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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카톨릭,교황 역사
카톨릭은 반유대주의적 정서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거나 학살을 방조.
•W. E. H. 레키:
역사를 바로 아는 프로테스탄트라면 로마 교회가 인류 사회에 존재했던 어떤 단체보다도 무고한 자를 많이 죽였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 교회에 의해 희생된 자의 수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존 다울링:
교황권이 존재한 기간 중에 해마다 평균 4만명의 종교적 살인이 자행된 것으로 추산된다
•J. M. 캐롤:
나는 또다시 잔악한 박해의 손길이 닥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코자 한다. 만약 암흑시대라 불리었던 1200년 동안에 5000만명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죽었다고 하면-역사는 확실히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는 100년마다 평균 400만명 이상의 비율로 죽은 셈인데, 이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데이브 헌트(Dave Hunt):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역사상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심한 핍박을 가한 당사자이며, 이방신을 섬기는 로마와 회교도들이 살해한 숫자보다 엄청나게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한 자이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와 처형에 있어서 로마교회를 능가한 자들은 모택동과 스탈린 밖에는 없다.
베드로는 비록 한 번도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었지만, 사실상 교황으로서의 직책을 맡아 사목 활동을 수행했다며 그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고 있다.
->예수 사후에 베드로의 권위화
로마에서 바울과 함께 순교 (64~68)할 때 원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렸다 함
밀라노 칙령 Edict of Milan
313년 2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던 공동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메디오라눔(지금의 Milano)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칙령
모든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 보장
(당시 로마는 다신교. 유독 기독교만 박해)
320년 리키니우스는 밀라노칙령 파기
콘스탄티누스1세와의 대립에서 패
대주교 명칭이 '교황'으로 변경
콘스탄티누스 1세 '카톨릭'을 국교로 지정
"로마신인 태양신은 죽었다"
밀라노 칙령을 계기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기반을 넓히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최대한 장려.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각종 특권을 주었고, 각지의 교회 설립을 지원.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열어 교리를 체계화
349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성베드로성당' 건설
396년 실베스트로 교황이 대성전으로 축성
세르지오3세 (904-911)
요한12세 Johannes XII (955 ~ 964)
레오 8세 Leo VIII (963-965)
베네딕토 5세 Benedictus V (964-966)
요한 13세 Joannes XIII (965-972)
베네딕토 6세 Benedictus VI (973-974)
베네딕토 7세 Benedictus VII (974-983)
요한 14세 Joannes XIV (983-984)
요한 15세 Joannes XV (985-996)
그레고리오 5세 Gregorius V (996-999)
실베스테르 2세 Sylvester II (999-1003)
요한 17세 Joannes XVII (1003-1003)
요한 18세 Joannes XVIII (1004-1009)
세르지오 4세 Sergius IV (1009-1012)
베네딕토 8세 Benedictus VIII (1012-1024)
요한 19세 Joannes XIX (1024-1032)
베네딕토 9세 Benedictus IX (1032-1044)
실베스테르 3세 Sylvester III (1045-1045)
베네딕토 9세 Benedictus IX (1045-1045)
그레고리오 6세 Gregorius VI (1045-1046)
클레멘스 2세 Clemens II (1046-1047)
베네딕토 9세 Benedictus IX (1047-1048)
다마소 2세 Damasus II (1048-1048)
성 레오 9세 St. Leo IX (1049-1054)
빅토리오 2세 Victorius II (1055-1057)
스테파노 9세(10세) Stephanus IX[X] (1057-1058)
니콜라오 2세 Nicolaus II (1059-1061)
알렉산데르 2세 Alexander II (1061-1073)
■카놋사의 굴욕 1077년
당시 국왕이 사제를 임명, 사제직이 돈으로 공공연히 매매...
이에 교회 내부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레고리우스 7세 (St. Gregorius VII 1073-1085)가 교황이 됨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한 마리의 굶주린 늑대’라고 공격하며 재선출을 주장하자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
교회와 제후들이 모두 교황 편을 들었고
자신의 폐위 움직임에 당황한 하인리히 4세는 추운 겨울 교황을 찾아 카놋사 성에서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눈 속에서 맨발로 수 시간 동안 서 있다가 겨우 사과를 받아냄
카놋사의 굴욕이후 교황권이 황제권을 압도 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중앙에 자리한 반면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그의 오른편에 서있다
1083년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에 대한 설욕에 나섰고 교황은 다시금 황제를 파문하고 폐위 선언.
황제는 독일 제후들에게 이 조치가 교황의 월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여, 교황 폐위
빅토리오 3세 B. Victorius III (1086-1087)
■십자군 전쟁
카톨릭, 이슬람교 간의 전쟁
그리스드교의 성지 탈환 명목
교황들의 본격적인 유대인 박멸운동은 1회(1096년)-8회(1272년)까지 약 200년에 걸쳐 일어난 십자군 전쟁 부터...
8회에 걸친 십자군은 거의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함
<1차 십자군원정 (1096-1099년)>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 종교회의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제창
당시 십자군 가입하라고 선동하며 당나귀를 타고 다니던 은자/피에르 Pierre L
울반/우르바노/우르바누스 2세 B. Urbanus II (1087-1099)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르퓌앙벌레이 (Le Puy-en-Velay)의 주교였던 아데마르 (Adhemar de Monteil)를 십자군의 지도자로 삼았다.
이는 십자군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자 하는 교황의 의도
예루살렘 공격 전에 유대인들을 불태움
성지(예수님이 사흘 동안 묻혔다는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 탈환을 위해 1096년 여름 5만명 규모가 출발하여 1099년 6월 예루살렘의 성벽 앞에 도착, 5주 동안의 전투 끝에 승리,
무슬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육
이유는 예수의 죽음에 유대인이 공모했다는 것.
파스칼 2세 Paschalis II (1099-1118)
대립 교황들과 황제 하인리이 5세에게 시달림
젤라시오 2세 Gelasius II (1118-1119)
황제의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남.
갈리스토 2세 Callistus II (1119-1124)
황제가 세운 대립 교황 그레고리오 8세의 도전을 물리쳤으며 황제의 서임권 주장을 이단이라고 선언.
하인리히 5세에게 파문장을 날림
호노리오 2세 Honorius II (1124-1130)
이노센트/ 인노첸시오 2세 Innocent II (1130 - 1143)
교황청 내분으로 인해 즉위한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2세(다수파)의 도전을 받아
로마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도망하여
성직자들을 설득해 재기
첼레스티노 2세 Celestinus II (1143-1144)
루치오 2세 Lucius II (1144-1145)
<2차 십자군원정 (1147-1148년)> 패
1144년에 무슬림에 의해 에데사(Edesa)가 함락되자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St Bernardus)의 설교로 촉발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 독일황제 콘라드 3세가 참전, 2만 5천의 군대는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5천 명으로 줄어있었다
에우제니오 3세 B. Eugenius III (1145-1153)
어려운 상황에서 십자군 원정 요청 받음
대부분 망명지에서 생활
아나스타시오 4세 Anastasius IV (1153-1154)
하드리아노 4세 Hadrianus IV (1154-1159)
알렉산데르 3세 Alexander III (1159-1181)
루치오 3세 (Lucius III 1181-1185)
원인모를 이유로 급사
■종교재판 The Inquisition
12-16세기경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종교상의 재판.
중세시대에 카톨릭의 타락과 모순에 대항하여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단자, 마녀로 몰려 그들의 교리와 권위에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당함
1200년까지 5000만여명 살해
■ 종교재판소(the Inquisition Tribunal)
-1184년 베로나(Verona) 회의는 ‘종교재판소’ 설립
-‘성직회’(the Con- gregation of the Holy Office)
-1966년 교황 바울 6세는 ‘신앙교리회’(the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라고 개명
-‘교리회’(the Doctrinal Congregation)
오랫동안 그 회의 중심인물은
베네딕토 16세 /요셉 라칭거 (Benedictus XVI, Joseph Aloisius Ratzinger) (2005-2013)
(좌)네덜란드 종교재판소에서 고문 받는 프로테스탄트
(우)버나드 피카르트의 '종교재판 고문실'
토마스 아퀴나스:
교회가 이단자들을 죽이고 제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
드 로사:
“13세기 이래 80명의 교황 전부가 예외없이 종교재판소의 신학적 타당성이나 기구 자체를 거부한 자는 없었다”
우르바노 3세 (Urbanus III 1185-1187)
그레고리오 8세 (Gregorius VIII 1187-1187)
1187년 하틴전투
기드루지앵이 이슬람 단순 상인들을 학살
살라딘은 이에 분노,
템플기사단 300명, 보병 15,000명과 싸워 승
예루살렘을 정복 -> 3차 십자군 원정단 계기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1192> 패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립 2세가 참전. 해안선을 따라 많은 토지를 회복하였으나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
클레멘스 3세 (Clemens III 1187-1191)
살라딘/사라센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3차 십자군 원정을 계획, 실무 담당
원인모를 이유로 급사
첼레스티노 3세 Celestinus III (1191-1198)
1192년 살라딘은 리처드1세와 격돌하다 휴전 요청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1204> 패
비잔틴 습격
베네치아 상인들이 제공하는 배를 이용하면서 그 대가로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이탈리아 상인들의 복수를 해주고 경제적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약속
이노센트/인노첸시오 3세 (Innocent/ Innocentius Ⅲ. 1198-1216)
교황권 절정기, 고해성사 선정
종교재판소(the Inquisition)를 통해 100만명 이상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살해
“나는 그리스도보다 더욱 자비롭다. 왜냐하면 내가 영혼들을 연옥에서 건져내는데 견주어, 그리스도는 영혼들을 연옥에다 버려둔 채 가버렸기 때문이다.”
알비파 십자군운동 (Albigensian Crusade, 1209~1229)
중세시대에 이단 카타르(Cathar heresy)를 전멸시키려고 동원된 무장한 십자군
1209년 프랑스 베지에르(Beziers)
6,000명이 칼로 살육되어 거리에 피가 강같이 흘렀다...
"여기에 동원된 살인 군대들은 훗날 죽어서 연옥을 거쳐 곧바로 천국에 간다"고 교황이 선포
베지에르는 로마 카톨릭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알비파(Albigensians)/카타르(Cathars)가 살던 지역
1211년 라바우어에서 총독 교수형,
그의 아내는 우물에 넣어 돌무더기로 죽이고
약 400명은 산 채로 화형
그날 카톨릭 사제들은 아침에 대미사에 참석하고 오후에 다른 살인을 하러갔다...
메린돌 (Merindol) 대학살
- 500명의 여인들이 창고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음
1212년 소년 십자군 전쟁
프랑스와 독일에서 2만명의 어린이들이 십자군으로 참전. 죽거나 잡혀 노예가 됨
-> 성전에 대한 열정으로 5차 원정 준비 계기
<5차 십자군원정 (1218-1221년)> 패
오스트리아, 헝가리, 예루살렘의 왕, 안디옥 왕자의 군대와 결합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싸움.
1219년 이집트의 다미에타에서 크게 패
1221년 카이로를 공격
이집트 군대와 술탄의 군대에 대패하여 항복
- 8년의 평화조약을 맺음
호노리오 3세 Honorius III (1216-1227)
<6차 십자군원정 (1228-1229년)> 패
1228년 황제 프레드리히 2세가 십자군에 참전하겠다고 했으나 교황 그레고리 9세와 경쟁을 하다가 파문을 당함.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술탄과 외교를 통해 회교의 모스크가 있는 지역을 양도하는 대신,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10년 동안 양도 받기로 협의.
- >1244년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
그레고리/그레고리오 9세 Gregorius IX (1227-1241)
이단자, 변절자, 유대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교황청 안에 특별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임
첼레스티노 4세 Celestinus IV (1241-1241)
<7차 십자군원정 (1248-1249년)> 패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주도
이집트 정벌 십자군을 지휘했으나 전군이 포로가 됨
이노센트/인노첸시오 4세 Innocentius IV (1241-1254)
1252년 교서 '박멸에 관하여 Ad Extirpanda'
- 이단자들을 뱀처럼 박살내 버려라
- 고문 사용 정식 인정
카톨릭과 카톨릭 영향권내 권력자들이 함께 이단자를 고문하고 화형할 것을 지시
알렉산더/ 알렉산데르 4세 Alexander IV (1254-1261)
박멸칙령
우르바노 4세 Urbanus IV (1261-1264)
클레멘스 4세 Clemens IV (1265-1268년)
박멸칙령
<8차 십자군원정 (1270년)> 패
루이 9세는 튀니지에서 두 달을 보내고 사망
십자군 실패 원인:
교황에게는 군사력이 없어서 군사력 통일 불가
왕들이나 기사들은 종교적 열정 보다 탐욕과 이권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해서 단결 불가
지리적으로 미숙
약탈, 살인, 무질서, 잔인성은 원주민들의 반감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
이교도들을 생존권 없는 도살 존재로 생각
무슬림들도 기회가 왔을 때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
그레고리오 10세 B. Gregorius X (1271-1276)
이노센트/인노첸시오 5세 B. Innocentius V (1276-1276)
하드리아노 5세 Hadrianus V (1276-1276)
요한 21세 Joannes XXI (1276-1277)
니콜라오 3세 Nicolaus III (1277-1280)
마르티노 4세 Martinus IV (1281-1285)
호노리오 4세 Honorius IV (1285-1287)
니콜라오4세 Nicolaus IV (1288-1292)
성 첼레스티노 5세 St. Celestinus V (1294-1294)
■면죄부 판매
보니파스8세 Bonifatius VIII (1294-1303년)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 성 베드로 성당까지 순례를 하는 사람에게 면죄를 허가
그 해에 200만명이 로마로 몰려 들었고, 성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두 사제는 돈을 갈퀴로 긁어 모았다.
교황은 이렇게 모은 돈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많은 성과 저택을 구입
이단교 신자들 박명 칙령
베네딕토 11세 B. Benedictus XI (1303-1304)
클레멘스 5세 Clemens V (1305-1314)
요한 22세 Joannes XXII (1316-1334)
1321년 단테의 '신곡'
지옥,연옥,천국으로 가는길
- 연옥:지옥과 천국의 심판 단계
- 카톨릭을 믿어야 천국 간다
베네딕토 12세 Benedictus XII (1334-1342)
클레멘스 6세 Clemens VI (1342-1352)
이노센트/인노첸시오 6세 Innocentius VI (1352-1362)
우르바노 5세 B. Urbanus V (1362-1370)
그레고리/그레고리오 11세 Gregorius XI (1370-1378)
"교황은 하늘의 힘을 가졌으며, 자연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수 있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수 있으며, 불의를 정의로 바꿀수 있고, 그는 모든힘에 가득차 있다."
우르바노 6세 Urbanus VI (1378-1389)
보니파시오 9세 Bonifatius IX (1389-1404)
1400년 알프스 프라겔라(Pragela) 골짜기에 은신했던 왈덴스 교도들이 로마교회가 보낸 토벌군 기습에 살해, 도망친 사람들은 깊은 산 속에서 얼어 죽음
이노센트/인노첸시오 7세 Innocentius VII (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 Gregorius XII (1406-1415)
마틴/마르티노 5세 Martinus V (1417-1431)
폴란드 왕에게 후스파를 절멸할 것을 명령
“그러므로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귀하의 군대를 보헤미아로 진격하시오. 전역을 불사르고 살육하고 초토로 만드시오. 왜냐하면 이보다 더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은 없기 때문이오.”
이단의 소멸과 그리스교회와의 합일에 노력했으나 실패
■ 마녀사냥 _ 잔다르크
1429년 잔 다르크와 왕실 군대는 영국군이 포위한 오를레앙을 해방
1430년 파리를 해방시키려던 그녀의 기도는 실패, 부르고뉴인들은 콩피에뉴에서 그녀를 체포해 영국군에게 팔아 넘김.
1431년 루앙에서 산 채로 화형 당함
에우제니오 4세 Eugenius IV (1431-1447)
니콜라오 5세 Nicolaus V (1447-1455)
갈리스토 3세 Callistus III (1455-1458)
비오/피우스 2세 Pius II (1458-1464)
바오로 2세 Paulus II (1464-1471)
식스토/식스투스 4세 Sixtus IV (1471-1484)
1478년 스페인 종교재판소 승인
이단이라는 자백을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고문
이단자뿐만 아니라 개종자까지도 잔혹하게 처단, 탄압
이노센트/인노첸시오 8세 Innocentius VIII (1484-1492)
1488년 왈덴스 교도 박멸령
- 프랑스군대가 알프스 로이스 골짜기에 기습하여 왈덴스 교도들이 동굴로 피신하자 입구에 불을 놓아 3천여명 질식사
알렉산더/알렉산데르 6세 Alexander VI (1492-1503년)
사상 최악의 교황
성질이 교활하고 잔인
신대륙 발견을 둘러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분쟁을 조정
자신의 사생아가 여럿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후원
교황이 되려고 쓴 거액의 돈과 재산을 회수하기 위하여 온갖 사악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이단 박멸
비오/피우스 3세 Pius III (1503-1503)
알렉산데르 6세의 족벌주의를 비판
추기경들의 교황 선거를 장악
15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즉위한 26일 만에 다리 궤양으로 사망
일각에서는 교황이 판돌포 페트루치의 꾀임에 넘어가 독약을 마시고 사망했다는 설
율리우스/율리오 2세 Julius II (1503-1513년)
전쟁, 정치, 예술에 더 몰두
성베드로대성당 재건
레오10세 Leo X (1513∼1521)
성 베드로 성당의 수리와 개축을 위한 비용을 대량의 면죄부 판매로 충당
그러나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였고, 실제로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교황청의 재정이 바닥,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에 진 빚을 갚기 위함
면죄부 판매 ->종교개혁의 발단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도시를 방문해 교황의 공식 인가서와 교황의 깃발을 내걸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긁어 모은 돈은 큰 쇠금고에 넣었다.
신부 테첼은 "헌금이 상자 속에서 찰랑 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은 지옥불 속에서 뛰어나온다"는 설교 (돈궤에도 쓰인 글귀)로 면죄부 판촉 활동
1518년 네덜란드의 가톨릭 학자 에라스무스는 “로마 교황청의 뻔뻔스러움이 그 절정에 달하였다”고 썼다
■ 종교개혁 (Reformation)
1513년 마틴 루터(1483-1546)
카톨릭 신학 박사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면제부를 파는 행위를 강력히 비판
"면죄부는 경건한 사기다. 면죄부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아무 효력을 주지 못한다."
1517년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 교회의 부패 방지
-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얻게 된다'
루터파 개신교 창시
하드리아노 6세 Hadrianus VI (1522-1523)
클레멘스 7세 Clemens VII (1523-1534)
1534년 헨리 8세
'성직자 임명법' 및 '수장령' 공포
영국 교회를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
예수회 Society of Jesus, Jesuits
1534년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 (Ignatius de Loyola), 프란시스코(Francisco Xavier)가 파리에서 창설
1540년 수도회로 공식 인정받아 로마 가톨릭교에 정식으로 편입
가톨릭 세력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
바울/파울/바오로 3세 Paulus III (1534-1549년)
교황권 강화와 카톨릭 배신자들을 죽이기 위해 예수회를 창설하도록 허락
1544년 롬바드 사람 개신교도 '프란시스 감바'가 밀라노에서 사형 선고
처형 장소에서 한 수도승이 그에게 십자가를 제시했는데 감바는 “나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참 공로와 선하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 분을 내 마음속에 모시기 위해 무의미한 나무 조각이 필요치 않다” 라고 말하여 그의 혓바닥을 도려냈으며 그 후 화형
1545년 프랑스, 왈도파(Waldensians) 대학살
21개 마을이 불에 탔고 거주민들은 약탈되고 살해당함
율리오 3세 Julius III (1550-1555)
마르첼로 2세 Marcellus II (1555-1555)
바울/파울/바오로 4세 Paulus IV (1555-1559년)
유대인 강제 격리지구인 게토(폐쇄사회)를 창설하여 유대인들을 사회로부터 강제 격리
루터파 개혁 반대
교황권에 집착한 정책은 편협, 독재적이어서 사람들에게 공포감 조성
비오/피우스 4세 Pius IV (1559-1565년)
"이단자(종교개혁을 따른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 는 박멸운동
신경 제14항: “이단들은 파문될 뿐 아니라 정당하게 사형되어야 할 것이다”
1562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가톨릭 교회 개혁과 실추되었던 권위 회복의 계기 마련
1562년 오렌지(Orange) 대학살
교황 비오 4세가 이탈리아 군대를 보내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이 도살하라고 명
성 비오 5세 St. Pius V (1566-1572)
그레고리/그레고리오13세 Gregorius XIII (1572-1585년)
이단 박멸운동을 명함
1572년 위그노 대학살
'성 바돌로매 날' 프랑스 파리에서 10,000명의 위그노 교도들(Huguenots) 대학살
프랑스 전역에서는 4-6만명에 이르렀다.
프랑스 왕은 많은 이단자를 살육한 것을 감사하는 미사를 들였고,
이 소식에 크게 기뻐한 교황 그레고리13세는 장렬한 행렬로 성 루이스 교회에 감사 드리러 갔으며, 교화 조폐국에 이 사건을 기념하는 동전을 만들라 함
동전에는 칼과 십자가를 든 천사와 그 앞에서 겁에 질려 있는 위그노 교도의 모습, "1572년 유그노들 살육 Ugnottorum Stranes 1572 "라는 글이 새겨 있다
식스토 5세 Sixtus V (1585-1590)
우르바노 7세 Urbanus VII (1590-1590)
그레고리오 14세 Gregorius XIV (1590-1591) 인노첸시오 9세 Innocentius IX (1591-1591)
클레멘스 8세 Clemens VIII (1592-1605)
레오 11세 Leo XI (1605-1605)
바울/파울/바오로 5세 Paulus V (1605-1621)
오스만투르크 원정을 위한 십자군 조직을 계획
족벌주의, 개인 재산 축적으로 비난 받음
그레고리오 15세 Gregorius XV (1621-1623)
우르바노 8세 Urbanus VIII (1623-1644)
이노센트/이노첸시오 10세 Innocentius X (1644-1655)
알렉산데르 7세 Alexander VII (1655-1667)
클레멘스 9세 Clemens IX (1667-1669)
클레멘스 10세 Clemens X (1670-1676)
인노첸시오 11세 Innocentius XI (1676-1689) 알렉산데르 8세 Alexander VIII (1689-1691)
인노첸시오 12세 Innocentius XII (1691-1700)
클레멘스 11세 Clemens XI (1700-1721)
인노첸시오 13세 Innocentius XIII (1721-1724)
베네딕토 13세 Benedictus XIII (1724-1730)
클레멘스 12세 Clemens XII (1730-1740)
베네딕토 14세 Benedictus XIV (1740-1758)
클레멘스 13세 Clemens XIII (1758-1769)
클레멘스 14세 Clemens XIV (1769-1774)
비오 6세 Pius VI (1775-1799)
비오/피우스 7세 Pius VII (1800-1823)
18세기 말, 마드리드 종교재판소 서기로 일했던 케논 로렌테는 그의 책 '종교재판소의 역사(History of Inquisition)'에서 스페인에서만 300만명 이상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약 30만명이 화형당하였다고 기록
비오11세 (1922-1939년)
히틀러와 ‘독일 내의 카톨릭 정당 해산’에 대한 은밀한 거래
비오12세 (1939-1958년)
히틀러에게 “ 예수님의 원수인 유대인들을 가차 없이 잡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며 유대인 말살 정책을 격려
프란치스코 (2013~)
266대, 최초 예수교 출신 교황
“교황 클레멘트 14세에 의해 예수회가 1773년부터 1814년까지 해산된 동안, (예수회) 리키 장군은 그의 병사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와 함께 일루미나티를 만들었다. 바이스하우프트는 현대 공산주의의 아버지이며 그는 그의 자코뱅당과 함께 프랑스 혁명을 지휘하였다. 수년 후에 예수회 장군 레도차우스키는 그의 볼셰비키와 함께 1789년의 대격변(프랑스 혁명)과 똑같은 러시아 혁명을 1917년에 지휘하였다.” 예수회의 역사 p. 356, 357
1211년 라바우어에서 총독 교수형,
그의 아내는 우물에 넣어 돌무더기로 죽