 큰 내가 산을 감싸고 흘러 남으로 沙潭에 이르러서는 혹 맑고 깨끗한 물이 깊어져서 못 골(潭洞)을 이루기도 하고, 혹은 흩어져 비단폭을 이루기도 한다. 개울을 따라서는 가파른 절벽이 깎아 새운 듯 섰는데. 절벽 사이에는 묵은 소나무와 기이한 화초가 많다. (『상산지』(蒼石本))
이 백화산의 최고봉인 한성봉(933m)을 중심으로10) 그 남쪽 계곡을 내외 2중의 포곡식으로 둘러쌓은 것이 백화산성이다. 성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백제 전초기지로 유명한 금돌성(今突城)으로 간주되고 있거니와, 이 성의 전체 둘레는 5,553m, 총 연장의 길이는 7,165m에 달한다.11)
현재 백화산록(白華山麓)의 계곡, 저승골은 몽고군이 고려군의 유격에 협공당하여 몰살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12) 그 밖에 방성재, 전투갱빈 등의 지명이 전한다. ‘방성재’는 홍지 등에게 격파된 몽고군의 패잔병이 방성대곡을 하며 넘어갔다는 고개이고, ‘전투갱빈’은 몽고군의 침입 때 전투가 일어난 ‘강변’이라는데, 그 위치는 모동면 수봉리 沙潭에서 500m 전도의 하류에 해당한다.13) 몽고군과의 대대적 전투를 뒷받침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들 지명 전설의 공간을 몽고군과의 전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과는 다른 주장도 있다. 저승골의 경우도 금돌성에 이르는 도중에 암벽으로 이루어진 이 절벽 같은 작은 계곡을 경유할 이유가 없다고도 하고 이 때문에 차라리 방성재나 전투갱빈이 실제 전투지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저승골의 이름은 몽고군 격살의 현장이라기 보다 “너무 위험하여 도저히 오르기가 어려운 계곡”이라는 의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14)
고종 41년(1254) 차라대 몽고군에 대한 상주산성에서의 전투는 『고려사』에 기록된 경상도민의 유일한 항전 사례이다. 그런데 한기문 교수는 『湖山錄』의 시를 근거로 1254년의 상주산성 전투가 상주에서의 세 번째 전투에 해당한다고 하였다.15) 『湖山錄』에 의하면 산양현의 申敏恕가 眞靜國師 天𩑠(만덕산 백련사 제4대 주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주는 …… 비록 두 번이나 병화에 거듭 짓밟혀 남은 것이 없을 정도로 쓸쓸하게 되었지만, 예부터 하늘이 좋은 세상을 만들 때는 異人을 내려 보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호산록』「游四佛山記」)16)
진정국사의 이 기록은 대략 1244년 경이므로, 1254년 백화산성에서의 전투 이전에 상주는 이미 2차례 몽고의 피해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1254년 이전, 2회에 걸친 몽고군의 상주 침입은 언제였을까. 이에 대하여 한 교수는 1232년(고종 19) 대구 부인사 대장경의 소실이 있었던 시기와 1238년(고종 25) 경주 황룡사의 소실의 시기를 들었고, 아울러 1247년(고종 34)에도 경상도의 안찰부사 전광재(全光宰)가 경주에 출진(出鎭), 선승(禪僧)을 모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몽고군의 경상도 내지 상주 침입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였다.17) 앞에서 말한 1247년 경주에서의 선승 집회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정미년(고종 34, 1247)에 금성(경주)에 출진, 선승들을 불러 모으고 서룡선로(瑞龍禪老) 연공(連公)을 초청 법회를 주관케 함으로써 몽고의 침입을 물리쳤다. (『고려대장경』제45권(補遺)
이 자료를 근거로 당시 몽고군이 경주에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18) 이 자료의 문면(文面)만으로는 그 점을 확신하기는 어렵다. 이 시기 몽고군 부대의 일부가 전라도와 충청도 충주에까지 이르기는 하였으나 경상도에까지 입구하였다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19)
고종 19년(1232) 살례탑 몽고군의 선발부대는 그 하반기에 대구 부인사 소장의 대장경을 불태웠는데 기록은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이 부대는 충주와 상주를 거쳐 대구에 침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고종 25년(1238) 경주에 침입한 때에도 역시 상주를 경유하였을 가능성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몽고군이 상주를 침입 혹은 경유하였을 때 상주와 그 주변 지역민이 고종 41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화산성에 대거 입보 피란하였을 것이다. 상주의 북쪽, 문경 경계와 가까운 황령사의 승 홍지가 백화산성으로 옮긴 것도 당시 백화산성에 원근에서 많은 피란민이 집결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때에도 의병과 피란민이 백화산성에 입보하였다. 당시 상주의 인물 월간(月澗) 이전(李전)과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우애를 담은 <형제급난도>(도 유형문화재 217호)는 임란 당시 의병과 상주민들이 이를 이용하였던 사실을 전한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봄 백화산 기슭의 향병소에서 왜적의 급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곽란을 일으킨 아우 창석을 업고 백화산성으로 피하여 구사일생 하였던 것이다.20)
고종 41년(1254) 상주승첩에 대해서는 전투의 상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 지방 각처에 일어났던 여타 전투의 경우처럼 기본적으로 기록의 소략함 때문이다. 상주산성의 승첩은 몽고군의 고급 지휘관을 포함한 다수의 적군을 궤멸시킨 큰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기록은 겨우 승전의 사실 정도만을 간략히 전하고 있을 뿐이다. 상주산성의 승첩에 대해서, 관계기록이 극히 간략히 처리된 것은 일면 관변측(官邊側)의 정보 부족과도 관련이 있다. 상주산성에서의 항전은 중앙정부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은 채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위적(白衛的) 항전이었다는 점이 그 중요한 특징이다. 이들은 백화산의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적을 궤멸시키기까지 이른 것이다. 상주승첩이 지역민들의 순수한 항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자연히 그 사실적 내용이 간과되고 묻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1254년의 상주승첩은 고려의 대몽항전사에서 1232년의 처인성 승첩과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전투가 모두 지역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항전이었다는 점, 지휘자가 관리가 아닌 현지의 승려였다는 점, 전투의 경과가 고려 측의 큰 승리로 귀착되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이러한 점에서 상주산성의 승첩은 적장 살례탑을 사살했던 처인성 승첩과 함께 대몽항전사의 중요한 전투 사례로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전투가 극히 간략한 한마디의 언급으로 밖에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것은 경상도 각처에서의 몽고군의 구략과 유린에 대하여 자위적 차원에서 항전하였을 많은 사실들이 기록의 한계로 말미암아 침묵 속에 묻혀버렸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4. 대몽항전의 기념물들
대몽항전 기념물은 당대에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것은 항전 이후 고려정부가 몽고에 복속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부터 많은 기념비와 기념물을 가지고 있는 임진왜란의 경우와는 퍽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몽항전의 기념물은 1970년대 이후 근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대몽항전 관련 기념물은 강화도, 진도, 제주도의 삼별초 관련 이외에는 춘천과 충주에 불과하다. 그나마 본격적 기념물의 성격은 진도의 배중손 동상과 충주의 기념탑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춘천 봉의산 순의비
야굴의 몽고군은 고종 40년(1253) 9월 20일 춘주성(춘천)을 도륙하였다. 특히 춘주의 경우 ‘도륙’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몽고군은 고려의 포로, 그리고 몽고에서부터 동반하였던 추밀원 부사 이현 등을 동원, 먼저 춘주성의 항복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거부되자 춘주성(춘천 봉의산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성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전투는 대략 보름 정도 지속되었는데 싸움이 장기화하자 문학 조효립이 가족을 동반, 먼저 자결하였다. 안찰사 박천기는 마침내 결사대를 조직, 적위 포위망을 돌파하는 최후의 시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아난 자가 없었다. 성이 함락 당하자 성 안에 들어와 있던 춘주민의 대부분은 적에게 도륙 당하였다.
춘주성 전투의 현장은 현재 춘천 시내에 소재한 봉의산성(봉산성)이다. 성벽을 묘사한 화강석 판석을 쌓아 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자연석을 활용한 비석의 본체를 올렸다. 비석 중앙에 종서로 ‘봉의산 순의비’라고 비명을 새긴 오석을 부착하였다. 기단부에는 동판에 봉의산성에서의 항전을 묘사하였다.
2) 충주 대몽항쟁전승 기념탑
충주는 대몽항전 기간동안 가장 치열한 전투가 되풀이 되었던 대표적인 도시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종 40년(1253)의 전투이다. 10월 10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70 여일을 끌었는데 몽고군은 주장 야굴 지휘하의 주력부대였고, 반면 충주산성에는 1232년 처인성에서 적장 살례탑을 저격한 인물로 유명한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김윤후는 성안에서 식량이 다하는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졸들을 독려하고 특히 노비들의 적극적 참전을 유도하기 위하여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귀천을 물론하고 공에 따라 상과 벼슬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공약하는 등 진력하였다. 적은 마침내 전투를 포기하고 고려로부터 철수하고 말았다.
충주산성의 현장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다. 한동안 남산성이 충주산성이었다고 생각하였으나 남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충주산성설은 부정되었다. 그에 대신하여 대림산성 설이 부각되어 있으나 아직 확정된 단계는 아니다. 이 때문에 충주산성 기념비는 1253년의 현장에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건립하였다. 그것은 1253년 전투만이 아니라 대몽항전에서 있었던 충주지역의 모든 전투를 포함하는 의미일 것이다.
화강석 기단에 석주형 본체를 올리고 기단에는 김윤후와 민중들이 청동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기단에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라 쓰고, 본체의 상단에 ‘1253’이라는 연대를 표시하였다. 기념탑 배후에는 배경석을 담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기념비문 등을 설치하였다. 현대적 감각으로 설치한 작품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강화 삼별초 출발지
삼별초는 최씨정권시대에 설치된 고려의 군사기구로서 특히 대몽항전을 지속하는 무력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270년 국왕 원종이 개경 환도를 단행하고 몽고에의 복속을 수용하였을 때 이에 정면으로 대항한 것이 삼별초였다. 그러나 강화도 방어에의 한계를 직감한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고려의 정통정부를 자처하며 진도로 그 거점을 이동하였던 것이다.
강화읍의 외포리 항구에 삼별초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삼별초군 호국항몽 유허비’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는데, 이 외포리항이 삼별초군의 남행 출발지라는 인식하에 사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외포리 항은 지금도 석모도, 교동도 등 강화도의 부속도서를 왕래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항구이다.
4) 진도 배중손 동상
1270년 8월 진도에 입거한 삼별초를 지휘한 것은 배중손이었다. 배중손은 진도 삼별초의 상징적 인물인 것이다. 그는 이듬해 5월 여몽연합군의 대공세로 진도가 함락되면서 전몰한 것으로 믿어진다.
진도 임회면에 배중손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팔각의 높은 화강석 대석 위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배중손 장군의 동상이다. 갑옷을 입고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 손은 불끈 쥔 주먹을 하늘로 들어 올린 모습이다. 그는 그 진도에서 한 줄기 불꽃이 되고 스러졌다.
5) 제주 삼별초 항몽순의비
1271년 진도 함락에 따라 남해 연안의 삼별초는 김통정의 지휘하에 제주도에 집결하였다. 이 제주도에서 1273년까지 남해, 서해 연안을 위협하며 항전을 지속한다. 북제주군 애월읍에 시설된 항파두리성은 이 제주 삼별초의 거점이었다. 항파두리성은 1970년대 대대적인 정비작업이 이루어졌다.
항몽순의비는 제주 애월읍 항파두성 내성에 조성된 삼별초의 기념비이다. 화강석의 대석에 오석의 판석을 부착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항몽순의비’라는 비석명을 새겼다. 항몽 기념시설로서는 가장 먼저 건립된 기념물이다.
맺 는 말
본고는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이에 대한 항전의 양상을 경상도라는 지역에 한정하여 검토하여 보았다. 경상도 지방은 그 지리적 특성과 관련하여 왜구의 침입 이외에는 대륙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별달리 경험한 바 없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고 침략기에는 이들의 침입이 서북면(평안도)으로부터 경상도 방면을 향하는 대각선의 노선을 주로 선정함으로써 중도 좌절로 진입에 실패한 것까지 포함, 경상도 방면은 도합 11회 중 9회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경상도 지역은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이 지역이 전라도와 함께 대몽항쟁기 무신정권과 강도정부의 주요 경제 기반이었던 만큼, 농민들의 고통은 이중적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몽고군의 경상도 침입과 경상도민의 항전에 대한 기록은 극히 단편적이고 소략하여 그 실상을 잘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고종 18년(1232)의 유명한 대구 부인사 대장경 소실사건, 그리고 고종 25년(1238) 경주 황룡사의 재난 등은 그 기록의 단편성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에 의한 피해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웅변하는 것이다. 황룡사의 피해는 고종 25년 윤 4월이라 한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해 겨울에 있었던 일이었으며 당시 몽고군의 심각한 피해는 경주 전체에 미쳐 경주는 도시구조 자체가 크게 변경 위축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상주산성 전투는 차라대의 몽고군이 처음으로 고려를 침입했던 고중 41년(1254) 10월, 6(1)차 침략 때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서에 간략한 기록이 보이고, 전투 결과에 대하여서는 적의 “제4관인”으로 표현된 차라대 휘하의 유력한 고급 지휘관이 사살되고, 몽고군 사졸의 “죽은 자가 과반수”라할 정도의 승첩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대몽항전사 속에서 상주산성 전투는 별달리 주목되지 못하였다. 이 전투는 상주 인근의 피란민이 중심이 되고 황령사의 홍지라는 승려가 이를 지휘, 정부조직과 전혀 연관을 가지지 않은 순수한 자위적 항전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이 전투의 성격은 고종 18년(1232) 살례탑을 사살하였던 처인성 승첩과 매우 흡사한 면을 갖는다. 전투 현장인 상주산성은 현재 백화산(白華山) 정상에 있는 백화산성(금돌성)이라고 하는 사실 또한 본고의 논증을 통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이 지역은 S자형의 깊은 산곡(山谷)이 특히 발달하여 당시 산성의 상주민들이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이용, 일종의 유격전에 의하여 적을 패퇴 시킬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몽항전의 실제 양상에 대하여 매우 단편적인 지식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실정에서 소략하기는 하지만 이 상주산성의 전투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고려 몽고전쟁사 연표
고려
1196.4 최충헌의 집권(최씨 무인정권의 성립)
1211.5 금에 파견한 장군 김양기 등이 몽병에게 살해 당하여, 금이 유골을 거두어 보냄
1216.8 거란족의 침입으로 방어군으로 3군을 편성하여 파견
1218.12 거란족의 고려 침입을 핑계로 몽고군, 고려에 처음으로 입경
1219.1 거란 침입으로 강동성의 싸움에서 여몽군이 연합전선 구축
9 최충헌 사망, 최우의 집권
1224 금 연호 사용의 정지
1225.1 몽고 사신의 피살 사건으로 여몽관계 단절
1230 최우, 야별초(삼별초의 전신) 설치
1231.8 몽고의 1차 침입, 철주 함락.
9 귀주 포위
10 고려의 방어군(3군)이 안북성(안주)에서 패퇴함
11 몽고군, 개경 부근에 침입
12 몽고와 강화
1232.1 몽고군, 고려에서 철수
6 고려, 강화도로 서울을 옮김
8 몽고의 제2차 침입
11 광주부사 이세화, 광주성(경기도)에서 몽고군 격퇴함
12 김윤후, 용인 처인성에서 살리타 사살
1234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고금상정예문 인쇄
1235. 윤7 3차 침입 몽고군 선봉, 안변에 이름
8 용강, 함종, 삼등 함락
10 동주성 함락
1236. 8 몽고군, 남경, 평택, 아산 등에 주둔
9 온수군 및 죽주(안성) 몽병 격파
대장도감 설치, 팔만대장경 조판 시작
12 대흥(예산) 수령이 몽고군 격퇴
1237 강화에 외성 축조
1238.윤4 몽병, 경주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움
1241.9 이규보 사망
1243.1 최우, 최이로 개명
1247.7 4차 침입 몽고 아무간, 고려에 침입하여 염주에 주둔함
1249.11 최우 사망, 최항 권력 계승
1250.8 강도에 중성 축조
1251.9 팔만대장경 완성
1253.7 몽고의 제5차 침입
8 몽고군 동주산성(철원) 함락하고 도륙
9 춘주성 함락, 도륙
10 원주성에서 방호별감 정지린이 몽고군을 격파함
1254.7 몽고군 제 6차 침입
9 충주산성 공방전, 방호별감 김윤후가 몽고군을 격퇴함
10 상주산성에서 몽고군 막아냄
이 해에 몽군에 포로된 자는 20여 만에 이른다 함
1256.3 장군 송군비, 입암산성(장성)에서 몽병 격파
6 온수(아산)에서 몽병 격파
1257.윤4 최항 사망, 최의 권력 계승
1258.3 류경 등이 최의를 죽이고 왕권 회복 선언
조휘 탁청의 반란으로 쌍성총관부 설치
1259.1 금강성에 침입한 몽고군을 별초군이 격파
3 몽고군, 고려에서 철수
4 태자 몽고 입조 출발
6 강도의 내, 외성을 파괴
고종의 사망
1260.3 태자 환국
4 원종 즉위
1264.8 김준을 교정별감에 임명
10 원종, 원세조 알현
1266.11 일본 초유를 위하여 송군비, 몽고 사신 黑的과 함께 보냄
12 제주 星主를 몽고에 보냄
1267.1 송군비, 일본에 가지 않고 거제도에서 돌아옴
8 潘阜를 일본에 파견
1268. 3 개경에 출배도감을 설치
6 몽고 사신, 이장용과 함께 전함의 수와 군액 등을 점검
8 몽고에 선함 건조를 보고
12 반부 등이 원의 흑적과 함께 일본에 감
무인 집정자 김준이 임연에 의해 죽임을 당함
1269. 4 세자 심, 몽고 입조
6 집정자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왕족 안경공 창을 왕으로 세움
10 최탄 등이 서경에서 반란
11, 몽고의 압력에 의하여 원종 복위, 원종 몽고에 입조함
1270. 2 몽고 서경에 동녕부 설치, 자비령 이북을 관할함
집정자 임연 사망, 아들 임유무가 권력 계승
5 임유무가 제거 당함으로써 무인정권 무너짐
원종이 세자와 함께 몽고에서 돌아와 개경에 거하고 개경환도를 선언
개경환도에 삼별초가 불응하자 원종은 삼별초를 혁파토록 함
6 장군 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봉기하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움
봉기한 삼별초군이 1천 척의 배에 분승하여 강화를 떠나 남하함
8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음
몽고, 강화성을 불태움
9 여몽연합군, 삼별초와 접전, 해남 삼견원에 교두보 확보
11 이문경의 삼별초군이 제주 명월포에 상륙, 제주 방어군을 격멸하고 지배권 확보
12 몽고(사신 杜員外), 개경정부(사신 박천주), 진도에 사신을 보내 삼별초 회유
1271. 1 몽고의 일본국신사 조양필을 강윤소와 함께 일본 파견
밀성(밀양), 개경 등지에서 삼별초에 호응하는 대규모 민란 봉기
2 몽고, 사신을 진도에 직접 파견, 삼별초 회유
3 흔도의 몽고군, 봉주에 경략사를 두고 주둔
4 삼별초, 일본에 사신 파견, 공동 대응전략 모색
5 여몽연합군, 삼별초 거점 진도 공함, 온왕 제거
잔여 삼별초군, 김통정에 의해 제주도로 이동
10 쿠빌라이, 고려 세자의 청혼건을 허용
1272. 2 전함병량도감 설치
3 삼별초군이 전라도 회령군에 침입, 조운선 4척을 붙들고, 해남 연안을 장악
개경정부가 합문부사 금훈을 제주역적초유사에 임명하여 파견
5 삼별초가 대포(목포 ?)에서 조운선 13척을 잡아감
8 전라도에서 개경으로 올라가는 貢米 8백석을 삼별초군이 탈취
개경에서 김통정과 오인절의 친족을 제주에 보내 삼별초군을 회유함
9 삼별초군이 서해 고란도 공격, 고려 전함 6척 불태우고 조선 기술자 살해, 홍주부사와 결성, 남포의 감무를 잡아감
11 삼별초군이 합포(마산)에 침입, 전함 20척을 불태움
삼별초군이 거제현을 치고 전함 3척 소각, 현령을 잡아감
원, 제주 삼별초에 대한 무력 진압 조치 확정
12 抄軍별감을 여러 도에 파견
1273. 1 경상도에서 전함을 만들게 함
삼별초군이 합포에 침입, 전함 32척을 불태우고 몽병 10여 인을 살해
4 여몽연합군, 제주 공격을 위하여 반남(나주) 출발
여몽군 제주도 공함. 제주 삼별초 붕괴.
윤6 삼별초 잔여세력 체포 처단, 김통정의 시신 확인
원, 제주에 탐라총관부 설치
1274.5 세자, 원 공주와 결혼
원의 일본 정벌군 고려 도착
6 원종 사망
8 세자가 원에서 돌아와 충렬왕 즉위
10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출정
1275. 7 군기조성도감 설치
10 관제 개정
1276.3 고려의 왕실 용어를 낮추어 개정
1279. 6 원, 일본 원정을 위한 전함 9백 척을 조성하게 함
1280. 8 충렬왕, 원에 입조, 일본정벌전에 관한 문제 협의
1281. 5 여몽연합군, 마산에서 출발, 일본 침략전 개시
8 동정군 마산으로 귀환
국외
1206 테무진, 징기스칸에 즉위
1209.5 몽고군 서하 침입, 서하의 이안전 항복
1210.12 몽고, 금의 서북변경 침입
1211. 8 몽고, 금의 서경 점령
1214. 4 금, 몽고와 강화
5 금, 변경으로 천도
1216 금의 포선만노, 요동에 동진국을 세움
1219 징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정벌전, 브하라 및 사마르칸드 점령, 호라즘 왕국 공략
1227.6 서하 멸망
10 징기스칸 사망
1229.3 몽고 태종 오고데이 즉위
1233.9 몽고, 동진을 멸함
1234.1 금, 멸망
1237 몽고의 바투, 러시아 침입, 모스크바, 키에프 점령
1241.11 몽고 태종 사망.
몽고군, 북유럽 연합군을 왈슈타트에서 격파
1246.7 몽고 정종 구육 즉위
일본, 北條時賴 집권
1248.3 몽고 정종 사망
1251.6 몽고 헌종 몽케 즉위
1252.8 쿠빌라이, 大理 침입
1253.12 대리국 멸망
1257.8 몽고 헌종, 송 정벌전 개시
1258 몽고군, 바그다드 점령
1259.7 몽고 헌종, 남송 정벌전의 과정에서 사망
1260.3 쿠빌라이, 개평에서 즉위
4 아리부카, 카라코름에서 즉위
1261.10 쿠빌라이, 아리부카를 격파
1264.8 몽고, 연경을 中都로함
1268 일본, 북조시종 집권
1271.11 몽고, 국호를 元 이라함
1273.2 남송의 양양 함락
1276.3 남송 수도 임안 함락
1279 남송 멸망
1) 『고려사절요』17, 고종 42년 3월.
2) 『고려사』24, 고종세가
3) 『고려사』24,〈고종세가〉42년 5월 갑인
4) 황령사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29, 咸昌縣에서 현의 서쪽 37리, 황령산에 소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佛宇 및 산천조) 현재 상주군 은척면 황령리의 황령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고려대의 유구는 잔존하고 있지 않다.
5) 병풍산성은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등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상주목 고적조)에서는 ‘沙代國古城’으로, 그리고 『여지도서』에서는 후삼국시대 견훤의 부 아자개의 거성이었다고 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6) 『세종실록지리지』상주목
7) 같은 내용의 기록이 『고려사』113, 金得培傳에도 실려 있다. 『고려사』에서는 몽고군을 피하여 이들이 들어간 城을 ‘日華城’이라 하였는데 이는 ‘白華城’의 착오라고 하겠다.
8) 몽고군 침입을 ‘丹兵’의 침략으로 기록한 사례는 『여지도서』 황해도 瑞興縣 城池條에서도 보인다. 여기에서는 고종 34년 몽고 아모간 침입시의 사건을 「丹兵」으로 기록하고 있다.
9) 金祚의 백화산성 입보를 고종 41년(1254) 상주산성 전투시의 경우로 간주하게 되면 김득배의 증조모 萬宮이 출가한 것은 1262년(원종 3)이 되어, 손자 得培의 출생과 50년 간격이기 때문에 적당한 터울이 된다. 金祚의 피난을 고종 20년대 몽고 唐古軍의 침략기로 설정하면 간격이 많고 차라대 침략 말년으로 잡을 경우 역시 터울이 좁은 느낌으로 적당하지 않다.
10) 한성봉은 일제 때 捕城峰으로 이름이 바뀌어 근년까지도 공식적인 지명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2008년 그 이름을 되돌려 국리지리원의 공식적 지명 개정이 이루어졌다.
11) 조희열 「성」『백화산』상주문화원, 2001 참고
12) “백화동천 제1경에 속하는 저승골은, 천혜의 요새로서 정상인 한성봉이 하늘과 맞닿은 듯한 거대한 암벽으로 된 계곡이다. 워낙 골이 험하고 암벽의 경사가 심하여 이 골에 한번 들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곳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차라대가 이끈 몽고병이 황령사 승려 홍지에게 과반이나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니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곳이다.”(곽희상 「지리」 『백화산』상주문화원, 2001, p.45) “황령사 승 홍지가 백성들을 지휘하여 이곳에서 적을 맞았고 금돌성 남쪽 石川(일명 龜水川, 中牟川) 계곡으로 밀어 넣어 싸워 이긴 것이다. 그래서 이 석천에서 북쪽의 금돌성을 향해 난 암벽 계곡을 저승골로 부른다는 것이다.”(조희열 「성」 『백화산』상주문화원, 2001, pp.476-477)
13) 조희열 「성」『백화산』상주문화원, 2001 pp.473-479
14) 조희열 「성」『백화산』상주문화원, 2001 pp.473-479
15) 한기문 「상주의 역사와 백화산」『백화산』상주문화원, 2001 pp.63-64
16) 『호산록』은 허흥식『진정국사와 호산록』민족사, 1995를 참고함.
17) 한기문 「상주의 역사와 백화산」『백화산』상주문화원, 2001 p.64
18) 서윤길 「고려의 호국법회와 道場」『불교학보』14, 1977, p.120
19) 윤용혁 『고려대뭉항쟁사연구』일지사, 1991, pp.88-95
20) 한기문 「상주의 역사와 백화산」『백화산』 2001 pp.6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