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방식과 저러한 내용을 규정하여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교육이 인간화를 지향한다고 한다면, 그 인간화의 과정과 경로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상황과 환경, 시대에 따라 인간화의 과정과 경로는 다양하게 변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육을 현상의 인간이 다양하고 다층적인 경험과 관계 맺기를 통하여 인간화되는 전체 과정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 즉 인간화의 과정과 경로는 제도학교 교육이 될 수도 있고, 자연에서 배우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익숙한 과정과 경로, 방식만이 아니라 ‘또다른 형태와 내용’이 교육일 수 있는 것이다. 책을 포함하여 자연에게 묻고, 사람에게 묻고, 현상에게 묻고, 사물에게 물어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생각하고 실천하여 익히며, 이것이 쌓여서 공부가 되고, 공부가 다양함과 축적됨, 관계 맺기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인간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간화 과정은 지속되고, 변화를 품고 있다. 이에 눈앞에 보이는 형태와 내용, 과정과 경로 뿐 아니라 또다른, 또는 새로이 만들어지는 형태와 내용, 과정과 경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교육이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다층적인 과정과 경로, 형태와 내용을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인간화의 과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학교를 포함하여 어떤 과정과 경로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화를 추구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제도학교에서 실행하는 과정과 경로가 단지 입시만을 목적으로 하거나, 평생교육이라 이름 붙은 영역에서 지식, 기술, 태도, 역량만을 강조하며, 순응하는 인력양성을 돋보이게 주장하는 것은 교육이 아닌 것이다.
최근 사교육 기업들, 특히 온라인 사교육 기업들이 활발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이는 대통령이 최근 교육 제공의 다양성을 주장한 것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이 교육 제공의 다양성은 일단 그 대상이 초중등교육 영역에 있는 학교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영역에서 초등교육인 초등학교, 그리고 중등교육에서 고등학교를 제외한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제공의 다양성, 즉 교육 제공 기관 또는 주체의 다양성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은 문제를 기지고 있다.
첫째, 교육이 인간화의 과정이라는 정언명령을 파괴한다. 칸트에 따르면 정언명령은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이다. 학교를 제외한 다른 교육 제공의 주체는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된다. 이들은 교육을 제공하는 이유가 인간화와 상관없는 수익일 따름이다.
둘째, 이들이 제공하는 내용과 과정은 교육이 아니다. 어떤 과정과 경로, 내용과 형태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화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교육일 수 있다. 그러나 수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공하는 내용과 형태라면 교육일 수가 없다.
셋째, 교육 소외계층을 만들어 낸다.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에서 만드는 내용과 방식은 일정 수준의 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이 비용을 처리하기 위해 자신들이 만든 내용과 방식의 사용료를 받게 된다. 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소외되게 된다. 특히 기업에서 보다 많은 사용료를 낼 수 있는 집단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맞춤인 고액의 내용과 과정을 만들게 되면 소외 계층은 더 넓어지고 고착화될 수 있다. 이전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EBS의 온라인 교육과 사용료를 낼 수 있는 대상을 표적으로 한 메가스터디의 온라인 교육 사례가 근거가 될 수 있다.
넷째, 제도학교의 교육 체제를 혼란스럽게 하고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지금까지 축적되고 구축된 교육 체제가 있다. 그런데 기업이 중심이 되어 교육내용과 과정을 제공하게 되면, 이것이 기존 학교교육 체제와 충돌하고, 훼손할 수 있다. 이는 자칫 제도학교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외에도 교사를 단순한 지식, 기술, 태도, 역량을 전달하는 판매상으로 전락시키고, 학생들을 철저하게 기업에게 쓸모있는 부품이 되게 만드는 재공품으로 취급하고, 사람들에게 기업의 선택을 받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기업이 추구하고 판단하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되게 만드는 등등의 문제가 너르고 깊게 퍼져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마치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으로 분칠하여 교육 제공의 다양성으로 제기하므로 도출된다.
교육이 인간화의 전체 과정이고 인간화를 이루는 길은 다양하다는, 즉 교육의 다양성은 사실 지금, 여기에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낯설고, 생소하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제도학교 과정과 내용만이 교육이라고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 다양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교육을 제대로 이루어나가는 첩경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도학교교육과 비제도학교교육이 서로 어우러지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척박하고 억압적 환경과 상황 속에서 교육의 다양성이 싹 틔우고 자라지 못한 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교육 제공의 다양화라는, 전혀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이라고 포장하여 교육 제공주체의 다양화를 교육의 다양화인 것처럼 잘못 이해하게 만들며 강제하는 것은 교육의 다양성을 해치고, 마침내 교육을 훼손시킬 수 있다. 교육의 다양성과 교육 제공의 다양성을 결코 같은 맥락이 아니다. 교육 제공의 다양성은 교육의 다양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 교육 제공의 다양성을 주장하는지, 거기서 제공되는 내용이 어떤 것이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새삼 톺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